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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장. 새로운 지식의 확산(16세기 초 : 독일과 네덜란드)

17장. 새로운 지식의 확산 (16세기 초 : 독일과 네덜란드)

 

 

▲ 이탈리아 거장들의 위업 3가지-북유럽의 평가 ▼

- ① “과학적인 원근법의 발견”

- ② “아름다운 인체를 완벽하게 표현하도록 하였던 해부학에 관한 지식”

- ③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품위 있는 아름다운 모든 것을 대표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고전 시대의 건축 형식에 관한 지식”

- 이러한 지식의 충격은 그러나 건축가들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왜냐하면 건축은 회화와 달리 대단히 기능적인 측면이 강하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건축물들이 ‘공공’ 건물이었다. ‘공공’이라는 말은 중세 가톨릭교회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러므로 건축은 중세 가톨릭교회의 이념을 현실화하는 기능적 차원에 머물러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 그러므로 이탈리아로부터의 “이 새로운 유행”이 “이탈리아를 방문하고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고자 원했던 군주와 귀족들의 줄기찬 요구에서 비롯”되었지만, “건축가들은 이런 새로운 양식의 요구를 대단히 피상적으로만 따르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원주(圓柱)나 프리즈를 여기저기에 갖다 붙이는 식으로, 다시 말하자면 그들의 풍부한 장식적인 모티프에 약간의 새로운 고전적인 형식을 가미함으로써 그들이 가지고 있는 새로운 건축 이념에 대한 그들의 지식을 과시했다. 건물의 본체는 고딕식으로 전혀 손을 대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다.” (341쪽)

 

 

▲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 : 1471-1528) ▼

- 그러나 화가들은 건축에서의 기능들에 매어 있을 수 없었다. 이미 반 에이크와 같은 15세기 북유럽 화가들의 현실화(자연을 구체적이고 세세하게 묘사, 즉 자연의 모방)라는 문제의식을 이어받아 그 현실화를 새로운 미술 원리로서 자기화하려는 충동과 노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 뒤러는 이탈리아로의 “여행 중에” “사물을 주의 깊게 관찰하였고 알프스 계곡의 아름다운 풍경을 수채화로 옮기기도 하고 만테냐(pp.256-9)의 그림을 연구하기도 했다. 결혼을 하고 공방을 열기 위해서 다시 뉘른베르크로 돌아왔을 때 그는 북유럽의 미술가가 남유럽에서 배울 수 있는 모든 기법적인 성과들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소화하고 있었다.” (343쪽)

 

 

▲ 뒤러의 <용과 싸우는 성 미가엘>(도판 220, p.344) ▼

- 이 목판화에서 나타난 “뒤러의 상상력과 대중들의 관심은 중세 말엽 독일에서 무르익어 결국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폭발한, 교회 제도에 대한 일반적인 불신과 불만을 반영”하는 것일 수도 있다. (343쪽)

- 이 목판화는 “성 요한의 계시록을 묘사한 일련의 대형 목판화”인데, “최후 심판 날의 공포와 그에 앞선 여러 가지 징후와 불길한 조짐들의 무시무시한 광경”을 “힘 있고 강력하게 시각화”시키고 있다. (343쪽)

- “이 위대한 한순간을 표현하기 위하여 뒤러는 종래의 전통적인 포즈를 모두 버렸다. 살려둘 수 없는 적과 싸우는 영웅을 종래와 같이 우아하고 유유자적한 모습으로 그리지 않았던 것이다. 뒤러의 성 미가엘은 일정한 포즈를 취하며 공격을 감행하지 않는다. 그는 필사적인 노력으로 분투하고 있을 뿐이다. 그는 큰 창으로 용의 목을 찌르려고 온 힘을 다해 두 손을 사용하고 있고 그 힘찬 몸짓이 화면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 이 천상의 싸움터 아래에는 뒤러의 유명한 서명과 함께 고요하고 평온한 풍경이 전개되어 있다.” (345쪽)

 

 

▲ 뒤러의 <풀밭>(도판 221, p.345) ▼

- “자연을 거울에 비친 것처럼 충실하게 재현하는 것임을 몸소 보여주었던 얀 반 에이크 이래, 지금까지 어떤 예술가가 했던 것보다도 더 끈기 있게, 그리고 충실하게 자연의 아름다움을 관조하고 자연을 모사하는 것이 뒤러의 목적이었음을 그의 습작이나 스케치를 통해 알 수 있다. …… 예를 들면 뒤러의 토끼 그림(p.24, 도판 9)이나 풀밭의 일부분을 그린 수채화(도판 221)와 같은 것이다.” (346쪽)

