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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보위츠, <모든 이들의 완전한 인간 발전에 대한 권리>

출처 : http://cafe.naver.com/radicaldemocracy/1007

 

 
모든 이들의 완전한 인간 발전에 대한 권리
자본에 대항하는 모든 투쟁들의 통합 요소
 
 
 
마이클 레보위츠
by Michael A. Lebowitz 
 
 
이 내용은 2009년 12월 4일 베네수엘라 카라카스(Caracas)에서 마이클 레보위츠와 진행한 인터뷰의 일부이다. 편집자는 Yalcin Burkev, Metin Ozugurlu, Yasemin Ozdek, and Ersin Vedat Elgur이고, 2011년 Hak Mucadeleleri에서 발간되었다. 온라인에 공개된 2011년 《Monthly Review》 Volume 63, Issue 06 (November)에 실린 글을 번역하였다. 
 
- 원문 : 
 
 
- 번역 : [연구공간 그람시안]은 그람시를 매개로 한국 민주주의의 급진화를 위한 대항헤게모니 프로젝트를 연구하는 장훈교의 일인 연구작업장입니다. 2015. 6. 29. 1차 번역. 교정 제안이나 원고 활용은 ganndalf@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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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
 
마르크스, 자본의 논리 그리고 노동계급의 논리에 대한 당신의 재검토 작업부터 출발하지요. 당신의 이런 작업들은 오늘의 사회운동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나요?
 
레보위츠 : 
 
나는 이전부터 마르크스는 노동계급의 측면을 이론적으로 발전시키지 않았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마르크스는 그의 이론적 핵심 저서인 『자본』에서 자본의 본성과 자본의 논리를 검토합니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또 다른 측면인 노동계급의 논리와 노동계급의 욕구 그리고 노동계급의 지향에 대해서는 사실 검토하지 않았습니다. 마르크스는 오직 자본의 그림만을 보여주었을 뿐인데, 사람들은 그가 자본주의에 대한 그림을 보여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이 바로 이런 의미에서 마르크스를 잘못 해석해왔다고 주장합니다.
 
마르크스의 자본 분석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 지식은 노동계급을 위한 무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분석은 전체 그림은 아닙니다. 그의 많은 다른 저작에서, 마르크스는 노동계급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마르크스는 노동계급의 투쟁뿐만 아니라 투쟁 하지 않는 노동자들이 어떻게 실제로 자기 자신을 냉담하면서도 대략 풍족한 생산의 도구로 생산하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그렇지만 마르크스의 『자본』안에서는 노동자의 측면으로부터 투쟁을 검토하는 곳을 찾을 수 없습니다. 특히 임금 투쟁에 대한 논의가 전혀 없습니다. 마르크스는 단지 임금을 주어진 것으로 그리고 주어진 필수품의 기준이 존재한다고 전제했을 뿐입니다. 이 전제를 제거하는 일은 계획은 있었지만, 결국 쓸 수는 없었던 나중의 책인 『임금 노동』에서 진행하고자 했습니다.  
   
이런 문제로 인해 나는 또 다른 측면의 문제를 탐구하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나는 거듭 혁명적 실천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의 개념으로 되돌아가곤 했습니다. 다시 말해 나는 언제나 환경과 인간 행동의 동시적인 변화 혹은 인간이 자신의 투쟁을 통해 자기 자신을 변형시켜나가는 자기변화라는 마르크스주의의 혁명적 실천 개념으로 되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투쟁을 통해서 뿐만이 아니라 그들의 일상적인 실천을 통해서도 자기 자신을 생산합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무엇을 하는 가에 의해 형성되어집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본다면, 자본주의 하에서 임금노동자인 사람은 특정한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생산하는 동시에 생산되어집니다. 곧 소외된 인간으로 그리고 자본주의 생산의 공허로 인해 단지 소비만을 원하는 인간으로 생산되어지고 자기 자신을 생산합니다.
   
우리는 항상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야만 합니다. “특정한 생산 관계 안에서 어떤 유형의 사람들이 생산될까?” 교환 관계 안에서는 어떤 유형의 인간이 생산될까요? 즉, 연대의 원리로 인민들이 행위 하는 공동사회(communal society)와는 정반대로, “당신이 나를 위해 그것을 한다면 나는 당신을 위해 이것을 할 것이다”라는 원리 하에서는 어떤 유형의 인간이 생산될까요? 이런 조건은 특정한 유형의 인간을 생산합니다. 
   
