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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글은 이문구 선생의 대표 중단편소설 모음집([공산토월], 문학동네) 중, <우리동네 김씨>라는 단편 소설에서 발췌한 것이다. 충청도 사투리가 이렇게 찰지고 유머스러운 것인지..^^ 그리고 이문구 선생께서 좀 더 찰지도록 떡메질을 잘 해놓으셨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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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어주슈. 앉어줘유."
하는 소리에 눈을 드니, 면에서 나온 사람이 전지 나팔을 불고 있었다. 곧 교육에 들어가겠다는 거였다.
"기립해주시요. 기립해줘유."
이윽고 정렬도 안 된 채, 엉거주춤하게 서서 국민의례가 시작되었다.
국기에 대한 경례. 이하 생략. 민방위 신조 복창. 민방위 노래 합창. 앉어주시요. 앉어줘유.
김은 출석 검검표를 받아 소속과 이름을 써내기까지 이십 분이 넘어 걸렸다. 놀미 사람 중에서는 쓸 것을 가지고 나온 이가 아무도 없어, 이장의 볼펜 하나를 수십 명이 쪼개 쓰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출석 점검표가 면직원의 손으로 되돌아가기까지는 한 시간도 더 걸렸다.
"앉어주슈. 앉어줘유. 혹시 새사둔이 뵈더래두 이런 디서는 인사가 늦어두 숭이 아닝께. 왔다리 갔다리 구만허구, 참구 앉어줘유."
면직원은 나팔을 물고 고래고래 소리질렀다.
"시방버텀 교육에 들러가겄읍니다. 담뱃불을 끄시구, 슨 사람은 앉어줘유. 앉은 분은 죄용해주서유. 한 번 말허면 들어주서유."
대강 정돈이 된 듯하자 면직원은 부면장을 돌아다보았다. 매양 그랬듯이 부면장은 뒤에 서서 잇긋도 않고 방위병이 앰프 손질하는 것만 지켜보고 있었다. 앰프와 확성기는 각각 두 대의 자전거 짐받이에 얹혀 있었으며, 수백 명의 귀청을 찢는 비명만 지를 뿐, 좀처럼 말을 들을 성싶지 않았다. 면직원이 입 다물어유, 앉어줘유, 담배들 꺼유 소리를 두어 차례 더 외친 뒤에야 확성기는 조용할 줄 알았다. 이윽고 부면장이 명승 담뱃갑만한 마이크를 원아귀에 넣고 돌아서며 훅훅 불어 성능 시험을 하더니, 일 년 전의 그것에 한마디도 늘고 줄음이 없는 것 같은 그 소리를 되풀이했다.
"안녕허십니까. 신을죙(신을종)이올시다. 이름이 션찮여 부민장밖에 못헙니다마는, 제가 여러분들보다 배운 게 많다거나, 워디가 잘나서 이 앞에 슨 건 아닙니다. 이 점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교육에 면장님께서 꼭 나오실라구 허셨읍니다마는 급헌 호이가 있어서 아직 못 나오시는 걸루 알구 있습니다. 회의만 끝나면 즉시 나오셔서 교육에 임허실 줄로 알구 있읍니다마는, 그동안은 지가 몇 말씀 드리겠읍니다."
여기까지가 예나 이제나 조금도 변함없는 부면장의 인사였다. 부면장은 하던 말을 계속했다.
