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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 게릴라전 연구> 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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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8/03/18
    <현대 게릴라전 연구> 6. (2)
    곰탱이

[간단메모] 임금 투쟁의 목표...

맑스에 따르자면,

계급투쟁의 한 형태인 임금투쟁, 즉 경제투쟁의 목표는 

새로운 사회적 필요욕구의 충족에 있다. 

 

그런데 새로운 사회적 필요욕구는 임금과 교환된 소비재의 소비 노동, 

즉 가사노동을 통해 충족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충족은 결국 가사노동으로부터의 해방과 직결되어 있다. 

 

그런데 가사노동의 해방은 가사노동이 여성의 담당이라는 이데올로기를 해체해야 가능하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해체는

그것의 물적 토대인 노동자 생산과정에서의 억압적이고 착취적인 성별 분업의 

생산관계를 통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이것은 곧 계급투쟁의 출발점이자 목표가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다른 한편 이것은 맑스가 말하고자 하는 임노동 분석의 의미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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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정적 자율지대: 또는 마다가스카르의 유령-국가[펌글]

적린님의 [잠정적 자율지대: 또는 마다가스카르의 유령-국가] 에 관련된 글.

 

+ +

 

글의 주요 내용은 마다가스카르의 베타포 마을에는 국가-제도들이 여전히 있어도 실질적으로는 국가가 없다시피 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레이버는 전통적인 국가의 정의(합법적 폭력의 독점 혹은 소유관계의 보증)가 이들 지역에 실제 국가가 있는지 없는지를 판별하게 해 주는 데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본다. 분명 어떤 수준에서 국가는 '있지만' 이곳의 국가는 대개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국가의 필요, 즉 사회기간시설이나 보장을 제공하는 일에는 무능력하고 그렇게 할 의사도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법을 집행하고 폭력을 독점하려는 의사조차 그다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오히려 이 마을은 '전통적'인 자치 기술, 일종의 '직접민주주의'적 조직 방식에 훨씬 더 크게 기대고 있으며, 생활에 필요한 물자 역시 주민들이 알아서 조달한다(기간시설을 제외한다면). IMF가 부과한 긴축재정 탓에 생활수준이 크게 추락한 지역들은 마다가스카르 말고도 세계에 많다. 하지만 이곳에는 그러한 전통이 유지됨으로써 껍데기만 남은 국가와 상관없이 삶이 지속될 수 있었다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물론 그레이버는 지역의 상황을 낭만화하지는 않는다. 식민기에 경험했던 폭력의 역사, 그리고 그것의 잔존물인 공교육 제도 및 의무병제에서 재생산되는 명령-지배 관계의 현존, 그리고 하루 벌이가 힘든 경제적 문제 또한 엄연히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점이 하나 있다. 이런 '제3세계 국가'에서 발견되는 무정부 상태(비정부 상태라고 해도 좋겠고, 여튼 아나키한 상태)에 대해 타지역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유일한 경우는, 폭동이나 소요, 참사와 같이 극단적으로 나쁜 일이 발생했을 경우밖에 없다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시각은 '그곳에서' 매우 다른 일들도 벌어지고 있다는 점, 정말로 국가가 사라졌을 때 다른 가능성들이 열린다는 점을 못 보게 만든다. (보편적/절대적 희생자 담론이 쓸모없을 뿐만 아니라 나쁘기까지 한 이유의 하나다.)

 

마다가스카르 사람들의 전형적인 전략은 '보는 앞에서는 비위를 맞추고' 돌아서면서 마치 그런 일이 없었던 듯 행동하는 것, 말을 안 들으면 어떤 일이 발생하는지 내버려두고 지켜 보는 것, 명시적인 대결을 피함으로써 국가가 '체면'을 잃지 않고 거기에 만족하도록 하는 것, 최종적으로는 국가가 마치 없는 듯 살아 갈 수 있는 조건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레이버는 마다가스카르에서 국가가 보여 주는 '포용력'(자신이 말라가시 사람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음)은 그것이 공허하다는 바로 그 사실 하나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언급하기도 한다.


번역본은 아래 전문을 옮겨 놓았다. 글이 매끄럽지 않지만... 그래서 미안하지만... 다시 손 볼 짬이 없어서 그냥 이대로 가야 할 듯. 원문은 Possibilities: Essays on Hierarchy, Rebellion, and Desire(2007, AK Press)에 실려 있음.

 


 

계속 보기...


잠정적 자율지대: 혹은 마다가스카르의 유령-국가


나는 마다가스카르로 떠나기 직전에 십 년 이상 그곳에서 작업을 해 온 고고학자인 헨리 라이트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는 “조심해야 할 겁니다”라고 말했다. “교외 지역을 쑤시고 다니려면요.” 국가 권위가 해체되는 중이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섬의 많은 지역에서는 국가가 실질적으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수도 근방의 지역에서조차 (마을 의회인) 포콘올로나fokon'olona가 처형을 집행하기 시작한 상태였다.


이것은 내가 마다가스카르에 실제로 도착하자마자 잊어버리게 된 많은 근심거리들 중 하나였다. 수도에는 상당히 기능을 잘 수행하고 있는 정부가 있었다. 교육 받은 사람들 대부분은 정부에서 일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서쪽으로 한 시간 떨어진 곳에 있는 마을인 아리보니마모Arivonimamo로 옮겨 가자마자 사태는 상당히 다르게 보였다. 사람들은 분명 언제나 정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였다. 모든 사람들이 마치 그런 것이 있는 듯 행동했다. 행정 구조는 있었다. 사람들이 서류를 작성하고 소유물을 등록하는 곳, 출산과 사망을 추적하고 사람들의 가축 수를 헤아리는 관청이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가장 중요한 의례를 행하려면 허가를 받아야 했다. 정부는 학교를 운영했고 국가시험을 주관했다. 헌병대, 감옥, 그리고 군수용 비행기가 놓인 공항도 있었다.


그가 해준 말이 정말로 사실일 수 있었는지 궁금하게 여기기 시작한 것은, 아리보니마모에 머물기 시작한 지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뒤였고, 지금 되돌아보면 심지어 그곳을 떠난 후였다. 어쩌면 내 자신의 편견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언제나 효과를 발휘하며 어디에나 있는 정부 아래서 살아왔기 때문에 단서들을 잘못된 방식으로 읽어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베타포Betafo에는 국가가 아예 없었는지도 모른다. 심지어는 아리보니마모에도. 아니면 나나 다른 서구인들이 국가란 그렇게 움직여야 한다고 추측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움직이는 국가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이 말로 무슨 이야기를 하려 하는지 설명하기 전에, 무대를 먼저 설정하는 것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아리보니마모와 베타포
 
나는 마다가스카르에 1989년 6월 16일에 도착했다. 첫 여섯 달 동안에는 수도인 안타나나리보Antananarivo에 살면서 말을 배우고 문헌 연구를 했다. 안타나나리보 국립 도서관은 매우 뛰어난 자원이었다. 도서관 장서에는 19세기의 마다가스카르 왕국으로부터 유래한 수천 건의 문서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왕국은 수도를 둘러싸고 있는 이메리나Imerina 주의 고지대 지역 전반으로부터 얻어진 것이었다. 대부분은 말라가시어로 되어 있었다. 나는 수백 개의 서류철을 뒤지며 동이마모Eastern Imamo 주와 관계된 모든 서류를 주의 깊게 복사했다. 이 지역은 이메리나의 일부로 내가 작업을 진행하려 했던 곳이었다. 당시 동이마모는 다소간 잠에 빠진 지역으로 수도에서 벌어지는 시끄러운 정치 투쟁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농촌 오지 마을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 지역은 또한 도둑떼의 습격과 산업 프로젝트의 진행, 주기적인 반란이 계속 발생하던 반쯤 빈 영토인 불안정한 이메리나 지역의 변방에서 완충되어 있기도 했다. 그곳에서는 벌어지는 일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 때문에 그곳은 내가 흥미를 갖고 있던 느린 사회문화적 변화 과정을 연구하기에 완벽한 현장인 것처럼 보였다.


일단 말라가시어를 최소한으로나마 다룰 수 있다고 느끼게 되자마자 나는 지역의 주요 마을인 아리보니마모로 떠났다. 그곳까지 가기는 전혀 힘들지 않았다. 아리보니마모는 수도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에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멀지 않아 마을에 정착하고 주변 교외 지역으로 정기적인 조사를 다니며 구전되는 역사를 수집하며 더 자세한 연구를 할 만한 지역인지 주시하고 있었다.


아리보니마모는 수도 서쪽에 있는 주요 고속도로의 근방에 수천 명 정도의 사람들이 군집을 이루며 살아가는 마을이다. 그곳에는 1960년대와 70년대에 국립공항이 있었는데, 이 공항은 마을 남쪽에 있는 넓은 계곡 지대에 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공항이 돈과 일자리를 가져다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을 경제를 통합하는 구실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공항은 거의 접붙인 채 간신히 매달려 있는 부분이나 다름없었다. 공항으로부터 나오는 길은 아리보니마모를 거의 지나가지조차 않았다. 여행객들이 밤을 보낼만한 장소도 없었다. 공항은 1975년에 수도에서 좀 더 가까운 다른 공항으로 대체되었다. 구 공항은 군대의 소유가 되었지만 군대는 그 공항을 이용할 만한 자금이 거의 없었다. 1990년 무렵 외국인이 그 곳을 거쳐 갔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잔여물은 부서진 합판 껍데기만 남은 텅 빈 식당뿐이었다. 이 식당은 공항 도로와 마을 바로 바깥에 있는 고속도로가 통합되는 지점에 서 있었다.


현재의 마을은 택시 정류장을 중심에 두고 있으며 이 정류장은 가톨릭과 개신교 두 개의 큰 교회들이 양 옆을 에워싸고 있는 넓은 아스팔트 광장이다. 이곳은 대부분의 시간 동안 승객과 가방과 바구니들을 가득 채우고 수도로 향하거나 고속도로 서쪽으로 더 이동하려 하는 밴과 역마차로 붐볐다. 택시 승강장의 남쪽 가장자리에는 넓게 가지를 펼치고 있는 아몬타나 나무가 서 있다. 이 나무는 매우 오래 된 침엽수로 마을의 상징적 중심으로 여겨지며, 그곳이 한 때 왕의 공간이었다는 점을 표시한다. 그 북쪽으로는 음식 가판대와 붉은 타일로 치장된 아케이드가 들어선 시장터가 있다. 이곳은 매주 금요일이면 시골 사람들과 흰 천막을 친 노점들로 붐빈다. 마을 자체는 길(전기가 공급되는 유일한 장소) 옆에 매달려 있다. 집들은 대개 이층이나 삼층으로 되어 있고, 2층 바닥 주변을 둘러싼 베란다를 받치는 아름다운 기둥들과 주석 혹은 타일로 된 뾰족한 지붕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리보니마모는 같은 이름으로 된 행정구역의 수도이기도 하다. 그곳에는 정부 관청 여러개와 세 개의 고등학교가 있다. 하나는 국립학교(CEG)이며, 다른 학교는 가톨릭계 리세이고, 다른 학교는 개신교 학교다. 진료소가 하나 있으며 마을에서 약간 서쪽에 있는 높은 절벽 위에는 작은 감옥이 하나 있다. 구 공항의 근처에는 헌병대의 병영과 더불어 우체국과 은행이 있다. 이 건물들은 정부가 있음을 알려 준다. 근처에는 한 때 공장이 있었지만 내가 갔을 무렵에는 방치된 지 이미 여러 해가 지난 상태였다.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는 그곳에서 뭔가 생산된 적이 있기는 한지 확실히 알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마을의 상업 경제 대부분은 공식적인(세금을 내고 규제되는) 영역 바깥에 나가 있었다. 약국, 그리고 두 개의 큰 상점이 있었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그 밖에는 주민들은 말라가시 마을의 일반 규칙에 따라 움직였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식량을 길러냈다. 모든 사람들이 무언가를 팔았다. 길가에는 수십 개의 가판과 상점들이 들어서 있었고, 모두 얼마 안 되는 종류의 동일한 품목들을 팔고 있었다. 이 품목들은 비누, 럼주, 양초, 식용유, 비스킷, 소다수, 빵이다. 차를 갖고 있는 사람은 택시 연합의 구성원이었다. VCR을 갖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극장 상영기사였다. 재봉틀을 갖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의류 생산자였다.


이메리나 주는 수도를 감싸고 있는 거대한 관개 평야인 안타나나리보의 가운데에 있었다. 이곳에는 오랜 동안 매우 밀집된 인구가 있었으며 강력한 왕국의 중심을 차지해 왔다. 메리나 왕국은 19세기에 마다가스카르의 거의 전 지역을 정복했다. 안타나나리보는 1895년의 프랑스 점령 이래 행정 중심지 역할을 유지해 왔고, 주변 영토는 마다가스카르의 행정관료와 교육받은 엘리트층의 영지로 남아 있게 되었다. 현재의 아리보니마모 주를 이루고 있는 영토는 언제나 다소간 변방이었다. 왕국에 통합되기에는 너무 늦었고, 수도를 중심으로 한 화폐 및 인맥의 네트워크와는 매우 약한 정도로만 통합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남아 있게 된 것이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현재도 정치경제적으로는 주변부이며 많은 일이 벌어지는 법이 없다.


아리보니마모의 북쪽에는 붉은 언덕이 끝도 없이 펼쳐진 시골 지역이 있는데, 일부는 풀로 덮여 있고, 다른 곳들에는 (키 작은 떡갈나무처럼 보이는) 타피아나 유칼립투스 나무가 숲을 이룬 지역, 그리고 소나무가 들어선 지역이 드문드문 있다. 언덕은 좁게 꼬인 계곡들이 가로지르고 있으며, 계곡의 양편에는 조심스럽게 층을 만든 논들이 들어서 있다. 화강암으로 된 산들이 여기 저기 솟아 있는데, 이 산들은 고대의 왕들이 안착했던 곳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 외진 시골지역에는 포장도로가 없다. 사람들은 대개 걸어서 다니고 자전거를 살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물건들은 소가 끄는 수레로 실어 나르며, 수레가 지나가는 길은 진흙투성이여서 겨울에조차 가장 강력한 구동의 자동차가 아니면 가기 힘들 만큼 울퉁불퉁하게 패여 있다. 여름철에 비가 오기 시작하면 아예 지나갈 수가 없게 된다. 행정수도에서 가까운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업화된 대규모 농업이 없는 까닭은 왕래의 어려움 탓이 크다. 농부들은 재배한 작물의 일부를 마을에 있는 시장터로 실어 나르는 데 성공하여 안타나나리보의 인구를 먹여 살리는 데 도움을 주지만 그 양이 여전히 부족하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경작하는 사람들이 매우 작은 규모만을 취급하는 상인들에게 무한하게 다양하고 작은 거래들을 통해 물건을 판매한다. 그 모습은 마치 사람들이 지역 생산품을 사고팔아 얻게 되는 보잘것없는 소득을,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의 손으로 분배되도록 하기 위해 의도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이미 말했던 것처럼 나의 첫 작업은 구술사를 채집하는 것이었다. 대개의 경우 나는 아리보니마모에서 온 말라가시 친구들 한 둘을 데리고 마을들을 방문하기 시작했다. 결국에는 집중적인 현지조사를 하게 된 베타포 마을에 안착하게 되었다. 내가 이 공동체에 매혹된 까닭의 일부는 그 [수적인] 구성이 안드리아나andriana(대개 ‘귀족’으로 번역된다)와 그들의 전 노예의 후손으로 거의 완벽하게 양분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베타포는 암보히드레이딤비Ambohidraidimby라는 이름의 길고 낮은 산맥 남측에 자리 잡고 있으며 마을 어느 곳에서든 아리보니마모의 중심까지는 걸어서 30분-40분 정도가 걸린다. 그곳은 많은 사람들이 실제 하듯이 마을에 살면서도 베타포에 경작지를 보유하고 양쪽 장소 모두에 집을 두어 자유롭게 오갈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있다.


이메리나에 있는 대부분의 농촌 공동체들은 일종의 경제적 분업을 이루고 있으며 분업은 특히 겨울에 두드러지는 현상이다. 한 마을에서는 남성들이 모두 푸줏간일을 하는가 하면, 다른 마을에서는 여성들이 [지역 일대에서 소비되는 모든] 바구니를 짜거나 밧줄을 만든다. 아리보니마모 시장통의 공간 지도는 노점상의 근거지나 판매하는 상품을 따라 그릴 수 있다. 베타포 사람들은 전통적으로는 대장장이로 알려져 있다. 오늘날 전체 가구의 3분의 1정도는 여전히 대장간 시설을 뒤뜰에 유지하고 있다. 대장장이 일을 그만 둔 사람들 중 많은 수는 대장장이에게 철괴를 공급하거나 그들이 생산하는 쟁기나 삽을 시장터나 이메리나 다른 지역에서 열리는 장날에 판매한다. 지역의 노력으로 출발했던 것이 내가 도착했을 무렵에는 극적일 만큼 확장되어 있었다. 행정수도의 서부에 있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베타포는 주로 쟁기를 파는 지역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타포 사람들 중 실제 손수 쟁기를 만드는 사람은 전혀 없었고, 모든 쟁기는 베타포의 암매상들이 공급한 철로 아리보니마모의 근처에 있는 다른 마을에서 만든 것이었다.


교역의 집중화는 1970년대 이후 마다가스카르 전체에 걸쳐 삶의 질을 극적으로 하락시킨 경제적 압박에 대한 반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부업이 엄청나게 증가하여 어떤 가정에서든 여성 한 명은 시내에서 커피 가판대를 운영하거나, [옷감이나 바구니를] 짜는 일을 하거나, 시장에 있는 노점상에게 내다 팔기 위해 카사바 발효품을 만들거나 하는 일을 하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야 했고, 남성이라면 파트타임으로 소 수레를 몰거나 한 해 여러 달을 이메리나의 다른 지역에서 파인애플을 팔며 보내거나, 교외 지역에는 이따금만 들르면서 시내의 택시 정류장 근처에서 일회용 라이터 기름을 재충전하며 일상의 대부분을 보내야만 했다. 이 모든 것은 베타포와 같은 공동체에 대한 소속을 정의하기 다소 까다로운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통계를 내기 위한 자료조사에 게을렀던 것은 아니다. 사실 내가 처했던 상황이 불러 온 특이한 효과 중 하나는, 서고에서 조사를 하는 동안에는 1840년대와 1920년대 베타포 주민의 인구학적 특성과 재산 소유 상황에 대해 상당히 자세한 내용을 조사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베타포에 있던 당시에는 그에 상응하는 통계 자료를 얻는 데 성공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바로 이 사실이 중요하다. 나는 이 점이 실제로는 상당히 근본적인 어떤 것을, 내가 실제 있었던 장소가 어떤 종류의 공간이었는지를 보여 준다고 생각한다.


