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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페미니즘 이론 그리고 혁명 전략의 전개 3.

개인의 변화 그리고 정치의 변화

 

“우리가 변화시키고 있는 것이 우리를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우리는 블록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일상생활을 강조하는 페미니즘은 두 번째 영역인 개인의 변화 그리고 정치적 변화의 통합에 초점을 맞춘다. 우리가 우리의 일상 활동을 통해 세계를 알아오고 (세계를 변화시키며 또한 세계에 의해 변화되었기) 때문에, 일상생활은 우리의 정치 활동의 토대가 될 수밖에 없다. 비록 가장 심오한 철학적 물음이 우리 자신의 삶을 이해하고자 하는 욕구보다 더 클지라도 말이다. 이러한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우리의 현실이 “감각적인 인간 활동, 즉 실천 활동”으로 구성돼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실이 우리에게 부과한 특수한 문제들에 대응할 수 있는 우리의 현실 존재를 우리가 만들어 간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개인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을 서로 연결시킴으로써, 그리고 일상의 삶과 사회 제도들을 서로 연결시킴으로써, 우리는 사회적 과정으로서, 즉 인간 활동의 산물로서 우리 현실 존재를 이해해 오기 시작했다. 게다가, 우리가 우리 사회를 창조했을 뿐만 아니라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자각은 우리의 힘을 느끼게 하고 행동을 취할 수 있는 에너지를 비축하게 만든다.

하나의 방법으로서의 페미니즘을 통하여 우리는 인간 행위가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자기 자신에 대한 근본적인 재규정은 정치적 변화를 꾀할 수 있는 행위의 주요한 부분이다.

우리 자신이 사회적 현상들이며 우리가 속해 있는 사회로부터 그 현상의 의미들을 찾을 수 있다면, 오로지 자신에 대해서만 생각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우리 삶의 다른 영역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게 만든다. (61쪽)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의존보다 자기에 대한 규정을 더 강화시키는지 그리고 우리의 새로운 힘을 축적시킬 수 있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해, 우리 개인이 우리 사회적 관계의 총체일 때, “어떤 개인의 개성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사회적 관계에 대한 의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뜻하며 또한 어떤 개인의 개성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이러한 관계들의 총체를 변화시킨다는 것을 뜻한다.” 분명히 말하지만, 우리가 아무 것도 없는 진공 속에서 우리의 삶을 생산하거나 재생산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에 대한 의식의 변화나 규정의 변화는 우리가 서로 맺고 있는 사회적(집단적이고 개인적인 것 모두를 포함하는) 관계들이 재구성되었을 때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페미니즘을 통하여 자본주의와 백인우월주의뿐만 아니라 가부장제 제도들에 반대한다. 개인들의 특별한 경험에 집중함으로써, 페미니즘은 사회적 관계 전체, 즉 전체로서의 사회구성체에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페미니즘의 분석 양식은 가부장제, 자본주의, 백인우월주의, 사회 상호작용의 형태들, 언어 등 이 모든 것들이 역사적인 것으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임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우리의 일상적인 삶은 전체로서의 사회구성체 특징들이 개인적인 수준에서 구체화된 것이다. 우리의 삶을 변형시키는 역사적인 구조는 우리가 답해야 하고 변화의 직접적인 가능성들을 규정하는 물음들을 제기한다.

그러나 우리가 인간 활동이 사회 세계의 구조라는 점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구조는 개별적 개인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이전부터 쌓아온 성과들을 발판 삼아 민중이라는 집단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사회적 삶은 어떤 점에서건 바로 복잡한 요소들에 의존하는데, 즉 태아 때 욕구들뿐만 아니라 이미 성장했을 때의 욕구들에 의존하는데, 이러한 욕구들을 생산하고, 실현하며 만족시키는 것은 역사적 과정이다. 그리하여 우리 자신을 새로운 자신으로 성장시켜 나가는 것은 우리가 대규모의 힘의 중요성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가 되고자 하는 사람, 즉 완전히 성장한 개인들만이 역사와 투쟁의 산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역사와 투쟁은 새로운 개인을 창조할 수 있는 새로운 집단의 생성을 필요로 하는데, 이 집단은 근본적으로 자본주의 개인의 개념과 반대된다. 이러한 새로운 집단의 창조는

 

(62쪽) 이질적인 목적들을 가진 분산된 다수 의지들이 동등하고 공통된 세계관을 바탕으로 해서 하나의 목표로 결합되는 “문화적-사회적” 유대감 형성을 전제로 한다. 또한 일반적인 것과 특수한 것 양자도 결합되는데, 일시적인 격정의 형태로(감정적인 방식으로) 결합될 수도 있고 지속적인 격정의 형태로(여기에서는 지성적인 기반이 잘 갖추어져 있고, 감정과 잘 동화될 수 있으며 그리고 잘 경험될 수 있어서 열정(passion)으로 되기도 한다) 결합될 수도 있다.

 

분명히 말하지만, 우리는 우리를 규정하고 있는 사회적 관계들을 변화시키려고 투쟁할 때만이 우리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다.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고 사회 제도들을 변화시키는 것은 동일한 과정의 두 측면일 뿐이다. 각각의 측면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 누군가를 변화시킨다는 것은 - 개인이 우리가 연관될 수밖에 없는 사회적 관계라면 - 사회 제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페미니즘의 실천은 자본주의에 의해 분열된 삶의 여러 측면들을 재통합시키는데, 바로 지성적 측면을 열정과 동화시키는 그러한 방식으로 재통합시킨다. 맑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환경의 변화 그리고 인간 행동의 변화 또는 인간 자신의 변화는 일치될 수 있으며 이러한 일치는 합리적으로 혁명적인 실천활동으로서만 이해될 수 있다.” 우리는 변화하는 세계 내에서의 우리 자신의 변화와 성장을 통해 우리의 삶이 보다 규모가 큰 여러 과정의 일부이며 우리 삶의 모든 측면들이 서로 연결될 수밖에 없음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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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페미니즘 이론 그리고 혁명 전략의 전개 2.

페미니즘 이론의 본성(The Nature of Feminist Theory)

 

자신들을 페미니스트라고 부르는 여성들은 많은 것들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토록 다양한 목적과 목표를 가지고 있는 사회운동에 관해 일원론적인 용어들로 말하는 것은 처음부터 잘못된 것처럼 보인다. 텔레비전에 나오고 전국적인 조직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매체가 페미니즘 사상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쉽게 접근할 수 있고 나타낼 수 있는 여성운동이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좀 찾기 어렵고, 지역의 특수한 프로젝트에 참가하는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지역 조직들 그리고 소규모 그룹들로 구성되어 있는 두 번째 운동들이 있는데, 이 운동은 여러 도시에 사는 여성들의 직접적인 욕구와 관련하여 연대하며(come together), 변화를 위한 작업에 직접적으로 에너지를 투입하는 운동이다. 페미니즘 이론에 대한 내 논의의 바탕이 되는 것은 바로 이 그룹들이다. 이 그룹들은 여성 공동체를 건설해 나가는 성폭력 위기 센터, 여성 센터 등과 같은 실천적 행위와 관련되어 있었다. 여성들은 페미니스트들처럼 그들의 삶을 지배하는 문제들에 공동으로 대처하기 위해 실천에 깊숙이 뿌리를 둔 운동을 조직하였다. 사실, 여성운동의 주요 임무 중 하나는 정확히 우리 실천에 대한 고찰을 넘어선 혁명적 이론의 창조이다.

이러한 모든 그룹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사회주의 운동 대부분의 세계관과는 다르지만, 또한 동시에 놀랍게도 맑스의 세계관과 아주 유사한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다. 우리가 구체적인 이론들과 마찬가지로 사회 이론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개념들로부터 논의를 전개시켜 나가는 이러한 분석 양식은 페미니즘 힘의 근원이며 내가 페미니스트가 가장 정통성 있는 맑스주의자였음을 주장하는 근거이다. 루카치(Lukacs)의 주장처럼, 맑스주의 이론 내에서의 정통성은 오로지 방법(method)하고만 관계가 있다.

