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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전쟁

홍석만/송명관의 <<부채전쟁>>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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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찾아왔다. 2000년대가 전 세계적인 금융거품으로 부채를 확대하는 과정이었다면, 2008년 이후엔 부채를 축소하는 과정이 진행되고 있다. 빚이 줄어드는 장기불황의 시대를 맞아 과잉 부채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두고 각자도생의 전투를 펼치고 있다. 누가 이 빚을 감당할 것인가, 누구에게 빚을 물릴 것인가? 여기에 자본주의가 현재까지 유지해온 비밀이 간직되어 있다. 국가부채의 불분명한 책임 소재로 인해 내부 갈등이 폭발하며 누구도 대립을 피할 수 없다. 

돈을 빌려주는 최종 대부자는 국가였다. 그러나 채권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최종 대부자는 IMF를 필두로 한 채권 지배 세력이다. (정확히 말하면, 국가가 최종 대부자 역할을 하는 나라는 미국, 유럽, 일본 등 기축통화국뿐이다). 이들은 위기 국면에서 구제금융(대부분 채권국 은행의 빚을 갚는데 쓰인다)을 조건으로 긴축 조치를 강요하며, 그 나라 헌법 위에서 민주주의를 유린하고 있다. 

이처럼 부채전쟁은 국내적으로는 감세와 증세, 연기금의 적립과 금융시장 투여 및 연기금 부채의 처리, 임금의 인상과 삭감은 물론이거니와 개인의 신용등급과 대출이자율까지, 누구에게 부채를 쌓고 어떻게 갚을지 결정하는 가장 첨예한 계급간 전투다. 또한 국제적으로도 금리, 통화와 환율, 무역,국가 채무를 놓고 벌이는 국가간 중단 없는 전쟁이다. '손실의 사회화'를 둘러싼 부채 전쟁의 시작과 끝은 결국 이 경제위기의 책임을 누가 어떻게 져야 할 것인가를 둘러싼, 문자 그대로 계급투쟁이다. 

 

 

지난 2012년 월 스트리트 점령 운동은 '빚 파업 Strike Debt' 운동으로 전화하고 있다. 1주년을 계기로 '빚 저항가'들의 행동 매뉴얼을 담은 5천권의 책이 무료 배포됐다. 이 책은 부채를 집중분석하며, 주택, 학생 부채, 신용카드, 의료비부채와 관련한 채무 딜레마로부터의 해결책을 제안한다. 뉴욕의 활동가들은 2012년 11월  미국 대선에선, 금융자본에 강탈된 사회를 스스로 재구성하자며 '민중 구제금융을 통한 빚 폐지 Rolling Jubilee', '은행 갈아타기 Bank Transfer' 등 다양한 사업을 전개했다. 

 

펀드 상품을 팔아 돈을 모은 은행은 이 돈을 자산운용사에게 전달한다. 그리고 자산운용사는 이 돈으로 금융 투자 사업을 벌인다. 전통적인 돈의 흐름으로만 본다면 상품을 산 펀드 가입자는 채권자인 셈이다. 그리고 이들로부터 돈을 받아 사업을 벌인 금융기업들은 채무자가 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모두가 투자자이다. 은행은 중간 판매 과정에서 수수료를 챙기고 자산 운용사는 운용 보수를 챙긴다. 그리고 남는 돈이 펀드 가입자에게로 간다. 지구촌 어디 있는지 모를 누군가의 미래 소득을 당겨 서로 나눠 먹는 투자자가 된 것이다. 이처럼 '채권자-채무자'라는 전통적인 구도는 축소되고, 대신 '미래 시간을 조직하는 투자자'라는 새로운 주체가 등장하게 되었다. 

 

경제 위기시 구제금융을 지원하면서 IMF와 유럽중앙은행, 채권국들은 주권국가인 채무국에 초헌법적 권한을 행사해왔다. IMF 프로그램은 이를 통해 그동안 노동자 민중이 이룩한 원칙과 제도를 한순간에 허물었다. 채권자들은 '공짜 점심은 없다'며 정부의 경제사회정책 모든 것을 좌지우지했다. 이 과정은 일종의 합법적 내정간섭이다. 차관 제공을 이유로 한 국가의 주권을 사정없이 뒤흔든다. 채권을 통한 채권자들의 초헌법적 지배, 즉 채권의 지배라 할 수 있다. 이미 세계는 채권의 지배로 구조화된 체계를 갖추고 있다. 

