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분류 전체보기

메모1

맑스의 생산력의 증대는 '초월론적인 태도 없이는 불가능하다.

맑스에게서 생산은 곧 '인간 자신의 생산'인데,

다시 말하자면 초월론적 주체로서의 '코기토'의 생산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진보, 도대체 누구냐, 넌!

한 6년 전에 쓰다가 만 글을 이제사 끝을 맺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올려본다.

=========================================================================

# 진보, 도대체 누구냐 넌?! #

 

1. 아리송한 진보의 정체.

2. 노동자는 진보적 존재인가 또는 아닌가?

3. 계급투쟁은 진보적인가 또는 아닌가?

4. 당은 진보적인가 또는 아닌가?

5. 진보는 여성 되기, 소수자 되기의 끊임없는 과정

6. 진보와 혁명의 관계-전략, 전술의 측면에서

7. 진지전과 게릴라전의 통일로서의 진보.

 

1. 아리송한 진보의 정체.

예전에 진보라는 말은 ‘빨갱이’, ‘좌익’과 동의어였다. 그래서 진보라는 말을 함부로 쓰지도 못했다. 그런데 오늘날 진보라는 말은 진부하다고 할 만치 여기저기서 쓰고 있는 말이다. 그런데도 진보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잘 아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진보, 그것은 ‘유령’인가 아니면 ‘보이지 않는 손’인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산물인 ‘민족주의’에 집착하는 주사파도 진보라고 하며, 심지어 노무현 정권도 진보라고 이름을 갖다 붙인다. 다른 한편 일반 대중들은 대통합민주신당이 새누리당보다 개혁적이고 진보적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참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것이 진보라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진보라는 말이 ‘중산층’, ‘서민’(우리는 이들을 보통 민중이라 부른다)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처럼 사용된다는 것이다. 중산층, 서민이라는 말은 ‘피지배 계급’의 뉘앙스를 강하게 풍긴다. 이제 ‘진보’의 정의를 내려 보자면 <중산층, 서민을 위하는 것에 속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의심해 볼 수 있다. 첫째 이러한 정의가 사실 참된 것인지 자꾸 의심이 간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에서 어떤 정권도 피지배 계급을 위하지 않는다는 정권이 없기 때문이다. 둘째, 첫째 물음과 관련하여, 도대체 중산층, 서민은 과학적으로 어떤 계층을 가리키는 것인지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이상 위의 정의로부터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다. 그런데 두 번째 문제에 대한 답을 구하면 첫 번째 문제에 대한 답을 자연스럽게 구할 수 있을 것이다.

 

2. 노동자는 진보적 존재인가 또는 아닌가?

서민, 중산층이라는 개념은 사회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계급처럼 질적인 차이를 포괄하는 개념이 아니라 양적인 차이만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다시 말하자면 양적인 소득 차이와 재산 소유의 양적 정도 차이만을 나타내는 개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양적 차이는 실제로 그 경계가 아주 불분명하다. 명확하게 어떤 기준으로 상류층, 중산층, 서민층을 가를 수 있을까? 그 기준은 대단히 자의적이고 임의적일 수밖에 없다. 연 소득 2,000만 원 이하이면 서민층이고 2,010만 원이면 중산층인 것인가? 이러한 자의성과 임의성은 명확한 질적 차이를 드러내는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관계, 즉 계급 지배에 따른 착취와 억압의 관계를 은폐하게 된다. 그러므로 중산층, 서민이라는 개념은 이러한 관계를 은폐시키는 이데올로기의 역할을 지닌 개념이 된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역할은 곧바로 서민, 중산층이라고 느끼는 일반 대중들의 심리에 엄청난 영향을 준다. 엄연히 현실적으로는 계급지배가 일어나고 있음을 피부로 느끼는 일반 대중들은 지배 당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받아들이기 힘들기 때문에(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면 사는 것이 너무나 비참하고 고달프기 때문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한 사실을 받아들이길 거부할 수 있는 것을 찾게 된다. 이러한 심리적 상태가 자본의 이데올로기와 맞아 떨어지게 됨으로써 일반 대중들은 서민, 중산층이라는 개념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라 본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계급질서 속에서 지배계급으로 상승할 수 있는 사회적 지위를 확보하고자 하는데, 이러한 것이 또한 일반 대중들 대부분이 자신을 중산층이라 생각하도록 만들며, 자신은 대부분 노동자이고 비슷한 처지이면서도 피지배계급에 속하는 다른 사람들과 끊임없이 자기를 구분시키고자 한다. 노동자 대부분은 도시빈민들과 다르다고 생각하며, 정규직 노동자는 비정규직 노동자와 다르다고 생각하며, 화이트칼라는 블루칼라와 다르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볼 때 서민, 중산층이라는 개념은 과학적인 개념이 아니라 심리적이고 주관적이며 이데올로기적인 관념일 뿐이다. 그러므로 서민, 중산층을 위하네 어쩌네 하면서 서민, 중산층을 들먹거리는 것을 진보라 칭할 수 없다. 그것은 단지 무늬만 진보인 ‘사이비 진보’이다. 진보는 질적인 차이를 지닌 개념을 바탕으로 하는 과학을 통해 그 진정한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질적인 차이를 지닌 계급지배를 나타내는 개념들은 노동-자본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노동-자본 개념은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지 못하느냐 또는 소유하고 있느냐’에 따르는, 즉 질적인 차이를 드러내 주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는 필요조건일 뿐이다. 즉 노동자를 위한다고 해서 모두 진보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좀더 생각해 봐야 할 문제라는 것이다.

서민, 중산층은 계급의 측면에서 볼 때 피지배계급이며, 자본주의 사회에서 피지배계급의 대부분은 노동자이다. 서민, 중산층으로서 이 노동자들은 어떤 물적 토대를 가지며 살고 있는 존재인가? 그들 삶의 물적 토대는 무엇인가? 맑스는 생산하는 ‘인간’ 자신이 생산력이라고 했으며, 이 인간은 생산관계의 총체를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노동자의 삶의 물적 토대는 노동자 자신이다.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자본가에게 팔아 그 임금으로 자신의 삶을 영위해 가는 존재이다. 이때 노동자는 두 가지의 측면으로 정의될 수 있다. 첫 번째는 자신의 노동력을 자본가에게 판다는 측면이다. 두 번째는 임금으로 자신의 삶을 영위해 간다는 측면이다. 이 두 측면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첫 번째의 측면에서 노동자는 <자본의 대상>이 된다. 두 번째의 측면에서 노동자는 <자신의 삶의 주체>가 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노동자는 대상과 주체의 측면 모두를 가지고 있는 <모순적인 존재>이다. 이 모순이야말로 자본주의의 본질적인 모순이다. 이 모순은 자본가-노동자의 갈등과 투쟁이라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노동자 대중은 이러한 모순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 자체로 진보적이지 않다. 그들의 생존의 물적 토대는 자본주의 경제 체제에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 대중은 자본주의 경제 체제에서 자신의 생존을 모두 자신 혼자 떠맡게 된다. 자신 이외의 다른 모든 사람들은 암묵적으로 무한한 적대 경쟁에서 물리쳐야 할 적이다. 노동자 대중은 전쟁의 한복판에 서 있다. 생존하기 위해서 그들은 ‘힘’이 있는 쪽, 이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고 있는 쪽으로 붙을 수밖에 없다. 이것이 노동자의 첫 번째 측면, 즉 자신의 노동력을 자본에게 팔 수밖에 없는 측면이다. “장자 에셔가 죽 한 그릇에 자신의 영혼을 파는 것”처럼 이렇게 노동자는 자신의 모든 것을 자본에 맡긴다. 그들은 자본주의 체제를 위협할 수 있는 어떤 사상, 신념, 개념, 언어 등을 사용하지 않으려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을 사용하게 될 때 자신의 생존을 보장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노동자 대중은 자본주의의 비밀을 폭로하며, 자본주의를 해체시킬 수 있는 과학적 개념인 ‘노동자’를 사용하는 대신에 자본의 비밀을 은폐하는 이데올로기 역할을 하는 말인 ‘근로자’, ‘국민’, ‘서민’, ‘중산층’이라는 말을 쓰며, 그 말에 아주 익숙해 있다. 이러한 것들은 노동자 대중이 자신의 삶을 최우선의 목적으로 두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부차적인 것으로 제쳐놓고서 돈 버는 것 자체를 최우선의 목적으로 삼게끔 만든다.

노동자 대중이 자신의 삶을 자본의 영역과는 전적으로 다른 영역에서 새로운 생산관계 속에서 영위해 나가려는 기획을 가지고 실천활동을 해 나가는 순간에서부터 노동자 대중은 진보적인 존재가 된다. 이는 두 번째 측면이 첫 번째 측면을 지양해 나가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므로 진보는 자본주의 생산관계를 해체하고 새로운 생산관계, 인간관계를 창출하는 과정 속에서 자신의 삶을 영위하고자 하는 지속적인 운동이라 할 수 있겠다. 이는 맑스가 말한 대로 “각각의 자유로운 개인들이 연대하는 사회”를 건설해 나가는 끊임없는 운동 자체라고 할 수 있겠다.

 

3. 계급투쟁은 진보적인가 또는 아닌가?

이런 물음을 던지는 것 자체가 어떤 이들에게는 뜬금없고 ‘별 미친...’이라는 말을 하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계급이 가지고 있는 이중적 측면, 즉 모순적인 측면들은 이런 물음을 가능하게 할 수도 있지도 않을까 싶다.

계급투쟁은 그 자체로 절대적으로 진보적이며 절대적으로 선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계급이 처해 있는 상황 또는 계급이 가지고 있는 현실적인 모순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순은 오늘날 노동자 계급 투쟁이 현실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한계라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 계급은 모순적인 존재이다. 먼저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자본에 팖으로써 자본의 대상이 되는 측면을 가지고 있고, 다른 한편 임금을 가지고 자신의 삶의 주체로 살아가고자 하는 측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측면을 ‘즉자적’ 계급이라 하고, 두 번째 측면을 ‘대자적’ 계급이라고 한다.

즉자적 계급으로서 노동자 계급은 자본의 적대적 경쟁 이데올로기에 따라 원자화되고 파편화된 존재로서 항상 모든 걸 자기 혼자(또는 오로지 자기 가족)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개별적인 개인에 불과하다. 이 노동자는 사회적 개인이 아니다. 이 노동자는 언제나 자기와 자기의 가족 안위만이 문제이며, 그 안위를 위해서 죽기 살기로 경쟁에 뛰어든다. 동료가 짤리든, 그 동료가 비정규직 노동자가 되어 자본과 싸우든 그것은 그에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만일 이런 것이 그의 생존을 위협할라치면 협력은 고사하고 적대적인 태도로 돌변하게 된다. 이 노동자는 오로지 ‘너 죽고 나 살자’라는 전쟁의 살얼음판 위에서 목숨 부지에 연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속에서 계급투쟁의 형태는 기껏해야 경제주의, 조합주의 이상을 넘어서지 못하게 된다. 이 즉자적 계급투쟁으로는 결코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갈 수가 없다. 이 상황에서 자본은 노동자 집단 이기주의의 이데올로기를 퍼트리면서 노동자들 사이의 분열을 촉진시킨다. 그리하여 노동자의 저항을 쉽게 분쇄시킨다. 이것이 신자유주의에 따른 자본의 기본 전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즉자적 계급투쟁은 진보적인 것이라 할 수 없다.

새로운 생산관계, 인간관계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은 ‘대자적’ 계급투쟁이라 할 수 있겠다. 자기 삶의 주체가 되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투쟁이 ‘대자적’ 계급투쟁이다. 자기 삶의 주체는 자본에 의해 개별화되고 원자화된, 그리하여 분열되어 있으며 타자를 끊임없이 수단화하려는 무한 적대적인 경쟁 속에 있는 즉자적 계급을 넘어서는 데 있다. 즉 이 분열을 줄여 나가기 위한 물질적 기반과 조건들을 만들어 나가는 데에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개별적이고 원자화된’ 존재에서 인간의 유적 보편성을 지닌 ‘보편적인’ 존재로 만들어 나가는 데에 있다는 것이다. 이런 존재의 생산과정은 맑스의 말마따나 동시적 과정으로서의 “환경의 변혁과 인간 활동 또는 자기 변혁의 일치” 과정이며, “혁명적 실천” 과정이다. 또한 생산력을 ‘질적’으로 변혁시키며 동시에 생산관계를 변혁시키는 과정이다. 이것이야말로 ‘진보’로서의 대자적 계급투쟁이다.

 

4. ‘당’은 진보적인가 또는 아닌가?

이러한 물음 또한 ‘미친...’이란 소리를 듣기 쉬운 물음일 수도, 어리석은 물음일 수도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당’은 크게 두 가지 형태로 존재해 왔다. 하나는 러시아 혁명 당시의 볼셰비키 당으로서의 전위 정당이고, 다른 하나는 전위 정당과 대비되는 의회를 중심으로 하는 제도적 대중 정당이다. 그런데 이 둘 모두 역사적으로 ‘대표하는 자’가 ‘대표되는 자’로부터 구속을 받지 않기 때문에 독재 또는 전제 정치로 귀결되었다.

먼저 전위 정당은 ‘이성의 화신’으로서 모든 프롤레타리아가 따라야 할 전범이며, 통치 권력을 잡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삼는다. 그런데 이러한 전위 정당의 특색 때문에 동일한 목적을 가진 다른 모든 정당 또는 정치 세력들을 자신의 통치 권력으로부터 배제시키고자 한다. 예를 들어 프롤레타리아 자체가 여러 정당으로 분열되어 있을 경우, 도시 프롤레타리아가 농민과 연대하여 권력을 잡았을 경우 등을 생각해 보면, 통치 권력을 잡은 프롤레타리아 일부가 통치 권력을 잡지 못한 다른 프롤레타리아를 통치 권력으로부터 배제시키고자 하며, 도시 프롤레타리아가 농민을 통치 권력으로부터 배제시키고자 하고, 남성이 여성을 통치 권력으로부터 배제시키고자 한다. 이렇게 될 경우 부르주아 정치와 하등 다를 게 없으며, 더 나아가서는 1차 파리 코뮌이나 스탈린 독재 체제처럼 공포 정치 또는 전제 정치로 나아갈 수밖에 없게 된다.

1차 코뮌의 실패는 코뮌의 통치가 공포정치로 변했다는 데 있다. 1차 코뮌은 프롤레타리아와 농민들의 연합에 의해 봉건적인 예속 관계와 지배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이 목표를 달성하면서 봉건적 귀족 소유의 토지를 배분하는 데 있어서 배분의 기준도 정하지 않고 농민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토지를 배분하도록 했다. 그렇게 해서 농민들과 부르주아들은 봉건 귀족의 토지를 무상으로 소유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농민들로 하여금 혁명과 코뮌에 대하여 더 이상 관심을 가지지 않도록 하였다. 왜냐하면 농민들은 이 혁명과 코뮌을 통하여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였기 때문이었다. 농민들은 자신들의 배만 불렸고, 먹고 남은 것은 비싼 값에 팔려고 하였다. 이렇게 해서 도시의 노동자들은 굶주리게 되었다. 이러한 굶주림은 고리대업을 성행시켰고, 부르주아들이 이득을 보도록 하였다. 도시의 프롤레타리아는 굶주림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자리를 찾아 나섰고 그리하여 코뮌의 일을 거의 볼 수 없게 되었다. 코뮌을 장악하고 있던 쟈코뱅 당은 도시 프롤레타리아의 이탈을 막기 위해 코뮌의 일로부터 멀어져가는 행위를 배신으로 규정하고 가차 없는 처벌을 내렸다. 이러한 일은 쟈코뱅 당이 도시 프롤레타리아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지 못하고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결과를 가져왔고, 결국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점점 더 공포정치로 빠져들게 하였다. 다른 한편 전쟁 수행 중이던 이때 프랑스를 지키기 위해 물자가 엄청나게 필요하였다. 이러한 물자 징발과 관련해서 파리와 국경 근처에 있는 농민들은 애국심으로 물자 징발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으나, 국경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전쟁의 위험을 크게 느끼지 못한 대부분 지방의 농민들은 이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으며 전쟁하는 것을 싫어하였다. 이렇게 물자가 제대로 징발되지 않자 코뮌은 6.000명의 군대를 동원해 무력으로 물자 징발에 나섰다. 이것은 대부분의 농민들을 쟈코뱅 당으로부터 등을 돌리게 하였고, 이에 대응하여 쟈코뱅 당은 더더욱 공포정치에 매달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1차 파리코뮌은 파리 노동자들의 저항을 불러일으키지 않고 무너지게 되었다. 오히려 이러한 와해는 많은 사람들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쟈코뱅 당의 이러한 공포정치와 독재의 전철은 러시아의 볼셰비키와 그 뒤를 이은 스탈린 독재로 이어졌다. 러시아 혁명 당시 볼셰비키는 “유럽 전체의 혁명이라는 단 하나의 카드에 모든 것을 걸었다. 그러나 그 카드가 나오지 않자 그들은 자신들이 해결할 수 없는 과제들이 가득 찬 길로 접어들고 말았다. 그들은 강력하고 무자비한 적들에 대항해서 군대도 없이 러시아를 방어해야만 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것들을 달성하기 위한 모든 물적인 조건과 정신적인 조건들이 부족하면 할수록 그 부족한 것을 메우기 위해 더욱더 노골적인 폭력에 의존하는 강제력, 즉 독재에 매달려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들이 그렇게 하면 할수록 국민대중 속에서 그들에 대한 반대파도 더욱 늘어났다. 그리하여 그들은 점점 더 불가피하게” “독재로” “나가야만 했다.” (카를 카우츠키 지음, 『프롤레타리아 독재』, 한길사, 2006, 103쪽) 이러한 최종적인 결과가 스탈린의 공포정치에 의한 독재가 되었던 것이다.