- “뒤러는 자연을 모사하는 완전한 기술을 얻으려고 노력한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그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는 유화와 동판화와 목판화로 삽화를 그려야 했던 성경의 이야기를 보다 더 실감나게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346쪽)

 

 

▲ 뒤러의 <예수 탄생>(도판 222, p.347) ▼

- 고딕 미술은 성경 이야기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그 성경 이야기를 <자연의 모방>이라는 새로운 기법을 통해 묘사한다는 의미를 가지는 작품이 <예수 탄생>이라 할 수 있다. 즉 이 둘이 아주 자연스럽게 동화․통일된 것이 뒤러의 <예수 탄생>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이러한 결합은 <예수 탄생>에서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것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본다. 고딕 미술의 전통은 성경 이야기의 인물들로 나타나는데, 이 “인물들은 정말 작고 거의 중요치 않게 보인다. 이 그림을 보면 낡은 헛간에 쉴 자리를 마련한 마리아가 아기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으며 요셉은 우물에서 물을 길어 좁은 물통에 붓느라고 분주하다. 배경에서 경배를 올리고 있는 목동 한 사람을 찾아보려면 대단히 세심하게 그림을 음미해야 하며 또 이 기쁜 소식을 온 세상에 전하는 전통적인 천사의 모습을 하늘에서 찾아보려면 확대경이 있어야 할 판이다.” (346쪽)

- 그러나 이 성경 이야기의 인물들의 배경인 “단지 낡고 무너진 담장”과 “이미 허물어진 외양간의 울퉁불퉁한” “금이 간 회벽”, “맞물리지 않은 기왓장들, 부서진 틈바구니에서 나무들이 자라고 있는 벽, 지붕 대신 씌운 너덜너덜한 벽, 그 위에 집을 짓고 사는 새”들이 “바로” 이 그림의 “주제인 것”처럼 “꼼꼼히” 묘사하고 있다. (346쪽)

- 이렇게 볼 때, 인물들과 배경의 결합에서 주된 것은 배경이라 할 수 있으며, 이 배경은 자연의 모방이라는 새로운 기법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동판화에서 뒤러는 예술이 자연의 모방을 추구하고 시작한 이래로 고딕 미술의 발전을 총합하고 완성시킨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의 마음을 이탈리아 미술가들이 부여한 고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346쪽)

 

 

▲ 뒤러의 <아담과 이브>(도판 223, p,348) ▼

- “고딕 미술이 거의 도외시되었으나 이제 관심의 전면으로 부상한 새로운 목적을 바로 고전 미술이 부여했던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는 인체의 표현이었다.” (347쪽)

- “여기에서 뒤러는 반 에이크의 아담과 이브(p.237, 동판156) 같이 꼼꼼하고 충실하게 묘사된 경우조차도 실제 자연에 대한 단순한 모방이 남유럽 미술 작품들을 돋보이게 하는 할 수 없는 아름다움의 요소들을 창출해 내기에는 불충분하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되었다.” (347쪽)

- “라파엘로는 이러한 문제에 당면했을 때 마음속에서 떠오르는 아름다움의 ‘어떤 이념’에 비추어 답을 구했는데(p.320), 그 이념은 그가 고전적인 조각과 아름다운 모델들로 수년 간 연구하는 동안에 익힌 것들이었다.” 그러나 뒤러는 “무엇이 인체의 아름다움을 만드는 것인가를 가르쳐 줄 수 있는 확실한 법칙을 찾아 나서게” 되었는데, “그러한 법칙을” “인체의 비율에 관한 고전 시대의 저술을 통해”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347쪽)

- 뒤러는 “인체의 올바른 균형과 조화를 찾기 위해서 인체를 과도하게 길게, 또는 넓게 그림으로써 인간의 체격을 왜곡시켰다. 평생 동안 몰두했던 이러한 연구의 첫 번째 결과 가운데 아담과 이브를 그린 동판화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아담과 이브>이다. (349쪽)

-다른 한편 “뒤러가 울퉁불퉁한 나무들로 이루어진 숲의 어두운 그늘을 배경으로 희고 섬세하게 모델링된 인체의 분명한 윤곽을 돋보이게 하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알게 되면 우리는 남유럽의 미술의 이상(가장 아름다운 인간 신체의 표현)을 북유럽의 토양에 이식시킨 최초의 진지한 시도에 감탄하게 된다.” (349쪽)

 

 

▲ 뒤러에 대한 소결론 ▼

- 뒤러의 4개의 작품을 통해서 뒤러의 화가로서의 고민의 진행방향을 가늠해 볼 수 있다.

