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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미트리 클라이너, <텔레코뮤니스트 선언> 중 벤처 코뮤니즘 관련

정보운동에서 오랜만에 과감하고 적극적이고 에너지 넘치는 제안을 보는 것 같아서 재밌다. 또한 '벤처 코뮤니즘'과 관련된 부분은 정보운동보다도 공동체은행 빈고와 같은 금융운동에 더 큰 상상력을 주는 것 같다. 

책에는 <<공산당 선언>>의 사회변혁을 위한 10가지 불가피한 방책을 리라이팅한 <텔레코뮤니스트 네트워크 선언>이 있는데, 방식이나 내용이 재밌다. 

크리에이티브커먼스라이선스에 대한 비판과 카피'파'레프트 주장도, 어느새 20년전 추억이 되어버린 카피레프트운동을 기억하는 사람들과 같이 보고 싶다. 

 


 

드미트리 클라이너 지음, 권범철 옮김, 갈무리 펴냄.

<<텔레코뮤니스트 선언 - 정보시대 공유지 구축을 위한 제안 : 카피파레프트와 벤처코뮤니즘>>

 

76p

또래 생산자(peer production)들은 자기조직적이고 독립적으로 생산하기 때문에 또래생산자 커뮤니티는 관리 단계의 발달 없이도 성장할 수 있다. 그래서 이들은 생산적 자산의 공통재(the commons)의 공급을 위해 필요한 것 외에 어떤 관리단계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따라서 관리는 공통재의 사용을 원하는 사람들 사이에서의 공통재 배분으로 제한된다. 그래서 이러한 유형의 생산이 자유소프트웨어처럼, 공통재가 비물질 재산인 곳에서 생겨나고 번창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낮은 복제 비용이 배분의 문제를 제거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또래 생산이 물질 재화를 공통재로 포함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독립적인 또래들 사이에서 물질 자산을 배분하는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은 최소한의 관리 책임만 부과한다. 이러한 방식이 벤처 코뮤니즘이다.  

77p

<벤처 코뮤니즘>

벤처 코뮤니즘은 생산적 자산의 공통재를 공유하는 독립 생산자들을 위한 구조를 제공하면서, 자유소프트웨어처럼 비물질적 가치의 창출과 배타적으로 결합된 예전의 생산형식들을 물질 영역으로 확장시킨다. 자유소프트웨어 커뮤니티가 성장하고 확산될 수 있게 해주었던 장치 중 하나는 카피레프트의 창안이었다. 이것은 2차 저작물도 적합한 조건에 따라 사용이 허가되는 한, 카피레프트가 적용된 소프트웨어의 재사용을 허가하는 라이선스 형식이다. 이러한 라이선스에 따라 소프트웨어를 공개함으로써, 그 저작물은 모든 자유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을 위한 집합적 자산이 된다. 

카피레프트의 가장 중요한 혁신은 카피라이트 체계로 하여금 스스로에게 등을 돌리게 한 것이었다. 카피라이트 하에서 주된 통제 수단은 저작물이 공개될 때 적용되는 라이선스이다. 이 라이선스가 설정한 조건에 따라 사람들은 카피라이트가 있는 저작물을 사용하기 위해 허가를 받아야 한다. 카피레프트는 지적 자산에 대한 특권을 강화하는 기존의 장치를 효과적으로 탈취하여, 카피라이트 라이선스가 부여하는 권한을 모든 것에 대한 접근을 보장하기 위해 사용하며 이 자유가 계속 이어지기를 요구한다. 카피레프트는 카피라이트법과 일치하며 그것에 의존한다. 왜냐하면 카피라이트 없이 그리고 카피라이트를 보호하는 제도 없이 카피레프트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벤처 코뮤니즘은 이와 동일한 자유가 물질적인 생산적 자산으로 확장되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기업은 생산적 자산에 대한 통제를 행사하기 위한 주된 수단이다. 그래서 벤처 코뮤니즘은 기업 형식 - 벤처 코뮌 venture commune - 에 기초하고 있다. 물질적 자산을 공유하기 위한 벤처 코뮌의 사용은 특권을 강화하는 기존 장치를 탈취한다. 특권을 강화하는 것 대신 독립 생산자들이 사용할 수 있는 생산적 자산의 공통재를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벤처 코뮌은 법적으로 기업이며 자본가 계급의 벤처 금융 venture capital fund 과 대체로 비슷하다. 그러나 벤처 코뮌은 자신을 혁명적 노동자들의 투쟁을 위한 효율적 수단으로 전환시키는 차별성을 가진다. 벤처 코뮌은 모든 생산적 자산에 대한 소유권을 보유한다. 이 생산적 자산은 집합적이며 독립적인 또래 생산자들의 다양하고 지리적으로 분산된 네트워크가 이용하는 공통재를 구성한다. 벤처 코뮌은 생산을 관리하지 않는다. 또래 생산자들의 커뮤니티는 자신의 필요와 욕망에 따라 생산한다. 코뮌의 역할은 공통재를 관리하는 것, 즉 또래 생산자들이 요구하는 주택이나 장비 같은 자산을 이들이 이용할 수 있게 하는 일 뿐이다. 

벤처 코뮌은 노동자 단체와 개인 노동자들의 연합체이며, 하나의 지분만 가지고 있는 각 구성원이 소유한다. 노동자가 단체나 협동조합에서 일하는 경우, 소유권은 단체나 협동조합을 구성하는 각각의 사람들에 의해 개별적으로 보유된다. 벤처 코뮌의 소유권은 자산이 아니라 노동의 기여로만 획득될 수 있다. 코뮌의 지분은 노동에 의해서만 얻을 수 있다. 토지, 자본, 심지어는 화폐를 기여해도 얻을 수 없으며, 오로지 노동만이 가능하다. 자산은 언제나 모든 코뮌 구성원들이 공통으로 보유하며, 모든 구성원들은 벤처 코뮌을 평등하게 소유한다. 따라서 각 구성원은 절대 자산의 수익에 대한 지분을 불균등하게 축적할 수 없다. 자산은 절대 소수의 손에 집중될 수 없다. 

벤처 코뮌의 기능은 구성원들이 생활과 노동을 위해 필요로 하는 장비나 도구 등의 물질적 자산을 취득하고 그것을 구성원들에게 배분하는 것이다. 코뮌은 구성원이 요청하면 이 자산을 취득한다. 이 자산의 사용에 관심이 있는 구성원들은 코뮌에 임대 계약서를 제출하여 자산의 점유를 위해 자신이 바라는 조건을 제시한다. 코뮌은 그 자산을 취득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모으기 위해 일련의 채권을 발행하고, 이에 따라 그 자산은 채권소유자들에게 담보물이 된다. 임대계약서는 그 자금이 채권 상환에 이용될 수 있다는 보증으로 제공된다.

이 보증이 이행되지 않으면, 그 자산은 매각될 수 있고 그 돈은 채권소유자에게 전달된다. 이 일련의 채권은 공매에 부쳐진다. 채권 매각이 완료되면, 코뮌은 그 자산을 취득하고, 임대계약서에 따라 임차인으로의 점유 이전이 이행된다. 임차인들이 더 이상 그 자산을 필요로 하지 않거나 합의 조건을 지킬 수 없을 때는 언제든지 그 자산은 코뮌에 귀속되며, 그러면 코뮌은 다시 그 자산을 새로운 임대 계약에 입찰하는 구성원들에게 경매로 내놓는다. 더 이상의 수요가 없으면 그 자산은 매각된다. 자산을 취득하기 위해 발행되었던 채권이 모두 상환된 이후, 그 자산은 완전히 코뮌의 소유가 된다. 

그 자산이 벌어들인 잔여 임대소득은 이후 모든 코뮌 구성원들에게 똑같이 배분되어 지불된다. 매각된 자산에서 나온 수익도 비슷하게 분배된다. 자산 임대로 얻는 모든 지대가 코뮌 구성원들에게 균등하게 분배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돌려받게 될 액수와 같은 양을 자산에 대한 지대로 지불하는 구성원들은 집합적으로 소유한 자산의 자기 지분만큼 무료로 사용하게 된다. 이들이 자산에 대한 지대로 지불하는 금액은 코뮌 구성원으로서 돌려받는 지대와 동일하다. 집합적 자산의 1인당 지분을 초과하여 임대하는 구성원들은 더 많이 지불할 것이고, 아마도 그렇게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자산을 생산적 자산으로 사용하고 있고, 따라서 지불할 만큼의 돈을 벌고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1인당 지분보다 적게 사용하는 구성원들은 지대로 지불하는 것보다 더 많은 보상을 받는다. 그들은 이렇게 자산을 비축하지 않은 것에 대한 보상을 받는다. 벤처 코뮌의 주요 활동 - 채권과 임대 계약 관리 - 은 높은 수준의 관리를 하지 않으며, 비물질적 재화의 배분을 관리하는 컴퓨터 네트워크처럼 컴퓨터 자동화에 잘 어울리는 활동이다. 다수의 벤처 코뮌이 존재할 수 있으며, 그 코뮌들은 상호 연관을 맺음에 따라 함께 융합되어 더 크고 더 안정적이며 지속가능한 공유지 기반 생산자들의 커뮤니티를 형성할 수 있다. 

보다 공정한 사회를 만들 수 있는 모든 변화는 노동자가 보유하는 부의 지분을 증가시키는 생산양식의 우선적인 변화에 달려 있다. 생산양식의 변화가 최우선이어야 한다. 자산 소유자들이 자신의 후보, 자신의 로비스트, 자신의 지지자, 그리고 궁극적으로 반-혁명적 폭력 능력을 더욱 발전시키는 일에 자금을 대는 방식으로, 모든 변화를 막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부를 더 많이 가지고 있는 한 이 변화는 정치적으로 이룰 수 없다. 투표나 로비, 혹은 지지나 혁명적 폭력에 의해서는 이룰 수 없다. 자산 소유자들이 생산이 중단된 기간 동안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보다 더 축적된 부를 갖고 있는 한 사회는 파업으로 바뀔 수 없다. 단체 교섭도 전혀 사회를 바꿀 수 없다. 자산 소유자들이 생산물을 소유하고 있는 한 이들이 생산물의 가격을 정하고 그에 따라 모든 임금 상승분은 가격 상승으로 소실되기 때문이다. 

벤처 코뮤니즘은 새로운 종류의 사회에 대한 제안이 아니라, 사회적 투쟁에 참여하기 위한 조직 형태로 이해되어야 한다. 벤처 코뮌은 노동조합, 정당, NGO 그리고 다른 잠재적인 계급투쟁 수단을 대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보완하기 위한, 즉 권력의 경제적 균형을 노동계급 이익의 대표자들 쪽으로 기울이기 위한 것이다. 벤처 코뮤니즘이 없다면, 이러한 다른 조직화된 형식들은 항상 훨씬 더 많은 부를 지닌 적대세력과 대항하여 작동하도록 강제되고, 따라서 끝없는 흡수, 실패, 후퇴를 겪을 수 밖에 없다. 유일한 길은 우리의 노동을 비생산자들이 소유한 자산에 투여하는 것을 중단하고 대신 생산적 자산의 공통재를 형성하는 것이다. 

벤처 코뮤니즘은 우리 자신의 생산 과정을 통제하고, 우리 노동의 생산물 전체를 보유하며, 우리 자신의 자본을 형성하고, 우리가 부를 집합적으로 충분히 축적해서, 착취를 옹호하는 이들보다 훨씬 더 큰 사회적 영향력을 획득하게 될 때까지 우리 자신의 자본을 확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경제적 균형은 벤처 코뮤니즘의 평범한 목적보다 훨씬 큰 변화를 가능하게 한다. 진정으로 자유로운 사회에서는 카피레프트 혹은 벤처 코뮤니즘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계급 없는 사회, 즉 평등한 사회의 건설이라는 역사적 소명의 실현을 위해 노동자들을 단결시킬 수 있는 실천수단일 뿐이다. 

전 세계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잃을 것은 사슬뿐이요, 얻을 것은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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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K 깁슨-그레엄, 금융산업을 다르게 보기

J.K 깁슨-그레엄, <그따위 자본주의는 벌써 끝났다> 중

 

90p

금융부문은 종종 "자본주의의 화려한 만개"라고 표현되곤 한다. 그러나 이 산업이 반드시 자본주의적이라고만 말할 수 있을까? 만일 우리가 경제적 차이를 이론화하려는 마음으로 그 생산관계와 수입원, 대출과 투자의 최종목적지 등을 검토해본다면, 이 금융산업에서 무엇이 필연적으로 자본주의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우선 생산관계와 관련하여 이를 살펴보자. 어떤 금융회사는 고용인의 노동으로부터 유래하는 잉여가치를 착취하는 자본주의적 지점이지만, 어떤 회사는 독립적 상품생산의 현장으로서 비자본주의적 성격을 가질 수 있다. 가령 개인투자관리사와 같은 자영업자를 생각해보라. 그들은 자신의 잉여노동을 스스로 전유한다. 금융산업 안에 있는 또 다른 비자본주의적 기업들은 잉여노동을 집단적으로 생산하고 전유하는 현장일 수도 있다.

생산관계에서의 이러한 차이들을 고려한다면, 금융산업을 자본주의적이라고 부를 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분명치 않다. 분명한 것은 이러한 호명방식이 다원성과 차이를 부각시키기보다 모호하게 만들 뿐이라는 점이다. 나아가, 금융산업에서 생겨나는 수익 역시 완전히 이종적인 원천들로부터 말미암는다고 볼 수 있다. (어떤 것은 자본주의적 기업에서 이자 지급의 형태로 배당한 잉여가치의 분배이다. 어떤 것은 독립 생산자나 노예제의 현장, 집단적 혹은 공동체적 잉여 전유의 현장 같은 비자본주의적 기업들로부터 유래한다. 또 어떤 것은 소비자 이자 지불, 즉 레스닉과 울프 식으로 말해 비계급적 수입원이기 대문에 자본주의적이지도 비자본주의적이지도 않다.) 마지막으로 금융산업이 수행하는 투자와 대출활동 역시 자본주의 재생산이라는 지상명령에 의해 완전히 규율될 수 없는 일종의 '제멋대로인 생성의 힘'으로 이해될 수 있다. 

실제로, 금융산업이 비자본주의적 계급관계 발전에 전례 없는 기회를 제공해 왔음을 보여주는 예를 드는 건 어렵지 않다. 가령 '소비자 신용' 부문이 크게 성장하면서 - 소규모 자본주의적 기업들뿐 아니라 [워커즈 콜렉티브와 같은] 조합기업이나 자영업자들에 이르는 - 소기업들이 신용 구매를 통해 장비와 물자 등 필요한 투입물을 얻기가 훨씬 쉬워졌다. 자유로운 사업대출 분야의 성장이 많은 비자본주의적 기업의 성공과 활력에, 그리고 특히 자영업 활동의 신장에 기여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이제 우리가 금융산업 자체를 전적으로 자본주의적인 것으로 이론화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자기모사적이기보다 자기모순적인 과정 속에 존재하는 것으로 표현될 수 있다. 금융산업이 자본주의뿐 아니라 비자본주의적 활동 및 관계들의 존재 조건을 이룬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이 (악마 자본주주의의) 금융산업의 풍성한 치마폭 아래로 경제적 다양성이 거대한 개구리알 더미처럼 뭉게뭉게 거품을 이루며 흘러나온다. 

 

233p

가령 자본주의를 단단하고 무엇이든 감싸버리며 침투력 있고 반드시 넘치는 힘을 지는 게 아니라, 열려 있는 것, 침투 가능한 것, [틈이 있어 내부의 것이] 새어나오거나 유출될 수 있는 것으로 바라보는 방식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금융자본(보다 직접적으로는 돈)은 으레 경제 시스템의 생명의 핏줄이라고, 즉 자유로운 순환을 통해 자본주의의 신체의 건강과 성장을 보장하는 것으로 재현되어 왔다. 하지만 금융자본(혹은 돈)을 자본주의의 혈액이 아니라 정액이라 상상해보면 어떨까? 정액의 분출이 주기적으로 끊어지는 것처럼, 통제불능 상태의 자본의 분출은 아무데로나 튀어나가는 것이어서, 가끔은 자기파괴로 치닫기도 한다. 1987년 10월은 그런 지나친 몸의 스펙터클이었으며, 지구 전역의 주식시장을 얼룩지게 만든 몽정이었다. 

 

237p

이처럼 "차마 생각해볼 수 없었던" 경제의 모습을, 즉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들이 범지구경제에 침투할 수 있다는 생각을 우리는 어떻게 끌어낼 수 있을까? 어쩌면 배어나옴의 주체이면서 동시에 자본의 정체성을 확인시키는 주체이기도 한 금융자본 자체가 보다 많은 결과를 자아낼지도 모른다. 어쩌면 신용의 확산과 금융시장의 탈규제 덕분에 자본주의적 계급관계뿐만 아니라 비자본주의적 계급관계들 또한 더 자라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소비자신용의 엄청난 신장(극대화된 한도를 자랑하는 신용카드 금융, 가계담보 대출, 기타 '소비자'에게 거의 강제 부과되고 있는 다른 여러 수단들)은 소비 문화를 조장하고 그에 따른 개인 채무의 증가를 낳는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자영업과 가내 공업의 성장을 고려할 때 - 이 중 일부는 자본주의적 기업의 규모축소와 군살빼기의 결과로 볼 수 있다 - 소비자신용처럼 보이는 것의 상당수가 실은 생산자신용이다(이기도 하다)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즉 소비자신용 대출금은 생산수단(컴퓨터를 비롯한 기타 사무비품을 포함)과 자영업자의 생산과정에 필요한 기타 투입물을 구매하는 데 사용된다. 역사적으로 지방과 지역 은행 같은 전통적인 금융기관에서 자영업자들이 대출을 받기란 너무도 어려웠다. 하지만 새로운 국제 신용 시장의 성장과 더불어 소비자신용 대출을 즉각적이고 손쉬워졌다. 이러한 변화는 곧 소규모 사업의 증가에 기여했는데, 소규모 사업장은 개인이나 공동의 잉여 전유와 같은 비자본주의적 계급과정(물론 소규모 자본주의 기업도 신용자원을 공급받을 수 있었다)이 이루어지는 장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신체로 진입하는 '통로'가 금융 부문에서 열린 것이다. 이 통로는 자본의 출입을 허용하지만 동시에 비자본주의의 틈입도 가능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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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 <은행의 국유화> 등

<임박한 파국, 어떻게 그것과 싸울 것인가>, <<지젝이 만난 레닌>> 중

1917년 9월 10~14일

 

 

114p

실제로 모든 연설, 온갖 경향의 신문에 실리는 모든 기사, 회의나 기관에서 통과시키는 모든 결의안은 파국이나 기근과 싸우고 그것을 피하는 주요하고 기본적인 조치가 무엇인지 아주 분명하고 명백하게 인식하고 있다. 그 조치란 국가의 통제, 감독, 회계, 규제다. 노동력을 생산에 적절하게 배분하고 물자를 배분하는 제도를 도입하는 것이며, 인민의 힘을 절약하고, 모든 쓸데 없는 노력을 없애고, 노력을 아끼는 것이다. 통제,감독, 회계는 파국이나 기근과 싸우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이 점은 논란의 여지가 없으며, 보편적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지주와 자본가의 최고 권력을 훼손당할까봐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모든 종류의 통제, 감독, 회계에 대한, 그리고 그것을 제도화하려는 국가의 모든 시도에 대한 전반적이고 체계적이고 집요한 사보타주가 벌어지고 있다. 이런 사보타주가 어디에서 오는지, 어떤 방법으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순진한 것이다. 

