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도린과 고르의 생활

지음님의 [Farewell to Andre Gorz] 에 관련된 글.

고르의 작품이 처음으로 번역되었다.

D에게 보낸 편지 - 10점
앙드레 고르 지음, 임희근 옮김/학고재

대표적인 저술들이 단 한권도 번역되지 않은 상황에서,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라는 식으로 포장되어,
순식간에 번역, 출간된 그의 마지막 편지.
가격에 비해 지나치게 얄팍한 책 두께만큼이나 얄팍한 현실에 화가 나서 안 읽을라다가... 결국 읽었다.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기대한다면 실망할게다.
그들의 죽음을 다룬 신문 기사 한 편 이상의 감동적인 장면은 찾아보기 힘들다.
철학적인 면모를 발견하기를 기대하기도 어렵다.
분량 자체도 얼마 없긴 하지만, 들뢰즈와 바타유 등에 대한 철학적인 언급들은 번역자가 이해하지 못한 채 옮겼음이 틀림없다.

오히려 봐야 할 것은 그들의 생활이다.


소파, 책꽂이, 탁자, 의자, 전기난로... 당신은 마치 수도자같은 나의 이런 세간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지요. 나 또한 당신이 그것을 받아들여준다는게 놀랍지 않았고요.

우리는 출발할 때 가진 것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거의 모든 것을 둘이서 공유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그때까지 살아온 대로 살겠다고, 그리고 당신의 눈길과 목소리와 향기와 가는 손가락과 당신이 당신의 몸으로 사는 방식을 그 무엇보다도 사랑하겠다고 동의하는 것만으로 미래는 온통 우리에게 활짝 열리게 되어 있었지요.

우리는 한 번도 생활과 소비 수준을 우리의 구매력 수준에 맞춰 높인 적이 없었습니다.
내가 기억하는 한 나는 늘 ‘호사스러운’ 생활 방식과 낭비를 싫어했습니다. 당신은 유행을 거부하고 당신 나름의 기준에 따라 유행을 판단했지요. 필요 없는 것을 공연히 필요하게 만드는 광고와 마케팅에 휘둘리지 않으려 애썼고요.
... 그 뒤 10년이 지나 우리는 결국 낡은 오스틴 차를 한 대 샀습니다. 차를 샀다고 해도 개인의 자가용 소유가 가증스런 정치적 선택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고만고만한 삶에서 벗어날 수 잇는 가능성을 준다고 큰소리치면서 사실은 개개인을 서로 경쟁시키는 짓 말입니다.
... 그 때를 떠올리니 당신이 일곱 살 때부터, 진정한 사랑은 돈을 무시할 수 있어야 한다고 결론 내린 것이 생각납니다. 당신은 돈을 무시했어요. 우리는 종종 돈을 기부하곤 했습니다.

당신이 회복하는 동안, 나는 예순 살이 되면 은퇴를 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예순 살이 될 때까지 몇 주 남았는지 헤아리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음식을 만들고 당신이 힘을 되찾도록 도와줄 유기농산물을 사러 다니고 어느 대체요법을 연구한 사람이 당신에게 권한 기막히게 잘 듣는 치료제를 바그람 광장에 가서 주문하곤 하는 일에 재미를 붙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직업.

도린의 직장... 극단 배우, 화가들의 모델, 영어 튜터, 헌 종이 수집, 관광 가이드... 당신은 어떤 일을 해도 당신만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설령 노예선을 탔다 하더라도 당신은 훨훨 날개를 달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그런 일을 겪을 때마다 의기소침해졌지만요.

고르의 직장... 세계시민들 사무국장 비서, 화학제품 제조회사 자료정리 및 서류번역, 보험회사 직원, 탐정소설 번역, 유네스코 독일어 번역, 인도 대사관 무관의 비서, 석간 <파리 프레스> 외신 종합면 작성.


그들이 만든 공간...

우리의 삶은 바뀌었습니다. 우리의 작은 아파트에 손님들이 많이 찾아왔습니다. ... 우리는 세계의 중심에 살고 있는 셈이었습니다. 일로 만나는 사람들과 우리에게 정보를 주는 사람들, 우리 친구들 사이의 구분은 모호해졌습니다.

“자율공간을 확장하되 그 자율공간을 단지 사적으로만 여겨서는 안 된다.”


실존주의... 생태주의...

‘실존주의자들’, 즉 정치권력에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함께 살아가며 대안적 목표를 실천하려고 꾸준히 시도하면서 ‘삶을 바꿀’ 결심을 한 사람들...

생태주의란 삶의 양식이 되고 매일의 실천이면서 끊임없이 또 다른 문명을 요구하는 것이더군요... 나는 내 인생을 직접 산 게 아니라 멀리서 관찰해 온 것 같았습니다... 당신은 늘 나보다 풍부한 사람입니다. 당신은 모든 차원에서 활짝 피어난 사람입니다. 언제나 삶을 정면돌파했지요. 반면에 나는 우리 진짜 인생이 시작되려면 멀었다는 듯 언제나 다음 일로 넘어가기 바쁜 사람이었습니다.


고양이, 어슐러 르귄... 푸훗.

작은 시골집으로 이사하고 얼마 안돼서 당신은 회색 줄무늬 고양이를 집에 들였습니다. 굶주린 행색으로 우리 집 현관문 앞에서 항상 문을 열면 기다리고 있던 고양이였지요. 고양이 피부에 오른 옴도 치료해주었습니다. 고양이가 처음으로 내 무릎에 뛰어올라 앉았을 때, 나는 정말이지 영광스럽기까지 했답니다.

앞으로는 우리를 미래에 투사하지 말고 이번에야 말로 정말 우리의 ‘현재’를 살아야 하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미국에서 가져온 어슐러 르귄의 책 두 권을 읽었습니다. 그 책 덕분에 이런 결심을 할 힘이 생겼습니다.


아무도 옮길 사람이 없다면... 고르의 <경제적 합리성 비판> 번역이나 해 볼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