아리보니마모에서 살고 베타포에서 작업을 하는 동안, 나는 연구 수행의 정치적 측면에 대해 생각하면서 상당히 많은 시간을 보냈다. 사실 거의 모든 인류학자들에게 해당되는 내용이다. 내 경우에는 특히 약간의 자의식이라도 갖지 않기는 매우 힘들었다. 그 시절 도시민들은 나에게 나와 같은 바자하Vazaha(나와 같은 유럽 계열의 사람들)를 시골 사람들이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그리고 시골 사람들은 아이들이 바자하를 얼마나 두려워하는지를 말해 주면서 각별한 즐거움을 느끼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말라가시 사람들에게 “바자하”라는 말 자체가 폭력의 위협을 느끼게 만들었다. 나에게는 다행이었지만 그 말은 일차적으로 “프랑스 사람”을 뜻했고, 나는 (끊임없이 설명해야 했던 것처럼) 프랑스어는 하지도 못했다. 말라가시어로만 말했기 때문에 상황을 약간 누그러뜨릴 수는 있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점은 연구를 한다는 것 자체가 어떤 관련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메리나는 한편으로 매우 교육률이 높은 곳이었다. 내가 인류학 박사 학위를 받으려 연구하는 미국 학생이라는 사실을 이야기해도 그 뜻을 이해하는 데 어려워하는 사람은 전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일이 합법적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존중할 만한 일이라는 점을 의심하는 사람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앎의 기술은 지배의 기술과 매우 가까운 것으로 동일시되었다. 그 때문에 나는 곧 어떤 질문들은 다른 질문들에 비해서 사람들을 훨씬 편하게 만들어 준다는 느낌을 받게 되었다. 어쩌면 나는 과민반응을 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사람들이 발을 들여놓기를 원하지 않는 영역으로 들어섰다는 느낌을 받게 되면 곧 그만두었다. 나는 그보다 사람들이 자신이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것을 말해 주기를 바랬다. 그 결과 나는 처음 그 곳에 갔을 때 1925년의 재산 분포에 대해(심지어는 1880년의 경우에도) 알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재산 조사는 정부나 할법한 종류의 일이다. 이 일은 힘의 위협을 지지대삼아 진행되었고, 노동력이나 세금을 강제로 끌어내는 작업을 용이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이 사실은 서고에 방대한 양의 기록이 있다는 점을 의미했다. 다른 한편에서는 사람들이 바로 그 일이 내가 하려는 일이 아니라는 점을 확인하고 싶어 했던 이유가 되기도 했다. 심지어는 집집마다 방문해서 가구 구성원의 수를 체계적으로 확인하는 행동조차 좋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일은 사람들이 등을 돌리게 하는 데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을 것 같다. 확실한 숫자를 얻지 못한 것은 지불해야 하는 대가치고는 작은 것이었다.
 
국가의 존재 자체
 
이제 국가라는 최초의 문제로 돌아가 보려 한다.


아리보니마모와 그 주변 시골 지역에는 정부가 있었을까? 한 수준에서는 그 대답이 완벽하게 분명하다. 물론 있었다는 것이다. 정부관료, 정부관청, 그리고 최소한 시내에는 정부가 운영하는 학교, 은행, 병원이 있었다. 대부분의 경제적 거래는 (장부에 기입되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정부가 발행한 말라가시 화폐를 사용하며 이루어졌다. 영토 전체는 세계 다른 모든 국가들이 인지하고 있는 말라가시의 주권적 권위가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었고, 이 영토에서 국가의 주권 권위에 대해 공공연하게 도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른 국가를 대변한다거나 정치적 대안을 대표한다고 주장하는 사람 역시 한 명도 없었다. 반란 공동체도 없었고 게릴라 운동도 없었으며 이중 권력 전략을 추구하는 정치 조직도 없었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상황은 사뭇 다르게 보인다. 최소한 이 지역에서 (그리고 이곳은 행정수도의 권력 중심에 매우 가까운 지역이었다) 말라가시 정부는 국가의 가장 기본적이고도 자체 정의를 충족하는 기능으로 간주되는 일의 대부분을 수행해 내지 못했거나 관심도 없었기 때문이다.


국가에 대한 서구식 정의의 대부분에서 국가 권력이 무엇인가를 강요할 수 있다는 문제가 핵심 사안이다. 국가는 “힘”(폭력의 위협을 완곡하게 말한 것)을 차용하여 법을 강제한다. 여기서 베버는 고전적인 정의를 내린다. 즉, “연속적인 조직을 지닌 강제적 정치 연합은 ‘국가’라고 불릴 수 있는데,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조건은 그에 소속된 행정부원들이 그 질서를 강제하는 과정에서 물리력을 합법적으로 독점할 수 있는 권한을 성공적으로 방어하여 실제 그렇게 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1968 I: 54). 하지만 베버의 정의는 그 자체로는 그저 당대에 통념적이었던 법적 견해를 반복하는 것일 뿐이다. 사실 그는 루돌프 폰 이헤링이라는 이름의 초기 독일 법률 이론가의 작업을 직접 참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헤링은 1877년에 국가를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정의했다.
 
국가는 사회적 강제력을 독점적으로 소유하며 그럴 능력이 있는 유일한 존재다. 강제할 수 있는 권리는 국가의 절대적인 독점을 형성한다. 물리적인 강제 수단을 통해 그 구성원에게 자신의 주장을 실현하기를 바라는 모든 연합은 국가의 협조에 기대고 있으며 국가는 그 권력 안에 그런 도움을 허용할 수 있는 조건을 배치해야만 한다(Turner &Factor 1994:103-104에 인용되어 있음).
 
이런 정의는 사고방식을 고정시켜 두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 특정 조직이 국가인지 결정하는 데는 별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정의는 국가일-수-있는 것이 그 독점권을 주장하는 데 ‘성공적’이었는지에 대한 개인적 느낌에 의존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정의는 분명 근대 서구의 정부제도 배후에 있는 암묵적인 공통감각을 포착해 낸다. 이 감각은 말라가시에서도 전혀 낯설지 않다. 말라가시 공화국은 프랑스의 식민 체제에서 동일한 모델을 따라 조직되었으며 크게 보면 현재의 형태 역시 식민주의적 제도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생각에 말라가시 사람들 대부분은 이런 방식으로 힘을 적용할 수 있는 능력은 본질적으로 국가를 그런 형태로 만든 것이라는 데 동의했을 것이다. 이것은 말라가시 시골 대부분 지역에 국가가 그렇게 하려는 의사가 거의 완벽하게 없다는 점을 더욱 더 충격적인 것으로 만든다. 국가는 강제할 수 있는 권리에 대한 완전한 독점을 유지하거나 다른 이들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권위를 부여하기는커녕, 그저 외연적으로 볼 때 자신의 일차적인 기능을 그저 전혀 행사하기 않았을 뿐이었다.


행정수도에는 경찰이 있었다. 아리보니마모 주변에서 경찰력에 가장 가까운 것은 시내의 약간 서쪽에 병영을 갖고 있는 헌병 부대 하나뿐이었다. 그들이 하는 주요 업무는 고속도로를 순찰하는 것이었다. 내가 이따금 들은 바에 따르면 그들은 도적떼와 싸워 더 서쪽으로 보내 버리곤 했다. 그러나 그들은 포장도로 바깥, 다른 대부분의 사람이 실제로 살고 있던 시골지역으로 향하는 울퉁불퉁한 먼지길을 따라 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시골에서는 누군가가 살해되지 않는 이상은 헌병들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 경우에조차 실제로 나타나서 누군가를 데려 가기 전까지는 뭔가 상당히 극적인 것이 필요했다. 상당히 많은 수의 증인들이 문간에 나타나 무슨 조치를 취하기를 요구한다거나, 혹은 이미 그들 자신이 용의자를 둘러싸고 있을 경우처럼.


그들은 시내에서조차 그다지 경찰처럼 행동하지 않았다. 나는 아리보니마모에서 앙리라는 이름의 불량배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체격이 크고 단단한 남자로 어쩌면 미쳤을 수도 있었는데(일부 사람들은 그가 그저 그런 척 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마을 주민들에게 수년 간 겁을 줘 왔다. 앙리는 지역의 가게에서 무언가를 사들이는 데 힘을 쓰곤 했고 누구도 감히 그를 막지 못했다. 그는 마을의 젊은 여성들에게는 특히 위험한 인물이었고, 여성들은 성폭행을 당할까봐 늘 두려움에 떨며 살았다. 시내의 젊은 남성들은 많은 토론을 거친 후 결국 힘을 합해 그를 죽이기로 결정했다. 이 일을 계획하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렸다. 고지대 그 지방에서는 어떤 사람이 누군가에게 폭행을 하기를 바라면 먼저 그 사람의 부모의 허락을 받아야만 하는 비공식적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보통 이것은 그저 부모의 권위를 강화하는 효율적인 수단이며 일종의 궁극적 처벌의 형태였지만(혹은 누군가의 어머니나 아버지에게 정말로 그 사람이 마을을 떠날 때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리는 방식), 이 경우에는 아들에게 문제의 심각성을 알리기 위해 여러 차례 헛고생을 한 끝에 앙리의 아버지가 두 손을 들고 일을 진행하라고 허락을 해 버리게 되었다. 그가 다음 차례로 싸움을 도발했던 때에 한 무리가 즉각 칼과 농기구를 들고 무장한 채 나타났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그를 죽이는 데는 별로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심하게 부상을 입혔을 뿐이어서, 앙리는 성당에 피신하는 데 성공하고 은신처를 요구하며 정신질환으로 인한 박해를 주장했다. 이탈리아인 사제는 그를 밴의 뒤에 숨겨서 광인 수용시설로 빼돌렸다. 그는 곧 퇴감되었지만(다른 환자를 때림) 여러 해 동안 아리보니마모에 얼굴도 내밀지 못했다. 내가 처음으로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부모가 허락하게 된 상황의 구체적인 면모에 주로 관심이 있었다. 나는 이후에야 이 일이 진짜로 마을의 파출소에서 벌어졌다는 일을 깨닫게 되었다. 앙리는 무슨 수로 오랜 기간 동안 아무 제재도 받지 않은 채 마을을 공포에 떨게 할 수 있었던 것일까? 나는 물었다. “헌병대는 왜 아무 일도 안 한 거죠?” 사람들은 이렇게 대답하곤 했다. “앙리를 못 봤어요? 덩치가 어마어마하잖아요!”“하지만 헌병대한테는 총이 있잖아요!”“물론 그렇지만 그래도.”


이와 같은 사건은 모든 면에서 예외적이었다. 아리보니마모 주변의 폭력에 관해서 가장 중요한 점은 폭력 자체가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살인은 충격적이며 고립된 사건이었다. 앙리와 같은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골 자치조직은 법을 강제하려면 질서의 (강제)력force을 받아들이기를 주저하는 경향을 극복하기 위해 온갖 종류의 창조적인 전략들을 고안해 내야만 했다. 내가 머무르던 기간의 끝무렵에는 베타포에서 폭력이 발발하는 경우에 대처하기 위한 포콘올로나 회의(마을 자치조직)가 있었다. 벤자Benja라는 이름의 남성은 불같은 성격 때문에 악명이 높은데 공동 업무 계획을 둘러싸고 여동생과 말다툼을 했고, 이야기가 계속되기로는 딱 죽기 직전만큼만 때렸다. 그녀가 실제로 얼마나 심하게 맞았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들이 상당한 차이를 보였지만, 이 문제는 즉각적인 주의가 필요한 매우 심각한 경우라고 여겨졌다.
 
포콘올로나는 상당히 고심한 끝에 벤자에게 자신의 자매를 죽였다고 고백하는 편지를 날짜 없이 쓰도록 했으며, 그 자백문을 시내에 있는 지역 헌병대 건물에 접수하도록 했다. 만약 그의 자매가 파울플레이의 희생자가 되어 발견된다면 이런 방식을 통해 이미 고백을 한 셈이었고 그저 해당 기관으로 이송되면 될 뿐이었다. 그 결정에 담긴 메시지는 그 이후로 그의 자매의 안전과 행복이 그의 개인적인 의무가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 경우 국가는 일종의 권위의 유령-이미지로 이용되고 있었으며, 일종의 원칙이었지만 위협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만약 그의 자매가 죽은 채 발견되었다면 포콘올로나 자신이 그를 체포해서 헌병대 사무실로 데려갈 것이었기 때문이다. 종이는 그저 그가 감옥에서 시간을 좀 보내게 될 가능성을 높여 줄 뿐이었다. 다른 경우에 국가권위는 전적으로 우회하면 될 뿐인 어떤 것이었다. 가령 1980년대에 살던 사람들은 집합적인 시련이 반복되는 것을 목도하게 되었다. 절도의 경우(예를 들면 베타포에서는 마을 원로에게 속한 쌀독의 내용물 전부를 갖고 도망친 이후) 원로들은 공동체 전체를 한 데 모아 모두에게 특별히 준비한 음료를 마시게 하거나 특별히 준비한 간 한 조각을 먹게 하여 죄가 있는 사람은 심장마비를 일으키게 해 달라고 조상에게 부탁을 했다. 따라서 다음 차례로 급사하는 사람은 조상의 보복에 희생당한 사람이라고 추측되었다. 내가 도착하기 전 십 년 간 베타포에서만 그런 시련이 두 차례 있었다. 심지어는 시골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면 실제 독약에 의한 시련도 부활하고 있다는 소문까지 있었다. 정의를 강제하는 보이지 않는 힘이 있다는 이야기를 어디서나 듣게 된다. 가령 땅에 파묻은 부적, 서 있는 바위, 악한 행실을 한 사람을 찾아 처벌하는 힘을 새로 얻게 된 고대의 희생제의 장소 등. 부나 정치적 영향력을 갖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이 위험한 주술의 힘(우박이나 번개의 주술, 보복하는 유령들, 고대 왕들의 보호 아래 있다는 것 등)을 사용할 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흘리고 다니기 시작했다. 누구든 상당한 부를 모으거나 유지할 의사가 있는 사람들은 정의상 최소한 다른 사람들의 마음 속에 그들이 어떤 종류의 숨겨진 위험한 힘을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불러 일으켰다. 하지만 이 게임은 매우 미묘했다. 그런 힘에 대해 공개적으로 떠벌리고 다니는 사람들은 거의 정의상 그런 힘이 없다고 추측되었고, 한 마을 사람들에게 그런 위험한 주술을 사용하는 사람은 정의상 마녀였기 때문이다. 나는 심지어 시골 깊은 곳에 사는 부유한 남성들이 주술의 힘을 어둡게 암시한 나머지 이웃 사람들을 분노하게 하여, 결국 그 이웃들이 실제로 대항의약품을 찾아 도적떼로 위장하고 그들을 공격해 약탈했다는 소문까지도 들은 적이 있다.
 
소유관계의 보증자로서 국가
 
사회계급에 관한 이론들은 거의 언제나 국가의 핵심적 역할(어쩌면 가장 중요한 역할)은 소유관계를 떠받치는 것이라고 가정한다. 맑스주의자에게는 분명 이것이 국가가 존재하는 일차적 이유다. 계약 및 시장 관계는 그 기본 토대, 게임의 기본 규칙이 법에 안치되어 있는 한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이 법들은 그 다음 차례로 (최후의 순간에는) 그 법을 떠받치는 몽둥이와 총과 감옥이 있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을 때에만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그리고 물론 소유 관계의 궁극적 보증자가 국가라면 사회계급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아리보니마모 주변의 시골 지역에서 국가는 이런 역할을 떠맡지 않았다. 국가가 어떤 사람이 타인을 자신의 땅으로부터 배제할 수 있는 권리를 지원해 주려고 무장한 남성들을 파견하는 상황을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계약을 강제하거나 강도사건을 수사하는 경우도 물론이다. 이 사실들 역시 나에게는 현지조사를 마친 이후에야 그 온전한 의미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모두 마치 그런 문제에 정부가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듯이 행동했기 때문이다. 정부는 각 대지의 소유자가 누구인지를 계속해서 추적했다. 누군가가 죽었을 경우 그 사람의 땅을 비롯한 여러 재산들이 배분된 방식은 해당 관청에 꼼꼼하게 기록되었다. 탄생과 죽음을 비롯해 소유물을 등록하는 것은 그런 관청이 했던 주요 업무 중 하나였다. 온갖 종류의 땅에 관련된 법률들이 있었고 어느 누구도 그에 맞서지는 않았다. 추상화된 형태로 말을 할 때면 어떤 것에 대해서는 어떤 사람이 궁극적인 권리를 갖고 있는지에 대해 마치 토지 소유 등록이 정확한 그림을 제공하는 것처럼 서술되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실제 행위에서는 법적 원칙들은 대개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단지 하나의 고려대상인 경우가 많았다. 분쟁이 발생한다면 법적인 것은 “전통적” 원칙들(어떤 문제에든 하나 이상의 해결책을 제공하는 것이 보통)이 이루는 홍수에 맞서 그 비중을 고려해야 했으며, 이전 소유자의 의도 및 사람들의 보다 넓은 정의감(예를 들어 공동체에 받아들여진 사람일 경우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수단을 완전히 박탈당해서는 안 된다는 느낌. 분명 누구도 이 문제를 법정으로 끌고 가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역시 사소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분쟁자 중 한 사람이 외부자인 경우가 드물게 있었는데 이 상황만큼은 예외였다. 심지어 그런 경우에조차 법원은 주로 중립적인 중재자 역할을 했다. 모든 사람들은 경찰을 비롯한 다른 무장한 관료들이 법원 결정을 강제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주1)
 
사실 아리보니마모에서는 헌병대 제복을 갖고 있는 남자가 한 명 있었는데, 그는 이따금 돈을 빌려 준 사람이나 상인들을 위해 빚을 갚거나 저당물을 양도하도록 사람들을 회유하는 일을 도왔다. 베타포 사람 중 내가 아는 사람 하나는 어느 날인가 악명 높은 빚수금용역loan-shark을 대동하고 겁에 질린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는 이웃들이 그 남자가 진짜 경찰일 리는 없다고 설명해 준 다음에도 마음을 놓지 못했다. 그렇게 사소한 문제 때문에 시골로 힘들게 걸어 들어올 만큼 의욕 넘치는 경찰을 찾는다 하더라도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것은 민법에 저촉될 뿐만 아니라 진짜 헌병이라면 돈을 빌려 준 사람 역시 체포해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이 사건은 특별히 진실을 드러내 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법]질서의 힘이 경제적 문제에 얼마나 대수롭지 않은 영향만을 미치고 있는지를 명시해 주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경찰을 사칭하며 돌아다니고 있다는 정보만큼 경찰을 분노케 하는 것은 대개 별로 없다. 그런 행동은 바로 그들이 가진 권위의 근본을 해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 특정한 사기꾼이 그 점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 그는 그럴 수 있었다) 바로 그가 헌병대라면 아무 관심이 없을 영역에 자신의 활동을 한정했기 때문인 것처럼 보인다. 결국 헌병들은 시내에서도 가게 주인들을 앙리로부터 지켜 주려는 행동 역시 전혀 하지 않았고 위조 경찰은 자신의 활동을 시골지역에만 거의 배타적으로 한정해 두었던 것처럼 보인다.