만일 우리의 국가가 실무적이고 진지한 통제 이행을 진정으로 원한다면, 통제 기구들이 자본가들의 노예가 되어 "완전한 무기력"에 빠지는 일을 피하려면, 국가가 할 일이란 이미 알려져 있고 과거에도 사용되었던 그 풍부한 통제 조치들을 자유롭게 이용하는 것뿐이다. 유일한 장애는 그런 통제가 자본가들의 막대한 이윤의 기반을 잠식했다는 것인데, 이 점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대단히 중요한 이 문제(본질적으로 러시아를 전쟁과 기근으로부터 구하고자 하는 진정으로 혁명적인 모든 정부의 강령 문제라 할 수 있다.)를 더 분명하게 설명하기 위해, 주요한 통제 조치들을 열거하며 하나하나 검토해보겠다. 

 

1. 모든 은행들을 단일 은행으로 통합하여 국가가 그 기능을 통제하거나 은행을 국유화한다. 

2. 신디케이트, 즉 자본가의 거대 독점 연합체(설탕, 석유, 석탄, 철강 등의 신디케이트)를 국유화한다. 

3. 영업 비밀을 폐지한다. 

4. 기업가, 상인, 고용주 전체를 강제로 신디케이트로 만든다(즉 강제로 연합체로 통합한다.)

5. 주민을 소비조합으로 강제로 조직하거나 그런 조직을 장려하며, 그 조직을 통제한다. 

 

 

은행의 국유화

알다시피 은행은 현대 경제 생활의 중심이며, 자본주의 경제 체제 전체의 주요한 신경중추다. "경제 생활 규제"를 이야기하면서 은행 국유화 문제를 피한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무지를 드러내는 것이거나, 아니면 화려한 말과 과장된 공약으로 - 그 약속을 이행하지 않겠다는 분명한 의도로 - "보통 사람들"을 속이는 것이다. 

은행 기능의 통제와 규제 없이 곡물의 운송이나 물자 전반의 생산과 분배를 통제하고 규제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몇 코페이카는 빼앗아 가려 하면서 수백만 루블에는 눈을 감는 것과 마찬가지다. 요즘 은행은 거래(곡물과 그밖의 다른 모든 것)나 산업과 밀접하고 깊이 있게 결합되어 있어, 은행에 "손을 대지" 않고는 어떠한 가치 있는 일도, "혁명적이고 민주적인" 일도 이룰 수 없다. 

하지만 국가가 은행에 "손을 대는" 것은 아주 어렵고 복잡한 일이 아닐까? 자본가와 그 옹호자들은 보통 이런 말로 속물을 겁주려 하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들에게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어떤 "소유자"에게서도 단 1코페이카도 빼앗을 필요가 없는 은행 국유화는 기술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전혀 어려움이 없다. 오로지 시답잖은 한 줌의 부자들의 더러운 탐욕 때문에 지연되고 있을 뿐이다. 은행 국유화는 사유재산 몰수와 자주 혼동되는데, 이렇게 널리 퍼진 혼란의 책임은 공중을 속이는 데서 이익을 얻는 부르주아 언론에 있다. 

은행이 운용하는 또 은행에 집중된 자본의 소유권은 주식, 채권, 어음, 영수증 따위로 불리는 인쇄되거나 기록된 증서로 공인된다. 은행이 국유화될 경우, 즉 모든 은행들이 하나의 국가 은행으로 통합될 경우에도 이런 증서들은 단 하나도 무효가 되거나 변경되지 않을 것이다. 저축 계좌에 15루블이 있는 사람이라면 은행 국유화 뒤에도 계속 15루블을 갖게 될 것이다. 1500만 루블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은행 국유화 뒤에도 주식, 채권, 어음, 하물증권 등의 형태로 계속 15000만 루블을 가질 것이다. 

그렇다면 은행을 국유화하는 의미는 무엇인가?

현재 개별 은행과 그 업무를 어떤 식으로든 통제하는 것은 효과를 거둘 수 없다(영업 비밀 등을 폐지한다 해도). 대차대조표를 작성하고, 유령회사와 자회사를 설립하고, 얼굴뿐인 대표를 내세우는 일에 이용되는 매우 복잡하게 뒤얽힌 교활한 속임수들을 추적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오직 모든 은행을 하나로 통합할 때에만 - 그 자체로는 소유권과 관련하여 아무런 변화가 생기지 않으며, 되풀이하지만 소유자에게서 단 1코페이카도 빼앗지 않는다. - 진정한 통제가 가능해질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앞에 언급한 다른 조치들이 모두 이행되어야 한다는 단서가 붙는다. 오직 은행을 국유화할 때에만 국가는 어디에서 어떻게, 언제 수백만 루블, 수십억 루블이 흘러가는지 알 수 있는 위치에 올라설 수 있다. 오직 은행, 자본주의적 유통의 중심이며, 그 축이자 주요 매터니즘인 은행을 통제할 때에만, 모든 경제 생활, 주요 물자의 생산과 분배에 대한 허구가 아닌 실제 통제를 조직하고, "경제 생활 규제" - 이것은 은행 국유화 외의 다른 방법으로는 보통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 고안된, 장관의 공허한 발언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 를 조직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은행 업무가 단일한 국가 은행에 집중되어 있다는 조건에서 그 업무를 통제하는 것이 가능할 때에만, 쉽게 실행에 옮길 수 있는 다른 조치들을 시행하여 소득세를 효과적으로 징수하는 일이 가능하며, 이것이 재산과 소득 은폐를 막아준다. 현재 소득세는 아주 많은 부분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은행 국유화는 선포하기만 하면, 임직원들 스스로 이행할 수 있다. 국가에서 특별한 기구, 특별한 예비단계를 준비할 필요도 없다. 단 한번의 포고로, "일격에" 이행할 수 있는 조치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어음, 주식, 채권 따위를 이용하는 단계로 발전하면서 은행 국유화는 자본주의 자체에 의해 경제적으로 실행 가능한 일이 되었다. 필요한 일은 오직 회계를 통일하는 것뿐이다. 만일 혁명적-민주주의적 정부가 모든 은행을 즉시 하나의 국가은행으로 통합할 목적으로 즉각, 전보로, 모든 도시에서 임직원 회의를 소집하고, 나아가 각 지역과 전국 규모의 대회를 소집하기로 결정한다면, 이 개혁은 몇 주면 이루어 질 수 있다. 물론 경영자와 은행 고위 간부들은 저항하고, 국가를 속이려 하고, 일을 지연시키려 할 것이다. 이 사람들은 보수 높은 자리와 이익이 많은 부정한 업무를 수행할 기회를 잃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그러나 은행들을 통합하는 데 기술적인 어려움은 전혀 없다. 만일 국가 권력이 말뿐이 아니라 진짜로 혁명적이라면(즉 타성과 판에 박힌 방식을 제거하는 데 두려움이 없다면), 말뿐이 아니라 진짜로 민주적이라면(즉 한 줌의 부자가 아니라 인민 다수의 이익을 위해 행동한다면), 경영자, 이사, 대주주의 모든 지연 행위, 문서나 회계의 은폐 기도를 재산 몰수와 징역형으로 처벌하겠다고 선포하는 것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예를 들어 가난한 피고용자들을 별도로 조직하여 부자들의 부정 행위나 지연 행위를 찾아내게 하고 포상한다면 은행 국유화는 아주 순조롭고 빠르게 이루어질 것이다. 

은행 국유화로 인민 전체 - 특별히 노동자만이 아니라(사실 노동자들은 은행과 거의 관계가 없다.) 농민 대중과 소기업가까지 - 가 얻는 이익은 엄청나다. 노동이 엄청나게 절약될 것이며, 국가가 기존 은행 직원들을 모두 유지한다고 가정할 경우, 국유화는 은행 이용의 보편화, 지점의 확대, 은행 업무의 손쉬운 이용 등으로 나아가는 매우 중요한 조치가 될 것이다. 소(小)소유자, 농민이 쉬운조건으로 신용 거래를 이용하는 일이 크게 늘어날 것이다. 국가의 입장에서 보자면 처음으로 공개된 상태에서 주요한 화폐 업무를 검토할 수 있을 것이며, 그런 다음에는 이 업무들을 통제하고, 그 다음에는 경제 생활을 규제하고, 마지막으로 자본가 신사들에게 "용역"을 대가로 천정부지의 "수수료"를 지불하는 일 없이 주요한 국가 거래에 필요한 수백만, 수십억(루블)을 얻게 될 것이다. 바로 이것이 모든 자본가들, 모든 부르주아 교수들, 모든 부르주아, 나아가 그들에게 봉사하는 모든 플레하노프, 포트레소프 같은 자들이 은행 국유화에 대항하여 필사적으로 싸우고, 이런 아주 쉽고 아주 다급한 조치가 채택되는 것을 막으려고 수많은 핑계를 만들어내는 이유, 유일한 이유다. 사실 국가의 "방위"라는 관점에서 보아도, 즉 군사적 관점에서 보아도, 이 조치는 엄청나게 이익이며, 나라의 "군사력" 또한 크게 높여줄 것이다. 

누군가 다음과 같은 이의를 제기할지도 모르겠다. 독일과 미합중국 같은 선진국은 은행 국유화를 고려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그렇게 훌륭하게 "경제 생활을 규제"하는가?

답을 하자면, 이 두 국가 모두 단순히 자본주의 국가일 뿐 아니라, 동시에 제국주의 국가 - 물론 하나는 군주국이고 또 하나는 공화국이지만 - 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반동적이고 관료적인 방법으로 그들에게 필요한 개혁을 이행한다. 반면 우리는 지금 혁명적이고 민주적인 방법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런 "작은 차이"가 아주 중요하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이런 차이를 생각하는 것이 "관례가 아니다." "혁명적 민주주의"라는 말은 우리에게(특히 사회주의자혁명가당과 멘셰비키에게) 거의 관습적인 표현이 되어 버렸다. 신을 믿을 만큼 무지하지 않은 사람들도 "하느님 감사합니다."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또는 <드예>이나, <예딘스트보>의 편집자들에게도 "명예로운 시민"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런 신문들은 자본가들이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창간하고 유지해 왔으며, 따라서 이런 신문에 기고하는 사이비 사회주의자들에게 "명예로운" 점이 거의 없다는 것은 모두 짐작하지 않는가?

"혁명적 민주주의"라는 표현을 판에 박힌 의례적 표현으로, 관습적인 통칭으로 사용하지 않고, 그 의미를 깊이 생각해본다면, 민주주의자라는 것은 소수가 아니라 인민 다수의 이익을 현실적으로 계산하는 사람이라는 뜻이고, 혁명가는 낡고 해로운 모든 것을 가장 단호하고 무자비하게 파괴하는 사람이라는 뜻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아는 한 미국에서도 독일에서도 어떤 정부나 지배 계급이 "혁명적 민주주의자"라는 이름을 사용하겠다고 한 적이 없다. 그러나 우리의 사회주의혁명가당과 멘셰비키는 그 이름을 사용했다(그래서 그 이름을 악용했다). 

독일에는 전국적으로 중요한 아주 큰 은행이 네 개 뿐이다. 미국에는 둘 뿐이다. 따라서 그런 은행의 금융 거물이 혁명적인 방식이 아니라 반동적인 방식으로, 민주적인 방식이 아니라 관료적인 방식으로 사적으로 은밀하게 결합하여 정부관리들에게 뇌물을 주고(이것은 미국과 독일 양쪽에서 일반적인 규칙이다) 은행의 사적 성격을 유지하여, 업무의 비밀을 보존하고, 국가로부터 엄청난 "초과 이윤"을 짜내고, 금융 부정 행위를 일삼고 있다. 

미국과 독일 모두 노동자들에게는(또 부분적으로는 농민에게도) 전시 노역 상황을 만들고 은행가와 자본가들에게는 낙원을 만들어주는 방식으로 "경제 생활을 규제한다." 그들의 규제란 노동자들을 기아선상에 몰릴 때까지 "쥐어짜는" 것이며, 반면 자본가들에게는 전쟁 전보다 높은 이익을 보장해주는(은밀하게, 반동적이고 관려적인 방식으로) 것이다. 

물론 공화제적이고 제국주의적인 러시아에서도 그런 경로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사실 밀류코프나 싱가료프 같은 자들만이 아니라, 케렌스키도 테렌센코, 네크라소프, 베르나츠키, 프로코비치 일파와 협력하여 그 경로를 따르고 있다. 그들은 반동적이고 관료적인 방식으로 은행의 "불가침성"과 그들이 막대한 이익을 거둘 신성한 권리 역시 옹호하고있다. 따라서 진실을 말하는 것이 낫겠다. 즉 공화제 러시아에서 그들은 반동적이고 관려적인 방식으로 경제 생활을 규제하고 싶어하지만, "소비에트"의 존재 때문에그렇게 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종종" 알게 된다. 그래서 첫 번째 코르닐로프는 소비에트를 전혀 해체하지 못했지만, 두 번째 코르닐로프는 해체하려고 시도할 것이다. 

이것이 진실이다.이런 단순한 - 비록 씁쓸하기는 하지만 - 진실이 "우리의", "위대한", "혁명적" 민주주의에 관한 달콤한 거짓말보다 인민의 계몽에 더 유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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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의 국유화는 동시에 보험업의 국유화 - 즉 모든 보험회사를 하나로 통합하고, 그 업무를 중앙 집중화하고, 국가가 그것을 통제하는 것 - 도 매우 편하게 해 준다. 이 경우에도 보험회사 직원들의 총회를 통해 즉시 큰 노력을 들이지 않고 통합을 이룰 수 있다. 단 혁명적-민주주의적 정부가 보험업 국유화 조치를 선포하고, 임원과 대주주에게 조금도 지체 없이 통합을 이루도록 명령하고, 그들 모두에게 엄격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자본가들은 보험 사업에 수억 루블을 투자했다. 그러나 일은 모두 직원이 한다. 이 사업의 통합으로 보험료는 낮아지고 피보험자는 많은 편의를 얻을 것이다. 게다가 노력이나 자금을 더 지출하지 않고도 피보험자 수는 늘어날 것이다. 오로지 보수가 좋은 일자리를 쥐고 있는 한 줌밖에 안되는 사람들의 타성, 판에 박힌 태도, 이익 때문에 이 개혁이 늦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개혁은 무엇보다도 전국의 노동력을 절약하고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경제 생활을 규제"할 매우 중요한 기회를 많이 만들어내 나라의 방위력을 높일 것이다. 

 

144p

나라가 헤아릴 수 없는 재난으로 고생하는 시기에 임박한 파국과 싸우려면 혁명적이고 민주적인 정책은 식량 배급표에 한정되어서는 안된다. 첫째로 전 주민을 강제로 소비조합으로 조직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소비 통제가 완전하게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부자들에게 노동 의무를 부과하여, 무보수로 소비조합을 위하여 서기 일 등을 하게 해야 한다. 셋째로 말 그대로 모든 소비재를 주민에게 균등하게 분배해야 한다. 그래야 전쟁의 짐을 공평하게 나누어 질 수 있다. 넷째로 주민 가운데 가장 가난한 계급들이 부자의 소비를 규제하도록 통제를 조직해야 한다. 

 

154p

우리는 재산의 "신성 불가침"에 관한 부르주아적이고 반민주적인 습관이나 편견에 우리가 얼마나 철저하게 사로잡혀 있는지 보통 의식조차 못하고 살아간다. 엔지니어나 은행가가 노동자의 수입과 지출, 임금과 노동생산성에 관한 정보를 공개할 때, 이것은 절대적으로 합법적이고 공정한 일로 여긴다. 아무도 이것을 노동자의 "사생활" 침해, 엔지니어의 "염탐이나 밀고"라고 보지 않는다. 부르주아 사회는 임금 노동자의 노동이나 소득을 자신들의 공개된 장부로 간주한다. 모든 부르주아가 어떤 순간에라도 임금 노동자의 노동이나 소득을 살펴 볼 자격이 있으며, 어느 순간에라도 노동자의 "사치스러운 생활"이나 그들의 눈에 "게으름"으로 비치는 것을 폭로할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그 반대 방향의 통제는 어떤가? 민주적 국가가 고용인, 사무원, 집안 하인들의 조합을 불러 자본가들의 수입과 지출을 확인하고, 이와 관련된 정보를 공표하고, 소득 은닉과 싸우는 것을 도와 달라고 요청하면 어떨까? 

