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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15

스무살엔 한 해 가는게 20분의 1로 느껴지지만, 
서른 살에는 한 해가 30분의 1로 느껴진다. 
어쩌면 가속도가 붙어서 더 작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고, 
그만큼 더욱 빨리 지나가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나이 서른에 우린... 이라는 노래를 농담처럼 낄낄대며 불렀고,
서른 즈음에... 를 조금은 조숙하게 공감하는 척 들었던 나와 우리 친구들...
이제 마흔도 사유의 범위에 들어온 듯 하다.
친구들이 보고 싶다.


*
내 나이 마흔 살에는/양희은

봄이 지나도 다시 봄~ 
여름 지나도 또 여름~
빨리 어른이 됐으면... 난 바랬지

어린 날에... 
나이 열아홉 그 봄에.. 
세상은 내게 두려움... 
흔들릴때면 손잡아 줄 그 누군가.. 있었으면

서른이 되고 싶었지..정말
날개달고 날고 싶어.. 
이 힘겨운 하루하루를 어떻게 이겨나갈까~

무섭기만 했었지.. 

가을 지나면 어느새
겨울 지나고 다시 가을.. 
날아가만 가는 세월이 야속해 붙잡고 싶었지

내 나이 마흔살에는.. 
다시 서른이 된다면..정말
날개달고 날고싶어

그 빛나는 젊음은 다시 올수가 없다는 것을
이제서야 알겠네
우린 언제나 모든걸... 

떠난뒤에야 아는걸까~
세월의 강 위로 띄워보낸 
내 슬픈 사랑의 내 작은 종이배 하나...

**
그리운 친구에게/양희은

종일 내리던 비가
어느새 그쳐 버린 저녁 무렵엔
나뭇잎 사이 스치면서
지나가는 바람결이 좋은데

너는 지금 어디에
무엇을 생각하며 살고 있는지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 그 얘기를 기억하는지

언제였던가,
새벽이 오는 줄도 모르고 수많은 얘길 했었지
그 땐 그랬지,
우리의 젊은 가슴속에는 수많은 꿈이 있었지
그 꿈에 날개를 달아 한없이 날고 싶었지

다시 어둠이 내리고
이렇게 또 하루가 접혀져 가고
산다는 일은 어디까지 가야지만
끝이 날지 모르고

너는 지금 어디에
무엇을 생각하며 살고 있는지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 그 얘기를 기억하는지

강물은 흐르고
흐르는 강물 따라 세월도 흘러
지나가 버린 바람처럼
우리들의 젊음 또한 가 버리고

너는 지금 어디에
무엇을 생각하며 살고 있는지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 그 얘기를 기억하는지

너는 말했지,
서로가 다른 길을 걸어도 우리는 함께 간다고
지금 이렇게,
혼자서 밤거리를 걸으면 구멍 난 가슴 사이로
신선한 가을바람이 지나는 소리가 들리는데

이제, 여름도 가고
어느새 바람 속엔 가을냄새가
만나고 싶은 누구라도
한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

너는 지금 어디에
무엇을 생각하며 살고 있는지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 그 얘기를 기억하는지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 그 얘기를 기억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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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15

중국에 처음 갔던 게 2003년 2월이었던 것 같다. 국가와 학교에 '학자금 대출'이라는 사기를 치고 대출을 받아 휴학을 해버리고 그 돈을 들고 중국으로 왔었기에 그만큼 각오가 대단했었다. 그런데 그 돈도 부족해서 정식 등록은 못하고 비자와 주거 등의 문제를 처리해주는 사이비 학원에서 수업을 들으며 틈틈히 과외를 받았다. 보통 학교에 정식 수속을 하면 하루에 네 시간 이상 듣는데, 나는 학원에서 겨우 두 시간 수업 듣고 나머지 시간은 혼자 돌아다니며 놀거나 과외를 받거나 했다. 발품 팔며 배운 중국어였다. 그래도 그 때는 젊고 건강해서 잘 먹지 못하고, 조금 피곤해도 충분히 버틸만했다. 물론 그당시 경제위기가 조장했던 비장한 정신상태도 일조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천진 도착해서 말 한마디 제대로 내뱉지 못하던 내가, 중급반 억지로 들어가서 눈치밥 먹던 내가, 세 달 정도 지나서는 작문 칭찬도 자주 받고 말도 꽤 제법 잘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세달 만에 다른 친구들 보다 먼저 고급반으로 월반하기도 했다. 지금도 보관하고 있는 그 당시 작문 연습을 꺼내 보면 흐뭇해지곤 한다. 그때 사귀었던 중국인 여자친구도 기억난다. 반 년이 지나 가을에 복학을 하고 겨울 방학에 다시 단기로 천진을 방문했다가 우연히 설날 전날 밤 술집에서 천진을 떠나며 헤어졌던 그 여자아이를 마주치기도 했다. 천진에 있는 투다리였던 것 같다.

