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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도두리의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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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택 팽성읍 도두리에서, 2006년 가을

 

                                                              작성자: 마리아

 

 

 

*2006. 8. 21.

 

H 아저씨가 온양에서 병아리 스물한 마리를 대추리에 데려오셨다. 양계장을 하는 친구 분이 거저 주셨다고 한다. 

 

 

 

*2006. 8. 22.

 

 마당에 닭장을 짓는 날이다.

 

 박언년 할머니는 땡볕에 닭장을 만드는 고생을 하지 말라고, 언젠가 빈집에서 주워둔 분홍색 새장 두 개를 친히 갖다 주셨지만, 닭들의 체형과 체면을 고려해 닭장을 신축하기로. 집근처에 널린 나무 팔레트와 철망, 나무판자, 함석판 등을 지킴이네 마당으로 주워 날랐다. 대추리, 도두리의 닭장들을 둘러보고, 주워 나른 재료들의 특징들을 감안하여 아담하고 튼튼한 닭장을 미리 구상해 두었다. 신흥 이장님 댁에서 망치와 톱을, 만진 아저씨 네 집에서 못을 조달했다.

 철망의 양쪽 가장자리에 나무 깔판을 직각으로 대어 고정을 한다. 바닥에 나무 깔판 한 개를 놓고, 그 위에 디귿자 모양 구조물의 트인 면이 벽으로 가도록 배치한다. 비료포대를 잘라 넓게 펼쳐서 바닥에 깔아주고, 그 위에는 등겨를 뿌리고 볏짚을 넣어준다. 이렇게 하면 보온 효과도 있을뿐더러 바닥에 쌓이는 닭똥을 간편하게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철망에는 주먹 하나가 드나들 정도의 정사각형 구멍이 나 있어 펜치로 잘라낸 네모난 철망을 철사로 고정을 하여 들창을 달았다. 빈집에서 가져온 슬레이트를 지붕으로 얹었더니 여닫기에는 너무 무거워서 치워버리고 대신에 함석판을 덮었다. 여름 땡볕아래 땀을 뻘뻘 흘린 끝에, 가로 1미터에 세로 0.7미터, 높이 0.8 미터 크기의 닭장이 완성되었다. 물그릇과 모이통을 넣어 주고, 갇혀 사는 설움을 조금이나마 덜어 주고자 닭장 철망에 분홍 장미 한 송이도 꽂아 주고, 닭장 관람용 의자를 닭장이 마주보이는 자리에 놓아두었다.

 

 721일 째 촛불 행사가 평화공원에서 열렸다. 닭장 신축 소식이 대추리에까지 알려져 사회자의 부름을 받아 마이크를 잡게 되었다. 닭장 만든 이야기며 닭을 키워서 잡아먹을 거라는 이야기를 했더니, 어느 할머니께서 “닭 듣는데서 잡아먹는단 말 하면 닭이 안 커” 하신다. “미군기지 안에도 건축 붐, 대추리와 도두리에서도 건축 붐이다”고 김택균 아저씨가 말했다. 대추리에서는 원두막과 식당, 박물관이 만들어지고 있다.

 

 촛불 행사 다녀오는 길에 도서관에 들러서 미리 준비해 둔 종이 박스에 공기구멍을 뚫은 후, 닭 네 마리를 담았다. 닭과 함께 도두리로 가는 미니버스를 타고 집으로 와서 닭장에 한 마리씩 입주시켰다.  

 

 

 

*2006. 8. 23.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닭장으로 달려가 우리 닭들과 눈을 맞춘다. 어둑한 무렵에 데려와서 입주를 시킨 탓에 닭들의 면면을 자세히 못 본 데다, 혹여 고양이나 족제비의 해를 입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다행히 닭들은 모두 무사했다. 한 마리는 깃이 누른빛이고 나머지는 모두 희다. 유독 한 녀석은 포악스럽게 다른 닭들의 꽁무니를 노린다. 병아리라 부르기에는 귀염성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닭이라 부르기에는 암수의 구별이 가지 않을 정도로 미성숙한 생김들이다.

 

 오늘 J는 미카엘과 K의 머리를 깎아 주었다. J는 미용 기술을 익혀 도두리에 미장원을 열고 싶다던데, 어찌 되었건 나는 J의 손길이 완성한 두 남자의 머리 모양을 보고 컷트를 단념했다. 지난 오월에 삭발을 한 후로 제법 많이 길었지만 내려둬도 아직은 괜찮으니까.

 

 우리는 비를 기다리고 있다. 단비가 내리면 배추와 무를 심어야겠다.

 

 

 

*2006. 8. 27. 일요일

 

 새벽에 단비가 좀 쏟아지다가 곧 그친다.

 

 배추 모종 심는 간격이 얼마나 되나 살피려고 자전거를 타고 동네 한 바퀴를 돌았다. 남언년 할머니가 마당 텃밭에서 망치질을 하고 계신다. 두 개의 두둑에 두꺼운 비닐이 씌워져 있는데, 할머니는 둥근 나무 작대기를 두둑에 수직으로 대고서 망치질을 해 홈을 파신다. 좁고 우묵한 홈에 물을 부어 주고 나서, 내일 아침 식전에 배추 모종을 심을 거라고 하신다. 배추 심을 때 보러 가기로 약속을 하고, 마당 울타리에 만발한 붉은 봉선화 몇 송이를 따서 손에 움켜쥐었다. 꽃송이를 움켜 쥔 채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동네 곳곳의 텃밭을 둘러보니 무가 자랄 곳에서는 어김없이 푸른 무 싹이 돋아 떡잎을 벌린다. 우리 밭으로 가서 무씨 뿌린 두둑에 덮었던 포대기를 걷으니, 실 뭉치 같은 연둣빛 무 싹이 드문드문 돋아 있었다.

 

 ‘돈 통’을 들고 노인정으로 간다. 할머니들과 민화투를 쳤다. 점심때는 노인정에서 호박볶음, 무생채, 된장찌개로 밥을 비벼서 먹고 화투를 또 쳤다. 화투를 치면 M이 할멈들 돈을 다 걷어 간다고 원성들이 자자하다. 집으로 와서 포도나무에 달린 청포도 몇 알을 따먹었다. 李가 P편으로 보내준 닭 모이- 옥수수, 가지, 복숭아, 호박을 적당히 썰어서 모이통에 넣어 주었다. 상현 아저씨가 페트병 두 개를 잘라서 모이통과 물통을 새로 만들어 주었다. 

 

 낮에 J가 통복 시장에서 늦배추 모종 한 판을 사왔다. 120포기 한 판에 6000원.

 저녁에는 다 같이 배추모종을 심었다. 100포기 정도를 심고, 남은 것은 이웃에 나눠드렸다. 소주병으로 두둑에 홈을 파면 그 자리에 물을 붓고, 포트에서 뽑아 올린 배추모를 하나씩 심는다. 다른 집들과 달리, 두둑에 검정 비닐을 씌우지 않았다. 김을 어떻게 다 맬 작정이냐, 비닐을 씌워줘야 가뭄에 잘 견딘다, 이런 저런 말씀을 많이 들었지만 비닐 멀칭은 작물의 성장에는 도움이 될지언정 철 지나면 한 무더기의 쓰레기 더미가 될 게 뻔하다. 환경에 폐를 덜 끼치면서, 보다 적은 돈을 들이고도 배추 농사 정도는 거뜬히 지을 수 있다는 베짱이 있었으니까. 그것이 농사엔 초짜라서 가능한 만용일지 모르지만.

 배추를 한창 심고 있는데 H 아저씨가 차를 세우더니, 최양례 할머니 댁의 새끼 강아지 한 마리를 내려주고 가셨다. 李도 와서 닭장을 둘러보고 배추를 같이 심었다.