다른 한편, 제도적 대중 정당 역시 ‘부르주아 독재’의 길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부르주아 독재란 부르주아 계급이 의회를 통해 지배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계급’이나 ‘지배’ 속에 있는 개인을 ‘자유로운’ 모든 개인으로 환원함으로써 개인의 계급관계나 지배관계를 지워버리는 일이다.”(가리타니 고진, 『트랜스크리틱』, 한길사, 2005, 256쪽) 제도적 대중 정당은 부르주아 의회 제도권으로 들어간 정당인데, 이 제도권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반드시 “보통선거”를 거쳐야만 한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부르주아 독재를, 오히려 보통선거에서 보고 있었다.”(같은 책, 255쪽) 보통선거의 특징은 모든 계급 사람들이 선거에 참여한다는 것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모든 개인들을 모든 계급·생산관계로부터 분리시킨다는 것에 있다. 이러한 분리는 부르주아가 추구하는 주요한 이데올로기 장치로서 현실 생산관계에서의 계급관계 또는 지배관계를 은폐·소거시킨다. 다른 한편 보통 선거는 비밀 투표로 이루어진다. 비밀투표는 투표에 참여한 사람 자신이 누구에게 투표했는지를 감춤으로써 자유로울 수 있지만, 동시에 누군가에게 투표했다는 증거를 지워버린다. 그럼으로써 ‘대표하는 자’(선출되는 자)와 ‘대표되는 자’(선출하는 자) 사이에 단절이 생김으로써 대표하는 자는 대표되는 자의 구속을 받을 필요가 없다. 다른 말로 하면 선출된 자는 선출한 모든 사람을 대표하는 것이 아닌데도 선출한 모든 사람을 대표하는 것처럼 행동하며 선출한 사람은 또한 그렇게 믿는다. 따라서 제도적 대중 정당이 비밀투표로 이루어지는 보통선거에 의해 의회로 진출하여 국가의 통치 권력을 접수하려고 할 때, 그것이 자의적이든 또는 타의적이든 간에 부르주아 독재의 길로 나아갈 수밖에 없게 된다.

‘당’이 진보의 길로 나아가는 것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물론 위에서 말한 두 가지 형태의 ‘당’ 역시도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방향은 의도했든 또는 의도하지 않았든 간에 부르주아 독재로 귀결되었음을 위에서 보았다. 부르주아 독재의 이데올로기적 원리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오로지 타자를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목적으로서만 대하라!’ 여기에서 목적으로서 ‘타자’에 대립해 있는 ‘나’는 ‘수단’이 된다. 타자에 대해 나는 영원히 수단의 위치에 서 있을 뿐이다. 노동자인 나는 자본인 타자에 대해 자본의 자기 증식을 위한 영원한 수단의 위치에 있게 된다. 이것을 상품의 가치 형태에 놓게 되면 상품인 노동력으로서의 나는 항상 판매되어야 하는 상대적 가치 형태의 자리에만 있게 되고, 자본은 구매하는 등가 형태의 자리에만 있게 되는 것이다.

물론 노동자가 구매하는 등가형태의 자리에 있을 때가 있다. 그것은 자신의 노동력을 재생산하기 위한 소비 물품을 구매할 때이다. 이때 소비자로서의 노동자는 자본가 대등한, 아니 오히려 자본보다 우위에 서 있다는 느낌을 가지게 되며, 그리하여 자신이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운 주체인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소비자로서의 위치에 서려면 우선 전제가 되는 것은 노동자 자신의 노동력이 판매되어야 한다는 사실, 즉 자본에 의해 구매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것은 소비자의 영역에 서게 될 때 자주 망각되는 것이다. 이것을 맑스는 『자본론』에서 ‘화폐의 물신성’으로 설명하고 있다. 선출하는 자는 선거를 통해서만 선출되는 자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지만, 이 자유는 선출되는 자 또는 선출된 자가 결정해 놓은 보통 선거라는 국가 장치를 전제할 때만 생겨나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방향은 이제 ‘오로지 타자를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목적으로서만 대하는 노동자 자신을 만들어 내는 영역이 아니라, 타자를 수단으로서뿐만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는 노동자 자신을 생산하는 영역’을 구축하는 것이다. 이 영역은 현실적으로는 타자(자본)에 대해 오로지 수단으로서밖에 존재할 수밖에 없으면서도 이데올로기적으로는 자신(노동자)이 타자에 대해 목적이라는 느낌을 가지게 하여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가져오거나 정체성을 기만하게 만드는 영역이 아니다. 다시 말하자면 현실세계에서는 타자와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으며 그 타자에 대해 수단으로밖에 존재하고 있지만, 본래 자신은 누구로부터도 자유로운 개별적 개인이라는 이데아를 상기함으로써 이데아계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환상을 가지게 하는 영역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은 타자에게 수단이 되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타인은 지옥’이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인간 역시도 타자이므로 목적이 될 수밖에 없고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인간의 특성을 잘 발현시키는 사회가 바로 코뮌 사회이다. 맑스는 코뮌 사회를 ‘각기 자유로운 개인이 연대’하는 사회라고 말했다. 코뮌 사회의 실현은 위에서 말한 영역의 끊임없는 확장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이 영역은 ‘공장 밖’의 영역이다.

‘공장 안’이 노동자의 삶의 목적을 수단으로 삼아 자본의 자기 증식이라는 목적을 위한 자본의 고유한 운동 영역이라면, ‘공장 밖’은 노동자의 자기 자신의 삶의 목적이 목적 그 자체가 되는 노동자가 유적 존재로서의 인간으로서 자기 자신을 생산하는 영역이다. 이 영역은 자본이 간섭하지 않고 통제하지 않는 영역이다. 왜냐하면 이 영역은 자본의 생산 과정의 전제로서 자본 생산 과정의 외부에 있기 때문이다. 또한 ‘공장 안’은 개별적인 노동자에 대한 자본의 지배와 감시, 통제와 억압이 일어나는 장소이며, 이 자본의 힘이 이 개별적 노동자에 대해서 독립적이고 낯설며,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져야 하는 초역사적인 힘으로 느껴지게 되는 장소이다. 그에 반해 ‘공장 밖’은 자본의 지배와 감시, 통제와 감시를 벗어나서 유적인 인간으로서 노동자 자신의 삶을 자유의사에 따라 자유롭게 꾸려갈 수 있는 장소이다. 이 영역에서 노동자 계급은 온전히 유적 존재로서의 인간으로 자기 자신을 생산할 수 있다. 유적 존재의 실현은 모든 인간의 보편적 목적이다. 이 목적의 달성은 각기 자유의지로 타자를 위한 수단이 됨으로써 동시에 타자에 대해 목적으로서의 타자가 됨으로써 이루어진다. 또한 이 유적 존재의 실현은 맑스가 말하는 ‘각자의 필요에 따라’, 즉 각자의 욕구에 따라 분배, 교환, 소통되는 방식이다. 이 방식 속에서는 그 누구도 이익을 보거나 손해를 볼 수 없다. 왜냐하면 누구나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5. 진보는 여성 되기, 소수자 되기의 끊임없는 과정

진보는 누구나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상태를 뜻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는 최대 다수를 위하고 소수를 배제하는 사회이다. 즉 소수를 수단으로 삼고 최대 다수를 목적으로 대하는 사회이다. 그런데 이 최대 다수는 양적으로 볼 때 최소의 다수가 된다. 왜냐하면 최대 다수가 되는 기준이 바로 적대적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이고, 이 경쟁은 TV프로그램인 1박2일처럼 한 번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이루어지면서 지속적으로 ‘소수’를 배출하기 때문이다. 이제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지속적으로 ‘소수’가 등장하면서 이 소수는 양적으로 ‘최대’가 된다. ‘소수’는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기회조차 제공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진보는 ‘소수’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맑스는 노동을 통해 사회적 관계로서의 인간이 생산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노동은 자본을 위해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노동을 수행하는 임노동자로서의 노동자는 여전히 로빈슨 크루소와 같은 순수한 개별적인 개인으로서의 노동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노동은 노동자 계급이 자기 자신을 생산하는 노동이 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치(자본)의 실체로서의 추상노동은 항상 노동자의 살아 있는 구체노동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이 추상노동은 노동자의 임노동이다. 그리고 이 임노동을 뒷받침하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노동은 여성의 가사노동이다.1 가사노동은 노동자 계급의 기존의 노동력 재생산뿐만 아니라 새로운 노동력 생산의 기초이다. 새로운 노동력의 생산은 질적으로 새로운 ‘생산력’으로서의 새로운 ‘인간’의 생산이다. 그러므로 가사노동은 대자적 노동자 계급 또는 주체로서의 노동자 계급을 생산해 내는 물질적 기초이다. 그리고 계급투쟁의 발화 지점이라 할 수 있다.

성별 분업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리고 가사노동이 개별적인 여성의 몫으로 남게 될 때, 노동자의 자기 생산은 가사노동의 착취 구조를 통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또한 이렇게 생산된 노동자의 노동력은 다시금 자본의 착취 구조 속으로 편입된다. 이러한 것은 <가사노동(개별) = 노동자의 임금(사용가치)(보편) = 자본(보편)>의 등식으로 성립될 수 있으며, <가사노동(개별) --> 노동자의 임금(사용가치)(보편) --> 자본(보편)>이라는 일종의 먹이사슬 구조로 바뀌어 나타난다. 이런 구조 속에서 노동자 계급의 계급투쟁은 그 자체로 비민주적인 착취 구조를 자기 자신 안에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비민주적인 착취 구조를 깨나가는 것이 바로 ‘여성 되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성 되기’는 ‘소수자 되기’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그러면 여성은 소수자인가? 과연 소수자란 무엇인가? 양적인 측면에서 볼 때 여성은 소수자가 아니다. 세계의 절반이 여성이라고 했다. 그런데도 여성이 소수자라고 하는 것은 ‘소수자’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사실상 ‘소수자 되기’, ‘여성 되기’라는 말은 가타리가 썼던 말이다.

 

“모든 권력 구성체에 고유한 남근적 경매[부풀림]에서 이탈하는 남성은 가능한 다양한 양식들에 따라 여성 되기에 개입할 것입니다. 오직 이러한 조건에서만 그는 더욱이 동물, 우주, 문자(lettre), 색채, 음악이 될 수 있습니다.” (F. Guatttari, 『분자혁명』, 윤수종 옮김, 푸른 숲, 2004, 226쪽.)

 

“본래적인 여성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성적 극이란 없으며, 영원한 여성성의 극도 없습니다. 남성-여성 대립은 계급이나 카스트 등의 대립에 앞서 사회적 질서를 근거짓는 데 기여합니다. 거꾸로, 이 규범들을 침해하는 것, 기존 질서와 단절하는 것은 모두 일정한 방식으로 동성애나 동물 되기, 여성 되기 등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같은 책, 227쪽.)

 

“우리가 사람들을 범주-흑인 또는 백인, 남성 또는 여성-로 환원하려는 것은, 우리의 선입관, 즉 이원론적 환원과정을 통해 우리의 권력을 이들에게 행사하려는 욕구 때문입니다. 어떤 사랑도 일의적인 방식으로 서술할 수 없습니다. 프루스트(Proust)에게서 사랑은 결코 특정하게 동성애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항상 분열자 및 편집자의 요소를, 식물 되기, 여성 되기, 음악 되기를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같은 책, 227쪽.)

 

여기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여성 되기’의 주체는 “모든 권력 구성체에 고유한 남근적 경매에서” (의식적으로)2 “이탈하”고자 하고, 기존의 “규범들을 침해하”고 “기존 질서와” (의식적으로) “단절하”고자 하며, “항상 분열자 및 편집자의 요소”를 (의식적으로) “포함하”고자 하는 모든 자들이라 할 수 있다. 즉 현존의 자본주의 가부장제 질서와 규범에 의식적으로 저항하고자 하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여성 되기’는

 

“다른 형태의 되기[생성](예를 들면 슈만에게서처럼 아동 되기, 카프카에게서처럼 동물 되기, 노발리스에게서처럼 야채 되기, 베케트에게서처럼 광물 되기)의 준거” (같은 책, 225~226.)

 

이다. 즉 다른 ‘소수자 되기’의 토대가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소수자 역시도 자본주의 가부장제 질서와 규범에 (의식적으로) 저항하는 주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이 ‘여성 되기’를 통해 본 가타리의 문제의식은 맑스주의의 문제의식과 동일하다. 즉 자본주의에서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주체인 노동자 계급이 계급 주체로 서기 위해서는 소수자, 특히 여성 되기의 과정과 필수 불가결한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맑스주의에서 ‘여성 되기’, ‘소수자 되기’는 결국 인간관계의 문제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관계는 자유롭게 이루어지지 않으며, 오로지 화폐, 자본을 매개로 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노동자를 비롯한 모든 개인들은 로빈슨 크루소와 같은 순수하고 개별적인 개인으로서 자신의 생존을 위하여 자본과 대면할 수밖에 없고, 자본을 통해서만 자신을 표현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자면 이 개인들은 인간으로서 자신의 유적 보편성을 자본의 유사 보편성을 통해 가질 수밖에 없음으로써 자본에 의해 포섭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개별적 개인으로서의 노동자들이, 즉 상대적 등가형태의 자리에만 있을 수 있는 노동자들이 화폐, 결국엔 자본에 의해 모여질 수밖에 없게 되는데, 이것이 루카치가 말한 ‘사물화된 의식’을 가지는 즉자적 계급으로서의 노동자 계급의 모습이다. 그런데 즉자적 계급으로서의 노동자 계급은 자본,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주체로서의 ‘소수자’의 모습이 아니라 자본에 포획되어 자본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다수자’로서의 모습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저항은 어떻게 가능할까? 그리하여 노동자 계급이 계급 주체로서, 저항하는 주체로서의 ‘소수자’ 모습이 어떻게 가능할까?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는 모든 것을 자본으로 표현하도록 강제하는 가치의 동일성, 자본의 동일성을 깨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일단 자본의 동일성은 아래와 같이 상대적 가치형태에 있던 것을 등가형태로, 등가형태에 있던 것을 상대적 가치형태로 뒤바꾸는 것으로부터 해체된다.

 

노동자 계급 = p․화폐(자본) --> p․화폐(자본) = 노동자 계급 [도식2]

 

그런데 이러한 해체는 자본의 동일성의 비밀을 캐물어 들어가 해명하는 데서 출발한다. 가치, 자본의 동일성은 ‘차이’라는 관계를 통해 나타난다. 맑스는 『자본』상품 장의 ‘단순한 가치 형태’의 절에서 ‘x량의 상품A = y량의 상품B’라는 등식을 통해 이 등식이 성립하는 것이 노동 일반으로서의 추상노동, 즉 자연적 노동시간이라는 공통요소(동일성)가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것이 맑스 생각 전체라고 보아서는 안 된다. 맑스는 『자본』을 통해서 자본 운동의 모순을 밝히고자 하였고, 고전 정치경제학의 노동가치론의 모순을 비판적으로 고찰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만일 이것이 맑스 생각의 전체라고 본다면 맑스를 고전 정치경제학의 아류쯤으로 보는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 된다. 이러한 동일성의 이면에는 무엇이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렇지 못할 경우 자본의 동일성과 똑같은 동일성을 노동자 계급이 가지고 있는 것이 된다.