 

그러고 졸업, 취직, 회사생활... 2007년 1월 회사를 그만두고 이러저런 준비 끝에 대만 유학이 확정된 후 6월 신강자치구로 여행을 간다. 북경에 들러 친구와 선배들을 만나기도 했다. 그러고는 곧 7월말 대만으로 왔고, 지금이 2011년이니 중국 가 본지 대략 3년 반의 시간이 된 셈이다. 그 사이 석사도 마치고 박사 코스웍도 끝나간다.

 

오는 4월 상해로 단기 방문을 가게 된다. 게다가 상해는 처음이다. 문득 중국에 갔었던 기억이 떠올라 몇자 적어 보았다.

 

대만에서 중국 비자를 대행해주는 여행사를 찾아보았다.

http://www.sttvisa.com/chinavisa.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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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시좌를 찾아: 피디 변혁 이론의 일반화?

'아시아'의 진보는 어떤 비판적 사상자원을 필요로할까? 사회주의적 민족혁명의 완성이라는 엔엘적 노선에 대한 비판적 입장으로 개진된 피디적 입장은 사실 적어도 아시아적 맥락에서는 예외적인 것이었다. 이는 분단이라는 특수한 조건 속에서 가능했던 논쟁이다. 아래 서관모 교수가 평가했던 것 처럼 이론적인 뒤쳐짐으로 폄하하는 것은 매우 '이론중심','서구중심'적이다. 왜냐하면 엔엘 피디의 이론적 논쟁은 단순히 서구마르크스주의의 선진적 이론에 의해서 재단될 수 없는 한국사회의 맥락에 놓여져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피디적 입장이 물질적 힘을 가질 수 있었던 데에 계급분석에 있어서 차별성도 있다고 보인다. 사실, 중국, 일본, 대만, 필리핀 등의 아시아 지역에서 피디적 입장은 이해될 수 없는 낯선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사회운동의 전망은 여전히 국가/당에 갇혀 있을 수 밖에 없다. 피디의 이론이 답을 제시해주지는 못하더라도 엔엘/피디의 쟁점들은 충분히 일반화되어 토론될 필요가 있다. 이론에 있어서의 주체성은 오히려 이러한 경험을 객관화하고 보다 넓은 맥락에서 일반화하는 작업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지, 보다 선진적인 이론의 수입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는 우리에게 뿐만 아니라, 아시아/세계에 새로운 시좌를 제공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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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말·90년대초 변혁운동의 이론 정세(서관모)

  *.99년 3월 6일 오후 2시 -7시 숭실대 사회봉사관 212호실에서 개최된 '진보정론지 발간을 위한 토론회"에서 발표된 글임.
 
  80년대말·90년대초 변혁운동의 이론 정세
 
  서 관 모
  충북대 교수·사회학
 
  한국전쟁 이후의 남한의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조건 속에서 사회주의의 사상, 이론이 공개적으로 존재하기란 거의 불가능하였다. 80년대 초까지 맑스주의 이론가는 사실상 박현채 하나뿐이었다. 사회주의 혁명이라기보다는 민족해방 혁명을 지향한 좌파 이론가들이 있었지만, 이들은 공개적 활동을 할 수 없었고 80년대에 등장한 남한의 독자적인 사회주의 운동에 거의 영향을 주지 못했다.
  80년대의 남한의 사회주의운동은 그 이론의 면에서 극도의 시대지체를 겪었다. 1968년 동과 서에서 사회주의의 내부적 개혁시도가 실패로 끝난 후 70년대 후반이 되면 자본주의 중심부 나라들에서는 맑스주의의 일반적인 위기가 선언되고 확인된다. 주변부의 사회주의 운동 역시 80년대에 들어서면 거의 완전히 전망을 상실하게 된다. 이러한 가운데 80년대 남한에서는 세계적 추세를 거슬러, 대학생을 포함한 젊은 진보적 인텔리층에 맑스주의, 특히 레닌주의적 맑스주의가 급속히 확산된 것이다(그렇게 된 역사적 배경은 비교적 쉽게 설명될 수 있다). 그러다가 불과 10여년만에 사회주의 운동과 맑스주의는 급속히 조락한다.
 