실제로, 페미니즘은 분석 양식이고, 삶과 정치에 접근하는 방법이며, (59쪽) 여성의 억압에 관한 일련의 정치적 결론들이라기보다는 여성 억압이 왜 생겨났는가라는 물음을 묻고 그 물음의 답을 찾는 길이다. 여성들은 자신의 현존을 규정하는 사회관계들을 변형시키기 위하여 이러한 방법을 여성으로서의 그들 자신만의 고유한 경험에 적용하고 있다. 페미니스트는 자신들의 고유한 일상적인 삶을 직접적으로 다루는데, 그 중 어떤 것은 이러한 운동이 급속하게 퍼져나가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맑스주의 내에서 일반적으로 하나의 특정한 경향으로 인지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나는 페미니스트가 맑스의 방법을 재창조하였기 때문에, 여성운동이 나머지 좌파의 발전적인 이론과 전략을 위한 모델을 제시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소규모 그룹의 의식을 끌어올리기 위한 실천활동은 경험을 분석하고 이해하며 개인의 경험을 여성의 삶을 규정짓는 구조에 연결시키는 데 초점을 두고 있으며, 페미니즘에 기초한 방법(재창조된 맑스의 방법-옮긴이)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이다. 이런 실천활동을 통해 여성들은 자신만의 경험과 함께 시작되는 지반(일상적인 삶-옮긴이)으로부터 자신의 분석 능력을 키워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여성들은 사색하는 사람으로서뿐만 아니라, 맑스가 제시하였듯이, 자신의 느낌 전체를 통해 자신의 삶을 분석하였다. 여성들은 자신들의 개인적 경험 그리고 여성 억압에 관한 모든 정치적인 것 사이의 연관관계를 이끌어내었다. 사실 여성들은 자신의 개인적 경험을 그러한 일반적인 것으로 전개시켜 나갔다. 우리는 우리의 경험 그리고 우리 자신을 변형시켰던 방식으로 우리의 경험, 우리의 과거를 이해해 왔다.

페미니스트들이 발전시켜온 방법의 힘은 이 방법을 통해 여성들이 자신의 일상을 규정하는 사회 제도들의 분석과 그 일상을 연관시킬 수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제국주의 양상을 포함한) 자본주의, 가부장제, 그리고 백인 우월주의 제도들은 더 이상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이 제도들은 일상의 경험과 행동이라는 생생하고도 현실적인 양상을 띠고 있다. 우리는 이 제도들 사이의 구체적인 상호관계를 보게 된다.

이러한 모든 것은 페미니즘 운동 안에서 이론을 위한 하나의 중요한 역할이 재차 강조되어 왔음을 의미하는데. 이 역할은 이론가들이 “원리들 그리고 대중이 자신의 실천 활동 속에서 제기한 문제들을 체계화시키는” 것이다. 분석 양식으로서의 페미니즘은, 특히 의식화(consciousness-raising)가 그러한 방법의 토대로 이해될 때, (S.60) 지식인 또는 이론가의 개념을 재규정을 요구하며, 일상의 삶과 관련하여 이러한 사회적 역할의 재구성을 요구한다.

우리들 각각이 잠재적인 이론가, 지성인 그리고 활동가이기 때문에, 교육(Education)은 여성 운동에서나머지 좌파 운동에서와는 아주 다른 역할을 해 왔다. 이 같은 페미니스트의 교육은 내가 가르침(instruction) 이라고 부르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게, 다시 말해 “올바른 정치 노선”을 가르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게 자신을 위해 행하는 것이다. 가르침과 반대되는 교육은 일상생활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교육은 일상생활에서 비롯되는 것이지만 또한 우리가 일상생활을 이해하는 데 기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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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페미니즘 이론 그리고 혁명 전략의 전개 1.

(56) # 3장. 페미니즘 이론 그리고 혁명 전략의 전개 #

- 낸시 하트석(Nancy Hartsock) -

 

많은 저자들이 미국 좌파의 문제점들을 상세히 설명하였다. 그들은 미국 좌파가 많은 사람들과 멀어졌고, 또한 통일된 조직을 세울 수 없었다는 것 또는 사회주의 문제를 가지고 논쟁하는 분위기를 끌어올리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좌파는 시대착오적인 19세기 잔존물로 만들어진 이론을 가지고 있다는 것 때문에, 정치 혁신 또는 정치 문제의 확장을 경멸하는 전략을 가지고 있다는 것 때문에 비판을 받았다. 너무나도 자주 좌파 그룹들은 노동계급이 그들 자신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생각 그리고 노동계급에게 자유를 가져다 줄 수 있는 자들이 신성한 텍스트들을 암기했던 자들일 것이며 세계를 조직할 수 있는 총괄적인 이론을 갖춘 자들일 것이라는 생각을 고수하였다.

이러한 비판들은 좌파 전체의 모습을 풍자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면서도, 많은 실제적인 문제들을 지적하고 있는데, 이러한 문제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재교육(reorientation)이 필요할 것이다. 나는 여기서 이 작업의 한 국면만을, 즉 페미니즘 이론의 역할 그리고 나머지 좌파의 모델로서 여성 운동의 정치적 실천만을 다룰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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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제언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엘리슨(C. Ellison), 로즈(S. Rose) 그리고 스쿨만(M. Schoolman)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고, 또한 이 아이디어들을 정식화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퀘스트』(Quest) 직원에게도 감사드린다. 이 논문의 여러 부분들은 제1회 국내 사회주의 페미니즘 회의의 비평문(a critique fo the first national socialist feminist conference)으로서 『퀘스트』(Quest)(a feminist quarterly 2, no. 2 (1975))에 실렸다. 또한 많은 부분들이 1977년 봄 이타카 대학(Ithaca College)의 사회주의 페미니즘 강의 시리즈에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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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나는 여성 운동이 새롭고도 확실한 미국 사회주의 건설의 토대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여성 운동은 혁명적 전략을 수립하는 방식들 그리고 선진 자본주의의 본모습을 확실하게 밝히는 혁명적 이론들을 발전시켜 나가는 방식들을 위한 하나의 모델을 제공할 수 있다. 이러한 모델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페미니즘 이론과 실천의 본성(the nature)이라는 특수한 관점으로 이론 일반을 검토하고 재정의(redefinition)하는 것이 필요하고, 계급의 본성이 무엇인가 하는 그런 기본적인 의문들을 재분석하는 것이 필요하며, 또한 페미니즘 이론을 우리가 건설해야 하는 다양한 조직과 연관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이론 그리고 페미니즘 이론(Theory and Feminist Theory)

 

이론은 어떤 혁명적인 운동에서도 기본적인 것이다. 우리의 이론은 우리가 직면한 문제를 설명하며, 사회 삶을 유지시키는 힘들(forces)을 분석하고, 우리가 집중해야 할 문제들을 규정하며, 또한 우리가 발전시키는 전략들을 평가하는 규준으로(as a set of criteria)작동한다. 그러나 이론은 한층 더 폭넓은 역할을 한다. 이에 대해 안토니오 그람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는 특수한 실천 국면에서 이론 자체를 실천 자체의 결정적 요소들과 동일시하고 일치시킴으로써 이론을 구성할 수 있는데, 이 이론은 모든 실천적 요소들을 좀 더 동질화시키고, 체계화시키며 효과적인 것으로 만들어 가는 역사 과정을 가속화시킬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실천의 가능성을 최대한 발현시켜 가는 역사 과정을 가속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론 그 자체는 변화를 일으킬 수밖에 없는 힘(a force for change)이 될 수 있다.

그런데 동시에 그람시는 우리가 이론에 대한 이해를 다른 방향으로 확장시키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이론화가 강단 지식인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어떤 무언가가 아니라 이론이 항상 우리의 행위 속에 있으며 우리가 실재를 참되게 파악할 때까지 이론이 깊이 있게 진행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이론은 세계에 대한 우리의 개념 속에 내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에 대한 우리의 개념 그 자체는 하나의 정치적 선택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 의해 주어진 범주들을 받아들일 수도 있고, 또한 우리 세계에 대한 비판적 이해를 발전시켜 나갈 수도 있다. 우리가 둘 중에 첫 번째를 선택했을 때, 우리의 이론은 영원히 절대적인 것(implicit)으로 남을 수도 있다. 반면에, (58) 두 번째 것을 선택한다는 것은 우리가 비판적이고 명확한 이론을 구성한다는 것을 뜻한다. 거의 최근 10여 년 동안 페미니스트들의 정치적 행위는 우리의 실천 속에 함축되어 있는 이론을 정교화시키는 토대를 제공한다. 이론을 명확하게 만드는 것은 어렵지만 페미니스트들이 지금 하고 있는 작업을 개선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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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자본주의 가부장제 관계들에 대한 몇 가지 노트 4.

가족 관계들

 

가족은 가족 안팎 모두에서 일어나는 여성의 행위들을 규정하는 일련의 관계들이다. 가족은 개인들을 경제와 관련시키는 관계망들의 한 구조이기 때문에, 가족은 한 사회의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그리고 문화적인 한 단위이다. 가족은 형성 과정상 역사적인 것이지, 단순히 생물학적 단위가 아니다. 여성의 역할과 마찬가지로, 가족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다 ; 가족은 사회의 특수한 관계들, 즉 충족되어야 할 특수한 욕구들을 반영한다.

