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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용차 아이들이 아프다던데...

앙겔부처님의 [쌍용 자동차 아이들이 아프다] 에 관련된 글.

얼마 전에 파업을 했던 쌍용자동차 노동자의 아이들이 많이 아프단다.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으며, 학교에서도 왕따를 당하고 있다고 한다.

비단 이번 파업 때뿐이겠는가!

이전에 많은 파업이 있었고, 그 파업한 노동자의 아이들이 비슷하게 많이 아팠을 것이다.

그 아이들 중에 이미 성인이 된 아이들이 있을 것이다.

이미 성인이 된 아이들과 아직 많이 아픈 아이들은 노동자의 파업을 어떻게 생각하며, 파업을 하였던 부모들을 어떻게 생각할까?

그런 모진 학대를 당하고 있는 또는 이미 당했던 아이들은 노동자인 부모의 파업을 기피해야 할 공포의 대상, 반드시 없애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아이들의 정신적인 상처뿐만 아니라 그 상처로 인하여 세상을 자본가의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면 우리 자신의 인권을 포기하는 일이 될 것이다.

만일 이런 일이 끊임없이 반복된다면 새로운 세상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생산력의 증대, 다시 말해서 새로운 인간을 생산해 낼 수 있는 일에 집중하는 일이 필요하고 아주 시급한 사안이라고 생각한다.

 

1.

 

노동계급과 자본계급의 갈등과 모순이 눈에 띄게 드러날 때, 노동계급은 투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파업투쟁을 택하게 된다. 더 나아가서는 노동계급 전체의 총파업 투쟁을 선언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파업투쟁을 선언하고 투쟁에 돌입하더라도 자본계급은 거의 눈 하나 깜빡이지도 않는다. 오히려 파업투쟁의 수위가 높아갈수록 불안해 하는 것은 자본계급이 아니라 노동계급이다. 그리고 옥쇄투쟁을 벌이고는 그 투쟁의 보람과 성과도 없이 백기를 들고 투항하는 형태로 패배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자본계급은 자신의 도구인 국가권력을 동원하여 그 투쟁을 고립시키는 것으로 싸움을 결말짓는다. 그러면서 노동계급인 우리는 늘 패배한 싸움을 안타까워하고 자본계급을 비난해 보지만 대체로 허탈해 한다. 이것이 우리가 늘 보아온 싸움의 과정과 결말이다.

우리의 노동계급 투쟁은 늘 패배한다. 물론 하나의 전투에서 승리하는 경우(이것도 거의 가뭄에 콩 나듯이 한다)도 있지만 전체적인 전선에서는 늘 밀리면서 패배를 하게 된다. 어떤 우리 노동계급 자신의 혁명적 변화 없이는 우리는 늘 패배할 것이다, 아니 패배한다. 우리 노동계급은 십중팔구 패배할 수밖에 없는 현실적 조건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 이 현실적인 조건들은 무엇일까? 이 현실적인 조건들을 따지기 전에 먼저 도대체 무엇이 패배이고 승리의 의미인지를 따져봄으로써 이 현실적인 조건들을 잘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현재의 상황으로 볼 때 자본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경우는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경우는 대단히 어려워 보인다. 순수하게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전환한 경우는 아주 드물며, 정규직에서 비정규직으로 전환되는 경우를 막는 것만으로도 승리라고 생각하는 것이 대부분인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하자면 현상유지를 하는 경우를 승리라고 대부분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승리도 아주 쉽지 않은 승리라고 할 수 있겠다.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의 전환이 현재의 상황에서 최대 승리라고 생각되고 있다.

그러나 이 승리는 전술적 의미에서 승리이다. 다시 말하자면 전체 계급투쟁 전선에서 보자면 정규직 쟁취 투쟁은 하나의 회전(전투)에 불과하다. 계급투쟁의 최종 목적은 자본주의를 지양하고 대체할 수 있는 노동해방, 인간해방의 새로운 사회, 즉 공산주의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 최종 목적이 현실화되어 갈 때 비로소 우리 노동계급은 승리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죄종 목적의 현실화라는 승리와 연관되지 않는, 연관될 수 없는, 또는 연관시키지 못하는 전술적 승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패배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 승리를 유지할 수 있는 노동계급의 ‘힘’이 거의 없기 때문인데, 이는 그 승리를 쟁취하기 위하여 모든 힘을 소진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동계급이 계급투쟁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는 현실적 조건은 바로 전술적 승리를 유지하여 계급투쟁의 최종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힘(투쟁력)을 끊임없이 새로이 생산해 낼 수 있는 진지가 없다는 것이다. 한 기업의 노동조합, 즉 개별자본과 대항하는 노동조합 또는 그 연맹은 진지가 될 수 없다. 그들은 총알이 빗발치는 전투를 수행하는 돌격대 또는 선봉대이기 때문이다. 이 돌격대 또는 선봉대가 계급투쟁 전 전선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도록 전방위적 지원사격을 할 수 있는 새로운 생산력을 생산하고 보급 조달하며 교체할 수 있는 진지가 필요하다.