맑스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새로운 사회의 도래에 대한 희망의 싹을 보는 것은 바로 이 단순한 가치 형태 속에서이다. 이는 맑스가 공산주의 사회를 ‘필요한 만큼 배분 받는 사회’라고 했을 때, 사회 구성원 각자가 서로의 욕구(필요)의 차이를 인정하고 동의한다는 점을 바탕으로 함을 암시하고 있는 대목이다. 단순한 가치형태는 바로 서로 질적으로 다른 욕구(필요)를 인정하고 동의하기 때문에 교환이 이루어짐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즉 단순히 상품 속에 들어 있는 노동량(자연적인 노동시간)이 동일하기(동일성) 때문에 교환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 주며, 교환의 전제가 바로 서로 다른 욕구(필요)의 인정과 동의라는 것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3 ‘자본’의 동일성은 이 차이의 인정과 동의 관계를 바탕으로 해서만 유지할 수 있다. 헤겔은 이 동일성에 최후의 목적을 두고 종지부를 찍었다. 그래서 자본의 동일성이 가지는 모순과 횡포를 두고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맑스는 이러한 헤겔을, 즉 머리로 서 있는 헤겔을 뒤집었다. 동일성은 차이를 긍정하고 동의할 때 생성되는 것이다. 차이를 부정하면 동일성은 사라진다. 왜냐하면 차이와 동일성은 관계 속에서 형성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자본의 동일성을 깨는 것은 차이를 부각시키는 것인데, 이는 부정의 단계에만 머무르는 것이 된다. 이 동일성을 깨고서 이 동일성에 바탕한 관계 방식을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바꾸지 않는 한 똑같은 관계 방식을 되풀이하게 된다. 즉 등가형태에 자리하는 얼굴마담만이 달라질 뿐이라는 것이다. 이럴 때 차이는 차별로 변하게 된다. 상대적 가치형태에 오는 것들, 즉 개별적인 것들 그리고 자본과 관계를 가지지 못한 개별적인 것들은 자본의 보편성의 기준에 따라 양적인 차이만을 가진 차별의 대상이 된다. 왜냐하면 자본은 질적 차이를 가지고 있지 못한 양적인 확대 재생산 측면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부정의 단계에서 부정의 부정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이것은 곧 자본의 동일성의 해체를 넘어서서 차이의 인정과 동의의 관계를 새롭게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제의 답은 차이의 생성의 변증법과 연관되어 있다. 차이의 생성의 변증법은 상대적 가치형태에 있는 개별을 등가형태의 보편으로 인정해 주는 것이다. 즉 개별과 보편의 관계의 변증법에 기인하는 것이다. 차이의 생성은 변증법(변화와 생성의 논리)을 배제하고서는 형성될 수 없다. 관계의 질적 변화, 발전의 변증법 없는, 또는 배제하는 차이는 어떤 차이도 가지지 못한다.

소수자 되기, 여성 되기는 이 관계의 변증법에 따라 끊임없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수자 되기, 여성 되기는 부정의 부정 변증법에 기초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이는 자본의 동일성만 깬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자본의 동일성만을 깬다는 것은 부정의 단계에 머무르는 것으로 소수자 되기, 여성 되기의 필요조건일 따름이지 충분조건은 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부정의 단계에 머무르는 노동자 계급의 중심성과 당파성은 해체되어야 한다. 노동자 계급의 중심성, 당파성은 바로 이러한 부정의 단계의 해체, 즉 부정의 부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6. 진지전과 게릴라전의 통일로서의 진보.

부정의 부정의 과정은 노동자 계급이 ‘즉자적 계급’에서 ‘대자적 계급’으로 구성되는 과정이다. 그렇다면 이 과정은 어떻게 구성될 수 있을까? 계급은 그 자체로 “진지”4이며, 또한 그렇게 돼야 한다. ‘즉자적’ 계급으로서의 노동자 계급은 보편으로서의 자본의 운동 과정의 모순에 따라 보편에 반대되는 개별로서의 주체의 참호를 구성한다.5 이러한 참호는 대체로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노동조합은 자본과 직접적으로 대면하는 최전선에 배치되어 있는 선봉부대이다. 그런데 이러한 참호는 각 개별 자본(기업) 별로 이루어지는 고립적 분산적인 것이기 때문에 총 자본의 측면에서 전 방위적인 포위 공격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이럴 경우 고립되고 분산된 참호인 노동조합은 얼마 지나지 않아 궤멸하거나 아니면 자본에 투항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총자본에 대항하는 총노동의 진지가 없기 때문이다.

‘즉자적’ 계급으로서의 노동자 계급은 개별화되고 원자화되어 있다. 즉 노동자 계급은 단일화되어 있지 않다. 노동자 계급들은 그 자체로 이질적이며 다원화되어 있다. 따라서 분열되어 있다.6 이 분열을 줄여 나가기 위한 물질적 기반과 조건들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대자적’ 계급, 즉 구체적인 계급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며, 이 과정이 바로 계급투쟁의 과정이며 총노동의 진지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총노동의 진지를 만들어 가는 과정은 계급투쟁의 과정으로서 자연, 사회의 총체적 관계를 만들어 간다는 것이고 이는 곧 소수자 되기, 여성 되기의 끊임없는 과정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순서의 도식들로 나타나게 된다.7

[여성, 성 소수자, 장애인, 빈민....] = 노동자 계급 [도식1]

 

노동자 계급 = [여성, 성 소수자, 장애인, 빈민....]   [도식2]

 

 [노동자계급, 어린이, 청소년 학생, 노인계층....] = [여성, 성 소수자, 장애인, 빈민....]

또는  [여성, 성 소수자, 장애인, 빈민....]  =  [노동자계급, 어린이, 청소년 학생, 노인계층....] [도식3]

 

[도식1]은 자본의 동일성, 보편성에 대한 부정의 형태이다. 그러나 이것은 자본을 단순히 노동자 계급으로 대체한 것뿐이다. 이것은 화폐, 자본이 서 있던 등가형태의 자리를 노동자가 단순히 대신한다는 의미의 동일성, 보편성을 뜻하는 것이고, 그 동일성, 보편성은 화폐, 자본이 모든 상품(또는 상품 소유자)을 추상적이고 자신에게로 지양되어야 할, 다시 말해서 환원되어야 할 개별자로 만들고, 그 개별자들을 동일성을 지닌 보편자로서의 자신에게로 환원시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또 다른 얼굴의 전체주의의 모습을 가진 사회를 만들 뿐이다.

노동자 계급의 자기 생산은 양적인 자기 생산인 자본 자신의 생산과는 달리 질적으로 새로운 자기 생산이다. 질적으로 새로운 생산은 자본처럼 늘 등가형태의 자리, 즉 동일성과 보편성의 자리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도식2]에서처럼 노동자 계급이 상대적 가치형태, 즉 차이와 개별성의 자리에 오고 동일성, 보편성의 자리에 여성을 비롯한 여러 소수자들이 온다. 여러 소수자 되기를 통해서 노동자 계급은 자기 자신을 새롭게 생산하고 표현할 수 있다. 계급투쟁은 이제 등가형태라는 보편성과 동일성의 자리에 끊임없이 소수자의 문제를 위치시킴으로써 노동자 계급 자신을 자유로운 사회적 개인으로서의 기초를 만들어 낸다.

공산주의 사회는 각기의 자유로운 사회적인 개인들이 자유롭게 연대의 관계를 맺는 사회이다. 물론 [도식2]는 공산주의 사회의 필요조건일 뿐이다. 만일 [도식2]에 노동자가 상대적 가치형태의 자리에만 머문다면 이것은 『자본』에서 전개된 가치형태가 일반적 가치형태로 이행하는 것처럼 [도식1]로 되돌아갈 수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도식2]에서의 노동자 계급은 『자본』의 전개된 가치형태에서 상대적 가치형태에 있는 개별 상품과 같은 순수한 개별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도식2]에서 좌변 항에 있는 노동자 계급은 이미 자신 안에 차이를 지닌 다양한 관계들을 포함하는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노동자 계급은 [도식1]에서처럼 이미 보편성을 지닌 우변 항을 거쳐 왔기 때문이다. 이제 [도식2]는 [도식3]으로 넘어간다.

그리하여 [도식3]의 좌측 등식의 좌변 항은 노동자 계급뿐만 아니라 여러 다른 계층이 올 수 있는데, 이는 『자본』에서의 일반적 가치형태의 좌변 항인 상대적 가치형태의 자리에 오는 상품들처럼 자기들끼리 아무런 연관 관계가 없는 것이 아니라 서로서로 연관되어 있다. 이러한 것은 우변 항에 있는 여성 계층(문제)과 다른 계층 사이에서도 동일하게 일어난다. 그럼으로써 노동자 계급을 비롯한 모든 계층은 다양한 상황 속에서 다양한 연대 관계를 가질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소수자 되기가 이루어지기 어렵다. 소수자 되기란 끊임없이 좌변 항과 우변 항의 위치를 지속적이고도 반복적으로 바꾸는 과정 속에 있는 것이다.8 이것은 보편이 개별이 되며 개별이 보편이 되는 끊임없는 과정이며, 또한 다시 보편으로 돌아갔을 때 이 보편은 이전의 보편과는 내용상 질적으로 차이가 있는 보편이며, 개별 역시도 이전의 개별과는 내용상 질적으로 차이가 있는 다른 개별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질적으로 새로운 인간의 생산과정이며, 생산력이 질적으로 바뀌는 과정이며, 그에 따라 새로운 환경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며, 이 새로운 환경은 곧 새로운 인간을 생산해 내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과정이 자본의 재생산 구조를 깨뜨려서 질적으로 새로운 인간관계 구조를 만들어 내는 계급투쟁의 과정이며 노동자 계급의 진지를 확보하는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진지화는 계급해방, 인간해방으로서의 노동해방의 기본 핵심 전략이다.

계급투쟁의 진지는 홍길동처럼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소수자 되기를 통해 나타나는 각각의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대이다. 노동자 계급은 “수은방울”9처럼 자신의 관계 형성을 끊임없이 바꿔 나가면서 자본의 공격에 저항해야 하며 동시에 그 공격을 무화시켜야 한다. 노동자 계급이 노동자, 특히 임노동자로서 자신의 모습을 고정시킨다면 그것은 ‘가만히 있을 테니 때리시오’와 같은 형국이라고 할 수 있다. 노동자 계급은 가타리가 말했던 것처럼 ‘되기(becoming)’, 즉 소수자 되기의 전략을 통해 자본에 저항할 수 있고 자신을 방어할 수 있다. 특히 이 소수자 되기의 토대는 바로 여성 되기이다. 노동자 계급은 소수자 되기로서 여성 되기의 기동성과 유연성이라는 핵심전략을 채택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해방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 여성 되기는 진지 없이 치고 빠지는 단순한 게릴라전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정규군대를 중심으로 하는 단순한 진지전도 아니다.101112 싸움의 헤게모니 장악을 통한 계급투쟁 진지를 구축, 확보함으로써 진지전을 가능하게 하는 것과 동시에 자신의 정체성을 하나의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끊임없이 옮길 수 있는, 다시 말하자면 개별(상대적 가치형태의 자리)과 보편(등가형태의 자리)을 끊임없이 넘나드는 기동전을 펼치는 게릴라전이라 할 수 있다. 이 여성 되기라는 게릴라전이야말로 노동해방의 핵심 열쇠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1. 여기서 가사노동을 본래부터 여성의 담당이냐고 이의제기할 수 있다. 정당한 이의제기이다. 그런데 여기서 ‘여성’의 가사노동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러한 성별 분업이 일반적 경향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 뿐이다. 해체되어야 할 것은 바로 자본주의 하에서의 이러한 성별 분업이다. 다른 한편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가치=상품=화폐=자본>. 이것의 최고의 법률적 형태는 국가이다. 그런데 이 국가는 가부장적이며 남성 지배적인 국가이다. 왜냐하면 노동자의 임노동의 물적 토대는 바로 여성의 가사노동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가부장제에서 여성의 노동, 특히 가사노동은 남성의 화폐(임금)라는 사물의 형태로 소외된다.텍스트로 돌아가기
  2. 여기서 ‘의식적으로’라는 말은 맑스주의적으로 볼 때 ‘대자적’이라는 말과 유사한 말이다. 그러므로 이 ‘의식적’이라는 말에 괄호를 친 것은 ‘대자적’인 것뿐만 아니라 ‘즉자적’인 것 모두를 포괄하기 위해서이다. 앞으로 ‘의식적’이라는 말에 괄호를 칠 경우, 이러한 의미를 담고 있음을 참고하기 바란다. 텍스트로 돌아가기
  3. 그람시가 말하는 ‘동의’란 바로 ‘차이’에 의거한 동의라고 할 수 있다. 그람시가 시민사회에서 동의를 바탕으로 한 진지 구축을 이야기할 때, 그 동의는 시민사회 내에서 자본이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한 자본의 ‘동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바로 이 자본의 동의와 질적으로 다르면서도 이 자본의 동의의 전제가 되는 동의이다. 이러한 동의는 바로 그람시의 사회주의관으로 연결된다고 본다. 텍스트로 돌아가기
  4. K. Marx, Das Kapital, MEW 25, S. 99 텍스트로 돌아가기
  5. 이는 들뢰즈의 기계들의 관계 방식에서 이접적 종합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이접적 종합은 기계들이 주체로서 자신을 욕망이라는 매끄러운 표면에 ‘홈’을 파면서 등록, 기입하는 과정이다. 여기에서 ‘홈’은 바로 노동자 계급의 ‘참호’를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홈’, ‘참호’는 자본에 의해 쉽게 함락되고 메꿔지는 것이다. 이때의 주체는 들뢰즈의 일시적, 분열적 주체일 따름이다. 텍스트로 돌아가기
  6. 이와 관련하여 리보위츠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노동자들이 이질적인 인간들로 존재한다는 점을 생각해 보자. 그들 각각의 생산에 고유한 조건들이 지닌 차이점(자본 자체가 만들어 내는 분열뿐만 아니라)들을 감안한다면, 노동자들을 분열된 존재로, 즉 서로 경쟁하는 임노동자들로-자본에 대항하는 단일한 존재가 아니라-파악할 수 있는 구체적인 물질적 근거가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요컨대 분석상 노동자 계급을 단일한 존재로 파악한다는 것은, 실제로 노동자 계급이 자신을 단일한 존재로 인식하거나, 또는 단일한 존재로 행동해 나간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또한 노동자 계급이 그렇게 행동할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도 아니다).” 마이클 리보위츠, 『자본론을 넘어서』, 홍기빈 옮김, 백의, 1999, 255쪽.  텍스트로 돌아가기
  7. 아래에 나올 도식들은 맑스 『자본』의 상품 가치 형태에서 나오는 도식들을 응용한 도식들이다. 텍스트로 돌아가기
  8. 이는 들뢰즈의 ‘차이의 반복’과 유사하다 할 수 있다. 들뢰즈는 동일성보다는 차이의 존재론적 우월성을 강조한다. 더 나아가 들뢰즈는 동일성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다. 이는 들뢰즈가 반변증법론자이자 반헤겔주의자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반레겔주의자로서의 맑스와 유사한 점은 바로 상품의 가치라는 동일성이 바로 질적인 차이를 가지고 있는 두 상품 사이의 관계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는 데에 있다. 그러므로 맑스에게서 자기 동일성을 추구하려면 차이의 생성을 전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동일성이란 차이를 내포하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러므로 헤겔처럼 완전한 동일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들뢰즈가 비판하고 있듯이 개념적인 차원에서만 가능할 뿐 현실에서는 가능하지 않다. 맑스 역시도 이 점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머리로 서 있는 헤겔의 변증법을 바로 뒤집고자 한 것이다. G. 들뢰즈, 『차이와 반복』, 김상환 옮김, 민음사, 2004, <서론 : 반복과 차이> 참조. 텍스트로 돌아가기
  9. “빨치산 부대들은 방어 시 가능한 한 공격목표 대상이 되지 않거나 그 대상권을 벗어나면서도 한편으로는 최대의 안전도와 공격력을 보유하기 위해 전개(展開)(군사용어로서 종으로 집중된 부대가 공격을 행하기 위해 종횡으로 공격대형을 전개함)되었다. 수은방울처럼 게릴라 부대들은 단일한 임무를 위해 신속하게 대부대로 결집될 수 있었으며 또 독일군이 반격을 취할 때에는 마찬가지로 재빠르게 십여 개의 분대들로 분해되어 흩어질 수도 있었다. 방어의 기본 이론이란 통상적인 전력 비교에 따라 적과의 접전을 피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기동성과 유연성이 빨치산 대원들의 가장 강력한 전술적 특성이 되었다.” 브룩스 맥클루어, 「러시아의 지하군대」, 『현대 게릴라전 연구』, 오상카 외 지음, 편집부 편역, 세계, 1985, 64쪽 참조. 텍스트로 돌아가기
  10. 먼저 정규군대를 중심으로 하는 진지전에 관해서는 영화 <랜드 앤 프리덤>에서 무정부주의자와 품의 군사조직이 스탈린 군대에 의해 강제적으로 해산되는 장면을 참고하면 되겠다. 이는 프랑코와 그를 원조해 주는 제국주의 정규군대에 맞서기 위해서는 일사불란한 정규군대가 필요함을 역설하는 것이다. 이는 일면적으로 타당하다. 각각의 게릴라 소부대가 서로간의 의사소통 관계(유기적 관계) 없이 각 소부대가 유기적 관계를 가지고 있는 상대방의 정규군에게 각개격파 당하기 쉽기 때문이다. 이는 자본주의 사회의 커다란 특성인 원자화, 개별화와 관련이 깊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각 개인이나 소집단은 개별화, 원자화되어 있고 이 개별화, 원자화되어 있는 개인들이나 소집단들을 자본이 관계 맺게 하며, 만일 노동조합처럼 자본에 대항하는 경우 각개격파하여 궤멸시킨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탈 중앙집권적인 게릴라 전의 위험에 대하여 중앙집권적인 정규군의 필요성을 역설하게 된 것이다.  텍스트로 돌아가기
  11. 그런데 과도하게 중앙집권적 정규군에 집중할 경우, 즉 게릴라를 정규군으로 만드는 데 집중할 경우 싸움은 백전백패를 당할 게 뻔하다. 왜냐하면 질적으로 동일한 형식(중앙집권제)으로는 양적인 것만이 승패의 요인이 되고 양적으로 불리한 정규군화된 게릴라들은 이미 지는 싸움을 시작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는 1936년 스페인 내전이 잘 보여 준다고 하겠다. 정규군에 대한 게릴라들의 싸움의 승패는 중앙집권화를 넘어서면서도 질적으로 새로운 관계 틀이 좌우한다고 보겠다. 탈 중앙집권적인 게릴라도 아니고, 중앙집권적인 정규군도 아니라면 무엇일까? 2차 세계대전 중의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베트남전>의 보기를 들어서 그 싹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텍스트로 돌아가기
  12. 전력이 부족한 상태에 있는 측의 싸움 형태는 게릴라전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게릴라전이 눈부신 전과를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질 수밖에 없었던 경우가 바로 이순신의 경우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순신은 [전투]에서 승리하였지만 [전쟁]에서는 패배한 장수라는 것이다. 이순신의 싸움은 게릴라전의 전형을 보여 준다. 이순신은 서남 해안의 물길 지형을 이용해서 치고 빠지는 전술을 택했다. 그리고 그 전술을 위한 무기도 개발했다. 이순신은 절대로 정규군들이 하는 식으로 일대일로 붙는 싸움을 하지 않았다. 이순신은 부하에게 도망가는 적을 절대로 쫓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다. 그런데 이순신은 마지막 노량 해전 때 도망가는 적을 쫓아 관음포구로 향해 갔다. 왜 이순신은 그랬을까? 이순신은 더 이상 게릴라전이 불가능함을 알고 있었다. 명나라 육군과 수군의 수모를 받으면서도 육지를 탈환해서 앞으로의 싸움을 진지전으로 끌어가고자 하였다. 싸움의 힘을 끊임없이 재생산하고 새로이 생산할 수 있는 진지로서의 육지의 탈환! 이것이 이순신이 무리하게 도망가는 왜군을 뒤쫓던 이유였다. 진지 없는 게릴라전은 결국 패배하게 돼 있다. 해방 후 남쪽의 빨치산의 최후는 바로 이 경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싸움의 힘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면서 새로이 생산할 수 있는 진지를 어디서 어떻게 만들 수 있을 것인가? 이 문제는 노동자 계급이 계급투쟁의 힘을 어디서 어떻게 끊임없이 재생산하면서 새로이 생산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와 직결된다.  텍스트로 돌아가기

