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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2/18
    가라타니 고진에 관한 글 몇가지...(5)
    지음
  2. 2008/02/13
    먹고 살 궁리...(5)
    지음
  3. 2008/02/05
    외부공간, 조응공간, 집합주거...
    지음
  4. 2008/01/31
    '자기만의 방'을 넘어서
    지음
  5. 2008/01/25
    건물 몇 동과 책 한 권... 놀이(7)
    지음
  6. 2008/01/21
    도린과 고르의 생활(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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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08/01/21
    생활은 반드시 생활 자체를 위해서 길을 연다.(1)
    지음
  8. 2008/01/18
    집... 자동차...(9)
    지음
  9. 2008/01/17
    2층 침대 두 개가 있는 방(10)
    지음
  10. 2006/01/03
    마음이 가난한 자(4)
    지음

가라타니 고진에 관한 글 몇가지...

[고진주의자가 되다] 에 이어지는 글...

 

'빈집' 프로젝트가 점점 구체화되면서... 계속 생각나는 사람이 바로 가라타니 고진이다.

게스츠하우스의 구상은 여행중에 만나고 신세졌던 많은 사람들과 장소들을 통해 구체화된 것이지만,

기본적인 아이디어는 고진으로부터 나왔다고 할 수 있다.

 

가라타니 고진에 대한 몇가지 글을 보며 다시 고민중...

 

  

박가분,  가라타니 고진 비판 유감 중

 

(현대자동차 노조원이 많이 사는 지역을 중심으로 벌어진 이랜드 홈에버 불매운동에 대해 논하며...)

나는 노조라는 기존의 노동운동 조직을 중심으로 '소비자 운동'을 전개하는 이런 형태에 대해 주목한다. 이런 주체성이야말로 노동자-소비자로서의 프롤레타리아의 정식과 부합하지 않는가?

 ...

문제는 소비자 운동이라는 것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물적토대'가 필요한 법인데, 그러한 토대가 잘 갖추어진 노조중심의 노동운동과 달리 소비자운동에는 그러한 구심점이 결여되어 있다. 그게 소비자 운동의 가장 큰 약점인데, 위의 기사와 같이 결국 소비자와 노동자의 정체성은 다르지 않다는 것에 희망을 걸어봄직하다.

이랜드 불매운동이 의미가 있었다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가라타니 고진의 '소비자 운동'은 특정 상품에 대한 불매가 아니라, 상품 일반에 대한 불매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상품 일반에 대해서 불매하면서도 삶이 가능한 구조를 만드는 것이 고진의 관심이 아니었던가?

 

소비자 운동의 '물적토대'를 노동자 운동의 '물적토대'로 등치시키는 것은 노동운동의 한계에서 빠져나온 순간 다시 뒷문으로 들어가는 셈이다. 위 기사의 불매운동은 우연히 그 지역에 노조원들이 많이 있었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그다지 특별할 것이 없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울산 홈에버에서 소비하는 소비자는 노조원이 아니라 노조원의 아내와 아이들이다. 여전히 노동자는 노동하고 있고, 소비자는 소비하고 있다. 다만 홈에버가 아니라 이마트라는 것이 다를 뿐. 그마저도 잠시겠지만.

 

소비의 공간은 가족이고, 지역이다. 공장과 노조의 재구성이 필요한 만큼, 가족과 지역의 재구성 역시 필요하며, 이것이 없이는 노동자-소비자 어소시에이션은 존재할 수 없다.

박가분, 가라타니 고진의 질 들뢰즈 중 에서 재인용

 

'푸코의 맑스(갈무리,2004)'에 수록된 들뢰즈와 푸코의 대담 중 일부(192p)를 인용.

  "맞습니다. 하나의 이론은 꼭 연장통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의미심장한 것(le signifiant)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그것은 유용해야 하며 기능해야 합니다. 이론은 그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론가 자신부터 시작해 아무도 그것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 이론은 가치가 없거나, 시기에 적절하지 않은 것이지요. 우리는 하나의 이론을 개정하지 않고, 새로운 것을 구축해 냅니다. 우리는 다른 것들을 만들어내는 수 밖에 없습니다. 묘하게도 이러한 생각을 명확히 밝힌 사람은 순수 지식인으로 생각되어 온 프루스트입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지요. '나의 책을 바깥을 향한 하나의 안경으로 생각해 주십시오. 그것이 당신에게 맞지 않으면, 다른 것을 찾으십시오. 필연적으로 전쟁 도구가 될 당신만의 도구를, 스스로 찾으십시오.' 이론은 총체화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다양화의 도구이며, 스스로 다양화합니다. 총체화하는 것은 권력의 본성입니다."

 

윤여일, '몰락 이후' 쉰이 넘어 코뮨주의자 되다  중

 

즉 일하지도 상품을 사지도 말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노동자이자 소비자인 대중이 일하지 않고도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안정망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까닭에 가라타니 고진은 ‘생산자/소비자 협동조합의 연합’을 제시한다.
...
어소시에이션은 개인들의 자유로운 계약에 기초한다는 점에서 시장경제와 닮아 있지만 잉여가치를 발생시키지 않는다. 또한 공동체의 교환원리인 상호부조와 유사하지만 배타적이지도 구속적이지도 않다.

...

그러나 소비자운동은 실상 입장이 바뀐 노동운동이며, 노동운동 역시 소비자운동인 동안 자신의 국지성에서 벗어날 수 있다.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소비과정은 육아, 교육, 여가 등 생활세계 전영역에 걸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라타니 고진은 생산자/소비자의 협동조합을 통해 자본주의 바깥에서 생활의 지평을 만들자고 제안한다.

...

그렇다면 그가 기획한 현실운동은 어떻게 되었을까. 결국 가라타니 고진은 FA(Free Association)라는 또 하나의 조어를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가라타니 고진은 2002년 「FA선언」을 통해 NAM(New Association Movement)을 해산시킨다.

...

자신의 기대와 달리 NAM은 그의 유명세를 바탕으로 한 지식인들의 모임이 되었다. 가라타니 고진이 「FA선언」에서 밝힌 해산 이유 역시 NAM 운동을 지속할 운동체가 부재하다는 것이었다.

...

나 역시 지금의 가라타니 고진에 대해 호의적이고 싶지 않다. 그의 시도는 자신이 서 있는 장소와의 긴장감을 놓쳤으며, 그의 실패는 그마저도 이론적 완결성을 위해 희생되었다.

 

NAM이 구체적으로 어떤 운동을 했는지도 알려진 바가 별로 없는데... 해산했다 하고, 또  FA가 발표되었다고 하고, 그래서 가라타니 고진이 끝났다느니, 호의적이고 싶지 않다느니... 난리다.

 

그것이 지식인들의 모임이었다면,  가라타니 고진이 말했던 NAM은 시작도 안 한거라고 본다.  FA선언은 보고 싶지만, 아직 못봤는데 FA가 NAM과 특별히 다를 거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고진이 'NAM 운동을 지속할 운동체가 부재하다'는 것이 사태의 정확한 진단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태는 고진의 이론적인 결함과는 무관하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오히려 가라타니 고진의 문제는 조직론이 없었던 것이 아닐까? NAM을 기존의 노동운동 조직이 정책적 전환만으로 추진하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그렇다면 기존의 시민운동 조직이?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이 만나야 한다는 정도의 얘기라면 가라타니 고진이 아니라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얘기다. 공장과 가족이 그대로인 채,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이 그대로인 채, NAM은 가능하지 않다.

