달콤한 나의 도시

관계의 종말이 닥쳤음을 확인하고 확인받는 순간 이별은 온전히 내몫의 책임으로 남게 된다. 한 줌의 희망도 없이 이별의 고통 속에서 허우적대야 한다. 이별인지 아닌지 모르도록, 결정적 순간을 조금만 더 유예하고 싶었다.

 

각자의 등에 저마다 무거운 소금 가마니 하나씩을 낑낑거리며 짊어지고 걸어가는 주제에 말이다. 우리는 왜 타인의 문제에 대해서는 날카롭게 판단하고 냉정하게 충고하면서, 자기 인생의 문제 앞에서는 갈피를 못잡고 헤매기만 하는 걸까. 객관적 거리 조정이 불가능한 건 스스로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인가, 아니면 차마 두렵기 때문인가.

 

어쩌면 우리들은 사랑에 대해 저마다 한가지씩의 개인적 불문율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닐까 싶다.

문제는, 자신의 규칙을 타인에게 적용하려들 때 발생한다.

자신의 편협한 경험을 토대로 만들어진 기준을, 타인에게 들이대고 단죄하는 일이 가능할까.

사랑에 대한 나의 은밀한 윤리감각이 타인의 윤리감각과 충돌할 때, 그것을 굳이 이해시키고 이해받을 필요가 있을까.

 

나라는 개인은 제도 안에서 비껴나 홀가분하고 자유로워지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노력해왔다.

하지만 한편으론 고독이라는 허기를 참지 못하고 체온을 나눌 누군가를 찾아 주파수를 곤두세운다.

개인과 개인이 영원을 약속하는 순간, 제도가 탄생하는 그 모순을 뼛속 깊이 겁내면서도.

 

서른 두살. 가진 것도 없고, 이룬 것도 없다. 나를 죽도록 사랑하는 사람도 없고, 내가 죽도록 사랑하는 사람도 없다. 우울한 자유일까, 자유로운 우울일까. 나,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무엇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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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10 14:38 2009/04/10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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