  80년대의 주요 사건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80년: 5월 서울역 집결 학생들의 '회군', 광주민중항쟁.
 
  82년: 학생운동 내에서 정치노선 논쟁 본격화(경제투쟁-정치투쟁의 관계 문제, 운동주도체 문제 등)
 
  84년: 민주화추진위원회(민추위), "노동자계급 관점에 선" 변혁운동 및 조직 주창. 기관지 {깃발}.
 
  85년: 조합주의적 노동운동의 틀을 깨고 정치투쟁 영역을 개척했다는 구로동맹파업을 계기로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 조직됨. "노동자가 억압받지 않는 사회" 표방. "정치적 집단"을 결성하고 이 정치적 조직이 선도적 정치투쟁을 통해 대중의 의식을 고양시켜 대중을 정치투쟁으로 이끈다는 '선도적 정치투쟁론'과 '대중정치조직(MPO)'론 제시.
 
  84년: 연말부터 CNP논쟁. 민투위, 서노련은 민족민주혁명론(NDR론).
 
  85년: * 박현채(국독자론)와 이대근(주변부자본주의론)의 논쟁.
  *식민지반봉건사회론/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혁명론과 민주기지론에 입각한 연방제통일론 확산. 이 NL(민족해방)노선이 곧 학생운동의 주도세력이 됨.
  * 제헌의회(CA)그룹,『한국사회의 성격과 노동자계급의 역사적 임무}에서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NDR론' 제시. NL/CA 대립구도 형성.
 
  87년: * 87민중항쟁, 노동자대투쟁, 대선.
  *PD(민중민주) 그룹 형성(인민노련도 처음엔 PD 주장). NL/PD 대립구도 형성.
  * 페레스트로이카 파고 밀려오기 시작.
 
  88년: * 연초 종속약화(=자립화)/개량화를 전망하면서 6.29 이후의 정세변화를 자본주의 발전의 고도화에 의해 추동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로의 이행'으로 파악하는 견해 출현(인민노련) → '일반민주주의(GD)적 투쟁', '개혁대안(=민주대안)론'으로 정식화됨. 종속약화론에 '신사고'의 '상호의존성론'이 결합.
  * NL/GD(?)/PD 대립구도 형성됨. 별도로 트로츠키주의적 비판 등장.
  * 전민련 건설 논쟁.
 
  89년: 베를린 장벽붕괴.
 
  90년: 전민련 분열. 전민련내 진보정당 논쟁.
 
  91년: 소련붕괴.
 