 

 일요일이라 촛불 행사는 도두리에서 열렸다. 밤에는 내일 마을을 떠나는 윤정이를 위해 환송회를 열었다. 

 오늘 도두리에 온 강아지에게 이름을 “별”이라 지어주었다.

 

 

 

*2006. 8. 28.

 

 아침 여섯 시가 조금 넘은 시각에 일어나 가장 먼저 닭들에게 가서 인사를 건네고 텃밭의 무와 배추를 살펴보았다. 두둑 위로 덮었던 포대기를 막 걷을 때는 무 싹이 노란 색이었는데, 하루 사이에 쪼글쪼글했던 떡잎은 활짝 펼쳐지고 연둣빛을 띤다.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알을 낳으러 오는 배추흰나비 떼는 보이지 않았다.

 

 이슬이 먼저 올라앉은 자전거 안장을 목장갑으로 쓱쓱 문질러 닦았다. 자전거 페달을 밟는다. 도두리 3반뜸에 못 미쳐 자전거 머리를 돌렸다. 아침 안개를 두른 대추리는 신비스럽고 어두운 꿈속의 마을처럼 논 끄트머리에서 부양한다. 논두렁을 진한 녹색으로 뒤덮은 콩 포기들, 나비의 날개보다 얇은 연노랑 꽃잎이 은은한 향을 뿌리는 달맞이꽃, 풀 속에서 튀어 오르는 풀벌레 소리, 농기계 창고의 함석판이 드러내는 시간의 흔적들…. 연보라와 연청, 자줏빛 나팔꽃 무리를 보았고 안개 속에 늘어뜨려진 능수버들의 가지를 보았다. 밝아 오는 하늘에서는 여덟 마리의 물오리가 해를 보며 날아갔다. 어린 닭들이 횃대에 앉아 깃을 다듬는 아침이다.

 

 J가 모로 누워 책을 읽으면, 별이는 그 옆에 가만히 엎드려 눕는다. 식전에 J는 텃밭2에 가서 상추씨를 뿌렸다. 나는 J가 상추씨를 뿌린 자리 옆에 쑥갓 씨를 뿌렸다. 쑥갓의 종자는 빈집에서 채집한 것으로, 입봉일 2002년에 유효 기간이 2년인 덴마크 산 씨앗이었다. 혹시나 하면서 씨를 넉넉히 뿌리고 흙을 덮었다. 텃밭에는 오늘 씨앗을 뿌린 상추와 쑥갓 외에 당근과 열무, 알타리 무, 김장파, 시금치를 심을 계획이다. 

 

 8월 28일 오늘은 빈집 철거 예정일이었으나 마을은 그저 조용했다. 엷은 구름이 흩어지면서 파란 하늘이, 하늘이라는 거대한 물고기의 푸른 등이 솟아났다. 저녁에는 잠시 초승달이 보였다. 길도, 들도, 먼 불빛도 모두 희미할 뿐인 시야. 전경들을 위한 간이 화장실은 세워둔 푸른 관(棺) 같았다.

 

 오른손 엄지손가락 위에, 으깬 봉숭아 꽃잎을 얹어 비닐로 동여 묶고 잠자리에 든다.

 

 

 

*2006. 8. 31.

 

 낮에 텃밭2에 가서 ‘골파’를 심었다.

 아주 얕은 두둑을 호미자루 하나 간격으로 쌓고, 고랑에 반 뼘 간격으로 파 종자를 꼭꼭 눌러 심은 후, 흙을 살짝 덮는다. 겸이네 할머니가 주신 것은 J가 모두 심었고, 나는 김월주 아주머니께서 주신 종자를 심었다. 저녁에는 무 싹이 자라는 밭에 왕겨를 뿌렸다. 물 조리개에 물을 떠서 왕겨 뿌린 자리에 물을 준다. 무순은 납작납작한 잎으로 햇살을 모으며 잘 자라고 있지만, 가는 줄기며 연한 잎 색깔이 어딘가 영양이 부족한 모양을 하고 있다. 비가 오지 않아서 배추도 많이 시들었다. 고등어찌개로 저녁밥을 먹고 나서 P가 텃밭1에 물을 마저 주었다.

 

 일을 하지 않는 동안 방 안에서 뒹굴며 '솔부엉이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읽었다. 저녁에는 비대칭이 보내온 구호 물품-연필 깎는 칼, 귀이개, 연필, 후추, 생강차, 커피-을 전달 받았다.

 

 촛불 문화제가 국방부 앞에서 열려 도두리 주민들은 오후 세시 50분에 마을회관 마당에서 관광버스를 타고 출발하였다. 관광버스 아저씨는 출발 전 노인정에서 라면으로 늦은 점심을 먹었다. 마을에 단골로 들어온다고 하셨다. 매번 검문소를 통과할 때마다 칠순 회갑연, 팔순 잔치, 누구 결혼식 때문에 가는 거라 둘러댔는데, 오늘은 누구네 돌잔치가 있어서 사람들을 태우러 가는 거라고 말했다한다. 겸희 할머니, 조정숙 할머니, 재석이 네 아주머니, 선화 네 아주머니, 이장님 댁 아주머니, 만진 아저씨, J가 촛불행사에 참석했다. 전입신고를 하지 않은 나는 마을에 남았다.

 

 오늘, 지킴이 일기장에 담희 어머니가 쓴 글을 옮긴다.

 

"선선해진 바람이 마음까지 상쾌하게 한다. 철조망 안쪽의 벼들은 벌써 이삭이 굽어 가을을 알리는데 바깥쪽의 논들은 숲을 연상케 한다. 저 넓은 농로길, 강가 이젠 가보고 싶어도 가보질 못한다. 어느 나라 국법이 자기 사는 곳도 못 다니게 하는가? 어언 3년, 외부 사람들에겐 짧은 시간이라 생각될지 모르는 기간이 우리에겐 얼마나 고통스럽고 긴 세월인가. 마음속엔 멍이 들고 타들어가 시커먼 재만 남았다. 그래도 우리의 소망-부모님껜 한이 서린 곳 이곳에 있는 그날이 빨리 오길 기다리며 고대한다. 팔월의 마지막을 보내며 구월을 기대한다.
 - 담희 겸희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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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비가 내리는 황새울에서_2006

   
 
"내일이면 다시 군용 헬리콥터가 떠오르겠지요"
[황새울 편지31] 단비가 내리는 황새울에서 
 
 
마리아 , 2006-05-23 오후 2:5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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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가물었는데, 어젯밤부터 단비가 내립니다.
매일같이 들려오던 굴착기 소리가 멎었습니다. 논 위를 달리면서 외치던 군인들의 구보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검은 흙덩이를 비집고 바늘처럼 가는 벼이삭이 돋아 자라는 황새울 들판이 오늘은 잠잠합니다. 비는 종일 조금씩 내리며 고요함을 선물로 주었지만, 그 고요함은 가슴속에서 들려오는 불안과 고통의 숨소리를 더욱 부풀립니다.
 
우산을 펼쳐들고 집을 나서서 할머니들이 계시는 노인 회관으로 갔습니다.
할머니들은 둥글게 모여 앉아서 화투를 치고, 몇 분은 스티로폼 조각을 베고 누우셨습니다. 십 원짜리 동전들이 짤랑거리더니, 곧 화투장이 담요 위에 깔렸습니다. 화투에 열중한 할머니들의 손놀림이 잽쌉니다. 손에 들어온 패가 불만스러운 한 분이 뭐라 군소리를 하십니다. 눈을 감고 누웠던 할머니는 뜬금없이 ‘아이구…. 나가라고 하는데 워디로 나가여’하고 혼잣말을 하고는 입을 닫으셨습니다. 행정대집행을 겪은 후 모든 것들이 바뀐 줄만 알았는데, 지난 가을에 처음 노인 회관에 들렀을 때와 같은 광경을 마주하니 기분이 묘합니다. 가방을 들고 조용히 방문을 열고 나왔습니다. 부엌에서는 촛불 행사 때 나눠줄 달걀을 삶는 솥이 가스 불 위에서 하얀 김을 내뿜고 있었습니다.
 