"그런디 교육에 들러가기 전에 지가 특별히 부탁을 드리겠읍니다. 제발 퇴비 좀 부지런히 해달라 이겁니다. 워떤 동네를 가볼래두 장터만 벗어났다 허면, 질바닥에 풀이 걸려 댕길 수가 읎는 실정이더라 이얘깁니다. 아마 여러분들두 느끼셨을 중 알고 있읍니다마는, 풀에 갬겨서 자즌거가 안 나가구 오토바이가 뒤루 가는 헹편이더라 이겝니다. 풀 벼서 남 줘유? 퇴비허면 누구 농사가 잘되느냐 이 얘깁니다. 식전 저녁으로 두 짐썩만 벼유. 그런디 저기, 저 구석은 뭣 때미 일어났다 앉었다 허메 방정 떠는겨? 왜 왔다리 갔다리 허구 떠드는겨? 꼭 젊은 사람들이 말을 안 탄단 말여. 야-- 저런 싸가지 웂는 늠으 색귀...... 야늠아, 말이 말 같잖여? 너만 덥네? 저늠으 색긔...... 쥐 애비는 저기 즘잖게 앉어 있는디 자식은 저 지랄을 혀. 이중에는 동기간이나 당내간은 물론이구 한집에서두 둣씩 싯씩 부자지간이 교육을 받으러 나오신 분이 즉잖은 줄루 알구 있습니다마는, 원제구 불 것 같으면 아버지나 윗으른은 즘잖게 시키는 대루 들으시는디, 그 자제들은 당최 말을 안 타구 속을 쎅이더라 이겝니다. 교육중에 자리 이사 댕기구, 간첩모냥 쑥떡거리구...... 야늠아. 너 시방 워디서 담배 피는겨? 너는 또 워디 가네? 저늠으 새끼들...... 그래두 안 꺼? 건방진 늠 같으니라구. 너 깨금말 양시환씨 아들이지? 올봄에 고등핵교 졸업헌 늠 아녀? 너지? 싹바가지 귀 떨어진 늠 같으니라구."
부면장이 한바탕 들었다 놓은 뒤에야 겨우 뭘 하는 곳 같아졌다. 부면장이 얼굴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사실은 이 시간이 교육 시간입니다마는, 가만히 앉어서 자리 흐틀지 말구 담배들이나 피서유. 지 자신이 교육에 대비하여 학습해둔 게 있는 것두 아니구 해서 베랑 헐말두 웂습니다. 또 솔직히 말해서 지가 예서 뭬라구 떠들어봤자 머릿속에 담구 기억허실 분두 웂을 줄로 알구 있습니다. 그냥 앉어서 죄용히 담배나 피시며 시간을 채우시도록 허서유. 그런디 퇴비들을 쌓실 때는 멪 가지 유의를 해주시라 이겝니다. 위에서 원제 와서 보자구 헐는지 알 수 웂으닝께, 퇴비장 앞에는 반드시 패찰과 척봉을 꽂으시구, 지붕 개량허구 남은 썩은새나 그타 여러 가지 쯔끄레미루 쌓신 분들은 흔해터진 풀 좀 벼다가 이쁘구 날씬허게 미장을 해주서유. 정월 보름날 투가리에 시래기 부쳐 담지 마시구, 혼인 때 쓸 두붓모처럼 깨끗허게 쌓주시라 이겝니다. 퇴비는 일 헥타당 멪 키로 이상이라는 것을 잘들 아시구 기실 중 믿습니다마는 아무쪼록 식전에 두 짐 저녁에 두 짐씩은 반드시 비시도록 당부허는 것입니다."
그때 김은, 퇴비는 지저분할수록 거름이 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입 밖으로는 무심히,
"모냥내구 있네. 멪 평이 일 헥타른지 워치기 알어."
하고 두런거렸다.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거였지만, 순전히 남의 말에 토 달기를 예사로 해온 입버릇 탓이었다. 그러나 좌중은 무심히 넘어가지 않았다. 김의 음성이 너무나 컸던 것이다.
"뭐여? 이봐유. 뭘 모른다는규? 구식 노인네두 다 아는 상식을, 당신 증말 몰러서 헌 소리유?"
하며 부면장이 따져들기 시작했다. 할말도 없는데 시간은 남고 처져 심란하던 중 계제에 잘됐다는 눈치가 역연했다. 부면장은 마이크 쥔 손을 뒷집진 채 육성으로 떠들고 있었다.
"당신 같은 사람은 워디를 가봐두 으레껀 한두 사람씩 있어. 그러나 여기는 그런 농담할 디가 아녀."
김은 남의 눈이 수백이라 구새먹은 삭정이 부러지듯 싱겁게 들어가기도 우습고, 그렇다고 졸가리 없이 함부로 말대답하기도 그렇겠고 하여 어쩔 줄 모르다가, 마음에 없던 말을 엉겁결에 뱉았다.
