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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09/18
    메모15.
    곰탱이
  2. 2021/09/18
    메모14.
    곰탱이
  3. 2021/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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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곰탱이
  4. 2021/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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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곰탱이
  5. 2015/09/21
    메모 11.
    곰탱이
  6. 2015/09/05
    메모 10.
    곰탱이
  7. 2015/09/05
    메모 9.
    곰탱이
  8. 2015/06/28
    메모 8.
    곰탱이
  9. 2015/06/23
    메모 7.
    곰탱이
  10. 2015/06/23
    메모 6.
    곰탱이

메모 19.

생산자 즉 노동자와 생산물의 구별이 생산자와 생산물을 동일시하는 것으로부터 나온

소외(자본, 화폐, 상품의 물신성)의 극복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맑스가 노동과 노동력을 구분하는 것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생산자와 생산물의 관계는 물자체와 현상 사이의 관계와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다. 

생산자는 생산물과의 관계에서 초월론적 존재이다. 

즉 노동자계급은 생산물의 주체로서 물 자체이다. 

타자를 수단으로서뿐만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라는 것은 노동자의 생산물을 수단으로 삼는다는 것이고, 

목적으로 대하라는 것은 노동자를 생산물로 대하라는 것이 아니라 생산 주체로 대하라는 것이다. 

노동자계급은 생산물의 소비와 소비를 위한 노동을 통해 새로운 주체로 자신을 생산하고 규정한다. 

노동자계급은 새롭게 생산되고 규정되어야 하는 물자체와 물자체의 관계, 

즉 실천적 주체와 실천적 주체의 관계이며 타자의 타자성의 관계이다. 

그리고 이 관계가 연대의 관계이다. 

이는 맑스가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에서 환경을 변화시키지만

교육하는 자도 변화된다고 말한 것과 직접 연결된다. 

또한 이것이 거꾸로 서 있는 헤겔의 변증법을 바로 잡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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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18.

맑스에게서 소외의 극복은 관조를 넘어서서 실천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동시에 칸트에게서도 마찬가지로 아직 규정되지 않은 것을 규졍해야 함이라는 

실천을 통해서 규정되는 것으로 만드는 생산과정에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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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17.

부르주아 사회(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정치 체제는 근본적으로 대의제이다. 대의제는 신적인 존재인 ‘국가’(그리고 이 국가는 추상적인 개별적 국민과 일치한다. 이는 근대 이후의 개별적 개인들이 신의 이성을 공유함으로써 신의 뜻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고 신과 대등하게 독대할 수 있게 되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의 뜻과 의지를 대신할 매개자(또는 대리자, agent)로서의 ‘지배계급’의 신분을 호명하는 것이다.

 

대리자로서의 지배계급은 국가의 대리자이면서도 추상적인 국민의 대리자이기도 하다. 그런데 현실적인 국민은 ‘현실적으로’ ‘개별적인’ 또는 특수한 이익에 사로잡혀서 아직 ‘신적인’ 보편성을 현실화시키지 못한 ‘시민사회’의 일원일 뿐이다. 대의제에 의해 호명된 지배계급은 현실적인 국민을 신적인 존재의 의지와 뜻을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계몽한다. 그런데 이 계몽은 이중적인 과정을 내포하고 있다. 하나는 현실적인 국민의 개별적인 또는 특수한 이익을 실현시킬 수 있도록 국가에 요청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국가의 보편적인 의지와 뜻을 현실적인 국민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이 계몽을 통해 시민사회의 일원이었던 지배계급은 자신의 이익을 국가의 보편적인 의지와 뜻과 일치시키면서 시민사회의 다른 구성원들의 개별적인 또는 특수한 이익을 무화시키고 자신의 이익과 일치되는 한에서만 이러한 이익을 충족시킨다.

 

개별적인 또는 특수한 이익에 매몰돼 있는 현실적인 국민을 자신의 이익과 일치시키고 또한 이를 국가의 의지와 뜻으로 일치시키는 지배계급은 중세시대의 ‘사제’의 모습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차이점이 있다면 하나는 선거를 통해 호명되고, 다른 하나는 신분제 사회에서 호명된다는 차이이다. 그러나 이 차이도 형식적인 요소인 선거를 빼고 나면 하등 다를 게 없다.

 

우리는 흔히 대의제에 기반한 대의 민주주의에 반대되는 의미로, 또는 대체될 수 있는 것의 의미로 직접 민주주의를 언급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의 민주주의나 직접 민주주의나 별반 다를 게 없다. 왜냐하면 신적인 존재인 국가의 대리자를 ‘선거’를 통해 호명하기 때문이다. 대의 민주주의나 직접 민주주의라는 두 항을 넘어서는 것은 ‘만장일치’이다. 만장일치는 부르주아 식의 (보통)선거를 통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왜냐하면 ‘선거’ 자체에는 이미 ‘소수에 대한 배제’와 ‘소수에 대한 다수의 복종의 강요’가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선거는 시민사회의 개별적인 집단적인 이해관계(집단적 이기주의)의 충돌의 장이며, 특수한 이해가 보편적인 이해로 세탁되는 장의 이데올로기를 내포한다고 할 수 있다.