 

자본을 위해 노동하지도 말고, 소비하지도 말라는 대전제가 잊혀져서는 곤란한다. 즉 자본을 위한 생산 공간인 공장/농장과 자본을 위한 소비 공간인 가족/지역이 이 대전제 하에 근본적으로 변화하는 것, 그리하여 자본=스테이트=네이션을 넘어선 삶을 구성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면 노동자로서의 소비자운동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디디님의 [고진, 맑스, 공동체 화폐, 가능한 꼬뮤니즘.]  중

가라타니 고진의 말처럼
노동자는 두 가지 관점에서 자본에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일하지 않는 거다.  또 하나는 사지 않는 거다.
하지만 -_- 노동자는 고뇌한다. 딸린 처자식은 어쩌라고!
 
문제는 분명하다.
노동자(=소비자)들이 일하지 않고 사지 않는 것,
즉 자본주의적 관계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비자본주의적으로 일 하거나 살 수 있는 장소가 있어야 한다.
공동체 화폐는 그러한 장소를 만들기 위한 분투다.
"자본과 국가에 내재하면서, 그 원리를 대체하고 넘어서려는 운동.
([지역통화LETS에대하여])”
내재하는 외부-되기.

 

자본주의와 자본주의적 화폐의 가공할 속도는
그러한 외부에 자꾸만 폐쇄의 의지를 부여한다.
그러나 자족적인 공동체가 되는 순간 그건 이미 외부도, 운동도 아니다.
그냥 자본이 허용하는 다양성 중 하나에 불과할 뿐이다.
(수많은 공동체 마을들은 관광지가 되고
마을 바깥에서, 자본의 속도는 점점 빨라진다.)

 

비자본주의적으로 일하거나 살 수 있는 장소...

그것은 무엇보다도 삶의 공간, 주거의 공간이어야 한다.

그리고 주거 공간은 단지 소비의 공간이 아니라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생산의 공간으로서의 면모를 회복해야 한다.

그것은 현재의 전형적인 주거형태인 핵가족 주거, 개인 주거의 형태로서는 불가능하지 않는가?

 

폐쇄의 의지를 근본적으로 배제함으로써 자족적인 공동체가 되지 않는 공동체, 꼬뮨...

누구든지 맞아들여 친구로 만들수 있는 공동체, 언제든지 떠나서 친구를 만들고 또 돌아올 수 있는 공동체.

 

아마도 자본주의가 제공하는 만큼을 소비할 수 있는 비자본주의적인 생산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적 생산의 문제는 무엇보다도 필요 이상으로 너무 많이 생산한다는 것이니까.

반대로 비자본주의인 것은... 조금 생산하되 좋은 것을 잘 생산하는 것이며, 또한 덜 소비하는 것이다.

그리고 굳이 화폐로 구입하지 않더라도, 자본주의로 얻을 수 있는 자원은 꽤 많다. 자본주의 착취하기.

그나저나...  여전히 궁금한 LETS. 시스템도 다양하고, 운영하는 조직도 다양하고...

가라타니 고진이 말하는 몇가지 원칙만 가지고  멋진 LETS의 시스템을 구성하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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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살 궁리...

요즘 하는 거라고는 '먹고 살 궁리'밖에 없는데... 쉽지 않지만 재밌긴 하다.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하는 문제를 돈 버는 걸로 환원해서... '돈 벌어야지...' 해 버리면 답은 쉽다. 이 때부터가 지옥이지만.

하지만 '누가 어디서 어떻게 생산한 무슨 먹거리를 누구와 함께 먹고 또 버릴 것인가' 라는 질문과...
'어떤 동네에서 어떤 집에서 어떤 가구를 놓고 무엇을 하며 누구와 함께 살고 누구와 함께 이웃해서 살 것인가'하는 질문은 정말 중요하고 어려운 문제다.

이사를 열흘 정도 남기고 이래저래 고민이 많다.
건축에 관한 글들이 계속 눈에 들어오는 건 그래서다.

오늘도 재밌는 책 한 권 발췌...
녹색은 내 코멘트



서윤영, <<집 宇 집 宙>>, 궁리 중

74p
1661년 정승 이경석, "선조들이 집무하는 방들은 모두가 마루방으로서 온돌은 내간용으로밖에 쓰지 않았는데, 근자에는 모두 온돌로 바꾸니 그 구들을 덥히기 위한 땔감의 낭비가 심합니다."
18세기 초 실학자 이익, "마루방에 잘 때는 병이 없었는데, 온돌에서 살기 시작하면서 병이 생기고 있다."
19세기 초 실학자 이규경, "얼마전까지만 해도 공경귀척의 큰 집에도 온돌이 불과 한두 칸밖에 없어 노인이나 병자의 거처로 쓰였을 뿐, 여타 식구들은 마루방에서 잠을 잤다."
박지원, <<열하일기>> 중, 온돌의 결점... 바닥이 고루 따뜻해지지 않는 점, 벽체가 허약하여 틈새가 생긴 곳으로 역풍이 들어와 연기가 가득 차는 점, 온돌을 난방하기 위해 많은 연료가 소비되는 점...
서유구... 연료의 낭비, 수목의 남벌과 그에 따른 홍수와 산사태의 피해, 화재 발생의 우려, 연료를 절약하기 위해 한 방에 많은 가족이 기거하면서 겪게되는 불편함...

내노라 하는 실학자들이 온돌에 대해서 한마디씩 했다는 것이 재밌다.
주거의 형태, 에너지의 문제와 그에 따른 사회, 건강, 생태의 문제는 조선시대에서도 중요한 문제였던 듯.
집을 지을 수 없는 상황에서 에너지와 탄소 소비를 줄일 수 있는 난방의 문제를 검토해야할 듯.


86p
온돌은 단순히 구들을 데워 겨울을 날 수 있게 하는 것뿐 아니라 많은 면에서 우리 생활을 변화시켰다. 우선 실내에서 신을 벗는 독특한 문화를 낳았다. ...
둘째로 온돌은 공간의 가변성과 절약성을 낳았다. 민속촌에서 가서 옛 집들을 복원해 놓은 것을 보면 방의 크기가 매우 작다는 걸 느끼게 된다. 실제 한 칸 방의 크기는 그 폭이 여덟자(2.4미터) 정도로, 이는 20평형대 소형 아파트의 가장 작은 방의 크기와도 같다. 하지만 이방을 좁다고 느끼지 않은 것은 가구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대 주택에서는 식탁, 책상, 소파, 침대를 놓고 살지만, 실내에서 신을 벗었던 탓에 방바닥에 앉아 생활하는 일이 많았던 과거에는 이같이 덩치 큰 가구가 전혀 필요하지 않았다. 옷을 넣어두는 옷장과 이불을 넣어두는 벽장, 밥을 먹는 밥상과 공부하는 책상만이 필요했다. 더구나 상 위에서 밥을 먹으면 식탁이고, 책을 펴 놓으면 책상이 되는 공간의 가변성과 그에 따른 절약성은 매우 뛰어난 것으로, 실내에서 신을 신는 주거 형식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
셋째로 아랫목이라는 자리 구분과 함께 보다 끈끈한 가족 중심주의가 발전했다. ...
넷째로 온돌은 ‘혜(鞋)’라는 독특한 신발을 만들었다. ...