 

가족을 규정하는 관계들에는 어떠한 것이 있을까? 첫째, 여성은 경제를 위한 노동자들 그리고 사회의 구성원들이 되는 아이들을 재생산하는 존재이다. 또한 여성은 노동 세계와 사회 전체 속에서 아이들이 자신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사회화시킨다. 여성은 이러한 아이들을, 그리고 그녀의 남편들을 먹이고, 입히고 돌보는 노동을 한다. 이러한 능력들을 펼치는 과정 속에서, 어머니는 경제의 측면에서 가사 노동자이며 또한 나아가 사회 전체를 양육하는 존재이다.

 

둘째, 여성은 가족에 대한 역할을 고려해 볼 때 소비자이다. 소비는 생산의 다른 측면이다. 여성은 가족이 원하고 경제가 팔아야만 하는 물건들을 산다. 여성은 새로운 옷을 세탁하거나 식사를 준비하는 하는 것과 같은 이러한 상품들을 선호한다. 소비자로서, 여성은 이러한 상품들을 고르고, 준비하고 유지시키는 데 힘을 쏟는다. 여성은 아주 중요하게 경제와 사회에 연결되어 있다. 여성은 경제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 즉 소비를 담당하고 있다.

 

모성이 가사노동이라고 부르는 활동들을 포함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모성은 이러한 활동들로 결코 환원될 수 없다. 모성은 자본 관계들 내에 있는 가사노동보다도 더 복잡한 실재,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어떤 계급 실재로도 환원될 수 없는 가부장 제도로 이해되어야 한다. 가사노동과 가정(housewifery)은 모성을 자본주의 가부장제의 특수한 것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어머니의 초역사적인(pre-existing historical) 의미 (49쪽) 그리고 이 개념이 남성지배와 관련하여 반영하고 있는 모든 것을 연결시킬 수 있도록 주의해야 한다.

 

가족 내의 이러한 관계들은 여성들이 일자리를 구하려 할 때 시장에서 그녀들의 가치를 하락시킨다. 1970년 (미국 남성의 40%에 비해) 고작 미국 여성의 7%만이 1년에 10,000$ 이상을 벌었다. 다르게 말하자면, 미국 여성의 93%가 1년에 10,000$ 미만을 벌었다는 것이다. 가정에서 여성의 노동은 가정 밖에서 임금을 받을 수 있는 일자리를 찾는 데 대한 책임이 있다. 여성은 자신을 가족에 묶어두는 관계들 때문에 자신의 노동력에 대한 임금을 지불 받지 못한다. 여성의 노동은 공짜거나 값싼 것으로 규정된다.

 

우리는 여성이 자신의 노동력 안에서 고립되고(ghettoized) 거기서 그녀들의 노동이 남성 지배의 사회 조직에 저항하지 못한다는 것을 이미 볼 수 있었다. 여성을 가장 낮은 단계의 노동력으로 유입시키는 것은 마음대로 사회를 남성이 지배하는 가부장적 위계질서로 만들고자 하는 욕망을 반영하는 것이다. 남성 지배는 계급 위계를 통해 유지된다. 이러한 불변성은 여성 삶의 모순인 이중 노동(the double day of work)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여성은 노동자이면서 어머니 둘 다이다.

 

첫째로 여성을 어머니로 규정하는 관계들은 무엇인가? 무엇이 가부장적 노동 조직을 규정하는가? 다른 말로, 여성은 왜 여성으로서 억압 받아야 하는가? 그 대답은 종종 여성의 생물학이 여성을 남성으로부터 구별시킨다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여성의 재생산 관계가 남성보다는 오히려 여성을 교환 대상으로 규정했다고 할지라도, 남성 지배의 역사 그리고 자본주의와 이 역사의 특수한 관계는 지금 이러한 유일한 특성(여성의 생물학-옮긴이)으로 제한되지 않는 일련의 관계들을 반영하고 있다. 여성을 재생산자로 정의함으로써 나타난 전체 관계들이 있는데, 이러한 정의는 결코 그 관계들의 근원으로 “환원될” 수 없다. 문화적이고도 정치적인 관계 이 두 가지는 성적 관계들의 위계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규정되었고 또한 재규정되었다. 위계질서에 대한 초기 이유는 아마도 꼭 필요로 하는 생물학적 지식의 결여로 나타난 여성의 재생산 능력에 대한 공포일 텐데,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회는 여전히 성적 위계질서를 필요로 하는데, 이는 그 관계들이 그 이후로 구조화되었던 방식 때문이었다.

 

남성과 여성 사이의 생물학적 특성을 구별시키는 것이 (50쪽) 여성의 재생산 능력이라고 한다면, 이 능력이 왜 그리고 어떻게 남성지상주의 관계들(이 관계들은 초기 이유보다 훨씬 더 복잡한 불평등 체계로 구성되었다)의 부분으로 사용되었는지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재생산자로서 여성의 생물학적 자아(self)에 대한 이해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이해가 정치적 관계들(이 관계들은 어떠한 경우라도 그러한 이해를 규정한다)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생물학적으로 추상화된 의미가 아닌 생산과 재생산의 관계들은 여성이 자신과 사회에 대해 재생산자로서 가지게 되는 관계성(relationship)을 규정한다. 재생산자로서 여성이 서로 다른 문화 속에서 나타나는 남성지상주의 보편적 특성이며 따라서 문제의 근원이라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문제를 부적절하게 정식화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동일한 실재(reality,재생산으로 여성을 통제하는 것)를 바라보는 것으로는 재생산을 규정하는 사회관계들을 충분하게 밝혀낼 수 없다. 문제는 재생산 자체가 아니라 바로 재생산을 규정하고 강제하는 관계들이다.

 

가부장제는 성별 노동 분업 그리고 문화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여성의 몸을 재생산의 그릇(vessel)으로 사용하는 데 기초를 두었던 사회를 통해 유지되었다. 여성은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선물로 교환되었다. 불평등은 재생산자로서 여성의 지위를 늘 찬양하고/하거나 통제하였던 구조로부터 나타났다. 교환체계가 바뀌었다고 하더라도, 그 체계가 생산했던 관계들은 가부장제 역사의 구성 부분이 되었고 아직도 (재규정되었지만) 그 구성 부분으로 남아 있다. 여성은 관리되는 존재였지 관리하는 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둘러싼 제도를 통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새로운 환경에 처해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집단 사회의 방식들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여성은 교환체계를 결정과 목적론적 행동 그리고 통제권으로부터 자신을 배제시켰던 관계 체계로서 경험하였다. 이것은 어느 정도 다른 형태이긴 하지만 자본주의 가부장제적 사회에 존재한다. 여성은 결혼해서 자기의 이름을 상실해 버리고 남편의 일이 필요로 하는 새로운 공동체로 이주해가서 외로움을 느끼며, 또한 사람 만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경제적으로 하위 계층에 있는 대부분의 여성이 노동력 시장에 나온다고 하더라도, 남성이 우선적으로 다루어진다. 남성과 동일하게 다루어지지 않으며 (51쪽) 결혼, 가족 그리고 가정주부라는 이성애적인 형태들에 따라야 하는 레즈비언 그리고 다른 여성들은 심지어 점점 더 고립되며 배척 당한다. 이러한 관계들은 남성에게 우선성이 주어진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 관계들은 여성의 삶에 대해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다는 특징을 명확하게 나타낸다.

 

사람들이 재생산 관계에 주목하게 될 때, 실제로 초점을 맞추는 것은 모든 기존 사회가 필요로 했고 이용했던 위계질서의 통제와 명령 체계이다. 남성 우월주의로서의 가부장제는 사회의 경제 구성체(organizations)가 변화해도 이러한 질서를 뒷받침했다. 이러한 것은 가부장제적 통제 체계가 변화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체계가 자신의 남성 우월주의 구조를 유지하고 남성 우월주의의 기본적인 영향력이 바뀌지 않고서도 변화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봉건주의로부터 자본주의로의 변화 과정에서도 기본적인 경제 계급 구조와 그 통제 체계는 확실히 변화한다.

