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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규범 윤리학 #
- 의미 : 당위에 관한 학문이라는 의미.
‘~을 해야 한다’, ‘~이어야 한다’ 등의 도덕 판단으로 표현.
- 이러한 도덕 판단의 기초, 토대 : <이성>
- 그런데 <이성>의 의미나 그 기능(또는 작동 방식)은 시대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이성>의 의미나 작동 방식은 시대적인 인간의 삶․문화 형태와 밀접한 연관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 또한 인간의 삶․문화 형태는 <이성>의 <대상>인 <인간 자신과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어떻게 파악하느냐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 그런데 세계에 대한 이성의 파악은 궁극적으로 세계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에 대한 법칙성, 즉 필연성을 파악하는 데 있다. 이러한 필연성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두 가지 형태로 나뉘게 되는데, 그 하나는 인간 삶의 필연성, 즉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윤리적 당위성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자연의 법칙이 가지고 있는 필연성, 즉 사실관계가 가지고 있는 필연성에 관한 것이다.
-고대에서는 이 둘이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즉 <자연법칙 = 윤리>라는 도식 관계에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는 것이다.
- 그러나 이후로 가게 되면 인간이 자연 존재이면서도 여타의 다른 자연 존재들과는 구별된다는 특성에 따라서 <자연법칙 ≠ 윤리>라는 도식 관계에 초점을 두게 된다. 이는 인간을 여타의 다른 자연 존재들과 구별되는 인간의 또 다른 특성을 강조하게 되는 의미를 가지게 되는데, 그 특성을 ‘자유의지’로 보았다.
- <자연법칙 = 윤리>라는 도식은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에 방점을 두고서 대체로 윤리의 보편성, 절대성을 강조하는 목적론적 윤리설과 법칙론적 윤리설, 공리주의 등의 규범 윤리학에서 나타난다.
- 다른 한편으로 <자연법칙 ≠ 윤리>라는 도식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방점을 두고서 대체로 윤리의 특수성과 상대성을 강조하는 상대론적 윤리설 등의 메타윤리학에서 나타난다.
- 아래에서는 규범 윤리학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한다.
** 고대 그리스 윤리학 1 : 플라톤
- 플라톤의 윤리학은 플라톤의 이데아 이론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 <이성>은 이데아 세계의 진리를 파악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인간은 바로 그 진리에 따라서 <그렇게 살아야 한다.>
- 그런데 이데아 세계는 우리가 경험하는, 변화하는 현실 세계의 원본이면서도 이 현실계와 분리되어 있다.
- 그렇다면 <이성>은 이 이데아 세계를 어떻게 파악할 수 있을까? 이성은 현실세계를 분석하고 쪼개고 따져서 이데아 세계를 파악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데아 세계는 현실 세계와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성은 오로지 도를 깨치듯이 아는 방법, 즉 직관을 통해서 이데아 세계를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이는 그 당시의 <신탁>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 그런데 이성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인데, 이 당시의 인간은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도시국가(폴리스)의 시민 성인 남성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 고대 그리스 윤리학 2 : 아리스토텔레스
-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데아 세계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플라톤의 생각을 비판하였다.
예) ‘개(dog)임’ 그 자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은 범신론적이고 경험론적인 형상론과 밀접한 연관 관계를 가지고 있다.
- <이성>의 목적은 <순수형상>, 즉 <신>의 뜻을 파악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이 <신>에 따라서 <그렇게 살아야 한다.>
- 그런데 이 <신>은 어떻게 파악될 수 있는가? 이 <신>은 이데아 세계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와 분리되어 있지 않고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러므로 이 <신>은 <직관>을 통해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세계를 분석하고 쪼개고 따지는 연역적 방법>을 통해 파악되는 것이다.
- 그런데 이 <직관>은 그것이 참된 것이니, 거짓된 것인지 확인․증명될 수 없다. 예를 들어 어떤 개인 또는 몇몇이 신의 뜻을 빌러 아주 잘못된 방향으로 인간의 삶을 이끌 수 있다는 것이다.
- 이 <신>을 파악하는 것이 우리 인간 삶(인생)의 궁극적 목적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그리고 이 궁극적 목적을 행복이라 이르는데, 이 행복은 현실 세계 저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 세계를 연역적으로 파악하는 <이성적 활동의 과정 속>에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 그리고 이러한 것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중용이란 현실 세계의 이런 저런 변화에, 그리고 그 변화에 따라 나타나는 임의적인 주관에 휘둘리지 않는, 그러한 변화를 일으키는 불변의 이성 법칙에 따르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물질적인 삶에 휘둘려 살지 않고 <과학적인 태도>의 삶을 견지하는 것을 말한다.