내가 강조하는 것의 대부분은 사람들이 그들의 행위를 통해 자기 자신을 변형하는 방식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사회운동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사회운동을 통해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변형시키면서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마르크스가 많은 곳에서 말한 바입니다.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물론, 임금 투쟁은 상황을 변화시키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임금투쟁을 포기한다면, 노동자들은 이보다 더 큰 무엇인가를 해낼 능력이 없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노동자들이 자기 자신을 새로운 사회를 창조하는데 적합한 이로 만들어가는 과정은 바로 그 투쟁을 통해서 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임금투쟁입니다. 그러나 이는 모든 투쟁의 진실입니다. 모든 투쟁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변형시켜나가면서 우리 자신을 개인적으로뿐만 아니라 집단적인 차원에서도 적합한 존재로 만들어나갑니다. 
 
편집자 : 
 
2008년 이후의 전지구적 규모에서의 자본주의 역사적 위기 이후에, 사회운동은 어떤 방향으로 그리고 어떤 형태로 형성되고 발전해가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레보위츠 :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해야만 하는 한 가지는 우리가 전통적으로 조직된 노동계급을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중심 동력으로 바라보았다는 점입니다. 분명 이는 마르크스가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그는 노동조합이 노동계급을 조직하는 중심 거점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운동을 창안한 것은 단지 임금노동자로서 그들의 지위만은 아니었습니다. 노동자들은 같은 동네에 살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공동체로 묶였습니다. 이는 언제나 하나의 요소였습니다. 나는 노동계급을 대규모 산업에서 임금을 받는 노동자로 단순하게 파악하는 것은 큰 실수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인민들은 생산수단뿐만 아니라 사회적 노동의 역사적 결과로부터 분리되어 있습니다. 당신이 만약 베네수엘라를 본다면, 노동계급의 절반은 비공식 부문에 속합니다. 그들은 그러나, 자본주의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베네수엘라만의 고유성은 아닙니다. 길거리에서 상품을 판매하는 많은 이들은 자본주의가 생산한 상품을 판매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자본의 유통 부문의 한 부분일 뿐입니다. 이들은 단지 힘이 없는 지위로 인해 자본의 유통부문 임금노동자의 지위가 아니라, 자본에 의해 판매의 위험을 감내하는 위치에 머물고 있습니다. 
 
차베스의 주요 기반은 도시 빈민입니다. 도시 빈민이란 누구입니까? 이들은 생산수단으로부터 분리된 이들로서,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일원입니다. 우리는 단순하게 착취 받는 자들만을 이야기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착취 받는 자와 그 착취 받기를 열망하고 있지만 실상 그로부터 배제되어 있는 이들 또한 이야기해야 합니다. 이 두 집단은 모두 생산수단에 대한 접근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에서뿐만 아니라 인간 존재의 사회적 유산에 대한 접근 또한 결여되어 있다는 점에서 공통성을 갖습니다. 이들은 모두 배제된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바로 그 측면에서 공통의 위치를 점유합니다. 나는 현재 투쟁의 다수가 완전한 발전(full development)에 대한 인민의 권리를 향한 투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점은 내가 연구를 통해 강조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는 특수한 사례를 넘어서는 하나의 통합하는 인자입니다. 모든 이들이 완전한 발전에 대한 권리와 그들의 능력 수단의 발전, 물론, 적합한 의료 시설, 적합한 교육, 적합한 음 등의 발전에 대한 권리를 보유한다는 생각은 전체 노동계급을 통합할 수 있는 요소들입니다.  
   
나의 책 『The Socialist Alternative: Real Human Development』은 바로 이 과정에서 내가 배운 내용들을 이론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은 또한 구체적인 정책을 말하기도 합니다. 사회주의 대안을 건설하기 위한 투쟁의 한 부분이 되어야할 중심 정책의 하나가 공통자원을 확장하기 위한 투쟁입니다. 신자유주의가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자본주의가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자본주의의 전체 초점은 모든 것의 상품화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의료서비스를 상품화합니다. 학교를 상품화합니다. 모든 것을 상품화합니다. 그렇다면 인간 존재가 자신의 능력을 발전시키기 위한 대안은 무엇일까요?
   
모든 것을 탈상품화하여 이를 통제하는 것입니다. 물론, 당신이 탈상품화와 공통자원의 확장에 대해 이야기할 때, 다음과 같은 즉각적인 질문이 나옵니다. “우리 모두는 ‘공통자원의 비극’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만약 사람들이 모든 것을 자유롭게 활용가능하게 만든다면, 이는 분명 비극으로 귀결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그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공동체는 공통의 자원을 항상 관리해왔습니다. 그러나 핵심 요소는 공동체입니다. 당신은 공토자원을 감독할 수 있는 효율적인 지역 공동체를 가져야만 합니다. 요약한다면, 나는 사회운동과 자본의 권력을 제거하려는 모든 운동들이 하나의 공통 지점으로 통일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바로 모든 이들의 완전한 인간의 발전에 대한 권리가 그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든 이들의 발전의 조건”이라는 『공산당선언』의 목적입니다. 
 