"알면 지랄헌다구 물으유? 평두 있구 마지기두 있구 배미두 있는데, 해필이면 알어듣기 그북허게 헥타르라구 헐 건 뭬냐 이게유."
"천동면이 이렇게 촌인가...... 저런 딱헌 사람두 다 있으니. 나 보슈, 국가 시책으루, 미터법에 의하야 도량형 명칭 바뀐 지가 원젠디 연태까장 그것두 모르는겨. 당신이 시방 나를 놀려보겄다--이게여?"
부면장은 당장 잡들이할 듯이 눈을 부라리며 언성을 높였다. 곁에 앉은 남병만이가 팔꿈치를 집적거리며 참으라고 했으나 김도 주눅들지 않고 앉은 채로 응수했다.
"내 말은 그렇게밖에 안 들리유. 저 핵교 교실 벽뙈기 좀 보슈. 뭬라구 써붙였유? 나라 사랑 국어 사랑...... 우리말을 쓰자는 것두 국가 시책이래유. 옛날버텀 공무원 말 다르구 농민들 말 다른 게 원칙인 게유. 천동면이 이렇게 촌인가...... 끙--"
부면장은 무슨 말이 나오는 것을 참는지 한참 동안 입술만 들먹거리더니 겨우 말머리를 찾은 것 같았다.
"도대체 당신 워디 사는 누구여? 뭣 허는 사람여?"
그러자 누군가가 뒤에서 큰 소리로 대답했다.
"그 사람두 높어유."
그 말이 떨어지기 전에 또다른 목소리가 곁들어졌다.
"놀미 부락 개발위원이구, 마을금고 후원회원이구......"
그러자 여기저기서 우루루 하고 아무나 한마디씩 뒵들이를 했다.
"부랄 조심(가족계획) 추진위원이구......"
"부녀회 회원 남편이여."
"연료림 조성 대책위원이유."
"야산 개발 추진위원이구."
"단위조합 회원이여."
"이장허구 친구여."
"죄용해줘유. 앉어줘유. 구만해둬유. 입 다물어줘유."
하고 부면장은 다시 마이크를 대고 고래고래 고함질렀다. 약간 수그러들자 부면장은 언성을 낮추며 말했다.
"일 헥타는 천 평입니다. 앞으루는 이백 평이니 말가웃지기니 허구 전근대적인 단위는 사용을 삼가주셔야 되겄다--이겝니다."
말머리를 끊으며 김이 말했다.
"이 바닥에 핵타르를 기본단위루 말헐 만치 땅 너른 사람이 몇이나 되느냐 이게유."
부면장은 들은 척도 않고 하던 말을 계속했다.
"에. 날두 더운디, 지루허시더래두 자리 흐트리지 마시구 담배나 피시며 쉬서유. 저 놀미 사는 높은 양반두 승질 구만 부리시구 편히 쉬서유. 미안헙니다."
그러자 박수가 쏟아져나왔다. 김은 그 박수의 임자가 자기라고 믿으며 속으로 웃었다.
(1977)
# --선우사(膳友辭)(선우는 '반찬 친구'라는 뜻이다) #
낡은 나조반1에 흰밥도 가재미도 나도 나와 앉어서
쓸쓸한 저녁을 맞는다
흰밥과 가재미와 나는
우리들은 그 무슨 이야기라도 다 할 것 같다
우리들은 서로 미덥고 정답고 그리고 서로 좋구나
우리들은 맑은 물밑 해정한 모래톱에서 하구 긴 날을 모래알만 헤이며 잔뼈가 굵은 탓이다
바람 좋은 한벌판에서 물닭2이 소리를 들으며 단단이슬슬 먹고 나이 들은 탓이다
외따른 산골에서 소리개 소리 배우며 다람쥐 동무하고 자라난 탓이다
우리들은 모두 욕심이 없어 희여졌다
착하디 착해서 세괏은3 가시 하나 손아귀 하나 없다
너무나 정갈해서 이렇게 파리했다
우리들은 가난해도 서럽지 않다
우리들은 외로워할 까닭도 없다
그리고 누구 하나 부럽지도 않다
흰밥과 가재미와 나는
우리들이 같이 있으면
세상 같은 건 밖에 나도 좋을 것 같다
'
김훈의 장편 소설 <<칼의 노래 2>> 중 58~59쪽에서 발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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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집중 속에 있는 것도 아니었고 분산 속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 모르기는 하되, 삶은 그 전환 속에 있을 것이었다. 개별적인 살기들을 눈보라처럼 휘날리며 달려드는 적 앞에서 고착은 곧 죽음이었다. 달려드는 적 앞에서 나의 함대는 수없이 진을 바꾸어가며 펼치고 오므렸고 모이고 흩어졌다. 대장선이 후미에 있을 때 이물 너머로 바라보면 함대는 적과 마주잡고 쉴새없이 너울거리며 춤을 추는 무도자처럼 보였다.