 

가부장제가 권력 체계이기 때문에 남성이 가부장제 관계를 구현시켰기 때문에 억압하는 자라는 설명 없이 남자가 억압자라고 말하는 것은 불충분하다. 권력 관계들의 반영으로서가 아니라 단지 “사람들”(things)로서 개별적인 남성들에 대해 말하는 것은 남성의 권력을 구체적인 형태가 아니라 추상적인 형태로 이해하는 것이다. 생물학적 존재로서의 남자가 가부장제 관계들 밖에서 존재했다면, 그는 속빈 조개(a hollow shell)가 되었을 것이다. 가부장제 역사에서, 그와 권력관계들을 동일시하는 것이 바로 그의 생물학이다. 어떤 이들은 남성의 권력이 신체적인 힘을 통한 개인적 수준에서 나타나는 것이라 말하고 싶겠지만, 나는 이것이 가부장제 체계에서 남성이 가지고 있는 권력의 매우 제한된 의미에서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남성이 자신의 권력을 나타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오히려 성적 위계 관계들이다. 남성들은 이 위계 관계들에 기초한 관계와 행위를 내면화시켰다. 남성의 성 권력(sexual power)은 그의 개별적인 존재에만 내재하는 것이 아니다. 가부장제 관계들을 해체하기 위해서 우리는 성적 위계질서의 구조, 인종적 위계질서의 구조 그리고 특히 성별 노동 분업을 통해 유지되었던 계급적 위계질서의 구조를 해체해야만 한다. 우리가 사회의 권력 관계를 변화시킬 때 남성은 변할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더 이상 그들의 위계질서의 토대를 가질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가부장제에서 여성에 의해 경험된 가부장제의 어떤 특수한 억압도 사회관계들을 보여준다. 사람으로서(As things) 여성은 완전히 중립적(neutral)이다. 실재를 추상하게 되면, (52쪽) 피임, 임신, 낙태, 아이양육, 또는 여성의 애정 관계들에 대한 본질적으로(innately) 억압적인 어떠한 것도 없게 된다. 그러나, 이 애정 관계 모두는 이 사회에서 여성의 매우 특수한 억압도 나타낸다. 피임 방법들이 이윤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 건강을 생각하면서 여성과 남성 모두를 위해 고안된 것이라면, 그리고 낙태가 가부장제적 가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고 가부장제적 가치를 짊어질 때보다 비용이 더 적게 든다면, 피임과 낙태는 서로 다른 경험들이 되었을 것이다. 여남 모두가 아이 양육이 여성의 책임이라기보다는 사회적 책임이라는 사실을 믿게 된다면, 어린 시절의 애정 행위가 친밀한 행위라기보다는 오히려 은밀한 행위라고 우리가 믿지 않게 된다면, 아이 양육의 “관계들”은 현저하게 달라졌을 것이다. 여성이 현재 임신을 해서 가부장제의 의료를 받지 않게 된다면, 여성이 이 임신으로 인해 개별적으로 건강을 회복해야 하는(defining private health care) 관계들 속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여성이 이 임신으로 인해 임금 손실을 당하지 않고 경제적 부담을 지지 않는다면, 그리고 사회주의 페미니즘 사회에서 아이를 낳게 된다면, 출산 행위는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 가부장제 내에서 가부장제의 경험을 강조하는 것은 사회의 어떤 특수한 계기 속에서도 권력 관계가 드러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사회 속에서 삶의 활동이 과정, 즉 권력 관계의 과정 속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단절된 계기들보다는 오히려 이러한 과정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과정을 이해한다는 것은 과정이 변화할 수 있는 방식을 이해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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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자본주의 가부장제 관계들에 대한 몇 가지 노트 3.

사회의 권력관계에 대한 초기 노트들

 

여성이 자본주의 가부장제 속에서 어떻게 그리고 왜 착취당하고 억압당하는가 하는 물음으로부터 시작하자. 우리는 이러한 물음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여성의 억압을 위해서는 우리사회에 현존하는 권력 구조를 검토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권력 구조는 자본주의 계급 구조이며, 가부장제 내에서의 남자와 여자 세계의 위계질서이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특수한 형태로 일어나고 있지만 전(前)자본주의 사회의 노예제에 뿌리를 두고 있는 노동의 인종 분업이다. 위계적이며, 억압적이고, 착취가 일어나는 시스템으로서의 자본주의 가부장제는 성과 계급 억압과 더불어 인정 억압을 필요로 한다. 여성들은 서로 억압을 공유한다; 그러나 (47쪽) 성적 억압으로서 여성들이 공유하고 있는 것은 가부장제 역사가 계급과 인종에 따라 항상 인간을 구별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계급과 인종 출신에 따라 구별된다. 분명히, 아메리카 노예 사회의 흑인 여성은 가부장제의 억압을 경험하였지만, 이러한 경험은 이 여성을 속박하고 있는 다른 권력 구조에 의해서 복잡하게 뒤얽혀 있었다. 노동자로서 이 여성은 여자의 어떠한 “연약함”도 결코 인정받지 못하였고, 여성으로서 “강간당하는 것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으며, 또한 노예로서 인간 이하의 지위를 견뎌냈다. 성이나 계급을 보는 대신에, 또는 인종이나 계급을 보는 대신에, 또는 성이나 인종을 보는 것 대신에, 우리는 권력이 형성되는 과정과 그 관계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권력이 형성되는 과정에 주목하게 될 때 우리는 우리가 왜 그리고 어떻게 억압당하는지를 비로소 배울 수 있는데, 그 과정은 우리의 억압을 변화시키는 과정의 첫 번째 단계이다.

 

여성이 관계하고 있는 어떠한 과정도 여성이 구현하고 있으며 사회의 이데올로기가 반영되는 사회의 여러 관계들로부터 분리된 것으로 결코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아이를 출산하는 행위는 비록 결혼과 가족 관계를 반영하고 있을지라도 오로지 모성의 행위로만 여겨진다. 다른 한편 이와 아주 유사한 행위가 간통과 같은 불륜으로 여겨질 때, 그 아이는 “서자” 또는 “사생아”가 된다. “어머니”라는 말은 여러 다른 관계들이 포함된 경우에 “미혼모”에서와 같은 아주 다른 의미를 지닐 수도 있다. 이 말은 행위 속에 어떠한 관계들이 구현되는가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이와 유사하게, 일련의 관계들 속에서 성적 사랑과 부부관계의 기쁨으로 정의되는 것은 다른 관계들 속에서는 매춘행위, 또 다른 관계들 속에서는 강간이 된다. 한 여성이 다른 여성의 집에서 일하는 것, 또는 남성에 의해 고용되어 일하는 것은 가사노동으로 여겨져서 임금을 받게 되지만, 바로 그녀의 집에서 아내 또는 어머니로서 일하는 것은 사랑의 수고(a labor of love)로 여겨져 사회에 의해 임금을 받는 노동(work)으로 규정되지 않으며, 그리하여 직접 임금을 위한 일이 아니게 된다.

 

그러므로 사회의 여러 사회적 관계들은 여성이 어떤 상황 속에서 행하는 특별한 행위를 규정한다. 이러한 관계들 밖에서 “여성은” 하나의 추상(an abstraction)이 된다(도외시된다). 어떠한 상황을 형성하는 권력 관계들과 그 상황을 규정하고 지키며 유지하는 이데올로기 밖에서는 이러한 상황을 결코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이러한 상황들을 설명하는 가운데서 사회의 이데올로기를 이해하는 것이 아주 중요한데, 왜냐하면 자본주의 가부장제의 사회적 관계들이 (48쪽) 자유주의, 남성우월주의 그리고 인종주의의 이데올로기를 통해 유지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자본주의 가부장제를 유지시키기 위해 필요한 어떤 특수한 상황도 설명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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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자본주의 가부장제 관계들에 대한 몇 가지 노트 2.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물음을 발전시키기

 

여성 억압 이론이 좋은 출발을 하기 위해서는 여성이 왜 그리고 어떻게 억압 받고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줄리엣 미첼(Juliet Mitchell)은 『정신분석과 페미니즘』(Psychoanalysis and Feminism)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내가 보기에 “그것이 왜 일어났느냐” 그리고 “역사적으로 언제”라는 이 두 질문은 잘못된 것처럼 보인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질문들을 대체해서 물어보아야 할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 그것이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가?…… 다시 말해서, 지금 그것이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지를 처음 질문으로 삼을 수 있다."

 

물론 “그것이 왜 일어났는가?” 하는 질문이 정말로 잘못된 질문일 수 있다; 비록 우리가 그것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찾아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것이 지금 왜 일어나고 있는가를 설명해 줄 수 없다; 그렇지만, “지금 그것이 왜 일어나고 있는가?”를 묻는 것은 여전히 중요하다. 이러한 것을 넘어서서 지금 그것이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가를 완전하게 밝히기 위해서는 성적 위계와 억압이 왜 유지되고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왜 그리고 어떻게는 서로 연관된 질문들이다. 둘을 분리시켜서 어느 한 쪽을 택한다면 대답의 일부분만 들을 수 있을 뿐이다. 어떻게와 관련된 질문을 통하여 우리는 현존하는 권력 배치를 규정하는 직접적인 관계, 즉 억압의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왜와 관련된 질문을 통하여 우리는 (44쪽) 이런 동일한 관계를 살펴볼 수도 있지만, 또한 실제적인 강제력으로서 가부장제 역사의 현존을 다루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의미에서 이 두 질문은 필수적이다. 이 둘은 남성 우위의 특수한 측면들과, 그렇지만 여전히 (특수한 측면들의 이면에 있는-옮긴이 삽입) 보편적인 측면들을 상호 연관시킴으로써 서로가 서로를 밝혀준다.

