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3/07/24 03:36) 댓글에 댓글 달기 : 지우기
  • 제가 몇 마디 하자면 서발턴 연구집단은 그람시가 쓰던 데로 서발턴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사전적 의미로 쓰고 있지도 않구요.

    사전적 의미에 가깝게 "아랫 것들"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서민이나 민중과도 거리가 멀고 그 중에서 "하위 주체"는 최악의 번역입니다.

    왜냐하면 주체가 될 수 없는 존재들이 서발턴이기 때문입니다.
  • (2013/07/24 03:32) 댓글에 댓글 달기 : 지우기
  • 결국 이걸 문제 삼고 싶으신가 보군요.

    "최근 서발턴 연구와 서발턴 개념을 소개하고 있는 국내 문헌이나 번역서에서 서발턴은 '하층민', '하위 주체', '하위 집단' 등으로 번역되어 있다. 그러나 그저 사전적인 뜻대로 '하층민'이나 '하위 집단'으로 번역하는 것은 서발턴 연구의 이론적 문제의식을 어느 정도라도 담아 내지 못한다.

    '하위 주체'라는 번역어도 서발턴 연구가 서발턴의 '주체성' 자체를 문제화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서 서발턴의 속성인 '서발터니티(subalternity)'를 번역하기가 더욱 곤란하다는 점에서 난점이 있다.

    본문에서는 이 같은 곤경을 해결할 수 없어 원음대로 '서발턴'이라고 표기한다.

    <서발턴과 역사학 비판>, 김택현 저, 박종철출판사, 2003에서 베낌.
  • 동네형 (2013/07/24 01:12) 댓글에 댓글 달기 : 지우기
  • subaltern은 하위주체로 옮기다가 요즘은 그냥 서발턴으로 번역하는 경우가 많더군요. '서민'도 좋아 보이는데, 그냥 '민중'의 의미를 확장해서 사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이는데, '피플'아니 '파퓰러'가 있으니...좀 애매하긴 하네요. 어쨌든, 전체적으로 매우 공감하는 내용입니다. 평소에 제 생각과 유사해서 놀랐습니다. ㅋㅋ.
  • 藝術人生 (2013/07/21 22:39) 댓글에 댓글 달기 : 지우기
  • 반가워요~ 한국가면 이번엔 술 한잔 하면서 천천히 이야기 나누도록 해요.^^
  • 유성 (2013/07/20 23:21) 댓글에 댓글 달기 : 지우기
  • 건강히 잘 지내시는지요.

    학문과는 거리가 먼 자라 이런 짧은 글을 따라가는 것도 쉽지 않지만, 언듯 언듯 공감되는 느낌들 - 다른 곳에서는 접한 적이 없어 스스로도 언어화하지 못하고 있는 어떤 느낌들 - 이 많답니다. 요 전의 논쟁적인 포스트도 그렇고요.

    목마르게 기다립니다. 건강하시길.
  • 꽃개 (2013/07/16 16:09) 댓글에 댓글 달기 : 지우기
  • 네. 그렇지요. 서로 배웠거나 밥벌이하는 텍스트가 다르다는 것은 기왕지사인 것 같네요. 이것은 아무래도 당장에는 공명하기 어려운 지점인 것 같기는 합니다. 하지만 저는 대중적 토론을 하려던 게 아니라 님과 '개인적인' 생각을 나누고 싶었을 뿐입니다. 제가 만약 대중적 토론을 원했다면 저도 좀 더 준비를 해 다른 연단으로 이 주제를 갖고 갔겠지요. '정치'적 입장에 관련해 별다른 이견이 없다는 님의 말씀에 관해서는 고개를 갸웃하지만서도 달리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 님과 한 짧은 토론은 제게 꽤 진전이 있었습니다. 감사드리면서 곧 올 포스팅을 기다리고 있을께요. 혹여 제가 감정을 상하게 한 지점이 있다면 널리 이해해주십사 부탁드려요.
  • 藝術人生 (2013/07/15 12:36) 댓글에 댓글 달기 : 지우기
  • 레퍼런스가 많이 다르니 논의를 전개하기는 쉽지 않겠습니다. 게다가 제 이야기가 정리된 이야기가 아니기에 더 그렇겠습니다. 님이 제 말이 잘 이해가 안 되는 것처럼 저도 님의 이야기 중에 여러가지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이 많아요. 암튼 쉽지는 않을 것 같네요.