편집자 : 
 
당신의 인간의 필요와 인간 발전에 대한 견해를 비판하는 몇 가지의 입장이 있습니다. 그 비판들 중 하나는 “마르크스는 인간의 필요에 대해 그렇게 많이 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필요는 상대적인 문제일 뿐만 아니라 또한 공산주의 사회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언급하고 있는 것과 같은 방식의 인간의 필요 개념의 이론적인 기반이 유토피아 사회주의와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비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레보위츠 : 
 
무엇보다 『자본』은 대안사회의 관점 곧 현재와는 달리 사회의 생산물이 마르크스가 “발전에 대한 노동자 자신의 필요”라고 부르는 과정에 복무하는 반대의 상황이란 관점에서 기술되었습니다. 나는 인간의 필요를 향한 투쟁과 그 필요의 충족을 향한 투쟁이 단순하게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는 과정이 아니라, 사람들이 공동체 안에서 공동의 필요와 공동의 목적을 위해 함께 일하는 권력을 보유하는 전체의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혁명적인 요구이고 투쟁입니다. 다음과 같이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유토피아 사회로서의 공산주의입니다. 사회주의는 ‘각 개인에게, 그 기여에 따라’라는 다른 원칙을 가집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마르크스의 왜곡이라고 말하겠습니다. 마르크스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와 같은 두 단계를 설정하지 않았습니다. 마르크스는 낡은 사회로부터 모든 결점을 상속받았기 때문에, 초기에 결점을 가지고 등장한 하나의 사회를 말합니다. 그러나 새로운 사회를 발전시키는 일은 이런 결점 위에서 건설하는 과정을 통해 수행될 수 없습니다. 인민들이 높은 수준에 도달할 때까지 인민이 어디에서 일하고, 얼마나 그들이 가져가야 하는지에 대해 우리가 국가통제를 해야 한다는 주장과 각 자의 기여에 따라 각자에게 할당한다는 ‘사회주의 원칙’ 레닌으로부터 나옵니다. 
   
하지만 당신이 행한 모든 것에 대한 등가물을 원하는 경향은 낡은 세계로부터 상속받은 결함입니다. 이 원칙과 주장은 당신이 그 위에서 건설해야할 원리나 주장이 아니라, 당신이 대항해 투쟁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분명 하룻밤 사이에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것이 목적이다”이라고 말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그 목적을 실현하는 길로 나갈 수 있을까요? 그리고 당신은 이 이데올로기적이고 실천적인 투쟁을 멀리 떨어진 단계로 연기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생산력을 체 게바라가 웅변했던 그 지점까지 발전시키는 과정을 통해 사회주의적인 인간 존재를 만들어야만 합니다. 
   
소련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소련의 경우에는 보너스와 같은 자기이익에 초점을 맞추었고, 유고슬라비아도 동일했습니다. 불행하게도, 동일한 패턴이 쿠바에서도 나타났습니다. 다음과 같은 점들이 점점 더 강조된 것이지요. “우리는 음식 지원을 못받았다, 우리는 값싼 전기가 없다, 우리는 이 모든 비능률을 참을 수 없다, 이건 쓰레기다 등.” 이는 지금은 거부되었지만 혁명의 일부로 존재했건 것들입니다. 이 시각은 일반적으로 이런 것들이 더욱 높은 단계를 위한 것들이라는 생각을 반영합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이후의 단계로 연기되어야할 유일한 것이 아닙니다. 노동자의 관리도 있습니다. 
   
내 생각에는 기여에 따른 분배를 재강조하는 경로를 따르는 것은 매우 불행한 경향입니다. 그러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별도의 단계에 대한 개념으로 파악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와는 관계없는 원칙을 도입하는 것입니다. 기여에 따른 분배라는 이기주의(“너가 나에게 그것을 준다면 나는 이것을 주겠다)에 기초해 건설하는 일은 자본주의로의 복귀라는 기반 위에서 구축하는 것 이상의 다른 것이 아닙니다.
 
편집자 : 
 
요즘에는 우리나라 혹은 다른 많은 국가에서도 사람들을 그들 자신의 권리를 위해 동원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사람들은 사유재산을 문제로 여기지 않습니다.
 