부르주아는 그들이 "염탐"을 하고 "밀고"를 한다고 얼마나 시끄럽게 떠들어댈까! "주인"이 하인을 통제하고, 자본가가 노동자를 통제하면, 이것은 당연한 일로 여긴다. 일하고 착취당하는 인민의 사생활은 신성 불가침으로 여기지 않는다. 부르주아는 모든 "임금 노예"에게 책임을 묻고, 언제라도 그의 수입과 지출을 공개할 권리가 있다.그러나 억압당하는 사람이 억압하는 사람을 통제하려 하면, 억압하는 사람의 수입과 지출을 공개하려 하면, 전시에도 사치스럽게 산다는 사실 - 그의 사치스러운 생활 때문에 바로 전선의 군대가 굶어 죽는 것인데 - 을 폭로하려 하면, 이럴 수가, 부르주아는 "염탐"과 "밀고"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결국 핵심은 똑같다. 부르주아의 통치는 진정으로 혁명적인 진정한 민주주의와 화해할 수 없다. 사회주의를 향해 전진하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20세기에 자본주의 국가에서 우리는 혁명적 민주주의자가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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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댕의 파밀리스테르

푸리에가 구상했지만 실현할 수 없었던 팔랑스테르. 고댕이 팔랑스테를 변형시켜 현실에 구현해낸 파밀리스테르. 2000여명이 살 수 있는 이 건물은 현재까지도 사용되고 있고, 협회는 1968년 해산할때까지 100여년을 넘게 지속되었다. 당연히 여러 한계들이 있었겠지만, 유토피아를 현실에서 실현하려했던 시도는 충분히 주목받을 가치가 있지않을까? 

 

파밀리스테르는 결국 공장과 공동주택을 중심으로한 협동조합 복합체라고 할 수 있다. 건축적 결과물은 공동주택으로서의 '사회궁전'이지만, 고댕이 파밀리스테르를 건축할 수 있었던 자금과 주민들이 살아갈 수 있는 돈을 벌 수 있었던 것은 노동자들의 자주관리 공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고댕이 처음 만든 공장은 화덕과 난로를 만드는 공장이었다는데, 몬드라곤의 시작도 난로공장이었다는 게 재밌다. ㅋ 우리도 공장이 필요하다. ㅋ 고댕의 공장은 1840년에 두 명으로 시작해서 1880년에는 1500명을 고용하는 당대 관련 분야에서 최고의 공장이되었다고 한다. (브랜드가 고댕인데 고댕 스토브 Godin stove는 여전히 좋은 기능 못지 않은 아름다움으로 여전히 이베이 등에서 거래되고 있다.)

 

상호부조가 중요한 것은 당연했을텐데, 그 재원을 얻는 방법이 재밌다. 상속 재산의 전액을 환수하는 것이다. 자식들의 육아와 교육 주거 등이 해결되는 파밀리스테르가 있다면 상속 재산을 전액 공동체에게 남기는 것이 꼭 무리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고댕 자신도 자신의 유산을 전액 파밀리스테르에 남겼다고 한다. 그 금액이 350만 프랑인데, 대략 지금 가치로 바꿔보면 약 170억~350억원 정도다. 부자는 엄청 부자였나보다. 푸리에가 자신의 팔랑스테르에 돈을 대줄 독지가를 매주 평생 기다리다 죽었던 걸 생각하면 안습. ㅎㅎ 고댕의 자손들은 그 뒤에 어떻게 살았는지, 또 엄청난 금액의 유산을 후대의 파밀리스테르 사람들은 어떻게 관리했지가 참 궁금하다. ㅎ

 

고댕은 새로운 사회가 개개인의 지적 도덕적 해방에 달려있다고 하며 교육의 역할을 강조하는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택이라고 단언한다. "삶의 환경에 대한 새로운 건축적 적용이 없이는 진정한 해방이 없다." "주거환경의 개선은 곧 사회의 발전과 진보를 의미한다." 그럴듯 하다! 결국 잘 산다는 것은 좋은 집에서 좋은 사람들과 함께 잘 산다는 것이지 않나? '좋은 집'을 가격으로 따지면 비싼 집에 산다는 것은 개인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공했다는 것 외에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쫓겨나지 않고 불안하지 않고 좋은 식구와 이웃들이 있고 좋은 일거리와 놀거리가 있고 늙거나 아플때 걱정이 없는 집이 좋은 집이라고 한다면 그런 집을 만드는 것은 곳 진보와 해방이지 않을까?

 

고댕은 자본과 노동의 협력과 화해를 시도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유토피아적이라는 비판을 들을 수도 있을 것이다. 자본과 노동의 화해는 불가능하니까. 하지만 자본주의 내부에서 그 외부로 나아가려는 시도들은 결국 자본과 노동 사이의 다양한 방식의 화해를 시도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고댕이 개량적인 것 같지만, 살아 있을 때는 개인 소유를 존중하지만, 죽으면 유산 전액을 환수하는 걸 보면 또 그렇지도 않은 듯.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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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유기, <고댕의 파밀리스테르 이상적 공동체 - 유토피아 사회주의와 사회경제학의 결합> 중 발췌

 

푸리에의 개념들을 바탕으로 문명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한 고댕의 사상은 다섯가지 핵심적 축으로 구성된다. 

첫 번째 핵심은 도덕과 노동의 강조이다. 근대 산업 사회는 거대한 부를 창출하여 “모든 이의 필요를 만족시킬 가능성을 열게” 하지만 대다수가 필요를 충족시키지 못하는데 이러한 “불행의 근본적 원인은 개개인이 자신을 위해서만 몰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기주의 대신에 우애를 목표로 하는 도덕적 기초의 정립이 필요하다. 이기적인 개개인이 조화로운 삶을 유지하고 사회를 발전시키고 사회적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상호 연결된 권리, 의무, 정의라는 세 가지 개념을 수용할 도덕적 고양이 필요하다. “의무가 없이는 권리가 없고 권리가 없이는 의무가 없다. 권리와 의무는 정의에 종속되며 권리와 의무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게 하는 것이 정의이다.” 의무, 권리, 정의를 인식할 도덕적 고양의 근원적 수단은 노동이다. “노동은 생산, 소비, 분배의 원칙”이며 “삶을 보존하고 발전시키고 유지하는 만드는 법칙들에 인간을 복종하게 하는 도덕적 가치들 가운데 첫 번째 가치이다.” 노동은 찬양되어지고 노동을 통해 노동자는 사회에서 진정한 자신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도덕을 고양시켜주는 것으로 종교의 기능을 인정하지만 기존의 종교가 비실증적인 신에게 인간을 예속시키는 억압적 기제로 작용하므로 노동을 숭배하는 새로운 세속적 믿음을 강조한다.

 

두 번째 핵심은 협동조합이나 협회(association)를 강조하는 것인데 이를 통해 자본과 노동의 결합, 그리고 분배의 정의(justice distributive)를 추구해야 한다고 인식한다. 고댕에 의하면 자유주의 경제학은 자본과 노동의 대립과 갈등을 유발하고, 노동자들을 빈곤에 빠뜨리고, 노동을 자본에 예속시킨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본이 노동에 봉사하도록 해야 한다. “자본은 과거 노동의 결과”이므로 사적 소유는 보장된다. 하지만 노동에 의해 형성된 사적 소유라는 개인의 권리 옆에, 자연에 의해 형성된 권리, 즉 모두의 이익에 부응하는 자연적 정의 개념에 의한 권리가 존재한다. 자본은 과거 노동의 성과물이므로 현재의 노동과 쉽게 결합할 수 있으며, 분배의 정의 실현을 통해 사적 권리와 자연적 정의가 조화를 이룬다. 자본과 노동의 조화를 위해 협동조합이나 협회의 구성이 필요하며, 이들 조직체는 자본과 노동 모두에게 유용성을 제공한다. 고댕에게 협동조합은 “생산하고 구입하고 판매하고 소비하기를 원하는 인간들이 지식과 의지, 힘, 이해관계 등의 결합을 통해 공통의 유용성을 추구할 목적으로 기획하는, 인간들 사이의 합의(entente)이다.” 협회는 경제적 협동조합의 원리가 보다 사회적으로 확대되는 것이다. 협동조합과 협회를 통해 “더욱 조직화된 산업은 노동자에게 그들이 행한 노동의 몫에 기인하는 부가가치의 결과물을 보장할 것이고, 이 때에 정의가 자유의 동반자가 된다.” 덧붙여 분배 문제를 넘어서 각종 사회 문제에 대한 사회적 예방이 필수적임을 주장한다. 이런 생각은 사회적 상호부조를 국가적 차원에서 사고하게 한다.

 

빈곤의 소멸을 위한 국가적 차원의 사회적 상호부조(mutualité sociale)에 대한 강조가 고댕 사상의 세 번째 핵심이다. 빈곤의 소멸은 사회의 첫 번째 의무이며 국가는 상호부조 체계를 통해 민중에게 봉사해야 한다. “사회적 안전망, 즉 인간 존재를 안전하게 보장하는 것이 사회 문제의 진정한 근원”이라고 생각한 고댕은 국가적 차원에서 상호부조를 조직하는 것을 사회개혁의 과정에서 이루어야 할 첫 번째 발걸음 중의 하나로 사고한다. 상호부조 기구는 민주적 선거를 통해 노사 동수의 대표로 구성되고 노사 각각의 분담금으로 운영되는데, 국가는 이 체계를 전 사회적으로 확산시켜야 하며 재정지원을 해야 한다. 국가의 부담금은 개인이 사망할 경우 모든 재산을 유산 받아서 충당한다. 또한 사회 입법을 통해 인간 삶을 보호하고 지원하고 보조하면서 인간의 물질적이고 도덕적인 필요물들(besoins), 즉 기본생계, 주택, 의복, 신선한 공기, 빛, 녹지 공간, 청결, 위생 등을 충족시켜야 한다.

 

네 번째 핵심적 사상은 사회적 관계와 국가들 간의 관계에 있어서 폭력을 거부하고 평화주의를 옹호하는 것이다. 작업 현장에서 노사 간의 평화는 이해의 수렴과 합의의 원칙 존중, 혼합조합(syndicat mixte)설립을 기반으로 가능하다. 특히 노동자들의 기업에 대한 참여는 “평화적인 진보로 향하는 열려있는 길”인데 이 길을 벗어나면 “갈등과 투쟁만이 존재하므로” 노동과 자본의 연합을 강조한다. 국가적으로는 사회 입법을 통해 사회적 평화를 목적으로 하는 공동의 규약(conventions collectives) 마련하고, 분쟁조정 재판소를 창설하며, 사회적 대화 기구를 설치해야만 한다. 국제적 평화를 위해서, 군비축소, 경제적 협력, 자유 무역, 유럽 민중들의 연방 결성이 상정된다. 국가는 개인이 살아 있는 동안 자유롭게 노동하고 노동의 결과로 부유해지는 것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 다만 한 개인이 사망 할 경우 사망시의 전 재산을 국가가 유산 받아야 한다. 가족에 대한 상속은 상속받는 자가 노동의 대가로 부를 획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금지된다. 국가에 상속된 재산은 모든 이들의 자유로운 노동을 보장할 각종 제도 마련과 사회적 상호부조 기금으로 사용된다.

 

고댕의 마지막 핵심적 사상은 새로운 사회가 개개인의 지적 도덕적 해방에 달려있고 이를 위해서 교육의 역할 그리고 주택 더 넓게는 건축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남녀가 동일한 사회경제적 역할을 수행하는 ‘노동의 공화국’의 기둥이며, 민주주의 학습을 가능하게 하는 능동적이고 통합적이고 단일한 교육을 위해 공립, 세속, 무상, 의무 교육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교육보다 중요한 것은 주택인데 삶의 환경에 대한 새로운 건축적 적용이 없이는 진정한 해방이 없다. 그는 인간과 사회에 봉사하는 새로운 ‘사회적 건축(architecture sociale)’을 개념을 강조한다. 고댕은 부자들의 개인주택에 설치되는 위생 설비와 부자들이 하녀, 보모, 요리사 등을 통해서 각종 서비스를 제공받는 것을 ‘부에 상응하는 것(équivalents dela richesse)’이라 칭하며 이런 설비와 서비스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노동자들을 위해 통합적인 공동체 주거 단지를 제시한다. 이 주거 단지에는 다양한 계층이 뒤섞여 살면서 공동의 사회성을 발전시키고 계층을 넘어서 인간으로서의 우애를 확대해 나간다. 또한 통합적 공동체 주택은 여성이 가사 노동과 아이 양육에서 벗어나 경제적, 정치적 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각종 가정생활 서비스가 제공된다. 고댕의 머리 머릿속에서 이러한 주거 환경의 개선은 바로 사회의 발전과 진보를 의미한다.

 

이 다섯 가지 핵심적 사상에서 강조하는 협동조합, 주택의 중요성, 여성 해방의 조건 등은 푸리에의 생각을 수용하고 발전시킨 것이다. 하지만 푸리에가 강조하는 정념의 법칙 대신 도덕과 노동을 강조하는 것, 그리고 국가적 차원의 사회적 상호부조 체제 마련 등 사회적 입법 활동을 강조하는 것들은 푸리에와 관련이 없다. 고댕은 유토피아 사회주의, 개혁적 실천적 사회주의, 고용주 온정주의, 사회경제학 사상들을 혼합한다.

 

 

 

고댕에게 주택은 자연스럽게 인간 삶의 보존과 진보, 필요로 하는 물질적 요소들 가운데 첫 번째 위치를 차지한다. 주택은 사회적 상태와 노동자들의 조건에 영향을 미치며 따라서 “건축의 진보는 인간성의 사회적 진보의 요소이다.”

 

 

고댕에게 주택문제 더 일반적으로 건축 문제는 사회적 진보의 지표이자 동인으로 파악된다. 그는 “빈곤한 가족을 편리한 주택에서 살게 하는 것, 이 주택 주위를 부자들이 그들의 주택에서 혜택을 누리는 생활 설비들로 둘러싸게 하는 것, 주택을 조용하고 안락한 휴식의 공간으로 만드는 것, 부자들이 가정 내부에서 받는 서비스들을 공동의 제도로 대체하는 것” 등이 물질적 지적 행복에서 배제되었던 노동자 가족들을 위해, 그리고 모든 이들을 위해 실현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주택을 통한 삶의 해방을 위해서는 편리하고 안락한 주택뿐만 아니라 삶의 행복과 해방을 도와 줄 각종 생활 설비와 서비스가 필요하다. 그런데 이런 설비와 서비스들은 경제적 이유로 민중들의 개별 주택에 마련될 수 없으므로 이것들을 공동으로 마련할 공동 주택 단지 건설이 필요하다. 공동 주택 단지는 단지 좁은 택지에 보다 많은 주택들을 짓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공동 주택 단지는 거주라는 주택의 단순한 기능을 넘어서서 개인과 가족의 삶을 둘러싼 모든 요소들을 포함하는 통합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이런 주거환경에서는 거주자들이 공동체적, 사회적인 삶이 가져다주는 모든 경제적 장점들의 수혜를 받을 수 있어 개인의 진정한 존엄성을 부여받게 된다. 또한 인간들 사이의 연합과 공동체적 사회성이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파밀리스테르 공동체 내의 사회궁전은 이러한 통합적 주거 단지로 계획되었다.

 

 

푸리에의 팔랑스테르가 정념작용의 극대화를 위한 것이라면 파밀리스테르는 노동 인구의 필요성에 부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팔랑스테르는 다양한 재능을 가진 남녀노소 개개인들의 공동 주택으로 계획되었지만 파밀리스테르는 열악한 주거 환경에서 살아가는 노동자 가족을 위한 공동 주택이었다. 푸리에의 여성관을 일부 수용한 고댕도 가족제도가 여성을 억압한다고 생각했지만 일부일처제에 기초한 가족 모델이 폐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고댕은 여성이 가족제도 자체에서 억압받는 것이 아니라 가부장적인 체제에서 가사노동을 전담하며 억압받고, 사회적, 경제적 활동에서 배제되면서 억압받는다고 생각했다. 가족을 위한 공동 주택이었지만 파밀리스테르에서 독신 남녀들 간에 자유로운 동거가 가능했다.

 

 

파밀리스테르는 공장의 이윤과 주택의 다양한 문제를 심의 결정하는 행정 위원회, 노동과 관련된 문제를 심의 결정하는 노동 위원회, 매해 열리는 거주자 총회에서 민주적 선거로 뽑힌 남녀 12명씩의 대표자 회의 등을 통해 운영되었다. 의료, 교육, 상호부조 기금, 소비 협동조합 등 각종 공동 서비스 시설과 제도도 각각의 관련 위원회를 구성하여 운영했다. 이들 기관들의 구성과 운영은 거주자들이 스스로 공동체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유도했다.

 

고댕은 파밀리스테르 거주자들이 지켜야 할 내부 지침서를 만들어 배포했다. 하지만 내부 지침서를 지키는지 감시하는 이는 없었고 개개인과 가구들의 사적 활동에는 공동체적 질서를 해치지 않는 한에서 자유가 주어졌다. 파밀리스테르 구성원이 권리와 지위를 상실하는 경우는 1.만취 2.다른 거주자들에게 불편을 주는 개별 가족과 주택의 불청결함 3.부정직한 행위 4.불성실한 노동 5.무질서와 폭력행위 6.아이들에게 행해야 의무적 교육의 위반 7.협회가 동의하지 않은 개인 술집의 운영 등이었다.

 

1880년 파밀리스테르는 ‘자본과 노동의 협동조합 협회’란 이름의 생산, 분배, 소비, 주거 협동조합으로 체제가 정비되었다. 고댕은 사회궁전을 계획하고 건설하면서 노동자들의 주택 문제만 해결하려 한 것이 아니라 주택과 노동현장을 연계하는 이상적인 공동체를 계획했고 자본과 노동의 협회 결성은 이러한 계획이 최종적으로 구체화 된 것을 의미한다. 이상적 공동체의 “실천에서 푸리에를 벗어나려” 했던 고댕에게 사회궁전이 지닌 “기능적 매력은 부차적인 것” 이었다. 그는 파밀리스테르 운영을 통해 푸리에가 생각한 정념의 효율적 작용에 의한 추상적 행복을 추구하려 한 것이 아니라 노동의 즐거움과 노동의 성과에 대한 올바른 분배를 통해 물질적, 도덕적 행복을 추구하려 했다. 고댕은 80년 이전에 동료 노동자의 노동에 대한 평가 투표, 노동자 지주제, 자율 노동 그룹 결성 등 노동자들을 부의 분배와 노동의 조직, 공장의 경영에 참여시키기 위한 다양한 방법들을 실험했으나 그 성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따라서 그는 자본과 노동이 동등하게 결합해 생산, 분배, 소비, 주거의 모든 영역을 협동조합적 방식으로 운영하기를 희망했다.