이러한 진지는 자본주의 내부에서 자본주의를 대체할 수 있는 자본주의 외부를 건설할 때 만들어질 수 있다. 이 진지는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자본주의에 저항하면서 자본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대안을 창조할 수 있는 생산력을 생산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새로운 생산력이 기존의 생산력을 대체할 수 있고 대체함으로써 자본을 전방위적으로 뒤흔들어 승리를 쟁취할 수 있는 유리한 고지를 점령할 수 있다. 기존의 생산력은 자본에 그 수를 이미 읽히고 있다. 예를 들어 기존의 투수가 타자들에게 볼 배합을 읽혀서 두들겨 맞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새로운 생산력은 자본에게 그 수를 쉽게 읽히지 않는다. 좋은 새로운 투수가 타자를 요리할 수 있듯이 새로운 생산력은 자본을 자기 맘대로 요리할 수 있을 것이다.

 

2.

 

 

그렇다면 새로운 생산력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맑스가 “생산력은 곧 인간 자신”이라고 말했듯이, 이는 새로운 인간 생산을 통한 생산력이다. 이 새로운 인간은 여성주의에 입각한 노동자 계급이다. 맑스가 “노동자 계급은 더 이상 잃어버릴 것”이 없다고 말했지만, 현재의 노동자들은 잃어버릴 것이 있다. 맑스가 ‘잃어버릴 것’을 착취적 관계를 의미하고 있듯이, 현재의 노동자, 특히 남성으로 대표되는,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노동자’들에게 자신의 노동력을 재생산하기 위해 소비재를 소비하는 ‘타인’, 즉 ‘여성’의 노동을 착취하는 구조와 관계가 ‘잃어버릴’ 것으로 남는다.

새로운 인간은 바로 ‘잃어버릴 것’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은 여성주의적 노동자 계급이다. 새로운 인간은 자기 자신 안에 더 이상 착취 관계와 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은 인간이다. 그런데 이런 착취구조와 관계는 가족 이데올로기로 포장되어 있다. 이 가족 이데올로기의 포장을 벗겨내고 그 안에 숨겨져 있는 착취구조와 관계를 해체하기 위해서는 그 물질적 토대를 해체해야 한다.

그 물질적 토대는 한 개별 노동자의 임금으로 한 개별 가족이 고립적으로 생활해 나가는 방식이다. 이 생활 방식은 자본주의 경제 체제 하에서의 기본적인 생활 방식 단위이다. 이 단위 속에서 노동력의 재생산은 가사노동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데, 이 가사노동은 자본주의적 성별 분업 형태에 의하여 대체로 여성들에게 강요된다. 그리고 그 재생산에 들어가는 재생산 생산노동은 거의 아무런 대가 없이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임금은 노동력 재생산에 최소한으로 꼭 필요한 소비재의 구매 비용이지, 그 소비재를 가지고 자신의 욕구에 맞게 변형시켜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생산’노동 비용은 그 임금에서 제외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신자유주의에 의해서 가사노동을 거의 전담하였던 여성들은 임금노동을 해야 할 수밖에 없도록 강요당한다. 그리하여 이제 여성은 이중적 착취와 억압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성의 강요된 임금노동의 대가인 임금은 여성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편의 노동력 재생산과 자식들의 다음 세대 노동력 생산에 거의 투입되도록 암묵적으로 강요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중적 착취의 구조와 관계가 해체되지 않고서는 새로운 세계를 차출해 낼 주체를 생산해 낼 수 없다. 오히려 자본주의 생활 방식 구조와 관계를 그대로 유지시키는 인간만이 재생산될 수 있을 뿐이다. 일상적으로 여성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를 억압하고 착취하는 데 익숙해져 버린 상황에서 노동자들의 파업이 경제를 파탄시키는 행위이고, 교통체증을 일으키는 주범이며 가족을 내팽개치는 파렴치한 행위라는 이데올로기가 ‘상식’으로 돼 버린다.