- 그런데 이런 변화의 현실은 필연적인 신의 뜻이므로, 당시의 모든 정치․경제․계층적 삶은 신의 뜻에 의한 것이다.
** 고대 로마의 윤리학 1 : 스토아학파
- 고대 로마의 문명은 고대 그리스의 문명을 계승․발전시킨 문명이다. 그러므로 고대 로마의 윤리학 역시 고대 그리스 윤리학의 전통을 계승․발전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 이러한 고대 로마의 윤리학 가운데 하나가 스토아학파가 내세우는 윤리학이다. 스토아학파가 내세우는 윤리학은 금욕의 윤리학이다.
- 고대 그리스의 윤리학의 쟁점은 참된 진리가 어느 정소에 존재하느냐에 따라 이성의 작동 방식이 달라지는 데 있다. 그런데 스토아학파가 문제 삼는 것은 <어떻게 하면 이러한 이성이 잘 발휘될 수 있도록 할 수 있는가>였다.
- 스토아학파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성 작동 방식이 암묵적으로 전제를 깔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현실 세계의 물질적인 변화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 이것은 곧 물질적인 측면에서 금욕주의를 추구해야 하는 것이고, 금욕주의를 통해 마음의 평정, 고요함(부동심)을 얻은 후에야 이성이 가장 잘 발휘될 수 있으며, 이것이 곧 과학적 태도라고 일컬어질 수 있다.
- 과학적 태도․실천은 곧 윤리적 태도․실천에 다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 고대 로마의 윤리학 2 : 에피쿠로스학파
- 절제와 평정을 강조했던 스토아학파와는 달리 에피쿠로스학파는 쾌락주의를 주장했다.
- 에피쿠로스학파의 <쾌락>은 <자유의지의 실현>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 에피쿠로스학파는 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학파와는 달리 자연의 필연적 인과율을 거부하는 비결정론적인 고대 그리스 원자론자의 생각을 이어받고 있다. 왜냐하면 자연의 필연적 인과율이 인간의 자유의지의 가능성을 제한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신의 의지, 뜻(자연법칙)을 그대로 따르는 것은 인간 이외의 여탸 다른 생명체와 인간 사이의 어떠한 구별․분리를 가능하게 하지 않는다. 이렇게 될 때 ‘인간의’ ‘윤리’는 성립될 수 없다. ‘인간의’ ‘윤리’가 성립되려면 인간 이외의 여타 다른 생명체와 구별될 수 있는 특성이 인간에게 존재해야 한다. 그러한 특성이 바로 ‘자유의지’라 하겠다.
- 자유의지는 자연법칙을 파악하는 능력 이외의 것이다. 자연법칙을 파악하는 능력은 자연을 분석하고, 쪼개고, 따져서 그 본질을 찾아내는 능력이다. 이렇게 해서 파악된 여러 개별적인 자연법칙 그 자체를 그대로 따르는 것은 결론적으로 동물의 삶의 방식과 구별되지 않는다. 인간은 단순히 이러한 법칙들에 따라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법칙들을 자신의 삶의 목적에 맞게 종합․통일시킨다. 이렇게 종합․통일시켜서 자신의 삶의 목적을 현실화하는 것이 자유의지의 실현이라고 할 수 있겠다.
- 그런데 자유의지의 실현은 이성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에피쿠로스학파의 윤리학 역시 이성을 통한 자유의지의 실현이라는 목적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이때의 이성은 분석하고, 쪼개고 따지는 능력이 아니라 종합하고 통일시키는 능력이 된다.
- 또한 동시에 이러한 능력은 과학적 실천의 기초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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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위는 이해와 대립하는 것입니다. 당위는 이런 것이죠.린도스 사람 에우아고라스의 아들 클레오불로스의 말
1. 적도가 최선
2. 아버지를 공경할 것
3. 신체와 혼을 유지할 것
4. 즐겨 듣는 자가 되고 말을 많이 하는 자가 되지 말 것
5. 무지보다는 박식을
6. 불길한 말 듣기를 삼갈 것
7. 덕과는 친하고, 악과는 남이 되라
8. 불의를 미워하고 경건을 지킬 것
9. 시민들에게 최선의 것을 충고할 것
10. 쾌락을 이겨낼 것
반면 이해는 이런 것입니다.