 

중소 산업도시에서 고용주 온정주의적 기업가들에 의해 건설되고 후원된 노동자 주거촌은 많았다. 하지만 이런 주택 단지는 주택난을 해결하면서 노동력의 안정과 노동 능률을 높여 생산의 확대에 기여하는 것이었고, 고용주가 도덕적 상징적 권위를 과시하고 이를 통해 노사 문제에 우위를 확보하기 위한 의도를 지녔다. 하지만 고댕은 파밀리스테르 공동체에서 자본주의 체제의 억압적이고 소외된 노동을 대체하는 자발적이고 즐거운 노동이 행해지길 원했다. 그는 노동을 통해 인간의 지적, 도덕적 해방을 꿈꾸면서 노동자들을 기업 활동에 참여시키고 분배의 정의를 실현하고자 했다. 노동과 자본의 협동조합 협회가 정비된 1880년부터 공장 경영에 노동자들의 직접 참여와 자주관리(autogestion)가 보장되었다.

 

자본과 노동의 협회는 협회원들의 지적, 도덕적 발전을 최우선시 했다. 협회 구성원의 첫 번째 의무는 모든 구성원들의 “빈곤을 소멸하게 하는 것, 고통과 질병을 극복하게 하는 것, 아이들의 교육을 가능하게 하는 것, 협회원들의 지적 도덕적 발전을 돕도록 주의를 기울이는 것” 이었다. 한편 고댕은 자본과 노동의 결합이 사회적 진보와 산업 발전을 동시에 가능하게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해 당사자들의 진정한 대표를 조직하는 것이 근대적 기업들에서 연구하고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들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했고, 기업 활동에 대한 “노동자들의 참여가 산업과 시장에 어떠한 불편함도 생기게 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고댕이 건설한 파밀리스테르는 일반적으로 푸리에의 팔랑스테르 계획이 현실화 된 것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고댕은 푸리에 사상의 핵심인 문명비판, 주거 공동체와 협동조합 체계를 통한 새로운 사회 건설 등을 수용하면서도 이를 기초로 자신만의 사회사상 체계를 확립한다. 그는 도덕과 노동, 분배의 정의, 지적 도덕적 해방을 위한 교육과 주거의 역할을 강조하고 국가적 차원의 사회적 상호부조 체제 마련과 사회적 평화를 위한 사회 입법을 중요시한다.고댕은 경제적으로 성공한 기업가였고 유토피아적이며 동시에 현실적 실천적 사회주의자였다. 자본과 노동, 사적 소유와 사회적 소유, 사회적 행복을 위한 민간의 사적 노력과 국가 개입들이 상호 결합해 사회적 평화를 유지하는 가운데 사회 발전과 진보가 가능하다고 인식했다. 이런 사상이 구체화된 것이 파밀리스테르 이상적 공동체였다.

파밀리스테르는 기존의 부를 가진 자들만이 주거 생활에서 누릴 수 있었던, 삶에 유용하고 편리한 각종 설비를 공동으로 갖추었다. 이들 설비는 경제적 이유뿐만 아니라 공동체적 사회성을 형성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파밀리스테르는 단순한 공동 주거 단지가 아니라 노동현장과 연계된 생산, 소비, 분배, 교육, 여가, 주거 공동체였다. 이 공동체에서는 소비 협동조합이 운영되었고, 상호부조 체계를 따른 의료 서비스가 제공되었으며, 공동 탁아와 교육 등이 이루어졌다. 생산과 부의 분배에 있어서 노동자들의 참여를 가능하게 하는 노동자 자주관리, 자본과 노동이 결합한 혼합경제의 선구적 실험이 이루어졌다. 이런 모습은 파밀리스테르 공동체가 유토피아적이면서 실천적인 사회주의와 사회경제학 흐름이 결합되어 운영되었음을 보여준다.

고댕의 사상과 파밀리스테르 실험은 당대의 자유주의자나 집산주의와 사회혁명을 추구하는 사회주의자 모두에게 환영받지 못했다. 사회경제학에 관심을 가진 부르주아 사회개혁가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고댕의 파밀리스테르 공동체 실험은 보다 인간적인 주거 환경을 계획하는 이들에게, 산업 발전과 분배의 정의를 동시에 고민하는 이들에게, 이기적이고 천박한 자본주의 물신숭배 폐해를 경제적 민주주의와 사회경제학 관점에서 풀어보고자 하는 이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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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전쟁

홍석만/송명관의 <<부채전쟁>>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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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찾아왔다. 2000년대가 전 세계적인 금융거품으로 부채를 확대하는 과정이었다면, 2008년 이후엔 부채를 축소하는 과정이 진행되고 있다. 빚이 줄어드는 장기불황의 시대를 맞아 과잉 부채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두고 각자도생의 전투를 펼치고 있다. 누가 이 빚을 감당할 것인가, 누구에게 빚을 물릴 것인가? 여기에 자본주의가 현재까지 유지해온 비밀이 간직되어 있다. 국가부채의 불분명한 책임 소재로 인해 내부 갈등이 폭발하며 누구도 대립을 피할 수 없다. 

돈을 빌려주는 최종 대부자는 국가였다. 그러나 채권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최종 대부자는 IMF를 필두로 한 채권 지배 세력이다. (정확히 말하면, 국가가 최종 대부자 역할을 하는 나라는 미국, 유럽, 일본 등 기축통화국뿐이다). 이들은 위기 국면에서 구제금융(대부분 채권국 은행의 빚을 갚는데 쓰인다)을 조건으로 긴축 조치를 강요하며, 그 나라 헌법 위에서 민주주의를 유린하고 있다. 

이처럼 부채전쟁은 국내적으로는 감세와 증세, 연기금의 적립과 금융시장 투여 및 연기금 부채의 처리, 임금의 인상과 삭감은 물론이거니와 개인의 신용등급과 대출이자율까지, 누구에게 부채를 쌓고 어떻게 갚을지 결정하는 가장 첨예한 계급간 전투다. 또한 국제적으로도 금리, 통화와 환율, 무역,국가 채무를 놓고 벌이는 국가간 중단 없는 전쟁이다. '손실의 사회화'를 둘러싼 부채 전쟁의 시작과 끝은 결국 이 경제위기의 책임을 누가 어떻게 져야 할 것인가를 둘러싼, 문자 그대로 계급투쟁이다. 

 

 

지난 2012년 월 스트리트 점령 운동은 '빚 파업 Strike Debt' 운동으로 전화하고 있다. 1주년을 계기로 '빚 저항가'들의 행동 매뉴얼을 담은 5천권의 책이 무료 배포됐다. 이 책은 부채를 집중분석하며, 주택, 학생 부채, 신용카드, 의료비부채와 관련한 채무 딜레마로부터의 해결책을 제안한다. 뉴욕의 활동가들은 2012년 11월  미국 대선에선, 금융자본에 강탈된 사회를 스스로 재구성하자며 '민중 구제금융을 통한 빚 폐지 Rolling Jubilee', '은행 갈아타기 Bank Transfer' 등 다양한 사업을 전개했다. 

 

펀드 상품을 팔아 돈을 모은 은행은 이 돈을 자산운용사에게 전달한다. 그리고 자산운용사는 이 돈으로 금융 투자 사업을 벌인다. 전통적인 돈의 흐름으로만 본다면 상품을 산 펀드 가입자는 채권자인 셈이다. 그리고 이들로부터 돈을 받아 사업을 벌인 금융기업들은 채무자가 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모두가 투자자이다. 은행은 중간 판매 과정에서 수수료를 챙기고 자산 운용사는 운용 보수를 챙긴다. 그리고 남는 돈이 펀드 가입자에게로 간다. 지구촌 어디 있는지 모를 누군가의 미래 소득을 당겨 서로 나눠 먹는 투자자가 된 것이다. 이처럼 '채권자-채무자'라는 전통적인 구도는 축소되고, 대신 '미래 시간을 조직하는 투자자'라는 새로운 주체가 등장하게 되었다. 

 

경제 위기시 구제금융을 지원하면서 IMF와 유럽중앙은행, 채권국들은 주권국가인 채무국에 초헌법적 권한을 행사해왔다. IMF 프로그램은 이를 통해 그동안 노동자 민중이 이룩한 원칙과 제도를 한순간에 허물었다. 채권자들은 '공짜 점심은 없다'며 정부의 경제사회정책 모든 것을 좌지우지했다. 이 과정은 일종의 합법적 내정간섭이다. 차관 제공을 이유로 한 국가의 주권을 사정없이 뒤흔든다. 채권을 통한 채권자들의 초헌법적 지배, 즉 채권의 지배라 할 수 있다. 이미 세계는 채권의 지배로 구조화된 체계를 갖추고 있다. 

 

들뢰즈에 의하면 유목적 삶은 기본적으로 '전쟁 기계'의 성격을 띠는데, 유목민(노마드)으로서 IMF도 '전쟁기계'의 성격을 가진다. 들뢰즈는 새로운 가치와 삶과 세계를 창조하려는 시도가 현재의 상태를 유지 보존 통합하려는 국가와 충돌하는 사태를 '전쟁'개념으로 파악했다. "국가장치도 아니면서 국가의 주권 외부에 존재하며, 법률에 선행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들뢰즈의 명제를 IMF는 그대로 따른다. 또한 "'전쟁기계'의 존재는 어떠한 폭력을 행사하지 않아도, 어떠한 전투를 벌이지 않아도 국가 장치나 국가인들에게 불안과 두려움을 야기한다."

 

앞에서 우리는 빚 없는 사회를 위한 지역적 차원의 이자 없는 은행, 가상 화폐의 통용 가능성을 보았다. 지역 차원 뿐 아니라 국민 경제 차원에서도 빚 없는 사회의 핵심은 여전히 이자다. 국민 경제 수준에서 당장 이자를 없애지는 못하더라도 이자 발생을 용인하되, 이것을 개인 소유가 아닌 사회적 소유로 바꾸는 즉, 이자의 사회화를 이룰 수 있다면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자의 사회화는 어떤 과정을 거쳐 실현될 수 있는가?

첫째, 이자의 사회화를 위한 출발은 은행의 국유화/사회화이다. 은행에 대한 감독을 강화하면서 은행 국유화를 유도해야 하며 이를 통해 은행에 대한 민주적 통제 수단을 확보해 나갈 수 있다. 금융과 신용 제도는 국가의 긴밀한 감독과 규제 속에서 발전했고 금융이 대형화할 수록 국가와 더 융합되었다. 

둘째, 중앙은행의 독립이다. 그런데 이 독립은 국민으로부터의 독립이 아닌 권력과 채권 지배 세력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한다. 중앙은행을 금융 전문가나 국제 금융 카르텔의 영향력에서 거꾸로 독립시켜 국가의 민주적 통제 아래 놓고 통화량 조절 및 시중은행의 규율을 다시세워야 한다. 

셋째, 이자 수입을 환수한다. 이것은 은행의 이자 수입은 물론 금융시장과 자산시장에서 발생하는 모든 이익도 이자로 보고 이를 회수하는 것을 말한다. 은행 수입의 80% 이상이 이자 수입이다. 이러한 수입은 대출을 통해 이뤄졌으므로 예금이자로 지급되는 부분을 제외하고 나머지 이자수입은 모두 국가에 귀속시킨다. 또한 자본으로서의 화폐 공급은 이자 수입에 대한 기대 및 업체의 신용도에 따라 이뤄지는 방식이 아니라 사업의 필요성과 지속 가능성, 공동체 기여율 등을 판단하는 민주적 심사를 통해 대출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예금과 대출 이자 없이 서비스 수수료로 운영되는 공공은행을 보편화한다. 이 은행은 발권은행인 중앙은행으로부터 직접 자금을 공급받고, 기업 대출 등 특수 목적 은행은 목적에 맞는 사업을진행한다. 주택과 가사 노동의 사회화 정책과 무상의료/교육 등 사회정책이 결합하면 개인 대출 규모도 대폭 줄어 빚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구조가 확보된다. 이처럼 이자가 없어지고 빚없이 살아갈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이 마련되면, 가계가 쓰고 남은 돈을 은행에 맡겨두고 필요한 사람이 대출을 받아가는 선순환구조가 확보된다. 

이 과정에서 화폐의 성격도 변화할 것이다. 유통 수단으로서 화폐는 더욱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겠지만, 지급과 부의 축적 수단으로서 화폐의 역할은 약화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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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의 헌법, 마을공화국

지금의 조직을 비폭력적 마을공화국으로 만들고, 이것이 국가 대신에 창립될 수 없다면, 국가의 내부에 세우자는 간디의 주장. 

국가에서 폭력을 배제한다면, 그것만으로 국가는 완전히 다른 조직이 될 것이다. 군대가 없는 국가, 영토가 아주 작거나, 영토를 배타적으로 소유하지 않는 국가.

그러한 공화국이 지금 현존하는 국가와 동시에, 국가 내부에, 국가와 나란히 존재하는 것이 불가능하기만 할까? 

이러한 권력과 국가 개념이라면, 간디가 헌법과 조직의 회칙을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한 것은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간디가 기반으로 생각했던 마을공동체가 현대 한국에서는 거의 소멸되었다고 하더라도, 회칙(constitution, 헌법)에 기반한 마을공동체, 비국가를 생성하는것이 불가능하기만할까?

저자는 레닌과 간디를 비교하지만, 레닌이 <국가와 혁명>에서 얘기했던 국가관(결국 실현되지는 못한)은 오히려 간디와 거의 유사했던 것이 아닐까? 

레닌과 간디의 현실이 달랐던 것처럼, 현재 한국의 현실은 또 무지하게 달라서 아주 구체적이고 전술적인 판단이 필요하겠지만, 다른 국가 다른 질서를 지금부터 작게라도 시작해야 한다는 점은 변함없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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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글러스 러미스, <<간디의 '위험한' 평화헌법>> 중

(따옴표는 간디의 말과 글)

 

"나와 같이 비폭력을 극단적으로 신봉하는 사람이라면 군대를 완전히 해산할 것이다. "

 

"만일 나에게 정부가 맡겨진다면 나는 다른 길을 선택할 것이다. 왜냐하면 내 밑에서는 군대도, 경찰도 설치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영국이 인도를 빼앗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인도를 바친 것이다. 영국인들이 자력으로 인도에 살고 있는 게 아니라우리가 영국인들이 살도록 만들어준 것이다. ... 영국인들에게는 왕국을 건설할 마음은 없었다. 그 회사(동인도회사) 사람들을 도운 것은 누구였던가? 회사 사람들의 돈을 보고 유혹을 당한 것은 누구였던가? 회사의 상품을 누가 사주었던가?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바로 우리가 그 모든 것을 했던 것이다. ... 우리가 영국인들에게 인도를 바치고, 영국인들에게 인도를 지배해달라고 한 것이다. 영국인들 중에는 인도를 칼로 손에 넣었다고, 칼로 지배하고 있다고 말하는 자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오류이다. 인도를 지배하는 데에 칼은 쓸모가 없다. 우리 자신이 영국인들을 인도속으로 끌어당겼다."

 

간디가 말하는 '헌법 constitution'의 6가지 의미

   : 체질, 조직의 구성, 영국헌법, 신의 뜻, 조직의 회칙, 혁명전략

 

1920년, 간디는 인도 국민회의의 회칙을 수정했다. 그렇게 해서 'constitution'이라는 말의 의미는 전혀 새로운 것으로 변모하였다. 수정된 회칙은 12월의 국민회의 총회에서 정식으로 가결되었다. 그 결과, 국민회의는 종래와 같은 상당히 느슨한 집단으로부터 좀 더 합리적인, 농촌 구석구석까지 미치는 조직이 되었다. 그 이전에는 누가 회원인지 모호했지만, 이번에는 소액의 회비를 내고 회칙을 지킨다고 선서한 사람이 회원이 된다는 규칙이 정해졌다. 그리고 국민회의는 회원모집 캠페인을 개시하였다. 이 캠페인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그것은 간디의 '권력' 분석에 기초한 것이었다. 

영국의 식민지 권력이 기본적으로 인도인들에 의해 발생한 것인 이상, 그 권력을 무력화하는 힘도 당연히 인도인들의 손에 있었다. 영국의 인도지배가 인도인의 협력에 기초해 있는 것이라면 그 지배를 끝낼 무기도 확실히 있었다. 그것은 비폭력이었다. 

 

구체적으로 국민회의의 회원은, 

- 영국정부가 설치한 학교에 아이들을 보내지 않는다. 

- 영국정부가 설치한 재판제도를 보이콧한다. (변호사인 경우엔 그 일을 하지 않는다.)

- 영국정부가 설치한 마을의회, 시의회, 국회 등과 협력하지 않는다. (의원이라면 그 직위에서 사임한다.)

- 나아가 영국산 수입품(주로 옷감)을 보이콧하고 손으로 짠 인도의 전통 옷감(카디)을 모두 노력하려 부활시킨다.


"이 새로운 회칙 constitution 밑에서 우리의 정책을 전국적으로, 또 세세히 실현하기 위해서 1년 사이에 국민 전원을 조직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거대한 인도 민족은 의식적으로 노력한다면 우리의 정당한 자립의 소망을 저지당할 수 없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학교를 국영화하고 재판소를 보이콧하고 그리고 필요한 옷감을 전부 스스로 생산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자치권을 주장하는 일이 되며, 세계의 어떤 군대라도 우리의 결심을 깨뜨리지 못할 것이다."

