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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타니 고진에 관한 글 몇가지...

[고진주의자가 되다] 에 이어지는 글...

 

'빈집' 프로젝트가 점점 구체화되면서... 계속 생각나는 사람이 바로 가라타니 고진이다.

게스츠하우스의 구상은 여행중에 만나고 신세졌던 많은 사람들과 장소들을 통해 구체화된 것이지만,

기본적인 아이디어는 고진으로부터 나왔다고 할 수 있다.

 

가라타니 고진에 대한 몇가지 글을 보며 다시 고민중...

 

  

박가분,  가라타니 고진 비판 유감 중

 

(현대자동차 노조원이 많이 사는 지역을 중심으로 벌어진 이랜드 홈에버 불매운동에 대해 논하며...)

나는 노조라는 기존의 노동운동 조직을 중심으로 '소비자 운동'을 전개하는 이런 형태에 대해 주목한다. 이런 주체성이야말로 노동자-소비자로서의 프롤레타리아의 정식과 부합하지 않는가?

 ...

문제는 소비자 운동이라는 것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물적토대'가 필요한 법인데, 그러한 토대가 잘 갖추어진 노조중심의 노동운동과 달리 소비자운동에는 그러한 구심점이 결여되어 있다. 그게 소비자 운동의 가장 큰 약점인데, 위의 기사와 같이 결국 소비자와 노동자의 정체성은 다르지 않다는 것에 희망을 걸어봄직하다.

이랜드 불매운동이 의미가 있었다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가라타니 고진의 '소비자 운동'은 특정 상품에 대한 불매가 아니라, 상품 일반에 대한 불매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상품 일반에 대해서 불매하면서도 삶이 가능한 구조를 만드는 것이 고진의 관심이 아니었던가?

 

소비자 운동의 '물적토대'를 노동자 운동의 '물적토대'로 등치시키는 것은 노동운동의 한계에서 빠져나온 순간 다시 뒷문으로 들어가는 셈이다. 위 기사의 불매운동은 우연히 그 지역에 노조원들이 많이 있었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그다지 특별할 것이 없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울산 홈에버에서 소비하는 소비자는 노조원이 아니라 노조원의 아내와 아이들이다. 여전히 노동자는 노동하고 있고, 소비자는 소비하고 있다. 다만 홈에버가 아니라 이마트라는 것이 다를 뿐. 그마저도 잠시겠지만.

 

소비의 공간은 가족이고, 지역이다. 공장과 노조의 재구성이 필요한 만큼, 가족과 지역의 재구성 역시 필요하며, 이것이 없이는 노동자-소비자 어소시에이션은 존재할 수 없다.

박가분, 가라타니 고진의 질 들뢰즈 중 에서 재인용

 

'푸코의 맑스(갈무리,2004)'에 수록된 들뢰즈와 푸코의 대담 중 일부(192p)를 인용.

  "맞습니다. 하나의 이론은 꼭 연장통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의미심장한 것(le signifiant)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그것은 유용해야 하며 기능해야 합니다. 이론은 그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론가 자신부터 시작해 아무도 그것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 이론은 가치가 없거나, 시기에 적절하지 않은 것이지요. 우리는 하나의 이론을 개정하지 않고, 새로운 것을 구축해 냅니다. 우리는 다른 것들을 만들어내는 수 밖에 없습니다. 묘하게도 이러한 생각을 명확히 밝힌 사람은 순수 지식인으로 생각되어 온 프루스트입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지요. '나의 책을 바깥을 향한 하나의 안경으로 생각해 주십시오. 그것이 당신에게 맞지 않으면, 다른 것을 찾으십시오. 필연적으로 전쟁 도구가 될 당신만의 도구를, 스스로 찾으십시오.' 이론은 총체화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다양화의 도구이며, 스스로 다양화합니다. 총체화하는 것은 권력의 본성입니다."

 

윤여일, '몰락 이후' 쉰이 넘어 코뮨주의자 되다  중

 

즉 일하지도 상품을 사지도 말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노동자이자 소비자인 대중이 일하지 않고도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안정망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까닭에 가라타니 고진은 ‘생산자/소비자 협동조합의 연합’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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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소시에이션은 개인들의 자유로운 계약에 기초한다는 점에서 시장경제와 닮아 있지만 잉여가치를 발생시키지 않는다. 또한 공동체의 교환원리인 상호부조와 유사하지만 배타적이지도 구속적이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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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소비자운동은 실상 입장이 바뀐 노동운동이며, 노동운동 역시 소비자운동인 동안 자신의 국지성에서 벗어날 수 있다.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소비과정은 육아, 교육, 여가 등 생활세계 전영역에 걸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라타니 고진은 생산자/소비자의 협동조합을 통해 자본주의 바깥에서 생활의 지평을 만들자고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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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그가 기획한 현실운동은 어떻게 되었을까. 결국 가라타니 고진은 FA(Free Association)라는 또 하나의 조어를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가라타니 고진은 2002년 「FA선언」을 통해 NAM(New Association Movement)을 해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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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기대와 달리 NAM은 그의 유명세를 바탕으로 한 지식인들의 모임이 되었다. 가라타니 고진이 「FA선언」에서 밝힌 해산 이유 역시 NAM 운동을 지속할 운동체가 부재하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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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역시 지금의 가라타니 고진에 대해 호의적이고 싶지 않다. 그의 시도는 자신이 서 있는 장소와의 긴장감을 놓쳤으며, 그의 실패는 그마저도 이론적 완결성을 위해 희생되었다.