이 상황을 분석할 때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다양하다. 그중 하나는 이메리나 교외 지역에 사는 사람들, 혹은 마다가스카르에 사는 사람 일반은 맑스주의자나 베버주의자들이 생각하곤 했던 국가와는 다른 개념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어쩌면 재산의 보호는 정부가 수행할 것으로 기대되는 기능 중 하나가 아닐 수도 있다. 사람들이 다르게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에는, 프랑스 식민 체제가 부과한 외부적 원칙들에 대해 그저 말치레를 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사실상 식민주의 이전의 메리나 주는 재산을 지키는 데 진실로 사로잡혀 있었다. 안드리아남포인이메리나 왕King Andrianampoinimerina은 그 수립자로 연설에서 그 역할을 언제나 강조했다(Larson 2000: 192). 그 자신의 것과 더불어 시작된 법률조항들은 언제나 상속을 규제했고, 구매나 대여와 같은 것들에 대한 규칙들은 언제나 가장 중요한 관심의 대상이었다. 심지어 토지 등록은 식민주의 시대보다 앞서 시작되었다. 이에 관계된 자료는 1878년부터 시작되는데, 이 해는 프랑스의 침략이 있기 17년 전이다.


다른 한편에서 현존하는 증거들은 당시의 사람들이 오늘날에 비해 이러한 정교한 법적 구조에 보다 많은 주의를 기울였다고 믿게 만드는 이유는 되지 못한다. 그에 공공연하게 도전하는 사람에 대한 기록 역시 전혀 없지만 말이다. 법체계는 언제나 원칙상으로만 수용되었고, 현실에서는 매우 선별적인 영향력만을 지녔다.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이전에 했던 것처럼 일을 계속 진행한다. 내 생각에는 이 현상이 여기서 정말로 벌어지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실마리를 가장 잘 드러내 주는 것 같다.


큰 일반화를 해보려 한다. 어떤 사람이 원치 않는 권위를 부여하려 하는 낌새를 보이게 되면, 말라가시 사람들의 전형적인 반응은 그 사람이 하는 요구가 무엇이든 진심으로 응대해 준 다음에, 그 사람이 사라지자마자 마치 그런 일이 절대 벌어진 적이 없는 것처럼 삶을 계속해 나가는 것이다. 심지어는 이것이 권위에 대처하는 말라가시의 원형적 방법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첫 방어선은 그저 문제가 되는 사건이 생겨나면 무시하는 것(정부 관료가 가축을 세러 와서 내야 하는 세금을 공지하거나, 노동자들에게 나무를 옮겨 심거나 도로를 건설하라는 소환을 공지하는 것)이다. 분명 이는 마다가스카르에만 한정되는 전략은 아니다. 이 계열에 있는 것들은 전형적인 “농부의” 전략이라고 여겨지곤 한다. 자신이 해야만 하는 일을 말하려 하는 사람에게, 만약 자신이 그에게 경제적으로 전혀 의존하고 있지 않을 경우라면 택할 수 있는 확실한 방식인 것이다. 하지만 택할 수 있는 다른 길들도 많다. 대결, 협상, 복종, 묵인과 같이 가능한 조합이 무한하다. 일상에서 명시적인 대결이 강한 혐오의 대상이 되는 일이 많은 마다가스카르에서는, 항상 선호되는 접근법은 성가신 외부자가 가버리기 전까지는 그를 기쁘게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 주는 것이다. 그러고 나면 애초에 그가 온 적이 없다고 주장하거나 일이 그렇게 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자신이 동의했던 모든 것을 단순히 무시하고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를 지켜보는 것이다. 여기에는 심지어 우주론적인 차원도 있다. 죽음의 기원에 대한 말라가시의 신화에서는 생명 자체가 인간이 정말로 이행하려 한 적이 없는 거래를 통해 신에게서 따낸 것이라고 주장된다(그 때문에 신이 우리를 죽인다고 이야기된다). 동부 연안의 베치미사라카Betsimisaraka에서 유래한 세기 초반의 신화가 하나 있다. 이 신화의 변주는 끝도 없이 많으며 대부분은 분명 비꼬는 의도를 갖고 있는데, 창조주는 보통 무장한 보조자들을 대동하고 세금을 내라고 요구하며 마을에 정기적으로 나타나 스쳐가는 식민 관료와 섬뜩한 외견상의 유사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서술된다.
 
옛날 옛적에 한 바짐바Vazimba[선주민-저자] 부부가 지구상에 사는 유일한 두 명의 사람이었다. 그들은 아이가 없어서 슬펐고, 그래서 어느 날 진흙을 찾아 인간의 모양으로 빚었다. 그들은 두 개의 형상을 만들었다. 하나는 소년이었고 다른 하나는 소녀였다. 여자가 그들의 코에 숨을 불어 넣어 움직이게 만들었지만 생명을 줄 수는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지구를 여행하고 있는 신을 하나 만났다. 그 여자는 신에게 두 개의 동상에 생명을 넣어 달라고 부탁을 했고, 신이 그 일에 성공한다면 암소 두 마리와 약간의 돈을 주기로 약속했다. 그래서 신은 그 부탁을 들어 주었다.

아이들이 자라나자, 부모들은 그들을 결혼시켰다. 이 때 신이 돌아와 자신에게 대가를 달라고 요구했다.

부모들은 말했다. “우리는 돈이 없어요. 늙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12년 후에 우리 아이들이 대가를 지불할 거에요.”신이 대답했다. “너희들이 나를 속였으니 너희들을 죽여 버리겠다.” 그리고 그는 그들을 죽였다.

12년이 지나 신은 다시 돌아와 아이들에게 대가를 지불하라고 요구했다.부부는 대답했다. “당신은 우리 부모를 죽였어요. 그래서 당신에게 주려고 모아두었던 돈을 다 써버렸어요. 그러니 빚을 청산하게 10년을 더 주세요.”

10년이 지나고 신이 돌아왔다. 부부에게는 세 아이가 있었지만 돈이 없었다.

신이 말했다. “너희들을 죽이겠어. 너희들과 너희들의 후손들, 너희들이 늙었건 젊건 상관없이.”

그 날부터 인간은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되었고, 생애를 마감하게 되면 말라가시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하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을 만든 신이 데려갔다.”

(Renel 1910 III: 17-18; 프랑스어로부터 옮긴 것.)
 
이 신화의 핵심은, 아주 소극적으로 말해도, 암시하는 바가 있다. 이 전체의 태도가 궁극적으로는 희생의 논리를 따른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이를테면 최소한 마다가스카르에서 희생은 신성한 힘에 정당하게 속하는 일부를 줌으로써 그를 기만한 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 나머지를 주는 방식이라고 분명하게 언급되곤 한다. 이따금 언급되는 것처럼 동물의 생명은 신에게로 간다. 따라서 (암묵적으로) 우리는 우리의 것을 지킬 수 있다. 그렇다면 마다가스카르 전체에서 이메리나의 의례인 파마디하나famadihana(재매장)와 같은 희생제의(혹은 그것의 기능적 등가물)가 언제나 정부의 허가를 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알쏭달쏭한 사실을 생각해 보자. 그 허가가 떨어졌다는 사실, 그리고 서류 업무가 적절하게 수행되었다는 사실은 행사 자체가 진행되는 동안에 큰 역할을 차지한다. 여기 베치미사라카 발화의 한 단편이 있다. 희생되는 소의 몸 위에 대고 읊는 것이다.
 
이 숫소는 마을 언저리에 똥을 싸고 다니거나 울타리 안에서 빈둥대는 그런 종류의 소가 아니다. 그 몸은 여기에 우리와 함께 있지만 그 생명은 너희들, 정부와 함께 한다. 그대, 정부는, 누워 있는 거대한 짐승과도 같다. 그 몸뚱이를 뒤집어 보는 자는 그 거대한 주둥이를 보게 된다. 그래서 우리, 벗들은, 그 짐승을 뒤집어 볼 수 없다! 그것이 숨긴 것을 감히 나서 자르려 하는 칼, 감히 그 뼈를 부러뜨리려 하는 도구는 바로 이 공식적인 허가서이며, 이 허가는 정치적 권위를 쥐고 있는 당신들로부터 왔다. (Aly 1984: 59-60)
 
국가를 잠재적인 폭력의 힘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 힘의 희생자인 것으로 묘사하는 것에서 끝이 나지 않는다. 허가를 받는 행위는 희생의 행위 자체와 등가화되는 것이다. 여기서 내가 제시하려 하는 핵심은 자율성에 대한 것이다. 서류를 작성하고 토지를 등록하며 심지어 세금을 내는 행위는 희생과 등가물인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삶을 지속하기 위해 필요한 자율성을 성취하는 자가 비위를 맞추기 위해 행하는 작은 의례인 것이다.


자율성이라는 이 주제는 식민시대, 그리고 식민 이후의 마다가스카르에 대한 많은 다른 연구들에서 발견될 수 있다. 같은 베치미사라카 지역에 대한 제럴드 알타베Gerald Althabe(1969, 2000) 및 북서연안의 사칼라바Sakalava에 대한 질리언 필리-하르닉Gillian Feeley-Harnik(1982, 1984, 1991)의 연구가 주목할 만하다. 하지만 이들 저자에서 자율성이라는 주제는 첨가된 변주의 일종이다. 왜냐하면 두 저자 모두 마다가스카르에서 자율성을 획득하기 위한 가장 흔한 방법은 지배에 대한 거짓된 상을 만드는 것이라고 논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논리는 이렇게 요약될 수 있다. 동등한 자들의 공동체는 그들을 압도하는 어떤 힘에 대한 공통의 종속에 의해서만 창조될 수 있다. 그 힘은 전형적으로 말라가시의 전통적인 신과 거의 비슷하게 자의적이며 폭력의 잠재력을 지닌다고 간주된다. 하지만 그 힘은 일상적인 인간의 관심사와는 마찬가지로 거리를 유지한다. 두 집단 모두에서 식민시대의 규칙에 대한 가장 극적인 반응 중 하나는 영혼의 강신에 대한 광범위한 확산이었다. 모든 공동체에서 여성들은 고대 왕의 영혼들에게 씌곤 했는데, 이 왕의 의지는 (최소한 이론적으로는) 왕이 살아있었다면 갖고 있어야 했을 모든 권위를 가진 것으로 간주되었다. 궁극적인 사회적 권위를 죽은 왕들의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황홀경에 빠진 여성들에게 맡겨버림으로써, 공동체를 구성하는 힘은 프랑스 관료와 경찰이 공공연하게 대결할 수 있는 길이 없는 어떤 지대로 자리를 옮겨 간다. 어떤 경우에서든 움직임의 성격은 동일했다. 자유로운 행위를 위한 공간을 창조하는 데 성공하고, 그 곳에서는 권력의 손아귀에서 빠져 나간 삶을 살아갈 수 있는데, 이는 절대적인 지배의 이미지를 창조함으로써만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지배는 궁극적으로는 그것이 외연적으로 귀속되는 자들에 의해서만 완전히 조작될 수 있는 이미지이며 판타즘이다.


문제를 다소 조야하게 설명하자면, 내가 알던 사람들은 일종의 사기에 가담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정부에 대한 그들의 이미지는 최소한 식민 시대 이후로는 본질적으로 이질적이며 잠식해 들어오고 강요하는 것 중 하나였다. 정부가 환기하는 주요 감정은 공포였다. 프랑스 지배하에서 정부장치government apparatus는 주로 돈과 강요된 노동을 우려내는 엔진이었다. 교외 지역 인구를 위한 사회적 이득은 거의 제공하지 않았던 것이다(교외지역 인구의 관점에서 보면 분명 하나도 보탬이 되지 않았다). 신민의 일상적인 필요와 정말로 연관되어 있던 한에서 말하자면 새로운 신민을 만들어 내려는 의식적인 의도, 즉 그들의 욕망을 보다 깊은 종속을 창조할 수 있는 것으로 변환시키려는 시도가 관계되어 있었다. 1960년의 독립 이후에도 사태는 그다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첫 말라가시 통치체제는 정책이나 작동방식에서 거의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구의 절대 다수에게 상식적인 태도는 국가는 뭔가 비위를 맞춰 준 다음 피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어떻게든 가능했던 경우였다면.


사태가 정말로 변하기 시작했던 것은 1972년의 혁명이 지나서였다.


반 식민 혁명에 기원을 둔 1972년의 사건들은 국가자본주의적인 군사기반 체제의 계승을 도입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 체제는 1975년에서 1991년까지, 디디에 라치라카Didier Ratsiraka 대통령이라는 인물에 의해 지배되었다. 라치라카는 북한의 김일성에게서 정치적인 영감을 얻었다. 이론상으로 그의 체제는 매우 중앙집권화된 사회주의적 발전과 동원 형태에 바쳐졌다. 비록 그는 처음부터 자신이 정체되어 있다고 간주했던 것, 즉 혁명의 잠재력이 거의 없는 전통적인 농민 분파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농경에 대한 그의 통치 방식은 산업에서와 마찬가지로 외채의 지원을 받는 대규모 투자를 포함하는, 이따금 영웅적인 규모를 지닌 일련의 거대한 발전구도에 모든 노력을 쏟아 붓는 것이었다. 1970년대에는 대출을 받기가 쉬웠다. 1981년 무렵에는 정부가 파산했다. 그때부터 말라가시의 경제사는 주로 IMF와의 협상에 대한 이야기가 되었다.


여기서 IMF가 명령한 긴축재정이 불러온 효과들의 세부사항으로 들어갈 여유는 없다. 그 직접적인 결과가 전반적인 삶의 기준이 최악으로 추락했다는 것이라는 점을 언급하는 것이면 충분할 것이다. 가장 강한 타격은 공공서비스 및 기타 정부 고용인들(중산층의 상당 부분을 이루던 사람들)이 입었다. 하지만 (자유롭게 약탈할 수 있는, 대통령 자신 주변에 있는 소수 엘리트를 제외하면) 극빈층화는 거의 보편적이었다. 마다가스카르는 이제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들 중 하나다.


라치라카의 “농촌 분파”(핵심 상품을 생산하지 않는 농촌지역)에게 이 전체의 기간은 국가의 점차적인 철수에 의해 표시된다. 프랑스 점령기에 가장 성가신 세금들(인두세, 가축세, 가옥세)은 농부들을 생산물을 팔게 하며 현금경제로 몰아넣기 위해 고안되었으나 혁명 직후에 철폐되었다. 라치라카의 체제는 처음에는 시골 지역의 통치를 무시했다. 하지만 1981년 이후에는 점차로 선별적 통치의 대상이 되었다. 예산이 무한하게 삭감되면서 자원이 점차로 바닥이 난 국가는 지배자들이 그 경제적 중요성을 발견한 마을에 대해서 최소한의 사회 서비스를 제공하고 행정을 유지하는 수준으로 축소되었다. 이들 마을은 외환을 벌 수 있는 자원을 생산하는 곳이 대부분이었다. 대부분의 생산과 분배가 공식적인 영역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아리보니마모와 같은 장소들은 그들에게 어떤 관심의 대상도 되지 못했다. 이런 곳((거의 가능성도 없지만) 무장 게릴라의 근거지가 되는 기준에 미달하는 곳)에서는 국가를 실제로 운영하는 사람들의 이해관계를 심각하게 위협할 수 있는 일이 벌어진다고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헌병대가 도적떼를 쫒는 데 간혹 보인 열정은 분명 그들이 반란의 핵을 형성할 능력이 있는, 유일하게 조직화되고 무장한 집단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과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하지만 그런 일이 벌어질 가능성은 별로 없었다). 주2)
 
시골 지역의 자원들은 씨가 말랐다. 내가 아리보니마모에 있을 무렵에는 유의미한 자금 지원을 받는 유일한 행정 영역은 교육체계 뿐이었다. 심지어는 여기서조차 그 합이 보잘것없었다. 주정부의 역할은 (최소한 봉급의 일부를 학부모회로부터 이따금 지불받는) 교사들에게 우편물을 발송하여 커리큘럼을 제공하고 시험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후자의 경우, 특히 바칼로레아 시험은 중심의 관점에서는 특별한 관심이 되었는데, 이 시험은 공식적인 국가 영역으로 향하는 관문이었기 때문이다. 바칼로레아를 통과한 사람들은 여러 주에 걸친 군사훈련을 받은 후 한 해 동안 “국방의 의무”를 수행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비록 (앞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이 의무는 아무 의미 없는, 일을 위한 일을 하는 것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국방의 의무는 중요하다. 실질적인 권위가 실제로 존재하는 영역, 명령에 복종해야만 하는 영역으로 들어가는 관문이었기 때문이다. 교육체계로 피신할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 정부는 어떤 것도 제공해 주지 않았지만, 또한 그들의 삶에 어떤 힘도 직접적으로 행사하지는 않았다. 주3)
 
하지만 시골지역에서조차 정부관청은 계속 남아 있었다. 사람들은 타자기를 자주 분해하며 타자기를 치는 데 필요한 종이를 구입하는 데 부속품을 사용했고, 더 이상 어떤 수요도 없었지만 의무에 충실하게 서류를 작성하며 나무를 뽑거나 시신을 무덤에서 들어내기 전에 허가를 요청하며 출생과 사망을 보고하고 그들의 가축 수를 등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거절했다 하더라도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을 깨닫고 있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왜 그 일을 계속하고 있었던 것일까?


내 추측으로 그 힘을 관성, 즉 순전한 습관의 힘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람들은 여전히 동일한 사기를 치고 있었다. 그 거대한 입에 이빨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공표하지 않는 국가의 비위를 맞추고 있었던 것이다. 식민시대의 폭력에 대한 기억 역시 여전히 생생할 것이다. 나는 초기의 대량 학살, 그리고 시골 사람들이 정부 관청에 들어갈 때나 끊임없는 세금의 압박에 노출되어 있었을 때 겁에 질리곤 했다는 이야기를 여러 차례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진짜 대답은 그보다 미묘하다고 생각한다.