여성 억압에 관한 어떻게 그리고 왜라는 물음은 페미니즘 이론 속에서 통합되지 못했다. 급진 페미니즘은 권력 과정이 어떻게 기능하는가를 묻기보다는 여성이 왜 억압 받고 있는가를 물었다. 슐라미스 파이어스톤(Shulamith Firestone)은 여성의 재생산 기능이 본래적으로 여성 억압의 중심이라고 대답했다. “권력의 성적 불균형은 생물학에 기초하고 있다.” 여성은 재생산자들로서, 하나의 성 계급으로서 존재한다. 여성이 어떻게 억압 받고 있는가 하는 것은 거의 확실하게 (왜 억압 받고 있는가와-옮긴이 삽입) 구별되는 것이 아닌데, 이를 처음으로 논의하기 시작한 사람이 티 그레이스 애킨슨(Ti Grace Atkinson)이다. 애킨슨의 개념에 따르면, 성 계급은 정치적 구조물(political construct)이 된다. 여성은 재생산이라는 생물학적 사실 때문에 억압 받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재생산 “능력”(capacity)을 하나의 기능으로서 규정하는 암성에 의해 억압 받는다. “사실 아이를 낳는 것은 여성의 기능이 아니다. 아이를 낳는 기능은 여성을 억압하는 남성의 기능이다.” 사회가 바로 여성의 생물학적 능력과 더불어 그녀의 목적을 상실시킨다. 성 계급은 생물학적 억압이 아니라, 바로 문화적인 억압이다. 억압의 요인(the agent)은 인간의 성을 문화적 정치적으로 “헤테로 섹슈얼리티”로 정의하는 것이다. 가족과 결혼 제도, 그리고 헤테로 섹슈얼리티를 강제하고 보호하는 법적 문화적 시스템은 여성을 정치적으로 억압하는 토대이다.

급진 페미니즘이 여성이 현재 왜 억압 받고 있는지에 대해 그리고 이러한 억압이 현재 어떻게 발생하고 있는지에 대해 이제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하고 있지만, 급진 페미니즘은 거의 대개 역사를 한 부분으로서, 즉 가부장적 역사로서 바라본다. 이러한 역사 파악은 여성의 관점에서 역사를 (가부장제 하나로-옮긴이) 통일시킴으로써 급진 페미니즘에게 많은 것을 가져다주었지만, 우리는 다른 역사 시기에서 가부장제의 가부장적 형태들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구체적인 역사가 아니라 추상적인 역사에 머무르게 된다. 예를 들어, 가부장제는 봉건시대와 자본주의 시대에서 유사한 형태들을 나타났기도 했지만 다른 형태들로도 나타났다. 여성 억압의 형태는 이 두 시대 모두에 걸쳐 있지만 서로 구별된다. 이와 관련하여 마르크 블로흐(Marc Bloch)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45쪽) "그 시대(봉건 시대)가 모계 쪽의 삼촌과 그 조카 사이의 관계들에 부여했던 감정의 중요성은 여성 쪽의 유대 관계가 거의 부계 친족의 유대 관계만큼이나 중요하게 보았던 시스템의 한 표현 형태일 뿐이다. 이러한 것의 한 증거로는 이름을 부여하는 행위로 잘 알 수 있다."

 

아이들은 아버지 또는 어머니 쪽의 이름을 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것에 대해 고정된 규칙이 없는 것처럼 보였으며 따라서 가족은 세대가 바뀌면 이름이 바뀌는 것처럼 불안정한 상태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불로흐에 따르면, 봉건적 관계들에서 초점을 맞춰야 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아주 불안정한 상태였다. 자본주의의 발전, 그리고 그 발전에 따라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새로운 경제 관계 형태들과 더불어 가족은 점점 더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안정성의 근원지로서 규정되었다. 가족은 초기 경쟁 자본주의의 완충지대 역할을 하였지만, 그 반면에 봉건적 관계 자체는 불안정한 가족 질서의 불안정성을 해소하는 역할을 하였다.

우리는 이 두 과정을 설명해야만 한다. 하나는 계급과 관련하여 정의된 역사, 즉 봉건제, 자본주의, 사회주의 등으로 명명되는 역사이다. 다른 하나는 이러한 시기에 의해 구조화되면서도 이런 시기를 구조화시키는 가부장제 역사이다. 예를 들어, 어머니임(motherhood), 가사(housewifery), 그리고 가족은 여러 역사적 순간에서의 가부장제 표현 형태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은 전(前)자본주의와 자본주의 사회에서 다르게 규정되고 구조화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순간들은 역사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지속되는 실재(reality), 즉 특수한 형태로 이해되지 않는 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형태가 되지 않는 실재의 부분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 실재는 하나의 추상이 되며 나아가서 하나의 왜곡된 일반화의 의미를 가지게 된다. 물론 이것은 가부장제가 서로 구별되는 계급 역사를 관통해 나가면서 현존하고 있다는 관점의 중요성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가부장제가 특수한 순간에 특수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이 가부장제를 완전히 이해했다고 할 수 없으며, 이 가부장제는 결코 그 보편적인 현존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보편적인 것은 특수한 것을 밝혀주며 특수한 것은 보편적인 것에 현실성을 부여한다.

모든 사회적 변화가 이전 사회의 찌꺼기와 더불어 시작되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가부장제 위계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배워야만 한다. 오늘날의 권력 기반은 자본주의가 성적 위계질서를 유지할 수 있게끔 하는 특수한 억압을 통해, 그러나 동시에 (46쪽) 부분적으로 전(前)자본주의 가부장제, 더 특별하게는 봉건적 가부장제로부터 비롯된 자본주의 가부장제의 관계들을 통해 현존한다. 가부장제 관계들을 이해하는 어떤 경우에라도 그 관계들을 그 특수한 역사적 틀 속에서 다루어야 한다. 물론 우리가 가부장제 역사의 요소들을 단일화시켜 이해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추상의 수준에 머무르게 되지만, 보편적인 것을 언급하는 어떤 경우도 또는 요소들을 단일화시키는 어떤 경우도 하나의 추상이 된다. 권력 관계들의 특수성과 보편성 양자 모두 남성 지배의 특수한 동력이 포함된 것으로 정의되어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봉건제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가부장제 사이의 변하지 않는 유사점과 차이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유사점들이 새로운 사회에서 지속되지 않는다는 주장을 확신하고자 할 때 이 유사점들이 중요하다. 자본주의 가부장제 관계들이 전(前)자본주의 형태들과 연결되어 있을 경우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유지되고 있는 전(前)자본주의 요소들에 도전해 볼 필요가 있다. 바로 들 수 있는 예가 성별 노동 분업이다. 이 분업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유지되고 있으며 자본주의 문맥 속에서 규정되고 있지만 특별히 자본주의 욕구로부터 도출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전(前)자본주의 형태들의 유지를 통해 우리는 가부장제 역사가 세워짐을 보게 된다. 자본주의 가부장제 관점이 아니라 페미니즘 사회주의 관점으로 삶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가부장제 가족과 성적 위계라는 낙인이 더 이상 찍히지 않은 혁명적인 가족 이론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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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자본주의 가부장제 관계들에 대한 몇 가지 노트 1.

아래의 글은 질라 아이젠슈타인이 편집한 논문 모음집 <<자본주의 가부장제와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입장>>(Monthly Review Press, New York and London, 1979) 중에서 질라 아이젠슈타인의 논문 [2장. 자본주의 가부장제 관계들에 대한 몇 가지 노트 ]를 해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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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장. 자본주의 가부장제 관계들에 대한 몇 가지 노트 #

- 질라 아이젠슈타인(Zillah Eisenstein) -

 

(41쪽) 이 논문은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분석 방법론을 규명하고자 한다. 이것은 페미니즘을 통해 맑스주의의 역사 접근 방법을 다시금 조명하고 정의하는 것을 포괄하고 있다. 급진적 페미니즘 이론을 통해 맑스주의 방법론을 여성의 억압, 특히 성-계급 구조, 가족, 노동과 사회의 위계적인 성별 분업과 관련한 여성 억압을 이해하는 쪽으로 적용시켜볼 수 있다. 요즘 부각되고 있는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한 학파는 바로 이러한 작업을 시도해 왔다. 이러한 (방법론의-옮긴이) 확장은 페미니즘 분석을 통해 맑스주의 방법론을 변형하는 데 기초해 있다. 변형된 맑스주의 방법론을 통해 이전에 알지 못했던 성 권력의 측면들을 알게 되었고, 권력의 특수한 역사적 국면들에 대해 새롭게 이해함으로써 페미니즘의 문점들을 해소하게 된다. 줄리엣 미첼(Juliet Mitchell)은 그녀 자신이 “우리는 페미니즘의 의문점들에 대답하여야 하지만 몇몇 맑스주의 답변은 고려해보아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이러한 종합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 그녀의 이러한 말은 페미니즘 분석 아니면 맑스주의 분석이라는 이분법, 즉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분석을 방해하는 이분법을 함축하고 있다.