"이 국민회의의 회칙이 가진 의의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회칙은 우리가 조속히 스와라지를 쟁취하도록 작성된 것이다. 만일 그 회칙에 따라서 모든 마을에 모든 국민회의위원회를 설치하고, 21세 이상의 남녀 전원의 이름을 우리 명부에올리는 데 성공한다면, 정부의 권위가 존경을 받는 것과 동시에 국민회의의 권위도 온갖 것에 관련하여 존경받을 것이다. 정부의 권위는 강제력에 의해서 유지되고 있다. 따라서 만일 같은 장소에또 하나의, 자유의지에 의해서 존경받는 권위가 나타난다면 ... 한순간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이 회칙이 전국적인 규모로 기능하기 시작하면 그날부터 스와라지가 실현되다고 말할 수 있다. "

" 이 회칙은 남자에게도 여자에게도 성인 참정권을 실현해준다. 선서문에 서명하고, 명목뿐인 4안나의돈을 낸다는 2개의 조건만이 있다. 이 회칙은 모든 세력을 공동체가 대표한다는 것이 목적이다. 만일 이 회칙을 정직하게 운영하여 인민의 신뢰와 존경을 얻을 수 있게된다면 현재의 정부를 추방하는 데에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민의 협력(자유의지에 의한 것인가 강제에 의한 것인가는 논외로 하고) 없이는 정부에 권력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부가 시행하는 강제력의 거의 전부가 우리나라 사람들을 통해야만 한다. 우리 협력 없이는 10만명의 유럽인들이 한 사람씩 마을을 점거하더라도 그것은 우리 마을의 7분의 1도 안된다. 인도의 마을의 평균인구가 400명이라고 한다면 유럽인 한 사람이 물리적으로 마을에 거주하더라도 그가 자신의 의사를 관철시키는 것은 지난할 것이다."

 

레닌은 전위당인 볼셰비키의 활동에 의해 정권을 탈취하고 혁명을 추진하려고 했다. 간디는 국민회의 세력으로 하려고 했지만 국가권력을 쟁취하는 것이 목적은 아니었다. 그는 식민지정부를 자신의 것으로 하려고도, 변화시키려고도 하지 않았고, 그것과 다른 원리에 기초한 조직을 발전시켜 식민지 정부의 권위를 무력화시키고자 했다.

레닌은 국가권력을 장악, 그 권력을 사용하여 다른 형태의 사회, 즉 사회주의사회를 형성하는 것을 생각했지만, 간디는 식민지 정부를 전복하는 과정과 새로운 사회를 형성하는 과정은 동일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스와라지(자립)를 실현한 인도 국민회의가 인도사회 그것이 되는 단계 그 자체가 혁명 후의 새로운 사회였다. 다른 말로 하면, 스와라지는 식민지 정부를 무너뜨리는 힘인 동시에 새로운 사회의 원리였다. 그리고 '새로운 사회구조'가 간디의 신헌법안의 근간을 이루는 구조가 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했다. 

 

"독립은 밑으로부터 시작되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각 마을이 모든 권한을 가진 공화국, 즉 판차야트가 되는 것이다."

간디는 '공화국'이라고 말했다. 간디가 이 말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면서 고의적으로 썼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공화국이라는 것은 '공동체'가 아니라 주권재민의 국가이다.

서양의 주류 국가론은 주권재민, 즉 주권은 인민에게 있다는 논리를 펴지만, 실제로는 이것은 어쩌다 행하는 선거에 참여하는 권리 이외에 구체적인 의미는 없다. 간디의 헌법은 주권재민에 대하여 다른 구조를 부여한 것이다. 주권은 '인민'이라는 막연한 존재에게 있는 게 아니라 보다 확실한 조직, 즉 각각의 마을에 있다. 여기에서 주권재민은 국가권력을 정당화하는 신화가 아니라 정치사회의 구조에 구체적으로 들어가 있는 원리이다. 주권은 인민의 손으로부터 벗어나 도회지에서 재현되는 게 아니라 인민 각자가 살고 있는 곳, 즉 마을에 있기 때문에 그렇게 간단히 손에서 놓아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을이 장악하고 있는 주권은 이론상의 존재에 그치는 게 아니라 실제의 힘이기도 하다. 

 

"나의 마을 스와라지의 이미지는 전면적인 공화국이다. ... 각 마을의 최초의 중대사는 먹을 것을 위한 작물과 옷감을 위한 면을 재배하는 일이다. 소를 위한 보호구역이나 어른을 위한 공원과 아이들을 위한 유희장을 설치해야 한다.그리고 만일 토지의 여분이 있다면 거기에 쓸모있는 환금작물을 심는다. 따라서 마, 담배, 아편 등이 배제된다. 마을에는 극장도, 학교도 공민관도 있다. 급수시설도 정비되어 있다. 급수시설은 잘 관리된 우물과 탱크로 되어 있다. 기본교육은 의무교육이 된다. 모든 활동은 가급적 협동을 통해 행해진다. 불가촉민을 포함하여 오늘날과 같은 카스트제도는 없다. 사티야그라하와 비협력이라는 테크닉을 포함한 비폭력이 마을공동체에서의 제재수단이 된다. 마을의 경비원은 마을 주민들의 투표에 의하여 순번을 정하여 선출되고, 그 활동은 의무적인 것이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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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가왈의 <자유인도를 위한 간디의 헌법안> 중에서

자유인도의 행정의 기본단위는 자급자족 및 자치의 마을이 된다.그것은 인도의 예로부터의 전통에 부합하는 방식이다. 마을의 규모가 작거나 혹은 인접해 있는 경우 몇 개의 마을이 하나의 행정 단위가 될 수도 있다. 

판차야트

각 마을은 성인 전원의 선거로 판차야트를 선출한다. 마을이 큰 경우, 5명에서 11명까지 선출할수도 있다. 판차야트는 만장일치로 사르판치(의장)를 선출한다. 판차야트의 임기는 통상 3년으로 한다. 파차야트 멤버는 3회까지 선출된다. 그러나 판차야트 멤버 중 1명은 임기중에 마을의 신임을 잃은 경우 마을사람들의 75퍼센트의 투표로 소환된다. 마을의 판차야트만이 세금징수회계기록관, 야경, 경찰관 등의공직자를 임명할 수 있다. 특히 소수파의 권리가 관계된 경우 판차야트의 결정은 가급적 만장일치로 한다. 

판차야트의 기능

마을은 최대의 자치권을 행사하기 때문에 판차야트의 기능은 마을의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생활 거의 모든 것을 포함하여 광범하고 종합적인 것이 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1. 교육 : 생산적 기술을 배우는 기초학교 운영, 도서관과 독서실, 어른을 위한 야간학교

2. 레크리에이션 : 체육관, 유희장, 전통게임, 미술공예전람회, 제사, 연중행사, 찬가모임, 민요, 민속극

3. 치안 : 경비원, 모든 시민은 비폭력저항과 방위에 대한 정기적 훈련. 

4. 농산업 : 농업시설 사용료 산정 및 수금, 공동 농업, 관개, 공동 구매점, 식용곡류, 이자율관리, 개간

5. 산업 : 전통 옷감의 생산, 공동산업방식, 우유 유제품 제조공장, 무두질 공장ㅇ

6. 무역과 상업 : 농공산물 공동판매, 소비생활협동조합 조직, 생산물의 잉여분 수출, 마을에서 생산할 수 없는 필요품 수입, 공동 저장시설, 저가격의 신용기관 설치

7. 위생과 의료제도 : 하수시설, 마을 위생, 공해와 전염병 방지, 건강한 음료수 시설, 병원 및 산부인과 센터 운영, 의료는 무료. 전통 요법과 자연 요법 장려. 

8. 사법 : 편안하고 신속한 사법제도, 무료의 법률 부조, 판차야트가 폭넓은 권한을 갖는다.

9. 재무 및 과세 : 특별한 목적이 있을 경우 과세. 현물급부나 공동노동을 추진, 개인 기부, 출입금 회계는 공적감시나 감사를 위해 공개된다. 

마을의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활동을 조정하기 위해서 타르카(마을복합) 및 지역 판차야트를 조직한다. 이 상위조직의 기능은 강제를 하는게 아니라 '조언'을 하는 것이다. 하위 판차야트를 지도하고, 상담하며, 감시를 하지만, 명령은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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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의 반국가, 비국가

국가 또는 당운동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그것이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것을 수행하는 사람들에 대한 신뢰와 낙관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어느정도를 국가를 개선하거나 이용하거나 장악하는 전략에 대한 소극적 동의와 '국가가 소멸한 사회'가 도래할 시점은 너무 멀리 있다는 비관도 한 몫 거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국가가 늘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상황. 세월호 이후 국가란 무엇인가? 국가가 존재하기는 하는가? 라는 질문이 대두된 상황.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 국가를 막아야할 필요성은 크지만 반전의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 국가를 개선해야 할 진보정당들의 미래가 불투명한 상황. '국가는 폭력'이고 '당신을 위한 국가는 없다'는 것이 자명하다 할지라도 '국가없는 사회'로 가는 경로는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상황. 자본의 힘이 막강해지면서 가난으로 내몰린 사람들의 유일한 희망이 국가의 복지정책인 상황. 각종 시민사회단체와 풀뿌리조직과 사회적기업과 협동조합도 국가의 지원에 기대지 않을 수 없는 상황. 여러 국가들간의 질서도 불안정해서 언제 어디서 전쟁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 국가가 있으면 안되지만, 국가 없이는 안되는 상황. 

답이 없는 상황에서... 잘 모르겠지만, 그냥 다른 국가, 국가 아닌 국가를 우리가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반쯤은 엉뚱하고 반쯤은 진지한 상상을 시작해봤다. 우리는 어떤 국가를 원하는가? 국가가 우리에게 필요하다면 그것은 어떤 필요일까? 

그러던 와중에 우연히 레닌에 관한 글을 보게됐다. 아주 단순하면서도 단호한 선언. 부르주아 국가는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폐지되어야 하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국가는 부르주아 국가와는 근본적으로 달라야 한다. 스스로 소멸하는 국가는 사회주의 운동의 시작부터 존재해야 한다. 그것이 부르주아 국가와의 관계, 장악방식, 폐지 가능성을 선규정한다.

현재 국가의 장악과 함께 폐지를 목표로 하는 정당운동, 국가의 지원을 이용하지만 국가와는 다른 삶을 만들어가는 풀뿌리운동, 국가 없는 사회 체계를 실험하는 아나키즘운동, 국가와 종교와 민족의 테두리를 무너뜨리는 평화운동을 지금 여기서 하나씩 만들어가는 것. 이를 위한 '국가 아닌 국가의 시작'이라는 설정이 가능할까?

공동체, 단체, 정당, 지역, 꼬뮨, 협동조합 등 여러 이름이 있겠지만 각각의 그룹들의 관계를 설정하고, 총체적으로 아우를 수 있는 상상력을 촉발시키고, 현존 국가들에 대한 반대를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국가'라는 기표가 유용한 것이 아닐까? 국가의 내부에서, 국가의 피통치자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것들을 실험해볼 수 있다면, 재밌는 놀이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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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경, <레닌의 정치학에서 외부성의 문제>, <<레닌과 미래의 혁명>>

 

경제투쟁에 안주하려는 태도만이 아니라, 정치투쟁을 노동자들의 경제적 이해관계 내부에 제한하거나 경제투쟁을 통해서만 발전시켜야 한다는 '내부성'의 논리 그 자체를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식으로 이해되는 정치활동은 "사회민주주의적 정치활동이 아니라 단지 노동조합주의적 정치활동"이고, 이는 "정확히 부르주아적 정치활동"이다. 이와 대비하여 레닌은 "계급적 정치의식은 단지 외부로부터만, 즉 오직 경제투쟁의 바깥으로부터만, 그리고 노동자들과 고용주들 사이의 관계 영역 바깥으로만 노동자들에게가져다줄 수 있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요컨대 노동자의 계급적 정치의식이란 노동자와 자본가 간의 고용관계 외부를, 경제적 이해관계 외부를 사유할 때에만 가능한 것이라는 것이다. 

"노동자들에게 정치적 의식을 가져다주기 위해서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모든 계급의 주민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들은 그들의 단위 부대들을 모든 방향으로 파견해야 한다" 외부에서 얻은 어떤 이념을 들고 노동자들에게 들어가 전파하는게 아니라, 모든 계급 속으로 들어가야 하고 모든 방향으로 파견해야 한다는 것은 기성의 정치의식을 노동자에게 전파한다는 것과 거리가 멀다. 그것은 차라리 정치의식을 얻기 위한 것이라고 해야 할까? 

요컨대 레닌에게 혁명적 정치, 사회주의적 정치란 노동자계급의 이해관계를 반영하고 대변하는 활동이 아니라 그러한 계급적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활동이고, 그 관계의 외부를 이해하고 사유할 수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 '노동자계급'에게 혁명이란 노동자계급 자신의 이해관계에 대해 외부적인 것을 통해 정의된다. 

"엥겔스에 의하면 부르주아국가는 '사멸'되는 것이 아니라 혁명과정에서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해 '폐지'되는 것이다. 혁명 후에 사멸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 국가, 또는 반-국가 semi-state 이다." 레닌의 주장을 분석적으로 살펴보면, 국가에 대해 세 개, 아니 네 개의 구별되는 계기가 설정되어 있음이 드러난다. 먼저 부르주아국가에 대해서는 국가권력의 쟁취와 국가장치의 파괴라는 두 계기가 필요하다. 다음으로 사회주의 혁명 이후 프롤레타리아 국가는 사멸하지만, 그것이 부르주아 국가와 다른 것인 한, 다시 말해 부르주아 국가를 대강 바꾸어서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닌 한, 먼저 만들어져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소수가 다수를 억압하는 사회가 아니라 그 반대의 사회이기에 특별한 억압장치가 없어도 되며 만들어지자마자 사멸하기 시작하는 국가라는 점에서 '반-국가'다.

프롤레타리아 국가는 부르주아 국가의 작동방식이나 작동논리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에서 후자에 대해 외부적이다. 그것은 후자의 폐지 이후 "새로운 방식으로 민주적인 국가가 되어야 하며, 새로운 방식으로 독재적인 국가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는 부르주아 국가권력의 쟁취 이후에 새로이 추가되면 족한 그런 것이 아니라 장악 방식 자체를 선규정하는 것이고, 부르주아 국가에 관계하는 방식 자체를 선규정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떻게 장악하는가, 어떻게 관계하는가가 장악 이후의 과정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 정치는 부르주아 국가권력에 대해 외부적이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국가권력 자체에 대해 외부적이다.

혁명적 정치란 국가권력 자체에 대해 외부적이다

혁명 이후 국가권력의 변화과정이 우리에게 명확하게 가르쳐주는 것이 있다. 그것은 '사멸하기 시작하는 국가'라는 역설적 개념에서 사멸의 계기를 만들려는 노력이 없다면, 혹은 좀 더 거슬러 가서 국가를 장악하여 이용하려는 시도가 그것을 해체하여 사멸로 이끌 계기를 결여하고 있다면, 장악과 이용의 논리가 혁명을 통해 국가를 더욱 강화하는 길로, 가장 강화된 국가로 인도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국가의 외부를 통해, 국가장치의 외부를 통해 혁명과 국가를 사유하지 않는다면, 장악의 논리는 혁명의 정치학을 다시 부르주아적 국가로, 부르주아적 정치로 인도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모태에서 태어난 사회고, 자본주의적 척도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회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일한 양에 따라 분배받는" 것이 그 사회의 생산과 분배원칙을 정의해 주는데, 여기서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주어지는 이 권리는 "여전히 하나의 '부르주아적 권리'"다. 이와 달리 공산주의 사회란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사회'다. 이러한 원칙이 사회를 완전히 포섭할 때, 다시 말해 "인민들이 사회적 교류의 기본규칙을 준수하는 데 익숙해지고 그들의 노동이 자신의 능력에 따라 자발적으로 노동할 만큼 아주 생산적으로 되었을 때, 국가는 완전히 사멸하게 될 것이다."

"협의의 엄격한 의미에서 공산주의적 노동은 사회의 이익을 위한 무보수 노동이고, 정해진 의무에 의한 노동이 아니라 특정한 생산물을 얻기 위한 노동이며, 사전에 만들어지고 법적으로 고정된 할당량에 따른 노동이 아니라 그런 할당량에 무관한 자발적 노동이다. 그것은 보상을 예견하지 않으며 보상을 조건으로 하지 않고 수행되는 노동이다. 이제 노동이 행해지는 것은 공동선 common good을 위해 작업하는 습관이 되었기 때문이고, 공동선을 위해 일할 필요성을 의식적으로 실현하는 것이다(이것이 습관이 된다"

사회주의란 공산주의의 이행기로 설정되지만, 사회주의의 기본법칙은 그런 이행의 계기를 갖고 있지 못하다는 역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행을 위해서는 공산주의적 계기가 처음부터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주의 자체 내에, 그 전체를 규정하는 기본법칙과는 전혀 다른, 그런 점에서 '사회주의의 외부'라고 할 무엇이 처음부터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주의를 이행기로 정의한다는 것은 그것을 사회주의에 대해 외부적인 것을 통해 정의한다는 것을 뜻한다. 

공산주의로 이행하기 위해서 공산주의가 이미 존재해야 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는 순환론이고 현실적으로는 자기모순처럼 보인다. 도달해야 할 곳이 처음부터 있어야 한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이는 논리적으로만 난점일 뿐이다. 이행이란 부재하는 곳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가려는 세계를 지금 현재 만들어가는 과정이고, 그러한 과정이 확장되거나 심화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모든 이행은 도달하고자 하는 어떤 것을 지금 현재 국지적인 한 지점에서부터 만들어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이행은 어떤 사회, 어떤 관계 속에 그것에 대해 외부적인 지대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공산주의적 외부, 그것은 사회주의의 시작부터 있어야 한다. 사회주의란 그러한 지대가 자본주의와 달리 쉽게 확장되고 좀 더 강력한 촉발이 되어 번져가는 체제라고 다시 정의해야 한다. 자본주의는 물론 사회주의에서도 코뮨주의적 외부를 사유하고 그것을 창안하며 작동시키는 정치적 실천이 없이는 코뮨주의를 향한 어떠한 이행도 불가능할 것이라고. 이행기란 외부성을 원리로 하는 체제다. 이를 시간과 관련된 개념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도래할 것이 현재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도래할 것은 도래하지 않는다. 도래할 것이 존재하는 현재, 그것이 이행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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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리에의 팔량쥬 - 즐거운 노동공동체

 

푸리에의 팔랑쥬는 공동체라기 보다는 하나의 사회 혹은 작은 도시나 국가에 가깝다. 공동체에 안주하지 않는 보다 큰 기획을 위한 상상력을 제공하고 있다. 