우리 선희..

# <우리 선희> (홍상수 감독, 2013) #

감독 : 홍상수

출연 : 정유미(선희), 이선균(문수), 김상중(최교수), 정재영(재학), 이민우(상우), 예지원(주현)

 

내 머리털 나고 혼자 야심한 밤(밤11시 상영)에 영화 관람을 하러 간 것은 처음이었다. 그만큼 홍상수라는 감독의 이름이, 그리고 배우들의 이름(정유미, 김상중, 정재영, 이선균, 이민우, 예지원)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이 영화에는 특별한 반전이 있는 내용이 없다. 그냥 너무나도 일상적인 이야기들과 모습으로 구성된 영화이다. 얼핏 보면 그냥 그저 약간 코믹한 영화처럼 보일 수 있다. 홍상수 감독께서 그러셨단다. “이번엔 쉽게 쉽게 보시라.” 그런데 이게 쉽게 보면 쉬울 수도 있는 것이지만, 한꺼풀만 벗기면 그리 녹록하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홍감독님께서 낚시밥을 던지셨구나 하는 느낌에 살짝 웃음이 나기도 했다(어렵게 생각하는 나를 홍감독님께서는 싫어하실 수도 있다! 그렇지만 영화 해석은 내 자유이니까!^^).

이 영화는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강하게 떠올리게 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람들 관계 속에서 네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를 찬찬히 사색해 볼 것을 바람이 전하듯 전해 준다.

이 영화는 한 여자(선희)와 세 남자(문수, 최교수, 재학)의 만남(재회)과 헤어짐에 관한 이야기이다. 세 남자는 예전에 한 여자와 관계가 있던 남자들이다. 한 여자는 학교 졸업 후에 다시 학교로 와서 이 남자들을 하나씩 만나고 나서 그대로 떠나버린다.

홍상수 감독의 예전의 영화 제목인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영화에서도 선희는 앞으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인간관계의 전형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선희는 인간관계, 특히 남녀관계에서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적 관계 고리를 끊어 버린다. 예전에 세 남자와 선희의 관계는 주인과 노예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다가 선희는 이 관계로부터 벗어나서 새로운 자신의 모습을 찾기 위해 현실(학교)을 떠나 잠수를 탄다. 그리고 새로운 관계를 통해 새롭게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려는 결심(유학)한 후에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이제 현실에서의 관계를 이해하고 정리해야 새로운 현실로 나아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선희는 세 남자를 만나서 현실을 이해하고자 한다. 세 남자와의 각각의 만남 속에서 선희는 자신이 이들과의 관계 속에서 주인의 위치에 있게 됨을 이해하게 된다. 세 남자는 선희에게 매달리고(문수), 선희의 말에 복종하게 되고(최교수, 교수 추천서를 선희의 뜻을 그대로 반영하여 다시 써 준다), 선희에게 오히려 위로를 받게 된다(재학). 그리고 선희는 이 주인의 위치를 과감히 버리고 쿨하게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고리를 끊어 버린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은 끊임없는 악무한적 순환의 고리(불교에서는 윤회의 고리로 표현된다)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세 남자와 다시 관계를 가진다면 주인의 위치는 얼마 가지 않아 노예의 위치로 바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희의 떠남은 결국 대등하고 평등한 인간관계를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

대등하고 평등한 관계란 집착과 아집을 끊어버리는 쿨한 관계이다. 집착과 아집은 배타적 소유인 사적 소유관계(주인과 노예의 관계)로부터 나타나는 것이다. 남자들 셋 모두 선희에 대한 동일한 파악은 바로 이러한 집착과 아집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세 남자는 자신들이 선희와의 관계에서 노예의 위치에 있다는 것을 즉자적으로 직감하지만 대자적으로 이해하지는 못한다. 그들은 늘 주인의 자리를 그리워하지만, 그 주인의 자리는 이제 과거의 일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선희가 떠난 후에 주인의 위치라는 집착과 아집에 갇혀 현재의 자기 존재에 대해 기만하게 된다.

다른 한편 세 남자는 선희와 만나면서 선희에게 삶에 대한 충고를 한다. 이러한 충고는 여전히 자신의 주인의 자리에 있다는 자기 존재기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또한 권력관계로부터 나타나는 것(가진 자, 쥔 자가 그렇지 못한 자에게 하는 것)이다. 그들이 자신의 삶을 깊게 파고 들어가봐야 한다고 말하면서 결과적으로 지금의 삶을 깨뜨려보라고 말하지 않는 것은 권력을 가진 자가 말하는 것, 즉 지금의 삶의 모습에 대한 제1원인을 캐보라는 것인데, 그 제1원인은 결국 신이고 네가 현재 이렇게 사는 것은 신에 의해 결정된 삶이라는 결정론의 이데올로기가 함축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결국 노예의 삶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임을 뜻한다.

세 남자는 자신들의 이러한 존재 기만이 관성의 법칙에 의한 것임을 깨닫지 못한다. 이 깨닫지 못함은 결국 치킨(닭)으로 상징된다. 주현(예지원 분)의 재치가 돋보인다. 여성의 이름에만 Sophia(지혜)가 있고 남성의 이름에는 없는지가 이해된다. 역시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칸트의 <<판단력 비판>> 에 관한 메모.

# 칸트의 [판단력 비판](김상현 옮김, 책세상, 2005년) #

 

- Communism에서의 <자유>는 칸트의 판단력의 기초인 감성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Communism에서의 <자유>는 칸트가 말하는 현존 대상의 질서와 법칙으로서의 개념과 도덕적 선(good)을 넘어서는, 즉 자본주의 질서와 도덕적 선(good)을 넘어서는 감성적인 것과 연관이 있는 것 같다. Communism의 자유로운 개인은 <취미판단에서의 순수한 취미를, 공통감(어쩌면 이것이 자유일 수 있겠다)에 대한 직관력을 가지고 있는 인간>일 수 있겠다.

 

- (칸트에서의) 정치철학적 의미로서 (칸트의) <개념>은 <국가>(공동체)에 상응한다고 볼 수 있으며 <취미판단>, <공통감>은 <세계 국가(공화국)> 또는 <국가 연합>에 상응한다고 할 수 있다.

 

- (75쪽) “취미판단이 순수하다면, 그것은 만족이나 불만족을 용도나 목적을 고려하지 않고 대상에 대한 순전한 관조와 직접 결부시킨다.”

--> Commune의 형식을 가장 잘 표현해 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목적성을 배제한 목적성, 즉 대상을 그 자체로 관조하는 것, 다시 말해서 여러 가지 유용성, 기능, 의도 실현 가능성을 배제한 대상 그 자체에 대한 아름다움의 관조가 바로 Commune의 형식이지 않을까 싶다.

 

- (75쪽) “마음의 능력들이 우리가 아름답다고 부르는 것과 더불어 자유롭게 그리고 무규정적이면서도 합목적적으로 향유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자유로우면서 합목적적인] 향유에서는 지성이 상상력을 위해 활동할 뿐 상상력이 지성을 위해 활동하지는 않는다.”

--> Commune : 아름답다고 부르는 것과 더불어 자유롭게 그리고 무규정적이면서도 합목적적인 것이다.

 

- (87쪽) “그것이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은 [이를 측정하기 위한] 척도로서 역시 크기를 가지고 있는 다른 어떤 것을 항상 요구하게 된다. 크기를 판정함에 있어서는 단지 다수성(수)뿐만 아니라 단위(척도)의 크기도 중요하고, 또 이 단위의 크기는 항상 다시 그것과 비교할 수 있는 척도로서 다른 어떤 것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현상의 모든 크기 규정은 크기에 관한 절대적 개념을 결코 제공할 수 없고, 언제나 비교 개념만 제공할 수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은 다른 크기를 가지고 있는 다른 어떤 것을 항상 척도로서 요구한다. → 이것은 맑스의 상품 교환을 뜻하고 그 척도는 교환가치를 뜻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어떤 것은 단적으로 크다>라는 것에서 <크다>라는 것은 어떤 척도를 요구하는 비교·상대적인 개념이 아니라 <절대적인> 개념이다. 이 개념은 맑스에게서 <필요한 만큼>이라는 개개인의 욕망과 직결된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필요한 만큼>이라는 개개인의 욕망 개념은 대단히 주관적인 것이지만, 이 주관을 넘어서는 보편성과 절대성(인간 삶을 위한 필요의 충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 비교·상대적인 개념으로서의 <크다> 개념은 수학적·논리적 판단을 위해 사용되는 개념이다.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들의 계열 밖에서 상품 가치의 기준, 척도가 되는 등가형태로서의 화폐, 나아가서는 자본의 역할과 바로 연결될 수 있다. 모든 상품들은 자신의 밖에서 판단의 기준을 확보하게 된다. 이것은 더 나아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소외> 개념으로 이어질 수 있다.

--> 절대적인 개념으로서의 <크다> 개념은 감성적 판단에 사용되는 개념이다. 이것은 모든 판단의 기준을 자신 안에서 확보할 수 있는 사회주의 사회에 적용될 수 있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 (91~92쪽) “물론 사물의 크기에 관한 명확한 개념은 단지 수(물론 무한히 진행하는 수 계열에 의한 근삿값)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이 수의 단위가 곧 척도이며, 그런 한에서 크기의 모든 논리적 평가는 수학적이다. 그러나 척도의 크기는 이미 알려진 것으로 가정되어야만 하므로, 만일 이 척도의 크기가 또다시 다른 척도를 단위로 삼아야만 하는 수를 통해서만 평가된다면, 우리는 결코 제일의 척도 또는 근본 적도를 가질 수 없을 것이며, 따라서 주어진 크기에 관하여 규정된 개념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근본 척도의 크기 평가는 오로지 우리가 그 크기를 직관적으로 직접 포착하여 포착된 크기를 상상력이 수 개념을 현시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다는 데서 성립하는 것임이 틀림없다. 다시 말해 자연 대상들의 크기 평가는 모두가 결국은 감성적인 것이다(즉 주관적으로 규정된 것이지 객관적으로 규정된 것이 아니다).”

--> 이는 화폐의 물신화를 벗겨내는 맑스 사유의 방법과 아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 (134~135쪽) “칸트는 ‘일체의 관심 없이 대상을 판정하는 것’은 곧 ‘상상력과 지성의 자유로운 유희에 있어서 나타나는 마음의 상태’(《판단력 비판》, 29쪽 참조)라고 말하며, 이렇게 상상력과 지성의 일치가 일어나는 경우 이는 필연적으로 만족을 동반하게 되며, 그 만족감을 표시하는 판단, 즉 감성적 판단은 비록 주관적이기는 하지만 만인에 대한 타당성을 요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 상상력과 지성의 자유로운 유희 = 상상력과 지성의 일치

→ 반성 취미에 의한 미의 만족

--> 이러한 상상력과 지성의 관계는 맑스주의에서 토대와 상부구조와의 관계, 자본주의와 그를 넘어서는 공산주의와의 관계로 유비될 수 있겠다.

→ (137~138쪽) “감성적 합목적성은 주관적 측면에서 본다면 인식 능력들 간의 일치로 규정된다. 상상력과 지성이라는 인식의 두 능력은 감성적 판단에서는 상호 대립하면서 통일하는 자유로운 유희의 상태에 놓이게 된다. 이 관계는 이론 인식의 상황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이론 인식의 상황에서는 상상력이 지성을 위해 활동하는 일방적인 관계가 성립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관계에서는 각각의 부분들이 결합해 전체를 이루기는 하되, 각각의 항이 서로에게 원인이자 동시에 결과인 전체 관계를 성립시킨다고 보기는 어렵다. 반면에 감성적 판단에서는 두 인식 능력이 상호 침투하여 동시에 상호 원인이자 결과인 관계를 형성한다. 이때 감성적 주체는 인식 능력들의 자유로운 상호 침투 작용을 합목적적인 것으로 느끼게 되고, 쾌감이 유발되어 그 상태에 몰입하는 관조의 상태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객체로부터의 자유는 주관 자신의 내적·반성적 자유를 가능하게 하며, 이 반성적 자유는 객체적 목적이 없는 자유로운 합목적성으로 규정될 수 있을 것이다.”