현대의 바닥난방은 공간의 가변성과 절약성에 있어서는 아랫목 윗목이 있는 온돌 보다도 유리하다.
그런데 왜 아파트에서는 장롱, 책상, 소파, 침대 등 거대한 가구들이 공간의 가변성을 질식시키고, 보다 더 넓은 평수의 아파트를 요구하고 있는 것일까.


100p
개인에게 각자의 침실이 주어지는 것은 사생활과 개인위생에 대한 개념이 등장하기 시작하는 18세기 이후의 일로서, 그 전에는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 침실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메소포타미아 궁전,  이집트 왕궁,  로마의  고급 단독 주택, 유럽의 고대와 중세, 고려 시대 봉당 등의 사례가 아주 재밌지만, 너무 길어 생략)

고려 시대 봉당에서 중세 침실까지 가족이 하나의 침실을 사용한 것에 대해, 현대의 우리는 사생활이 전혀 보장되지 않아 아주 불편했을 거라고 추측한다. 하지만 이것은 현재의 눈으로 과거를 해석한 결과일 뿐이다. 어쩌면 지금 우리의 생활도 중세인의 눈으로 볼 때 매우 이상해 보일 것이다. ... 식사는 공적이고 사회적인 일인 반면, 취침은 철저히 사적이고 개인적인 일로 취급되는 이분법의 이유는 사실 우리도 명확하게 설명할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가족 모두에게 개인 침실이 주어지고 심지어 나이가 아주 어리거나 노쇠하여 주위의 도움이 필요한 어린이와 노인에게까지 개인 침실이 주어진다는 것은 중세 사람에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일 수도 있다. 중세 사람들은 사생활에 그다지 집착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홀로 있으려 하지 않았다. 우리가 지금 ‘왕따’를 두려워하듯,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 홀로 남겨지는 것은 두렵고 피해야 할 일이었다. 물론 현대에도 조금 흔적은 남아 있어서, 교도소에 수감된 재소자에게 내리는 가장 가혹한 형벌은 독방에 감금하는 일이다.

유럽에서 개인의식과 프라이버시의 개념이 싹트는 것은 산업혁명과 관련이 있다. ... 워크숍이나 하우스처럼 사람이 거주하는 건물이 아닌, 비주거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이러한 형식은 주거 건물에도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과거의 서민 주택은 노동과 생활, 귀족 주택은 정치와 생활이 혼재된 곳이었지만, 비주거 건물이 등장하면서 주택은 노동과 정치와는 유리된 채 점차 주거전용 건물이 된 것이다. 또한 그것은 중세의 농노제나 봉공제 등을 대체한 새로운 노동 형태, 즉 임금 노동의 출현과 관계가 깊다.
작업장과 집이 구분되지 않았던 과거의 생산형태 대신 주택 외부에 마련된 공장에 나와 생산에 종사하면서 노동을 시간제로 계산되어 매매되기 시작한다. 따라서 노동 외 시간인 ‘사생활’을 누구라도 갖게 되면서 프라이버시 개념이 싹트고 이는 건축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더 나아가 문학에서 고백록이, 회화에서 자화상이 유행하게 된다. ... 당시 거울은 단순한 화장도구가 아닌, 자신의 내면세계를 비춰 보는 역할을 했다. 거울의 등장과 함께 관심이 개인 자신에게 쏠리게 되면서 회고록이나 고백록, 자화상이 등장하고 또한 개인의식과 사생활 및 그에 따른 개인 침실이 주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프라이버시는 재정의되어야 한다.
개인에게 방 하나씩이 원칙이면서도 부부는 같은 방을 써야 한다는 또 하나의 이상한 원칙.
지극히 외로움을 타면서도 자기만의 방을 고집하는 사람들...
내면세계, 개인의식, 사생활, 고백록, 자화상의 등장은 푸코를 떠올리게 하는데... 푸코가 학교, 감옥이 아닌 주거공간에 대해서는 어떤 얘기를 했더라...?
노동, 정치, 생활은 혼재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그에 맞는 주거형태는?


137p
사랑채란 남성전용 공간이라기보다는 주택 내에 존재하는 사회적 공간이었다. 현대의 주택은 식사, 취침, 휴식, 가족 단란 등과 같이 철저히 사적인 행위만이 일어날 뿐 손님을 접대하거나 행사를 벌이는 등의 사회적 행위는 일어나지 않는다. ... 조선에서 손님을 맞이하고 행사를 벌이는 등의 일은 사회적으로 중대한 의미를 가졌다. 사랑채에서 과객을 맞아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신문이나 언론 매체가 없던 시절 사회여론이나 소식을 알 수 있는 채널 역할을 했으며, 이때 얻은 정보와 지식은 후에 경제자본으로 환원될 수도 있는 귀중한 것이었다. 또한 대갓집의 사랑채에는 식객이나 문객이라 하여 오랜 동안 머무는 손님도 있었는데 이를 대접하는 것은 문화 예술을 후원하는 일이기도 했다. 문화나 예술, 학문이란 그 자체로는 생산적인 것이 아니어서 자본에 기생할 수밖에 없는데, 사랑채는 마치 17~18세기 프랑스 살롱의 역할을 했다고도 볼 수 있다.

신문과 언론 매체는 물론 인터넷이 있는 세상에서도, '과객을 맞아 이야기를 나누는 것'의 중요성은 강조되어야 하지 않을까?
경제자본으로 환원되지 '않는' 귀중한 정보와 지식의 형성 방법...
귀족이야 돈이 남으니까 투자차원에서 식객, 문객을 대접할 수 있다 치자. 우리는 불가능할까?
'자본에 기생'하지 않는 식객, 문객들과 함께할 수 있는 방법...


146p
민속촌에 마련된 집들을 볼 때 가장 먼저 느끼는 것은 실내 공간이 매우 좁다는 것이지만, 주택의 본질은 지붕이 덮인 실내 공간이 아니라 마당에 있다. ... 전통 건축에서 마당이 실외로 확장된 생활 공간이었다면, 현대 건축에서 정원은 조망과 휴식을 위해 예쁘게 꾸며놓은 공간이다.

마당의 본디 어원은 ‘맏+앙’이다. 여기서 ‘맏’이란 맏아들이나 맏딸 등에서 쓰이는 것처럼 ‘으뜸’ 혹은 ‘큰’이라는 뜻이며 ‘앙’은 장소를 뜻하는 접미사로서, 가장 큰 으뜸 공간을 뜻한다. 중요한 행사는 항상 마당에서 치러졌으며 평상시에도 가장 자주 사용되는 공간이 마당이었다.

마루의 어원은 '말' 혹은 '마리'로서 높다는 뜻을 갖는다. ... 마루를 뜻하는 한자, 상(床)과 청(廳)은 그 의미가 조금 다르다. 상이 물리적인 마루, 즉 남방기원설에 근거를 둔 고상주거를 말한다면, 청은 북방기원설에 근거를 둔 지배 공간 내지는 행정기관을 뜻한다. ... 청동기 시대의 마루는 상이면서 곧 청이었지만 철기 시대에 들어 상과 청의 역할이 분리되기 시작하면서, 단순히 여름을 나기 위해 만든 마루는 상이 되고 지배 계층에서 아랫사람을 내려다보기 좋게 만든 마루는 청이 되었다.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 사이의 공간으로서의 마당과 마루...
중요성 만큼이나 어원도 재밌고, 어감도 좋네.