폭력에 대한 기억들은 국가가 무엇에 대한 것이라고 사람들이 상상했는지를 정의해 준다는 점에서 중요성을 갖는다. 나는 국가가(그 모든 사회주의적 주장에도 불구하고) 서비스를 제공하려는 목적으로 존재했다는 인식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최소한 어떤 사람도 그런 서비스가 없다는 데 대해 크게 불평한 적은 없다. 사람들은 정부는 본질적으로 자의적이고 침략적이며 강요하는 힘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던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정말로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이던 공식적인 이데올로기의 주제 중 하나는 말라가시의 통일성이라는 개념이었다. 최소한 고지대에서는 사람들이 자신을 “말라가시 사람”으로 보았다. 그들은 자신을 “메리나 사람”이라고 언급하는 법은 거의 없었다. 말라가시의 통일성은 수사법에서 지속적인 주제로 등장한다. 나는 모든 주요 의례(공식적인 의미는 서류가 작성되었고 그 행사가 승인되었다는 것을 표시하기 위한 것이다)에 말라가시 깃발이 항상 등장하는 것의 진짜 의미는 거기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내게는 국가의 텅 빈 성격이야말로 그것을 통합하는 힘으로 받아들여지게 할 수 있던 원인인 것처럼 보인다. 1972년의 혁명은 무엇보다도 고유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시도였고 국가를 진정한 말라가시로 만들기 위한 시도였다. 나의 경우 고지대의 인구에 관해서라면, 이 노력이 대체로 성공적이었다고 말할 것 같다. 동시에 국가가 그 모든 실질적인 권력을 잃었던 한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정부는 알타베와 필리-하르닉이 논의했던 고대의 왕들과 비슷한 계열의 존재가 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공통된 종속의 힘을 통해 하나의 공동체로 종속되는 이들을 구성하는, 그리고 그와 동시에 직접적인 실천의 의미에서는 어떤 경우에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통제에 따르기가 극단적으로 편리했던 절대적이고 자의적인 권력이 된 것이다.
 
잠정적 자율지대
 
현대의 아나키스트 집단에서는 “TAZ” 혹은 “일시적 자율지대”temporary autonomous zone(Bey 1991)에 관한 이야기들이 흔해졌다. 지구상에 국가와 자본에 의해 전혀 식민화되지 않은 지역은 더 이상 없을지도 모르지만, 권력은 완전한 단일체는 아니라는 생각이다. 언제나 일시적인 균열과 틈이 생겨나고, 자기-조직화된 공동체들이 지속적으로 분출되어 출현하는, 곧 사라지는 공간들, 감춰진 봉기들이 언제나 있다. 자유로운 공간이 깜빡이며 생겨났다가 사라져 간다. 만약 다른 것이 없다면, 여전히 대안을 사유할 수 있고 인간의 가능성은 절대 고정된 법이 없다는 사실에 대한 지속적 증언을 제공하는 것은 바로 이 공간들이다.


이메리나 교외 지역에서는 “일시적인” 것보다는 “잠정적 자율지대”가 있다고 말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이렇게 부르는 까닭의 일부는 TAZ의 이미지처럼 권력 바깥에서 반항하며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며, 또한 그 독립이 반드시 그렇게 일시적이라고 가정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베타포, 심지어는 아리보니마모조차 상당부분은 국가장치의 직접적인 통치 바깥에 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이들 지역 혹은 상당 부분이 국가의 지배 아래에 있는 자본과 같은 지대 사이를 계속 오간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자율성은 잠정적이며 불확실하다. 이런 자율성은 총이나 돈이 새로 유입되며 장치를 회복하는 순간에는 쓸려 나갈 수 있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다시 그렇지 않게 될 수도 있다. 일부 사람들은 현재의 상황이 추문에 가깝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나 자신은 그런 것이 매우 주목할 만한 성과라고 생각한다. 결국 전 세계 모든 국가에 긴축재정이 부과되었다. 하지만 인구 다수가 스스로를 통치하도록 포기하며 내버려둠으로써 반응한 정부는 거의 없었고, 대처할 준비가 그만큼 잘 되어 있던 인구도 별로 없었을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일까? 나는 여기에 여러 이유가 있다고 추측한다. 하나는 자기-통치라는 능동적인 전통, 가령 유럽이나 라틴아메리카의 사회운동에서 발견되었다면 의심의 여지없이 직접민주주의의 문화라고 일컬어졌을 것이 유지되었던 것이다. 합의에 의해 결정에 도달하는 기술은 그저 모든 사람이 성장하면서 익히는 것이었다. 이는 거의 일상적인 상식의 일부이기 때문에 외부자는 처음에는 알아채기조차 힘들다. 예를 들어 타인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이면 어떤 행위의 과정도 타인들이 미리 동의하지 않는 한에서는 적법하게 수행될 수 없다는 일반적 원칙이 있었다. 그 결과로 개최되는 회의는 “포콘올로나” 회의, 기본 의미가 “모두”인 회의였다. 하지만 식민주의적인 민족지들이 계속 오해해 온 바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the 포콘올로나는 공식적인 제도가 아니라, 집합적으로 해결하려 노력하는 문제의 차원에 따라 다섯 명에서 천 명까지 참가자 수가 달라질 수 있는 유동적인 고찰 원칙이었다. 하지만 이 회의가 이루어질 때면, 남성이든 여성이든 나이 많은 사람이든 젊은 사람이든 누구에게나 동등한 발언권이 공식적으로 주어졌다. 여기서 유일한 기준은 합당한 견해를 내놓을 수 있을 만큼 나이가 들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주4) 게다가 진행중인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현대의 합의과정에서라면 “블록”block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에 참여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일들이 진행되는 전반적인 방향에 대해서는 “난 더 이상 찬성할 수 없다”(tsy manaiky aho)라고만 선언하면 될 뿐이었고, 어떤 사람의 관심사가 공적인 주목을 받기 전까지는 일반적인 위기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그렇다면 모든 정치집회가 기술적으로 불법이었던 식민기에조차 평범한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일을 외부의 힘은 최소한도로 빌리고 처리할 수 있는 제도 구조와 정치적 관습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으로 말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들은 또한 국가가 그 실체를 잃게 되었을 때 체면을 거의 잃지 않고도 효과적으로 붕괴하도록 만들 수 있을 만큼 미묘한 저항의 형식을 발달시킬 수도 있었다.


나는 상황을 낭만화하고 싶지는 않다. 극심한 빈곤을 짊어지는 대가로 농촌 공동체가 얻어낸 자율성이기 때문이다. 먹을 것을 충분히 구하기 위해 계속 시달려야만 하는 상황에 있다면 자유를 향유하기란 힘든 일이다. (가장 뚜렷한 것으로는 학교나 교회와 같은) 지배 제도들은 여전히 기능을 발휘했으며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위계적이었다. 다만 이 제도들이 이제는 물리력의 위협을 통해 그 노력을 보강할 만한 힘은 거의 없지만 말이다. 도시 지역은 말할 것도 없고 이들 농촌 공동체의 상당 지역에는 분명 깊은 사회적 불평등이 있었다. 부의 차이(세계적인 기준으로는 미미한 것이지만 여전히 현실적인), 그리고 심지어는 “백인”과 “흑인”이라고 일컬어지는 분할, 고대 왕국의 귀족 혹은 평민의 후손, 그리고 그들의 노예들과 같은 구분이 여기에 해당된다. 베타포와 같은 지역이 어떤 곳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곳이 국가권력의 바깥에 서있는 장소라는 점을 이해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전적으로 바깥에 서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자율지대를 유지하기 위한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강제력의 현실성은 사람들이 서로를 대하는 데 사용하는 용어까지 다른 형태로 바꾸어 놓았다. 이런 변화는 바로 경험의 구조 속에 어떤 방식으로든 깊게 박혀 있다.


이메리나에서는 거의 모든 사람이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간주한다(2/3는 개신교이며 1/3은 가톨릭이다). 많은 사람들이 규칙적으로 교회에 간다. 정부는 아이들에게 학교에 출석하도록 강제할 수단이 더 이상 없지만, 출석은 최소한 초등학교 수준에서는 거의 보편화되어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이들 제도, 특히 학교에 대해서는 양가적인 측면이 분명 있다. 연구의 정치성을 이야기할 때 이미 언급했던 것처럼 이메리나의 교육체계는 언제나 권력의 도구처럼 보였고, 또한 언제나 바자하와 동일시되었기 때문이다. 현재의 교육체계는 프랑스 식민 통치 시기에 형성되었다. 여기서 이 체제는 대중의 의지의 표현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의 최소한도조차 전혀 충족하지 못했다는 점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이 체제는 정복에 의해 부과된 체제였으며 지속적인 힘의 위협에 의해서만 유지될 수 있었다.


여기서는 의존할 수 있을 만한 힘의 위협을 유지하는 것이 실제로 무엇을 요구하는지 잠시 고찰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 이는 단순히 폭력을 행사할 의사가 있는 사람들을 적정 수로 확보해 두는 문제가 아니며 그들을 무장시키고 훈련시키는 문제가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이 문제는 조화coordination의 문제다. 핵심은 권위에 대한 공개적 도전이 발생할 경우 언제 어디서나 그런 폭력적인 사람들을 충분한 수로 반드시 등장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그들이 정말로 그렇게 할 것이라는 점을 확신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다음 순서를 보면 이렇게 하기 위해서 상당히 많은 것이 요구된다. 정보를 처리할 수 있도록 훈련받은 기능직 관리들 상당수, 게다가 도로, 전화, 타자기, 병영, 수선 가게, 석유 보급소라는 하부구조, 그리고 이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관리자들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런 하부구조는 일단 세워지고 나면 의심의 여지없이 다른 기능들도 잘 수행해 낼 수 있다. 병사들을 이송하기 위해 건설된 도로는 닭을 시장으로 나르거나 아픈 친척을 방문하려 하는 사람들을 이동시키는 데 사용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병사를 이송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더라면 도로가 아예 있지도 않았을 것이며, 최소한 마다가스카르에서 사람들은 이 점을 매우 잘 인식하고 있는 듯 보였다.


국가 관료제(어디에 있는 어떤 국가관료제건 거의 다 해당되는 것이지만)에서 일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매일 매일의 수준에서는 사람들의 두개골을 부수는 것보다는 정보를 처리하는 데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하지만 군인과 경찰 역시 마찬가지다. 이 점을 국가의 작동에서 폭력이 차지하는 역할이 미미하다는 증거로 보는 것보다는, 이런 정보기술 자체가 어떻게 폭력 장치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지, 사람들의 두개골을 깨버릴 능력과 의지가 있는 소수의 사람들이 언제나 적소에 적시에 나타나는 것을 보증해 주는 데 필수적인 요소가 되는지를 질문해 보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결국 감시는 전쟁의 기술이며 푸코의 판옵티콘은 무장한 간수들이 있는 감옥이었던 것이다.


마다가스카르에서 보면 국가에 본질적인 폭력적 본성은 부정하기가 훨씬 더 어렵다. 이것은 식민주의의 역사 때문만은 아니다. 이것은 또한 (최소한 내가 아는 사람들의 경우) 대부분의 말라가시 사람들이 서로 다른 지각 기준standards of perception에 적응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을 가장 잘 설명하는 방식은 이들이 대부분의 미국인과는 달리 공포에서 특별히 수치스러운 점을 찾지 못한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 부분은 내가 여기서 적응하는 데 가장 오랜 시간이 걸렸던 면모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성장한 남성이 거리를 응시하며 이따금 “무서운 자동차”들을 언급하거나 “이 황소들이 두렵다”라고 말하는 것을 지켜 볼 때처럼, 이런 일들은 나와 같은 방식으로 양육된 사람에게는 매우 당황스러운 일이다. 나는 미국의 기준에서 보면 특별히 마초적인 [문화적] 배경으로부터 온 것도 아니지만, 공포의 고백, 최소한은 타인에 의해 신체적인 피해를 입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약간은 당황스러운 것이라고 가정하도록 길러져 왔다. 대부분의 말라가시 사람들은 이 화제가 즐겁고 재미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일부 사람들이 바자하가 그 자체로 어떤 사람이던 상관없이 얼마나 두렵다고 느끼는지 말하면서 진짜로 즐거움을 느낀다. 국가가 대개 국민들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킴으로써 작동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그들에겐 명백한 사실일 뿐이다. 서구 사회과학이 강압의 중요성을 평가절하하는 경향이 있는 한에서, 까닭의 일부는 숨겨진 당혹감이 있기 때문인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우리의 일상적인 삶이 물리적 힘에 대한 공포에 의해 형성되고 있는 그 수위를 인정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라고 느낀다. 주5)
 
그러나 학교는 궁극적으로 이 폭력 장치의 일부다.


말라가시에서 사람들은 교육이 기술은 전달해도 사실이나 정보를 전달한다고 이야기하는 법은 없다. 사용되는 말인 파하이자나fahaizana는 “기술, 노하우, 실용적 지식”을 의미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학교에서 습득하는 종류의 파하이자나는 본질적으로 외국의 것, 즉 파하이자나 바자하로, 그 자체로는 말라가시의 노하우 형태와는 대립되는 것으로 간주된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기술들은 본질적으로 지배의 기술이다. 그 까닭의 일부는 학교 체계 자체가 폭력의 하부구조의 일부를 이루기 때문이다. 학교는 일차적으로 기능직, 이차적으로는 테크니션을 훈련시키기 위해 고안되었다. 가르침의 스타일은 전적으로 권위주의적이어서, 틀에 박힌 암기에 대해 크게 강조했으며, 학생들이 배우는 기술들은 그들이 특정한 사회관계 형태(아마도 명령 관계라고 부를 수 있는 것)를 취하게끔 조직된 사무실, 공장, 혹은 교실에 고용되리라는 기대 속에 제공된 것이었다. 일부 사람들은 명령을 내리고 다른 이들은 복종할 것이라는 점이 언제나 가정되어 있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 체계는 폭력의 하부구조를 유지하는 데 요구되는 능력을 생산하기 위해 고안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의 다른 현재 측면과는 완전히 다른 사회관계, 신체적 상해라는 지속적인 위협에 의해서만 유지될 수 있는 사회관계를 가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연구와 책을 통한 공부를 향한 양가감정은 상황에 대한 완전히 분별력있는 평가에 기초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사람은 지식 자체는 가치가 있고 심지어는 즐거운 것이라고 여겼다. 모든 사람은 학교에서 배운 기술들이 다른 방식으로는 체험할 수 없는 경험의 영역, 지구 전체를 가로지르는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와 정보 유형들을 열어 보여 준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기술들은 또한 억압의 기술들이기도 했다. 이 체계는 사람들을 다른 것(어떻게 명단과 물건의 목록을 유지하며 어떻게 회의를 진행할 수 있는가)이 아닌 특정한 조직화의 방식 속에서 훈련시킴으로써, 그 목적이 무엇이건 간에 한데 묶어 조화시킬 수 있는 대규모의 네트워크(역사보존회건 아니면 혁명정당이건)는 무엇이건 전부 강제적인 관료제와 비슷한 형태로 작동하게 되는 것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분명 많은 사람들이 시도했던 것처럼 이들 장치를 보다 합의에 기반한, 민주적인 방식으로 가동되게끔 가공하려 노력할 수도 있다. 할 수는 있지만 극단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이 경향, 이동은 이러한 능력들을 훈련받은 사람들에 의해 창조된 체계라면 어디에서나 드러날 수 있다. 참여자들의 의도가 얼마나 혁명적이건 간에 프랑스 식민체제와 약간은 유사한 모습을 띄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기술들이 본성적으로 외국의 것이라고 간주하며 가능한 한 “말라가시”의 맥락에서 떨어뜨리려 노력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동시에 여기에는 이러한 위계화된 제도의 존재가 가져 온 보다 미묘한 효과들도 있을 것이다. 이런 구분은 사람들이 “가시”gasy한 모든 것(즉, 말라가시의)과 “바자하”, 즉 외부의, 권위주의적인, 억압적인, 프랑스의 것으로 간주되는 모든 것을 명쾌하게 구분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들은 모든 사람이 후자의 것을 최소한 약간일지라도 경험하게 한다는 점을 보증해 두었다. 즉, 국가가 “사회적 강제력의 유일한 독점자일 뿐만 아니라 실행능력이 있는 유일한 자”인 지대. 단순히, 유년시절에 불편한 줄에 서 있거나, 체육수업에서 지시에 따라 뛰거나, 지겹고 논점도 없는 수업을 그대로 모방하여 암기해야만 하는 의무를 강요당하는 것의 문제였을지라도 마찬가지다. 국가와 흡사한 규율의 경험은 사람들에게 이와는 대조적으로 “말라가시”의 것(합의에 의한 의사결정, 예를 들면 동료 성인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을 주저하고, 대결의 느낌, 심지어는 카리스마적인 리더쉽으로 간주되는 것이면 무엇이든 일반적으로 의심하게 하는)을 지속적으로 주지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Bloch 1971과 비교해 볼 것). 이런 자질들의 상당수가 언제나 말라가시의 핵심 본질로 간주되어 왔던 것이 아니라는 점은 상당히 분명하다. 비록 나는 말라가시가 섬에 정착한 매우 초창기부터 언제나 자신들을 이런 저런 종류의 외국인들과 대립해 정의하려는 경향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하지만 말이다. 주6) 충분히 역설적이지만 지역적 자율성의 조건부적 성격은 이런 방식을 통해 실제로는 어떤 의미에서 자족적인 것이 된다. 우리 모두는 부와 권력이 심각한 불평등의 상태에 있는, 보다 넓은 세계 속에서 살고 있다. 말라가시에서 쌀을 재배하는 농부들과 대장장이, 바느질하는 여성들이나 비디오 상영자들은 모두 이 점을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바로 그러한 지속적인 주지를 통해 사람들은 크게 봐서는 그들을 절연시키는 데 그럭저럭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 질문
 
나는 아리보니마모의 오지가 고립된 사례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헨리 라이트가 내게 말해 주었던 것처럼 마다가스카르 전역에서는 비슷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사실 섬의 다른 지역들에서는 훨씬 더 오래 그리고 훨씬 더 근본적인 방식으로 그랬을지도 모른다. 결국 수도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고 군용 공항과 헌병대, 감옥이 있는 아리보니마모는 국가 권위가 사라질 것이라고 기대하기가 가장 힘든 곳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마다가스카르 자체 안에서 국가권위는 쇠퇴기에 있고 썰물처럼 빠져 나가는 것처럼 보이는데, 해를 걸러 가며 이따금은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고 이따금은 후퇴한다. 하지만 교외 지역(특히 아리보니마모처럼 바닐라 플랜테이션, 보크사이트 광산, 혹은 자연보존구역이 없는 곳) 대부분에서 상황은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 수백, 심지어는 수천에 달하는 비슷한 공동체가 없을지 생각해 볼 법 하다. 전국적 정부national government의 효율적 지배로부터 벗어났거나 그로부터 발을 빼 오면서 모든 의도와 목적에서 자기-통치를 할 수 있게 된, 하지만 여전히 그 구성원들이 그 사실을 위장하기 위해 외적 형식을 유지하며 경의의 표현을 취하는 그런 공동체들.