 

들뢰즈에 의하면 유목적 삶은 기본적으로 '전쟁 기계'의 성격을 띠는데, 유목민(노마드)으로서 IMF도 '전쟁기계'의 성격을 가진다. 들뢰즈는 새로운 가치와 삶과 세계를 창조하려는 시도가 현재의 상태를 유지 보존 통합하려는 국가와 충돌하는 사태를 '전쟁'개념으로 파악했다. "국가장치도 아니면서 국가의 주권 외부에 존재하며, 법률에 선행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들뢰즈의 명제를 IMF는 그대로 따른다. 또한 "'전쟁기계'의 존재는 어떠한 폭력을 행사하지 않아도, 어떠한 전투를 벌이지 않아도 국가 장치나 국가인들에게 불안과 두려움을 야기한다."

 

앞에서 우리는 빚 없는 사회를 위한 지역적 차원의 이자 없는 은행, 가상 화폐의 통용 가능성을 보았다. 지역 차원 뿐 아니라 국민 경제 차원에서도 빚 없는 사회의 핵심은 여전히 이자다. 국민 경제 수준에서 당장 이자를 없애지는 못하더라도 이자 발생을 용인하되, 이것을 개인 소유가 아닌 사회적 소유로 바꾸는 즉, 이자의 사회화를 이룰 수 있다면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자의 사회화는 어떤 과정을 거쳐 실현될 수 있는가?

첫째, 이자의 사회화를 위한 출발은 은행의 국유화/사회화이다. 은행에 대한 감독을 강화하면서 은행 국유화를 유도해야 하며 이를 통해 은행에 대한 민주적 통제 수단을 확보해 나갈 수 있다. 금융과 신용 제도는 국가의 긴밀한 감독과 규제 속에서 발전했고 금융이 대형화할 수록 국가와 더 융합되었다. 

둘째, 중앙은행의 독립이다. 그런데 이 독립은 국민으로부터의 독립이 아닌 권력과 채권 지배 세력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한다. 중앙은행을 금융 전문가나 국제 금융 카르텔의 영향력에서 거꾸로 독립시켜 국가의 민주적 통제 아래 놓고 통화량 조절 및 시중은행의 규율을 다시세워야 한다. 

셋째, 이자 수입을 환수한다. 이것은 은행의 이자 수입은 물론 금융시장과 자산시장에서 발생하는 모든 이익도 이자로 보고 이를 회수하는 것을 말한다. 은행 수입의 80% 이상이 이자 수입이다. 이러한 수입은 대출을 통해 이뤄졌으므로 예금이자로 지급되는 부분을 제외하고 나머지 이자수입은 모두 국가에 귀속시킨다. 또한 자본으로서의 화폐 공급은 이자 수입에 대한 기대 및 업체의 신용도에 따라 이뤄지는 방식이 아니라 사업의 필요성과 지속 가능성, 공동체 기여율 등을 판단하는 민주적 심사를 통해 대출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예금과 대출 이자 없이 서비스 수수료로 운영되는 공공은행을 보편화한다. 이 은행은 발권은행인 중앙은행으로부터 직접 자금을 공급받고, 기업 대출 등 특수 목적 은행은 목적에 맞는 사업을진행한다. 주택과 가사 노동의 사회화 정책과 무상의료/교육 등 사회정책이 결합하면 개인 대출 규모도 대폭 줄어 빚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구조가 확보된다. 이처럼 이자가 없어지고 빚없이 살아갈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이 마련되면, 가계가 쓰고 남은 돈을 은행에 맡겨두고 필요한 사람이 대출을 받아가는 선순환구조가 확보된다. 

이 과정에서 화폐의 성격도 변화할 것이다. 유통 수단으로서 화폐는 더욱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겠지만, 지급과 부의 축적 수단으로서 화폐의 역할은 약화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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