나를 이동시키면서 고정된 적을 조준하는 일은 어려웠고 나를 고정시키고 이동하는 적을 조준하기도 어려웠다. 나를 이동시키면서 이동하는 적을 조준하기는 더욱 어려웠으나, 모든 유효한 조준은 이동과 이동 사이에서만 이루어졌다. 내가 적을 조준하는 자리는 적이 나를 조준하는 표적이었다. 함대가 이동할 때, 적을 겨누는 나의 조준선은 커다랗게 원을 그리며 회전했다.
김훈의 장편 소설 <<칼의 노래 2>> 중 55~56쪽에서 발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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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죽음을 죽음으로써 각오할 수는 없었다. 나는 각오되지 않는 죽음이 더 두려웠다. 내 생물적 목숨의 끝장이 두려웠다기보다는 죽어서 더 이상 이 무내용한 고통의 세상에 손댈 수 없게 되는 운명이 두려웠다. 죽음은 돌이킬 수 없으므로, 그것은 결국 같은 말일 것이었다. 나는 고쳐 쓴다. 나는 내 생물적 목숨의 끝장이 결국 두려웠다. 이러한 세상에서 죽어 없어져서, 캄캄한 바다 밑 뻘밭에 묻혀 있을 내 백골의 허망을 나는 감당할 수 없었다. 나는 견딜 수 없는 세상에서, 견딜 수 없을 만큼 오래오래 살고 싶었다. 바다에서, 삶은 늘 죽음을 거스르고 죽음을 가로지르는 방식으로만 가능했다. 내어줄 것은 목숨뿐이었으므로 나는 목숨을 내어줄 수는 없었다. 죽음을 가로지를 때, 나는 죽어지기 전까지는 죽음을 생각할 수 없었고 나는 늘 살아 있었다. 삶과 분리된 죽음은 죽음 그 자체만으로 각오되어지지 않았다.
김훈의 장편 소설 <<칼의 노래 2>> 중 48~49쪽에서 발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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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니는 어김없이 돌아왔다. 지나간 모든 끼니는 닥쳐올 단 한 끼니 앞에서 무효였다. 먹은 끼니나 먹지 못한 끼니나, 지나간 끼니는 닥쳐올 끼니를 해결할 수 없었다. 끼니는 시간과도 같았다. 무수한 끼니들이 대열을 지어 다가오고 있었지만, 지나간 모든 끼니들은 단절되어 있었다. 굶더라도, 다가오는 끼니를 피할 수는 없었다. 끼니는 파도처럼 정확하고 쉴새없이 밀어닥쳤다. 끼니를 건너뛰어 앞당길 수도 없었고 옆으로 밀쳐낼 수도 없었다. 끼니는 새로운 시간의 밀물로 달려드는 것이어서 사람이 거기에 개입할 수 없었다. 먹든 굶든 간에, 다만 속수무책의 몸을 내맡길 뿐이었다. 끼니는 칼로 베어지지 않았고 총포로 조준되지 않았다.