이것은 우리가 “실패한 국가”, 그리고 특히 아프리카에서 국가 권위의 위기에 대한 현대 문헌들을 읽을 때 깊이 생각해 볼만한 문제다. 최근에 제임스 퍼거슨(Ferguson, 2006)이 주지했던 것처럼, 아프리카의 많은 지역에서는 “국가 주권”이 남아 있다는 것의 유일한 의미는 국제 지역에서 국민들을 합법적으로 대변할 수 있는 권리, 그리고 특히 그 영토 내에서 다른 국가에서 온 사람들의 자원 접근권과 관련된 계약들을 보증할 수 있는 권리가 국가에게만 있다는 사실에 대한 국제적인 인식일 뿐이다. 심지어 루돌프 폰 이헤링이나 막스 베버가 서술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폭력의 독점권을 보존하는 척 하는 경우조차 별로 없다. 자원의 회수, 그리고 정부가 모든 국민에게 기초적인 필요를 평등하게 제공할 의사나 능력을 어떤 의미에서 포기한 것은, 보건, 교육, 그리고 삶의 문제에서 엄청나게 파괴적인 효력을 발휘해 왔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IMF가 부과한 긴축재정은 의도치 않은 신기한 부수 효과를 불러 온 것으로 알려져 왔다.


사실상 비-아프리카인들이 국가 권력의 붕괴라는 의미에서 “아나키”가 혼란, 폭력, 그리고 파괴를 낳을 때만(예컨대 1990년대의 소말리아나 오늘날의 많은 남부 및 중앙아프리카 지역) 그 점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는 점은 일종의 아이러니다. 내가 마다가스카르에서 관찰한 것은, 그런 사례 모두에서 외부자들만 모르는 수십 혹은 수백 가지의 다른 측면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은, 지역주민들이 이 이행을 평화적으로 일궈내는 데 성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라가시 주민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대면을 피함으로써 국가의 대변인들이 공개적으로 모욕감을 느끼거나 체면을 잃어야만 했던 적은 없게 만들었고, 하지만 동시에 그들이 지배를 행하거나 표면적인 지배만으로 만족하기를 가능케 하는 것을 쉽게 만들었다. 게다가 이 전략이나 새로운 자율 공동체들의 존재가 아프리카에 한정되리라는 법도 없다. 세계의 많은 지역들(동남아시아, 오세아니아, 그리고 가장 주목할 만한, 심지어는 라틴아메리카의 일부)에서는 국가의 존재가 언제나 다소간 이산적인 현상이 되어 왔다. 국가의 방문은 아마도 이따금 재앙에 가까운 경우가 많더라도 보복적인 말라가시 신의 예외적인 출현과 흡사하며, 전체주의적인 국가나 산업민주주의 사회를 통해 우리가 익숙해진 지속적인 모니터링과 감시의 형태와는 별로 닮지 않았다.


물론 제도적인 구조는 남아 있다. 학교, 은행, 병원이 있는 것이다. 이들은 예컨대 마리오 트론티가 부르는 것처럼 ‘국가 형태’state form가 언제나 현존한다는 점을 보증한다. 모든 사람은 강요에 기초하고 있는 제도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약간씩은 알고 있다. 심지어 실제적인 폭력이 대부분 사라졌기 때문에 현실국가 제도의 유령 같은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점을 알고 있을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여기서 보다 자세하게 고찰해 볼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폭력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단순히 후퇴했을 뿐이다. 도시에는 여전히 경찰이 있었고, 예컨대 보크사이트 광산이나 상당량의 외환을 벌어 주는 자원이 있는 다른 곳에는 어디나 경찰이 있었다. 심지어 지구적인 자원 배분(예를 들어 해당 지역의 병원에 어떤 의약품과 장비가 실제 갖춰져 있을 것이냐의 문제처럼)은 소유의 배치를 강제하려는, 체계화된 폭력의 위협에 의해 유지되고 있었다. 하지만 아리보니마모와 같은 지역에 사는 지역 주민들은, 오직 그것의 먼 효과들, 그리고 자신들이 일상에서 하면 안 되는 행위들이 정확히 무엇인지를 일깨워주는 이상하고 텅 빈 제도들에만 대처하면 될 뿐이었다.
 

 
주1) 가령 브라질 교외 지역의 대부분에서 그렇듯 상황이 거의 반대인 경우와 대조를 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경찰은 실질적으로 소유권을 강제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고, 피해자가 재산이 있는 엘리트층이 아니라면 단순한 살인 사건은 무시될 것이라 예상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주2) 주로 19세기 무렵을 전후해 도적떼가 실제 반란군으로 변했던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 관심은 국가가 결국 무엇에 대한 것인가에 관한 보다 깊은 이해에 뿌리를 두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추측하게 된다. 메리나 왕국에서 도적떼들(공식 문서에는 그저 파하발로fahavalo, “적”이라고만 언급되어 있는)은 마녀들과 더불어 원형적인 반-국가로, 합법적인 왕실 권위에 저항하며 스스로를 정의했다. 마녀들과의 관계는 또한 그 점을 가정하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사실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즉, 그들은 앙리의 강탈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지만, 아리보니마모의 헌병대가 도적떼를 체포하기 위해 행동을 취하고, 1979년 국립고등학교에서 기숙사 전체의 학생들에게 영향을 주었던 암발라벨로나Ambalavelona의 발발, 즉 악령의 강신 배후에 있었던 것으로 의심을 받았던 십대 소녀를 조사했던 것은 이것과 관계가 있다.
 
주3) 예컨대 의료서비스는 이론적으로 무상으로 제공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부패에 의해 사유화되었고, 그 다음차례로는 정부의 급료가 유명무실해지면서 다시 보편적인 것이 되었다.


주4) 자크 데즈(Jacques Dez, 1975:54-57)이 이 점을 대체로 매우 훌륭한 요약을 통해 언급한다. 비록 그는 마지막에 18세기 말엽의 안드리아남포인이메리나 왕에 의해 “하나의” 포콘올로나가 “발명”되었다고 결론을 내림으로써 식민주의적 가정을 재생산하고 있지만. 합의에 의한 의사결정 배후에 있는 에토스에 대해서는 안드리아만자토(Andriamanjato, 1957)을 참고할 것.
 
주5) 유럽이나 북미에서는 여성보다 남성이 더 그렇다고 느낀다. 마다가스카르에도 만약 그런 것이 있었다면 상황은 반대였을 것이다.


주6) 현대 고고학자들은 이제 마다가스카르의 유의미한 정착 인구는 놀라울 만큼 최근에 형성되었다는 점을 믿고 있다. 이 시기는 어쩌면 8세기부터일 수도 있으며, 마다가스카르의 인구는 오스트로네시아, 아프리카, 그리고 심지어는 다른 지역에 기원을 둔 매우 다른 기원을 지닌 이질적인 인구로 구성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초기에는 심지어 작은 이슬람 도시인 마힐라카Mahilaka까지 있었다. 여기서는 스와힐리어를 사용했던 것이 거의 분명하고, 동아프리카와 아라비아 반도와의 무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따라서 초기 말라가시는 맨 처음부터 국가 및 세계종교를 경험하고 있었다. 그리고 현대의 말라가시 문화가 탄생한 것처럼 보이는 “통합”의 순간은 마힐라카가 최정점 혹은 심지어는 쇠퇴를 겪는 시기에 등장했던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후 말라가시는 섬 전반에서 놀랄 만한 일관성을 유지했고 섬의 인구를 개종시켜 병합하려는 이슬람교의 잦은 시도에 대한 저항력을 갖추고 있었다. 나는 말라가시 문화가 일관된 단일체로 출현했던 한에서, 마치 오늘날 “바자하”인 모든 것에 대한 의식적인 대조가 유지되고 있는 것처럼, “실라모”Silamo(스와힐리어를 사용하는, 이슬람교의)로 간주된 모든 것이 의식적인 대립 속에 있었던 것이 아닌지 강한 의심을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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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버 국가론 추가[펌글]

적린님의 [그레이버 국가론 추가] 에 관련된 글.

 

적린님의 [그레이버, 국가론에 대한 단상] 에 관련된 글.

 

고소 이와사부로와 그레이버 대담집(원문은 일어인데 번역해 준 사람들이 있음)에서 아주 조금 손봐 일부 긁어 올린다. 올려도 괜찮겠지? ^^; 이 대담집, 정말 재미있다. 개념적으로 흥미로운 것들도 많고 구체적인 부분에서도 흥미로운 게 많고...

 

더 보기

고소: 『아나키스트 인류학의 단상들』에서 당신은 처음에는 국가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은 권력구조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레이버: 그렇습니다. 그것들은 일반적으로 '추장제'[=일어 원문에는 '수장제首長制']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명칭은 별로 좋지 않습니다. 어쨌든 중점은 국민국가의 망령이 지나치게 강해져서 그것을 과거의 역사에 과도하게 투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에 관해 클라스트르는 (그리고 월러스틴 등도) 비판적인 시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국민국가라는 모델을 과거에 투영하고 있지만, 그 때 그것을 '사회'라고 하는 언어, 습관, 제도, 경계가 명료하게 떼어낼 수 있는 고유한 실체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상태는 인간의 역사에 있어서 거의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역사를 통해서 정치/경제기구가 가지는 실제의 형태는 이것과 많이 틀립니다.


우리가 국가라고 부르는 것은, 실제로 그것들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 존재한다고 상상하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어떤 의미에서 유토피아적인 이상[=ideal. 일어 원문에는 '망상']인 것입니다. 따라서 국가는 두 가지 요소가 합체된 결과물로 만들어져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유토피아적인 이상과 급습적인 약탈기구입니다. 이 둘 사이에는 원리적으로 어떤 관계도 없지만 실제로는 합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동남아시아의 인도어계의 국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것들은 기본적으로 단지 마음 내키는 대로 상인이나 농민에게 강탈하기 보다는 그들의 부를 제도적으로 빨아올리는 편이 이득이라고 이해한 해적이나 산적에 의해 설립된 것입니다. 거기에서 그들은 불교도든, 힌두교도든, 그 누구라도 인도에서 유랑하는 성자를 데려와 거대한 우주론적 체계를 만들어내게 해서, 그것을 정통화한다는 안전판을 사용한 것입니다. 우주론적 체계란 것은 항상 우주전역이 어떤 전체화의 원리에 의해 조정되어 있다는 절대적/신적인 힘의 망상입니다. 그것은 어떤 국가도 실제로는 끌어 낼 수 없는 힘에 대한 환상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국가의 우주론적 도취는 실제로 지상에 존재하며 경험되는 것과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지배자가 복잡한 천체적인 장식으로 거대사원을 만들거나 할 때, 그것에 가깝게 보이는 것은 있어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붕괴합니다. 하여간 그 이유가 무엇이든, 국가는 항상 전능한 권력의 환상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제임스 스콧이 『지배와 저항의 기술』에서 주장하고 있듯이 주인과 노예와 같은 두 개의 불평등한 역관계가 존재할 때, 양 쪽 모두 역사를 날조하기 위해 협력하고 있는 듯한 사태가 진행합니다. 권력을 방위하기 위한 제1선은 모두가 공공의 장에서는 그것을 믿고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주인들은 플랜테이션이 진심으로 노예들을 생각하는 부권적인[?? 이건 번역자에게 물어봐야 할 듯] 제도인 것처럼 보이게 하고 노예들도 말을 맞추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집에 돌아가면 양쪽 모두 그것을 터무니없는 것이라 비웃고 있었던 것입니다 (웃음)


그러므로 권력구축의 제1선은 아무도 믿고 있지 않는 게임에 모두를 참가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좀처럼 넘어서기 힘든 불가시(不可視)의 선입니다. 그리고 권력에 도전할 때, 우선 우리는 모두가 무대 뒤에서 말하고 있는 것을 무대 앞에서 말해보고 그것이 처벌 받게 되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항상 무엇을 하면 좋을까, 무엇을 하면 안 될까 실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스콧이 '공식기록official transcript' 이라고 부르는, 역사기록에 쓰여있는 것은 사람들이 실제로 믿고 있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실제로 효력이 있는 권력의 외연(外延)이란, 그 초기에는 대략 왕의 신체로부터 사방 100야드 정도 아니었을까요. 또는 왕이 바라볼 수 있는 범위정도인 것입니다. 그래서 왕은 언덕 위에 있을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국가의 현전은 동일하지 않으며, 또한 예측 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산발적(sporadic)인 것입니다. 우리들은 언제 국가가 모습을 드러낼지 확실히는 알지 못합니다. 국가개입에는 어딘가 엉터리같은 구석이 있습니다. 눈먼 거인이 닥치는 대로 휘두르며 달려드는 것과 유사합니다. 그러나 이 엉터리와 비일관성이 위협의 방법으로서 대단히 효과적입니다.


직접행동을 뉴욕에서 하는 경우와 유럽의 도시에서 하는 경우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국가권력은 뉴욕에서는 철저하게 통제해 왔습니다. 워싱턴도 그에 가깝게 통제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뉴욕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 뉴욕에서는 일정한 수의 사람이 집합하면 즉시 경찰대가 나타나 법을 강요합니다. 파리나 밀라노에서는 약간 틀립니다. 제노바 직후의 밀라노에서는 경찰대가 어느 시점에 한꺼번에 사라져 버려 데모대 마음 내키는 대로 하게 했습니다. 나는 유럽의 많은 도시에서 비슷한 상황을 여러 번 봤습니다. 어떤 때 경찰은 숨어 있다가 소수의 그룹을 공격하거나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그들의 행동은 산발적입니다. 남반구의 독재 국가들에서 대부분의 시간 동안 국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돌연히 대학살이 일어납니다. 세계제국의 진앙인 뉴욕은 국가가 항상 통제에 예민해, 일순간도 거리를 내주지 않는 드문 장소일지도 모릅니다. 어찌됐든 국가는 본성적으로 산발적인 것입니다. 우주론적 차원에서 국가는 절대성을 주장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회적인 통제의 차원에서 [절대적 체계를] 재생산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이것의 결론은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국가를 본질적으로 실현불가능한 유토피아적인 계획이라 하든, 혹은 많은 권력제도는 국가가 아니지만 그것들을 정의하는 말이 아직 없다고 하든.... 특히 국가가 이전과 같은 전체주의적인 논리(혹은 고전적인 '주권'이라는 의미)로 향하지 않는 오늘, 이것을 생각하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물론 '주권'이나 '왕권'은 국가 훨씬 전부터 존재했습니다. 인류학에서는 국가기구가 없는 곳에서(다시 말해 왕의 의지로 압력을 가할 수 있는 관료기구가 없는 곳에서) 왕이 복잡한 우주론적인 의례에 둘러싸여 있는 예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수단 남부의 실룩Shiluk이 그 한 예입니다. 그들은 나일강변에 살고 있는 양을 치는 사람들로 그들의 남쪽에 사는 인류학에서 평등주의적인 사회의 고전적인 예로 여겨지는 누어Nuer와 많이 비슷합니다. 그 차이는 실룩에는 왕이 있다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실룩의 왕은 거의 누구에게도 명령을 내릴 수가 없습니다. 누구보다도 많은 부인과 친척 등 부양가족을 거느리고 있다는 차이 밖에 없습니다. 그는 이 사람들을 배치할 수 있고, 싫어하는 사람을 공격하거나 분쟁이 있을 때 결정을 내리는 강제력으로서 나타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자신을 지상에 비를 내려 농업을 가능케 하는 하늘과 땅의 합체의 열쇠로 모셔 세우는 터무니없이 복잡한 의례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실제로 모든 농사는 그의 의례적인 행위에 맞춰 실행됩니다. 여기에는 국가의 강탈적인 측면과 우주론적인 측면 둘 다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 국가가 아닙니다. 실제 국가에서는 이미 충분히 확립된 어느 쪽의 요소가 다른 쪽을 제치고 지배적으로 되어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른바 '신성왕권'에서 왕은 몸이 땅에 닿거나, 태양을 바라보거나, 궁전에서 벗어나면 안 된다든지, (바콩고의 경우 등) 취임 후에는 거세되는 것과 같은 상당히 복잡한 의례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믿기 어려운 규약은 우주론적인 측면이 다른 것을 억누르고 있는 현상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벌써 그와 같은 지적이 있듯이 )그것들은 왕권에 대한 대중의 저항이 성공한 결과라고 간주할 수도 있습니다. 여하튼 이러한 의례화가 일어난다는 것은 실제적인 '주권권력' 혹은 '국가다운 권력'이 붕괴하는 때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실룩의 왕권과 같이 '국가가 되려고 하는 권력'이 이미 의례의 과잉에 의해 왕권의 기초를 제대로 만들어낼 수 없는 경우일 것입니다.
 

 

이 '주권'이라는 개념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것에 대해 논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의 '주권자'와의 관계는 그다지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실제의 '통치'의 힘이란 것은 매우 복잡한 것으로 무한한 형식을 취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근대국가라는 정통성 주장의 이면에 무수한 형태로 그림자처럼 붙어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는 '주권sovereignty'이 없는 '통치sovereign'가 있거나 국가기구가 없는 '통치권력'이 있거나 합니다. 우리가 대응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여러 요소는 실제로 반드시 대응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인류학의 이점중의 하나는 그것이 우리에게 '정치적인 것'의 보다 폭넓은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이미 여러 다양한 방식으로 국가권력을 무효화하는 것을 시도해왔습니다. 그 중 하나가 국가권력을 아주 복잡하고 내용 없는 의례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우주론적인 권력의 이미지가 지나치게 장대해져서 강탈적인 행동을 취하는 기초를 꺾어 버린 것입니다. 내가 여기서 하고 싶은 말은 결국 저항의 형식은 우리가 통상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풍부하다는 것입니다.

 

이밖에 뒤의 "전투규약"에 관련된 논의도 참 재미있다. 이건 나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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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스트 인류학의 가능성들[펌글]

적린님의 ["아나키스트 인류학의 가능성들 : 직접행동의 민주주의를 위하여" 참가 안내] 에 관련된 글.