플라톤(DK10A2)
저로서는 바로 그것, 즉 '자신을 아는 것'이 절제라고 얼추 말하지요, 또 나도 그러한 잠언을 델포이 신전에 헌정한 분과 같은 생각입니다. "너 자신을 알라"와 "절제하라"는 것은 - 그 잠언이 의미하는 바나, 또 내가 주장하는 것처럼 - 사실 같은 말이긴 하지만, 아마도 어떤 이는 다르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저로서는 '무엇이든 지나치지 말라', '보증, 그 곁에 재앙'과 같은 후대의 잠언을 헌정한 이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너 자신을 알라'라는 잠언을 하나의 충고라고 생각할 뿐, 신전에 들어서는 자들을 위한 신의 인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그들 역시 아주 유익한 조언들을 신에게 바치려고 그러한 잠언들을 새겨 바쳤던 것이지요.
카르미데스 164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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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에 대해서는 아는게 별로 없어서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서 잠시 말씀드리겠습니다.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 윤리학, 형이상학 등을 썼습니다. 그런데 이런 학문들이 지금의 학문처럼 분리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고 하나의 체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사람을 이해해야하는데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에 수준 높은 교육을 받았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 밑에서 공부하기 위해 아테네에 가는데, 당시 플라톤의 아카데미아는 강의와 토론을 위한 공간만이 아니라 학자들의 만남의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20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플라톤 밑에서 학문을 정진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외국인이라는 신분적 한계때문에 아테네의 정치에 직접 참여할 수 없었지만, <정치학> 집필과 강의를 통해 학문적 차원에서 정치에 관한 독자적인 이론을 제시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이 관심을 가지는 질문은 무엇을 탐구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탐구하느냐입니다. 논리학은 탐구의 방법론입니다. 그의 논리적 분석은 실재(reality)를 개념적으로 재생산하는 사고에 대한 분석입니다. 논리적 분석은 궁극적으로 실재와 진리 인식을 목적으로 합니다.
자연학은 자연의 운동과 정지의 원리를 자기 속에 갖고 있는 실체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라고 형이상학에서 규정합니다. 철학이 질료와 분리되는 실체를 다루는데 비해, 자연학은 질료와 분리될 수 없는 실체를 다룹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학을 통해 자연 그 자체가 무엇인가를 규명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자연의 본질인 운동 또는 변화의 고찰을 중심으로 그 조건과 관계와 원인에 대해 논하고, 그것과 더불어 무한과 장소, 시간을 다룹니다. 사물의 생성 및 소멸과 질료적 구조를 다루는 학문이 자연학, 즉 현재의 과학입니다. 인간도 자연이죠.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을 모든 것이 그것 때문에 존재하는 목적 telos라고 보았습니다. 자연은 본성 혹은 본질이라는 뜻도 있죠. 만사가 요행이고 우연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것은 부수적인 원인일 뿐 자체적인 원인에 앞설 수 없다고 합니다. 자연은 방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연은 질료로 여겨지기도 하고 형상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에게 있어 생성, 변화, 운동은 질료가 그 목적인 형상을 실현하는 과정으로 해석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자연은 단순히 세계에 내재하는 운동의 원리일 뿐 아니라, 세계와 사물의 목적을 위한 활동 원리이기도 합니다.