- 먼저 도판 220의 <용과 싸우는 성 미가엘>에서 전통과 현실을 결합시키고자 한 뒤러의 의도가 기계적인 결합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 뒤러는 이러한 기계적 결합을 넘어서서 유기적인 조화와 통일을 위해 노력하게 되는데, 그 노력의 일환으로 도판 221 <풀밭>이 나타나게 된다. 이 <풀밭>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성경 이야기(전통)를 보다 더 현실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 이러한 노력을 통해서 나타난 작품이 도판 222의 <예수 탄생>이다. 성경 이야기의 일부인 예수의 탄생을 그 당시의 일상생활 속에서 표현하고자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 그런데 성경 이야기의 주된 부분은 이야기 내용의 주체(subject)인 인물들이다. 이러한 인물들을 생명력이 충만한 현실성을 가지면서도 가장 완벽한 아름다움을 지녀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간이 따라야 할 가장 완벽하게 아름다운 존재(Type)인 성인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아름다움을 추구한 결과로 나타난 것이 도판 223의 <아담과 이브>이다.

 

 

▲ 마티아스 그뤼네발트(Matthias Gruünewald) ▼

- “위대함과 예술적인 기량에 있어서 뒤러에 비견할 수 있는 유일한 독일 화가”인 이 사람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거의 알려진 바가 없고, 이 “화가가 그렸다고 확신되는” “작품들은 통상 ‘그뤼네발트’라는 라벨이 붙게 되었다.” (350쪽)

- “그는 이탈리아 미술의 위대한 발견들을 잘 알고는 있었지만 그가 생각하는 미술의 이념에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한도 내에서만 그것들을 활용했다.” (353쪽)

- “그에게 있어서 미술은 (뒤러처럼) 아름다움의 숨겨진 법칙을 찾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목적, 즉 중세의 모든 종교 미술의 목적인 그림으로 설교를 해 주고 교회가 가르친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었다. 이젠하임 제단화의 중앙 패널(도판 224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p.351)은 이 절대적인 목적을 위해서 다른 모든 문제들을 희생시켰음을 보여 준다.” (353쪽)

- 그 예로 “인물상의 크기가 상당히 다르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십자가 밑에 있는 막달라 마리아의 손과 예수의 손을 비교해보기만 해도 그 크기에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 이러한 문제에 있어서 그뤼네발트는 르네상스 이래로 발전하여 온 근대 미술의 법칙들을 거부하고 인물들의 중요성에 따라서 그 크기를 변화시켰던 중세와 원시 시대의 원칙들로 의도적으로 되돌아간 것이 분명하다.” (353쪽)

-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구세주의 뻣뻣하고 참혹한 모습에는 이탈리아 미술가들이 생각하는 그런 아름다움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다. 그뤼네발트는 수난절의 설교자처럼 이 고통스러운 장면의 무서움을 우리들에게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353쪽)

-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가 근대 미술의 원칙들을 모두 버린 것은 아니다. 그가 필요하다면 이 원칙들을 적용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도판 225(<그리스도의 부활>, p.352)이다.

- 이 그림에서 그뤼네발트는 다양한 색채를 사용하고 있으며, 이 색채들을 통해 “휘황찬란한 빛을 남기고 무덤에서 막 솟아나와 승천하는 것 같이” 보이는 “그리스도”를 표현하고 있다. (354쪽)

- 다른 한편 “땅 위에 쓰러져 있는 군인들의” 모습 사이에서 원근법이 사용되고 있다. 그리스도의 무덤 앞에 있는 군인들과 뒤에 있는 군인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렇게 입체성을 가짐으로써 그리스도의 부활이 한낱 이야기 거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인 사실임을 강조함으로써 신도들에게 믿음에 대한 각성을 다시 한번 강조하는 종교의 목적을 잘 전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루카스 크라나흐(Lucas Cranach : 1472-1553) ▼