 

관련글 목록

소개: 데이비드 그레이버를 소개합니다 :: 올 여름에는 그레이버랑 세미나를 하자

전문 번역: 승리의 충격 :: 역순의 혁명 :: 잠정적 자율지대: 마다가스카르의 유령-국가

일부 번역: 국가론에 대한 단상들 :: 고소 사부와의 대담 중 국가에 대한 부분

국역서: 가치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 (알라딘 링크임)

 

영어 원문

새로운 아나키스트들 (뉴 레프트 리뷰 - 맑스주의와 아나키즘의 비교)

이타주의자들의 군대 (글은 아직 안 읽어봤는데... 본인한테 언뜻 들은 내용. 군에 자원입대 하는 사람들은 활동가와 똑같은 이유에서 그렇게 한다!? 평범한 사람들이 왜 우경화되나?)

부채: 첫 5000년의 역사 (자본주의는 노예제의 한 형태?)

이외 위키피디아 페이지에 다른 글들의 링크 및 인터뷰 링크가 올라와 있음.

 

 

 ■ 제3회 연구공간 <수유+너머> 국제워크샾, “아나키스트 인류학의 가능성들 : 직접행동의 민주주의를 위하여”


오는 7월 13일 월요일부터 17일 금요일까지 매일 저녁 7시 데이비드 그레이버 선생님과 함께 하는 국제 워크샾이 열립니다. 반지구화 운동, 반전운동, 생태운동의 현장을 누비며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아나키즘의 정치학을 고민해 오신 선생님과 더불어 ‘빡세게’ 공부하는 프로그램입니다. 직접민주주의의 정치적 가능성과 아나키즘의 현재적 의미에 대해서 함께 고민하고 토론하며 공부하고자 하시는 모든 분들을 초대합니다.

 

■ 데이비드 그레이버(David Graeber) 선생님.


그는 아나키스트입니다. 그리고 인류학을 좋아합니다. 인류를 대상으로 하는 이 학문은 ‘정치’에 대한 낯설고 다양한 상상력을 발견하도록 우리를 돕기 때문입니다. 저항의 형식은 우리가 통상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풍부합니다. 제3회 국제워크샵은 인류학과 함께, 그리고 유쾌한 그레이버 선생님과 함께 우리 시대의 운동과 사유의 능력에 대해 질문합니다.


데이비드 그레이버 선생님께서는 『가치이론에 대한 인류학적 접근』(그린비,2009), Possibilities: Essays on Hierarchy, Rebellion, and Desire (AK Press ; September 1, 2007, 수유+너머 번역중), Fragments of an Anarchist Anthropology (Prickly Paradigm Press; April 1, 2004), Direct Action: An Ethnography(AK Press, 근간) 등을 쓰셨고, 2009년에는 '부채(Debt)'에 관한 책이 출간될 예정입니다.

 

■일정


공개강연 | 7월 13일 월요일 오후 7시_ <인류학과 그 가능성들 : 가치와 사회> (공간플러스)
집중세미나(1) | 7월 14일 화요일 오후 7시_ <국가와 그 외부> (강의실1)
집중세미나(2) | 7월 15일 수요일 오후 7시_ <권위와 행동> (강의실 1)
집중세미나(3) | 7월 16일 목요일 오후 7시_ <운동과 조직> (강의실 1)
집중세미나(4) | 7월 17일 금요일 오후 7시_ <선물과 공동체>(강의실 1)

 

■수강안내


월요일의 공개강연은 무료입니다. 집중세미나에 참가하시려면 회비를 입금하고 신청해 주세요.

수강회비 : 8만원
입금계좌 : 국민은행 363 002 0403 0007(예금주 : 안명희)
문의 : 정정훈 (010-3942-0748)

* 덧글 문의도 가능~ ^^

* 웹자보를 클릭하시면 참가 신청 게시판으로 이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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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민법 이상일 뿐인가? 현실이 될 수 있는가?

곰탱이님의 [거꾸로 된 세상(학생 글) ] 에 관련된 글.

 


똑같은 학생 글을 또 하나 올려 봅니다.^^

제목은 <만민법 이상일 뿐인가? 현실이 될 수 있는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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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민법 이상일 뿐인가? 현실이 될 수 있는가?>

 


공화국에서 제국으로 성장한 로마는 수많은 민족과 그들의 언어, 관습, 풍습 등을 포용해야만 했다.

따라서 서로 다른 이 이방인들을 '로마'라는 이름 아래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그들 모두를 아우르는

공통점을 찾아야만 했다.

법의 자질구레한 조문보다는 법의 기본 정신을 중시하는 형평법의 원리를 채택한 만민법의 등장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신과 이성 앞에서 모든 인간의 영혼은 평등하다는 자연법 사상에 기초한 만민법은 가히 혁명이라

부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소수의 철학자들 사이에서만 나타났고 대부분의 로마인들에게는 별 귀감을

주지 못했다.

만민법은 이상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로마 시민들은 로마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 즉 로마에서 살고 있는 노예, 외국인, 야만인에게도

시민권이 부여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자신들보다 '비천한 이들'이 자신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는다는 것에, 자신들이 지니고 있는

특권을 나눠야 한다는 것에 큰 불만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로마의 기득권층들 때문에 만민법은 실질적으로 실현되지 못한 것이다.

자유, 평등이라는 가치는 인간의 역망에 의해 사라질 수도 있다.

이는 로마 제국으로부터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만민법의 진정한 실현은 가능한 것인가?

 

오늘날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거대한 로마 제국과도 비슷하다.

국경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지금

우리에게도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고루 평등하게 적용될 수 있는 '만민법'이 필요하다.

그러나 만민법의 실현은 과거나 지금이나 쉽지 않다.

경제적 차이, 인종적 차이에 의해 우월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누어지고

다른 대우를 받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현실 앞에서 만민법의 진정한 실현이란,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이상의

국가 유토피아와 다름 없다.

만민법의 실현이 이상에 가까운 일일지라도 우리는 계속 만민법에 대한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된다.

로마가 내부의 통합에 실패해 무너졌듯이 우리도 서로 다름을 강조해 하나로 통합되지 못하고

와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법 앞에서 모든 사람들이 진실로 평등해지는 날이 오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서로 다른 언어와 역사 문화에서 오는 이질감을 거북하게 생각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는

포용력을 가져야 하고 서로 다름에 대한 편견을 버려야 할 것이며, 모든 사람에게 유효한

지구촌 윤리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몇몇의 철학자들에게만 귀감을 주었던 만민법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지구촌 시대에 걸맞는 합리적이고 올바른 법을 만드는 데 영감을 주고 있다.

지구촌 시대의 만민법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어쩌면 만민법 실현에

한발짝 나아간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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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에 대한 철학적 고찰.

이번 방학 때 변변치 않은 글을 하나 썼다...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부분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거칠게 정리해 보았다.

 

글의 들어가는 부분만을 싣는다.

관심 있는 블로거께서는 덧글에 메일 주소를 남겨 주시면 메일로 보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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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왜 클라우제비츠에 주목하는가.

 

근대 이후 자본주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 번의 세계 대전과 크고 작은 국지전들이 일어났으며, 이러한 전쟁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또한 전쟁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극단적인 폭력 형태를 띠어가고 있다. 그런데도 이런 극단적 폭력 형태의 전쟁을 막을 방도도, 그리고 막을 주체도 아직 없어 보인다. 역사 발전의 주체인 노동자 계급도 이 극단적 폭력 형태의 전쟁을 어찌 해보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전쟁은 헤겔이 말한 것처럼 세계화로 나아가는 도정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현실적인 상황이 이러한데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과연 클라우제비츠가 우리에게 주는 시사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렇게 전쟁이 극단적 폭력 형태를 띠는 것이 근대적 주체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군사 전략의 근대적 주체였던 국가-인민-군대의 통일체가 해체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해체는 민족국가의 국경이 해체됨을 의미하며, 민족국가 내에서 국가와 인민(그람시에 따르자면 국가와 시민사회)의 ‘동의’ 체계가 무너져 감을 의미하는 것이다. ‘동의’ 체계가 필요했던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첫째, 자본이 다른 자본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기 위해 민족국가 자본 형태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좀더 값싼 노동력으로 시장을 확보하고, 시장 확보에서 갈등이 첨예화되어 전쟁이 일어날 경우 자발적으로 전쟁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해서 동의 체계가 필요했던 것이다. 둘째, 소련을 위시한 사회주의 국가가 있을 때에는 그들 국가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적으로 노동자들을 비롯한 인민들의 불만과 저항을 통제하고 제도화하지 못했을 경우 국가의 정치권력이 걷잡을 수 없는 혼란 상태에 빠지게 될 수밖에 없다.

 

클라우제비츠는 이러한 근대적 주체의 해체를 상당히 우려하였다. 즉 그는 전쟁의 극단적 상승을 통하여 군사전략의 근대적 주체로서 국가를 정점으로 하는 국가-인민-군대의 통일체의 해체를 우려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우려는 현실화되고 있다. 근대적 주체의 해체는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 이론 체계에 이미 내재하고 있었다. 그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하였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는 자신의 『전쟁론』을 출판하기를 꺼려하였다.

 

그렇다면 이러한 근대적 주체의 해체를 통해서 새로운 주체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새로운 주체의 가능성이 곧바로, 필연적으로 현실화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20세기 초에 근대적 주체를 대신할 새로운 주체로 떠올랐던 사회주의자들과 노동자 계급이 전쟁에 자발적으로 참가한 뼈아픈 역사적 경험이 있으며, 오늘날에도 노동자 계급이(그들이 민간인이건 군인이건 간에) 이 전쟁에 지속적으로 참가하고 있음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주체의 가능성을 어떻게 현실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은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이 가지고 있는 아포리아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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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지금 건설하라, 21세기 사회주의>

 

# [책] <지금 건설하라, 21세기 사회주의> #


이 책은 미이클 레보위츠가 쓴 책(메이데이, 2008)이다.

이 저자의 책은 이미 한 권 소개 된 바 있다, <자본을 넘어 : 맑스의 노동자계급 정치경제학>으로.

이 책의 번역은 그리 깔끔하지 못하다.


이 책은 총 7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2,3,4장의 내용은 위에서 이미 소개된 책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이미 소개된 책에서 저자는 자본주의 사회의 총체성은 크게 2개의 운동과정으로 이루어지는데, 첫째 자본의 자기 증식 운동과정이며, 둘째는 노동자 계급 자신의 자기 생산 과정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맑스의 <자본론>이 미완의 저작으로 첫째 운동과정인 자본의 자기증식 운동 과정만이 기술되어 있을 뿐, 두 번째 운 동 과정의 노동자 계급 자신의 자기 생산 과정이 서술되어 있지 못하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그리하여 이 둘째 과정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며, 이 둘째 과정이야말로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는 토대이며, 새로운 사회에 대한 비전이라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이 책의 중심은 바로 노동자의 자기 생산을 어떻게 현실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에 집중되어 있다.

이 자기 생산이야말로 새로운 여성과 새로운 남성, 즉 새로운 인간을 창조해야 한다는 체 게바라의 생각과 일치하는 것이다.

이 새로운 인간의 생산의 현실화와 관련하여서 저자는 유고의 [노동자의 자주관리]에 주목한다.

그런데 이 자주관리는 7가지의 어려운 문제를 자기 안에 가지고 있다.

그 7가지 문제는 다음과 같다.

1. 기업 내에서 생각하는 사람들과 일하는 사람들의 분열을 어떻게 깨부술 것인가?

2. 판매가 하락할 때 노동자관리 기업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3. 상이한 기업의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에서 노동자관리의 역할은 무엇인가?

4. 자주관리기업의 노동자들은 실업자들과 배제된 계층에 대해 어떠한 책임이 있는가?

5. 노동자 자주관리체제에서 누가 노동자계급 전체의 이익을 책임지는가?

6. 노동자관리기업들의 파산을 허용해야 하는가?

7. 어떻게 노동자관리기업들과 사회 전체 사이의 연대가 직접적으로 기업에 통합될 수 있는가?


이러한 문제들이 발생하게 된 근본원인이 기업의 이윤을 그 기업에 속한 개별 노동자의 이익으로 환원하고자 한다는 데에 있다고 저자는 생각한다.

이는 저자의 탁월한 통찰력이며, 이 저자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왜냐하면 이런 방식은 철저하게 자본주의적인 방식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자본가가 노동자라는 이름으로 대체되었을 따름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기업의 이윤을 개별 노동자의 이익으로 환원하게 될 경우, 첫째, 각각의 기업들 사이의 경쟁은 불가피하게 되며, 둘째, 노동자 계급 내에서의 빈부 격차가 발생하게 되어 노동자들의 분열이 가속화됨으로써, 셋째, 이 분열을 중재하기 위해 국가 권력이 등장하게 된다.

그런데 이 국가권력과 개별 노동자 사이의 적대가 발생하게 되는데, 이는 곧바로 노동자 계급 전체의 이익과 개별 노동자의 이익 사이의 적대로 표면화하게 된다.

그리하여 노동자 자주관리 기업은 국가의 통제를 받게 되며, 이는 노동자 자주 관리 기업의 존재를 의문시하게 되어, 결국 이 자주 기업은 옛날 스탈린주의 식의 국유화로 넘어가게 되거나 아니면 자본화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이 차베스가 주도하는 베네수엘라 볼리바르 공화국의 혁명적 볼리바르 정책  49개 자체 내에도 깔려 있다고 저자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저자는 볼리바르 정책이 완전한 반자본주의 정책이 아니라는 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즉 베네수엘라 자국의 산업과 농업을 지반을 다지기 위하여, 즉 베네수엘라 일국적 자본가 계급을 창출하기 위한 정책들을 입안하면서도(이는 철저하게 자본주의적인 것이다), 새로운 인간의 생산(이는 사회주의적인 것이다)을 볼리바르 정책의 목적과 방향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볼리바르 정책이 가지고 있는 모순을 어떻게 해결해 나갈 수 있을 것인가?

저자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베네수엘라의 첫걸음은 기존의 국가에 대한 통제를 획득하는 것이었다(어떤 시인들의 아름다운 관념과는 반대로, 권력을 장악하지 않고서 세계를 변화시킬 수 없다). 그리고 그 국가는 이제 새로운 생산관계의 기초를 창출하기 위해 이용되고 있다,”

첫 번째 것은 국영기업의 형태로, 두 번째의 것은 각 지역의 협동조합 형태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 국영기업은 스탈린 식의 국영기업도,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국영기업도 아니다.

또한 각 지역의 협동조합 형태는 스탈린 식의 협동조합도 아니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각각 아무 관계도 가지고 있지 않은 개별적인 소집단도 아니다.

이 두 형태는 사회적 생산기업EPS의 모습을 가지는데, 이 생산기업은 각각의 공동체들이 자신의 필요를 집단적으로 확인하고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만큼, 전체 공동체의 필요와 목적에 진정으로 기초한 생산 활동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를 통해 인간 능력의 완전한 발현이라는 우리의 목적이 이루어질 수 있으며, 사회주의는 이 목적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경로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것이 현재 베네수엘라가 가지고 있는 의미이다.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21세기 새로운 사회주의의 특징이다.’ 이것이 저자의 말하고 있는 마지막 요지이다. 

 

*** 

일단 저자의 생각에 거의 대부분 동의하는 바이다.

그런데 저자의 생각을 좀더 밀어부쳐서 생각해 봐야 할 대목이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새로운 인간주체의 형성은 어디서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이는 노동자 자주관리 체제의 7가지 문제점이 왜 생겨나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와 직결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노동자 자주관리 체제에서도 새로운 인간주체가 형성되지 못해 7가지의 문제점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른 한편, 노동자의 자기 생산과 직접적으로 맞물려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노동자의 자기 생산은 저자에게는 곧바로 새로운 인간주체 생산과 연결되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 노동자의 자기 생산은 구체적으로 어디서, 어떤 방식을 통해 이루어지는가? 새로운 생산관계는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

이러한 문제에 대한 고찰 없이는 새로운 생산관계를 만들기 위한 변혁적 실천활동이 이루어질 수 없다. 노조를 통한 노동자의 직접적인 대 자본 투쟁으로는 새로운 생산관계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이는 역사가 증명해 주는 바이다. 오히려 자본의 내성을 강화시켜 주었는지도 모른다. 무엇이 문제인가? 왜 그렇게도 열심히 투쟁하는데도 맨날 패배이며, 위축되어 가는가? 노동자의 자기 생산은 곧 노동자의 노동력의 재생산, 새로운 생산과 맞물려 있다. 이 생산은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가? 이는 자본-노동의 관계와 아주 유사한 관계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성별 분업화된 자본주의 가부장제 아래에서 이 생산은 여성의 가사노동의 착취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러한 착취 관계 방식을 근본적으로 해체하고 새로운 노동자의 자기 생산 방식, 즉 새로운 생산관계의 창출을 위한 자기 변혁이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새로운 사회의 새로운 생산관계는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노동자 계급 스스로 성별 분업 체계를 해체하고 ‘여성 되기’를 통한 여성 해방의 과정 없이는 새로운 생산관계의 창출은 어렵다는 것이다.


둘째, 저자는 베네수엘라의 첫걸음이 기존 국가의 권력을 장악하여 그 국가를 통제하는 것이 새로운 생산관계의 창출을 위한 기초이자 전제(책 203쪽)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지만 자칫 오해를 살 만한 부분이 있다. 두 가지만 지적하도록 하겠다.

(1) 새로운 생산관계의 창출을 위한 수단으로서 기존 국가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오히려 기존 국가 권력 장악이 목적으로 둔갑하는 경향에 좋은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 자신의 삶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위한 수단일 뿐인 돈이 그 자체 목적이 되어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 현상이라 할 수 있다. 노동자의 경제주의 현상이 여기에 속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학생들에게 꿈이 뭐냐고 물어보면 열의 여덟 아홉은 좋은 대기업에 취직해서 돈 많이 버는 것이라고 말한다). 권력 획득이 하나의 수단이고 새로운 생산관계의 창출이 궁극 목적임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생산관계의 창출은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고 권력 획득이 궁극 목적이 되어 버린다. 그리하여 권력 획득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서슴지 않는 부르주아 정치 형태로 환원될 위험이 아주 많아지게 된다.

(2) 도대체 어떻게 기존 국가 권력을 장악할 것인가 하는 점에 관해서는 거의 말을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새로운 인간 주체 형성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문제이다. 새로운 생산관계를 통해 새로운 인간 주체를 어디서 만들 것인가의 문제이다. 이 문제는 노동자 계급이 자신의 생산관계를 새롭게 만드는 과정 속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는 문제이다. 기존 국가 권력 장악의 전제는 새로운 생산관계 창출 과정이며, 이 과정을 배제한 모든 논의는 공허한 것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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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되기와 계급투쟁.

아래의 글은 논문 중의 일부(첫머리)입니다.