  이 가운데 1988년 "본격적 이론지"를 표방하면서 무크 {현실과 과학}이 창간되었다. '현실과 과학' 그룹의 이론작업은 레닌주의적 맑스주의 운동의 정점에 있었다. 윤소영이 이끈 '현실과 과학' 그룹의 노선은 레닌주의의 현대화 및 신식민지적 상황에의 특수적 적용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그룹은 반스탈린주의, 반NL주의, 반개량주의의 3중전선에서 싸웠다. 즉 1975년경까지의 알튀세르/발리바르의 이론에 입각하여 스탈린주의의 이론적 핵심인 사회주의적 생산양식(SMP)론 및 선진사회주의 하에서의 계급투쟁/프롤레타리아독재 종식론을 비판하였으며, 사회주의를 민족주의에 종속시켜 남한 사회혁명을 봉쇄하는 식반론/민주기지론/주체사상과 싸웠고, 국가독점자본주의 '특성론'과 종속적 축적론을 결합한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과 종속파시즘론을 토대로 변혁운동 내의 개량주의적·청산주의적 조류와 투쟁하였다.
  3년간 10집까지 간행된 {현실과 과학}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집(1988) 좌담: 한국사회 민주변혁의 성격―반제반봉건인가 반제반독점인가?
  2집(1988) 특집: 한국사회구성체론의 규명
  식반론과 신식국독자론 일반적 위기와 국독자 논쟁
  식반론과 신식국독자론의 계급분석 신식파시즘의 이론구조
  3집(1989) 특집: 민중민주주의론 연구
  한국사회성격 논쟁에서도 페레스트로이카가 임박하였는가?
  러시아혁명과 레닌의 PDR론 식반론과 '민족해방혁명론'
  4집(1989) 특집: 현단계 변혁이론의 쟁점 ­ NDR론과 PDR론
  5집(1990) 특집: 사회주의 이행론의 제문제
  pt독재론, 국가자본주의론, 신민주주의혁명의 성장전화, 짜골로프논쟁
  6집(1990) 특집: 변혁운동과 페레스트로이카
  기획번역: 80년대 소련 사회주의 정치경제학 동향
  7집(1990) 강령문제, 조합주의적 정투관, 통일론, 민주대안론, 사회주의개혁 문제
  8집(1990) 정세분석과 전술원리, 전선운동, 칠레혁명교훈, 러시아제국주의논쟁
  9집(1991) 개량문제, 통일요구강령, 새로운 당이론, 한국자본주의 연구 쟁점, 맑스 정치경제학 유산의 역사성과 현재성
  10집(1991) 레닌적 당조직론, 노동귀족, 80년대의 한국자본주의, 로블랭 사회화론, 조절이론 비판, 알튀세르-대담, 조사(弔辭).
 
  '현실과 과학' 그룹이 특히 인민노련의 이론 및 정치노선에 대해 가한 비판은 당시 변혁운동의 '좌파' 내에서도 지나친 것, 분파적인 것이 아니냐는 평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처음에 작아 보이는 차이가 나중에 어떻게 확대될 수 있는지를 이후의 사태전개가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91년 6월 계간 창간호인 {현실과 과학} 제10집이 간행될 무렵 '서사연(서울사회과학연구소) 사건'으로 대학원생 6명이 구속되었다. 한편 '현실과 과학' 그룹 내에서 맑스주의의 위기에 대한 인식이 점차 확대되어갔다. 그리하여 {현실과 과학}은 종간되었으며, '서울사회과학연구소'는 93년 1월 재편되고 윤소영이 떠날 때까지 후기 알튀세르와 80년대 이래의 발리바르의 '맑스주의의 전화' 프로젝트의 학습 및 소개에 작업을 집중하였다(이후 '서사연'의 새로운 성원들은 푸코, 들뢰즈, 가타리, 네그리 등의 이론을 수용하면서 좌익이론의 지평을 넓히려는 방향으로 작업해 오고 있다).
  이처럼 레닌주의적 맑스주의적인 이론적 활동을 수행하고자 하였던 '현실과 과학' 그룹의 작업의 한계와 문제점은 너무도 분명하다. 맑스주의의 일반적 위기가 폭발한지 상당한 시간이 경과한 이후에도 그 위기의 본질에 대해 인식하지 못했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 위기의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당 형태의 문제이다. 계급투쟁의 조직형태로서의 당은 필연적으로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부르주아적 분할을 재생산한다. 당은 노동자계급 투쟁의 정세적 조직형태이지 '본질적' 조직형태일 수 없다. 그렇다고 지금 대안이 주어져 있는 것도 아니다. 계급투쟁의 조직형태는 계급투쟁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지 이론이 선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이론정세는 사회주의의 재구성이 현안이 되지도 못할 정도로 어려운 상태에 있다. 맑스주의의 유효한 비판적 재구성은 상당히 긴 시간을 요한다. 이러한 조건하에서 탄생할 진보적 이론지는 다양한 좌파의 연대와 소통의 장이 되어야 한다. 이 잡지는 계급운동 외에 여성운동, 환경운동, 그리고 동성애자 운동, 장애자 운동, 노인권리운동, 반인종주의 운동 등 다양한 소수자운동이 자신을 이론적으로 표현하는 장이 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이 잡지는 이들 운동 일반이 아니라 이들 운동의 래디칼한 좌익적 부분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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