182p
신석기 시대의 움집, 그곳엔 집 한가운데 부엌이 있었다. 집의 가장 주된 기능은 불을 피워 내부를 따뜻하게 하고 실내를 밝히며 음식을 조리하는 일이라서 화롯불은 곧 집과 동의어였다. 하지만 청동기 시대에 들어 집이 넓어지면서 부엌도 점차 전용 공간화되기 시작했다. ... 철기시대를 거치면서 부엌은 음식을 조리하고 방을 데우는 일만 전담하면서 구석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 고려 시대만 해도 부엌과 안방은 분리되지 않은 채 명칭도 정지와 봉당이라 불렸다. 부엌과 안방이 나뉘어 져 있는 형식으로 굳어지게 된 것은 조선 시대에 이르러서이다.
... 1970년대 새마을 운동과 함께 입식 부엌이 도입되고 이름 또한 주방으로 바뀌게 된다. 마당에서 신을 신고 들어가던 부엌은 이제 마루나 거실에서 바로 드나들 수 있도록 실내로 들어온 것이다.
... 그 후로 한 세대가 지난 요즘, 아파트는 과거 신석기 시대의 움집처럼 집 한 가운데 주방이 들어서는 것으로 또한 번 변신을 하고 있다. 주부가 주방에서 일을 하면서도 집안 전체를 통어할 수 있도록 거실과 붙어 있거나 혹은 거실을 제치고 집안의 한 가운데 자리잡기도 한다.

특정 시대나 사회에서 부엌이 구석진 곳에 위치할수록 그 사회의 여성들은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집 안에서 가사에 전념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동일한 시대와 사회에서 어떤 집의 부엌이 구석진 곳에 위치한다면 그 집은 부유한 상류 계층에 속한다. 그리고 노예제 사회나 노동 임금이 싼 사회에서는 부엌이 구석진 곳에 위치하는 경향이 있으며, 이상의 세 가지 경향은 반대의 경우도 성립한다.

주방이 여성만의 공간이기를 그치고 또 단순한 소비의 공간이 아닌 생산의 공간이 된다면... 주방은 어떻게 변화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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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공간, 조응공간, 집합주거...

재밌다.
천천히 다시 읽어봐야지...



손기찬, <외부공간의 회복 - 조응공간> 중, <<우리의 도시주거>>, 도서출판 미건사

"거주라는 단어는 지붕이 뽀족하거나 몇평의 규모를 갖고 있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첫째, 그것은 다른 사람과 만나 물건을 교환하거나, 대화하거나, 감정을 전달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여러가지의 가능한 삶을 경험하는 것을 뜻한다. 둘째, 그것은 다른 사람과 동의하게 됨을 뜻한다. 즉, 어떤 가치를 공유하는 것이다. 셋째, 우리자신의 조그만 세계를 갖게 된다는 의미에서 자기자신임을 뜻한다." - 크리스챤 슐츠 <거주의 개념> 중에서

"'가로의 미학'을 성립시키기 위해서는 '내부'와 '외부'의 공간영역에 대하여 확실한 영역의식을 갖도록 해야 한다. 즉 자신의 집 바깥까지도 '내부화'하여 생각할 것, 자신의 집 안까지도 '외부화'하여 생각할 것, 2개의 영역에 대하여 공간을 동일화하여 생각할 것, 또는 공간을 통일하여 생각할 것이 요구된다.
우선 자신의 집을 '내부'의 공간으로 생각해 본다. 그러면 자신의 집 앞에 있는 도로는 '외부'공간이라 할 수 있다. 다음에 공간영역을 얼마간 확대하여 생각해 본다. 전면도로와 같은, 자신의 집과 관계가 있는 부분을 내부화하여 '내부'로 생각해 본다. 다시 영역을 더욱 확대하여 동네 안까지를 내부화하여 '내부'로 생각한다. 이렇게 차례로 내부화하여 생각할 때, 어디까지를 내부화 할 수 있는가가 중요한 문제가 된다." - 요시노부 아시하라, <외부공간의 미학> 중에서

"나는 민중이 만드는 과정에서 기쁨을 얻는 것을 선택하고 싶으며, 민중이 이용하는 과정에서 기쁨을 얻는 것을 만들고 싶다. " - 윌리암 모리스

사람들이 모이고 사람들이 이동한다. 거기에는 만남이 있고, 부딪힘이 있고, 체험이 있다. 어쨌거나 모든 집합주거는 그 자체내에서 공공적인 특성을 갖는다. 설계의 책임은 이러한 공공의 친교를 유도하는 상호작용을 고무할 수 있는 설정을 제공하는 것이며, 알도 반 아이크가 지적했듯이 공공영역과 개인영역간의 중요한 '사이'공간이 있다고 하였다. 공간이야 말로 공(空)의 간(間) 즉, 공의 관계의 연계로서 발현되며, 이러한 흐름위에 사이공간은 건축적으로도 외관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인임에는 틀림이 없다. 팽개쳐진 '사이'가 아니라 상호의존(공생)적인 유기체 관계망으로써의 너무 완벽하고한 프라이버시와 기능의 배분이 아니라 오히려 적당한, 애매한 공간조차도 가치있는(애매함을 갖지 못한다면 변화될 수도 없는) 교호된 조응공간에 의해서 우리의, 옛날의 자연스러운 조정공간이었던 모여삶의 단란함과 모여 산다는 것의 원형에 대한 재인식이 찾아져야 할 것이다.



황기원, <커뮤니티의 변용과 지향> 중, <<우리의 도시주거>>, 도서출판 미건사

도시주거의 많은 모델들이 실패한 원인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로 정리될 것이다.

1) 도시공동체는 촌락공동체와 근본적으로 그 존재양식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도시 주거는 도시 안에 촌락공동체를 재현하고자 하였다.

2) 도시 안에 촌락공동체를 재현함에 있어, 도시 전체를 농촌처럼 바꾸지는 못하고 도시의 일부만 농촌처럼 바꾸고자 하였다. 따라서 개방시스템인 도시의 일부를 폐쇄시스템인 농촌으로 국한하고 '부분적정화'하려는 방식은 처음부터 실패의 소지를 안고 있었다.