혹시 관심 있어서 읽어보고 싶으신 분이 계시면

이메일로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잘 쓴 논문은 아니지만 열심히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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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 되기와 계급투쟁 #


1. 오늘날 맑스주의에서 왜 ‘여성 되기’가 핵심적으로 중요한 문제인가.


오늘날 맑스주의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곤혹스럽게 다가온다. 특히나 역사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노동자계급 중심성은 한마디로 뜨거운 감자처럼 보인다. 이런 노동자계급의 중심성은 크게 두 가지의 문제를 낳는다고 볼 수 있다. 하나는 ‘노동자계급(운동)의 보편성’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이 계급운동의 보편성에 대한 다른 모든 반자본 운동과의 연관성 문제이다. 이 문제들은 사실상 맑스주의 사적 유물론의 존폐와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먼저 노동자계급(운동)의 보편성을 살펴보자. 노동자계급(운동)의 보편성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노동자계급(운동)은 정말 보편적인가? 자본-임노동과의 관계에 있는 임노동자는 보편적 존재가 아니라 개별적 존재이다. 임노동자는 개별적으로 자신의 노동력을 가지고 시장에서 자본과 상품관계를 맺는다. 그렇기 때문에 상품관계에서 상대적 가치형태에 서 있는 임노동자는 개별적 존재이지 보편적 존재가 아니다.(주1-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맑스주의에서 노동자 계급의 보편성을 ‘노동자가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하는 것’에서 찾는다. 그런데 이러한 ‘보편성’은 자본주의 생산양식 내에서의 생산수단 유무의 구조에 의해 사회공학적으로 단순하게 주어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하자면 자본의 보편성을 통해서만 자신의 보편성을 드러낼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알튀세는 이러한 보편성을 지닌 주체를 ‘호명된 주체’로 불렀다. 이 보편성은 대단히 불완전하며 일면적이고, 알튀세에 따르면 허구적이다. 왜냐하면 알튀세에게 보편적 존재로서의 계급은 없기 때문이다. 추상적(분석적) 수준에서 보편적 존재로서의 노동자 계급은 가능할 수 있지만(그것도 불완전한 추상으로서 말이다), 현실적 수준에서 이 추상적 수중에 상응하는 보편적 존재로서의 노동자 계급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 또는 노동조합 이기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사회적으로 먹혀들게 되는 것이다. 다른 한편 이에 관해서 마이클 리보위츠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노동자들이 이질적인 인간들로 존재한다는 점을 생각해 보자. 그들 각각의 생산에 고유한 조건들이 지닌 차이점(자본 자체가 만들어 내는 분열뿐만 아니라)들을 감안한다면, 노동자들을 분열된 존재로, 즉 서로 경쟁하는 임노동자들로 - 자본에 대항하는 단일한 존재가 아니라 - 파악할 수 있는 구체적인 물질적 근거가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요컨대 분석상 노동자 계급을 단일한 존재로 파악한다는 것은, 실제로 노동자 계급이 자신을 단일한 존재로 인식하거나, 또는 단일한 존재로 행동해 나간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또한 노동자 계급이 그렇게 행동할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도 아니다).” 마이클 리보위츠, 『자본론을 넘어서』, 홍기빈 옮김, 백의, 1999, 255쪽. 이 문제는 다음에 자세하게 다루어 보도록 하겠다.) 그런데도 맑스주의에서는 노동자계급(운동)의 보편성을 이야기한다. 현실은 그렇지 않은데도 말이다.

맑스는 노동을 통해 사회적 관계로서의 인간이 생산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노동은 자본을 위해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노동을 수행하는 임노동자로서의 노동자는 여전히 로빈슨 크루소와 같은 순수한 개별적인 개인으로서의 노동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노동은 노동자 계급이 자기 자신을 생산하는 노동이 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치(자본)의 실체로서의 추상노동은 항상 노동자의 살아 있는 구체노동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이 추상노동은 노동자의 임노동이다. 그리고 이 임노동을 뒷받침하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노동은 여성의 가사노동이다.(주2-여기서 가사노동을 본래부터 여성의 담당이냐고 이의제기할 수 있다. 정당한 이의제기이다. 그런데 여기서 ‘여성’의 가사노동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러한 성별 분업이 일반적 경향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 뿐이다. 해체되어야 할 것은 바로 자본주의 하에서의 이러한 성별 분업이다. 다른 한편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가치=상품=화폐=자본>. 이것의 최고의 법률적 형태는 국가이다. 그런데 이 국가는 가부장적이며 남성 지배적인 국가이다. 왜냐하면 노동자의 임노동의 물적 토대는 바로 여성의 가사노동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가부장제에서 여성의 노동, 특히 가사노동은 남성의 화폐(임금)라는 사물의 형태로 소외된다.) 가사노동은 노동자 계급의 기존의 노동력 재생산뿐만 아니라 새로운 노동력 생산의 기초이다. 새로운 노동력의 생산은 질적으로 새로운 “생산력”으로서의 새로운 “인간”(주3- 맑스가 말하는 생산력은 인간 자신이다. K. Marx, Grundrisse, MEW 42, S. 599)의 생산이다. 그러므로 가사노동은 대자적 노동자 계급 또는 주체로서의 노동자 계급을 생산해 내는 물질적 기초이다. 그리고 이러한 계급의 계급투쟁의 발화 지점이라 할 수 있다.

성별 분업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리고 가사노동이 개별적인 여성의 몫으로 남게 될 때, 노동자의 자기 생산은 가사노동의 착취 구조를 통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또한 이렇게 생산된 노동자의 노동력은 다시금 자본의 착취 구조 속으로 편입된다. 이러한 것은 <가사노동(개별) = 노동자의 임금(사용가치)(보편) = 자본(보편)>의 등식으로 성립될 수 있으며, <가사노동(개별) --> 노동자의 임금(사용가치)(보편) --> 자본(보편)>이라는 일종의 먹이사슬 구조로 바뀌어 나타난다. 이런 구조 속에서 노동자 계급의 계급투쟁은 그 자체로 비민주적인 착취 구조를 자기 자신 안에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비민주적인 착취 구조를 깨나가는 것이 바로 여성-되기라고 할 수 있다. 여성-되기의 출발점으로서 가사노동의 사회화가 필요하다. 가사노동의 사회화는 가사노동을 새롭게 재조직하여 여성을 가사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여성 자신이 개별화, 원자화된 존재로부터 보편적 존재로서 새로운 인간관계를 끊임없이 형성시켜 나가면서 새로운 노동관계, 생산관계를 만듦으로써 성별 분업 체계를 깨는 것이다. 자유로운 개인으로서의 여성들의 자유로운 발전이 바로 생산력 발전의 토대이고, 이 생산력 발전이 ‘여성 되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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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 대한 철학적 고찰 2.

2. 새로운 저항 주체의 가능성


클라우제비츠는 애국심이 가지는 비합리적 요소의 이율배반 때문에 민족국가 내에서의 내전을 전쟁의 범주에서 배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내전은 인간학적 관점에서 볼 때 대외전쟁, 민족국가 간의 전쟁과 마찬가지로 순수하고 무차별적인 폭력의 형태가 아니라 제도적 폭력의 한 형태이다. 클라우제비츠가 피하고 싶었고 배제하고 싶었던 이 내전에 주목한 것은 맑스와 엥겔스였다. 맑스와 엥겔스는 이 내전을 통해 새로운 저항의 주체의 싹을 보았다. 이 내전은 바로 다름 아닌 계급투쟁이다.

클라우제비츠에 따르면 내전은 정치의 도구가 아니라 정치를 전복시키는 반(反)정치의 도구이다. 클라우제비츠에 있어서 정치적인 것은 초역사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헤겔과 마찬가지로 근대적 주체로서의 민족국가를 최고로 완성된 초역사적 국가 형태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클라우제비츠가 전쟁에 대한 분석을 전쟁의 역사적 사실을 통해서 한 것과 모순되는 것이다. 이에 반해 맑스는 이러한 모순을 보았고 근대적 주체로서의 민족국가를 역사적 산물로 보고서 민족국가에 대항하는 새로운 저항 주체를 통해 새로운 사회 형태인 코뮌을 보았다. 그러므로 정치적인 것에 대항하는 반정치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인 국가를 파괴하기 때문에 역사적인 것이다.

그러나 맑스의 내전은 클라우제비츠의 전쟁 개념을 반성적으로 활용한다. 첫째, 오직 ‘내전’으로서 사회적 전쟁(social war)만이 절대전쟁 또는 근본적으로 적대적인 전쟁이 된다. 그것은 극단에 도달하고, 절멸의 위험이 작동한다. 따라서 그것은 ‘본연의 의미에서’ 전쟁이다. 둘째, 이러한 전쟁은 ‘정치’를 구성하고 클라우제비츠의 정식을 뒤엎지만, 클라우제비츠에게는 단지 경향(공포)으로 남아 있던 것을 논리적 결론으로 나아가게 한다. 즉 그 결론은 정치의 ‘수단’으로서 폭력은 정치적인 것에 반작용하며, 정치가 전쟁의 계속이 되게 한다는 생각이다. 나아가 이것은 전쟁 ‘주체’ 표상의 총체적인 변화와 분리할 수 없다. 이제 주체는 더 이상 제도적․사법적 주체 즉 국가가 아니며 오히려 내재적인 사회적 주체다. 그렇지만 맑스는 계급투쟁이라는 약호를 통해 클라우제비츠의 명제 또는 문제를 치환함으로써 클라우제비츠의 명제와 문제를 부활시키게 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는 지배계급의 편에 서서 계급투쟁의 조직자로서 직접적으로 기능한다. 그렇다면 피지배계급인 프롤레타리아는 어떠한가? 맑스는 ‘군대’로서의 계급으로 나아가길 주저했지만, 내전으로서의 계급투쟁에는 이미 군대로서의 계급, 군대 형태의 혁명정당으로서의 계급정당이라는 개념의 가능성이 내재해 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클라우제비츠의 아포리아를 맑스도 만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맑스는 프롤레타리아의 투쟁이 심지어 혁명을 준비하고 자본가계급을 전복할 때라도 ‘방어적’ 투쟁이라고 설명한다. 이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임금노동자를 절대적 빈곤과 실업에 빠뜨리며 그들의 생존을 위협하며, 더 나아가 임금노동자가 사회를 부양하고 유지한다는 의미에서 사회의 재생산과 생존을 위협한다는 생각과 결합된다. 이 때문에 자본주의에 대한 공격이 사회 내부의 적에 대항하여 사회를 방어하는 것과 동일시될 수 있다. 이는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프롤레타리아는 자신이 현재 몸담고 살고 있는 부르주아 사회를 위협하는 부르주아에 대한 저항을 하는 것이지 부르주아 사회 자체에 대해 저항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곧 부르주아 사회 자체를 방어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것을 전략적, 준(準)전략적으로 고려해 보면,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은 자신의 힘, 의식, 조직을 경쟁하는 부르주아 사회조직으로부터 이끌어 낸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방어적 투쟁은 최후에는 공격적 투쟁으로 바뀌게 된다. 공격적 투쟁으로 바뀐다는 것은 절멸, 궤멸을 동반하는 것인데, 이러한 궤멸, 절멸은 곧 부르주아의 절멸, 궤멸이다. 부르주아의 절멸, 궤멸은 곧 부르주아를 대신할 무엇을, 즉 부르주아 사회 또는 자본이 자신을 대변할 대리자로서 또 다른 인격체 또는 화신을 호명하게 된다. 이 또 다른 인격체 또는 화신은 노동자 계급을 대표하는 당이 된다. 이러한 것은 [노동자 계급 대중(상대적 가치형태) = 자본가(등가형태) = 자본(등가형태)]이라는 도식으로부터 [노동자 계급(상대적 가치형태) = 당(등가형태) = 자본(등가형태)]의 도식으로 옮겨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될 때 노동자 계급은 더 이상 새로운 저항 주체로 나타나지 못한다. 내전을 전쟁으로 인정하고, 이 내전을 절대전쟁으로까지 밀고 나갈 경우 클라우제비츠가 근대적 주체인 국가의 해체의 위험이라는 아포리아에 직면하게 되는 것처럼 맑스의 경우에도 역시 새로운 저항 주체인 노동자 계급의 대상화라는 아포리아에 직면하게 된다. 

다른 한편 내전을 극단적인 절대전쟁으로서 계급투쟁으로 유비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상당한 난점을 지니게 만들었다. 1848년과 1872년(파리코뮌)에 일어난 현실의 내전은 대량학살의 비극적 경험이었다. 이때 부르주아 국가는 프롤레타리아를 절멸시키기 위해서 식민지 전쟁을 포함해 대외전쟁 기간 동안 형성된 군사 장치를 손쉽게 사용했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는 결코 ‘군대’가 아니었다. 게다가 20세기는 물론이거니와 19세기 동안 민족전쟁은 계급투쟁에게 자리를 내 주지 않았다. 민족전쟁은 서로 다른 나라의 지배계급이 ‘자신의’ 노동자가 서로를 절멸하도록 만들었고,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로 노동자를 기만해 왔다. 이러한 것은 다시 클라우제비츠와 그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였다.

마오쩌둥은 이러한 요청을 자신의 ‘유격대의 지구전’에서 받아들인다. ‘유격대의 지구전’은 클라우제비츠의 전쟁 개념에 대한 맑스주의적인 방식의 탈환이자 정치적인 것에 대한 클라우제비츠의 관념에 대한 대안으로 간주될 수 있다. 마오쩌둥은 맑스주의 전통에서 가장 일관된 클라우제비츠주의자였을 뿐만 아니라 클라우제비츠 이후 가장 일관된 클라우제비츠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마오쩌둥은 클라우제비츠의 공리 중 일부가 아니라 전체를 모두 재해석했기 때문이다.

마오쩌둥의 핵심적인 생각은, 처음에는 제국주의 적국과 지배 부르주아는 군대가 있지만 프롤레타리아와 농민은 군대가 없기 때문에 방어 전략이 강요되지만, 이는 결국 공격 전략으로 역전되고 ‘가장 강한 적’의 실제 절멸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구전’(또는 전쟁의 대장정)이라고 불리는 전쟁의 지속시간은 ‘마찰’의 변증법적 등가물이며, 농민 대중들 내부에서 피난처를 찾는 혁명적 노동자와 지식인의 소규모 핵심에게 필요한 시간이다(이 시간은 전쟁을 빨리 끝내려는 서방의 부르주아 시간이 아니라 무한정의 시간으로서 전쟁을 지속시키려는 시간이다. 무한정의 시간은 무제한의 공간에 달려 있다). 그들은 이 시간 개념을 통해서 세 가지 결과를 동시에 추구한다. 첫째, 침략군의 고립된 분견대에 맞서 지역적 게릴라 공격을 감행함으로써 적군의 희생을 대가로 스스로 무장한다. 둘째, 전장을 전국적 수준으로 확장함으로써 전략의 기술을 ‘배운다.’ 셋째, 헤게모니를 외부의 권력(식민지 정복자 또는 민족의 특권계급)으로부터 내재적 권력으로 이동하고, 피지배계급들의 공통이익을 대변함으로써 최종적으로 ‘인민 내부의 모순을 해결하고’ 인민을 인민의 적(또는 당의 적)으로부터 분리한다. 공산당은 바로 그 내재적 권력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클라우제비츠주의자로서 마오쩌둥에게도 난점이 두 가지 측면에서 남게 된다. 첫째, 이것은 특정한 역사적 조건에서 계급 이데올로기를 통해 인민을 군대 또는 ‘인민군’의 내부로부터 변형한 조직인 공산당의 내재적 권력, 즉 혁명정당이 스스로 국가가 되는 조건에서만 ‘방어에서 공세’로 전략적 반전을 완전히 수행할 수 있으며 정치적 대행자로 남을 수 있다는 사실에서 유래한다. 둘째, 마오쩌둥이 세운 전쟁의 첫 번째 원칙은 생존 그 자체였다. 생존을 위해서는 그 생존을 위협하는 존재는 궤멸 또는 절멸되어야 한다. 이렇게 해서 전쟁의 최종 목표는 적의 완전한 궤멸 또는 절멸이며, 이는 전쟁이 절대전쟁으로 나아감을 뜻한다. 그런데 농민은 군대가 아니다. 군대가 된다는 것은 부르주아의 무장 수단으로 무장을 하며, 부르주아 조직의 편재로 군대를 구성하며, 부르주아 전쟁 전략을 배움으로써 절대전쟁 형태로 나아갈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이때 군대, 공산당은 부르주아 정치조직과 유사한 형태로서 농민을 비롯한 인민의 대의체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당과 인민의 분리가 일어나며, 삶과 의식의 분리가 일어난다. 다시 말해 계급과 계급의식 사이의 괴리와 모순이 발생하게 된다. 즉 이데올로기로서 계급의식은 인민의 삶을 직접 반영하는 의식,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인민의 삶으로부터 독립된 자율적인 계몽의식이 되며, 인민은 계몽 대상이 된다. 

물론 마오쩌둥에게서도 긍정적 측면이 있다. 노동자와 농민 대중들을 물로 삼아 지구전을 펼치는 전략이다. 그러나 노동자와 농민 대중들이 물로 될 수 있는 까닭은 레닌이 말했던 것처럼 오직 전쟁에 대한 정치적 공포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계급의식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전쟁에 대한 정치적 공포만이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부르주아 사회 자체 안에서 자신의 삶을 이어가고 있으며, 부르주아 사회 자체가 무너져서는 자신의 삶을 이어갈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때 전쟁에 대한 정치적 공포는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지배계급뿐만 아니라 계급의식을 가지고 있는 혁명적 노동자와 지식인에게도 해당된다. 그러므로 노동자, 농민 대중들은 상당히 기회주의적이며 언제든지 등을 돌릴 수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당’은 항상 계급의식을 지니지 못한 노동자, 농민 대중들로부터 일정하게 분리될 수밖에 없으며 부르주아 국가와 마찬가지로 그들을 계몽적으로 조직할 수밖에 없다. ‘당’은 근대적 주체인 부르주아 국가처럼 ‘이성의 화신’이 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 있다. 그것은 혁명정당이 ‘권력 장악’을 삼가거나, 또는 적의 완전한 파괴라는 ‘최종’ 목적까지 혁명전쟁을 수행하는 것을 그만 두는 것이며, 따라서 ‘절대전쟁’을 ‘제한전쟁’으로 어떻게든지 축소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안은 클라우제비츠의 ‘전쟁’ 개념의 범주 자체가 어떻게 유지될 수 있는지를 설명해야 하는 문제가 남는다.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착취당하고 억압받으면서 자신의 생존을 위협받고 있는 인민들에게 그냥 참고 견디라는 이데올로기에 부응하는 것에 다름 아니며, 궁극적으로는 아무 것도 하지 말자는 말로 비쳐진다.