비가 내려 마을길은 한산합니다. 솔부엉이가 사는 숲 앞에 멈춰 서서 혹시나 하고 솔부엉이가 있나 두리번거렸지만 오늘도 보이지 않습니다. 숲 맞은 편 점방 안에 낯익은 얼굴들이 보입니다. 가게 쪽으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아, 그전에 잠시 우리 텃밭이야기를 할까요.
 
이른 봄 까지 만해도 이곳은 마른 고춧대와 쓰레기뿐인 버려진 땅이었습니다.
지킴이들이 고춧대를 뽑아서 태우고, 두둑을 다시 쌓고, 거름더미를 만들었습니다. 저녁에 직파작업을 하고 돌아와 텃밭에서 일을 하고 있으면, 노인 회관에서 ‘퇴근’하시던 할머니들이 우리 밭 앞을 지나다 멈춰 섭니다. 너 댓 분이 처마 아래에 앉아서 우리가 일하는 쪽을 바라보면서 영농지침을 한마디씩 일러주십니다. 상추씨 뿌린 자리에는 짚을 덮는 게 아니라는 둥, 들깨를 심으려면 아직 멀었다는 둥, 마른 콩대 같은 건 둬 봤자 썩지도 않으니 불태우라는 둥…. 난 아직 시집을 안 갔는데도, 그럴 땐 정말 할머니들이 전부 시어머니처럼 느껴집니다. 한번은 목화를 재배하려고 씨를 뿌렸더니, 아까운 땅에 먹지도 못하는 걸 심는다고 다들 한 말씀씩 하셨습니다. 뭐라고 둘러댈 거리를 찾고 있는데 할머니 한 분이 ‘구원 투수’가 되어 주셨습니다.
 
“내비 둬, 심심해서 저러는 겨. 지들 맘대루 하게 놔둬….”
 
어쨌거나 심심풀이로 텃밭농사를 지으면서 채소 모종도 구해서 심고, 이런저런 씨앗들도 많이 뿌려 두었습니다. 지킴이들이 여름에 농활을 오면 쪄먹으려고 옥수수도 많이 심었습니다. 좀 전에 밭엘 나가보니, 비를 맞고 떨어진 아카시아 꽃들이 땅위에 눈처럼 덮여 있었습니다. 마치 영화 ‘웰컴 투 동막골’에 나오는 팝콘을 연상시키더군요. 얼마나 예쁘던지.
점방에는 작은 방 하나가 딸려 있습니다. 그 비좁은 방에서도 화투판을 벌여 자주 노시는데, 오늘은 화투보다 재밌는 장난감이 좌중들을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바로 3반 반장님네 아기 ‘나연이’입니다. 나연이는 방안으로 들어서는 저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방긋 웃었습니다. 아기가 한참 저를 쳐다보니까 아주머니들이 신기해합니다.
 
“헤어스타일이 비슷해서 자꾸 보는가 봐요.”
 
나연이랑 아주머니들 모두가 그 말에 웃음을 터뜨립니다. 나연이는 아기라서 머리카락이 조금밖에 안 났고, 저는 행정대집행 이후에 삭발을 해버렸기 때문입니다. 동네 분들은 저의 짧은 머리를 보고 처음에는 많이 놀랐지만, 요즘은 손바닥으로 제 머리통을 박박 쓰다듬으면서 ‘짧은 머리가 더 잘 어울린다’고 말씀하십니다.
 
아주머니들은 마을길에서 검문하는 경찰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전에는 아무렇잖게 드나들던 길목에 전경들이 배치되어 주민들도 평택에서 대추리로 차를 타고 들어오는 동안 세 차례나 검문을 받습니다. 무인 감시 카메라까지 작동되고 있습니다. 병원이나 교회에 다녀오면서 검문을 하는 경찰과 실랑이를 벌인 일을 전하며 이제는 집에 가는 길까지 경찰들이 막는다며 한탄하십니다. 아들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집으로 오는 길에도, 경찰이 차를 세워서 신분 확인을 한다며 이것저것 캐 묻길래 창문을 내리고 욕을 했더니 그제야 보내주더란 말씀도 하십니다. 주민들이 고통에 겨워 제 발로 떠나도록 내몰 작정을 한 게 아닌가 싶을 만큼 가혹한 행위들을 정부가 하고 있습니다. 농사짓는 것밖에 모르고 살아온 분들께 말입니다.
 
글을 쓰다가 촛불 행사에 다녀왔습니다. 비가 내려 오늘은 천주교 공소에서 촛불 행사가 열렸습니다. 관절이 불거지고 거친 손들이 촛불을 밝히고 앉았습니다. 미군기지 확장 반대를 위해 함께 싸우고 있는 최종수 신부님은 ‘우리의 아이들이 미국이 일으키는 전쟁의 총알받이가 되지 않도록 이 땅을 지키면서 끝까지 싸우자’고 말했습니다. 뒷자리에 앉았던 저는 조용히 눈물을 훔치는 사람들을 봤어요. 신부님은 “제가 마음을 담아서, 사랑한다고 인사드리겠습니다.”하면서 두 팔을 벌려 머리위로 하트 모양을 만들어 보이고 나서 자리로 돌아가 앉으셨습니다. 이어서 나오신 송재국 할아버지.
 
“우리 주민은 만신창이가 됐습니다….”
 
첫 말씀을 이렇게 열었습니다. 그리고 긴 이야기가 이어졌습니다.
 
“…이 싸움은 우리가 분명히 이겼습니다. 국방부는 이 싸움에서 반드시 지고, 져야 이기는 겁니다. 죄 없는 서민들을 죽이는 것을 국민들이 훗날 반드시 심판할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국방부는 진 것입니다. 우린 만신창이가 되고 병들어 쫓겨난다고 하더라도 후손들은 우리가 끝까지 싸운 것을 인정해 줄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는 이겼습니다.… 국방부에서 나온 사람이 ‘우리는 결국 법대로 합니다’ 그러더군요. 우리 애절한 얘기 들으면은 뭐가 좀 바뀌지 않을까 했는데, 끝에 가서 하는 이야기가 그랬습니다. 법이 아닌 법으로 법대로 한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법은 2월에 농사 준비를 마치고 나서 모판에 흙 담고, 논 갈고, 못자리 준비하는 것입니다. 못자리한 게 잘못되면 또다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합니다. 돌 위에 둔다고 불 위에 둔다고 볍씨에 싹 나는 게 아니에요. 미군기지 확장하는 걸 염두에 뒀다면 여러분 땅이 이만저만해서 필요하니 내 줄 수 없겠냐고 주민들 의사를 타진하고 순서에 맞게 했어야지요…….”
 
촛불이 꺼지고, 할머니들이 가져오신 따뜻한 달걀을 저마다 손에 쥐고 사람들은 공소 문을 나섰습니다. 지킴이들은 남아서 공소 바닥을 쓸고, 방석을 정리한 후 문을 닫고 나왔습니다. 비가 그쳤더군요. 숲으로 날아든 솔부엉이가 작은 소리로 울었습니다. 내일이면 다시 황새울 들판에서 굴착기가 땅을 파헤치고, 하늘에 군용 헬리콥터가 떠오르겠지요. 그리고 철조망 너머의 논에서는 벼들이 비를 먹고 더 푸르게 자랄 것입니다. 가을에는 철조망을 걷어 낸 들판으로 가서 저 어린 벼들이 키워낸 낟알들을 수확할 수 있기를 바라며, 저의 글은 여기서 줄입니다.
 