김훈의 장편 소설 <<칼의 노래 1>> 중 143쪽에서 발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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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 맞서는 배의 저항은 물에 순응하기 위한 저항이다. 배는 생선과 같다. 배가 물을 거스르지만, 배는 물에 오래 맞설 수 없고, 물을 끝끝내 거절하지 못한다. 명량의 역류를 거슬러 나아갈 때도, 배를 띄워주는 것은 물이었고 배를 나아가게 하는 것도 물이었다. 생선의 지느러미가 물살의 힘과 각도를 감지하듯이 노를 잡은 격군들의 팔이 물살의 함과 속도와 방향을 감지한다. 장수의 몸이 격군의 몸을 느끼고, 노 잡은 격군의 몸이 물을 느껴서, 배는 사람의 몸의 일부로서 역류를 헤치고 나아간다. 배는 생선과도 같고 사람의 몸과도 같다. 물 속을 긁어서 밀쳐내야 나아갈 수 있지만, 물이 밀어주어야만 물을 따라 나아갈 수 있다. 싸움은 세상과 맞서는 몸의 일이다. 몸이 물에 포개져야만 나아가고 물러서고 돌아서고 펼치고 오므릴 수 있고, 몸이 칼에 포개져야만 베고 찌를 수가 있다. 배와 몸과 칼과 생선이 다르지 않다.
김훈의 장편 소설 <<칼의 노래 1>> 중 155쪽에서 발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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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은 싸움마다 개별적인 것이어서, 새로운 싸움을 시작할 때마다 그 싸움이 나에게는 모두 첫 번째 싸움이었다. 지금 명량 싸움에 대한 기억도 꿈속처럼 흐릿하다. 닥쳐올 싸움은 지나간 모든 싸움과 전혀 다른 낯선 싸움이었다. 싸움은 싸울수록 경험되지 않았고, 지나간 모든 싸움은 닥쳐올 모든 싸움 앞에서 무효였다.
경험론의 한계에서 비롯되다..
이순신을 그리는 역사소설 <<불멸의 이순신>>(김탁환 지음, 황금가지, 2004) 중 4권의 내용 중에서 발췌함(270~2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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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인) "예, 큰 스님!"
(휴정) "나는 널 안다. 네가 원하는 것은 승병이 이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는 것 정도가 아니지. 너는 이 나라를 불국토로 바꾸고 싶은 게 아니냐? 어쩌면 이번 전쟁을 기회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허나 내가 보기에 너는 다만 공맹의 무리들이 싫은 것이다. 정작 네가 원하는 불국토를 위해서는 아직 탑 하나도 쌓지 못하고 있어."
월인이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
"오래전부터 꿈꾸어 왔던 일입니다. 이미 탑은 충분히 쌓았습니다."
휴정이 답을 미루고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월인도 그 눈길을 받자 더 말을 보탤 수가 없었다.
"어떤 경우를 당해서라도 마음이 흔들리리지 않는 것을 태어나지 않음이라 하고, 태어나지 않는 것을 생각 없음이라 하며, 생각이 없는 것을 해탈이라고 하느니라. 그동안 너를 곁에 둔 것은 네가 이 이치를 깨닫기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한데 이제 보니 넌 바람이 불어오기도 전에 먼저 흔들리는구나. 그렇게 흔들려서야 네가 쌓았다는 탑이 무너지지 않을 도리가 있겠느냐? 앞으로도 아주 오랫동안 너는 네가 쌓았다는 그 탑이 무너지고 또 무너지는 것을 볼 게다. 엉절거리지(작은 소리로 원망스럽게 자꾸만 군소리를 내는 것) 마라. 네가 한 번 성낼 때마다 백만 가지 바람이 불어온단다. 월인아!"
"예, 큰스님!"
"서두르지 마라. 손 내미는 자가 있더라도 덥석 쥐지 마라. 가장 늦게까지 서 있어야 한다. 이제 우리 오랜 인연을 접을 때가 가까웠느니라."
월인이 깜짝 놀라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어인 말씀이시옵니까? 소승에겐 아직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큰스님을 모시고 싶습니다."
언젠가 헤어질 날이 오리라 생각은 했지만, 너무나 급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월인은 이미 휴정이 승병을 일으키리라는 밀서를 내리면 그것을 들고 팔도를 돌아다니리라고 결심하고 있었다.
'큰스님이 전면에 나설 수 없다면 그 수족 노릇을 제대로 할 사람이 필요하다. 맡겨 주시면 성심을 다하리라.'