3) 커뮤니티 개념의 변용
  • 정주성 : 현대도시에서 현대인들은 한 단위 주거에 '거처'를 마련하지만, 삶의 양식은 이동성을 전제로 하므로 생활권은 매우 넓어졌고 복합적으로 변모하였다. 따라서 커뮤니티의 정주성 자체가 이전과는 매우 달라졌다. 장차 예상되는 정보화 사회에서는 이와 같은 정주성의 개념은 또 한번 변용되어야 할 것이다.
  • 자족성 : 이동을 전제로 한 삶의 양식이라는 것은 결국 커뮤니티 안에서 삶에 필요한 자원을 다 획득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단위 주거에서 많은 가사서비스가 외부에 의존하게 되었다. 따라서 커뮤니티가 제공하는 서비스의 자족성은 가사부분은 확대되지만, 비가사부분은 점차 축소된다.
  • 동질성 : 도시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동질적이기 보다는 이질적이다. 이 이질성은 도시를 다른 정주양식과 구별하는 중요한 징표이자 존재이유가 된다. 그러므로 이런 성향을 역행하면서 커뮤니티 구성원의 동질성을 강요하는 모델은 실현되기가 어렵다.
  • 규모의 제한 : 자족성을 확보하는 방안은 커뮤니티를 도시 전체 규모로 넓힌 도시커뮤니티, 또는 지구 전체 규모로 넓힌 지구 커뮤니티를 구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개념적으로 불가능하고, 또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4) 따라서 공간적으로 전통 커뮤니티의 형식을 지니고 있지만, 그 내부에 서식하는 인간의 삶의 양식은 이미 그것을 벗어나고 있다. 그래서 규모의 제한과 자족성은 인간을 사회적인 관점에서 억지로 사회집단으로 얽어매는 기준이 되기 보다는 매우 공리적인 관점에서 제공하는 수준으로 작용한다.

5) 게다가 물적 환경의 조작을 통한 사회공학의 실현은 방법론상에서 큰 한계가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회과학자, 사회공학자들은 물적 환경에 대해 소홀히 접근한 반면에 환경 설계가들은 물적 환경의 조작에는 열중하지만, 그들이 추구하는 사회구조에 대해서는 대단히 소박하게 접근한 것이다.

6) 특히 우리나라와 같이 근대화 과정이 환경의 도시화, 경제의 산업화, 정치의 민주화가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진 경우에는 전통적 주거문화의 급격한 해체와 쇄신된 주거문화의 통합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였다. 다시 말해서 이 주거모델들이 우리 자신의 생활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 실패요인 중에서 가장 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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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의 방'을 넘어서

버지니아 울프가 얘기했던 '자기만의 방'의 중요성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버지니아 울프가 건축가였다면, 그녀는 어떤 집을 지었을까?
신축 풀옵션 원룸 건물을 지었을까?
(나는 버지니아 울프는 읽지 않았다. 대학 1학년 때 독립할 무렵, 그냥 책 소개만 보고도... '아 멋지다. 역시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해'라고 멋대로 감동한 적이 있었을 뿐. 나는 그녀에 대해 얘기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냥 '자기만의 방'에 대한 얘기를 하는 중이다.)

'자기만의 방'만 필요할까?
자기만의 거실, 욕실, 화장실, 주방, 서재, 옷방, 정원, 수영장.... 은 필요하지 않을까?

개인에게 사적인 공간은 얼마나 필요한 것일까?


루이스 멈포드의 눈에는 그처럼 프라이버시라는 개인적 사람의 영역도 없고, 연인들 간의 내밀한 관계도 보장되지 않는 중세도시의 가족이 근대적인 것보다 훨씬 더 개방적인 세계로 표상된다. 즉 중세의 가족은 부모자식이나 핏줄을 나눈 친척은 물론, 함께 살며 일하는 도제나 노동자들, 그리고 하인들까지 포함하며, 그들의 공통의 삶이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개방적인 단위였다. 또한 노동과 생활이 분리되지 않아서, 주거공간과 작업장은 하나로 결합되어 있었다. ...

작업장이 가정이었고, 상인의 상점 역시 마찬가지였다. 가족 구성원은 같은 식탁에서 밥을 먹고, 같은 방에서 일하고, 같은 방에서, 혹은 공동 홀에서 잠을 잤으며, 가족기도에 참가하고, 공동오락에 참여했다. ... 조합 자체도 일종의 가부장적 가족이었으니, 가정 내에서 질서를 유지하고 도시정부와는 전혀 별개로 형제들에 대한 작은 범법 사건을 처벌하고 벌금을 물렸다. ... 이 노동과 가정 생활의 친근한 결합은 중세기 가정집의 살림살이를 좌우했다. ...

하나의 가족과 그 외부자의 경계도 매우 가변적이고 약했다. 친소관계에 따라 함께 거주하는 가족의 외부는 친지와 친구, 이웃으로 구분되었는데, 이들은 서로의 집에 드나드는 것이 자유로웠으며, 많은 경우 서로 초대하고 방문하며 함께 지냈다. “로지아(loggia), 이웃집, 널찍한 벤치로 둘러싸인 도시의 광장들은 날씨가 좋은 아침이나 저녁이면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사람들은 자주 집으로 손님을 초대했고, 이 집 저 집으로 자주 오고 갔다. ... 손님에 대한 이러한 환대는 잘사는 사람에게만 국한되지 않았다. 덜 잘사는 사람들도 재력이 허용하는 한 자신의 집을 친척과 친구, 이웃에게 개방했다. 심지어 어떤 이유에서건 방랑하는 외부인에 대해서도, 적절한 음식과 잠자리를 대접하는 것이 귀족들의 경우 관대함과 미덕으로 간주되었다. ...

우리는 주거공간의 역사를 발전이라는 개념을 매개로 ‘사적 욕망’이나 ‘사생활의 욕망’이라는 뿌리로 귀착시키려는 모든 종류의 관념과 결별해야 한다. 이전의 모든 주거공간을 오직 사생활의 공간을 완성하기 위한 전사(前史)로서 취급하는, 그럼으로써 사생활 자체를 주거 공간에 내적인 본질로, 심지어 존재 자체의 본질과 결부된 어떤 것으로 간주하는 모든 종류의 관념과 결별해야 한다. 또한 사생활 내지 사적공간을 일종의 ‘인간 조건’ 내지 주거공간의 초월적 목적으로 간주하는 모든 종류의 관념과 분명하게 결별해야 한다. ‘사생활’에 관한 19세기적 관념에서 벗어나 새로운 생활의 방식, 새로운 주거공간을 사유할 수 있기 위하여.

- 이진경, <<근대적 주거 공간의 탄생>> 중에서


유럽의 중세를 얘기하고 있지만, 우리의 과거와도 멀지 않은 것 같다.
방 한칸에 한가족이 몰아서 자던 주거형태...
조그만한 자취방이나 기숙사에 여러명이 같이 살던 주거형태...
가난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돈 없는 학생 시절에 일시적으로 있을 뿐인 주거형태라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왠지 그 때가 즐거웠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가?
이러한 주거형태는 현대 사회에서는 오래 지속될 수 없는 것일까?
대학가 앞 '풀옵션원룸'의 확산은 대학생들과 그들의 집단에 가져온 효과는?

돈없는 배낭여행객들이 주로 이용하는 6명에서 18명까지도 한 방에서 자는 도미토리 형식의 주거형태는 어떠한가?
여행지에 대한 온갖 정보가 교류되고, 낯선 사람들과 짧은 언어만으로도 소통의 기쁨을 느끼는 공간...
이러한 공간에서 쭈욱 사는 것은 생각할 수 없나?