→ (138~139쪽) “여기에서 우리는 감성적 합목적성의 두 번째 특징을 발견하게 되는데, 바로 생명감의 고양이다. 즉 인식 능력들의 일치와 조화라는 “감성적 판단은 ‘활력을 불어넣는 것’으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 이는 사실 칸트 자신이 주장하는 바이기도 하다. 그는 감성적 판단에 있어서의 쾌·불쾌의 감정을 생의 감정이라고 일컬으며(《판단력 비판》, 4쪽), 이 판단에서 성립되는 쾌의 감정이 인식 능력들에 활력을 준다고 말한다(《판단력 비판》, 37쪽). 감성적 합목적성이 생명감을 고양시킨다고 할 때도 우리는 감성적 합목적성의 부정적 규정, 즉 목적 없음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이 생명감의 고양은 물질적 욕구의 충족에서 비롯되는 것도, 실천적 욕구의 충족에서 비롯되는 것도 아니다. 말하자면 자기반성에서만 비롯되는 생명감이다. 바로 이런 측면에서 우리는 미와 예술을 통해 마음을 도야하고 세련된 문화를 지향하되, 목적(억압) 없는 - 일체의 목적은 그 달성을 위해서는 언제나 그 목적에 반하는 것들에 대한 배제를 내포하므로 목적은 곧 어압의 근원이 된다 - 자유로운 문명을 추측해 볼 수 있게 된다.”

 

- (139~140쪽) “그러므로 형식적 합목적성, 즉 객관의 측면에서 본 감성적 합목적성은 ‘전체-존재Ganz-Sein가 지성에 의한 부분들의 규칙적인 합성을 통해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부분들이 자유롭게 합쳐져서 통일을 이루는 것과 같은 외관을 제시하는 것’이라 하겠다.

감성적 합목적성에 대한 이와 같은 주관적 측면의 규정과 객관적 측면의 규정은 자연스럽게 감성적 경험에 있어서 주·객의 관계를 합목적적으로 표상하게 만든다. 인식 능력들의 일치와 조화 또는 생명감의 고양이라는 주관적 측면은 대상의 형식적 합목적성이라는 객관적 측면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감성적 합목적성은 감성적 주체와 그 주체가 경험하는 세계와의 목적 없는 자유로운 일치로 규정된다. 이는 객체에 투사된 주체의 자기 경험임과 동시에 주체에 투사된 객체의 (또 다른 방식의) 드러남이다. 말하자면 인식 능력들 간의 자유로운 일치가 주관과 객관의 자유로운 조응으로 전환됨을 의미한다. 주체와 객체의 자유로운 상호 조응은 사회적 의사소통의 문제와 관련하여 새로운 지평을 열어줄 수 있는 단초가 된다.”

--> 공산주의 사회는 자유로운 각 개인들의 연합체(어소시에이션)이라는 정의와 아주 흡사하다(감성적 합목적성, 전체-존재).

--> 코뮌 사회 : 목적(사유재산제로 유비) 없는 합목적성, 자유로운 합목적성(또는 필연성, 합법칙성) 또는 무규정적인 규칙성.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4장. 전통의 단절(18세기 말과 19세기 초 : 영국, 미국 및 프랑스)

▲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 : 1757 - 1827) ▼

- “미술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접근에 있어서 가장 두드러진 예는 고야보다 열한 살 아래인 영국의 시인이자 신비주의자인 블레이크였다.” 그는 “자기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에 사는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었다. 그는 아카데미의 관학적 미술을 경멸했다.” (488쪽)

- “도판 321(<태고 적부터 ‘계신’ 이>, p.491)은 《유럽, 예언서》라는 자작 시집에 곁들인 삽화 가운데 하나이다.” (488쪽)

- “블레이크가 그린 것은 깊은 바다 앞에서 컴퍼스를 세우고 있는 하나님의 이런 장엄한 환상이다, 이 천지창조의 그림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모습은 어딘가 미켈란젤로의 숭배자였다 그러나 블레이크의 손을 거치면서 하나님의 모습은 몽환적이고 환상적으로 되어 갔다.” (490쪽)

- “사실상 블레이크는 자기 나름의 독특한 신화를 창조했으며 환상 속의 형상은 엄격하게 말해 하나님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블레이크의 상상 속의 한 존재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는 이를 유리즌(Urizen : 이성을 상징-역주)이라 불렀다.” (490쪽)

- “비록 블레이크가 유리즌을 세계의 창조자로 생각하기는 했으나 그는 세계를 악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러한 세계의 창조자도 사악한 영혼을 지녔다고 생각했다. 그 때문에 이 환상을 기분 나쁜 악몽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컴퍼스는 마치 어둡고 폭풍우 몰아치는 밤의 번갯불처럼 보인다.” (490쪽)

- “블레이크는 환상에 너무 깊이 빠진 나머지 현실세계를 그리길 거부하고 오로지 자기 내면의 눈에만 의존했다.” (490쪽)

- “중세의 미술가들처럼 그는 정확한 묘사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꿈속의 형상 하나하나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으므로 단순한 정확성의 문제는 그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 같이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는 르네상스 이래로 공인된 전통의 규범을 의식적으로 포기한 최초의 화가였다.” (490쪽)

 

▲ J. M. W. 터너( J. M. W. Tuner : 1775 - 1851) ▼

- “주제를 마음대로 선택하는 새로운 자유를 얻게 된 화가들이 가장 많은 혜택을 입었던 분야는 풍경화였다. 그때까지 풍경화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져왔다. 특히 시골의 집이나 정원, 또는 멋진 경치를 그려 생계를 꾸려왔던 화가들은 진정한 예술가로서의 대우를 받지 못하였다. 이러한 태도는 18세기 말엽 낭만주의 정신을 통해 다소 바뀌었으며 위대한 화가들은 풍경화를 새로운 권위로 끌어올리는 것을 일생의 목표로 삼았다.” (490쪽)

- “여기서도 전통은 한편으로 도움을 주면서도 한편으로는 장애물이 되었다. 같은 세대에 속하는 두 명의 영국화가가 서로 얼마나 다른 방식으로 이 문제에 접근하였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흥미 있는 일이다.” (490쪽)

- “그 중 하나는 터너이고 다른 한 사람은 존 컨스터블이다. 이 두 사람을 비교하는 것은 레이놀즈와 게인즈버러 사이의 대조를 연상시키는 무엇이 있다.” (490쪽)

- “그 역시 레이놀즈와 마찬가지로 전통의 문제에 사로잡혀 있었다. 클로드 로랭의 유명한 풍경화(p.396, 도판 255, <아폴론에게 제물을 바치는 풍경>)를 능가하지는 못해도 같은 수준에는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 그가 지닌 일생의 야심이었다. 그는 자신의 작품과 스케치를 국가에 기증하면서 그 중 한 작품(도판 322, <카르타고를 건설하는 디도>, p.492)를 항상 클로드 로랭의 작품과 나란히 전시해 줄 것을 명백한 조건으로 내세웠다.” (492쪽)

- “클로드의 그림이 지닌 미를 단순함과 고요한, 그의 환상세계가 지니는 명료함과 구체성, 그리고 어떠한 요란한 색채도 없다는 점에 있었다. 터너 또한 빛으로 가득하고, 눈부신 아름다움을 지닌 환상세계를 그렸지만 그것은 정적인 세계가 아니라 동적인 세계였으며 단순한 조화의 세계가 아니라 현란하고 화려한 세계였다.” (492쪽) (밑줄 친 부분은 낭만주의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 “그의 최고의 걸작들은 사실상 우리에게 웅다한 자연의 가장 낭만적이고 숭고한 모습을 보여준다. 도판 323(<눈보라 속의 증기선>, p.493)은 터너의 작품 중 가장 대담한 것 가운데 하나로서 눈보라 속의 증기선을 그린 것이다. 이 소용돌이치는 구도를 데 블리헤르의 바다 풍경(p.418, 도판 271, <해풍에 흔들리는 네덜란드 군함과 수많은 범선들>)과 비교해보면 터너의 접근방식이 얼마나 대담한 것인지 알 수 있다.” (492쪽)

-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데 블리헤르”의 “그림을 보고 이러한 배들을 다시 만들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터너의 그림을 보고 19세기의 증기선을 다시 만들어낼 수 없을 것이다. 그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은 시커먼 선체ㅘ 돛대에서 펄럭이는 깃발, 사나운 바다의 위협적인 돌풍과 대결하는 투쟁의 인상뿐이다. 마치 휘몰아치는 바람과 파도의 충격을 몸으로 느낄 수 있을 것만 같다. 세세한 부분은 살펴볼 겨를이 없다.” (492-4쪽)

- “낭만주의 시를 읽거나 낭만주의 음악을 들을 때에 우리가 상상하게 되는 것은 영혼을 뒤흔들고 마음을 압도하는 이러한 폭풍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터너에게 있어서 자연은 항상 인간의 감정을 반영하고 표현한다.” (494쪽)

 

▲ 존 컨스터블(John Constable : 1776 - 1837) ▼

- "컨스터블의 생각은 터너와는 매우 달랐다. 터너가 경쟁하고 능가하기를 원했던 전통이라는 것이 그에게는 단지 장애물에 지나지 않았다.“ (494쪽)

- “그는 클로드 로랭의 눈이 아니라 그 자신의 눈으로 본 것을 그리려고 했다. 그는 게인즈버러가 그만둔 것에서 다시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p.470, 도판 307, <시골풍경>). 그러나 게인즈버러조차도 여전히 전통적인 기준에서 보아 ‘한 폭의 그림 같다(picturesque)’고 생각될 만한 소재들을 선택했으며 여전히 자연을 목가적인 장면들을 위한 아늑한 무대로 보았다. 컨스터블에게는 이러한 모든 생각들이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진실만을 원했다.” (494-5쪽)

- “컨스터블은 대담한 혁신으로 사람들에게 추격을 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가 원한 것은 그저 자신의 눈에 충실하려고 하는 것뿐이었다.” (496쪽)

- “그의 습작(도판 324, <나무줄기의 습작>, p.494)들은 흔히 완성된 그의 작품들보다 훨씬 대담하다. 그러한 아직 일반 대중이 순간적인 인상의 기록을 전시할 만한 가치 있는 작품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시기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완성된 작품들은 처음 전시되었을 때 큰 물의를 불러일으켰다.” (496쪽)

- “도판 325(<건초마차>, p.495)는 1824년 파리에서 공개되어 컨스터블을 일약 유명하게 만든 작품이다.” (496쪽)

- 컨스터블은 “실제의 자연보다 더 그럴 듯하게 보이도록 묘사하는 것을 거부하였고 가식적인 포즈나 허세가 전혀 없는” 태도를 “성실”하게 견지하려고 했다. (496-7쪽)

 

▲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 : 1774 - 1840) ▼

- “전통과의 단절은 화가들에게 터너나 컨스터블의 작품에서 구체화된 두 가지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그들은 붓과 물감으로 시를 쓰는 시인이 되어 감동적이고 극적인 효과를 추구할 수 있었다. 또 자기 앞에 놓여진 소재들을 성실하게 묘사하여 끈질기고 정직하게 그것을 탐구하려는 결심을 할 수 있었다.” (497쪽)

- “유럽의 낭만주의 화가 가운데는 터너와 동시대 사람인 프리드리히 같은 위대한 미술가들이 있었다.” (497쪽)

- “프리드리히의 풍경화는 슈베르트의 가곡을 통하여 우리가 보다 친숙하게 알고 있는 당시의 낭만적 서정시의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그가 그린 황량한 산의 모습(도판 326, <살레지아 산의 풍경>, p.496)은 그 발상에 있어서 시와 가까운 중국 산수화(p.153, 도판 98, <우산도>)의 정신을 상기시키기까지 한다.” (497쪽)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4장. 전통의 단절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 영국, 미국 및 프랑스) 1

24장. 전통의 단절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 영국, 미국 및 프랑스)

 

▲ 전통 단절의 역사적 배경 : 프랑스 대혁명(1789년) ▼

- 르네상스, 근대(“역사책에서 근대는 1492년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발견으로 시작된다.”) 이후, 프랑스 대혁명 이전까지만 해도 미술은 중세 때처럼 “유한계급의 생활 속에서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반드시 있어야 하는 어떤 것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475쪽)

- 또한 “이러한 미술의 목적이란 원하고 즐기려는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것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사실 그들 간에도 여러 유파가 존재하여 ‘미’란 무엇인가, 카라바조와 네덜란드 화가들과 게인즈버러 등이 명성을 얻었던 것처럼 자연을 능숙하게 모방하는 것인가, 혹은 라파엘로와 카라치, 레니, 레이놀즈와 같이 자연을 ‘이상화’할 수 있는 미술가들의 능력이 진정한 미를 좌지우지하는가 하는 여러 문제에 대한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475쪽)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논쟁자들 사이에는 많은 공통점이” 있었다. “‘이상주의자’들도 미술가란 자연을 연구해야 하고 나체화로부터 그림 공부를 시작해야 한다는 점에는 동의했으며 ‘자연주의자’라고 할지라도 고대의 고전적인 작품들이 결코 능가할 수 없는 최고의 미를 지니고 있다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 (475쪽)

- “18세기 말에 이르러 공통된 기반은 점점 무너지기 시작하는 것처럼 보였다.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은 “이성의 시대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으며 미술에 대한 관념이 변화한 것도 이 시기부터였다.” (475-6쪽)

 

▲ 호레이스 월폴(Horace Walpole) ▼

- “첫 번째 변화는 이른바 ‘양식’에 대한 미술가들의 태도였다.” (476쪽)

- “전에는 한 시대의 양식이란 그저 어떤 일이 행해지는 방식이었고 사람들은 그것이 어떤 바람직한 효과를 얻는 데 가장 올바르고 훌륭한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채택할 뿐이었다. 이성의 시대가 되자 사람들은 양식에 대해서 의식하기 시작했다.” (476쪽)

- “그러한 의식은” “‘왜 꼭 팔라디오 양식이어야만 하는가’”라는 물음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일이 바로 18세기 영국에서 일어났다.” (476쪽)

- 이러한 물음을 화제로 삼은 사람들 중 “가장 톡특한 인물은 초대 영국 수상의 아들인 호레이스 월폴이었다.” 그는 “스트로베리 힐의 별장을 고성(古城)처럼 고딕 양식으로 결정”했다(도판 311, <런던 트위크넘의 스트로베리 힐>, p.476). (476쪽)

- 이러한 고딕 양식의 선택은 “벽지 무늬를 선택하듯이 건물의 양식을 선택하도록 만든 자의식의 첫 번째 징후였다.” (477쪽)

 

▲ 존 숀(John Soane : 1752 - 1837) ▼

- 첫 번째 변화에 뒤이어 두 번째의 변화가 있었다. 그것은 “과연 무엇이 올바른 양식인가” 하는 것이었다. (477쪽)

- “건축가들은 올바른 양식을 먼저 찾아야만 하였다. 이제 월폴의 ‘고딕 복고’와 견줄 만한 ‘그리스 복고’가 일어났고 이는 ‘섭정 시대(1810-20)’에 절정을 이루었다.” (477-8쪽)

- “도판 312(존 패프워스, <첼튼엄(Cheltenham)의 도셋 하우스>, p.477)는 순수한 이오니아 식 그리스 신전(p.110, 도판 60)을 모방하여 지은 첼튼엄 온천의 한 집이다.” (478쪽)

- “도판 313(<시골 별장의 구상도>, p.478)은 파르테논 신전(p.83, 도판 50)을 통해 우리가 알고 있는 본래의 도리아 식을 건축의 한 예를 보여준다.” (478쪽)

 

▲ 신고전주의의 득세 ▼

- “엄격하고 단순한 규칙들을 적용한다는 이러한 건축 개념은 그 힘과 영향력이 전 세계적으로 커지고 있던 이성의 옹호자들에게 강한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미국의 건국공로자이자 제3대 대통령이었던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 1743 - 1826) 같은 사람이 자신의 저택 몬티첼로(도판 314, <버지니아의 몬티첼로 저택>, p.479)를 이러한 확실한 신고전주의(neo-classical) 양식으로 설계했고 각종 관공서가 있는 워싱턴 시가 ‘그리스 복고(Greek Revival)’ 양식으로 설계되었다는 것은 결코 놀라운 이야기가 아니다.” (479-80쪽)

- “프랑스에서도 대혁명이 일어난 후에 이 양식의 승리가 확고해졌다. 바로크와 로코코 건축가나 장식가들의 화려하고 낙천적인 전통은 이제 흘러가버린 과거지사가 되어버렸다.” “나폴레옹이 프랑스 대혁명의 이념을 옹호하는 척하면서 유럽에서 패권을 잡게 되자, 신고전주의 건축 양식은 제정 양식이 되었다.” (480쪽)

- “유럽 대륙에서도 고딕 양식의 부활을 이러한 순수한 그리스 양식의 새로운 부활과 나란히 존재하였다. 이것은 특히 이성의 힘이 세상을 개조하는 데 실망하고 이른바 ‘신앙의 시대’로 되돌아가는 것을 주장하던 낭만주의자들의 호응을 얻었다.” (480쪽)

- “전통의 사슬이 단절되었다는 사실이 그림과 조각에서는 건축처럼 즉각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을지 모르지만, 사실은 훨씬 더 커다란 의의를 지닌 것이었다.” (480쪽)

- 그런 의의 중 하나는 아카데미(Academy)의 설립이었다. “16세기 이탈리아의 미술가들은 자기들이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과)학자들과 맞먹는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그들이 모이는 장소를 처음으로 아카데미라 불렀다. 이러한 아카데미가 점차 학생들에게 미술을 가르치는 기능을 맡게 된 것은 18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이루어졌다.” (480쪽)

- 이 아카데미에서의 미술 교육은 그 이전까지 길드에서 도제를 교육시키는 방식과는 판이하게 다른 근대 학교의 방식인 것처럼 보인다. “18세기의 아카데미는 왕실의 후원을 받았다.” (480쪽)

- 그런데 여기에서 대단히 어려운 문제가 발생했다. 그것은 그 당시 현재의 화가들이 그림이 팔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카데미는 그림을 팔기 위한 전시회를 계획하였다. 이제 그림은 시장에서 팔려야 하는 상품이 되었다. 그런데 그림의 이러한 상품화 때문에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주제, 즉 멜로드라마의 주제 같은 것도 그리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화가들 사이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가져 왔으며, 이에 따라 아카데미적인 미술을 경멸하고 불신하는 흐름이 나타나게 되었다.