형이상학에서는 자연 다음으로 오는 것들, 존재의 문제를 다룹니다. 그의 형이상학은 존재의 우선적인 범주인 실체와 관계합니다. 실체란 무엇인가. 그에게는 개별자들이야말로 진정한 실체입니다. 그러나 그가 개별자가 진정한 실체이자 유일하게 진정한 실체라고 말할 때, 그는 보편자가 그 자체로서 분리된 실체라는 플라톤주의적 독트린을 거부하는 것이지, 사물 안에 있는 형상적 또는 종적 요소라는 의미에서의 보편자가 실재적(real)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 맨 처음을 좋음과 목적으로 시작합니다. 그 다음에는 놀랍게도 최고선과 정치학에 대해 말합니다. 윤리학인데 왜 정치학 얘기를 하느냐. 좋음에는 최상의 좋음이 있는데 그것이 정치라는 것입니다. 자신은 정치를 못했으면서도 정치가 가장 좋다고 합니다. 그래서 폴리스 안에 어떤 학문들이 있어야만 하는지, 또 각각의 시민들이 어떤 종류의 학문을 얼마나 배워야 하는지 정치학이 규정한다고 합니다. 왜냐면 정치학은 실천적 학문이기 때문입니다. 시민들이 입법을 하기 위해서는 정의에 대한 앎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정치학의 목적이 인간적인 좋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최상의 좋음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윤리학은 무엇인가, 윤리학은 직역하면 품성, 성격에 관한 논의들입니다. 이것은 <윤리학>에서는 정치학으로, <정치학>에서는 거꾸로 윤리학으로 말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윤리학과 정치학은 같은 것입니다. 왜냐면 정치는 개인이 모여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치를 잘하려면 개인이 훌륭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윤리는 당위가 아니라 탁월함, arete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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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쿠로스 학파의 형성은 당시 그리스의 정치현실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에피쿠로스 학파의 시조인 에피쿠로스는 알렉산더 왕이 죽은 이후 권력투쟁이 벌어지면서 그리스는 피폐화되고 그리스를 지탱하던 중간층도 점차 빈민화됩니다. 따라서 그리스의 민주주의도 함께 흔들렸고, 정치학이나 윤리학도 쇠퇴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개인주의가 대두합니다.이것은 중국의 명말청초의 상황과 매우 비슷합니다. 명말청초는 격변기였습니다. 이민족인 청나라의 침략으로 명나라 말기의 정치 상황은 환관의 발호와 국가재정의 파탄, 격렬한 당쟁 등으로 혼란에 빠집니다.
이러한 비참한 정치현실과는 달리, 명대에는 상품경제의 괄목할 만한 발전이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지역간의 교류도 활성화되고 사람들의 시야가 넓어지고 생활과 소비문화에 큰 변화를 가져옵니다. 달라진 물적 환경 앞에서 중국 봉건 통치의 기반을 떠받쳐오던 예교와 도덕 관념도 점차 변모합니다.
가치관의 변화는 명분을 상실한 유학의 교조적 권위를 부정하고, 자신들을 둘러싼 질곡에서 벗어나려는 인간성의 해방과 개성의 발견에 눈을 뜹니다. 여기에 암담한 정치 현실에 대한 환멸은 지식인들에게 염세적 은둔 풍조를 부추깁니다. 그들은 백성을 교화하고 임금을 보필하는 재도지기로서의 문학을 전면거부하고, 소품의 새로운 양식을 통해 삶의 진실을 발견하고, 제도의 질곡과 지식인의 허위의식을 정면으로 고발 풍자합니다.
마찬가지로, 에피쿠로스 역시 새로운 공동체를 꿈꾸게 됩니다. 그는 아테네에 있는 정원을 사들여서 학교를 세우고 죽을 때까지 '정원' 공동체에서 활동합니다. '정원'의 구성원은 여자와 노예는 물론 창녀도 속해 있었기 때문에 에피쿠로스를 비웃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의 철학의 목적은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고통을 야기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피하고자 했기 때문에 기존의 교육이나 공적인 일도 거부하고 개개인이 오로지 자신과 공동체만을 의지해서 살아야한다고 주장합니다. 에피쿠로스가 말한 아타락시아는 마음이 동요되지 않고 평안한 상태를 말합니다. 따라서 마음을 동요시킬 수 있는 외부의 자극은 적극적으로 차단되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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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다시 돌아가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중용도 아리스토텔레스가 실제로 중용에 대해 어떻게 말했는지 찾아봐야하는데 집에 있지만 관두고, 플라톤이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을 절제로 해석했다는 것에 대해서 말씀드릴께요. 절제란 사람마다 달라요. 매달 백만원 버는 사람과 매달 천만원 버는 사람에게 절제란 다를 수밖에 없어요. 자신의 능력에 맞게 소비하는 것이 절제겠죠. 아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님은 이 글을 직접 작성하셨는지, 아니면 어떤 글을 퍼오신건지, 퍼오셨다면 출처를 밝히셔야하고, 어떤 글을 읽고 그 글을 바탕으로 쓰셨다면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철학사를 이해하는것은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데 너무 급히 작성하신 것은 아닌지, 급하게 레포트를 제출해야한다면 큰 무리가 없지만 다른 사람도 보는 블로그에 이런 글을 올려놓으시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 제 판단입니다. 동의하지 않으셔도 좋고요, 자신이 공부해서 아는 만큼만 말하는 것이 진보를 위한 한걸음이라고 생각합니다.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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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에 대한 설명도 그래요. 