 

부르주아 사회에서의 개인은 로빈슨 크루소와 같은 순수하게 개별적이고 원자화된 개인을 근본적인 전제를 깔고 있지만, 사회주의 사회에서의 개인은 개별적 개인의 대립항으로서의 ‘집단적 또는 공동체적’ 개인이 아니라 이 대립된 두 항의 개인을 넘어서는 초월론적인 개인으로서의 ‘사회적’ 개인이다. 사회적 개인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개인이다. 그런데 자기가 하고 싶다는 욕구는 단순히 감각적이고 즉자적인, 즉 개별적 개인 또는 집단적 개인의 이해를 충족시키고자 하는 욕구(개별적인, 특수한 또는 일반적인 욕구)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즉자대자적인 욕구, 다시 말해서 칸트 식으로 말하자면, ‘너의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 타당할 수 있도록 행위하라’, ‘너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인격을 결코 수단으로만 다루지 말고 항상 목적으로도 다루라’는 이성적이고 보편적인 욕구이다. 이성적이고 보편적인 욕구는 맑스에게서는 “각기 자유로운 개인들이 서로 연대하는 사회”를 생산하고자 하는 욕구이다. 그리고 ‘계급의식적’ 욕구이다. 이 욕구는 자기 자신을 ‘새로운 인간’으로 생산하고자 하는 생산력을 총체적으로 실현하고자 하는 ‘실천적’이고 ‘구체적인’ 욕구이다. 이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만장일치이며, 이 만장일치를 ‘의식적으로’ 실현시키려는 사회가 사회주의 사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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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16.

데카르트의 의심은 맑스의 계급투쟁과 연결되고, 데카르트의 생각은 계급의식과 연결된다.

그리고 데카르트의 생각은 맑스의 생산 개념과 연결된다.

데카르트의 생각은 의심하는 나에 의한 실천활동(계급투쟁)의 생산물이며, 생산력이다.

그러므로 생산 또는 생산력은 기존의 경험론(유물론)-합리론(관념론)의 관계구조를 넘어섬(해체함)과 동시에 질적으로 새로운 관계 방식을 의식적으로 창조해내는(혁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실천은 해체와 창조를 동시에 내포하는 것이다.

칸트의 실천 역시 규정되지 않은 것을 배제하고 억압하는 관계구조(경험론-합리론)를 초월하는 것임과 동시에 억압되지 않고 배제되지 않는 새로운 관계구조를 ‘의식적으로’ 생산해내는 것이다.  

생산력에 의하여 기존의 생산관계(경험론-합리론 관계구조)가 해체되고 새로운 생산관계가 수립될 수밖에 없고, 새로운 생산관계의 확립은 당연히 기존의 상부구조를 해체하고 새로운 상부구조를 생산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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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15.

알튀세의 자본주의 모순의 중층결정-철학적으로는 경험론과 헤겔 변증법. 

 

맑스의 유물론-비유적으로는 [원령공주]의 아시타카(주인공)의 모습에서 나타난다. 

산(원령공주)는 자연법칙(시시가미 신)을 거스르지 않고 그대로 반영, 수용한다는 경험론자의 모슴을 보인다. 

에보시(철 생산 마을의 지도자)는 자연을 지속적으로 자기화하여 자신의 힘을 현실 속에서 점점 더 구체화시키고 현실화시켜 나가면서 최후에는 시시가미 신(자연법칙)마저도 자기의 힘을 절대적인 것으로 만드는 대상으로 삼는 절대정신의 형상을 띤다. 

그리하여 헤겔의 변증법의 모습을 보인다. 

이 둘을 초월하면서도 내적으로 통일시키는 고차적인 유물론이 바로 맑스의 유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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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14.

맑스의 자유는 각기 자유로운 개인으로서 서로 연대하고자 하는 상대방(서로 동일화될 수 없는 타자)를 

통하여 자신의 한계를 의식하고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이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것, 즉 자유를 현실화시키고자 하는 것이 바로 <실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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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13.

피터 싱어의 보편성은 '양적 측면'에서의 보편성이다.

즉 동일한 원리가 양적으로 확대되어 최종적으로 모든 것에 적용된다는 것이다. 

이는 헤겔의 변증법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될 경우 자신이 주장했던 <윤리가 아닌 것>이 된다. 

질적인 측면에서의 보편성-하나의 동일한 원리가 모든 것에 적용될 경우 인간을 포함하는 모든 세계존재는 관조적으로(수동적으로) 그 원리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새로운 것을 생산한다는 <실천>의 의미는 사라지게 된다. 

이러한 실천의 의미가 포함될 때 과학이 성립할 수 있다. 

또한 보편성은 양적인 것을 넘어서서 질적인 것이 될 수 있고 되어야만 한다. 

이것이 맑스가 말한 실천으로서의 혁명이며, 질적인 측면에서의 보편적인 윤리나 정치의 원리는 

[각기 자유로운 개인들이 서로 연대하는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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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12.