페미니즘을 통해 맑스주의 방법론(마찬가지로 그 내용도 포함해서)의 방향을 재정립하기 위해서는 선차성(priorities)에 관한 문제, 특히 사회 조건들과 관련한 의식의 문제를 재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의식의 문제는 사회적 현실(social reality)에 관한 논쟁의 일부가 되고 있다. 현실 그 자체는 계급과 성 그리고 인종 관계를 포괄하는 데까지 이르고 있다. 사적인 것(개인적인 것)과 공적인 것(정치적인 것) 양자 사이의 관계는 (42쪽) 섹슈얼리티, 헤테로섹슈얼리티, 호모섹슈얼리티를 규정하는 관계들이 특별하게 중요하다는 쪽으로 주요하게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이러한 흐름에 따라서 이데올로기가 중요한 초점이 된다. 그리하여 변증법은 자기 의식적으로(self-consciously) 의식, 이데올로기 그리고 사회적 현실 사이의 관계들로 그 폭을 확장시켜 나갈 것이다. 사물을 바라보는 이러한 새로운 방식, 즉 사회의 관념과 사람들의 의식이 객관적인 사회적 현실의 부분들이며, 이 부분들이 성, 계급 그리고 인종 관계들의 외부에서 작동한다고 보는 방식은 좌파가 가지는 이론과 실천의 빈약함에 대한 페미니즘 비판의 산물이다.

맑스주의 방법론의 방향 재정립은 사회적 관계 이론을 자본주의 가부장제 관계들을 나타내는 데 사용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이러한 방법론이 맑스 저작에 나타나 있는 계급 사회와 계급투쟁에 의해 나타난 것이라고 할지라도, 이러한 사회적 관계 이론들은 현존의 맑스주의 분석에서 주어진 내용과는 구별될 수 있다. 이러한 방법이 계급 분석과 잘 맞지 않고 여전히 계급 분석 너머에 있지만 이러한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중요하고 또 그럴 수 있다. 계급 분석은 우리의 이해에 필요하지만, 우리의 목적을 위한 충분한 것은 아니다.

맑스주의 분석은 권력을 연구하는 데 방향이 맞춰져 있다. 우리는 이러한 분석을 권력의 어떠한 특수한 현상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 그 도구를 충분히 그렇게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은 분석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그 분석을 사용하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이다. 맑스는 이른바 “사물들”을 그 구체적 연관 속에서 파악하는 자신의 사회적 관계 이론을 사회의 권력관계들을 파악하는 데 사용하였다. 그의 분석이 계급투쟁에 관한 논쟁을 다루었던 것이지만, 사회적 관계들을 분석하는 그의 방법은 또한 가부장제 투쟁을 검토하는 데도 사용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맑스주의 사회적 관계 이론을 페미니즘 의문에 대답하는 데 사용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는 다르다. 이것은 생물학에 기초한 파이어스톤(Firestone)의 유물론 역사와 더불어 우리를 정체시킬지 모른다. 아니면 우리는 이 변형된 방법을 가부장제와 계급 역사 사이의 접점을 이해하는 데, 또한 성과 계급, 성과 인종, 인종과 계급, 그리고 성, 인종, 계급 사이의 변증법을 설명하는 데 사용해야만 한다.

우리가 현존하는 것 자체로서 현실을 다루지 않는다면 뚜렷한 정치적 목적과 전략을 가지고 있는 여성 억압에 대한 분석을 발전시킬 수 없다. 급진 페미니즘의 문제는 (43쪽) 사회 권력의 다른 관계들로부터 성을 도외시함으로써 이러한 분석을 수행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물론 급진 페미니즘이 권력의 이러한 여러 관계들을 깨닫고 있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관계들을 서로 연결시키지 못하고 있다. 계급투쟁과 인종투쟁은 가부장제 역사를 파악하는 데 필수적이다. 역사가 종종 마치 이 투쟁들이 분리되었던 것처럼 서술하고 있지만, 실천적으로 이 투쟁들은 분리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관계들이 설명되지 않는다면, 남성 우위는 권력 관계 또는 과정으로서가 아니라 독립적인 것으로 보인다.

급진 페미니즘을 불러일으켰던 여러 좌파 분석들은 맑스주의 방법론을 새로운 방식으로 변형시키기에 충분할 만큼 진지하게 이 방법론을 파고들지 않았다. 지금까지 권력에 관한 의문점을 완전히 물질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의미에서 고찰하지 못했다. 급진 페미니즘, 계급 분석 그리고 변형된 맑스주의 방법론을 통일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지금 가부장적·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와 사회 현존을 규정할 수 있는 과정에 주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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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결 부분(HYPHEN)을 해체하기 : 맑스주의-페미니즘 그룹 1-5에 관한 레포트 6

4. 여성의 의식과 혁명적 변화

 

 

