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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과의 대화를 위하여

무화과님의 [기동단이여, 부당한 명령을 거부하라] 에 관련된 글.

그들이라고 생각이 없을 것인가? 양심이 없을 것인가? 두려움이 없을 것인가? 매맞는 동료들이 보이지 않을 것인가? 그리고 왜 그들만이겠는가? 농민들을 그 자리에 나올 수 밖에 없도록 몰아간 자들. 강경 진압하라고 명령한 자들, 그 명령의 지휘계통에 있는 자들, 사람이 죽어도 책임지지 않는 자들... 또 왜 그들만이겠는가? 매맞는 시위대에 힘을 보태지 못한 사람들, 사람이 죽어도 분노하지 않는/못하는 사람들은 또 어떠한가? 우리는 누구와 어떻게 대화해야 할까?
가라타니 고진, [윤리21], 사회평론, 65쪽부터. 자유가 있다는 정명제와 자유가 없다는 반대명제가 양립한다고 본 칸트의 생각은 그렇게 난해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자유가 없다는 태도로 사물을 보아야 하고, 또한 자유가 있다는 관점에서도 사물을 보아야 한다. 예를들어 여기에 살인자가 있다고 하자. 통상의 재판에서는 그에게 살의가 있었는가 없었는가가 중요하다. 변호인 측은 그가 살인에까지 이른 원인을 말하며 변호할 것이다 검사는 가령 그렇다고 해도 당사자가 그것을 피하는 선택이 가능했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칸트에게는 당사자에게 어떤 의도가 있었는지 혹은 어떤 원인으로 불가피하게 그렇게 했는지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 살의가 있어도 죽일 수 없는 때가 있고, 살의가 없어도 죽이고 마는 경우도 있다. 그러한 여러 원인을 구체적으로 따져 가면 이 범인에게 '자유' 따위는 없고, 따라서 책임도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 그러나 칸트는 이 범인에게 '자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그가 행위하는 시점에서 자유가 있었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결코 있을 수 없다. 다만, 그가 스스로 자유에 의해 이 행위를 '한 것으로' 간주해야만 된다는 말이다. 자유는 '자유로워지라'는 명령(의무)에 의해서만 존재한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결정론적 인과성을 배제하라는 것이다. ... 우리는 자유를 배제했을 때 현상(자연필연성의 세계)을 발견하고, 자연필연성을 배제했을 때 자유를 발견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뭔가를 저질렀다면 그것이 아무리 불가피한 것이라 하더라도 윤리적으로 책임이 있는 것은 '자유로워지라'는 당위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실상 그에게 자유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유로웠던 것으로 보야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칸트가 윤리학에 있어서 중요한 전환을 하고 있음에 주의하기 바란다. 그것은 자유라는 관점에서 도덕성을 본 것이다. 그에게 있어 도덕성은 선악보다는 오히려 '자유'의 문제다. 자유 없이 선악은 없다. 자유란 자기원인적인 것, 자율적인 것, 주체적인 것과의 동의어다. 그러나 그러한 자유가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것이 그의 물음이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자유로워지라'는 지상명령에서 찾아낸다. 지금까지의 윤리학은 선악이 무엇인가에 대해 논해 왔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그것에는 두 가지의 사고 방식이 존재한다. 한편에 선악을 공동체의 규범으로 보는 견해가 있고, 다른 한편에 그것을 개인의 행복(이익)이라는 관점에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칸트에 따르면 그것은 모두 '타율적'인 것이다 공동체의 규범에 따르는 것이 '타율적'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행복주의-선을 행복으로부터 설명하는 공리주의적 사고-도 근본적으로는 감각이나 감정에 뿌리를 두고 있는 여러 원인들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에 '타율적'이다. 그에 비해 칸트는 도덕성을 오직 '자유'에서 찾는다. 자유가 없다면 주체가 없고 책임이 있을 수 없다. 거기에는 자연적/사회적인 인과성만 있다. 칸트가 자유를 '의무에 따르는' 것에서 구했던 것은 커다란 오해를 낳고 있다. 일반적으로 의무는 공동체가 각 개인에게 부과하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칸트가 말하는 의무는 '자유로워지라'는 의무다. 거듭말하지만 그것은 자연적/사회적 인과성을 배제하라는 말과 같다. 자유를 의지(意志)함으로써만 자유가 생겨난다. 그 이외에 자유는 생기지 않는다. '당위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칸트의 말은 그것을 의미한다. ... 칸트가 "행위자가 이러한 행위의 결과를 완전히 새롭게, 스스로 시작하는 것처럼 간주해도 좋다"고 한 것은 그것을 말한다. 예컨대 그것이 죄라는 것을 모르는 채 저지르는 경우가 있다. 그럼 알지 못했다면 책임이 없는가? 그것을 알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라면 책임이 있다. 이 점에서 나는 칸트를 일관되게 공격한 니체에게서 바로 칸트적 윤리성을 발견한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 "정신이 얼마만큼의 진실에 견딜 수 있을까, 얼마만큼의 진실에 감히 맞설 수 있을까?" - 나에게는 이것이 본래의 가치척도가 되었다. - 있는 그대로의 세계에서 무언가를 뺀다거나 제외한다거나 선택하는 일 없이 디오니소스적으로 그렇다라고 말하는 데까지 나아가길 원한다. - 이것을 나타내는 나의 정식이 운명애(amor fati)다. -니체, [권력에의 의지]
그가 말하는 운명애란 그러한 인생을 타인이나 주어진 조건 탓으로 돌리지 않고 마치 자신이 만들어낸 것처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강자고 초인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다지 특별한 인간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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