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J.K 깁슨-그레엄, 금융산업을 다르게 보기

J.K 깁슨-그레엄, <그따위 자본주의는 벌써 끝났다> 중

 

90p

금융부문은 종종 "자본주의의 화려한 만개"라고 표현되곤 한다. 그러나 이 산업이 반드시 자본주의적이라고만 말할 수 있을까? 만일 우리가 경제적 차이를 이론화하려는 마음으로 그 생산관계와 수입원, 대출과 투자의 최종목적지 등을 검토해본다면, 이 금융산업에서 무엇이 필연적으로 자본주의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우선 생산관계와 관련하여 이를 살펴보자. 어떤 금융회사는 고용인의 노동으로부터 유래하는 잉여가치를 착취하는 자본주의적 지점이지만, 어떤 회사는 독립적 상품생산의 현장으로서 비자본주의적 성격을 가질 수 있다. 가령 개인투자관리사와 같은 자영업자를 생각해보라. 그들은 자신의 잉여노동을 스스로 전유한다. 금융산업 안에 있는 또 다른 비자본주의적 기업들은 잉여노동을 집단적으로 생산하고 전유하는 현장일 수도 있다.

생산관계에서의 이러한 차이들을 고려한다면, 금융산업을 자본주의적이라고 부를 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분명치 않다. 분명한 것은 이러한 호명방식이 다원성과 차이를 부각시키기보다 모호하게 만들 뿐이라는 점이다. 나아가, 금융산업에서 생겨나는 수익 역시 완전히 이종적인 원천들로부터 말미암는다고 볼 수 있다. (어떤 것은 자본주의적 기업에서 이자 지급의 형태로 배당한 잉여가치의 분배이다. 어떤 것은 독립 생산자나 노예제의 현장, 집단적 혹은 공동체적 잉여 전유의 현장 같은 비자본주의적 기업들로부터 유래한다. 또 어떤 것은 소비자 이자 지불, 즉 레스닉과 울프 식으로 말해 비계급적 수입원이기 대문에 자본주의적이지도 비자본주의적이지도 않다.) 마지막으로 금융산업이 수행하는 투자와 대출활동 역시 자본주의 재생산이라는 지상명령에 의해 완전히 규율될 수 없는 일종의 '제멋대로인 생성의 힘'으로 이해될 수 있다. 

실제로, 금융산업이 비자본주의적 계급관계 발전에 전례 없는 기회를 제공해 왔음을 보여주는 예를 드는 건 어렵지 않다. 가령 '소비자 신용' 부문이 크게 성장하면서 - 소규모 자본주의적 기업들뿐 아니라 [워커즈 콜렉티브와 같은] 조합기업이나 자영업자들에 이르는 - 소기업들이 신용 구매를 통해 장비와 물자 등 필요한 투입물을 얻기가 훨씬 쉬워졌다. 자유로운 사업대출 분야의 성장이 많은 비자본주의적 기업의 성공과 활력에, 그리고 특히 자영업 활동의 신장에 기여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이제 우리가 금융산업 자체를 전적으로 자본주의적인 것으로 이론화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자기모사적이기보다 자기모순적인 과정 속에 존재하는 것으로 표현될 수 있다. 금융산업이 자본주의뿐 아니라 비자본주의적 활동 및 관계들의 존재 조건을 이룬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이 (악마 자본주주의의) 금융산업의 풍성한 치마폭 아래로 경제적 다양성이 거대한 개구리알 더미처럼 뭉게뭉게 거품을 이루며 흘러나온다. 

 

233p

가령 자본주의를 단단하고 무엇이든 감싸버리며 침투력 있고 반드시 넘치는 힘을 지는 게 아니라, 열려 있는 것, 침투 가능한 것, [틈이 있어 내부의 것이] 새어나오거나 유출될 수 있는 것으로 바라보는 방식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금융자본(보다 직접적으로는 돈)은 으레 경제 시스템의 생명의 핏줄이라고, 즉 자유로운 순환을 통해 자본주의의 신체의 건강과 성장을 보장하는 것으로 재현되어 왔다. 하지만 금융자본(혹은 돈)을 자본주의의 혈액이 아니라 정액이라 상상해보면 어떨까? 정액의 분출이 주기적으로 끊어지는 것처럼, 통제불능 상태의 자본의 분출은 아무데로나 튀어나가는 것이어서, 가끔은 자기파괴로 치닫기도 한다. 1987년 10월은 그런 지나친 몸의 스펙터클이었으며, 지구 전역의 주식시장을 얼룩지게 만든 몽정이었다. 

 

237p

이처럼 "차마 생각해볼 수 없었던" 경제의 모습을, 즉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들이 범지구경제에 침투할 수 있다는 생각을 우리는 어떻게 끌어낼 수 있을까? 어쩌면 배어나옴의 주체이면서 동시에 자본의 정체성을 확인시키는 주체이기도 한 금융자본 자체가 보다 많은 결과를 자아낼지도 모른다. 어쩌면 신용의 확산과 금융시장의 탈규제 덕분에 자본주의적 계급관계뿐만 아니라 비자본주의적 계급관계들 또한 더 자라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소비자신용의 엄청난 신장(극대화된 한도를 자랑하는 신용카드 금융, 가계담보 대출, 기타 '소비자'에게 거의 강제 부과되고 있는 다른 여러 수단들)은 소비 문화를 조장하고 그에 따른 개인 채무의 증가를 낳는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자영업과 가내 공업의 성장을 고려할 때 - 이 중 일부는 자본주의적 기업의 규모축소와 군살빼기의 결과로 볼 수 있다 - 소비자신용처럼 보이는 것의 상당수가 실은 생산자신용이다(이기도 하다)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즉 소비자신용 대출금은 생산수단(컴퓨터를 비롯한 기타 사무비품을 포함)과 자영업자의 생산과정에 필요한 기타 투입물을 구매하는 데 사용된다. 역사적으로 지방과 지역 은행 같은 전통적인 금융기관에서 자영업자들이 대출을 받기란 너무도 어려웠다. 하지만 새로운 국제 신용 시장의 성장과 더불어 소비자신용 대출을 즉각적이고 손쉬워졌다. 이러한 변화는 곧 소규모 사업의 증가에 기여했는데, 소규모 사업장은 개인이나 공동의 잉여 전유와 같은 비자본주의적 계급과정(물론 소규모 자본주의 기업도 신용자원을 공급받을 수 있었다)이 이루어지는 장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신체로 진입하는 '통로'가 금융 부문에서 열린 것이다. 이 통로는 자본의 출입을 허용하지만 동시에 비자본주의의 틈입도 가능해졌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