 
  
2006-05-23 오후 2:51:17   © CoreaFocus.com
가져온 곳 :  블로그 >코리아포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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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3월 16일, 대구 동성로에서 열린 반전집회에서

 

 

기억에 붙들릴 수밖에 없는 이유,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내가 '가해자'라는, '가해자였다'는 사실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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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4월, "대추리의 봄을 안고 청와대로" 행진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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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의 시대에 건네는 생명의 목소리 2010

 

 



  발문 _ 질병의 시대에 건네는 생명의 목소리

 

김연주 

 

 

2010년 8월, 대구시는 첨단의료복합단지 선정 일 년째를 맞이하였다. ‘의료산업 실리콘밸리’ 구축을 목표로 현재 103만 제곱미터 규모의 대지 조성공사가 진행 중이며, 올 하반기부터 민간 입주구역 부지를 분양할 예정이라고 한다. 또한 인재와 기업 유치를 위해 글로벌펀드와 메디시티 기금을 조성할 계획이란다. 대구시는 ‘메디시티 대구’의 브랜드화, 밀양신공항 유치에도 열을 올리고 있다.

의료시장 개방 이후, 지자체마다 의료산업 육성에 경쟁적으로 뛰어들고 있지만, 서민들의 건강이 이전보다 나아지리라는 전망은 보이지 않는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대구시는 법정전염병인 결핵 증가율이 27.7%로 전국 1위다. 최근 수년 간 한국에서 결핵 발병률은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으며, 매년 2,300여 명이 결핵으로 사망했다. 얼마 전 대구의 모 고등학교에서 일어난 결핵 집단발병 사태는, 신종플루대유행에 이어 또다시 전염성 질환 확산에 대한 공포감을 불러왔다.

정부와 지자체는 의료산업 부흥을 외치기 전에 ‘OECD 국가 중 결핵사망률 1위’라는 불명예를 극복할 수 있는 정책부터 당장 시행하여야 할 것이다. 서민들의 건강권은 제쳐둔 채 거대 기업의 의료시장 진출과 고객 유치에만 매달린다면, 그 폐해는 국가의 지원을 가장 필요로 하는 의료취약 계층에게 전가될 것이 분명하다. 면역력을 키울 짬이 없는 학생들, 노숙자, 이주노동자, 노인들에게 ‘메디시티 대구’는 달아오른 분지에 떠오른 신기루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시대의 몸·삶·죽음』의 저자 김진국 선생은 1960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줄곧 대구에서 성장하였고, 신경과 전문의가 된 이후 각종 의료 현안을 주제로 꾸준히 글쓰기를 이어왔다. 그리고 2010년 가을, 대구에서 갓 태어난 출판사 〈한티재〉에서 선생의 글 열여덟 편을 엮어 책으로 발간하였다.

이 책은 의료계의 주요 쟁점에 대한 논의와, 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인간의 몸과 생명에 대한 성찰, 문학에 반영된 인간과 의료계의 현실에 대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이 책을 읽는 경험은 간단없이 뒤틀린 내장 속 같은 현실의 굽이굽이를 펜라이트를 비춰가며 한 바퀴 돌아 나오는 고독하고 지난한 여행을 연상시킨다. 그 여행에서 우리는 언젠가 한번은 만났을, 아니 날마다 마주치지만 얼굴을 떠올릴 수 없는 ‘난장이’들의 생애와 마주하게 된다. ‘난장이’들을 생산해내는 거대한 시스템을 어둠 속에서 발견하게 된다.

 

병원은 사람을 일상의 삶과 그가 소속된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는 공간이며 인간관계의 단절을 만들어내는 공간이다. 그러므로 원래 병원은 일상의 삶에서 격리될 수밖에 없는 가난한 병자와 연고자가 없는 부랑자를 위한 수용시설로서 기능을 했다.

― 「우리 소설에 그려진 의술의 풍경」 25쪽

 

영국의 지리학자인 에드워드 렐프는 그의 저서 『장소와 장소상실』에서 무장소성(無場所性)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것은 뿌리를 잘라내고, 상징을 침식하고, 다양성을 획일성으로, 경험적 질서를 개념적 질서로 바꾸어버리면서, 가장 심각한 수준에 도달한다.” 무장소성은 ‘의미 있는 장소를 가지지 못한 환경과 장소가 가진 의미를 인정하지 않는 잠재적인 태도’로 정의된다. 이러한 무장소성은 ‘기술’과 ‘집권적 권력’에 의해 계속해서 확장되어 왔다.

격리되어 서로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공간. 역할에 따라 위계가 나눠지고 그 대우가 천차만별로 달라지는 것이 당연시되는 공간.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해 ‘밀실 속의 권력’을 상대로 싸워야 하는 공간. 용도에 부합하기 위해 발버둥 쳐야 하는 공간. 병원은 각개 집단의 집합체는 될지언정 결코 공동체를 형성할 수 없는 ‘불모의 공간’이 되어간다. 효율과 수익성에 맞춰 구조화된 그곳에서 ‘격리’를 거부하며, 자기가 누구인가를 말하려는 이들은 가차 없이 추방당한다.

대구의 모 대학병원 식당의 해고노동자들. 그들은 환자식당 외주철회와 직접고용을 요구하며 옥외 천막농성장에서 오늘도 79일째 철야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병원 식당 정규직 노동자에서 외주업체의 계약직 노동자로 옮겨갔던 그들에게, 사측은 올해 6월부터 재하청업체의 노동자로 재입사하라고 요구했고, 노동자들은 이를 거부했다. ‘인력관리 효율’과 ‘서비스 질 향상’을 내세우는 병원 자본에 의해 해고당한 노동자들은 농성장 천막 아래서 폭염의 여름을 지나왔다. 이미 밀려나올 대로 밀려난 이들을 여기서 어디로 추방하려는 것인가.

수십 년에 걸쳐 병원 환자들에게 따뜻한 밥을 지어낸 노동자의 몸. 그 몸은 참으로 ‘고마운 몸, 고운 몸’이다. 식당 노동자들은 밥을 짓는 일로 쌀을 사고 그의 자녀들을 길러내었을 것이다. 고된 노동의 흔적을 몸 속에 갖가지 질병으로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그 몸은 아름답지 않은가. 아름다움은 어디로 숨어버린 것일까. 이 시대가 ‘아름답다’고 노래하는 몸들이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다.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약과 기술은 엄청난 효과를 나타냈다. 난장이의 키가 커지고, 누런 피부는 뽀얗게, 하얀 피부는 뽀송뽀송하게, 평면적인 얼굴에 낮은 코는 갸름한 얼굴에 오뚝한 콧날로, 튀어나온 광대뼈는 깎아내서 반듯하게, 짧은 하반신은 쭉쭉빵빵하게, 납작한 가슴은 불룩하게, 굵은 몸통은 잘록하게 다듬어낸다.

― 「난장이의 죽음, 그 이후」 82~83쪽

 

멋진 몸을 욕망하는 개인이 성형외과를 찾는 것이 이젠 더 이상 별스럽지 않은 일이 되었다. 성형외과가 포화상태에 이르러 성형외과 의사들의 밥벌이가 어려워졌다는 뉴스가 나온 지도 벌써 몇 년 전이다. 이참에 한국관광공사가 의료관광 활성화를 위해 이색적인 활동을 펼쳐보였다. 중국의 최대 미용성형병원인 ‘화메이병원’ 의료진을 초청, 한국의 유명 가슴성형센터에 견학을 주선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몽골의 여성 톱 모델을 ‘의료관광 서포터즈’로 위촉하면서 강남의 모 성형외과를 통해 눈, 코, 사각턱, 광대뼈, 앞턱 수술과 귀족수술 등 대대적인 성형수술을 지원했다. 한국관광공사가 의료시장의 포주 역할을 하기에 이르렀냐고 탄식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의료관광의 최대 수혜자는 실력 좋은 의료진과 최신기술을 갖춘 병원 자본이 될 것이 자명하다.