미구엘이라는 이 멕시코인은 미망인의 아들이었다. 미망인은 무를 재배하여 그것을 부근 도시에서 장사를 하는 어떤 사기꾼 같은 상인에게 팔아 4명의 아이들을 키웠다. 아이들 외에도 언제나 외부인들이 미망인의 집에서 식사하고 잠을 잤다. 미구엘은 뮐러씨의 초대로 독일에 갔다. ...
독일에 간지 6개월 뒤에 써 보낸 편지속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뮐러씨는 진짜 신사처럼 행동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독일인은 너무나 많은 돈을 가진 가난뱅이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타인을 돕지 않습니다. 아무도 자신의 집에 사람들을 데리고 오지 않습니다.
미구엘의 견해는 과거 천 년간의 상황과 인간의 태도를 잘 반영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임금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생활의 자립과 자존에 뒷받침된 가정을 갖지 못하고, 스스로의 생활자립을 기초 지우는 여러 수단을 빼앗겼으며, 타인에게 아무런 생활자립의 원조도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무능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태도 말이다.

- 이반 일리히, <<그림자 노동>> 중에서


사적인 공간과 공적인 공간의 구분,
소비의 공간과 생산의 공간의 구분.
생산 노동과 재생산 노동의 구분.
가족과 이방인의 구분.
이러한 구분을 가로지르는 주거형태는 어떤 형태가 되어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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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몇 동과 책 한 권... 놀이

행복의 건축 - 10점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이레
 
 
 
책 속에서 재인용.
르 코르뷔지에,  - 고객들에게 그들의 소유물을 최소로 유지하라고 권하며......
"오늘날 가정 생활은 우리가 가구를 소유해야 한다는 개탄스런 관념 때문에 마비되고 있습니다. 그런 관념을 근절하고 그 대신 장비라는 관념을 도입해야 합니다. "
"[현대인이] 원하는 것은 수도사의 방이다. 조명과 난방이 잘 되어 있고 모퉁이에서 별을 볼 수 있으면 그만이다."
 
'실행가능한 모범'
'건물 몇 동과 책 한 권'
'백 명'
'자신의 규모나 건축 비용과는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영향'
'끈기와 조심성' 그리고 '게임'
"
취향의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아주 많은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절망하지 않도록, 이전의 미학적 혁명을 이루는데 필요한 수단들이 얼마나 보잘 것 없었는지 생각해 보는게 좋겠다.
 
다른 사람들이 따라올만한 실행가능한 모범을 제시하는데 보통 건물 몇 동과 책 한 권이면 충분했다. 보통 '이탈리아 르네상스'라는 어마어마한 이름으로 알려진 발전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참가자들이 이뤄낸 것이라고 상상하지만, 니체는 그것이 실제로는 불과 백명 정도가 해낸 일이라고 말한다. 또 교과서에서 '고전주의의 재탄생'이라고 부르는 혁신 작업은 그보다 적은 수의 옹호자들에게 의존했다. 브루넬레스키의 고아원이라는 단 하나의 건물과 레오네 바티스타 알베르티의 <건축론>이라는 한 권의 논문만으로도 세계는 새로운 감수성의 세례를 받을 수 있었다. 팔라디오 스타일을 영국의 풍경에 박아 넣는데는 콜런 캠블의 <영국의 건축가들> 단 한 권이면 충분했고 20세기의 환경을 구축한 많은 것들의 출현을 결정하는 데는 르 코르뷔지에의 <새로운 건축을 향하여> 200여 페이지면 충분했다. 어떤 건물들 - 슈뢰더 하우스, 판스워스 하우스, 캘리포니아 케이스 스터디 하우스 등 - 은 자신의 규모나 건축 비용과는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이 모든 건축적 변화에서 처음 운동을 시작한 사람들의 끈기는 그들이 이용할 수 있었던 자원만큼이나 중요했다. 건축의 위대한 혁명가들은 예술적인 면과 실용적인 면을 겸비했다. 그들은 그림을 그리고 생각할 줄도 알았지만, 의뢰인과 정치가들을 달래고, 유혹하고, 괴롭히고, 또 끈기와 조심성을 잃지 않고 그들과 오랫동안 게임을 할 줄도 알았다.
"
 
 
그리고 또 한 권...
놀이의 달인, 호모 루덴스 - 10점
한경애 지음/그린비
 
기분 좋은 선물...
아직 다 읽지는 못했지만... 가공할 정도로 희망적인 문장 하나...
 
"놀이는 언제나 더 잘 노는 법을 가르쳐준다."
 
"일단은 놀기 시작해야 한다. 정말로 잘 논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의 즐거움을 자극하고 소비하는 무수한 장난감들 사이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걱정하지 말자. 서툴게 시작해도 좋다. 일단 놀기 시작하면 우린 점점 더 잘 놀게 될 테니 말이다. 게다가 그건 무엇보다도 즐거운 일일 것이다."
 
풋. 노~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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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린과 고르의 생활

지음님의 [Farewell to Andre Gorz] 에 관련된 글.

고르의 작품이 처음으로 번역되었다.

D에게 보낸 편지 - 10점
앙드레 고르 지음, 임희근 옮김/학고재

대표적인 저술들이 단 한권도 번역되지 않은 상황에서,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라는 식으로 포장되어,
순식간에 번역, 출간된 그의 마지막 편지.
가격에 비해 지나치게 얄팍한 책 두께만큼이나 얄팍한 현실에 화가 나서 안 읽을라다가... 결국 읽었다.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기대한다면 실망할게다.
그들의 죽음을 다룬 신문 기사 한 편 이상의 감동적인 장면은 찾아보기 힘들다.
철학적인 면모를 발견하기를 기대하기도 어렵다.
분량 자체도 얼마 없긴 하지만, 들뢰즈와 바타유 등에 대한 철학적인 언급들은 번역자가 이해하지 못한 채 옮겼음이 틀림없다.

오히려 봐야 할 것은 그들의 생활이다.


소파, 책꽂이, 탁자, 의자, 전기난로... 당신은 마치 수도자같은 나의 이런 세간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지요. 나 또한 당신이 그것을 받아들여준다는게 놀랍지 않았고요.

우리는 출발할 때 가진 것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거의 모든 것을 둘이서 공유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그때까지 살아온 대로 살겠다고, 그리고 당신의 눈길과 목소리와 향기와 가는 손가락과 당신이 당신의 몸으로 사는 방식을 그 무엇보다도 사랑하겠다고 동의하는 것만으로 미래는 온통 우리에게 활짝 열리게 되어 있었지요.

우리는 한 번도 생활과 소비 수준을 우리의 구매력 수준에 맞춰 높인 적이 없었습니다.
내가 기억하는 한 나는 늘 ‘호사스러운’ 생활 방식과 낭비를 싫어했습니다. 당신은 유행을 거부하고 당신 나름의 기준에 따라 유행을 판단했지요. 필요 없는 것을 공연히 필요하게 만드는 광고와 마케팅에 휘둘리지 않으려 애썼고요.
... 그 뒤 10년이 지나 우리는 결국 낡은 오스틴 차를 한 대 샀습니다. 차를 샀다고 해도 개인의 자가용 소유가 가증스런 정치적 선택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고만고만한 삶에서 벗어날 수 잇는 가능성을 준다고 큰소리치면서 사실은 개개인을 서로 경쟁시키는 짓 말입니다.
... 그 때를 떠올리니 당신이 일곱 살 때부터, 진정한 사랑은 돈을 무시할 수 있어야 한다고 결론 내린 것이 생각납니다. 당신은 돈을 무시했어요. 우리는 종종 돈을 기부하곤 했습니다.