- "뒤러 세대에 세 번째로 유명한 미술가“가 크라나흐이다. (354쪽)

- 크라나흐는 “해묵은 산림과 낭만적인 풍경을 가지고 있는 알프스 북쪽 산기슭에 매혹되어 있었다.” “1504년에 크라나흐는 이집트로 도피하는 성(聖) 가족을 그렸다(도판 226 <이집트로 피난 중의 휴식>, p.354)” (355쪽)

- “이 시적인 새로운 구상은 로흐너의 서정적인 미술 정신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p.272, 도판 176).” (355쪽)

 

 

▲ 알브레히트 알트도르퍼(Albrecht Altdorfer : 1480?-1538) ▼

- “알트도르퍼는 숲과 산을 누비고 다니며 풍우에 시달린 나무와 바위의 형태를 연구했다. 그가 남긴 많은 수채화와 동판화, 그리고 유화 몇 점(도판 227, <풍경>)에는 아무런 이야기도 담겨 있지 않으며 인물이 하나도 없다.” (356쪽)

-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변화이다.” “중세에는 종교적인 테마이든 세속적인 테마이든 분명한 이야기 거리를 다루지 않는 그림은 거의 상상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356쪽)

 

 

▲ 얀 호사르트(Jan Gossaert) 또는 마뷰즈(Mabuse : 1478?-1532) ▼

- “독일의 뒤러처럼 적어도 새로운 지식을 배우려고 노력했던” 16세기 초엽 “네덜란드의 화가들은 옛날 장식에 대한 집착과 새로운 것에 대한 애정 사이에서 심한 갈등을 껶어야만 했다.” (356쪽)

- “도판 228(<성모를 그리고 있는 성 루가>)은” 마뷰즈의 “작품으로서 그러한 갈등을 특징적으로 보여 주는 한 예이다.” (356쪽) 이 그림에서는 성경 이야기의 인물들과 그 배경이 따로 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을 곰브리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왜 하필이면 성 루가가 성모상을 그리는 데 겉보기는 화려하지만 외풍이 있을 듯한 텅빈 궁전의 중정에 자리를 잡았는지 의아스럽게 생각되기도 한다.” (356쪽)

- “그 결과 이 그림은 확실히 대단한 매력을 가지게 되었으나 북유럽과 이탈리아의 모델들이 가지고 있는 단순한 조화미(색채를 가지고 인물이나 배경의 구성․배치를 조화롭게 통일시킨 회화의 원리)는 결여되어 있다.” (356쪽)

- 다른 한편, 이 그림은 15세기, 16세기 초 북유럽과 이탈리아의 새로운 기법이 기계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인물들을 그린 방식은 얀 반 에이크나 그를 따르던 사람들의 전통”을 따르고 있고, 그 배경은 이탈리아 방식, 즉 “과학적인 원근법에 대한 능숙한 솜씨, 그리고 고전기의 건축에 대한 조예와 능숙한 명암 처리 방법”에 충실히 따르면서 그것을 “과시하려 한 것 같이 보인다.” (356쪽)

 

 

▲ 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 : ?-1516) ▼

- “이 화가에 대해서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356쪽)

- 그렇지만 “이 시기의 가장 위대한 네덜란드 미술가들” 중의 한 사람인데, 보스는 “독일의 그뤼네발트와 같이 남유럽에서 밀려오는 새로운 물결에 휩쓸리기를 거부”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가장 위대한 네덜란드 미술가의 반열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 (356쪽)

- “그뤼네발트와 마찬가지로 보스는 현실을 가장 신빙성 있게 표현하기 위해서 발전되어 온 회화의 전통과 새로운 수법들이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세계를 그럴 듯하게 표현하는 수단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보스는 지옥의 광경을 소름끼치게 묘사한 화가로 유명하다.” (356쪽)

- 도판 229-30(<천국과 지옥>)을 보면 알 수 있다.

- “중세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괴롭히던 공포심을 구체적이고 실감나는 형상으로 표현하는 데 성공한 미술가는 역사상 보스 한 사람뿐일 것이다. 이러한 업적은 아마도 새로운 시대정신이 미술가들에게 그들이 본 것을 재현하는 방법을 마련해 주었고 반면에 구시대의 이념이 의연히 살아남아 있었던 바로 그 순간에서만 가능할 수 있었을 것이다.” (3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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