그러므로 새로운 인간은 이러한 착취와 억압이 익숙한 것이 아니라 아주 낯선 것이며 해체되어야 할 것으로 여겨지는 인간이다. 이 새로운 인간은 개별적 생활 방식을 깨뜨리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래야만 노동자 계급 안에 내재해 있는 착취와 억압 구조와 관계를 해체할 수 있는 필요조건이 갖춰진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이전에 개별적으로 해결해야 할 생활 전반의 문제들을 조직적이고 사회적으로 해결해 나갈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자본의 내부에 자본의 외부인 노동자 계급의 코뮌을 건설하는 출발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 자신 속에 내재해 있는 억압과 착취의 관계와 구조를 깨뜨려 나가기 위해서, 이 새로운 인간은 ‘자기 비판적’이어야 한다. ‘자기 비판적’이라는 측면에서 이 새로운 인간은 ‘과학적’인 인간이다. 그런데 이 ‘자기 비판’은 끊임없는 상호소통과 협력‧연대 과정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 과정 속에서 각 개인은 억압과 착취에서 벗어나는 ‘자유로운 개인’이 될 수 있으며, ‘자유로운 각 개인이 연대하는 사회’인 ‘코뮌’을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이다.

자본의 내부에 있는 자본의 외부인 자유로운 개인들의 상호소통, 협력과 연대 과정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자신의 일상적인 생활 방식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생활 방식의 물적 토대를 형성해야 한다. 이 형성을 위해 대자본 투쟁의 기초인 임금‧단체협상 투쟁이 이루어져야 한다. 개별적인 개인과 가족의 생활을 위한 투쟁이 아니라 공동으로 살아갈 수 있는 코뮌의 물적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투쟁이 되어야 한다.

새로운 인간의 생산은 새로운 세대의 생산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의 현재이자 미래이며, 또한 희망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생산은 그들 스스로가 수행하도록 해야 하며, 그 생산을 도와야 한다. 이 생산은 ‘자기 비판’ 능력을 생산하는 것인데, 그들 스스로가 상호소통하며 협력과 연대를 할 수 있는 코뮌을 통해 이루어진다(이러한 비판 능력을 키우는 것이 ‘대중화’의 진정한 의미이며 노동자 계급의 교육 목표라고 생각한다. 이 대중화와 교육 목표는 ‘자본의 공교육’ 체제 아래에서는 현실화될 수 없고, ‘노동자 계급의 공교육 체계’(이는 자본의 공교육에 직접적으로 대립하는 이른바 ‘사교육’을 지양하고 해체하는 체계이다)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 대중화와 노동자 계급의 공교육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를 빌어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새로운 세대의 자기 생산과 코뮌의 싹에 관한 예로 영화 <우리학교>와 <더 사이더 하우스 룰즈>를 들겠다. 우리학교는 조총련계 조선인 학교의 아이들과 그 지역사회와의 관계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이고, 더 사이더 하우스 룰즈는 부모에게 버려지거나 부모가 없는 고아원 아이들의 삶의 모습을 담은 영화이다. 이 영화들에서 아이들은 자신들의 생활 규칙을 자신들이 만들어 나가며, 서로가 서로를 돌보는 일에 아주 익숙해져 있다. 특히 <우리학교>에서는 학교(이 학교는 일본 공교육 체계 밖에 있는 조선인 공교육 체계로서의 학교이다)라는, 아이들과 선생님들의 코뮌들 사이의 연대, 그리고 그 학교를 통해 지역 조선인들의 코뮌과 그 코뮌과의 연대가 나름대로 잘 이루어지고 있다. 이것을 통해 새로운 세대의 자기 생산과 코뮌은 기성세대 노동자들의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고, 그리하여 기성세대 노동자들을 그들 스스로 새로운 인간으로 변화시킬 수 있도록 하는 토대가 될 수 있다고 본다(맑스가 “교육하는 자도 교육 받아야 한다”고 말했듯이 말이다). 바로 이 토대가 노동자 계급의 진지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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