당신이 회복하는 동안, 나는 예순 살이 되면 은퇴를 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예순 살이 될 때까지 몇 주 남았는지 헤아리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음식을 만들고 당신이 힘을 되찾도록 도와줄 유기농산물을 사러 다니고 어느 대체요법을 연구한 사람이 당신에게 권한 기막히게 잘 듣는 치료제를 바그람 광장에 가서 주문하곤 하는 일에 재미를 붙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직업.

도린의 직장... 극단 배우, 화가들의 모델, 영어 튜터, 헌 종이 수집, 관광 가이드... 당신은 어떤 일을 해도 당신만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설령 노예선을 탔다 하더라도 당신은 훨훨 날개를 달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그런 일을 겪을 때마다 의기소침해졌지만요.

고르의 직장... 세계시민들 사무국장 비서, 화학제품 제조회사 자료정리 및 서류번역, 보험회사 직원, 탐정소설 번역, 유네스코 독일어 번역, 인도 대사관 무관의 비서, 석간 <파리 프레스> 외신 종합면 작성.


그들이 만든 공간...

우리의 삶은 바뀌었습니다. 우리의 작은 아파트에 손님들이 많이 찾아왔습니다. ... 우리는 세계의 중심에 살고 있는 셈이었습니다. 일로 만나는 사람들과 우리에게 정보를 주는 사람들, 우리 친구들 사이의 구분은 모호해졌습니다.

“자율공간을 확장하되 그 자율공간을 단지 사적으로만 여겨서는 안 된다.”


실존주의... 생태주의...

‘실존주의자들’, 즉 정치권력에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함께 살아가며 대안적 목표를 실천하려고 꾸준히 시도하면서 ‘삶을 바꿀’ 결심을 한 사람들...

생태주의란 삶의 양식이 되고 매일의 실천이면서 끊임없이 또 다른 문명을 요구하는 것이더군요... 나는 내 인생을 직접 산 게 아니라 멀리서 관찰해 온 것 같았습니다... 당신은 늘 나보다 풍부한 사람입니다. 당신은 모든 차원에서 활짝 피어난 사람입니다. 언제나 삶을 정면돌파했지요. 반면에 나는 우리 진짜 인생이 시작되려면 멀었다는 듯 언제나 다음 일로 넘어가기 바쁜 사람이었습니다.


고양이, 어슐러 르귄... 푸훗.

작은 시골집으로 이사하고 얼마 안돼서 당신은 회색 줄무늬 고양이를 집에 들였습니다. 굶주린 행색으로 우리 집 현관문 앞에서 항상 문을 열면 기다리고 있던 고양이였지요. 고양이 피부에 오른 옴도 치료해주었습니다. 고양이가 처음으로 내 무릎에 뛰어올라 앉았을 때, 나는 정말이지 영광스럽기까지 했답니다.

앞으로는 우리를 미래에 투사하지 말고 이번에야 말로 정말 우리의 ‘현재’를 살아야 하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미국에서 가져온 어슐러 르귄의 책 두 권을 읽었습니다. 그 책 덕분에 이런 결심을 할 힘이 생겼습니다.


아무도 옮길 사람이 없다면... 고르의 <경제적 합리성 비판> 번역이나 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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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은 반드시 생활 자체를 위해서 길을 연다.

지음님의 [2층 침대 두 개가 있는 방] 에 관련된 글.


다이 호우잉, <사람아 아, 사람아> 중

인생이란 것은 과거 우리가 상상했던 것처럼 멋진 것은 아니다. 하물며 과거에 상상했던 것만큼 무서운 것도 아니다. 인생은 인생일 따름이다. 모순으로 가득 차고 끊임없이 흔들린다는 사실이 바로 인생의 매력이라고 생각된다. 그것은 인간의 영혼을 삼켜 버리기기도 하지만 인간의 영혼을 드높이 단련시키기도 한다. 지금 나는 인생의 갖가지 고통에 직면해 있다. 그리고 바로 그 고통 속에서 나는 인생의 가장 귀중한 의미를 깨닫고 있는 것이다.


"생활은 반드시 생활 자체를 위해서 길을 연다." - 레닌(레닌이 어디서 이런 얘기를 했을까? 아시는 분 손!)


인생이란 얻는 것과 잃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얻는 것을 좋아하고 잃는 것을 싫어한다. 그러나 잃는다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때로는 잃지 않으면 얻을 수도 없는 법이다. 얻어도 거만해지지 않고 잃어도 우울해지지 않는 경지에 달한다는 것은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우리들은 다만 득실을 따지는 기분에 스스로가 좌우되지 않도록 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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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자동차...

옆에 발레리의 글은 프라이부르크에서 묵었던 친구집에서 본 글귀다.

사는대로 생각하게 된다...

무서운 얘기지만 별 거 아니다.

 

자동차를 갖고, 자동차를 몰게 되면...

길이 넓어지길 바라고, 터널이 뚫리길 바라고, 고속도로가 놓이길 바라게 된다.

또, 기름값이 내리길 바라고, 유류세가 없어지길 바라고, 자동차값이 더 싸지길 바라고, 현대자동차가 잘 나가길 바라고, 파업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고...

또, 차창 밖 공기가 맑아지길 바라는 대신, 에어컨과 공기청정기를 구매하게 된다.

모르지 요트를 갖게 되면 대운하도 찬성하게 될지...

"

자동차가 우리의 삶에 가져다준 모든 이득마다 그에 대응하는 손실이 있다. 어떤 신체부자유자에게 축복이 되는 바로 그 자동차가 사고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을 평생토록 신체적 부자유자로 만든다. 어떤 노인들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게 허용하는 바로 그 자동차로 인해 다른 노인들은 분주한 거리에 한발짝도 나가지 못하고 갇혀 지내게 된다. 어떤 아이들을 디즈니랜드로 데려다 주는 바로 그 차들 때문에 훨씬 더 많은 아이들이 자기네 동네길에서 자유롭게 놀지 못한다. 우리들 중 몇몇을 편하게 직장에 갈 수 있게 하는 자동차들이 다른 사람들의 출근길을 점점 더 힘들게 만든다. 우리를 병원에 빨리 데려다 주는 바로 그 차들이 없었다면 애당초 우리가 병원에 갈 필요가 없었다. 우리들 중 몇몇의 사교생활을 넓혀준 바로 그 차들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들은 동네와 거리를 잃고, 친구와 이웃 사람들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이러한 불유쾌한 부작용을 넘어서 아마도 훨씬 더 불길한 문제가 있다. 즉, 자동차는 현대인의 영혼을 점령해버린 것이다. 자동차는 점차로 자아를 대신하고 있다.

"

- 볼프강 주커만, {파국을 향해 가는 자동차}, [녹색평론선집1], 녹색평론사

 

주식을 사면 주식가치가 오르길 바라고 기업과 금융 산업이 잘 나가길 바라게 된다.

집을 사면 집값이 오르길 바라게 되고, 철거와 재개발을 바라게 된다.

'가구들과 소유물들'이 많아질 수록 더 넓은 집 더 '안전한' 집을 바라게 된다.  