- 이러한 흐름은 미술가들로 하여금 “도처에서 새로운 주제의 종류를 찾아”내도록 했다. “미술가들은 셰익스피어 작품의 한 장면에서부터 시사적 사건에 이르기까지 상상력에 호소하고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모든 것을 그들의 주제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고 느끼게 되었다.” (481쪽)

- 그러나 “18세기 중반 이전의 미술가들은 주제에 있어서” “성경에서 따온 주제들이나 성자의 전설을 묘사”하는 주제 또는 “고대 그리스 신화라든가 용맹과 자기희생이 있는 로마의 영웅 설화, 또는 의인화를 통해 일반적인 진리를 보여주는 우의적 주제 등 몇 가지 선택된 주제”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481쪽)

 

▲ 존 싱글톤 코플리(John Singleton Copley : 1737 - 1815) ▼

- “유럽 미술이 기존의 전통으로부터 이렇게 이탈한 것은 부분적으로는 대서양을 건너 유럽으로 왔던 미술가들, 즉 영국에서 활약했던 미국의 화가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분명히 이들은 구세계서 신성시되어온 관습에 구속감을 느꼈으며 새로운 실험을 시도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코플리는 “이러한 부류의 전형적인 화가였다.” (481쪽)

- “도판 315(<1641년에 다섯 명의 탄핵된 의원들의 인도를 요구하는 찰스1세>, p.483)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서 1785년 처음 일반에게 공개되어 큰 물의를 일으켰다. 그 주제는 그야말로 특이한 것이었다.” (481-2쪽)

- “코플리는 찰스1세가 영국 하원에 대해 탁핵된 5명의 체포를 요구했을 때, 하원 의장이 왕의 권위에 도전하여 그들을 내주기를 거부했던 사건을 그리도록 제안 받았다.”(482쪽)

- “그의 의도는 마치 목격자의 눈에 비친 것처럼 가능한 한 정확하게 그 장면을 재구성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 코플리는 “엄밀하게” 역사적인 “시대 고증을 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482쪽)

- “프랑스 대혁명은 역사적 사건에 대해 이러한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영웅적 주제를 다룬 그림들을 등장시켰다. 코플리가 영국의 역사 속에서 그 주제를 구한 것은 하나의 예라고 할 수 있다.” (482쪽)

 

▲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 Louis David : 1748 - 1825) ▼

- “프랑스 혁명가들은 스스로를 새로 태어난 그리스와 로마 시민으로 자처하기를 좋아했으며, 그들의 그림들은 건축 못지않게 로마 풍의 장려함이라고 불리는 취향을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신고전주의 양식의 지도자는 다비드였다.” (482쪽)

- “그는 혁명 정부가 내세우는 ‘공식화가’였다.” “프랑스 대혁명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인 마라(Mara)가 광신적인 반혁명파의 젊은 여자에 의해 목욕탕에서 피살되었을 때 다비드는 그를 대의명분을 위해 죽은 순교자의 모습으로 그렸다(도판 316, <암살 당한 마라>, p.484).” (485쪽)

- “그는 그리스와 로마의 조각을 연구하여, 신체의 근육과 힘줄을 실감나게 묘사하고 고상하고 아름다운 외관을 그리는 것을 배웠다. 또한 중점적인 효과에 꼭 필요하지 않은 모든 세부 묘사를 생략하고 단순성을 목표로 삼는 것을 고전기의 미술로부터 배웠다. 이 그림 속에는 잡다한 색채도 없고 복잡한 단축법도 없다. 코플리의 커다란 전시 효과적 작품에 비교해 볼 때 다비드의 그림은 엄숙하게 보인다.” (485쪽)

 

▲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 : 1746 - 1828)의 <발코니의 사람들>(도판 317, p.486) ▼

- “고야는 엘 그레코(p.372, 도판 238, <요한 묵시록의 다섯 번째 봉인의 개봉>)와 벨라스케스(p.407, 도판 264,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를 배출한 스페인 회화의 훌륭한 전통을 몸에 익히고 있었으며 도판 307의 <발코니의 사람들>(p.486)에서 보듯 그는 다비드와는 달리 고전주의적인 장려함을 위해서 이러한 지식을 거부하지 않았다.” (485쪽)

- “18세기의 베네치아의 위대한 화가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Giovanni Battista Tiepolo, p.442, 도판 288)가 사용한 얼굴 광채와 같은 표현이 고야의 그림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고야의 인물은 다른 세계에 속한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유혹하듯이 쳐다보고 있는 두 여인과 배경의 어둠 속에 서 있는 다소 불길한 두 명의 정부는 호가스의 세계에 더 가깝다.” (485쪽)

▲ 프란시스코 고야의 <스페인 국왕>(도판 318, p.487) ▼

- “그에게 스페인 궁중에서의 지위를 확보해준 초상화(도판 318)들은 얼핏 보면 반 다이크(p.404, 도판 261)나 레이놀즈 류의 어용 초상화들처럼 보인다. 그가 마술을 부리듯 비단과 황금의 반짝임을 만들어내는 기술은 티치아노와 벨라스케스를 연상시키지만 사실 고야는 그들과는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485쪽)

- “옛 거장들은 권력에 아첨했지만 고야는 그것을 버리는 것을 전혀 아까워하지 않은 듯 보인다. 그는 그들의 초상화에서 허영과 추악함, 탐욕과 공허함을 낱낱이 드러냈다(도판 319, <도판 318의 세부>, p.488). 자기 후원자들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던 궁정 화가는 전무후무할 것이다.” (485쪽)

 

▲ 프란시스코 고야의 <거인>(도판 320, p.489) ▼

- “렘브란트처럼 그도 수많은 에칭을 제작했는데, 그 중 대부분이 부식된 선뿐만 아니라 그늘진 부분까지도 나타낼 수 있는 에쿼틴트(aquatint)라는 기법으로 제작된 것이었다.” (485쪽)

- “고야의 판화에서 가장 특이한 점은 성경의 주제이든 역사적 주제이든 또는 풍속적인 주제이든 간에 이미 알려진 주제는 일절 그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의 판화들은 대개 마녀라든가 기괴한 요괴들의 환상이 주제이다.” (485-8쪽)

- “어떤 것들은 고야 자신이 스페인에서 직접 목격했던 부패하고 반동적이며 잔인하고 억압적인 폭력에 대한 고발로서 제작한 것이며 또 어떤 것들은 그저 고야 자신의 악몽을 형상화한 듯하다.” (488쪽)

- “도판 320은 그의 꿈 가운데 가장 무시무시한 악몽으로, 한 거인이 세계의 끝에 앉아 있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 “이것이야말로 전통의 단절이 가져온 가장 뚜렷한 결과”였다. “이제 미술가들은 지금까지 오직 시인들만이 누렸던 개인적 환상의 세계를 종이 위에 펼쳐 놓는 자유를 얻게 된 것이다.” (이것은 상품에서 가치가 사용가치로부터 독립한 현상과 비견될 수 있다 할 수 있으며, 구체적인 사물로부터 이미지의 독립과 비견될 수 있겠다. 다른 한편 이로부터 심미주의 --> 예술 지상주의로 나아가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488쪽)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3장. 이성의 시대(18세기 : 영국과 프랑스) 2

▲ 조수아 레이놀즈 경(Sir Joshua Reynolds : 1723 - 92) ▼

- 호가스로부터 “한 세대가 지나서야 비로소 18세기 영국의 상류사회를 만족시킬 수 있는 그림을 그린 영국의 화가 조수아 레이놀즈 경이 탄생했다.” (464쪽)

- “그는 미술가들의 유일한 희망은 과거 거장들의 장점이라고 불리는 것들, 이를테면 라파엘로의 소묘, 티치아노의 채색 등을 세심하게 연구하고 모방하는 것이라는 카라치(pp.390-1쪽)의 교훈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464쪽)

- “그의 강연들은 고상하고 품위 있는 주제의 탐구를 권하는 말로 가득 차 있다. 왜냐하면 레이놀즈는 거창하고 감동적인 것만이 ‘위대한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진정한 화가라면 대상을 세밀하고 예쁘게 묘사해서 인류를 즐겁게 만들려고 애쓰지 말고 그의 신념의 위대함으로 사람들을 개선하는데 이바지해야 한다.” 이것은 레이놀즈가 제3회 강연(영국 왕립 미술원의 초대 원장으로서의 강연들 중 하나)에서 한 말이다.” (464쪽)

-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대상으로 한 초상화나 풍경화의 경우처럼 눈으로 본 것을 그대로 손으로 묘사하는 작업은 어딘가 비천한 감이 없지 않다는 점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회화란 단순한 손재주 이상의 것을 필요로 한다. 즉 레니의 <오로라(새벽의 여신)>(p.394, 도판 253)이나 푸생의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다>(p.395, 도판 254)와 같은 주제를 그리는 데에는 해박한 학식과 상상력이 필요하다.”” (465쪽)

 

▲ 레이놀즈의 <조지프 바레티의 초상>(도판 304, p.466) ▼

- “그는” “상류사회가 실질적으로 필요로 하는 종류의 미술은 초상화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465쪽)

- “이미 반 다이크가 귀족 사회의 초상화의 전형(典型)을 확립해 놓았으며 후세의 인기 있는 초상화가들은 모두 이 전형에 도달하려고 애썼다. 레이놀즈는 반 다이크 이후의 초상화가들 중 누구 못지않게 모델을 돋보이게 미화할 수 있었으나 그는 모델의 성격과 사회저인 지위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의 초상화에 무엇인가 특별히 흥미가 있는 것을 덧붙이기를 좋아했다.” (465쪽)

- “도판 304는 존슨 박사(Samuel Johnson : 1709 - 1784 ; 18세기 영문학을 대표하는 시인·비평가) 그룹의 한 지식인이며 이탈리아 출신의 학자로서 영어-이탈리아 어 사전을 편찬하고 후에 레이놀즈의 《강연집》을 이탈리아 어로 번역한 조지프 바레티의 초상이다.” (465쪽)

 

▲ 레이놀즈의 <강아지를 안고 있는 보울즈 양>(도판 305, p.467) ▼

- “어린이의 초상화를 그려야 할 때에도 레이놀즈는 배경을 신중하게 선택함으로써 그 그림을 단순한 초상화 이상의 것으로 만들었다. 도판 305는 그가 그린 <강아지를 안고 있는 보울즈 양>의 초상화이다.” (465쪽)

- “우리는 벨라스케스도 또한 강아지와 함께 있는 어린이의 초상화를 그렸음을 기억한다(p.410, 도판 267). 그러나 벨라스케스가 자신의 눈으로 본 질감과 색채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반면에 레이놀즈는 우리에게 소녀가 애완용 강아지에게 기울이고 있는 애정을 보여주고자 했다.” (465-7쪽)

- “그는 이 귀여운 아이의 성격을 표현하고 그 성격의 우아함과 매력을 우리에게 생생하게 전해주려고 하였다.” (467-8쪽)

 

▲ 토마스 게인즈버러(Thomas Gainsborough : 1727 - 88)의 <하버필드 양의 초상>(도판 306, p.469) ▼

- 레이놀즈의 “호적수였으며 그보다 불과 네 살 아래였던” 게인즈버러가 “그린 비슷한 또래의 소녀 초상화”가 바로 이 그림인데, “작은 숙녀가 망토의 끈을 매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 (468쪽)

- “그녀의 행동에는 감동적이거나 흥미를 유발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애완용 강아지를 안고 있는 소녀의 모습을 그린 레이놀즈의 창안처럼 게인즈버러의 그 단순한 행동(산책을 가기 위해 막 옷을 입고 있는 행동)을 매우 온화하고 예쁘게 만들었다. 게인즈버러는 레이놀즈에 비해 ‘창안’에 훨씬 관심을 덜 가지고 있었다.” (468쪽)

- “이 두 사람(레이놀즈와 게인즈버러)의 관계는 라파엘로의 방법을 부활시키려 했던 유식한 안니발레 카라치(p.390)와 자연 이외는 어떤 스승도 인정하지 않았던 혁신적인 카라바조(p.392)를 연상시킨다.” (468쪽)

- “게인즈버러는 ‘지성적인’ 체할 의향이 전혀 없었으며 단지 그의 뛰어난 붓놀림과 날카로운 관찰력을 과시할 수 있는 솔직하고 틀에 박히지 않는 초상화를 그리길 원했다.” (468쪽)

- “그의 빠르고 성급한 붓질은 우리에게 프랑스 할스(p.417, 도판 270)를 연상케 한다. 그러나” “그의 많은 초상화에서 볼 수 있는 어두운 색조의 섬세함과 세련된 붓질은 오히려 바토의 그림(p.454, 도판 298)을 상기시킨다.” (468쪽)

 

▲ 게인즈버러의 <시골 풍경>(도판 307, p.470) ▼

- “레이놀즈가 고대사에 나오는 야심적인 신화의 장면이나 일화들을 그릴 시간과 여유를 갈망한 반면에, 게인즈버러는 그의 경쟁자가 경멸했던 바로 그런 주제, 즉 풍경화를 그리고 싶어 했다.” (469쪽)

- 게인즈버러의 “대부분의 풍경화는” 살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그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 그린 습작(도판 307)으로 남아 있다. 이 그림들에서 그는 영국 시골의 나무들과 언덕들을 아름다운 풍경이 되도록 짜 맞추어서 그 당시가 풍경 정원이 유행하던 시대였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왜냐하면 게인즈버러의 습작들은 자연을 직접 묘사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그림들은 어떤 기분을 불러일으키고 반영시키기 위한 풍경 ‘구성 작품’들이었다.” (469-70쪽)

 

▲ 장 밥티스트 시메옹 샤르댕(Jean-Baptiste Siméon Chardin : 1699 - 1779) ▼

- “18세기 영국의 제도와 영국인의 취향은 이성의 법칙을 갈망했던 유럽의 모든 사람들이 찬미하는 모델이었다. 왜냐하면 영국에서는 미술이 신처럼 군림한 통치자들의 권력과 영광을 과시하기 위해 이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470쪽) (미술의 상품화가 시작되었음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

- “우리는 프랑스에서도 역시 베르사유 궁전의 중후하고 장엄한 바로크 양식이 18세기 초에 오면 바토의 로코코 미술 작품(p.454, 도판 298)과 같은 보다 섬세하고 친근한 감각 효과에 밀려 우행에서 벗어났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이제 이러한 귀족풍의 몽상적인 세계는 퇴조하기 시작했다.” (470쪽)

- “화가들은 당대의 보통 사람들에게 눈을 돌리고 이야기로 엮어낼 수 있는 감동적이거나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그리기 시작했다. 이들 중에 제일 위대한 화가는 샤르댕으로 그는 호가스보다 두 살 아래인 화가였다.” (470쪽)

- “도판 308(<감사기도>, p.471)은 그의 매력적인 그림 중의 하나로서 한 여인이 식탁 위에 저녁을 차리면서 두 아이들에게 감사기도를 드리라고 말하는 소박한 장면을 보여준다.” (470쪽) (이는 근대에서의 남녀 성별분업을 암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샤르댕은 이러한 서민 생활의 평온한 광경을 좋아했다. 눈에 띄는 효과나 날카로운 비유를 추구하지 않고 가정적인 정경의 시정(詩情)을 느껴 화폭에 담은 면에서 그는 네덜란드의 화가 베르메르(p.432, 도판 281)와 유사하다.” (470쪽)

- “그의 색채는 고요하고 은근하다. 그리고 바토의 번쩍거리는 그림과 비교할 때 그의 작품은 광채를 잃은 것 같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원칙을 잘 살펴보면 우리는 거기에서 신중하게 구사된 색조의 미묘한 농담의 변화와 꾸밈없어 보이는 화면 구성의 솜씨를 발견하게 된다.” (470쪽)

 

▲ 징 앙투안 우동(Jean-Antoine Houdon : 1741 - 1828) ▼

- “영국에서처럼 프랑스에서도 권려의 겉치레보다는 서민들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초상 미술에 도움을 주었다. 아마도 프랑스에서 가장 위대한 초상 미술가로는” “조각가인 우동을 들 수 있을 것이다.” (472쪽)

- “그의 훌륭한 흉상들을 백여 년 전에 베르니니가 시작했던 전통(p.438, 도판 284)을 이어받고 있다. 도판 309는 우동이 제작한 흉상 <볼테르 상>(p.472)인데, 우리는 이 위대한 이성의 옹호자의 얼굴에서 날카로운 기지와 통찰력 있는 지성과 또한 위인의 깊은 동정심을 ‘읽을 수’ 있다.” (472쪽)

 

▲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Jean-Honoré Fragonard : 1732 - 1806) ▼

- “영국에서 게인즈버러의 스케치에 염감을 불어넣어 주었던 자연의 ‘그림 같이 아름다운(picturesque)’ 측면에 대란 취향은 마침내 18세기의 프랑스에서도 나타나게 되었다.” (472쪽)

- “도판 310(<티볼리에 있는 에스테 별장의 넓은 정원>, p.473)은 프라고나르의 소묘인데 그는 게인즈버러의 세대에 속한 사람이었다. 그 또한 상류사회의 테마를 그리는 바토의 전통을 따르는 매력적인 화가였다.” (472쪽)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3장. 이성의 시대(18세기 : 영국과 프랑스) 1

23장. 이성의 시대 (18세기 : 영국과 프랑스)

 

▲ 영국 경험론의 특징 ▼

- 이 시기 영국과 프랑스에서 자리 잡고 있던 철학적 이론 경향은 베이컨으로부터 시작하는 영국 경험론과 이 경험론에 영향을 받은 프랑스의 기계적 유물론이다.