 

의약분업의 필요성이 제기될 때마다 의사들은 약가 마진에서 음성 수입을 얻는 부도덕한 집단으로 매도당했다. 그런데 불합리하게 책정된 약가 때문에 최대의 이익을 얻은 집단은 의사들이 아니라 제약자본이었다. 의사들이 제약자본의 방패막이였던 셈이다. 첨단시설, 최신장비, 최신기술이 의료기관 사이에 최고의 경쟁력이 되어 있고 여기에 소비자들이 환상을 가지고 있는 한, 의료비의 낭비구조는 결코 개선되지 않을 뿐더러, 그에 따른 반사이익은 의료 자본이 가져가고 의사들은 더욱 궁핍해진다.

― 「의료대란과 소비자 주권」 169쪽

 

저자는 의사라는 직업의 멋들어진 허울에 가려진 의료계의 실상을 고백한다. 실체를 가늠키 어려운 거대 자본 앞에서 의사 개인은 무력한 존재일 뿐이다.(“의학기술이 발전하면 할수록, 병원의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병원 자본의 힘은 더욱 커져갔고 의사는 병원 경영진의 뜻을 따라가야 하는 고임금 노동자의 처지로 내몰렸다.”) 승자독식의 논리는 의료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의료자본이 성장할수록 정부는 자본의 이익 창출에 부합하는 새로운 제도들을 만들어낸다. 공공의료의 근간을 흔드는 영리병원 도입이나 민영의료보험법안 발의 등 의료민영화의 수순을 정부가 진행하고 있다. 바야흐로 민영화가 ‘대세’가 되었다.

그러나 국민들이 의료민영화에 지지를 보내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공공노조가 지난 5~6월, 전국 7개 병원의 환자와 보호자 578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89.4%가 영리병원 도입으로 가계의료비가 증가할 것이라 예상했다. 진료실적에 따른 차등성과급 도입에 대해서도 응답자의 80% 이상이 “불필요한 검사가 많아지고 돈벌이 환자를 선호하게 될 것”이라고 답했다. 한쪽에서는 더 좋은 의료서비스에 대한 욕구가 팽배해지는 한편, 서민들은 의료민영화로 인해 의료비 부담이 가중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고가의 의료서비스를 구매할 수도 없으며, 건강을 위해 일정한 시간과 경비를 투자할 수도 없는 이들은 어찌해야 하는가.

 

저자는 “의료에 관한 진정한 소비자 주권 운동은 단순히 환자의 알 권리나 언제라도 진료받을 권리가 보장되는 수준이 아니”며, “의학에 의해 일방적으로 규정되어버린 건강과 생명에 대한 가치, 몸에 대한 문화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한다. 의료 서비스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그것을 소비하는 이들도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체장애인의 방화로 발생한 대구지하철참사 이후 “지하철의 안전 시스템 구축과 완벽한 복구보다도 더 중요한 문제가 지역사회의 소외계층들을 사회의 구성원으로 통합할 수 있는 지역단위의 정책을 만드는 것”이라는 저자의 지적은 참으로 적절하다.

거대한 병동 속에서는 아무도 살고 싶어하지 않으며, 그러므로 먼저 우리가 잃어버린 가치들을 일상 속에서부터 복구해내어야 한다. 마을과 텃밭, 골목길과 광장에서 누구나 쉽게 만나고, 어울리고, 이야기 나눌 수 있어야 한다. 격리와 소외를 넘어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자연 사이에 깊은 사귐이 이루어지는 공간, 그곳에서 가장 근원적인 치유가 이뤄질 것이다.

 

지금 의사들이 해야 할 일은 의권을 쟁취하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사회 전체를 병동으로 만들어 이익을 챙겨가는 세력들과의 싸움이다. 그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힘은 국민들의 신뢰와 애정이 뒷받침된 의사의 자존심과 오기뿐이다.

― 「농담 속에 파묻힌 진실」 65쪽

 

책을 읽고 나서 가장 기억에 남는 두 개의 단어, 그것은 바로 ‘자존심’과 ‘오기’였다. 지하 벙커에 숨은 권력, 끊어지는 물길과 사라지는 습지들, 너무도 많은 자동차와 어두운 뉴스들, 기후 이상으로 지구 곳곳에서 일어나는 재난 소식들……. 그저 새가슴으로 살아갈 뿐인 작은 사람들에게 밀려드는 파괴의 굉음과 비명소리는 고문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저자는 싸워야 한다고, ‘자존심’과 ‘오기’를 가져야 한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지금도 이 갑갑한 분지의 도시에서, 따스한 아랫목이 아닌 차가운 윗목의 한 자리를 꿋꿋이 지켜주고 계신다. 발문을 쓸 자격도, 깜냥도 되지 않는 이에게 지면을 내어주신 저자와 〈한티재〉 출판사에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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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을 살리는 것이, 평화"

  

 

 " 마을을 살리는 것이, 평화"

 

 

 

 마을 하나가 부서졌다. 단 한 시간의 포격으로.

 꽃게잡이 그물을 건지고 굴을 따며 살아온 섬사람들은, 포격을 맞아 부서지고 불탄 마을을 두고 뭍으로 떠나야 했다. 병들고 눈먼 노인들, 강아지와 고양이들, 도저히 생업을 접고 떠나기 어려운 사람들만 섬에 남았다. 짐 보따리를 들고 아기를 안고서 피난을 나온 사람들은 갈 곳이 없어 찜질방 건물에서 지내고 있다. 현대식 난민수용소에서 보내는 하루하루를 그전엔 상상이나 했을까.

 연평도가 포격당한 이후 정부는 최신식 무기를 연평도에 배치하고, 서해상에서 대규모 군사훈련을 연이어 실시해 왔다. 포격에 대한 대응이 적절치 못했다는 비난을 받아온 정부가, 2차 도발 발생할 시에는 아주 본때를 보여주겠노라고 작정을 한듯하다. 텔레비전 뉴스에서는 연평도 도발과 최신식무기와 김정일 부자의 모습이 날마다 비춰진다. 전쟁이 끝나지 않은 국가에서 살고 있음을 실감하는 요즈음이다.

 예상대로 북이 2차 도발을 하고 국방부가 강력하게 보복공격을 한다면, 한반도 안보 문제에 대해 국민들이 안도할 수 있을까. 불안이 잦아들고, 평화가 제자리를 찾게 될까. 온갖 최신식 무기들이 잔뜩 들어찬 작은 섬 연평도에서 다시 어민들이 꽃게를 잡고, 굴을 따고, 아이들이 뛰어놀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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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9월 도두리 빈집 철거하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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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4월, 부서진 대추리 공소

 

 

 지금은 사라져버린 한 마을이, 있었다. 신라시대 때 당나라와의 주요 교역로였던 ‘곤지진’이 있었던 마을. 일제강점기에는 군사기지 건설로 강제이주를 당하고, 이어 한국전쟁 때는 미군기지 건설로 쫓겨난 사람들이 갯벌을 농토로 일궈 살았던 마을. 이제는 구글 위성지도를 검색해 봐도 찾을 수 없는 마을. 바로, ‘평택미군기지’ 확장공사로 사라져버린 대추리와 도두리다. 그 마을에서 나는 꼭 500일을 살았다. 그 마을에서 맞이했던 마지막 가을과 그곳을 떠나오던 마지막 봄을 나는 잊지 못한다.

