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에서 어떤 삶의 경험이 한계적 상황에서도 타협할 수 없게 만들었는지, 무엇을 보고 듣고 겪었길래 그렇게 되었는지, 간첩 혹은 비전향 장기수로 불리는 자들의 사상과 정견을 형성한 배경엔 아무런 관심도 없으면서 '원칙과 양심을 지킨다'는 그럴듯한 껍데기만 떼어내 존경한다고 말하는 게 이른바 "양심의 자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총구 앞에서 제 사상을 밝힐 것을 강요받는 이에게 "사람들이 거기에 동의하지 않을 거 같고 사람들을 설득할 자신도 없다면 생각을 바꿔야 한다",는 따위의 "민주적" 폭력을 아무런 양심에 거리낌 없이 우월감을 느끼며 자행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다.
예전에 어떤 이가 이른바 비전향 장기수의 문제를 드러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인간의 얼굴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그 자신이 비전향 장기수로 살면서 어떤 경험과 삶을 보고 들으며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통찰이라 생각합니다. 인식 혹은 실천의 한계는 그것을 얼굴 없는 인간들에 대한 인도적 조치로 마무리하게 만들었지만, 여전히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술인생님의 작업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번역하신 책 잘 읽었습니다.
"시민"들의 평화와 질서 그리고 비폭력을 찬송하는 담론은 그동안 모순에 대한 저항을 무질서와 폭력으로 매도했던 억압적이고 차별적이며 진정으로 폭력적이었던 주류 식민주의적 자유주의 담론을 직접적으로 재생산 및 강화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이 선은 명확히 그어져 있었다고 나는 보았는데 만약 그렇다면 이 상황을 마주하며 표출되는 변혁세력의 과잉된 주관적 희망은 성찰부재로 인한 어떤 관성의 표현이라는 점이 지적인 차원에서 논의되어야함이 당연하다. 이는 운동에 대한 직접적인 지도의 의미에서가 아니라 지식의 실천성의 복원이라는 맥락에서 제기되는 과제다.
국민경제와 민족경제를 구분하면서 민족적생활양식론의 역사적 종축을 인정했던 박현채 선생의 사유가 곤경에 빠지는 지점에서 나는 동시에 '당'의 불가능성이라는 한 측면을 추출했는데, 이 부분이 '권역적 국제주의'로 확장되면 결국 종축/횡축의 동시 변혁의 핵심 원리로 발전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지점에서 아프리카의 경험은 특히 중요하다.
제가 체감하기엔 언론이 이번 사태를 규정하고 다루는 틀과 분위기는 2012년 통합진보당 부정경선 사건과 2013년 이석기 사건 당시와 동일합니다. 요컨대 시대착오적이고 비의적인 '종북주의자', '오방낭 아줌마', '팔선녀'들 때문에 망했다는 것이죠.
그때나 지금이나 '질병'을 진단하고 '주술'을 추방하라는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주체들의 목소리가 드높습니다. 지난번엔 박근혜 편에서, 지금은 박근혜를 향해 서 있지만 딛고 선 허공은 동일해 보입니다. 포항제철과 국가보안법 위에 어른거리는 이른바 '국민국가'죠. 손에 든 '사상의 자유'를 들여다보면 비참하게도 텅 빈 깡통이지만.
흑백과 상하를 뒤집는 언어로 사람들의 관념을 주조하고 시선마저 위조하는 것이 주술이라면, 희생양을 만들어 제단 위에 올리는 건 그것의 최고봉이겠죠. 그런 점에서 어떤 당의 작명 이상 가는 주술 행위를 적어도 동시대엔 본 적이 없습니다. 맥락을 상실한 채 남한의 인터넷을 떠도는 북조선 찬양글들이 현대적 주술사들의 '자유' '민주' '평등'보다야 무해하리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