- 영국의 경험론이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즉 우리의 감각 또는 지각 바깥에 존재하고 있는 감각 대상 또는 지각 대상이 우리에게 감각적인 정보 데이터를 보내 주면 우리가 그 감각 데이터를 받아들여서(이렇게 받아들이는 것을 <경험>이라고 한다) 그 감각 대상에 대한 관념(idea)을 비로소 가지게 되며, 이 관념이 대상과 완전히 일치하는 <참다운 앎> 또는 <진리>라고 주장하는 철학이론이다.

- 그런데 이 영국 경험론은 우리의 일상 경험으로 볼 때 대단히 의심스럽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이 경험론에서 말하는 진리 또는 참다운 앎이 그렇지 않은 것일 수 있는 경험적 반박 사례를 제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범죄자의 목격자가 2명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한 목격자는 그 범인의 얼굴이 장동건처럼 생겼다고 하고, 다른 목격자는 그 범인의 얼굴이 배철수처럼 생겼다고 진술했다. 그럼 범인의 얼굴에 대한 진술은 누가 맞는 것인가?

- 이러한 불일치는 우리의 관념(장동건, 또는 배철수)의 원인인 감각적 경험 대상(범인 자체)을 부정하는 결과에 이르게 된다. 왜냐하면 그 대상은 한결 같아야 하는데(그래야만 그 대상에 대한 앎, 사실이 참된 것인지 아닌지를 판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지각에 따라 이랬다 저랬다(장동건이었다가 배철수였다가) 하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남는 것은 우리의 지각 또는 그 지각에 의한 관념뿐이며, 이러한 지각 또는 관념에 따라 감각 대상인 사물이 존재할 수밖에, 즉 그렇게 존재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 이렇게 해서 영국 경험론은 두 가지 형태로 갈라지는 모습을 띠게 된다. 첫 번째는 우리의 감각 대상에 의해서 우리의 지각 또는 관념이 형성된다는 견해로서 감각 대상(즉 객관)이 더 우선적이라는 주장이다. 두 번째는 우리의 지각 또는 관념에 따라 우리의 감각 대상이 존재한다는 견해로서 우리의 지각 또는 관념이 더 우선적이라는 주장이다. 첫 번째를 주장하는 철학자는 로크라는 철학자이고 두 번째를 주장하는 철학자는 버클리라는 철학자이다.

- 이 두 철학자에 비유될 수 있는 영국의 두 회화 예술가가 있다. 로크에 비유될 수 있는 회화가는 게인즈버러라고 할 수 있고, 버클리에 비유될 수 있는 회화가는 레이놀즈라고 할 수 있겠다.

- 이러한 영국 경험론이 18세기 영국 미술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 크리스토퍼 렌 경(Sir Christopher Wren : 1632 - 1723) ▼

- “그가 지은 세인트 폴 대성당(도판 299, <런던의 세인트 폴 대성당>, p.458)을 불과 20여 년 전에 로마의 바로크 양식으로 지은 교회(p.436, 도판 282, <전성기 바로크 양식의 로마 교회 : 산타 아그네스 성당>)와 비교해 보면 흥미롭다.” (457쪽)

- 유사점 : “렌의 성당은 보로미니의 교회당보다 규모가 훨씬 크지만 그것과 마찬가지로 중앙의 둥근 지붕과 양쪽의 탑들과 고대 신전의 정면을 연상시키는 정면 현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보로미니의 바로크식 탑과 렌의 탑 사이에는 확실히 유사성이 있으며 특히 2층의 경우가 그렇다.” (457쪽)

- 차이점 : “이 두 정면 현관들이 주는 전반적인 인상은 대단히 다르다. 세인트 폴 성당은 곡선적인 곳이 없어서 운동감을 암시하지 않으며 오히려 강인함과 안정감을 준다. 건물에 당당함과 고귀함을 주기 위해서 사용된 쌍으로 나란히 선 원주들은 로마의 바로크 양식보다는 오히려 베르사유 궁전의 정면(p.448, 도판 291)을 연상시킨다.” (457쪽)

- “세부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의 장식에는” 바로크와 같은 “괴상한 것이나 환상적인 것이 하나도 없다. 그의 모든 형태들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최고의 모델들을 엄격하게 따르고 있다. 건물의 각 형태와 부분은 그것이 갖는 본질적인 의미를 상실하지 않은 그 자체로 보여질 수 있다. 보로미니나 멜크 수도원을 지은 건축가의 자유분방함에 비하면 렌은 우리들에게 은근하고 침착한 인상을 준다.” (457쪽)

 

▲ 렌 경의 <런던의 세인트 스티븐 월브룩 교회>(도판 300, p.459) ▼

- “신교와 가톨릭 교회 건축의 대조는 렌이 설계한” “월브룩 교회(도판 300)와 같은 건물의 내부를 살펴보면 훨씬 더 뚜렷하게 나타난다. 이와 같은 교회”의 “목적은” “천국의 환상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신도들의 생각들을 집중시키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457쪽)

 

▲ 벌링턴(Burlington : 1695 - 1753)과 윌리엄 켄트(William Kent : 1685 - 1748) ▼

- “교회들이 그랬듯이 성(城)들도 동일한 경향을 따랐다. 영국의 어떠한 왕도 베르사유와 같은 궁전을 짓는 데 필요한 엄청난 자금을 모을 수 없었고 영국의 귀족들 또한 사치와 방종의 면에서 독일의 제후들과 경쟁하려 하지 않았다.” “18세기 영국의 이상(理想)은 성이 아니라 교외의 저택이었다.” (459쪽)

- 이러한 교외 저택의 선호는 중세 봉건 공동체가 해체되면서 부르주아 가족 형태인 근대 핵가족 문화, 더 근본적으로는 경제적 생산과 그 생산에 따른 이윤 창출이라는 목적, 즉 효율성에 부합하려는 경향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 “교외의 저택들을 설계한 건축가들은 보통 바로크 양식의 지나친 호사스러움을 배격했다. 그들의 야심은 그들이 ‘고상한 취향’이라고 생각한 규칙을 하나도 위반하지 않고 고전 건축의 실제적인 또는 그렇다고 주장하는 법칙을 가능한 한 충실하게 따르려는 것이었다.” (459쪽)

- “도판 301(<런던 치직 저택>, p.460)은” “팔라디오 식 별장인 치직(Chiswick) 저택이다.” “이 건물은 정말로 팔라디오의 로톤다 별장(p.363, 도판 232)과 대단히 유사하다.” (459-60쪽)

- “당당한 현관은 코린트 식 기둥 양식(p.108)을 지닌 고대 신전의 정면과 동일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p.73). 건물의 벽은 단순하고 평범하여 곡선이나 나선형이 없고 지붕 위를 장식하는 조각상도 없으며 그로테스크한 장식도 없다.” (460쪽)

- “그 이유는” 영국의 “고전주의”와 경험론에 기인하고 있다. (460쪽)

 

▲ 도판 302(<윌트셔(Wiltshire) 주 스타우어헤드의 정원>, p.461) ▼

- “영국의 전반적인 기질은 바로크 식 장식에 나타난 공상의 비약에 반대했고 또 감정을 압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그런 예술에도 반대했다.” “베르사유 궁의 정원 양식 같이” “실제 건물 이외의 주변 지역까지 확장된 형식적인 느낌을 주는 정원은 불합리하고 인공적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460쪽)

- “영국인들이 생각하는 정원이나 공원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반영해야 하며 화가의 눈을 매혹시키는 그런 아름다운 풍경을 모아놓아야 하는 것이었다. 켄트 같은 사람은 팔라디오 식 별장의 이상적인 주변 경관으로서 영국의 ‘풍경 정원(landscape garden)’을 고안해냈다.” (460쪽)

- “경치에 있어서의 아름다움의 기준에 대해서도” 영국인들은 “남유럽의 한 화가에게 자연이 어떤 모습으로 보여야 하는지에 관한 그들의 생각은 대체로 클로드 로랭의 그림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460-1쪽)

- “18세기 중엽에 조성된” 이 도판의 “아름다운 정원 풍경을 로랭과 팔과디오의 작품들과 비교해보면 흥미롭다. 배경에 있는 ‘신전’은 팔라디오의 로톤다 별장(p.363, 도판 232 : 이것은 본래 로마의 판테온을 본떠 지은 것이다)을 연상시키는 한편 연못과 다리, 로마의 건물을 연상케 하는 전체적인 경관은” “ 영국 풍경의 아름다움이 클로드 로랭의 회화(p.396, 도판 255)에서 영향 받았다는 것을 확인해 주는 것이었다.” (461쪽)

 

▲ 윌리엄 호가스(William Hogarth : 1697-1764) ▼

- 호가스는 “사람들이 ‘그림의 효용이 무엇인가’라고 묻고 싶어 한다는 것을 깨닫고 청교도적인 전통이나 성장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서라도 예술이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따라서 그는 사람들에게 착한 인의 보상과 악한 일의 대가를 가르칠 만큼 교훈적인 내용을 그릴 것을 계획했다.” (462쪽)

- “그는 방탕과 나태로부터 범죄와 죽음에 이르는 <탕아의 편력(A Rake’s Progress)>이나 소년이 고양이를 놀리는 일에서부터 어른들의 잔인한 살인에까지 이르는 <잔혹의 네 단계(Four Stages Gruelty)>를 보여주려고 했다.” (462쪽)

- “그가 이러한 교화적(敎化的)인 이야기와 경고의 사례들을 어찌나 잘 그렸던지 이 일련의 그림을 본 사람들은 모두 다 그 그림이 의미하는 모든 사람들과 교훈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462쪽)

- 왜냐하면 “그들은 과거의 대가들과 그들이 회화적인 효과를 내는 데 사용한 방법을 세심하게 연구” 했기 때문이다. “그는 일상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익살스런 에피소드로 그림을 채우고 또 인간의 유형을 개성적으로 표현하는 데 탁월했던 얀 스텐(p.428, 도판 278)과 같은 네덜란드의 대가들을 잘 알고 있었다.” (462쪽)

- “그는 또 당시의 이탈리아 화가들과 구아르디(p.444, 도판 290) 풍의 베네치아 화가들의 수법도 알고 있었다. 구아르디로부터 그는 붓을 두세 번 힘차게 휘두름으로써 한 인물의 모습을 실감나게 표현하는 기법을 배울 수 있었다.” (462쪽)

- “도판 303(<베들럼의 탕아>, p.463)은 <탕아의 편력>에 나오는 한 장면으로 빈털터리가 된 탕아가 베들럼 정신 병원에서 광란하는 미치광이로 인생을 끝맺는다는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다.” (462쪽)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2장. 권력과 영광의 예술 2(17세기 말과 18세기 초 :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22장. 권력과 영광의 예술 Ⅱ (17세기 말과 18세기 초 :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 베르사유 궁전(도판 291, p.448) ▼

- 이탈리아를 포함한 가톨릭교회의 화려함과 장식 과잉의 특징을 가진 가톨릭적 바로크에 맞선 부르주아·프로테스탄트적 바로크는 단순함·간결함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부르주아·프로테스탄트적 바로크는 다음과 같은 형태로 변화·발전하게 된다. 즉 건축의 외양에 있어서는 단순성을 그대로 유지하되 가톨릭교회 권에 맞서서 거대한 크기를 자랑한다. 일단 건물 크기로 가톨릭교회를 압도함으로써 부르주아와 결탁한 절대 군주와 영주들의 권력의 위엄을 잘 나타내기 위해서다(물론 그렇다고 내부 장식에 소홀했느냐 하면 그것은 결코 아니다. 가톨릭교회의 화려함과 맞먹는다). 이러한 대표적인 건축물이 베르사유 궁전이다.

베르사유 궁전은 프랑스 “루이 14세의” “절대 권력의 상징이 되었다.” “베르사유 궁전은 너무나 거대하기 때문에 사진을 통해서는 그 외관이 어떻게 생겼는지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다.” “베르사유가 바로크 양식인 것은 그 장식적인 세부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거대한 규모 때문이다.” (447쪽)

- 그런데 이러한 거대한 규모는 한 가지 종류의 형태만으로는 채울 수 없다. 얀 베르메르 반 델프트의 <부엌의 하녀>(도판 281, p.432)라는 정물화에서처럼 전혀 이질적인 것들(크게는 사람과 사물)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처럼, 베르사유에서도 서로 다른 이질적인 요소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이것은 시장에서 여러 이질적인 상품들이 서로 기계적인 교환 관계에 있음과 비견될 수 있겠다). 단순하게 조합했더라면 이처럼 방대

- 이에 대해 곰브리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순수한 르네상스식 형태들만으로 한 규모의 정면은 그 단조로움을 깨지 못했을 것이나 조각상들과 항아리, 전승 기념품 등의 도움으로 건축가들은 어느 정도의 다양성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건물에서 바로크 형태의 진정한 기능과 목적을 잘 감상할 수 있다.” (447쪽)

- 다른 한편 이 시기 베르사유를 비롯한 건물의 대부분은 기본적으로 단순하게 4각형 형태를 취하고 있다. 중세 때까지만 하더라도 가장 단순하면서도 안정적이며 기본적인 기하학 형태는 3각형이었다. 이것은 사회적·정치적 형태로 볼 때 지배계급을 의미하는 것이었다(삼각형의 정점에는 The One, 왼쪽 꼭짓점에는 천사, 오른쪽 꼭짓점에는 성인, 즉 성직자가 있다). 그런데 꼭짓점이 하나 더 추가되어 사각형이 된다. 이것은 부르주아(또는 과학)가 지배계급으로 편입되었음을 의미한다고 생각해 볼 수 있겠다. 현대의 아파트 건물의 aid아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 루카스 폰 힐데브란트(Lucas von Hildebrandt : 1668 - 1745) ▼

- “1700을 전후한 시대가 건축에 있어서는 가장 위대한 시대였으며 그것은 비단 건축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성과 교회당들은 단순히 건물로서만 설계된 것은 아니었다. 모든 예술은 환상적이고 인위적인 세계의 효과를 높이는 데 기여해야만 했다.” (449쪽)

-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바로크 이념들이 가장 대담하고 일관성 있게 융합된 지역은 오스트리아와 보헤미아, 그리고 남부 독일이었다.” (449-451쪽)