 지난 2006년, 국방부는 미군기지 확장 공사를 내세워 농민들이 더 이상 논으로 갈 수 없도록 철조망을 쳤다. 마을 곳곳에 검문소를 설치하고 주민이 아닌 사람들의 통행을 가로막았다. 대추분교 행정대집행과 빈집철거를 강행하면서, 그때마다 1만 여명이 넘는 경찰과 군인이 작은 마을로 밀려들었다. 주민들이 쫓겨나기 전, 마을은 이미 폭격을 맞은 전쟁터 마냥 부서진 모습이었다. ‘올해도 내년에도 이 땅에서 농사짓고 살자’던 농민들의 소박한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935일 동안 촛불을 들며 미군기지 확장에 저항했던 주민들은 더 이상 투쟁을 이어가지 못하고 2007년 봄, 마을을 떠나야 했다. 아니, 쫓겨나야 했다. 50여 가구에 이르는 주민들의 이사가 이뤄지던 그 봄은 눈물에 잠겨있었다. 마을을 지키려고 그곳에 갔던 나와 다른 벗들도, 주민들이 떠난 마을에서 남아 있을 수 없었다. 손수 닭장을 만들어 키우던 닭이며, 강아지들, 마늘과 완두가 자라는 작은 텃밭, 내가 살던 ‘빈집’ 마당 귀퉁이에서 흰 비둘기 같은 꽃송이를 피워내던 목련나무……. 그 모든 것들을 그대로 둔 채, 빈집을 부수는 포클레인의 굉음과 성토용 흙을 나르는 덤프트럭의 먼지 속을 지나 폐허가 되어버린 마을을 빠져나와야 했다.

 그리고 2010년. 노을이 아름다웠던 황새울 들녘, 배꽃이 뽀얗게 피어나던 언덕과 천연기념물인 솔부엉이가 살던 솔숲은 3미터 높이의 흙더미에 묻혔다. 주민들이 쌀과 보리를 내서 지었던 대추분교도 마을보건소도 사라지고 없다. 성토작업이 진행 중인 그곳에는 미군 숙소용 건물과 미군 자녀들을 위한 학교, 각종 군사시설, 골프장 등이 들어설 예정이다. 평택시민이 6개월 동안 먹을 쌀을 생산하던 곳에서, 지금은 한국의 대기업들이 수주한 미군기지 건설공사가 한창이다. 2015년 완공 예정인 미군기지 건설에 드는 비용만 총 10조원에 이른다. 그 비용의 90% 이상을 한국이 부담한다고 한다.

 ‘한반도의 평화, 동북아 평화’를 위해서 미군기지 확장이 필요하다고 그들은 말했다. 그래서 미군이 요구하는 전쟁기지며 살인무기를 한국이 비용을 부담해 제공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했다. 미군이 ‘전략적 유연성’을 거론하며 한국의 미군기지에서 복무하는 미군을 이라크로 아프가니스탄으로 내보내도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자주 국방’을 외치던 현 정부는 ‘전시작전권 이양’ 따위는 미뤄질수록 좋다며, 미국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졌다. 남한 영토의 민간인까지 포격한 북한을 맹렬히 비난하지만, 한국군 또한 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 민간인들이 수십만 명 씩 죽어가는 그 전쟁터에 파병을 계속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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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가을, 미군 숙소 건물이 들어선 평택 황새울 들판

 

 대추리와 도두리를 떠나온 주민들 대부분은 이제 벼농사를 짓지 않는다. 보상금으로는 농지를 구하지 못해 공공근로를 다니거나, 그일 마저 없어 시름이 깊다. 생업을 잃은 연평도 주민들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한국전쟁 때 피난을 나온 이래, 고향인 북녘 땅이 바라보여 연평도에서 60여 년을 살았다는 할머니는 다시 연평도로 돌아가 살 수 있을까. 그분이 원래 고향인 북녘 땅을 다시 밟을 날은 언제나 올까. 그리고 대추리와 도두리 주민들은 언제 다시 빼앗긴 들판으로 돌아가 씨앗을 뿌릴 수 있을까. 꼭 다시 돌아와 농사를 짓겠다는 대추리‧도두리 주민들의 마지막 소원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평화를 위해서 살지 않는다면, 언제까지나 전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라고 누군가 말했다. 어릴 적 일본과 한국에서 두 차례의 전쟁을 경험하고, 아픈 몸으로 평생 ‘슬픈 동화’를 쓰면서 전쟁으로 고통 받는 아이들을 걱정하셨던, 권정생 할아버지의 작은 기도가 이 땅에서 이루어지길, 바랄뿐이다.

 

하느님이 지으신 세상에 평화가 이루어지자면 우리는 모두 동지가 되어야 합니다. 개구리는 물론 파리도, 모기도, 미꾸라지도, 메추라기도, 산돼지도, 노루도, 강아지도, 원숭이도, 모두 동지가 되어야 합니다. - <도토리 예배당 종지기 아저씨>, 권정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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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가을, 도두리 지킴이네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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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주의실천협의회에서 발행하는 <생명과 의료>에 보낸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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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7개월 만에 열린 대추리 마을 잔치

 

마을회관 명패에 꼭 대추리라고 붙이고 말겨"
3년 7개월 만에 열린 대추리 마을 잔치... 대추리 투쟁 백서 발간 기념식도
10.11.01 18:26 ㅣ최종 업데이트 10.11.01 18:26 김연주 (wren12)

 

 
 

  
이주단지 전경
ⓒ 김연주
대추리 이주단지

 

 

 

평택미군기지 확장 사업으로 대추리를 떠나온 지 3년 7개월. 지난 10월 30일, 구 대추리 주민 43가구가 정착한 평택 노와리 이주단지에서 '2010 대추리 마을잔치'가 열렸다(주민들이 정착한 곳은 '노와리'지만 여전히 '대추리', '대추리 주민'으로 불리기 원한다). 대추리 주민들과 시민단체 활동가, 평택시민 등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대추리 입촌식과 대추리 투쟁백서 <아! 대추리>의 발간 기념식을 진행했다.

 

대추리라는 이름, 절대 빼앗길 수 없어요

 

오후 6시부터 시작된 대추리 입촌식에서 신종원 이장은 "2007년 (평택미군기지 확장을 막기 위한) 투쟁을 중단하고 이곳 이주단지로 오게 되었다. 부끄럽지만 오늘 여러분들을 초대하는 자리를 마련했다"며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주민들에게 '함께 살자'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다"고 말했다.

 

"우리를 내쫓은 사람들을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한 신종원 이장은 "겉으로 보기에는 (이주단지) 마을이 멋있다, '집을 짓고 싶거든 대추리에 가보라'는 말도 들려온다. 그러나 이는 어려운 분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분들은 은행에 융자를 얻고, 자식들의 도움 받으며 집을 마련했다. 왜 대추리 사람들이 쫓겨나 이렇게 어렵게 살아야 하는지 원망스럽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2010년 현재 벼농사를 짓는 가구는 이주단지 43가구 중 다섯 가구에 불과하며, 주민들 대부분은 공공근로를 하며 월 80-90만 원의 생계비를 벌거나, 이주단지 한쪽에 마련된 텃밭에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고 있다. 신 이장은 "어려운 상황에서 이 자리에 함께 해주신 분들에게 고맙다"고 인사하며 "대추리 주민들이 떳떳하게 굳건히 살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이 자리에 오신 분들이 앞으로도 지대한 관심을 가져달라"고 당부했다.

 

일본 오키나와에서 '헤노코 미군기지 반대운동'을 하고 있는 토미야마씨는 입촌식 행사에서 "미군은 오키나와 헤노코의 아름다운 바다를 메워 미군기지를 만들려고 했다. 우리는 작은 배를 타고 나가 국방부의 배를 상대로 싸웠다. 오키나와도 한국도 미군기지에 대한 싸움은 똑같다. 이곳에서 힘을 받고 오키나와로 가서 열심히 싸우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멈춰 버린 콤바인이 평화 공원 한쪽에 전시 돼 있다.
ⓒ 김연주
대추리 입촌식

 

 

현재 평택시 팽성읍 노와리에 위치한 이주단지에는 대추리에서 살았던 마을 주민 43가구가 입주를 마친 상황이며 마을회관과 노인정, 대추리기념관이 공사 중이다. 평화공원과 체육시설은 완공됐으나, 대추리에서 이주단지로 옮겨오기로 했던 <파랑새>, <갑오농민전쟁> 등의 조형물과 벽화, 벽시 등은 아직 설치되지 못한 상태.     