 

NAM이 구체적으로 어떤 운동을 했는지도 알려진 바가 별로 없는데... 해산했다 하고, 또  FA가 발표되었다고 하고, 그래서 가라타니 고진이 끝났다느니, 호의적이고 싶지 않다느니... 난리다.

 

그것이 지식인들의 모임이었다면,  가라타니 고진이 말했던 NAM은 시작도 안 한거라고 본다.  FA선언은 보고 싶지만, 아직 못봤는데 FA가 NAM과 특별히 다를 거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고진이 'NAM 운동을 지속할 운동체가 부재하다'는 것이 사태의 정확한 진단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태는 고진의 이론적인 결함과는 무관하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오히려 가라타니 고진의 문제는 조직론이 없었던 것이 아닐까? NAM을 기존의 노동운동 조직이 정책적 전환만으로 추진하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그렇다면 기존의 시민운동 조직이?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이 만나야 한다는 정도의 얘기라면 가라타니 고진이 아니라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얘기다. 공장과 가족이 그대로인 채,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이 그대로인 채, NAM은 가능하지 않다.

 

자본을 위해 노동하지도 말고, 소비하지도 말라는 대전제가 잊혀져서는 곤란한다. 즉 자본을 위한 생산 공간인 공장/농장과 자본을 위한 소비 공간인 가족/지역이 이 대전제 하에 근본적으로 변화하는 것, 그리하여 자본=스테이트=네이션을 넘어선 삶을 구성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면 노동자로서의 소비자운동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디디님의 [고진, 맑스, 공동체 화폐, 가능한 꼬뮤니즘.]  중

가라타니 고진의 말처럼
노동자는 두 가지 관점에서 자본에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일하지 않는 거다.  또 하나는 사지 않는 거다.
하지만 -_- 노동자는 고뇌한다. 딸린 처자식은 어쩌라고!
 
문제는 분명하다.
노동자(=소비자)들이 일하지 않고 사지 않는 것,
즉 자본주의적 관계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비자본주의적으로 일 하거나 살 수 있는 장소가 있어야 한다.
공동체 화폐는 그러한 장소를 만들기 위한 분투다.
"자본과 국가에 내재하면서, 그 원리를 대체하고 넘어서려는 운동.
([지역통화LETS에대하여])”
내재하는 외부-되기.

 

자본주의와 자본주의적 화폐의 가공할 속도는
그러한 외부에 자꾸만 폐쇄의 의지를 부여한다.
그러나 자족적인 공동체가 되는 순간 그건 이미 외부도, 운동도 아니다.
그냥 자본이 허용하는 다양성 중 하나에 불과할 뿐이다.
(수많은 공동체 마을들은 관광지가 되고
마을 바깥에서, 자본의 속도는 점점 빨라진다.)

 

비자본주의적으로 일하거나 살 수 있는 장소...

그것은 무엇보다도 삶의 공간, 주거의 공간이어야 한다.

그리고 주거 공간은 단지 소비의 공간이 아니라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생산의 공간으로서의 면모를 회복해야 한다.

그것은 현재의 전형적인 주거형태인 핵가족 주거, 개인 주거의 형태로서는 불가능하지 않는가?

 

폐쇄의 의지를 근본적으로 배제함으로써 자족적인 공동체가 되지 않는 공동체, 꼬뮨...

누구든지 맞아들여 친구로 만들수 있는 공동체, 언제든지 떠나서 친구를 만들고 또 돌아올 수 있는 공동체.

 

아마도 자본주의가 제공하는 만큼을 소비할 수 있는 비자본주의적인 생산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적 생산의 문제는 무엇보다도 필요 이상으로 너무 많이 생산한다는 것이니까.

반대로 비자본주의인 것은... 조금 생산하되 좋은 것을 잘 생산하는 것이며, 또한 덜 소비하는 것이다.

그리고 굳이 화폐로 구입하지 않더라도, 자본주의로 얻을 수 있는 자원은 꽤 많다. 자본주의 착취하기.

그나저나...  여전히 궁금한 LETS. 시스템도 다양하고, 운영하는 조직도 다양하고...

가라타니 고진이 말하는 몇가지 원칙만 가지고  멋진 LETS의 시스템을 구성하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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