어떤 면에서 빈집/빈마을은 팔랑쥬를 닮지 않았나? 교육보다는 욕망의 뒤섞임을 통해 스스로를 알아가는 방식. 정해진 이념이나 신념을 교육하는 것보다는 각자의 삶이 마주함으로써 형성되는 공유 공간. 
물론 빈집은 노동공동체가 아닌 기본적으로는 주거공동체이지만, 주거공간에서의 각종 노동/활동들(청소, 음식, 손님맞이, 회계, 농사, 술빚기, 손님맞이 등)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 빈고, 빈가게, 마을활동 등 새로 생겨난 노동/활동들이 생겨나고 있다는 점에서 노동의 배치는 항상 주요한 고민이 되어 왔다. 

또한 빈마을에서의 각 집들이 작은 단위를 이루면서 사람의 배치를 어떻게 할 것인지, 각 집들 내부에서의 협력과 외부에서의 협력/경쟁/갈등이 항상 고민이었고, 또 그런 조화와 부조화가 해결되지 않는/해결하지 않는 상태로 지속되어온 셈이다. 그리고 사람들의 빈번한 출입과 집간 이동으로 각종 갈등들이 끊임없이 변화시키는 방식은 의외로 전체적인 안정성을 유지하는 데 크게 기여한 셈이다. 

개인의 욕망과 노동을 정념(정확히 이해가 되는 개념은 아니지만)에 따라 집단화하고 순환하려는 시도로는, 빈집의 세번째 재배치(생산, 환대, 공부, 낭만, 생태 등의 테마집)과 1인1팀제(각자가 적어도 하나의 팀 - 농사팀, 반찬팀, 주류팀, 풍물팀, 운영팀 등 -에서 활동을 하기로한 제도)가 떠오른다. 주거 공간 이외의 별도의 공간적 여유와 외부노동으로 인한 시간적 여유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지속하기는 어려웠지만, 장기적으로 또 반복적으로 시도해볼만한 시스템이지 않을까?

사유재산에 대한 태도 또한 유사한 측면이 있다. 빈고는 개인이 소유한 자본을 인정하면서도, 각자가 자발적으로 자본을 공유하고, 여기서 발생한 수익을 재분배하는 독특한 시스템을 형성해가고 있다. 빈집 사람들과 빈고의 조합원들은 출자를 통해서 (즉각적인 사유재산의 철폐는 아니더라도) 사실상 사유재산의 의미를 없애는 공유의 실천을 하고 있다.

첫번째 빈가게의 모토 역시 푸리에가 떠오르는 '일놀이공동체'였는데, 일과 놀이의 결합이 쉽지 않고 일은 역시 일이다라는 현실을 받아들일수밖에 없었다. 이는 저자의 의견대로 푸리에의 한계이기도 하겠지만, 수정하지 못할 근본적 한계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여러 어려움에도 계속 갖고 있어야할 지향이 아닐까?

빈집을 푸리에와 성급하게 동일시 할 필요는 없겠지만, '연관', '대조', '결합'을 통한 새로운 미래를 그려보기에는 충분히 재밌고 의미있는 작업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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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원, <푸리에의 ‘팔랑쥬(Phalange)’ ― 즐거운 노동공동체>, <<이상국가론>>

 

푸리에에 따르면, 근대 문명사회의 자본주의적 노동이 문제시되는 것은 노동의 결과인 분배나 소유가 불평등한 때문이라기보다 그 노동 활동이 인간의 ‘정념(passion: 열정)’을 왜곡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근대적 노동을 극복할 수 있는 길 또한 인간의 자연스런 정념을 좇아 노동이 배치될 때에 가능한 것으로 제시된다. 즉 그에게서 노동과 정념의 관계는 사회주의적 노동공동체를 위해 정념을 조직하거나 배치하는 형상이 아니라, 거꾸로 사람들 개개인의 정념에 따라 노동이 배치되다 보면 자연스레 공동체가 이루어지는 방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만큼 푸리에에게서 중요한 것은 인간이 자신의 자연스런 정념을 어떻게 판단하며, 정념은 어떻게 충족될 수 있는가라는 점이었다.

그는 인간을 영구히 대체되거나 억압될 수 없는 정념(passion)을 가진 존재로 보았으며, 그러한 인간의 본성이란 나이와 관계없이 기본적으로 불변하는 것으로 보았다. 왜냐하면 그에게서 정념이란 “심사숙고나 반성에 앞서서 자연에 의해 생긴 것이기에 이성이나 의무, 편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언제까지나 존속하는 것”(Fourier, 1829: 398)이기 때문이다. “이성과 의무는 인간에게서 온 것이지만, 정념은 신에게서 온 것”(Fourier, Selected Texts: 25)이라는 그의 언명은 이러한 생각을 잘 나타내 준다. 그렇기에 푸리에는 인간의 성품이 환경에 의해 형성될 수 있다는 고드윈과 오웬의 생각에 반대하고 있다. 인간본성은 후천적인 교정이나 억압으로 인해 변화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즉 ‘본성은 왜곡될 수는 있지만 파괴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푸리에의 사상은, 인간의 이성과 욕구를 대립되는 개념으로 보고 욕구를 규제함으로써 이성적인 사회제도를 고려해왔던 모든 도덕주의자들과 구별되는 의미를 가진다. 그에게는 심지어 잔인함이나 공격적 성향과 같은 본성도 그 자체로 악은 아니며, 다만 어떤 본성을 왜곡되게 하는 사회조직에 그 잘못이 놓이게 된다. 선한 본성이나 도덕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성향도 그것이 사회적으로 올바로 배치되지 못할 때 그것은 이미 좋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한 사회상에 맞추어 인간을 교육하고 규제하려 했던 다른 이상론자들과 달리, 푸리에는 이러한 인식에 바탕하여 있는 그대로의 인간 욕구와 정념을 인정하고 그것이 자연스럽게 향유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육성하려 했던 것이다.

당시 푸리에와 오웬 그리고 오웬주의자 사이에 있었던 논쟁의 초점은 바로 이러한 인간본성에 대한 그들의 상이한 견해에 놓여 있었다. 푸리에는 인간본성의 불변성을 주장하고 그에 적합한 사회적 환경의 조성을 강조하였다면, 오웬은 원천적으로 인간성을 개조할 수 있는 환경의 건설을 꿈꾸었다. 따라서 오웬은 공동체의 건설을 위해 공동체적 삶에 맞는 인간의 육성이라는 교육의 문제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겼다. 물론 푸리에도 교육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지만, 그에게서 교육은 자신의 신념이 사람들의 일반적인 관심이 되도록 육성하는 데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그리고 유쾌한 마음으로 스스로 원하는 바를 하도록 돕는 데 강조점이 있었다. 즉 푸리에에게서 교육의 목적은 인간을 어떤 선한 모습으로 교화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 마음의 자연스런 열정을 알고 실현하는 데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그는 각 개인이 자연스런 정념에 따라 마음이 이끌리는 원리를 “정념인력(Attraction passionelle)의 법칙”(Fourier, Selected Texts: 211―2)이라 부르고, 이를 노동활동과 사회구성의 근본원리로 삼고자 한다.

"재산공동체, 진정한 박애가들의 기분 좋은 우애, 모두의 일치된 의견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낡고도 지극히 바보스러운 궤변 ...... 오웬파가 사용하고 있는 이러한 도덕적인 무미건조가 아니라 협동사회제도에 있어서는 ‘조화’와 똑같은 만큼의 ‘부조화’가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바로 부조화로부터 시작되지 않으면 안되며, 또한 정념 계열의 팔랑쥬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조화를 조직하기에 앞서 적어도 5만의 부조화를 폭발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그것에 의해 정념 및 사회적 조화의 수단에 대해서 도덕의 잘못된 판단의 모든 것을 여기서 검토함에 따라, 우리의 시대가 얼마만큼 협동사회에 이르는 길로부터 멀어져 있는가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푸리에는 인간의 정념들이 자유로이 표출되고 향유되기에 적당한 일정 규모의 연합을 구상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팔랑쥬(phalange)’이다. 팔랑쥬(phalange)의 규모는 정념 계열의 조합에 따른 노동의 구성으로 제안된다. 먼저, 팔랑쥬의 노동활동이 “마음에 끌리는 노동(le travail attrayant)”이 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원리는 공동체 구성원의 작업 활동이 자신의 정념에 따라, 자유롭게, 그리고 다양하게 선택되어 배치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푸리에는 인간 개개인의 욕구가 상이하며 저마다의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다양한 정념이 인정되고 향유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어떻게 각 개인들은 저마다 자신이 원하는 정념의 충동을 인식하고 판단할 수 있는가? 이 문제는 교육에 대한 그의 생각에 직접 연관되는 것으로, 그는 이와 관련하여 각 개인 스스로가 다양한 많은 일에 참여하고 경험함으로써 판단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에게 있어 가장 좋은 교육이란 실제로 행동하고 참여함으로써 스스로의 열정을 인식하고 알아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팔랑쥬에서는 모든 어린이를 포함하여, 모든 여성과 남성이 연령에 관계없이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 노동에 참여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또한 중요한 것은 이러한 노동의 배치가 각 개인의 자유로운 의사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할지라도, 혼자 이루어지는 노동활동이 아니라 반드시 일정한 소규모의 ‘집단과 군(groupe et série)’을 중심으로 조직되고 영위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정념이란 각각 충족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다른 정념 계열과의 ‘연관’과 ‘대조’를 통해, 또한 그러한 과정에서 다른 정념과의 복합적 ‘결합’을 통해 비로소 충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팔랑쥬의 노동체계는 일의 종류의 유사성에 따라 50―60개 이상의 집단이 인접적으로, 연속적으로 배열되고 있다. 성원들은 그들이 원하는 바와 재능에 따라 하나의 집단과 군을 이루어 노동하는 데, 이때 하나의 집단은 짧은 시간 일하고 곧 전환한다. 그러한 과정에서 인접 집단들 간에는 상당한 경쟁이 일어나게 되는 데, 푸리에는 이러한 ‘경쟁’ 과 ‘부조화’가 자연스런 정념일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성취와 집단 구성원 내부의 결속력을 형성시키게 된다는 점에서 ‘협동 사회’를 구성하는 데 반드시 필수적인 정념으로 보았다.

팔랑쥬에서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작업 군 내부의 활동에서 ‘협동’의 관계를, 그리고 외부의 다른 유사 작업 군과의 관계에서 ‘경쟁’의 관계를 익히게 된다. 그러므로 그의 사상에서 협동적 사회의 기초는 ‘타인을 사랑하라’는 박애주의나 도덕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선호에 바탕을 둔 자유로운 노동활동이 타인과 맺는 자연스런 관계 속에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정념과 적성에 맞는 직업을 다양하게 전환하며 협동과 경쟁을 체험함으로써 즐겁고 행복할 뿐 아니라, 매번 바뀌는 작업계열로 인해 고정된 경쟁상대나 고정된 경쟁심이 생기지 않고 서로 협력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공동체 전체는 경쟁상태에 있는 광범위한 노동 분화로부터 노동의 유인이 있음으로 해서 유익하고, 노동자들은 자신의 다양한 욕구와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통로를 찾음으로 해서 기쁨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듯 하루에도 여러 번의―약 여덟 번의―작업 군에 다양하게 참여할 수 있도록 배치가 조직되는 곳은 팔랑스테르(Phalanstère) 중앙의 공동장소에 있는 ‘정념 거래소(bourse)’로 제안된다. ‘정념거래소’를 통해 자유롭게 이루어지는 다양한 노동활동과 다양한 군 활동은 사람들의 다양한 정념을 만족시켜주며 상이한 즐거움의 혼합을 가능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만일 어떤 이가 계속 같은 일을 원할 경우에도 그 작업 집단에 자신을 제외한 다른 새로운 구성원이 유입됨으로써 전혀 새로운 구성원과 새로운 정념계열의 복합적 관계 속에 놓이게 되며 전환의 정념이 충족될 수 있다고 한다(Fourier, Selected Texts: 231―2). 팔랑쥬의 노동이 집단과 군 활동을 통해 분업과 협업, 그리고 다양하게 변화하는 전환업무의 방식에서 오는 경쟁과 협동을 모두 향유함으로써, 푸리에는 자유롭고 조화로운 노동 공동체를 이루리라 전망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노동활동을 통해 생산되는 가치는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어떠한 방식으로 전유되는가? 푸리에는 우선 산업사회의 임금제도를 폐지하고 팔랑쥬의 구성원은 배당금을 받는 조합원이어야 한다는 점을 공동체의 가치분배관계의 근본적인 원리로 들고 있다. 이때 남성, 여성, 어린이는 각자 자신의 자본, 노동, 재능의 공헌 정도에 따라 배당금을 받는 데, 노동 : 자본: 재능에 따라 5 : 4 : 3의 비율로 나누어 생산보상의 5/12는 노동에, 4/12는 자본에, 그리고 능력과 자질의 몫으로 3/12가 할당되도록 하였다. 그 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우선 팔랑쥬에서 생산된 이익금은 전체 성원을 위한 공공복지 비용에 할당되고 그 나머지 부분으로 자본, 재능, 노동에 따라 분배된다. 재능에 따른 분배는 구성원들의 투표에 의해, 자본의 할당은 개인의 자본 본을 나타내는 주식분에 비례해 이루어지며, 노동에 따른 분배는 생산성의 기준이 아니라 그 노동활동의 필요성, 유용성, 즐거움의 기준에 따라 평가되었다(Fourier, Selected Texts: 275).

그러므로 팔랑쥬에서는 재산과 소득의 과도한 불평등을 방지하기 위해 재산권의 규제와 제한은 요구되었지만, 개인의 재산권 자체를 박탈하거나 소득균등을 강요하려 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는 협동과 경쟁의 원리, 조화와 부조화의 원리 모두가 인간에게 없앨 수 없는 자연적인 욕구이자 실제로 협동사회를 결속시키는 충동의 원리가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다만 그는 자본에서 오는 배당을 폐지하지는 않았지만, 자본에 의한 무제한적인 축적의 허용은 반대하였으며, 이를 제한하기 위해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자산의 총계에 따라 자본으로 투자되는 비율의 다양성을 통해 이를 제한할 것을 제의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팔랑쥬에서 자본과 노동은 배타적인 범주가 아니라 유기적으로 연계된 범주로서, 일정한 갈등과 긴장은 존재하지만 그것은 생산단위 사이의 경합일 뿐 상호 의존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팔랑쥬에서는 ‘최저 수입제’를 통해 하루에 5번 식사를 할 수 있는 권리 등 기본적인 의식주가 배당됨으로써, 빈부의 차이는 의미가 없어지고 생계의 걱정에서 자유로워지도록 했다. 이러한 코뮌의 구성 속에서 노동은 더 이상 생계를 위한 수고로운 활동이 아니라 자신의 정념과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활동이자 즐거움의 원천이 되리라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검토에서 본다면, 맑스가 비판했던 “하루 15시간의 과도한 노동작업표”는 푸리에의 사상 속에서는 휴식시간이 없는 과도한 노동이라기보다 오히려 수면 시간을 제외하고는 줄곧 참여하고 싶은 “하루 15시간의 자유로운 놀이시간표”와 동일한 것이다. 푸리에게서 자유로운 노동이란 노동하는 수고를 애써 벗어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을 즐김으로써 획득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푸리에 사상에서 나타나는 ‘자유’ 개념은 노동을 ‘초월’할 뿐만 아니라 노동행위의 과정 ‘안’에서 나타나며, 그의 사상은 맑스가 구분했던 자유의 영역과 필연의 영역의 경계선을 넘어가 있는 듯 보인다. 그에게서 ‘자유’란 사회적 필요노동을 초월한 곳에, 노동시간을 넘어선 곳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고통을 벗어나 누리는 휴식이나 자유시간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푸리에는 한편으로 공동체 안에서 노동활동의 종류나 조건에 따라 차등적인 사회적 보상이 필요하다고 언급한다. 힘든 일이나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푸줏간 일, 병자 돌보기 등의 작업에는 보다 높은 보상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푸리에의 논지대로 산업사회의 노동과 달리 팔랑쥬의 노동이 자신의 정념과 적성에 따라 선택된 즐거운 것이라면, 어떤 특정한 분야의 노동이 특히 수고롭고 고통스러울 필요가 있을까? 그러한 인식 자체가 불평등한 가치에 의해 규정된 산업사회의 직업의 귀천 기준이기 때문이다. 푸리에는 모든 노동활동이 자신의 정념에 따라 배치되기만 한다면 즐거운 것이라 하면서도, 누구에게나 힘들고 불유쾌한 어떠한 종류의 일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분적으로 인정함으로써 다시금 직업상의 구분을 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즐거운 노동이라는 그의 기본적 지향이자 전제는 모호해진다는 점을 그의 사상이 가진 근본적인 문제점이라고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도 1840년대 다양하게 시도되었던 미국에서의 팔랑쥬 공동체 실험이 실패했던 까닭 또한 팔랑쥬에 지분을 투자하고 참여했던 많은 지식인이 그 노동에서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고 자본의 많은 부분을 회수한 데에서 찾아지고 있는 것을 보면, 노동의 필수성과 자유에 대한 구분이 근본적으로 사라질 수 있는지의 질문이 다시 제기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그의 사상에서 과연 즐거운 노동이 가능한가라는 본질적인 문제를 회의하게 만든다. 그는 각 개인마다 정념의 특성이 다양해서 어떤 이가 좋아하는 일은 다른 어떤 이가 싫어하고 어른이 싫어하는 어떤 일을 어린이가 좋아하는 그러한 방식으로 조화롭게 이루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그가 부정하고 싶었던 필연의 영역, 즉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두 비슷하게 힘들게 인식하는 노동의 영역이 일반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은 그가 그 자체를 향유하기만 하면 자유의 영역이라 바꾸어 정의하고 싶었던 부분을 다시금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딜레마에 놓이게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한계는 우리에게 다시금 자유로운 노동에 대해, 그리고 즐거움의 의미에 대해 근본적인 성찰을 제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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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오물통과 마주하기

사랑의 열정은 처음부터 서로를 객관적으로 볼 수 없게 하거나
그 사람에 대해 진정으로 공감하게 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그것은 차라리 우리 자신 속으로 가장 깊숙히 파고들어가는 것이며,
천번, 만번 접힌 외로움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우리 자신의 외로움으로 하여금
만물을 포옹하는 세계로 뻗어나가 나래를 펴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마치 천개의 빛나는 거울에 둘러싸인 듯이.