플라톤의 국가를 안 읽어봤지만 적어도 제가 알기로는 플라톤은 능력만 있으면 여자에게도 정치의 기회가 주어져야한다고 생각했던 사람이고 여성과 남성은 본질적으로는 동등하지만 현실에서 여성의 본질이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알고있어요. 한번 찾아보세요. 실제 폴리스의 정치가 여자를 배제했다고 해서, 바로 그런 점이 안타까워서 플라톤은 국가에서 여자도 능력만 있으면 정치를 할 수 있어야한다고 했는데 저렇게 말씀하시면 혼동이 일어나죠. 그것은 공정하지 않아요.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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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아학파가 금욕을 말한 것도 당시 그리스가 무역을 통해 얻은 상품과 노예들 때문에 극도의 사치와 방탕에 물들었고 그때문에 망했어요. 그래서 스토아학파가 이를테면 막대 구부리기처럼 금욕을 말했던 것이지 스토아 학파는 에피쿠로스 학파에 비해 매우 실천적이고 도덕적, 규범적이 아니라 냉철한 이성의 소유자들이었어요. 물론 그들의 한계는 시대의 한계이고 그들에게도 명백한 한계가 있지만.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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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쿠로스 학파는 고대 유물론자들의 영향을 받아 자연의 필연적 인과율을 거부하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실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했는데, 그들에게 쾌락이란 말씀드린대로 고통의 적극적인 회피에요. 하지만 에피쿠로스는 자연 현상의 구체적인 원인들에 대해서 다른 철학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무관심했어요. 특히 천문학에 있어서 동시대의 과학적 발견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어요. 에피쿠로스는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에 영향을 받는데, 맑스가 이 두사람 가지고 박사논문 쓰죠. 맑스도 젊었을 때는 고대 철학부터 열심히 공부해서 그래요. 어떻게 다르냐.데모크리토스는 원자의 크기는 무한히 다양하다고 했어요. 하지만 원자들의 모양이 무한히 다양하다면 우리의 눈에 보이는 원자도 존재할 것이라고 했어요.
에피쿠로스는 원자의 수는 무한히 많지만, 원자의 모양은 매우 다양할 뿐 무한히 다양하지는 않다고 했어요.
그럼 이 사람들이 도구도 원시적인 상태에서 원자에 대해 알면 얼마나 알까요.
데모크리토스는 원자들이 영원히 움직인다고 말할 뿐, 운동의 기원에 대해서는 분명히 밝히지 않았어요.
에피쿠로스는 원자들이 자신의 무게 때문에 아래로 떨어진다고 주장했어요. 여기서 원자가 똑바로 안떨어지고 비스듬하게 떨어지는게 있는데 이것이 원자론의 엄격한 결정론을 깬다고 생각한거에요. 필연에 저항하는 자유의지.
이 정도면 소설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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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제 님이 정리하신 규범윤리학은 당위, 이성, 남성, 필연으로 정리됩니다. 그렇다면 규범에 대립하는 것들은 당위(sollen)에 대립하는 그냥 있음(sein), 감성, 여성, 우연 등이 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정말 대립항일까요. 잘 생각해봅시다.당위는 그래야한다는 것입니다. 현존재가 자신의 본질을 실현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이지만 사람답게 살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우리의 꿈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사람다운 것이냐, 인간성이란 무엇이냐, 인식이 필요합니다.
남성과 여성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더 밑에 있는 인간이라는 층위에서 동등합니다. 우리는 남자와 여자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만나길 원합니다. 이것도 아직 실현되지 않은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사람과 여자만 있지 남자와 여자가 있지 않습니다. 그 사람, 그 여자, 사람, 여인, 교수, 여교수, 등등
이성과 감성은 대립하는 것이 아닙니다. 감성도 이해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불의를 보면 분노하는 것은 우리의 가슴에 또 다른 이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그토록 고대 철학자들이 이성을 강조했을까요. 당시 민중이 신화적, 종교적 세계관에 사로잡혀있었기 때문입니다. 소크라테스가 무슨 죄목으로 극약을 먹고 죽었는지 생각해보시죠. 불경죄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똑같은 처벌을 받고 망명합니다.
사람들은 세상에는 필연과 우연이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우연이란 있지 않고 단지 그 원인을 모르기 때문에 우연이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사물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다는 것이 스피노자의 생각입니다. 사물에는 질서가 있다는것이죠. 그러나 인간의 인식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모든 질서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모르는 것은 신비로운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모르기 때문에 신비로워 보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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