과학은 주체의 실천활동(Praxis)과 직결된다. 

즉 제1원리 또는 제1원인으로서의 이념이나 법칙은 인간의 실천활동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과학적 방법은 주체의 실천활동을 잘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이다. 

주체의 실천활동은 환경을 변화시키고 그 환경에 맞추어 자신을 변화시키는 변혁적, 혁명적 활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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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11.

~** 메모 11 **

- “예를 들어 주자학은 천을 초월자로 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태극(공)으로 보지만, 이는 별로 모순하는 것이 아니다. 가령 주자학에서 천이라는 개념이 사용되고 있다고 해도, 사실 그것은 태극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서로 변환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천이 인격적으로 표상된다고 해도, 그것은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태극이다. 이리하여 주자학에서 태극에 이르는 길, 즉 수양으로서 ‘명경지수(明鏡止水)’의 경지에 도달하는 일은, 동시에 ‘천명’을 인식하는 일인 것이다. 자기 내부의 ‘이’와 세계의 ‘이’는 이렇게 상호 변환 가능한 관계에 있다.” (같은 책, 242쪽)

- “진사이가 비판하는 것은 바로 이 초월=내재라는 사고이다. 초월=내재라는 것은 결국 내재적인 입장이다. 따라서 그것은 ‘마음’이나 의식에서 출발하게 된다. 사상가들은 진사이나 소라이가 ‘천’의 초월성을 강조했음을 중시하고 있다. 그러나 천의 초월성은 주자학에서도 이야기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초월=내재와 같은 ‘내부’에서 출발하는 일, 또는 ‘마음’으로부터 출발하는 것, 즉 고립된 개인의 ‘의식’에서 출발하는 것을 거절하는 일인 것이다.” (같은 책, 242쪽)

- “진사이가 공자만을 성인으로 본 것은, 공자가 초월적인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흔해빠진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바꿔 말해 어디에나 있는 인간의 초월성을, 또는 타자의 타자성을 발견했던 것이다. 또 그가 『논어』에서 발견한 것은 ‘심원’한 언어나 초월적인 의미가 아니라 ‘평명(平明)’한 언어의 심원함과 초월성(외재성)인 것이다.” (같은 책 243쪽)

- “하지만 그(진사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마음’을 감각이나 성리로 환원하는 것이 아니라, 만인에게 공통된 ‘마음’ 따위는 없다는 사실이다. 달리 말해 개개인이 서로 타자라는 것이다.” (같은 책, 244쪽)

- “주자학에서 각 개인은 이른바 초월론적 자기(훗설)에 의해 연결되어 있다. ‘성(性)’이 다양하다고 할 때, 진사이는 그러한 초월론적 자기를 해체하는 것이다. [……] 이와 똑같이 진사이에게 주자학은 타자와의 관계(윤리적 영역)를 지적으로 처리하는 것으로 비치고 있다. 그것이 아무리 도덕을 과시해도, 본질적으로는 ‘격물치지’, 즉 ‘지에 도달하는’ 일이 과제인 것이다. [……] 그리고 이 동정을 ‘타고난 것’이라고 말할 때, 진사이는 ‘성선설’이나 ‘생득설(生得說)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윤리적 영역이 지에 의해 기초 부여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하는 것뿐이다.” (같은 책 246~247쪽)

- “인간의 본래적인 동일성, 진리나 완전한 해방에 도달할 가능성이라는 이념은, 오히려 타자에 대한 ‘잔인 각박’으로 전화한다. 만인이 동일하므로, 진리에 도달한 자는 진리에 도달하지 않은 사람에 대해 당연히 절대적이라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주자학만의 문제는 아니다. 진사이의 숙(塾)에 권력관계가 없는 것은, 진사이가 ‘가르치고-배우는’ 관계를 거부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 반대이다. 이 관계 없이 인간의 보편적인 동일성 등이 있을 수 없다는 인식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사이는 일반적인 타자에게 강의할 수 있는 교의 같은 것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또 그의 주석에 완결 따위는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같은 책 250~1쪽)

- “그 어떤 언어도, 문화도, 종교도 형식적·구조론적으로 등가라고 보는 견해는 결코 서양 중심주의를 전복시키지 않는다. “이 민족중심주의는 역으로 자기는 반=민족중심주의라고 생각하는, 해방적 진보주의의 민족중심주의인 것이다.”” (같은 책 2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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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10.

~** 메모 10 **


- 단독성은 개별성과 구분되는 것이다.
단독성은 어떤 특정한 공동체(경험론적인(즉 동의라는 행위를 통한) 사회계약론에 의해 구성된 일반적인 것)에 속할 수 없는, 이 공동체 내부에 있지만 외부에 있는 것, 즉 물 자체로서의 타자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 개별성은 어떤 특정한 공동체의 부분으로서 속해 있는 것, 또는 속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서의 타자(공동체에 단지 대립한다는 의미의 타자, 즉 공동체에 의해 지양되어야만 하는 타자)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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