레보위츠 : 
 
사람들이 사유재산을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유재산은 오직 사람들이 사유재산이 장애물이라고 볼 때에만 그들에게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코뮨을 건설하는 것과 같이 그들에게 필요한 무엇인가를 위해 투쟁할 때, 갑자기 사유재산의 소유자들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 땅은 우리 것입니다. 당신은 이 땅을 가질 수 없습니다.” 이 일이 발생하자마자, 당신은 사유재산이 장애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돌아다니면서 “사유재산이 적이다”라는 구호를 알리는 것은 이미 설득된 이들을 동원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사실 당신은 사람들이 행동과 운동을 통해 그들 자신에 의해 볼 수 있고, 배울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행동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행동을 통해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베네수엘라에서 돌아다니면서 단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은 공동체의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도 없습니다. “여기의 모든 문제는 우리가 은행을 국유화한다면 해결될 것입니다.” 당신은 지역의 혹은 공동체 안의 사람들이 이것을 걱정하고 있다고 생각하세요? 베네수엘라에서는, 그들이 걱정하는 것은 “왜 정부는 우리의 요구에 응답하지 않지?” 그리고 “우리가 왜 이 관료들에 직면하는 것일까?”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일상적인 관심입니다. 그들의 시각에서 본다면, 실제 모순은 은행의 사적 소유가 아닙니다. 혁명을 죽이고 있는 관료제가 실제 모순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항상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좌파의 융통성 없는 사고에 진정한 문제가 있습니다. 조직된 노동계급이 혁명을 만드는 유일한 집단이란 개념은 전통적인 개념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신자유주의와 지구화의 결과로 인해 자본이 어떻게 노동자를 결합하고, 그들을 조직하고 규율하는가 등에 대해 마르크스가 당시 기술했던 패턴이 역전되었다고 계속 말합니다. 자본은 산업 노동을 분리시키고 해체시킵니다. 자본은 노동을 더욱 약하도록 만들기 위해 노동을 해산시키고 있습니다. 어떻게 좌파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투쟁의 새로운 형식을 위한 새로운 조건을 창출해왔는지를 인식하지 못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항상 동일한 방식으로 투쟁할 수 없습니다. 
 
편집자 : 
 
그렇다면 당신은 우리가 노동계급을 재정의해야만 한다고 말하는 것인가요?
 
레보위츠 : 
 
네, 그렇습니다. 노동계급은 협소한 범주가 아닙니다. 인간 존재의 모든 유산을 빼앗아온 부르주아계급이 있습니다. 그들은 지식과 단지 기계가 아닌 모든 것을 통제합니다. 다른 모든 이들은 그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모든 이들을 조직해야 합니다. 우리는 권리의 문제로 돌아가야 합니다. 『The Socialist Alternative: Real Human Development』에서, 나는 마르크스와 인간 발전의 전체 개념에 대해 말을 합니다. 이는 틀림없이 핵심 개념화입니다. 그리고 나는 이 책을 인간발전에 대한 장으로 끝맺었습니다. 그 장에서 난 모든 이들이 우리의 사회적 유산의 혜택을 사용할 권리와 이를 공유할 권리가 있다고 제안했습니다. 모든 이들은 노동 현장과 공동체에서 주인공이 되어 자신의 능력을 발전시킬 권리가 있습니다. 모든 이들은 연대에 기반을 둔 공동체에서 살아갈 권리가 있습니다. 
   
인간발전 선언의 각 요소들은 여러 구체적인 요구로 연결됩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인간 발전에 대한 모든 이들의 권리 개념화를 지지한다면, 당신은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생산수단을 사적으로 소유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저것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를 든다면, 위에서 모든 권력이 나오는 그리고 노동자가 어떤 권력도 갖지 못한 노동현장을 만들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단일 쟁점보다는 연결된 요구들의 전체 프로그램을 가져야만 합니다. 종종 한 집단은 한 문제를 가지고 투쟁하고, 또 다른 집단은 또 다른 문제에 대해 투쟁합니다. 이들 집단이 자신의 문제에만 집중한다면, 그들은 진정한 변화를 만들어내는데 성공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기껏해야 개혁으로 끝납니다. 그들은 체계를 사실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이 투쟁과 다른 투쟁 사이의 연결을 볼 수 있고, 당신의 투쟁이 보다 큰 투쟁의 일부임을 알게 된다면, 당신은 개혁주의를 넘어설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모든 투쟁들을 통합하는 요소가 완전한 인간 발전에 대한 권리라고 주장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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