 

신종원 이장은 "마을 주민들은 모든 것을 빼앗기고 이곳에 다시 자리를 잡았다. '대추리'라는 이름만이라도 가져오고 싶지만 쉽지 않다. 원래 8월 중순 완공 예정이던 마을회관 공사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하나하나 싸우지 않으면 이뤄지는 게 없고, 담당자마저 바뀌기 일쑤"라며 이주단지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쉽지 않음을 밝혔다. 그는 "지명 변경 요구만 벌써 몇 년째다. 새로 지어지는 마을회관과 노인정에 반드시 '대추리'라는 이름을 붙이고 준공식을 열겠다"고 말했다.

 

  
잔칫날 풍물을 치다
ⓒ 김연주
대추리 2010

 

 

대추리 주민들은 이날 오랜만에 풍물을 치며 흥을 돋웠다. 새로 노인 회장에 뽑힌 방효태 할아버지도 오랜만에 꽹과리를 들었다. 대추리 이장을 지낸 바 있는 심영섭씨는 복색을 모두 갖춰 입고서 장구를 쳤다. 입촌식 행사를 앞두고 열린 마을 고사에서 구부정한 허리를 굽혀 정성스레 절을 올린 마을 주민 신광순옹(83)은 "앞으로 우리 마을이 내내, 천년이 가도록 사고 없이, 오래오래 잘 되도록 해달라고 소원을 빌었다"고 말했다. 신광순 할아버지는 할머니와 함께 날마다 마을에서 나오는 폐품을 수집해 번 돈을 생활비에 보태고 있다. 

 

대추분교에서 풍물학교를 운영하다 2006년 5월 대추분교 행정대집행 이후 연행되어 수원구치소에서 두 달 동안 옥고를 치른 송영민씨도 풍물 공연에 함께 했다. 대추분교 철거로 강제퇴거를 당하고 고가의 공연장비들을 모두 잃어 버리는 등 시련도 겪었지만, 지금은 '평택풍물학교 소리얼' 대표를 맡아 풍물 전수에 힘쓰고 있다. 송씨는 "앞으로 대추리 기념관이 완공되면, 이 자리에서 한 달에 한 번 풍물 공연을 열고 싶다"며 소망을 밝혔다.

 

오랜만의 대추리 잔치... 돼지 세마리나 잡았네

 

  
대추리 할머니들
ⓒ 김연주
대추리 2010

 

 

 

  
대추리 투쟁 사진을 보며 이야기 나누는 주민
ⓒ 김연주
대추리 2010

 

 

주민들이 돼지를 세 마리나 잡았다는 이번 마을 잔치는 대추리 부녀회에서 '종이가방 접기' 부업을 해서 모은 마을기금으로 치러졌다. 동네에서 '이 반장님'으로 불리는 이태헌 할아버지는 잔칫날에 먹을 김치를 위해 텃밭에서 키운 배추 20포기와 김장 무를 내놓았다. 서순희 할머니는 "대추리를 떠나와서도 항상 대추리에서 만났던 신부님들과 지킴이들을 생각하며 기도한다"며 "마을 잔치를 열어 다시 만나게 돼 기쁘다"고 말했다.

 

대추리 투쟁 당시 마을에서 '들소리 방송국'의 기자로 활동했던 니나(예명)씨는 "마을 주민들과 만나서 반갑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현재 이주민 인권단체에서 활동 중인 그는 "현장에서의 투쟁도 중요하지만, 주민들이 마을에서 나오고 나서의 이야기도 중요하다. 공동체가 파괴되었을 때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가, 그 이야기를 듣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주민들을 찾아뵙고 그 분들의 이야기를 지속적으로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고 말했다. 

 

  
마을 주민들이 무대로 나가 '아리랑'을 불렀다
ⓒ 김연주
대추리 입촌식

 

 

이날 발간 기념식을 가진 투쟁백서 <아! 대추리>는 대추리 주민들의 미군기지 확장반대 투쟁기록을 엮은 것으로, 평택 투쟁 당시 행정대집행에 저항하다 두 차례에 걸쳐 구속된 바 있는 박래군 인권운동가가 글을 썼다. 박래군씨는 "역사는 누구에 의해 기록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미욱한 글 솜씨로나마 대추리 주민들의 투쟁 기록을 책으로 내게 되었다. 주민 분들의 한이 클수록 앞으로는 행복하게 사시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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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을 떠난 '대추리' 사람들의 가을 이야기

 

 
 
  
▲ 내리 언덕에서 바라보이는 대추리 들판 성토공사가 완료된 곳에 지어진 미군 숙소 건물
ⓒ 김연주
대추리 2010

 

 

 

 

  
함정리 언덕에서 바라본 황새울
ⓒ 김연주
황새울 2010

 

 

'큰 가을(大秋)'은 더 이상 오지 않았다. 2007년 3월, 935일 동안 매일마다 '우리 땅을 지키기 위한 촛불 행사'를 열었던 대추리 주민들은 미군기지 확장 공사를 막아내지 못하고 마을을 떠나야 했다. 제비 떼가 날아와 흙을 물어 나르며 집을 짓고, 마늘 싹이 파랗게 돋아나던 무렵이었다.

 

대추리를 떠나와 살게 된 '임시이주단지'인 팽성읍 송화리 포유 빌라에서 '대추리 사람들'은 3년을 넘게 살았다. 그곳에서도 땅을 사랑했던 사람들의 손은 쉬지 않았다.

 

더 이상 큰 가을은 아니지만... 부지런한 대추리 사람들

 

미군 임대를 목적으로 지어진 빌라 곳곳에 작은 텃밭들이 생겨났다. 주민들은 화분마다 고추와 상추를 심고, 잔디밭 귀퉁이에 대파를 심었다. 공터에는 비닐하우스를 세워 버섯을 키웠다. 대추리 언덕에서 자라던 가장 키가 큰 포플러 나무를 미리 잘라서 옮겨둔 덕분에 그 나무에 버섯 종균을 심을 수 있었다. 비닐하우스에서 수확한 버섯을 주민들은 나눠 먹었다.

 

아무도 농사짓지 않는 수렁논을 빌려 주민들은 다 같이 벼농사를 지었다. 가을에는 허벅지까지 빠지는 논에서 낫으로 벼를 벴고, 수확한 쌀은 노인정에서 함께 나눠 먹었다. 밭을 빌려 공동으로 배추를 심어 그해 김장을 담갔다. 억척스레 일만 알고 살아온 농사꾼에게 하루하루는 너무도 길었다. 주민들은 공공근로를 다니면서 도로변에 버려진 쓰레기를 치우고, 잡초를 뽑았다. 언제 집을 지어 나갈 수 있을지 불안한 나날이었다.

 

그리고 2010년 가을, 팽성읍 노와리 이주단지.

 

  
마늘을 심는 방효태 할아버지
ⓒ 김연주
방효태

 

방효태(74) 할아버지는 20년 전에 산 자전거를 끌며 집을 나선다. 자전거 앞 바구니에는 마늘을 싣고, 짐칸에 커다란 대빗자루를 묶어 밭으로 간다. 이주단지 입주 가구 당 100평씩 텃밭을 살 수 있었고, 비로소 할아버지에게도 농사지을 '내 땅'이 생겼다. 할아버지는 올해 마늘 15접을 심는다고 했다.