나는 가정이 성소(聖召), 즉 재미와 즐거움만이 넘쳐나는 장소라고
보지 않는다 - 물론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보다는 가장 야만스러운 피조물인 인간이 다른 사람들과 비폭력적이고 비파괴적인 방식으로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는 것을 배우는 곳이다.
 
함께 사는 사람에게 자신을 완전히 드러내고
동시에 한 사람이 그(그녀)의 개성, 인간사, 희망과 공포를 알아감으로써
그가 만들어 내었던 이미지를 수천 개의 조각들로 깨버리는 일은 오래 걸리고 매우 고통스러운 경험이다.
 
이런 의미에서 결혼과 가족생활은 삶의 오물통과 마주하기에 훌륭한 장소이다.
 
그래서 나는 26년 6개월 동안의 결혼 생활을 하고 나서
결혼의 목표가 행복이 아니라는 결론을 얻었다.
 
결혼은 훌륭한 면을 많이 갖고 있다.
그것은 성별과 가치관과 관점과 나아가 다른 사람들과 생활을 함께 하는 것을 배우는 곳이다.
 
결혼은 증오심을 극복할 뿐 아니라 증오를 할 수 있는 곳,
웃고 사랑하고 의사소통하는 것을 배우는 곳이다.

 

- 울리히 벡 / 엘리자베트 벡-게른샤임,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 첫 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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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고르, '건강과 사회'

녹색평론 7권에 있는 글입니다.

너무 오래되어서 지금은 거의 구할 수가 없더군요.

허락없이 전문을 타이핑해서 올립니다만...

녹색평론에서 좋아해주실거라 믿습니다.  ^^

(강조는 제가 했습니다. 오타 지적해 주시면 수정할게요. ^^)

 

의료의 소비자나 의료정책의 수혜자로서의 위치에서 벗어나

불건강한 사회관계를 폐기하고, 건강한 삶의 기술과 주권을 회복하자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보험드는 것 밖에 대책이 없는 불안한 삶이 두렵다면,

강추합니다.  읽어보세요. 저는 힘이 좀 나더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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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고르쓰, <건강과 사회>, <<녹색평론 7권>>

흔한 병에 대해서 전문적인 의학적 진단과 치료를 하는 것이 열중 아홉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한 병의 증상은 분명하고, 치료법도 잘 알려져 있으며 값도 싸다. 그래서 의료전문가들이 병의 치유를 촉진하기는 할지 모르지만 그들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중국에서는 “맨발의 의사”를 훈련하는 데 3주일밖에 걸리지 않는데, 이들은 공장이나 농장의 노동자로서 일을 계속하면서 일반적인 병에 대한 처치를 하고 약을 나누어주며(그들은 약의 부작용으로 나타나는 증상이나, 함께 사용하면 안되는 약 등을 잘 알고 있다) 어떤 경우에 전문가가 필요한지를 판단한다. 그들은 이 모든 일을 아주 정확하게 해내기 때문에 현지에 가 본 서양의사들의 감탄을 자아낸다.
이반 일리치가 인용하고 있는 캐나다의 한 보고서에 따르면, 치료에 필요한 의료비가 아주 싸기 때문에 현재 인도의 건강지출이 균등하게 분매된다면 인도사람들 모두가 혜택을 보게 될 것이라고 한다.
세계보건기구의 책임자에 따르면, 피부병의 진단과 처치는 대학을 졸업한 사람이면 누구라도 1주일만에 배울 수 있다고 한다.
살바도르 아옌데(그도 의사였다)도 들어 있던 칠레의 의료위원회에 따르면, 질병에 대하여 현저한 치료효과가 있는 약은 겨우 20~30가지 뿐이며 따라서 약전(藥典)은 쉽사리 축소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약의 반 이상이 사용법을 첨부해서 자유롭게 팔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지난 20년간 모든 산업국가에서 의료장비와 “건강”관계 지출이 엄청나게, 국민생산 속도보다 두세배 정도나 증가하였다.
조제약의 소비는 더욱 빠르게 성장하였다. 프랑스에서 개인당 약품 구매량은 13년간에(1959-1972) 2.7배로 늘어났다. 영국의 한 조사에 따르면, 어른들의 반 이상, 그리고 모든 아이들의 3분의 1에 가까운 사람들이 매일같이 어떤 약인가를 먹는다. 영국과 미국에서는 향정신성 약품(안정제, 수면제 등)에 대한 처방이 그 나라들의 주민수만큼이나 많이 내려지고 있다. 미국의 제약산업은 연간 1인당 18회분의 암페타민과 50회분의 바르비투르산을 생산한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약품과 의료전문가들의 활동에도 불구하고 삶의 개선이나 생명의 연장에 있어서 그것들은 별로 효과가 없다. 도리어 그 반대여서, 프랑스에서 60세 이상인 사람들의 평균 예상여명은 1900년대보다 겨우 2년 높아졌을 뿐이다. 프랑스 사람 일반의 경우에는 평균 예상여명이 1965년 이후로 변하지 않았다. 지난 약 10년간 모든 산업국가의 40대, 50대 남자의 사망률은 높아졌다. 15세에서 20세 사이의 젊은 사람들의 사망률은 프랑스에서 해마다 2퍼센트씩 오르고 있다. 영국의 50세 이상의 노동자들의 사망률은 1930년대보다 지금 더 높다. 사망률이 반드시 일반적인 건강에 대한 좋은 지표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겠는가? 그러나 J.N.모리스는 사망률로 미루어 그 자신이 염려했던 것보다 일반적인 건강상태가 더욱 악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20년동안에 55세에서 60세 사이의 남자들에게서 만성병의 현저한 증가가 있었고, 60대에 들어서는 남자들에게서는 그 증가율이 약 30퍼센트 정도나 높아졌다. 영국 국립보건원은 1970년의 보고서에서 6년동안(1963-1969) 영국인들이 질병으로 인해 잃어버린 날짜들이 20퍼센트 증가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특히 크게 늘어난 것은 심장 혈관계 질병과 류머치스, 그리고 기관지염과 폐결핵을 뺀 호흡기 질병이었다.
이러한 통계는 “아픈 사람이 더 많아졌다면 그것은 사람들이 더 오래 살기 때문이다”라는 흔히 듣는 말이 사실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통계는 또한 건강관계 소비를 더 늘이면 일반적인 건강을 개선시킬 수 있다라고 하는 믿음에 명백하게 반하고 있다. 진실은 훨씬 단순하다. 사람들이 약을 더 많이 사용하는 것은 그들이 더 병들었기 때문이며, 그리고 의료소비의 빠른 증가는 질병의 증가를 전혀 막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날의 의료는 그 자신이 추구한다고 하는 목표에 별로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의료의 발달은 이제 아무런 혜택도 가져오지 않고, 실제로 의료에 의한 치유보다는 손상이 더 많은 것이다.
이것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본질적으로는, 우리의 생활방식과 환경이 점점 더 질병 발생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사실로 설명될 수 있다. 퇴행성 질병들은, 그 이전의 감염성 질병들과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 문명병이다. 윌켄스타인은 질병이 발생한 신체부위에 따라 병명을 부를 것이 아니라 병의 원인에 따라 병명을 붙이고 분류해야 된다고 말한다. 예컨대 풍요의 질병(과식, 오래 앉아있는 것, 담배 등에 기인하는), 속도의 빌병, 현대적 편의에 의한 병(운동과 자연식품의 결핍에 기인하는), 오염에 의한 병 등으로.
최근의 연구들은 심장혈관계 질환, 고혈압 그리고 특히 콜레스테롤 과다증은 이른바 원시인들에게서는 나이와 상관없이 아주 드물다는 것을 확인했다. 오직 우리 문명에서만 그런 질병이 나이든 사람들을 괴롭힌다.
더욱이, 남자들에게 열 번째로 흔한 병인 대장 및 직장암은 아프리카의 농업지역보다 산업국가들에게서 열배나 더 흔하다. 그것은 섬유질이 부족한 식품이 심각하게 느린 속도로 장을 통과함으로써 조장되는 것으로 보인다.
국제 암연구센터의 히긴슨박사는 모든 암의 80퍼센트가 생활방식과 산업사회의 환경에서 기인되는 것으로 추정한다. 예를 들어 위암은 석탄연기로 인한 공기오염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기관지 및 폐암은 담배연기의 흡입과 관련이 있다. 영국의 암전문가이며 방영학자인 R.돌에 따르면, “많은 사실들로부터 우리는 대부분의 암은 환경에 의해 생겨난다고 믿게 되었다. 특히 암의 발생빈도가 나라에 따라서 크게 다르고, 그 차이가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이주하는 집단에게서 재확인된다는 사실로 보아 그러하다. 따라서 이론적으로 대부분의 암은 피할 수 있는 것이다.”
미국과 영국의 다른 통계는 폐암과 만성기관지염에 의한 사망률이 시골보다 도시에서 두배 이상 높다는 것을 보여준다. 레어와 새스킨은 공기오염을 반으로 낮추는 것만으로 폐암에 의한 사망 25퍼센트, 기관지염에 의한 사망 50퍼센트, 심장혈관질환에 의한 사망 20퍼센트 등을 줄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일라이 긴즈버그는 “섬유질이 풍부한 다양한 식사가 어떤 새로운 의학발달보다도 사람들의 건강에 더 크게 기여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러한 진실들이 여전히 무시되고 있거나 별로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 마치 의료, 의사들, 보건정책, 그리고 대중이 질병을 막는 것보다 환자를 보살피기를 더 좋아하는 것 같다. 건강한 사람의 건강은 너무나도 가치가 없어져 버린 것 같다. 기업과 공공기관 국민들 자신이 건강훼손을 어리석게도 거의 하나의 제도적 정책으로 자행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극소수의 환자를 “구제”하거나 혹은 크고 대단히 값비싼 선진 의료설비를 가지고 훼손된 건강을 “수리하는” 경우가 될 때, 그 때는 “생명값은 헤아릴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실제로 의료의 혜택은 줄어들고 있는 동안에도 의료비용(특히 병원비)는 성큼성큼 늘어나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의료가 가장 효과적인 조치(그것은 예방이다)를 무시하고, 효과가 의심스럽고, 그 비용은 너무 높아서 대부분의 사람이 이용할 수 없는 과시적 의료기술에 집중 투자를 하고 있느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예를 들어, 장기이식 기술을 보자. 과학적 반향은 어떻든간에, 장기이식이 필요한 사람에게 제공할 장기가 결코 충분히 있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생명을-그리고 고통을- 연장할 가능성이 있는 죽어가는 사람들 모두에게 제공할 생명유지장치가 충분히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심장발작 환자들을 구하기 위해 마련된 중환자실을 보라. 그것은 바로 선진 의료의 공장이라고 할 수 있다. 생명유지 서비스가 그러하듯이, 이곳에는 일반 병실보다 세배나 더 많은 장비와 다섯배나 되는 전문 인력이 필요하다. 그런데도 비용을 고려함이 없이 수백개나 되는 중환자실을 만들 필요가 있는가? 게다가 지방사람들도 이것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데 필요한 헬리콥터 수송망까지?
플라트 경이 이끄는 영국의 한 조사위원회가 이 문제를 연구했는데 그 결론은 가정에서의 간호에 비해 중환자실이 더 낫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더욱이 위원회는 말하기를 “절반 이상의 사망이 의사가 도착하기 전에 발생하며, 대부분의 시간 손실은 의사를 부르기 전에 생겨난다. 따라서 우리는 죽음에 이르는 심장발작환자의 50퍼센트는 의학처치가 가능하지 않은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경우를 위해서 우리는 예방에 기대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실제의 예방은 아무런 호소력이 없다. 장 피에르 듀피가 잘 예시했듯이, 새로운 초현대식 병원을 짓는 것은 정치적으로 수지가 맞는 일이지만, 환자수가 반으로 줄었다고 해서 한 정치가가 감사를 받을 것으로 기대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예방수단 덕분에 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은 오직 통계상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그들은 “통계상의 사람들”이다. 그들 자신도 모르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모르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들이 혜택을 입은 보호수단에 대하여 감사하지 않는다. “나는 누구누구 덕분에 일년 내내 병에 걸리지 않았으므로 그 사람에게 투표하겠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도대체 어디 있겠는가? 그에 비해서 병원에 입원하는 환자는 구체적인 사람이고 그 사람과 그의 가족들은 그 병원을 세운 정치인이 “이 새 병원을 세운 것은 본인입니다. 본인에게 투표해 주십시오”라고 말할 때 그 말을 들을 것이다.
그러나 예방보다 처치가 더 수지 맞는다는 것은 정치적인 의미에서만이 아니다. 질병은 고용기회를 만들어내고 따라서 “부”를 만들어 냄으로써 가장 수익성 높은 기업을 돌아가게 만든다. 환자의 수와 “건강”산업의 동시적인 증가는 국가 대차계정에서 플러스 쪽에 표시되지만, 환자가 없어져서 이러한 산업이 사라지면 그것은 GNP의 감소로 번역되고 자본주의에 타격이 될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질병은 수익성이 높고, 건강은 그렇지 않다.
이것이 모든 양식(良識)과 페어플레이에 어긋나는 방식으로 의료가 계속해서 발달하는 까닭이다. 수백만의 교외거주자들의 나날의 수송문제보다도 초음속 제트기 콩코드에 더 큰 중요성을 두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건강유지의 문제보다도 선진의료의 모험적인 개척자에 더 관심이 있는 것이다. 그 결과로 의료기술의 발달은(교통문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더 많은 결핍과 불평등과 좌절감을 만들어내고, 그 결과로 더 소수의 필요만을 충족시킨다. 그러한 과정에 가장 고약한 환상, 즉 머지않아 의학이 모든 질병의 치료법을 알게 될 것이며 따라서 병을 예방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환상을 유지시킨다.
이러한 환상은 의료용어에서도 발견된다. 건강검사나 퇴행성 질환의 조기진단이, 실제로 아무런 처치나 치료를 하지 않는데도 “예방”이라고 불리고 있지 않은가? 이것을 존 캐슬은 다음과 같이 잘 표현하고 있다. “우리가 질병을 예방할 수 있었던 것은 환자들 개개인의 질병을 살피는 것으로써가 아니라 집단적인 차원에서의 환경과 병에 걸리기 쉽게 만들고 저항력을 약화시키는 사회적 심리적 요인들을 다룸으로써였다. 건강은 본질적으로 발병요인들과 사람 사이의 균형상태이다. 건강은 자신의 환경과의 사이에 상대적으로 안정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개인의 능력에 달려있다. ... 중요한 점은 이 능력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어떻게 사회적 지원이 주어질 수 있는가를 배우는 것이다.”
증가하는 질병, 진정한 예방에 대한 무관심, 건강관리를 위한 엄청난 과잉소비, 그리고 건강을 회복시키지 못하는 약품들. 이러한 터무니없는 상황에 의학과 의사들은 어떻게 적응하는 것일까? 그들을 비난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환자와 질병, 의료의 기능에 대한 그들의 관념은 아직도 18세기와 19세기의 부르조아 이데올로기에 깊이 젖어 있다. 신체는 톱니바퀴가 고장난 기계로 간주되고 있다. 의사는 수술이나 화학적 혹은 전기적인 수단으로 톱니바퀴들을 다시 제대로 작동하게 만드는 기술자인 것이다.
고대의 의학과는 달리 부르조아 의학은 개인들만 알았지 전체 인구는 알지 못한다. 이것은 물론 의사들이 “그들의” 환자들과 갖는 관계로 볼 때 당연하다. 환자들은 사사로운 개인들이고 고객이다. 환자들은 지금 이곳, 있는 그대로의 세상속에서 의사가 그들의 통증을 덜어주고 치료를 하고 조언을 해줄 것을 청한다. 의사들은 이 요구에 순응한다. 그것이 그들의 직업이다. 의사가 개별적인 사례를 넘어서 그 질병의 사회적 경제적 생태적 원인을 볼 것을 아무도 요구하지 않는다. 이렇게하여 의학은 부분적인 구조들만을 세밀하게 연구하며 그것이 속해 있는 전체구조를 고려하지 않는 괴상한 “과학”으로 변하고 있다.
오직 소수의 개척자들, 선교사들 그리고 “미치광이”들만이 전체인구를 고려하는 방역학과 생리학 혹은 인류학이나 작업관련 질병들에 관심을 갖고 있다. 이들 진정한 연구가들과 이론가들은 의료전문가로서의 명예를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의료의 실제와 기능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인구전체의 건강을 대상으로 하는 연구에 필요한 돈이 마련되어 있지 않고, 아무도 그런데 신경을 쓰라고 의사들에게 돈을 주지 않는다. 게다가 그들이 받은 훈련과 사회적 지위로 인하여 의사들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습관과 환경을 변화시켜 건강을 도모할 수 있을지를 충고해 줄 능력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따라서 의사들은 사회체계의 좁은 한계 안에서, 놀라우리만큼 사회규범에 순응하면서, 그들의 직업을 수행한다.
가스와 화학증기, 연기(담배, 녹은 금속, 뜨거운 기름, 석탄의)와 먼지(석면, 면, 화강암의)를 들이마시는 것이 건강에 몹시 해로우리라는 것을 의사들이 어떻게 예견할 수 없었던가? 어떻게 그들은 산업도시와 광산촌의 생활조건, 그들 자신이 날마다 그 처참한 폐해를 보고 있는 그 상황에 맞서서 일어나지 않을 수 있는가? 그들은 돌이킬 수 없는 퇴행적 진행(동맥경화증 고혈압, 천식 등)을 - 이러한 증상이 “정상적”인 것으로 그들이 받아들이는 생활에 기인하기 때문에 - “질병”이라고 부르기를 거부하고 있지 않는가? 간단히 말해서, 우리의 문명과 사회가 전체 인구에게 입히고 있는 손상을 의사들은 어떻게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에서 다루고 있을 수 있는가?
그러나 당신이 그렇게 묻는 순간 이 질문은 당신에게로 되돌아온다. 왜 임금노동자, 시민, 투표자, 납세자인 당신은 국가나 당신을 고용한 사람들에게 질병의 결과나 비용을 감당해달라고 끊임없이 요구하면서, 그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질병으로부터 당신을 보호해 달라고 요구하지는 않는가? 어째서 당신은 더 많은 병원과 의사 간호원 새로운 약들을 요구하면서, 그런 것들 없이 지낼 수 있게 해 줄 생활조건을 요구하지는 않는 것인가? 왜 불건강한 습관과 생활방식을 바꾸지는 않고 “당신의” 의사에게 그 결과를 해결해 달라고 하는가?