    레퍼런스가 다른 건 그렇다쳐도, 제가 보기엔 제 의도나 맥락을 거의 파악하지 않고 본인의 맥락에 제 낱말과 구절들을 무차별적으로 끼워넣고 있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대중적 논쟁에서는 아주 중요한 화법이자 기술이겠지요. 기본적으로 입장이 명확하신 것 같고, 대상에 대해 '정치'적인 비판을 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저는 그런 '정치'적 논의를 여기서 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리고 그런 '정치'적 입장에 관련해서는 저도 별 다른 이견이 없습니다. 저는 오히려 그러한 '정치성'의 타자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어요.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그것이 바로 '지식'의 문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고, 또 '역사'가 바탕을 이룬다고 보고 있습니다.

    무정부주의, 엘리트주의, 포퓰리즘 등은 제가 보는 맥락에서는 한 가지 원인의 여러 다른 표현일 뿐입니다. 그것의 폭력성도 마찬가지이구요. 저는 추상적 인간으로부터 도출되는 보편적 인간학이 주체의 형성, 변혁적 전망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자유'니, '평등'이니... 이런 추상적 가치들은 구체적 맥락이 없이는 아주 공허한 담론에 불과하지요. 매우 반 유물론적이구요.

    아름다움과 윤리를 추구하는 맥락에서 그 자원이 될 수 있는 어떤 것을 망각되고 억압된 것으로서의 역사적 개별성을 찾는다면, 저는 그것이 보편적인( 동시에 같은 형식을 공유하는 다원주의적인) 인간학으로부터 주어진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개체는 서로 다른 '민족'적 역사를 갖는 사회 속의 개체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늘 강조하는 것처럼, 저는 사회의 변혁이 무에서 무로 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바로 보편주의의 폭력성이구요. 변혁의 동력 역시 '무'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변혁 이후의 세계 속에서도 '무'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형식적 동일성을 유지하는 다원주의의 보편주의가 궁극적으로 '폭력'적일 수 밖에 없다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글이 길어지는데, 조만간 따로 포스팅을 해야겠군요.
  • 꽃개 (2013/07/14 18:13) 댓글에 댓글 달기 : 지우기
  • 아, 그리고 혹시 가능하시면, 이른바 그 '기차사건'에서 "이 파티에 자원한 17세 고교 중퇴생 여성과 18명의 남성의 섹스를 진행했다고 전한다"는 것 외에 다른 건 없는지 궁금하네요. 만다린을 못 읽고 팩트를 모르니 "이 파티에 자원한 17세 고교 중퇴생 여성과 18명의 남성의 섹스를 진행했다고 전한다"는 것만으로는 그래서 뭐? 라는 생각 밖에 떠오르지 않아요. 아울러, 이런 "파티"에 왜 '미학'이 있는가라고 묻는지도 궁금합니다. 뭐가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신지, "무질서"하다는 것을 말씀하시는건지. 그리고 이 단락 뒤에 '동성애'를 언급하신 이유도 궁금해요, 주신 문장만으로 볼 땐, 18명의 남성들이 동성성교를 했다는 건가요? (섹스파티였다고 하니 동성애, 로 규정하기엔 좀 그렇고 동성간 성교로 읽히거든요.)
  • 꽃개 (2013/07/14 18:06) 댓글에 댓글 달기 : 지우기
  • - 장문의 덧글이 될 것 같은 불길함이…일단은 제가 과문하기도 하거니와 님이 다루시는 conception(s)들을 포괄하는 텍스트에 접근할 수 없어 이른바 ‘아카데미아’ 영역 밖의 것으로만 그러니까 제 개인적인 것으로만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님이 쓰시는 다원주의는 일견 상pluralism인 것 같아 제 이해와 다른 결인 듯 싶습니다만 그것은 차치하고 말씀드릴께요.