이러한 아포리아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는 자본주의 생산양식 자체 안에서 그 생산양식과는 전혀 질적으로 새로운 [외부 영역]으로서의 사회체, 즉 코뮌을 형성하는 것이다. 이 코뮌은 맑스가 말하는 ‘자유로운 각 개인들이 연대하는 사회’이며, 이러한 사회는 가타리가 말하는 ‘소수자 되기’, ‘여성 되기’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 이 소수자 되기나 여성 되기는 소수자 되기란 끊임없이 상대적 가치형태라는 개별로서의 좌변 항과 등가형태라는 보편으로서의 우변 항의 위치를 지속적이고도 반복적으로 바꾸는 과정 속에 있는 것이다(이는 들뢰즈의 ‘차이의 반복’과 유사하다 할 수 있다. 들뢰즈는 동일성보다는 차이의 존재론적 우월성을 강조한다. 더 나아가 들뢰즈는 동일성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다. 이는 들뢰즈가 반변증법론자이자 반헤겔주의자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반레겔주의자로서의 맑스와 유사한 점은 바로 상품의 가치라는 동일성이 바로 질적인 차이를 가지고 있는 두 상품 사이의 관계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는 데에 있다. 그러므로 맑스에게서 자기 동일성을 추구하려면 차이의 생성을 전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동일성이란 차이를 내포하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러므로 헤겔처럼 완전한 동일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들뢰즈가 비판하고 있듯이 개념적인 차원에서만 가능할 뿐 현실에서는 가능하지 않다. 맑스 역시도 이 점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머리로 서 있는 헤겔의 변증법을 바로 뒤집고자 한 것이다. G. 들뢰즈, 『차이와 반복』, 김상환 옮김, 민음사, 2004, <서론 : 반복과 차이> 참조). 이것은 보편이 개별이 되며 개별이 보편이 되는 끊임없는 과정이며, 또한 다시 보편으로 돌아갔을 때 이 보편은 이전의 보편과는 내용상 질적으로 차이가 있는 보편이며, 개별 역시도 이전의 개별과는 내용상 질적으로 차이가 있는 다른 개별이다. 왜냐하면 질적으로 새로운 인간의 생산과정이며, 생산력이 질적으로 바뀌는 과정이며, 그에 따라 새로운 환경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며, 이 새로운 환경은 곧 새로운 인간을 생산해 내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를 비롯한 인민은 '부르주아 사회의 방어'가 아니라 '새로운 사회체인 코뮌에 대한 방어'를 수행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코뮌은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계급의식을 지닌 노동자계급을 지속적으로 생산해 낼 수 있으며, 방어전으로서의 지구전을 펼쳐 나갈 수 있게 된다. 코뮌과 자본주의 사회는 더 이상 동일한 사회가 아니다. 그러므로 클라우제비츠를 지속적으로 괴롭혔던 아포리아를 해결할 수 있다. 이제 전쟁(부르주아 사회)은 정치(코뮌)의 자율성에 의해 영향을 받으면서 자신의 본성을 본질적으로 변화시켜 나감으로써 절대전쟁으로 나아가지 않고 제한전쟁으로 축소되면서 결국 전쟁 자신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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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 대한 철학적 고찰 1.

1. 근대적 주체의 해체에 대한 고찰

 

근대 이후 자본주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 번의 세계 대전과 크고 작은 국지전들이 일어났으며, 이러한 전쟁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쟁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극단적인 폭력 형태를 띠어가고 있다. 이런 극단적 폭력 형태는 인종청소, 경제의 파멸로 인한 기근과 절대빈곤, 대재앙(외견상 자연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대규모의 살인과 같은 유행병, 가뭄, 홍수, 지진 등) 등 잔혹한 폭력의 지대를 낳고 있으며, 결국 세계를 생명의 지대와 죽음의 지대로 분할하는 ‘초국경’(원한의 경계선)을 만들어 내는 형태를 띤다. 더 나아가 세계적인 시민성을 창출할 수 없는 자본주의의 정치적 조건으로 인하여 죽음의 지대의 인민은 불필요한 잉여로 간주되고, 외부세계는 예방적 반봉기라는 관점에서 이 지대에서 벌어지는 상호제거 또는 절멸을 조장하거나 개입하는 형태를 띤다. 이렇게 전쟁이 극단적 폭력 형태를 띠는 것은 근대적 주체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군사 전략의 근대적 주체였던 국가-인민-군대의 통일체가 해체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해체는 민족국가의 국경이 해체됨을 의미하며, 민족국가 내에서 국가와 인민(그람시에 따르자면 국가와 시민사회)의 ‘동의’ 체계가 무너져 감을 의미하는 것이다. ‘동의’ 체계가 필요했던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첫째, 자본이 다른 자본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기 위해 민족국가 자본 형태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좀더 값싼 노동력으로 시장을 확보하고, 시장 확보에서 갈등이 첨예화되어 전쟁이 일어날 경우 자발적으로 전쟁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해서 동의 체계가 필요했던 것이다. 둘째, 소련을 위시한 사회주의 국가가 있을 때에는 그들 국가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적으로 노동자들을 비롯한 인민들의 불만과 저항을 통제하고 제도화하지 못했을 경우 국가의 정치권력이 걷잡을 수 없는 혼란 상태에 빠지게 될 수밖에 없다.

클라우제비츠는 이러한 근대적 주체의 해체를 상당히 우려하였다. 즉 그는 전쟁의 극단적 상승을 통하여 군사전략의 근대적 주체로서 국가를 정점으로 하는 국가-인민-군대의 통일체의 해체를 우려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우려는 현실화되고 있다. 근대적 주체의 해체는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 이론 체계에 이미 내재하고 있었다. 그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하였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는 자신의 『전쟁론』을 출판하기를 꺼려하였다.

클라우제비츠의 이론적 체계는 크게 4가의 명제로 구성된다고 할 수 있다. 1) 전쟁의 정의로서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계속”이다. 2) 전략으로서 ‘방어’는 본질적으로 ‘공격’이나 ‘공세’보다 우월하다는 명제이다. 3) ‘절대 전쟁’과 ‘제한 전쟁’의 구분이다. 4) 전쟁의 역사에서 다른 전략적 요인에 대한 ‘도덕적 요인’의 궁극적인 최우선성이다. 이러한 4개의 명제는 서로 씨줄 날줄로 얽혀 있는데, 이 체계를 통해 클라우제비츠가 근대적 주체의 해체를 피하려고 했지만, 피할 수 없는 난점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다.


1) 전쟁의 정의로서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계속”이다.


이 명제는 『전쟁론』의 분리된 두 곳, 1편과 8편에서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첫째, 확실히 전쟁이 ‘계속해서’ 정치적 목적을 추구하고, ‘다른 수단을 통해’ 또는 ‘다른 수단을 도입함으로써’ 정치적 목적을 추구하는 하나의 방식이라는 생각을 강조한다. 이때 다른 수단은 위협이나 압박뿐만 아니라 현실의 폭력, 심지어 극단적 폭력의 수단이다. 이때 정치의 수단은 비폭력적인데, 어떤 상황에서는 이러한 비폭력적 수단으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어려울 때 다른 수단인 폭력적 수단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면 정치 행위는 절대적 한계에 도달한다. 이렇게 폭력적 수단을 사용하는 절대적 한계에 도달하면 정치적 주체의 존재가 엄청난 위험에 빠질 수가 있으며, 비폭력적 성격의 정치 특성과 논리가 전복될 수 있는 위험에 빠진다는 함의를 가지게 된다. 이것은 곧 전쟁의 수단 사용이 정치에 반작용하거나 정치를 전혀 다른 성격으로 변화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이것은 변증법적 진술로 제시될 수 있는데, 다시 말하자면 정치(비폭력)(즉자)--> 전쟁(폭력)(대자) --> 정치(폭력)(즉자대자)라는 진술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곧 전쟁의 정치에 대한 ‘자율성’ 또는 ‘독립성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되었을 때 정치는 자신의 본성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게 되는 것이며, ‘동의’를 바탕으로 하는 근대적 주체의 해체를 의미하게 된다. 이는 뒤에서 언급하겠지만 4)의 도덕적 요인의 최우선성이라는 명제와 모순되는 것이다. 다른 한편 이는 동의의 관계에 있는 화폐관계에서 자기 증식이라는 목적을 폭력적으로 관철하는 자본관계로 변화한다는 맑스의 생각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이 명제는 다음과 같이 해석될 수도 있다. 즉 한편으로 정치가 자신의 본성을 변화시키지 않으면서 전쟁이라는 폭력적 수단을 사용할 수 있고, 전쟁의 폭력적 수단이, 전쟁의 논리가 정치의 본성을 벗어나서 독립적인 논리가 되지 않을 때에만 정치적 수단으로 남는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여기서 정치가 비폭력적, 폭력적 수단 모두를 사용할 수 있다는 정치의 합리성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정치는 자기 자신 안에 ‘폭력’을 내재함으로써 언제든지 변증법적인 위기와 갈등을 맞을 수 있으며, 이는 곧 ‘동의’를 바탕으로 하는 근대적 주체의 해체라는 결과를 맞을 수도 있다는 의미를 가지게 된다. 이 또한 전쟁의 정치에 대한 ‘자율성’ 또는 ‘독립성’을 함의한다고 할 수 있다.


2) 전략으로서 ‘방어’는 본질적으로 ‘공격’이나 ‘공세’보다 우월하다.


클라우제비츠에게서 방어의 우월성은 전술 수준과 관련된 것도 아니고 정치적인 것과 관련된 것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방어의 우월성은 전략의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수준에서 전형적으로 존재하고 전략 이론의 전체 대상은 이 명제를 확립하고 여러 환경과 조건에 따라 방어의 전략적 우월성을 규명하는 것이다. 방어의 우위라는 개념은 정치적 목적(Zweck)과 무관하고, 정치적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게 하는 군사적 목표(Ziel)와 관련할 뿐이다. 그리고 군사적 목표가 달성되었을 때 정치적 목적을 달성할 수 있으며 정치적 합리성이 현실화되는 것이다. 이때 군사적 목적으로서의 전략적 사고와 전략적 계획의 주요 목표는 궁극적으로 전장에서 전략의 자율성을 정확히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전략의 자율성은 또한 근대적 주체의 해체와 연결된다. 여기서 클라우제비츠는 방어의 우월성을 이끌어내는데, 이것은 대단히 역설적이고 모순적이다. 클라우제비츠에게서 공격 전쟁은 정치적 목적에 종속되어 있음으로 해서 정치에 대해 자율적이지 못하다. 이때 전쟁은 극단적 상승으로 인하여 극단적 폭력 형태를 띠게 된다. 반면에 방어 전쟁은 정치적 목적에 종속되어 있지 않음으로 해서 자율적이다. 이때 전쟁은 극단의 폭력 형태를 띠지 않는다. 공격 전쟁의 경우 앞에서 말한 것처럼 결국에 정치가 전쟁에 종속되는 결과를 낳으며 전쟁은 정치에 종속된다는 자신의 논리에 위배되는 것이다. 클라우제비츠는 이러한 논리의 모순을 통해 방어 전쟁의 우월성을 이끌어내고자 하였다.

그러나 방어 전쟁도 단순히 방어하는 데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방어 전쟁은 그 성격상 마지막에 가서 ‘공격’적인 전쟁으로 전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전쟁이 형식적으로라도 끝나려면 적을 격퇴시켜야만 하고, 이때 적의 격퇴는 적의 섬멸 또는 궤멸이라는 형태를 띠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이는 스탈린그라드 전투나 베트남전 등을 통해 알 수 있다. 이제 방어 전쟁은 방어를 넘어서서 공격으로 전환되고, 전쟁과 정치 사이의 자율적 관계는 정치가 전쟁에 종속되는 관계로 바뀌게 된다. 이렇게 해서 공격 전쟁에 대한 방어 전쟁의 도덕적 우월성도 사라지게 된다.


3) ‘절대 전쟁’과 ‘제한 전쟁’의 구분


클라우제비츠는 ‘절대’전쟁과 ‘제한’전쟁을 구분한다. 그런데 절대전쟁이 아닌 것을 ‘제한’전쟁과 ‘현실’전쟁으로 구분했다. 그에게서 제한전쟁과 절대전쟁은 논리적으로 상반되는 두 극점이며 현실전쟁은 이 두 극점 사이에서 움직이고 다양한 단계와 결합을 보여 준다. 이러한 전쟁들 사이의 관계성은 헤겔의 변증법적 체계에 따라 다음과 같은 도식으로 나타낼 수 있다. 제한전쟁(즉자) --> 현실전쟁(대자) --> 절대전쟁(즉자대자).

 제한전쟁은 18세기 절대왕정 시기에 정부 간의 전쟁으로 나타났다. 이 전쟁은  군사 카스트의 지휘 아래 용병, 직업군인, 모병된 신병에 의해 강압적으로 수행되었고, 이 전쟁의 목적은 이른바 유럽의 세력 균형을 바꾸고 적대적 이익을 실현하는 것으로서 정의상 제한전쟁이었다. 이 제한전쟁은 전쟁이 정치에 종속된 형태의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을 통해 나타난 전쟁은 새로운 전쟁으로서의 절대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극단의 상승을 불러 일으켰으며, 전 인민(민족)의 무장을 동반했고 나폴레옹은 이를 유럽 대륙의 헤게모니를 위한 제국주의의 도구로 이용했다. 그 이후 무장한 민족들은 서로의 실존을 위해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계속하였다. 그러므로 이 전쟁은 정치가 전쟁에 종속된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클라우제비츠는 제한전쟁에서 절대전쟁으로의 전개가 역사적으로 비가역적이며 ‘전쟁의 절대화’의 방향으로 전개되는 것이라고 여겼다.

클라우제비츠는 두 가지 측면에서 절대전쟁으로 향하는 경향에 저항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첫째, 절대전쟁은 이른바 전 인민(민족)의 무장으로 인해 이른바 ‘절멸’의 전쟁으로 나아감으로써 근대적 주체로서의 국가(정치권력)의 존립에 엄청난 위협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전 인민(민족)의 무장화는 ‘절멸’의 전쟁을 벌이고 있는 국가에 대해 불만을 품고 국가를 전복시킬 수 있는 위험이 너무 크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곧 정치가 전쟁에 종속되어 정치의 최우선권이 파기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클라우제비츠는 근대적 주체로서의 국가의 형성과 전쟁의 역사적 흐름을 통한 전쟁의 현상을 분석하기 위하여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했던 간에 헤겔의 변증법에 기대고 있다. 그러나 근대적 주체로서의 국가의 존립과 유지라는 측면에서는 칸트에게로 돌아가는 듯이 보인다(클라우제비츠는 불안한 귀족 가문 출신의 프러시아 장교로서 주로 칸트적인 철학교육을 받았다). 즉 클라우제비츠는 자신의 조국인 프러시아가 현상적으로 최고로 완성된 형태의 입헌군주제 국가이고 이 국가를 해체하고자 하는 것은 순수 이성의 오류이며, 이 국가를 지탱하기 위한 정언 명령으로서 도덕적 요인에 최우선성을 두고자 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4) 전쟁의 역사에서 다른 전략적 요인에 대한 ‘도덕적 요인’의 궁극적인 최우선성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의 역사에서 다른 전략적 요인들보다 ‘도덕적 요인’에 궁극적인 최우선성을 놓는다. 이 ‘도덕적 요인’은 전쟁과 정치의 접합의 결과물이다. 이에 따라 ‘도덕적 요인’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전쟁의 비합리적 측면에서의 요인이다. 이 요인은 ‘동의’에 기반한 합리성의 영역을 넘어서 있다. ‘동의’에 기반하지 않는 이 요인은 전장에서 자신의 생존을 이어나가기 위해서 난폭한 죽음의 위험과 대치할 수 있게 하는 개개 병사의 ‘용맹’, 전장 상황의 무한한 복잡성을 독자적인 직관으로 대체하고 어떻게 움직일지 결정하는 총사령관의 자질 등으로 나타난다. 둘째, 정치의 합리적인 측면에서의 요인이다. 이 요인은 국가의 ‘지성’ 또는 국가의 정치적 합리성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합리성은 비합리성의 영역에 있는 개인의 생존의 문제를 ‘동의’를 바탕으로 한 근대적 주체인 국가의 유지, 보존의 문제로 통합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는 전쟁의 극단적 상승을 억제하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때 각 병사 개인의 용맹은 ‘애국심’으로 나타나며, 이 애국심은 민족적 능력의 배경이 되는 ‘근대적’ 의미에서의 정치적인 것이다. 또한 총사령관의 자질은 전쟁을 ‘제한전쟁’으로 만드는 능력, 즉 수단과 목적 간의 균형을 맞출 수 있는 개인의 능력으로 구현된다.

이렇게 볼 때 첫 번째 전쟁의 비합리적인 측면에서의 도덕적 요인은 두 번째의 정치의 합리적 측면에서의 도덕적 요인으로 지양되어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게 되면 전쟁은 전 인민의 무장을 통해 절대전쟁으로 나아갈 것이며, 그리하여 근대적 주체인 국가는 무장한 전 인민에 의해 해체될 위험이 아주 높기 때문이다. 또한 방어 전쟁의 도덕적 우위뿐만 아니라 정치의 합리적인 도덕적 요인이 전쟁의 비합리적인 도덕적 요인 속으로 사라짐으로써 도덕적 요인 자체가 야만으로 치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이 첫 번째 도덕적 요인으로부터 두 번째 도덕적 요인으로의 승화는 전쟁의 ‘정치화’라는 의미에서 방어 전략과 방어의 반격으로의 전환에서 사활적인 요소이다. 그러나 이렇게 승화된다고 하더라도 애국심은 방어 전략의 자율성으로 인하여 국가가 조정은 할 수 있지만 지배할 수 없는 비합리적 정서이다. 왜냐하면 이 애국심은 전쟁의 비합리적인 도덕적 요인인 용맹을 토대로 하고 있으며, 자신의 내부에 용맹의 불씨를 여전히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도덕적 요인은 정치의 합리성을 위협할 수도 있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애국주의는 국가(지배계급)에 대한 충성과 동일시될 수 없으며 오히려 국가를 전복할 수 있는 요소로 전환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클라우제비츠의 딜레마였던 것이다. 그리고 민족국가가 일반적으로 당면한 정치적 문제의 군사적, 전략적 등가물이었다. 어떻게 봉기를 제도화할 것인가? 어떻게 대중들에게 고삐를 채울 것인가? 이러한 문제는 결국 맑스주의에서 계급의식의 문제, 그리고 국가장치와 이데올로기의 문제로 연결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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