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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15.

알튀세의 자본주의 모순의 중층결정-철학적으로는 경험론과 헤겔 변증법. 

 

맑스의 유물론-비유적으로는 [원령공주]의 아시타카(주인공)의 모습에서 나타난다. 

산(원령공주)는 자연법칙(시시가미 신)을 거스르지 않고 그대로 반영, 수용한다는 경험론자의 모슴을 보인다. 

에보시(철 생산 마을의 지도자)는 자연을 지속적으로 자기화하여 자신의 힘을 현실 속에서 점점 더 구체화시키고 현실화시켜 나가면서 최후에는 시시가미 신(자연법칙)마저도 자기의 힘을 절대적인 것으로 만드는 대상으로 삼는 절대정신의 형상을 띤다. 

그리하여 헤겔의 변증법의 모습을 보인다. 

이 둘을 초월하면서도 내적으로 통일시키는 고차적인 유물론이 바로 맑스의 유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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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14.

맑스의 자유는 각기 자유로운 개인으로서 서로 연대하고자 하는 상대방(서로 동일화될 수 없는 타자)를 

통하여 자신의 한계를 의식하고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이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것, 즉 자유를 현실화시키고자 하는 것이 바로 <실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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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13.

피터 싱어의 보편성은 '양적 측면'에서의 보편성이다.

즉 동일한 원리가 양적으로 확대되어 최종적으로 모든 것에 적용된다는 것이다. 

이는 헤겔의 변증법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될 경우 자신이 주장했던 <윤리가 아닌 것>이 된다. 

질적인 측면에서의 보편성-하나의 동일한 원리가 모든 것에 적용될 경우 인간을 포함하는 모든 세계존재는 관조적으로(수동적으로) 그 원리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새로운 것을 생산한다는 <실천>의 의미는 사라지게 된다. 

이러한 실천의 의미가 포함될 때 과학이 성립할 수 있다. 

또한 보편성은 양적인 것을 넘어서서 질적인 것이 될 수 있고 되어야만 한다. 

이것이 맑스가 말한 실천으로서의 혁명이며, 질적인 측면에서의 보편적인 윤리나 정치의 원리는 

[각기 자유로운 개인들이 서로 연대하는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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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12.

과학은 주체의 실천활동(Praxis)과 직결된다. 

즉 제1원리 또는 제1원인으로서의 이념이나 법칙은 인간의 실천활동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과학적 방법은 주체의 실천활동을 잘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이다. 

주체의 실천활동은 환경을 변화시키고 그 환경에 맞추어 자신을 변화시키는 변혁적, 혁명적 활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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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산동네 의풍리.

밖에는 햇살 몇 조각들 모여,

가을장마의 물기 툭툭 떨어내듯

조곤조곤 안부인사를 건넨다.

토요일 오후 동네 카페에 앉아

무심히 창밖을 내다본다.

 

<그리운 산동네 의풍리> - 정기복 -

 

담론이 끝나고

철문이 내려진 거리에

스산한 겨울이 어슬렁거리면

구겨진 전단 같은 퇴색한 잎들이 날리고

이제 나는

그리움의 수배자가 된다

그 많던 사람들

뿔뿔이 흩어져 어디로 갔나

지워진 얼굴들 대책 없이 호명하다가

가슴에 품었던 산동네 하나 끄집어낸다

 

살얼음 진창 밟으며

사람의 하늘 열던

동학군 깃들어 짚신 고쳐매던 그곳

그믐 가시밭길 봉화 치켜들고

새벽을 밝히던 산사람들

싸릿불 지펴 감자 굽던 그곳

비탈산 불 놓아

조며 수수며 메밀 갈던

생떼 같은 화전민들 목숨 부쳐먹던 그곳

그렇게 시절에 쫓긴 땅벌들이 더덕 뿌리 흙살 박아 물 차오르던 곳

 

암울에 지쳐 병이 된

이 계절에 산동네 의풍리 떠메고 와

만나는 사람마다

한 자락씩 떼어주고 싶다

 

- 정기복 시집 <<어떤 청혼>> 중에서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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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청혼

하도 답답하여, 20여 년 전에 읽었던 시집을 꺼내들었다.

시집 제목은 <어떤 청혼>(정기복 시집).

시집 제목인 어떤 청혼은 이 시집에 들어 있는 시들 중 한 시의 제목이기도 하다.

그때 참 무엇인가에 그리움 복받쳐 먹먹하게 읽었던 시다.

그런데 오늘 읽어보니 무엇인가 밋밋하다..

왜 그럴까를 찬찬히 생각해보며 이 시를 다시 읽어보련다.

 

<어떤 청혼> -정기복-

 

바다 쉴새없이 뒤척여

가슴에 묻었던 사람 하나

십 년 부대껴 떠나보내고

달무리 속 대보름달

생선 속살 모래밭에

연어 같은 사람 하나 던져주었네

 

그대!

잘먹고 잘사는 일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는가?

오빠,

다 읽었는데 전태일

그 사람 그 뜨거움 어떻게 견딜 수 있었을까

 

썩는다는 것이다

씨앗으로 썩어 어머니 젖가슴 닮은

봉분을 키운다는 것이다

그대,

 

흙 토해 기름진 흙이게 하는

지렁이처럼 살자

 

정기복 시집 <어떤 청혼> 중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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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복시계] 기조제기 : 중추섬멸전을 축으로 한 대중적 반일 도시게릴라전의 전개를!

years and years

일 포스티노를 보고..

어제 밤에 모처럼 [일 포스티노]라는 영화를 다시 보았다.

어렸을 때 아껴 먹던 맛있는 과자처럼, 개인적으로 아끼면서 보는 영화다.

그런 영화들 중에는 브레스트 오프, 풀 몬티, 빌리 엘리엇, 파업전야, 우리 학교 등이 있다.

 

어제 본 [일 포스티노]를 보고 떠올랐던 단상을 주저리 주저리 메모해 본다.

 

시는 혁명이고, 혁명은 가랑비와도 같다.

사회주의는 메타포어이며, 아름다움이다.

아름다움은 자신이 관게하는 모든 타자에 대해 모른다는 한계를 자각하고,

그 타자를 향해 현재 자신을 넘어서는 것으로부터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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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죽음이란 어떠한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규정으로 규정될 수 없는 물자체(thing itself)이다.

그렇지만 삶은 규정될 수 없는 이 물자체의 현상학(과학)이다.

그럼으로써 죽음은 삶에 의해 규정되어야만 하는 당위이면서

현실의 삶에 의해 규정되는 존재라고 할 수 있겠다.

동시에 삶은 '규정된' 죽음에 의하여 규정되어야만 하는 당위이며,

현실의 죽음에 의해 규정되는 존재라고 할 수 있겠다.

 

이상 주저리 주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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