의주로 오는 동안 월인은 이 결심을 가슴에 새기고 또 새겼다. 그런데 휴정은 도와달라는 말 대신 인연을 접자고 한다. 승병을 일으키는 일에서 아예 손을 떼라는 것이다.
"정녕 모르겠느냐? 전쟁이 끝나면 나는 살아남더라도 나를 따른 문하 중 몇은 크게 곤욕을 치를 게다. 더구나 너는 더욱 큰 생각을 품고 있지 않느냐? 내 일을 돕다가 탑을 쌓기도 전에 세상 눈에 띌까 걱정이구나."
"그래도 전국에 밀서를 보내려면....... 큰스님 뜻을 충분히 아는......."
"염려를 거두어라. 그 일은 내가 알아서 하겠다. 너는 날이 밝는 대로 떠나라. 전쟁이 이 나라 백성들을 얼마나 참혹하게 만드는지 네 눈으로 직접 보아라. 백성들 곁에 머물며 그 아득한 절망과 눈물과 한숨을 끌어안아라. 싸우고 싶으면 무기를 들고, 달아나고 싶으면 달아나라. 아무도 네 언행에 트집 잡지 않을 게다. 나와 함께 지낸 시절은 잊어라. 누가 묻더라도 내 법명을 내밀지 마라. 월인아! 이제 혼자 힘으로 부딪혀 보는 게다. 가거라. 당장!"
월인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휴정은 벽을 보며 다시 돌아누웠다. 월인은 휴정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큰스님!
눈 감았다가 뜨면 한 삶이 다 흘러가고 또 눈 감았다 뜨면 겨우 기침 한 번 뱉는 순간이라 하셨지요. 모기가 무쇠로 된 소 엉덩이에 주둥이를 찔러 넣듯 정진하라고도 하셨습니다. 저놈은 늘 달아날 궁리만 하는 놈이라고, 망아지처럼 날뛰다 제 명에 죽지 못할까 염려하여 데리고 있는 것이라고도 하셨습니다. 이제 큰스님께서 스스로 우리 문을 열어 주시니 한 걸음 내딛는 것도 벅찹니다. 달은 지고 오경(五更) 깜깜한 밤입니다. 당신의 가늘고 긴 손 어지러이 움직이는 가락을 따라 어두운 숲도 곧잘 돌아다녔습니다만, 이제 마음만 아지랑이처럼 어지럽고 길은 도무지 보이지 않습니다.
큰스님!
그 깊은 뜻을 어렴풋이 느낄 것도 같습니다. 잊고 또 잊으며, 되새시고 또 되새겨, 몸도 마음도 의지할 곳 없는 순간을 찾으라는 것이겠지요. 죽음의 자리에서, 치욕과 번민의 자리에서, 저만의 탑을 쌓아 올리라는 것이겠지요. 첫 마음 잃지 않고 큰스님 가르침 가슴에 깊이 새기겠습니다. 부끄럽지 않은 나날을 쌓아 가겠습니다. 불국토를 이루는 길을 꼭 찾겠습니다.'
이순신을 그리는 역사소설 <<불멸의 이순신>>(김탁환 지음, 황금가지, 2004) 중 3권의 내용 중에서 발췌함(74~75쪽), (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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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이 한발 물러났다.
"듣고 보니 좌상 대감 말씀이 백번 지당하십니다. 그렇다면 저는 어떤 마음으로 성학(성왕을 배우는 학문)을 닦아야 하겠습니까?"
류성룡은 미소를 띠며 편안한 음성으로 답했다.
"반성하면서도 다른 사람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총(聰)'이라 하고, 마음속에 있는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을 '명(明)'이라 하고, 내가 나 스스로를 이기는 것을 '강(彊)'이라고 하옵니다. 소생은 이 셋을 항상 마음에 담고 지냅니다마는, 나리께서는 그 중에서도 강에 마음을 두심이 어떠하온지요?" (74~75쪽)
"천하의 눈으로 사물을 보면 보이지 않는 것이 없고, 천하의 귀로 들으면 들리지 않는 것이 없으며, 천하의 지혜로 생각하면 알지 못할 것이 없다." (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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