끝내기 전에, 나는 내가 네 번째 비판적 관계로서, 즉 여성의 의식과 혁명적 변혁의 본성 사이의 관계로서 리스트에 올려 논 것에 관해 말하고 싶다. 맑스주의자-페미니스트로서 나는 우리가 역학적 사유 양태들에 대한 일종의 자연스러운 반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정치적 이해를 벗어나서 우리는 서로 다른 문화와 시대 속에서 살아온 여성들 자신이 어떻게 그들 자신의 상황들을 지각하고 그 상황들 속에 살아 남아 투쟁하게 되었는지에 관해 엄격하게 탐구하기 시작했다. 분명히, 여성의 “재생산” 노동과 집단 의식에서 비롯되는 항의 조직 형태들, 예를 들어 생필품 가격 인하 운동(food riots;세계 1차 대전 기간에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세금이 엄청 올랐고 노동자 계급 가족의 가계 생활비를 제한시켰다. 물론 임금이 전쟁 기간에도 오르긴 했지만, 노동자 계급 가족은 물가를 따라 잡을 수 없었다. 1917년 2월 10일, 생필품에 대해 과도하게 요금을 인상하였던 손수레 행상인들과 대치한 후에, 수천 명의 여성들은 가격 인하를 요구하며 뉴욕시 청사로 행진하였다. “생필품 가격 인하 운동(food riot)”은 사실상 손수레 생필품 가격을 강제로 떨어뜨리도록 재촉하였다. 보스턴과 필라델피아의 여성들이 비슷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집세 지불 거부 운동(rent strikes) (386) 학교 점거 운동(school sit-ins; 글래스고우 엄마들의 학교 점거 운동; 2006년 2월 1일 13:53, 스티븐 기자; 태그: 영국 교육 배움 학습 학교 스코틀랜드 지역사회 글래스고우 직업; 금요일 글래스고우의 Carnwadric 초등학교에서 엄마들이 학교 폐쇄에 맞서 학교 점거 운동을 조직하였다. 학생 수가 239명인 이 학교는 학생들이 걸어서 1.5마일 거리에 있으며, 그 옆에는 고속도로와 이동 전화 송신탑이 있는 새로운 곳의 다른 학교와 통합될 위기에 처해 있다. <더 이브닝 타임스>가 이 사건을 기록하였다. “격노한(ANGRY) 엄마들이 글래스고우 초등학교를 지키기 위해 밤새도록 학교 점거 운동을 펼쳤다. 25명이 넘는 부모들이 폐교의 위기에 빠진 남부에 있는 Carnwadric 초등학교를 접수하였다. 그리고 위원회가 다시 생각하도록 투쟁을 계속 하겠다고 맹세하였다. 교육청 고위 관리들은 Capelrig가에 있는 239명 아이들의 학교를 폐쇄하고서, 이 학교를 360명의 아이들이 생활할 새로운 건물의 Arden 초등학교로 통합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부모들은 새로운 학교가 고속도로와 이동 전화 송신탑 옆에 세워질 것이며, 또한 아이들이 학교까지 1.5마일이나 걸어다닐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 계획에 반대하여 투쟁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은 이미 1,600의 서명이 들어간 탄원서를 위원회에 지출하였다. 그리고 학교의 날 행사가 오후 3시에 끝난 어제, 근처에 있던 25명의 부모들이 슬리핑백과 베개를 가지고, 그리고 [우리 학교를 살리자]라는 포스터를 흔들면서 학교 건물을 점거하기 위하여 움직였다. 부모들은 체육관으로 향해 갔다. 오늘 아침 6시에 마지막으로 해산할 때까지 체육관에서 그들은 여러 그룹으로 나누어 밤을 새웠다. 이 저항운동은 학교 위원회 여성 위원장인 Pauline Gilgallon이 조직하였다. 첫째 딸인 10살 Bronwyn, 둘째 딸인 8살 Charlotte, 막내딸인 7살 Romy가 이 학교에 다니는데, 그 딸들의 엄마인 Pauline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는 변화 양상에 대처해 왔다. 평화로운 분열이다. 우리는 학교 폐쇄에 대한 성명서를 준비하고 있다.” “이것이 잘 되어 갈 것이라고 나는 낙관한다. 수적으로 우세하지만, Carnwadric를 닫는 최종 결정은 돈이 될 것이다.” “만일 위원회가 강행하기로 결정하더라도, 우리는 포기하지 않겠다.” 이전에 이 학교 학생으로 30살인 Lynn Wright도 이 저항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이 학교에 다니고 있는 9살 된 아들 Dylan의 엄마는 “우리는 투쟁으로 이 문제를 풀어갈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5살 된 학생 Gemma의 엄마인 Sharon Wallace(50살)는 오늘 학교를 떠나면서 “학부모들은 어제 3시에 학교로 이동하여 점거 농성을 하자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우리는 피곤했지만 마치 저항해야만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Carnwadric 초등학교를 포함하여 폐교의 위협을 받고 있는 수십 개의 학교의 앞날은 목요일에 결정될 것이다. 시 위원회 대변인은 오늘 “협의 기간은 한차례로 끝났지만 위원회가 접수했던 모든 개별적인 대응은 앞으로도 고려의 대상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Carnwadric는 또한 탁아소, 고아원 그리고 Langside 대학 캠퍼스가 있다.)와 같은 형태들은 원래부터 노동조합 조직과 같은 다른 투쟁 형태들보다 그리 급진적인 것이 아니다. 이 두 경우에서, 그러한 형태들이 내용과 효과 면에서 혁명적일 수 있는 정도는 그 형태들의 역사적 문맥, 지도력의 특성, 대중 기반과의 연계성, 사회의 모든 것을 변형시키는 장기적인 전략의 채택 등등에 달려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성들이 특수한 물질적 조건들 때문에 특수한 투쟁 조직 방식들을 발전시킬 수 있을지를 결정하기 위하여 우리가 구체적인 혁명적 상황들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 나에게는 중요하게 느껴진다. 우리가 가부장적 친족 관계가 고정된 것이 아니라 계급 관계와 같이 적대와 투쟁의 특성이 있음을 이해하게 될 때, 비로소 여성의 의식과 지배적인 친족 관계 구조에 저항하고 그 구조를 변화시키려는 여성의 시대적인 시도들이 그 자체 계급 관계에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는 점을 우리는 깊이 생각하기 시작한다. 교회, 빈민법 담당 공무원, 도덕 개혁가들 등에 의하여 법적 결혼과 부르주아 법 규범을 18세기와 19세기 유럽과 미국의 전(前) 산업적인 노동 계급의 관습적인 성적 활동에 강제적으로 적용하려는 체계적인 시도를 예로 들어보자. 이러한 시도들은 분명히 개별적인 여성들에 의해 엄청난 저항을 받겠지만, 1848년과 1871년 프랑스에서와 같이 혁명적 투쟁이 고양되는 시기에는 “자유 노조”의 법적 인정에 대한 요구와 그 노조에 속한 아이들에게 동등한 국민 보험금 지급이 노동 계급 여성 집회의 첫 번째 요구가 되었다. 맑스주의-페미니즘 분석은 앞으로 질병, 종교 그리고 노동 윤리를 둘러싼 도덕 캠페인과 같이, 섹슈얼리티와 친족 관계가 그 자체 계급 투쟁의 중요한 영역이었다는 것을 보여 줄 수 있을 것인가(물론 이 영역이 여성이 자신을 위해 싸웠던 영역이라는 중요한 구분점이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또한 우리의 고유한 투쟁이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아이들 돌봄, 출산 통제, 학교와 병원에서의 인원 축소, 가사노동, 그리고 성적 억압을 둘러싼 싸움들이 사회주의 혁명과정의 부분이라고 느끼는 우리의 경험을 어떻게 정교화할 것이며, 또한 어떻게 실천활동과 연결시킬 수 있을까? 분리된 영역이라는 잘못된 이분법을 제거하는 것이 우리의 혁명적 전략을 위한 비판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이론적 분석을 위한 것이 된다. 위에서 언급되었던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사이의 모든 것이 상호 연관되어 있다면, 이러한 상호 연관들은 여성의 의식과 여성의 혁명적 활동을 위한 중요한 함축을 담고 있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시장에서, 좀 더 폭넓게는 국가 제도 하에서, 임금이 지불되는 노동 현장에서 그리고 가정에서 우리의 재생산 노동을 수행한다. 우리는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을 매개한다. 우리를 배제하고서는, 그리고 우리를 자본주의의 여성으로서 “생산하는” 섹스-젠더 체계에 대한 정면 공격 없이는, 자본주의 경제와 국가를 혁명하고자 하는 사회주의 운동은 사실상 근본적으로 패배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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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마지막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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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결 부분(HYPHEN)을 해체하기 : 맑스주의-페미니즘 그룹 1-5에 관한 레포트 5

3.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와 국가

 

 

우리는 바로 여성 혐오 이데올로기들의 폭넓은 정치적 함의들, 즉 그 이데올로기들이 어떻게 가부장적 가족 그 자체를 강화하고 현대 자본주의 국가에 대한 가장 근본적이고 일관된 정당성을 제공하는지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내가 그러한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구체적인 증거를 거의 가지고 있지 못하지만, 오염과 타락 또는 순수함과 모성애 화신의 근원으로서 여성을 혐오하는 이데올로기 또는 성적 이중 노동(sexual double standard)을 최상의 공공선으로 끌어올리려는 이데올로기가 국가 통합의 시기에 매우 널리 퍼져 나가기 시작했던 것 같다. 이러한 시기는 극심한 계급 분화와 사회적 불안 또는 엄청난 군국주의화와 전쟁이 있던 시기였고, 또한 중앙 집중화된 국가 기구들이 (엥겔스 표현대로라면) 사회적 무질서에 대한 일반적인 해결 수단으로서 그리고 지배계급 헤게모니를 확고하게 다지는 것으로서 발전하던 시기였다. 서구 국가의 발전 과정에서 여성 혐오 이데올로기들이 계급의 선을 추상적인 “시민”(citizenship)의 의미로 끌어들이면서 남성 집단들을 단일화시킴으로써 그러한 무질서들을 해결하려 했던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방식으로, 국가는 매우 한정된 가부장적 토대뿐만 아니라 계급적 토대 위에서도 발전하게 된다.

 

Pomeroy는 이런 패턴을 자신의 15세기 아테네의 성 정치학 분석 속에서 풍부하게 묘사하고 있다. 국가 소유의 매음굴을 설립하였고 (따라서 양가집 여인과 창녀 사이의 구별을 “제도화시키면서), 하위 계급 여성들의 지위를 하락시켰으며, 또한 상위 계급 (시민-양육자) 여성들을 엄격한 신체적‧법적 규제 속에 가두어 두었던 Solon의 법적 “개혁”을 예로 들면서, 그녀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얼핏 보기에 반페미니즘적인 것처럼 보이는 이러한 규제들은 실제로 남성들 사이의 다툼을 제거하고 새롭게 만들어진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여성들은 남성들 사이의 충돌의 영원한 근원지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Solon의 해결책은 그녀들을 눈에 보이지 않도록 하고 그녀들의 영향력을 제한하는 것이었다.”