"

집과 가옥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가옥은 사람들이 가구들과 소유물을 보관하는 곳이다. 그것은 사람들 자신보다는 가구의 안전과 편의를 위해 마련된 곳이다. 간디의 오두막이 함축하는 것은 인도 사회와의 완전한 조화를 이룸으로써 가능해지는 기쁨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소유하고 있는 불필요한 물건이나 상품들은 주위 환경으로부터 행복을 섭취할 수 있는 사람의 능력을 위축시킨다는 것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

- 이반 일리치, {간디의 오두막}, [녹색평론선집1], 녹색평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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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 침대 두 개가 있는 방

다이 호우잉이 쓰고 신영복 선생이 옮긴 <사람아 아, 사람아!>를 다시 보고 있다.

보고 있던 책이 너무 난해한 탓에 볼 것이 없던 차에,

선배집에서 굴러다니는 책에 우연히 눈이 갔던 탓이다.

한 12년, 아니 15년 만인가?

 

재밌다.

예전에도 재밌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그 때의 내가 아래와 같은 문장에 주목할 수 있었을까?

시 왕은 3층 화장실 옆의 작은 방을 열었다. 너무나 초라한 방이었다! 몹시 낡은 나무 상자 하나와 책이 가득한 선반 몇 개가 있는 것 외에는 가구라고 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방에는 2층 침대가 두 개 놓여 있었다. 호 아저씨는 아래쪽에서 자고 위쪽에는 물건들이 아무렇게나 쌓여 있었다. 또 하나의 2층 침대는 비어 있었는데, 시 왕의 이야기에 의하면 단신 부임한 교직원이나 노동자가 그들의 가족이나 친구를 하루 이틀 묵게 하는 데 사용된다고 했다. 침구는 더더구나 볼품이 없었다. 이불은 퇴색되어 꽃무늬가 회색에 가까웠고 그나마 몇 군데는 솜이 삐어져 나와 있었다. 베게는 작고 딱딱했으며 베갯잇 대신 그냥 수건을 감아 두었을 뿐이었다.

호 젠후라는 사람... 사랑과 혁명에 상처를 입고 떠나, 하루하루 '노동을 팔아서 밥으로 바꾸'고, 단 두 권의 책 <홍루몽>과 <마르크스 엥겔스 선집>을 동무삼아, 10여년을 홀로 세상을 유랑하다 돌아온 사람의 방이다.

 

사람에 어울리는 방이다.

단지 허름하다는 것 말고, 비어 있다는 것, 혼자 사는 방에 2층 침대가 두 개 있다는 것...

'자기만의 방'에 누구라도 묵고 갈 수 있고...

손님이 묵고 어울리게 되면서 주인과 손님의 구별이 희미해지고...

마침내 자신도 손님의 한 사람이 되어...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게 하는 방...

 

그런 방, 그런 집을 만들어보고자 합니다.

 

 

 

그런데... 문득...

  • 홍루몽은 어떤 책인고... 갑자기 관심이 가네...
  • 한반도의 온돌방 구조에서 침대는 바보짓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2층 침대는 좀 끌린다. 한 방에 4명이 널부러져서 자는 것 보다는... 왠지 최소한의 개인공간 확보와 공중 공간의 활용이라는 측면에서 포기하기 힘든 장점이 있는 듯... 일반적인 방 구조에서 일부분을 복층화 하는 것이 가능할까? 흠...
  • 어서 마저 읽어야지... 한 번 본 건데도... 감동은 기억하는데 스토리가 거의 기억이 안난다... ㅠㅠ 해피엔딩이었던 것 같긴 한데... 기억력 면에서는 십 몇 년 전의 내가 쫌 더 낫다는 걸 인정해야 하나... ㅋ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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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가난한 자

가라타니 고진, [윤리21]

신란(일본의 승려이자 불교철학자)

성경의 저자(들)

예수

지음

맑스

 


가라타니 고진의 재미에 푹 빠져있다. 한 때 좀 읽다가, 그래서 뭐하자는 건가가 참 갈수록 애매해진다 싶어 그만뒀었다. 그런데 우연히 그의 인터뷰 기사를 보게 되었고, 그가 아주 구체적인 운동을 제안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 배경을 알기 위해 다시 읽기 시작했다. 읽다보니 이것 저것 재밌는게 많은데, 다음은 그 중에 한 가지.

 

예컨대 어떤 사람이 평생 사람이나 동물을 죽이지 않아도 된다면 그것은 돈이 있어서 그러한 입장에 놓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손을 더럽히지 않고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권력자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자신의 의지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아무도 죽이지 않았으니까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는다. 신란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확히 읽지 않으면 거꾸로 읽을 가능성이 많다. 정확히 읽자.

 

선인임에도 왕생을 얻는다. 하물며 악인이랴.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항상 말하기를, 악인도 왕생한다, 하물며 선임임에랴. ...

- [단니쇼] 제 3조

 

... 그가 이렇게 말한 시점에서 '악인'이란 종래의 계율에서 볼 때 악으로 간주되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의미했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악을 면한 부자나 지배계급이 구원된다면 악을 강요당하는 사람들이 구제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구원은 악인으로부터 시작된다? 악인의 운명애. 초인이 된 악인. 예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 예수께서 이말을 들으시고,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치 않으나 병자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동물을 잡아 나에게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가를 배워라. 나는 선한 사람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하고 말씀하셨다.

- [마태오의 복음서] 9장 10절-13절

 

니체도 여러번 얘기하곤 했지만, 예수는 멋진 인간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부자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거듭 말하지만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 [마태오의 복음서], 19장 23절-24절

 

크리스트교에서는 "가난한 자는 행복하다"라는 예수의 말을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라고 바꿔 말한다. 정말 절묘하지 않은가? 이를 이렇게 명료하게 표현할 수 있는 고진도 대단하지만. 그러면 부자라도 마음이 가난하면 되는 것이다. 교회를 살찌우는 것은 부자일 것이라는 것은 명확하다. 이러한 논리의 전도가 필요했던 이유? 다시 말해 현실의 사회적 관계는 그대로 두고 개인의 내면만 착하면 된다는 말이다. 뭐 굳이 종교를 비판할 생각은 없다. 맑스도 얘기했지만, 종교에 대한 비판은 이미 끝났다.

 

종교상의 불행은, 첫째로 현실 불행의 표현이고 둘째로는 현실의 불행에 대한 항의다. 종교는 번민하는 자의 한숨이며 인정없는 세계의 심정인 동시에 정신없는 상태의 정신이다. ...... 민중의 환상적 행복인 종교를 폐기하는 것은 민중의 현실적 행복을 요구하는 일이다. 민중에게 자신의 상태에 대해 그리는 환상을 버리라고 요구하는 것은 그 환상을 필요로 하는 상태를 버리라고 요구하는 일이다. 따라서 종교에 대한 비판은 종교를 후광으로 하는 저 고통스런 세계에 대한 비판을 내포하고 있다.

-[헤겔 법철학 비판]

 

이것도 고진의 다른 책에서 다시 인용한 것인데, 중간의 말줄임표는 너무도 유명한 '그 말'을 내가 일부로 생략한 것이다. 고진 역시 '그 말'이 자주 인용되는데, 거의 확실히 오해되고 있다. 그러한 오해를 하는 것 만으로도 그 사람이 맑스를 읽은 적이 없다는 사실이 들통나기 때문에 앞으로 주의해야 할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하튼, 부자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마음이 가난해서 될 게 아니고, 현실에서 가난해져야 하는가 보다.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을 좀 더 빡시게 할 필요가 있다. 자기가 가난해질 정도로. 그리고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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