“의학은 당신에게 아무런 일도 해줄 수 없습니다. 더욱이 만일 당신이 담배를 끊고, 과식을 하지 않고, 걱정하기를 그치고, 집안에 앉아서만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면 약이 필요없을 것입니다”라고 분명하게 말하는 의사에게 우리는 계속 찾아갈 것인가? 유행성 감기를 우리의 할머니가 치료하던 방법과 똑같은 방법으로 치료하면서 “뜨거운 레모네이드를 하루에 두되쯤 마시고 몸을 따뜻이 하고 쉬십시오. 그러면 약을 먹지 않고도 사흘이면 나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의사에게 우리가 계속 찾아가겠는가?
사실, 의학적 보살핌과 약물의 과잉소비에 대한 책임은 그것들이 효과가 있다고 거짓말을 하면서 팔아먹는 사람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사고, 사기 당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쟝 피에르 듀비와 세르쥬 카센티가 쓴 책 - <<약의 침략>>이라는 제목이 암시하는 것보다 더 풍부한 것을 담고 있는 책 -이 아주 섬세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저자들은 의사와 환자 사이에 짐짓 행하여지고 있는 공모체제를 멋지게 분석하고 있다.
물론 환자는 가짜이고 의사는 사기꾼이라는 말은 아니다. 현실은 그보다 훨씬 복잡하다. 왜냐하면 질병과 건강은 또한 언제나 인식의 문제이고 인식은 각 개인의 성향보다도 사회적 문화적 배경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똑같은 증상이라도 월요일과 토요일에 느낌이 다를 것이고, 일을 하기 전과 애인을 만나기 전의 느낌이 같을 수 없을 것이다. 자기 관찰에 익숙해져 있는 “교양있는” 사람들은, 보통 무심하게 지내는 “세련되지 못한” 사람들보다 더 쉽게 자신이 병들었다고 느낄 것이다. 자신들의 파편화된 일에 좌절감을 느끼고 있는 임금노동자들은, 자기들의 일을 끝내지 못하면 스스로의 사업 자체가 위험에 처하게 되는 장인이나 농부들보다 더 쉽사리 병에 걸릴 것이다.
듀피와 카센티가 우리에게 상기시켜주는 것처럼, 대부분의 경우에 질병은 “스트라이크”이거나 소극적인 항의일 뿐, 그 이상은 아니다.
일반의(一般醫)의들은 전체 환자의 75퍼센트가 기질적인 장애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처지 못지 않게 위안을 구하러 온다고 말한다. 이런 환자들이 실제로 고통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고, 그대로 방치하면 심각한 상태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장 임상적으로 정의할 수 있는 질병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의사들은 이런 경우 “기능상의 부조” 혹은 “신경성”이라고 부르면서, 그러한 증상에 대하여 흔히 값비싼, 독성이 있는 약으로 처치를 하려고 한다. 여기에 바로 속임수가 끼어든다.
실제로, 이렇다할 명명할 수 있는 병은 아니더라도 진실로 아픈 이들은 흔히 자신의 일을 감당할 수가 없어서 도움과 임무면제를 청하러 온 사람들이다. 다른 시대였다면 그들은 분명히 고백을 하러 가거나 성지순례를 하거나 기도에 몰두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성자들이 아니라 실험실에서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대한다. 자선은 땅에서뿐 아니라 하늘에서도 사라졌다.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이해서는 그 도움을 청하는 외침이 신체 이상(異常)-외인성이며 환자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는-의 형태를 위해야 한다. 만일 당신이 “이대로 계속할 수는 없어요. 잠도 못자고, 식욕도 없고, 성관계에 대한 흥미도 없어요. 아무것도 할 기운이 없어요. 일주일 휴가를 주세요”라고 말한다면 당신의 사장이나 상급자가 젼혀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당신의 말을 듣게 하려면 당신의 호소는 불면증이나 당신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상해(傷害)의 형태를 취해야 한다. 즉, 의학적 면제를 정당화하는 질병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거의 망가질 지경에 처한 사람은 의무의 면제를 허용해줄 자격을 가진 유일한 권위자인 의사를 개입시키기 위해 자신의 불편을 의료적인 문제로 만든다. 그리고 의사는 대개의 경우 그 게임에 합세하여, 기본적으로는 그의 고객이 자기가 직면한 상황을 견딜 수 없게 되었을 뿐인 것을 화학적으로 처치 가능한 질병으로 취급한다.
그러나 이러한 속임수 속에는 심각한 위험들이 도사리고 있는데, 이것은 이반 일리치가 지적하기 훨씬 전에 전위적인 의사들이 보고 있었던 위험들이다. 이 속임수는 질병의 형태로 나타나는 구제 요청을 기술적인 처치로 다스리려하는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더욱 근본적으로, 그것은 환자의 그러한 견딜 수 없어하는 상태를 가능한 한 빨리 약품으로 제거할 수 있는 “일시적 이상상태”로 보는 데에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의사들과 의료가 어떻게 체제유지의 수호자로 되는가를 본다. 의사들의 임무는 환자가 자신의 주어진 사회적 역할에 잘 적응하지 못하게 하는 증상을 제거하는 것이다.
의사들은 물론, “우리에게 와서 될수록 빨리 치료해 달라고 청하는 것은 환자들이므로” 자기들은 비난받을 것이 없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좋은 변명이 못된다. 치료를 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환자들의 역할이다. 진정한 문제는 “의료가 환자를 도울 수 있는가”이다. 일시적이며 원칙적으로 치유될 수 있는 이상상태가 아니라, 그 질병은 건강한 사람이 불건강한 상황에서 나타낼 수밖에 없는 당연한 반응이 아닌가? 전화교환수, 키펀치작업자, 일관공정작업의 노동자, 전자납땜공 등이 겪는 소화불량, 두통, 류머티즘, 불면증, 우울증은 매일같이 여덟시간씩 계속해서 가해지는 폭력에 적응할 수 없게 된 한 생명체가 보이는 “건강한” 저항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런 증상의 원인이 아니라 증상 자체가 나쁜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학교와 군대와 감옥이 시작한 일을 의료가 완성시켜 주기를 청하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할당된 역할에 개인들이 잘 적응하도록(필요하면 화학약품을 써서라도) 만드는 일 말이다.
이것은 과장이 아니다. 이것은 바로,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된 역할을 계속 견딜 수 있도록 신경안정제, 흥분제, 항우울증약물, 수면제 등을 의사에게 부탁하는 양심적이고, 나이든, 과로에 지친 피고용자들의 의료관이다. 또, 이것은 노동자들을 병들게 하는 바로 그 일자리로 가능한 한 빨리 노동자들이 돌아오도록 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는 많은 회사전속의사들의 의료관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이것은 군대, 감옥, 정신병원, 경찰에 소속된 의사들이 의료의 기능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들은 감금상태에 적응하려 하지 않는 개인들에 대한 “의료적 처치”를 주저하지 않는다. “불안해 하는” 사람을 진정시키는 약이 있고, “난폭한” 사람을 겁먹은 양(羊)으로 만드는 약도 있고, 동성연애자들을 성적으로 무력하게 만드는 약이 있는가 하면, 고문당하고 있는 사람이 기절하거나 죽지 않게 하는 약도 있다.
이러한 길의 극단에는, 사회적 일탈자, 부적응자, 반항적인 사람, 불만을 품고 있는 사람, 게으른 사람 등에 대한 강제적인 정신치료-혹은 세뇌-가 있다. “가장 좋은 세상”에서 행복하지 않은 것은 병이 든 것이다. 그리고 병든 사람은 치료를 받아야 한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소비에트 경찰과 정신의학자들만이 아니다. 서유럽과 미국에도 그런 생각을 하는 저명한 인물들이 있다. 예컨대 B.F.스키너 교수같은 사람이 있는데, 그의 “재교육”방법은 <<기계오렌지>>라는 소설속에 충실하게 묘사되어 있다. 또, 스페인계 미국인인 델가도는 컴퓨터를 인체내에 심어놓고 원격조종으로 사람의 “정상적인” 행동을 유도하는-정부지도자로부터 시작해서-어떤 세계정신의학자 위원회를 꿈꾼다. 혹은, 함부르크대학의 그로스교수와 스바브교수가 있는데 이들의 인성(人性) 파괴방법은 독일 정치범들에게 무시무시하게 효과적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병적인” 증상이 기질적 고장에 기인한 것인지, 아니면 받아들일 수 없는 사회적 조건에 기인하는 것인지를 생각해 보지 않고 의사들이 기꺼이 증상만을 다루려고 한다면, 그들은 쉽사리 경찰과 정부의 조력자가 된다.
그러므로 지금은 의료에 대하여, 혹은 더 정확히 말하여, 무엇이 건강과 질병을 결정하는가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야 할 때이다. 이반 일리치의 목표는 이러한 반성을 자극하는 일이다. 그는 의료의 실패에 대하여 악을 악으로 다스리는 식으로 반응하지 말아야 한다는 데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즉, 의료체제를 더욱 확장하고, 의료의 관할권과 힘을 늘리고, 의료의 사회통제 및 삶의 “의료화” 경향을 확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일리치에 따르면 이 위기에 대한 오직 하나의 건강한 반응은 의료의 비전문화, 즉 건강과 질병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의사들의 독점을 폐기하고, 보통 사람들이 스스로를 보살필 수 있는 자율적인 능력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기술적으로 비현실적인 것이 아니다.(그렇게 하려면 근본적인 정치-문화적 변화가 필요하기는 하지만.)
의료의 기술적 효율성은 몹시 제한되어 있다. 병원들이 환자의 85퍼센트를 내보낸다 하더라도, 엄격히 의학적 견지에서 그 환자들은 조금도 피해를 입지 않는다. 4분의 3의 경우에, 일반의의 충고와 그것의 연장으로서 불가피하게 주어지는 처방의 효과는 기술적인 것이 아니라 심리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옛날에 주문이나 기도나 굿이 가졌던 것과 같은 종류의 효과가 있다. 전체의 75퍼센트에서, 처방된 약품의 유효성은 의료기술에 대한 환자의 “믿음”에 달려 있다. 다른 시대에서 사람들은 기적을 믿었는데, 오늘날 사람들은 과학을 믿는다. 나머지 25퍼센터의 환자의 경우에는 질병을 정확하게 진단할 수 있다. 그런데, 그들이 모두 전문가의 기술적인 보살핌이 필요한다? 전혀 그렇지 않다. 모든 경우의 90퍼센트에서 병은 저절로 회복된다. 이 90퍼센트에서 처방의 주된 목적은 환자에게 회복의 기회를 허용해줄 휴식과 섭생과 적절한 행동을 -물약과 알약과 좌약의 형태로 위장하여-제공하는 것이다. 결국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한 사람은 전체 환자의 아주 작은 부분일 뿐이다. 이러한 수치들을 통해서 우리는 전체적인 조망을 해 볼 수 있다. 오늘날의 의료에서 신화와 신비와 마술적인 의식이 제거되고 났을 때, 전문적인 의료설비들 가운데서 얼마나 많은 것이 기술적으로 필요한 것으로 남아 있을지를 그 수치들은 보여준다. 그것들은 건강관리의 비전문화가 중국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일리치는 이렇게 쓰고 있다. “진단과 치료에서 해로움보다는 확실히 도움을 주는 경우에 있어서 대부분은 두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즉, 그 진단과 치료를 위한 물질적 자원이 극히 값싸다는 것, 그리고 그것들은 본인이나 가족구성원들이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포장 설계 되어 있다는 점이다.”
의료의 이러한 비전문화는 “특별한 경우에 필요할지 모르는 전문가를 훈련하는 일과 그 기술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일리치는 지적하고 있다. 그것이 뜻하는 것은 전문가에 대한 의존은 드문 일이어야 하며, 최소한으로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회구성원들에게 최적의 건강을 제공하는 사회는 사람들을 전문치료사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거대한 집단에 떠넘기는 사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반대로, “건강을 지키고 질병에 대응하는 수단과 책임을 전체인구들 가운데 고르게 분배하는” 사회야말로 최적의 건강을 보장하는 사회이다.
“건강한 사람들은 짝을 짓고, 아기를 낳고, 인간 조건을 공유하고, 그리고 죽는데 관료적 개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건강한 사람이라는 것은 의료해택을 잘 받는 사람이 아니라 “건강한 가정에서 건강한 식사를 하며, 출생·성장·일·회복·죽음에 꼭같이 알맞은 환경속에서 살면서 인구가 무제한 일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또 사람은 늙어가고, 병으로부터 불완전하게 회복될 수밖에 없다는 것, 죽음이 언제라도 닥칠 수 있다는 사실을 의식적으로 받아들이도록 도와주는 문화를 누리는 사람들이다.”

우리보다 이전의 모든 문화들은 이 불가피하고 필연적인 한계를 인정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을 일리치는 상기시켜 준다. 건강관리는 직업적인 기술자들의 배타적인 전문분야가 아니었다. 그 반대로, 건강유지 기술은 삶의 기술이었다. 거기에는 올바른 행동과 위생규칙이 강조되었다. (위생이란 낱말의 본래 의미는 사람의 기술이다.)
이러한 규칙은 특히 “잠자는 것, 먹는 일, 짝짓기, 일하기, 놀이, 꿈꾸기, 그리고 고통을 견디기”에 관계하였다. 그러한 규칙으로 인해 사람들은 “아픔을 견디고, 병을 이해하며, 항상 사람과 함께 있는 죽음에 대하여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다.”
본래 모든 사회적 활동 속에 들어 있었던 삶의 기술(위생)은 산업화와 더불어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그 이유를 이해하기는 쉽다. 임금노동이 널리 퍼짐에 따라 노동자들은 자기들이 하는 작업의 길이, 강도, 속도, 조건 등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게 되었다. 독립된 장인(匠人)이나 토지를 소유한 농민들과는 달리 노동자들은 자기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작업과 휴식과 잠을 조절할 수 없게 되었다. 생활리듬을 통제할 힘을 빼앗긴 그들은 “일의 문화와 위생술”도 박탈당했다.
그리하여 노동은 노동자들에게 강요되는 외부적인 임무가 된다. 노동자들은 핑계만 있으면 언제고 공장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18세기와 19세기의 공장주들은 노동자들의 “게으름”을 중시했다. 그 때는 분명히 이 “게으름뱅이”들을 믿고 스스로 자신이 아픈지 아니면 일을 하기에 적당한지 결정하게 할 수는 없었다. 이 결정(질병증명 혹은 치료증명)은 “과학적인” 기준을 적용시키는 전문가가 해야 한다. 지난 세기 초에 진료소들이 성장함에 따라 이러한 기준이 가능하게 되었고, 질병은 아픈 남자와 여자, 그들의 노동, 그들의 삶으로부터 분리된 실체가 되었다. 성장하는 자본주의가 이런 발견들을 장악했다. 이제부터는 오직 의사들만이 누가 아픈지 그렇지 않은지를 판단할 권리를 가지게 되었다. 가장 일상적인 흔한 고통조차도 의학적 관리와 증명서의 대상이 되었다. 이런 식으로, 자본주의는 노동자에게서 노동에 대한 통제권을 빼앗은 것처럼 사람들에게서 병과 건강을 빼앗았다.
그 이후로 건강은 일반적인 편안한 상태가 아니라 단지 질병이 없는 상태, 즉 육체적으로 일을 하기에 적합한 상태로 되었다. 한편으로 질병은 아픈 상태가 아니라 가능한 한 빨리 제거해버려야 할 “비정상적인” 장애물이 되었다. 이제부터 연구하고 보살피고 치료하는 대상은 환자가 아니라 질병 그 자체이다. 지금부터 100년도 더 전에 도입된 건강보험으로 인해 건강관리의 전문화·산업화·표준화는 더욱 촉진되었다.
일리치가 반드시 그렇게 말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의 주장은 건강을 회복하려면 강제된 임금노동을 폐기해야 된다는 결론으로 나가고 있다. 노동자들이 그들의 공동작업의 조건, 도구, 목표를 다시 통제할 수 있게 되어야 한다. 생산활동이 더 이상 외부에서 주어지는 임무가 아니라, (노동자들의 자율성, 다양성과 자연스러운 리듬이 회복되어) 그것이 바로 기쁨이 되고, 교감이 되고, 삶의 기술이 되는 새로운 문화가 필요할 것이다. 건강이 전문가들의 일이기를 그치고 항상 개인과 집단의 생활에 질서를 잡아주며, 어디서나 통용되는 노력이며 가치가 되지 않는 한 우리는 건강을 회복하지 못할 것이다.
모든 사람이 각기 의료를 거부할 것을 일리치가 요구할 때 그것을 따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안다.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이것은 임금노동자들이 병가와 출산휴가를 포기하는 것을 뜻할 것이다. 실제로, 질병과 건강에 대한 건강하고 “비의료화된” 관계는 우리가 임금노동과 함께 현사회의 바탕을 형성하고 있는 그 “불건강한” 관계(의료기관들과 기업들에 의해 유지되고 있는)을 폐기할 때에만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일리치는 여기에 대하여 어렵지 않게 대답을 한다. “불건강한” 사회 관계의 폐기는, 이 사회의 틀 속에서라도 이미 개인과 집단의 주권, 우리의 환경과 생활방식의 건강성, 그리고 우애와 상호협조에 기초를 둔 인간관계에 대한 욕망을 이미 자기자신의 기본적인 행동규칙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만이 해 낼 수 있는 일이다.

 

 

* 앙드레 고르쓰(Andre Gorz) - 프랑스의 사회이론가. 이 글은 Ecology as Politics(1980)의 일부분을 뽑아 옮긴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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