 

"대추리 살 때, 논에 철조망이 쳐지면서 마늘 심었던 거 하나도 못 캤지. 이듬해 대추리 나오면서 또 마늘 농사 못 짓고. 마늘 농사는 작년부터 지었어. 아이들한테 보내주려고 많이 심었지."

 

두둑을 지어 미리 비닐을 씌운 자리에 마늘 한 쪽 씩을 박아 넣는다. 비닐 구멍 하나에 마늘 하나, 그렇게 심어서 내년 여름이 오면 그 자리에 마늘 한 통이 맺힌다. 대추리를 떠나기 전, 할아버지는 마늘밭에 덮인 짚을 걷어내고 지난 가을 심었던 마늘을 모두 캐냈다고 했다. 이사를 하고 나면 다시 마을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제 막 하얗게 뿌리가 자라난 마늘을 뽑아서 뿌리를 자르고 먹을 수 있도록 모두 빻았다. 밭에 심었던 마늘은 그렇게 할아버지와 함께 떠나왔다.

 

"일 끊어지면 우리 살려내라고 데모할겨"

 

  
노영희 할머니
ⓒ 김연주
대추리 이주단지

 

오전 공공근로를 마친 노영희(73) 할머니 댁. 조립식으로 지어진 작고 노란 집이다. 양지바른 마당에는 씨앗이 빼곡하게 박힌 해바라기와 메주콩, 호박고지가 볕을 쬐고 있었다. 할머니는 김장 때 쓸 홍고추를 자르며 말했다.

 

"대추리 살 땐 가을에 할아버지랑 벼이삭 주운 것만 몇 가마가 됐어. 텃밭에 채소도 심고 감나무, 은행나무, 밤나무도 있었어. 뭐든 내가 심어서 먹다가 나오고 나니 전부 팔아서 먹어야 혀. 공공근로 안하면 할 게 없어. 일 끊어지면 우리들 살려내라고 시청 가서 데모해야혀."

 

이주단지에 입주한 가구 대부분은 연세가 많은 노인 분들이다. 더 이상 힘든 일을 하기 어려워 생계비 걱정이 크다. 공공근로를 나가서 버는 한 달에 90만 원 남짓한 수입이 시골에서는 적지 않은 돈이다. 대추리에서 '끝집 할머니'로 불리던 최양례(73) 할머니는 시름이 더욱 깊었다. 허리디스크를 오래 앓아온 할머니는 새로 지은 집에서 혼자 사신다.

 

"집터 107평 보상받아서 여기 와서 땅을 사고 나니 돈이 없어. 집도 아들이 지어 준 거야. 나는 돈 없어. '내 집은 있구나' 고거 한 가지뿐이지. 공공근로도 내년이면 끝나는데, 나이 찼다고 떼버리면 뭐 먹고 살라는 겨. 없는 사람은 맨 한 가지여."

 

할머니는 올해 공공근로마저 11월에 끝나고, 내년 2월부터 다시 일이 시작된다고 했다. 공공근로를 하는 짬짬이 텃밭을 일궈 김장 배추와 무, 고추를 심어 키웠고 며칠 전에는 마늘도 심었지만, 걸음걸이가 불편할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다.

 

"여긴 차편이 불편하니 병원도 자주 못 가. 공공근로 없는 날, 토요일에 병원 가서 일주일에 한번 치료 받고 오구. 원정리에다 새로 보건소 잘 지어놨어. 대추리가 없어지니까 대추리에 있던 보건소를 원정리에 지은 겨. 보건소는 혈압 약 타러 한 달에 한 번 가. 허리랑 다리 아파서 가면 소장님이 주사도 놔주고 약도 줘."

 

"내 꿈이 백섬지기였는데 이젠..."

 

  
▲ 벼베기 작업 마지막 날 이태헌 작업 반장의 논에서 추수를 하고 있다.
ⓒ 김연주
대추리

 

이주단지 입주 가구 중에서 벼농사를 짓는 가구는 다섯 집뿐이다. 지난 10월 28일, 이태헌 아저씨 네 논을 마지막으로 벼베기 작업이 끝났다. 평택 노와리에서 두 시간 거리인 충남 서산에서 벼농사를 짓는 신종원 이장에 따르면 올해 벼 수확은 지난해 보다 15% 정도가 줄었다고 한다. 대추리에서 '지킴이 영농학교' 일일 강사로도 활동했던 송재국 할아버지도 지금은 벼농사를 짓지 않는다.

 

"여기 와서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이유가 있어. 금리적인 계산이 맞아야 농사를 지을 수 있는데, 보상 받은 돈으로는 농사짓던 땅의 반밖에 살 수 없어. 대추리에서는 친구네 아들들이 기계로 농사짓는 김에 다른 부락보다 돈을 적게 받으면서 농사를 다 지어줬어. 젊은 사람들은 힘이 있으니, 논 사서 차 몰고 가서 농사짓고 살 수 있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어려워. 이렇게 같이 한 마을로 오지 않고 다들 뿔뿔이 흩어졌다면 싼 논 찾아서 그쪽으로 이사했겠지. 그런데 나이 들어서 흩어지긴 싫고, 모여서 살고 싶으니까……."

 

송재국 할아버지는 "백섬지기가 꿈이었는데 그 꿈을 이뤄준 땅을 잃어버렸다"고 말했다.

 

"농사짓던 사람이니까, 새벽 네 시면 잠이 깬다고. 그러면 옛날에 논에 가던 생각도 나고, 고생하고 피 흘리며 싸우던 생각도 나고, 옛날 생각밖에 안 나. 친구들하고 모이면 '우리가 살겠냐, 미국 놈들 쫓아내야 살지' 그래. 이런 게 다 전쟁의 여파지. 옛날 전쟁 시절엔 내가 살던 땅도 보상도 못 받고 내줬어, 기지 만든다고. 전쟁은 안 되는 일이야."

 

송재국 할아버지는 이제 꿈에서만 옛 논을 갈 수 있다. '대추리 사람들'의 마을은 흙속에 묻혔다. '큰 가을'도 묻혔다. 미군기지 공사가 한창인 도두리 벌에는 '대추리'에서 옮겨왔다는 소나무 여남은 그루가 서있을 뿐이다. 천연기념물 솔부엉이 서식처라는 그곳에 더 이상 솔부엉이는 날아들지 않는다.

 

  
대추리 마을이 없어지면서 "천연기념물 솔부엉이" 서식지도 옮겨졌다.
ⓒ 김연주
솔부엉이
2010.11.03 09:34 ⓒ 2010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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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잔치

 

 

 

 

노란 장미 세 송이를 데려왔다

 

노란 장미 진짜 예쁘다

 

장미, 노란 장미

 

그렇게 예쁘게 태어나서는 부끄럼도 없어가지고 얼굴이 빨개지지도 않고

 

애기 병아리 보송보송한 깃털처럼 아주 샛노랑이다, 깜찍스럽기도하지!!

 

神은 사랑도 많고, 미적 감각이 참 풍부하신 것같다

 

예쁜 것들이 계절마다 잔뜩 생겨나게 해주셨다

 

밤하늘의 별,

 

본 지 정말 오래 된 것 같다만 밤하늘의 별도 정말 곱고 신비스럽고 아름답다 

 

여름이지만, 크리스마스 전구를 밝혀 본다

 

반짝반짝 더 환해지는 공간

 

가까운 벗을 앉혀 놓고 맛난 음식 먹고 싶다

 

감자전과 붉은 자두, 아오리, 콩국수의 계절이다

 

나는 감자전도 잘 굽고, 콩국수도 정말 맛있게 만들 줄 안다

 

음식을 만들어서 나눠먹은 지 너무도 오래되었다

 

여름에는 잔치를 벌여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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