    - 아무래도 성적 다양성sexual diversity에 대한 이야기를 ‘성(sex)’ 중심으로 전개하다 보니 (전문가가 아닌 인민의) 화법 상sexual diversity에 관한 주제들이 성(sex), 특히 성기(genitals) 중심의 담론으로 많이 제한되고 (인민의) 욕망을 구체화할 다양한 상상력-담론들도 덩달아 이에 갇히는 상황을 많이 봅니다. 이것이 위험한 이유는 이른바 이성애중심주의자들 (주로 호모포비아이거나 근본주의종교론자들 혹은 전통적인 생(번)식 중심의 가족주의자들이겠죠. 동시에 지배계급이기도 하고요.) 이 내거는 ‘사회에 대한 걱정’ 이데올로기가 바로 이 제한에서 시작하여 이 수준에만 머문다는 점에 있는 것 같아요 (막말로 예의, 성이 문란해지고 사회가 어느 지경으로 갈지 모른다는 ‘덧없는’ 걱정 따위). 그리고 아시다시피 이 이데올로기가 상당한 효과를 내고 있어요. 이 정도는 학문의 수준이 아니라 정치, 삶의 문제겠죠. 아무 것도 안하고 죽은 듯이 살아도 sexual minority란 이유만으로 얻어터지거나 생사를 오가는 사람들이 지구에 ‘실재’하고 있으니까요. 따라서 오래전부터 좌파의 일부 혹은 상당수가 (본인의 정체성과 무관하게) sexual diversity에 대해 이른바 “PC”하게 접근하려 애쓰는 게 이해못할 바도 아니에요. 그런데 왜 일부 사람들은 이런 ‘덧없는’ 걱정을 할까요? 저는 이 맥락을 결국 인민의 ‘몸’(노동력)에 대한 걱정이자 통제로 보고 있어요. 저로서는 이런 접근이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 ‘자신’에 대한 통제인 것 같아서 대단히 불편해요.
    - 한편으로 ‘동성애/이성애/양성애 등으로 범주가 늘어나는 것’이 갖는 효과도 있어요. (사실 저는 이게 왜 ‘폭력’이 될 수 있는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답니다)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기존에 있었던 담론/개념 외의 것으로 정체화(identifying)하기 시작했고 정체화할 언어를 얻었거든요. 예를 들면 주로 북미대륙에서 쓰는LGBTTIQQ2SA... (Lesbian, Gay, Bisexual, Transsexual, Transgender, Intersex, Queer, Questioning, 2-Spirited and Allies...) 개념으로 보면 한 개인을 하나의 개념(만)으로 define한다는 것이 얼마나 ‘폭력’인지 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알 수 있죠. 결국 이 “LGBTTIQQ2SA...” 개념 아래서는 성적 정체성을 구별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 타자를 그 타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존중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 섹슈얼리티에 대한 자유로운 토론은 sex-positive environments를 조성하려는 노력 정도로만 오늘은 받아들여 주세요.
    - 마지막으로 “인민(들)의 자유로운 결합은 그 어떤 방식으로 결합하든 그 인민들이 알아서해야 할 문제”라는 점을 기존의 바운더리없는 자유주의자 개념으로만 받아들여시지 않으면 됩니다. ‘인민의 결합은 이러이러한 식이어야 한다’는 엘리트주의에도 저는 별반 관심 없고 사실은 인민들이 결합하든말든 그들이 (그 개인이) 알아서 책임질 줄 아는 사회를 만들자는 게 보다 더 큰 관심거리이긴 합니다. 이성애자들이 낳았지만 책임지지 못하는 아이들을 키워보겠다는데, 확장된 가족 (extended families)이 등장해 개인이 개인을 지지보족하겠다는데 그 이성애자들과 정부, 사회가 왜 반대하거나 시시콜콜 참견하는지 원 알다가도 모르겠어요. 뭐죠, 그냥 각자 알아서 고군분투하라는 건가요. 뭐, 사실 그게 다스리기엔 쉬울지도 모르죠.
    - 사족: 토론에 불필요한 수사법은 문자로 뭔가를 표현할 때 제 정서feelings를 드러내는 수사법이니 그냥 무시하셔도 상관없어요.
  • 藝術人生 (2013/07/14 13:12) 댓글에 댓글 달기 : 지우기
  • 꽃개님.

    앞서 댓글에서의 '용감'이라던가, 지금 말씀하시는 '안타까움' 등의 표현은 토론에 불필요한 수사로 보입니다.

    모든 토론은 일정한 전제와 범위가 있는데, 그 내부에서 논의를 전개하여 토론을 심화할 수도 있고, 외부에서 전제와 범위를 비판하여 토론의 외연을 확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 비판이나 토론을 해주시면 됩니다.

    '섹슈얼리티'에 관한 자유로운 토론이 무엇인지 어떤 것인지 듣고 싶습니다. 제가 질문해 하는 '욕망의 인간학'의 한계를 넘어서는 측면이 있는 것인지 궁금하기도 하구요.

    그리고 '전제'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명확히 하자면, 저는 그것을 반지성주의/무정부주의/폭력적으로 '인민들이 알아서해야 할 문제'라고 보지 않기 때문에, 그 모종의 '민주/자유'라는 전제에 대해 저 나름의 질문을 던지는 것... 바로 그것이 전제입니다. 그래서 미적/윤리적 가치라는 '자유'의 타자성을 제기해 본 것이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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