 

 

고대 세계의 깊은 문화적 뿌리를 가지고 있는 양상과 유사한 양상이 (385) 현대 부르주아 국가 성립에서 발생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많은 증거들이 있다. Christopher Hill과 Eli Zaretsky 같은 사람들이 주장하고 있듯이, 영국 대내란(english Civil War) 이후에 나타난 “평등”, 계약 그리고 “자발적 동의”에 기초하였던 공화국은 가족 내에서의 남성 지배자들을 위한 승리를, “자유”로부터 대다수 남성들의 배제와 시민들 몸 자체 내에서의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모순 이 둘 다를 모호하게 만드는 그 지배자들의 능수능란한 미사여구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18세기 경 자코뱅 당의 이상적인 “덕”(virtue)이 극에 달할 무렵, 시민에 대한 정의는 견고하게 남성 일색이고, 그 남성의 침묵하는 파트너인 여성은 방어적이며, 온순하고 가정에 안주하는 자로서 정의된다. 그리고 또 다시 고대 그리스에서처럼, 이러한 이데올로기 경향은 여성을 점점 더 신체적으로, 법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가부장적 가족 안에 가둬두려는 것에 의해 강화된다. 나는 지금 여성 혐오적인 이데올로기와 제도들이 모든 남성을 위한 “자유와 평등”이라는 부르주아 정치 이데올로기를 합법화시키는 것을 도와줌으로써, 다른 모든 것들 가운데 민족의(남성의) 단결, 충성, 군 복무를 안전하게 유지하도록 기능한다. 합법과 불법이라는 이데올로기 탄생 그 자체는 위에서 논의하였던 하나의 지지자 또는 재생산 수단에 대한 가부장적 통제의 기능을 한다. 뿐만 아니라 시민의 참다운 의미를 부풀리거나 신비화시키는 데 일조한다. (공화국의 덕과 여성의 종속 둘 다에 관한 탁월한 이데올로그인 Jean-Jacques Rousseau가 여성이 자신으로서는 이중노동일이 될 그 노동일을 위반한다는 것은 “반역” 행위를 구성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하찮은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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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결 부분(HYPHEN)을 해체하기 : 맑스주의-페미니즘 그룹 1-5에 관한 레포트 4

2. 가부장적 권력과 재생산 수단에 대한 통제

 

 

페미니즘 운동은 항상 뿌리 깊은 신념에 기초해 왔고, 종종 개인적인 저항 또는 폭넓은 사회적 요구 측면으로 나타났으며, 피임과 낙태 또는 “불법”으로 정의된 것들과 같은 그러한 것들이 가장 높은 수준의 정치적인 것이다. 대체로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슬로건은 이러한 현실을, 즉 사람들이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섹스를 하고 피임을 하며, 또는 아이를 낳는지 하는 것은 커다란 정치적 중요성을 지닌 이슈들이라는 현실을, 또한 이런 이슈들과 관련된 고립된 “사적 영역”이란 결코 없다는 현실을 알리는 의미로 쓰였다. Linda Gordon과 Sarah Pomeroy의 연구 같은 최근의 페미니즘 연구는 이러한 슬로건에 역사적 내용을 부여하고 있다. 그들의 연구는 우리에게 재생산 통제와 가부장적 권력, 계급 권력 그리고 국가 권력 사이의 관계에 대한 맑스주의-페미니즘 이론을 발전시킬 수 있는 구체적인 역사적 토대를 제공한다. Pomeroy와 Gordon 이 두 사람(한 사람은 (382) (B.C.) 15세기의 아테네에 관해 말하고, 다른 한 사람은 19세기 미국에 관해 말하고 있다)은 예를 들어, 법과 사법적 판결의 의미를 반영한 것으로서 “합법”(legitimacy)과 “불법”(illegitimacy)과 같은 개념들의 의미가 국가의 인구 통제 정책들과 그 정책들을 지배하는 사회 경제적 조건들의 변화와 관련하여 명백하게 바뀌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특히 Pomeroy는 고대 아테네의 여성 지위가 시민 생산을 그녀의 첫 번째 의무 기능으로 삼았다는 데 있었음을 주장하면서, 합법성, 성관계, 낙태, 영아 살해, 시민과 이방인 사이의 결혼, 그리고 간음과 관련된 아테네의 법률들이 모두 직접적으로는 군사적인 남성권력에 대한 요구를 충족시켰고 간접적으로는 국가 권력을 확고하게 만들었던 의도적인 재생산 통제 정책들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재생산 수단에 대한 통제는 가부장적 (자본주의 또는 전자본주의) 국가에 (그 국가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옮긴이) 상당한 인적 자원을 제공한다. 예를 들어, 직접적으로 아이들의 출산 형태와 수를 통제하는 정책은 수에 대한 통제권, 여러 계층 또는 신분 사이에서의 인구 분포에 대한 통제권, 잠재적 시장 변동 등과 관련한 잠재적 노동 또는 노예 풀(pools) 크기에 대한 통제권을 국가와 지배 계급에게 부여한다. 비슷한 예로, 섹슈얼리티에 대한 합법적이고 불법적인 표현들을 규정하는 지배적인 규범들(예를 들어, 아내에 대한 남편의 성적 강제의 법적인 처벌, 매춘을 규제하거나 지원하는 국가 법률, 남창에 관한 법률, 동성애에 대한 금지 등)은 단지 특정한 가부장적 가족 구조와 (특히 여성과 동성애자에 대한) 성적 억압을 강화시키는 것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다. 더 나아가 이 규범들은 가부장제 속에 살고 있는 어머니들의 아이들과 그 아이들의 운명에 대한 통제권을 국가의 수중에 둠으로써, 그 통제권을 가족들, 즉 그녀들의 손에서 빼앗아 버린다.

 

Pomeroy와 Gordon의 연구에서 나타나는 재생산 통제에 대한 분석은 그러한 의문들에 대한 “급진 페미니즘”의 관점과 동일시되는 분석들과 “맑스주의-레닌주의” 접근법과도 다르다. 한편으로, 맑스주의-페미니즘의 탐구 방법은 한 측면에서 볼 때 재생산 수단에 대한 통제가 사실상 계급 문제임을 보여 주면서, 사실상 수많은 재생산 통제 정책이 가지고 있는 계급 기초를 인정한다. 물론, 위에서 언급한 인적 자원을 통제하는 것이 모든 남자는 아니지만, (383) 자본주의-제국주의 지배 계급을 구성하는 남자들이다. 더욱이 Gordon의 책이 보여 주고 있듯이, (체계적인 국가 인구 통제 정책과는 반대되는 것으로서) 개인들의 출산 통제권을 위한 자유주의자들의 운동은 그 자체 이따금 특정한 계급 편향들(예를 들어, 후기 “자발적 모성” 지지자들과 Margaret Sanger와 같은 20세기의 출산 통제 개혁가들에 의한 우생학 이론과 정책에 대한 지지)을 반영해 왔다. 마지막으로, 재생산 통제는 그 형태와 영향이 서로 다른 계급과 민족 그룹의 여성들에 대해 차이가 난다는 의미에서 계급적 문제이다. 이러한 계급-민족적 분리의 가장 노골적인 예는 물론, AID(Agency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artificial insemination by donor 비배우자(非配偶者)간 인공 수정)와 푸에르토리코 여성, 미국 원주민 여성 그리고 그 외 제국주의 주변에 있는 제3세계 여성들에 대한 또 다른 국가 인구 통제 기관들에 의해 강요된 체계적인 비자발적 불임이다.

 

비자발적 불임을 포함한 그러한 재생산 통제를 논의한다는 것은 전적으로 또는 근본적으로 그러한 실행이 약 4,000년 동안의 가부장적 전통에 의해 점점 더 강화되었고 정당화되어 왔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계급 문제이다. Gordon이 설득력 있게 지적하고 있듯이, 단순하고 효과적인 출산 통제 수단들이 대부분의 기록된 역사를 통해 여성에게 잘 알려져 있었던 한에서는, 가부장 시대의 그러한 수단들에 대한 억압은 기술적 변화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학(특히, 여성 자신을 해방시키려는 여성의 시도에 대한 반페미니스트들의 응답)의 문제이다. 사실 비자발적 불임 프로그램들은 다른 계급과 민족 집단 여성들이 처해 있는 문제들과는 아주 다른 제3세계 여성들의 문제들을 값싸고 안전한 낙태와 출산 통제를 보장하려는 쪽으로 배치하고 있다. 그런데 이 두 문제들은 지배적인 남성 집단이 재생산 자체를 통제하고자 하는 데서 생겨난 문제들이다. 맑스주의-페미니즘은 역사적으로 특수한 인구 통제 형태들에 관한 분석을 재생산 수단, 여성의 몸 그리고 방법의 사항들과 물질적 조건들을 장악하고 있는 남성 우월주의라는 보다 넓은 구조 속에 다시 배치한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통제가 여성의 특수한 계급 그리고 민족 집단과 관련하여 특수한 형태들을 취하고 있으면서, 다른 한편으로 그 통제는 (384) 그러한 분리를 넘어서며 모든 지위의 여성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리하여 이 통제는 명백하게 페미니즘의 이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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