- “도판 293(<빈의 벨베데레 궁>, p.450)은 오스트리아 건축가 루카스 폰 힐데브란트가 말버러 공작의 동맹자인 사부아 가(Savoy 家)의 외진(Eugene)공을 위해서 빈에 세운 성을 보여준다.” (451쪽)

- “우리가” 이 건물의 “환상적인 장식의 효과를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것은 이 건물 안에 들어설 때마다 도판 294(<벨베데레 궁의 입구 홀과 계단>은 외젠 궁의 궁전 입구이며 도판 295(<독일 폼머스 펠덴 성의 계단>, p.451)는 힐데브란트가 설계한 독일의 한 성의 계단 부분이다. (451쪽)

 

▲ 야콥 프란타우어(Jacob Prandtauer : 1726년 사망) ▼

- “교회의 건물들도” 왕이나 귀족의 성 실내의 모습에서처럼 “인상적인 효과를 이용했다.” (451쪽)

- “도판 296(<다뉴브 강변의 멜크 수도원>, p.452)은 다뉴브 강변에 있는 오스트리아의 멜크(Melk) 수도원이다.” 이 수도원의 “장식은 바로크 양식의 방대한 보고에서 나온 새로운 이념과 디자인을 즉시 적용할 줄 알았던 솜씨 좋은 떠돌이 이탈리아 장인들이 맡았다.” (452쪽)

- “이 이름 없는 미술가들은 단조롭지 않고 당당한 외관을 표현하기 위하여 건물들을 한데 모으고 배치하는 어려운 기술을” 아주 “잘 습득하고” 있었으며, “또한 장소에 따라서 장식의 비중을 두어 ”눈에 띄지 않는 곳은 지나치게 화려한 장식을 삼가고 돋보이고자 하는 부분에서는 더욱 효과적으로 부각되도록 애썼다.“ (452쪽)

- “이러한 교회의 건물(도판 297, <멜크 수도원의 예배당 내부>, p.253)에서는 ‘자연스럽거나’ ‘정상적인’ 것이 하나도 없으며 또 그런 것을 의도하지 않았다. 그것은 보는 사람들에게 천국의 영광을 미리 맛보게 해주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가 그 가운데 서 있으면” “우리의 모든 의심을 정지시켜 버린다. 우리는 우리 나름의 규칙과 기준이 전혀 통하지 않는 그런 세계에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452쪽)

 

▲ 앙투안 바토((Antoine Wateau : 1686 - 1721) ▼

- “이탈리아에서와 마찬가지로 알프스 북쪽에서도 미술의 각 분야가 이러한 장식의 북새통에 휩쓸려 들어가 버렸으며 각 분야의 독자적인 중요성을 많이 상실했다.” 이런 가운데서 “17세기 점잔기의 위대한 지도적인 화가들과 비견되는 거장은 단 한 사람밖에 없었던 것 같다. 이 사람은 앙투안 바토이다.” (454쪽)

- “그는 현실의 모든 어려움과 자질구레한 일에서 동떨어진 자기 자신의 환상적인 생활을 그리기 시작했다.” (454쪽)

- “너무나 존귀하고 인위적일 거라는 인상을” 줄지도 모르는 “바토의 예술”은 “많은 사람들에게” “로코코(Rococo)라고 알려져 18세기 초의 프랑스 귀족들의 취향을 반영하는 것이 되었다.” 바토의 “꿈과 이상”은 “우리가 로코코라고 부르는 유행을 만들어내는 데 일조를” 하였다. (454-5쪽)

- “도판 290(<공원의 연회>, p.454)은 공원에서의 소동 모습을 보여주는 그의 작품이다. 이 장면에는 얀 스텐의 떠들썩한 쾌활함(p.428, 도판 278) 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달콤하고 우수에 젖은 그런 고요함이 지배적이다.” (455쪽)

- “바토는 그가 찬양했던 루벤스처럼 슬쩍 한번 그은 분필 자국이나 붓 자국만으로 살아서 숨 쉬는 듯한 육체의 인상을 묘사할 수 있었다.” “그의 그림이 얀 스텐의 그림과 다르듯이 그의 습작들이 자아내는 분위기는 루벤스의 습작과는 다르다. 이러한 아름다움의 환상 속에는 어딘지 슬픈 분위기가 감돌고 있는데 그것은 말로 설명하거나 규정할 수 없지만 그것이 바토의 예술을 단순한 기교나 예쁘장한 아름다움의 영역을 초월하게 만든다.” (455쪽)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1장. 권력과 영광의 예술 Ⅰ(17세기 후반과 18세기 : 이탈리아)

21장. 권력과 영광의 예술 Ⅰ(17세기 후반과 18세기 : 이탈리아)

 

** 세기 별 서양 예술 사조

 

<14 ~ 18세기>

국제 고딕 - 르네상스 (14세기) · 매너리즘 (16세기) · 바로크 (17세기) · 로코코 - 신고전주의 - 낭만주의 (18세기)

 

<19세기>

사실주의 · 라파엘전파 · 아카데미 예술 · 인상주의 · 후기인상주의 · 신인상주의 · 분할주의 · 점묘주의 · 구획주의 (클로와조니즘) · 나비파 · 종합주의 · 상징주의 · 허드슨 리버파

 

<20세기>

모더니즘 · 입체파 · 표현주의 · 추상표현주의 · 추상미술 · 뮌헨 신미술가 협회 · 청기사파 · 다리파 · 다다이즘 · 야수파 · 신야수파 · 아르누보 · 바우하우스 · 더 스테일 · 아르데코 · 팝 아트 · 미래주의 · 절대주의 · 초현실주의 · 색면파 · 미니멀리즘 · 설치미술 · 서정추상 · 포스트모더니즘 · 개념미술 · 대지미술 · 행위 예술 · 비디오 아트 · 신표현주의 · 아웃사이더 아트 · 로브로우 예술 운동 · 뉴미디어 아트 · 젊은 영국 작가들 · 스터키즘 · 시스템 아트

 

<21세기>

관계 예술

 

** 로코코

로코코(Rococo)는 18세기 프랑스에서 생겨난 예술형식이다. 어원은 프랑스어 rocaille(조개무늬 장식, 자갈)에서 왔다.

로코코는 바로크 시대의 호방한 취향을 이어받아 경박함 속에 표현되는 화려한 색채와 섬세한 장식, 건축의 유행을 말한다. 바로크 양식이 수정, 약화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로코코는 왕실예술이 아니라 귀족과 부르주아의 예술이다. 다시 말하자면, 유희와 쾌락의 추구에 몰두해 있던 루이 14세 사후, 18세기 프랑스 사회의 귀족계급이 추구한, 사치스럽고 우아한 성격 및 유희적이고 변덕스러운 매력을, 그러나 동시에 부드럽고, 내면적인 성격을 가진 사교계 예술을 말하는 것이다. 귀족계급의 주거환경을 장식하기 위해 에로틱한 주제나 아늑함과 감미로움이 추구되었고 개인의 감성적 체험을 표출하는 소품위주로 제작되었다. 또한 로코코에서는 중국 양식이 많이 유행하였다.

로코코란 낱말이 서양 예술사에서 전문용어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아마 1840년대로 보인다 (1842년 프랑스 학술원에서 이 낱말의 사용 인정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좁은 의미에서 로코코란 루이 15세 시대 (1730년 - 1750년)에 유행하던 프랑스 특유의 건축의 내부장식, 미술, 생활용구의 장식적인 양식을 의미한다 (조개무늬를 장식으로 많이 쓰기 때문에 style de rocaille라고 부른다). 후에 이 국한된 의미를 벗어나 예술사를 연구하는 이들 사이에서 후기 바로크를 이어주는 건축과 서양미술의 한 예술 양식으로 쓰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로코코는 바로크나 르네상스처럼 한 시대를 대표하는 사조라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18세기는 로코코 뿐만 아니라 바로크, 고전주의, 낭만주의가 병존하는 시대이며, 이 시기에 유행하고 나타난 예술양식들은 서로간에 영향을 받고 주는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건축물로 상수시 궁전(Sans-Souci Palace)이 있다.

 

▲ 프란체스코 보로미니(Francesco Borromini : 1599 - 1667) ▼

- “17세기 전반에 이탈리아에서는 건물과 그 장식에 대한 더욱 눈부신 새로운 구상들이 하나하나 축적되어 17세기 중엽에 가면 소위 바로크라고 부르는 양식은 완전하게 발전하게 된다.” (435쪽)

- “도판 282(<전성기 바로크 양식의 로마 교회 : 산타 아그네스 성당>, p.436)는 유명한 건축가 프란체스코 보로미니가 그의 조수들과 건립한 전형적인 바로크 양식의 교회이다.” (435쪽)

- “델라 포르타처럼 그는 중앙 입구를 고대 신전의 정면 형태로 만들고 또 그와 마찬가지로 보다 풍부한 효과를 살리기 위해서 양쪽으로 벽기둥의 수를 배로 늘렸다.” (435쪽)

- “그러나 보로미니의 정면과 비교해보면 델라 포르타의 정면은 다소 엄격하고 절제된 것처럼 보인다. 보로미니는 더 이상 고전 건축에서 따온 기둥 양식을 가지고 벽을 장식하는 데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거대한 둥근 지붕을 만들고 그 양쪽에 두 개의 탑과 정면을 세움으로 해서 서로 다른 형태들을 한데 모아 그의 교회를 구성했다. 정면은 마치 진흙으로 빚어서 만든 것처럼 굴곡이 져 있다.” (435쪽)

- “세부를 들여다보면” “두 개의 탑 아래층은 사각형이고 윗층은 원형이며 이 두 개의 층이 이상하게 파괴된 엔타블레이처로 연결되어 있는데, 이것은 모든 정통파 교사들을 불쾌하게 만들 만한 것이었으나 건물 전체에는 극히 잘 어울리고 있다.” (435쪽)

- “이 교회 내부를 들여다보면 중세 성당들보다 훨씬 구체적인 방법으로 천상의 영광을 연상시키기 위해 얼마나 신중히 보석과 황금과 스터코(stucco, 치장 벽토) 등으로 화화스러운 장관을 연출했는지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도판 283(산타 아그네스 성당 내부>, p.437)은 보로미니가 설계한 교회의 내부를 보여 준다.” (436쪽)

- “가톨릭 세계는 중세 초기 미술에 부여했던 단순한 임무, 즉 글을 못 읽는 사람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역할(p.95) 이상으로 미술이 종교에 공헌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미술은 글을 못 읽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너무 많이 읽은 사람들까지도 설득해서 개종시키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었다. 많은 건축가, 화가, 조각가들이 교회를 변형시켜 그 찬란함과 아름다움으로 보는 이를 거의 압도해 버리는 거대한 장식물로 만들기 위해서 소집되었다.” (436-7쪽)

 

▲ 장 로렌초 베르니니(Jean Lorenzo Bernini ; 1598 - 1680) ▼

- “이러한 무대 장식과도 같은 현란한 미술은 잔 로렌초 베르니니라는 한 미술가에 의해서 발전되었다. 베르니니는 보로미니와 같은 세대로 반 다이크와 벨라스케스보다는 한 살 위였고 렘브란트보다는 여덟 살이 위였다. 이런 거장들처럼 그도 최고의 초상화가였다. 도판 284(콘스탄차 부오나렐리 상>, p.438)는 한 젊은 여자의 흉상으로 참신하고도 인습에 얽매이지 않는 베르니니의 최고 걸작 중의 하나이다.” (437-6쪽)

- “마치 렘브란트가 인간의 행동에 관한 그의 심오한 지식을 이용했듯이” 여기에서 “베르니니는 얼굴 표정의 묘사를 활용하여 그의 종교적인 체험에 시각적인 형태를 부여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438쪽)

- “도판 285(<성 테레사의 환희>, p.439)는 로마에 있는 조그마한 교회의 부속 예배실을 장식하기 위해 베르니니가 만든 제단이다. 이 제단은 스페인의 성 테레사에게 봉헌된 것이다.” (438쪽)

- 여기에서 “우리는 그 성녀가 구름을 타고 황금빛 햇살의 형태로 위로부터 쏟아지는 빛줄기를 향해서 하늘로 올라가는 광경을 본다. 천사가 공손하게 그녀에게 다가서고 있으며 성녀는 기절한 채 황홀감 속에 빠져 있다.” (438쪽)

- “만약 우리가 이 기절한 성녀의 얼굴을 이전의 다른 작품과 비교해 보면 우리는 그때까지 미술의 영역에서 한번도 시도된 일이 없는 얼굴 표정의 격렬함이 표현되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도판 286(<도판 285의 세부>, p.440)을 <라오콘>(p.110, 도판 69)의 두상과 비교해 보면 그 차이점을 분명히 알 수 있다.” (440쪽)

- “베르니니의 옷 주름 처리 방법도 그 당시로서는 아주 새로운 것이었다. 즉 고전적인 방식으로 인정되어온 품위 있는 옷 주름으로 흘러내리게 하지 않고 흥분과 움직임의 효과를 보다 강조하기 위해서 옷자락이 몸부림을 치듯 펄펄 날리게 표현했다. 베르니니의 이러한 강렬한 효과들은 얼마 안 가서 유럽 전역에 퍼져 모방되었다.” (440쪽)

 

▲ 조반니 바티스타 가울리(Giovanni Batista Gaulli : 1639 - 1709) ▼

- "도판 287(<예수의 성스러운 이름을 찬미함>, p.441)은 베르니니를 추종하는 화가였던 조반니 바티스타 가울 리가 그린 로마의 한 예수회 교회의 천장 장식이다. 이 화가는 우리에게 교회의 궁륭형 천장이 열려 있으며 우리가 천국의 영광을 곧바로 보고 있다는 환상을 주려고 했다. 그 이전의 코레조도 천장에 천국을 그리는 데 착안했으나(p.338, 도판 217) 가울리의 효과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무대 효과에 가깝다.“ (443쪽)

- “이와 같은 그림은 이것이 놓여 있는 장소를 벗어나면 그 의미를 상실한다. 그렇게 때문에” “바로크 양식이 완벽하게 발전한 뒤에는 이탈리아와 유럽의 가톨릭 세계에서 회화와 조각이 각각 독립적인 예술로서 발전하지 못하고 쇠퇴하게 된 것도 우연한 일은 아닌 것 같다.” (443쪽)

 

▲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Giovanni Batista Tiepolo : 1696 - 1770) ▼

- "도판 288(<클레오파트라의 연회>, p.442)은 그가 1750년 경에 그린 베네치아의 한 궁전 장식의 일부이다. 이 그림은 티에폴로에게 화려한 색채와 호화스러운 의상 묘사를 과시할 모든 기회를 준 주제인 <클레오파트라의 연회>이다.“ (444쪽)

- “이와 같은 프레스코는” “그 이전 시대의 보다 차분한 작품들보다 영구적인 가치에 있어서는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이탈리아 미술의 위대한 시대가 끝나고 있는 것이다.”(444쪽)

 

▲ 프란체스코 구아르디(Francesco Guardi : 1712 - 93) ▼

- “이탈리아 미술은 18세기 초에 단 한 가지의 특수한 분야에서만 새로운 이념들을 창조해냈다. 그것은 대단히 특징적인 것으로 풍경을 묘사한 유화와 동판화였다.” (444-5쪽)

- “도판 290(<베네치아의 산 조르조 마조레 정경>, p.444)은” “구아르디가 그린 베네치아의 한 풍경이다. 티에폴로의 프레스코처럼 이 풍경화도 베네치아의 미술이 그 특유의 화려함과 빛과 색채의 감각을 잃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445쪽)

- “우리는 움직임과 대담한 효과를 좋아하는 바로크의 정신이 단순한 한 도시의 풍경 속에서도 여실히 나타나 있음을 알 수 있다.” (445쪽)

- “그는 화가가 일단 한 장면의 일반적인 인상만 제공해 주면 나머지의 사소한 세부들을 보는 사람들이 상상을 통해 메꾸고 보충하려 한다는 사실을 터득하고 있었다.” (이것은 벨라스케스의 영향을 받았고 그것을 전승하고 있음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도판 267과 410을 참조하기 바란다.) “작품 속의 곤돌라 사공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놀랍게도 그들은 능숙하게 배치된 몇 점의 색채들로 단순하게 이루어졌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몇 발짝 뒤로 물러서면 그 환영은 완벽한 효과를 연출해낼 것이다. 이러한 후기 이탈리아 미술의 결실 속에 살아 있는 바로크 양식의 전통은 후대에 가서 새로운 중요성을 얻게 된다.” (445쪽)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