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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가부장제 이론의 발전과 사회주의 페미니즘 6

3. 자본주의 가부장제에서 노동과 사회의 성 분업 : 새로운 페미니즘 이론을 향하여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상호 연관성을 분석하려는 과정에서 생시는 문제들 중의 하나는 우리의 언어가 가족과 경제를 분리된 체계로서 다룬다는 점이다. 그러나 위계적인 노동의 성별 분업은 이 두 가지가 만들어 내는 문제를 해결해 준다. 자신의 생물학적 성에 따르는 인간의 행동, 목적, 목표, 욕망 그리고 꿈을 규정해 주는 노동과 사회의 성별 분업은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기초를 이룬다. 이 성별 분업은 여성과 남성을 그들을 대표하는 위계적인 성 역할로 분리하고 그 역할과 관계되는 의무들을 가족 영역과 경제 영역으로 구조화시킨다.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상호 의존성에 관한 이러한 진술은 가부장제가 자본의 필요에 부응할 뿐만 아니라 자본이 가부장제의 필요에 부응한다는 점을 가정하고 있다. 누군가가 자본주의는 효과적으로 작동하기 위하여 가부장제를 필요로 한다고 말할 때 그는 성적 위계 체계로서 남성의 우월성이 (28) 자본주의에 필요한 질서나 통제를 자본주의에게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 진정으로 주목하고 있다. 이러한 가부장제 통제 체계는 사회와 경제적 체계를 부드럽게 기능하도록 하는 데 필수적이며, 그리하여 결코 그 토대는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이런 주장은 남성 우월 체계로부터 나타나는 문화적, 사회적, 경제적 그리고 정치적 통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겉보기에, 이익과의 관계와 사회적 통제와의 관계가 가부장제와 뒤엉켜 있으며(그렇지만 결코 서로에게 환원될 수 없다), 자본주의는 완전한 과정이 된다. 각 체계의 특수한 요소들은 다른 체계에 의해 필요한 것이 된다.

 

자본주의는 가부장제를 이용하며 가부장제는 자본의 필요에 따라 규정된다. 이러한 진술은 앞의 주장, 즉 하나의 체계가 다른 체계를 사용하는 동시에 다른 체계의 특성을 지키기 위하여 다른 체계의 필요 주변에서 다른 체계를 조직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유지시킨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체계는 자신의 특성을 잃어 버릴 것이며 이와 더불어 자신의 독특한 가치를 잃어 버리게 될 것이다. 가능한 한 단순하게 이것을 말한다면, 누군가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가부장제(남성 우월성)는 정치적 통제를 위해 사회에 성적인 위계 질서를 제공할 것이지만, 하나의 정치적 체계로서 경제적 구조로 결코 환원될 수 없다. 반면에 이익 추구를 원동력으로 삼는 경제적 계급 체계로서 자본주의는 가부장적 질서를 이용한다. 이 둘(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은 둘 중의 이것 또는 저것이 아니라 둘의 특수한 혼합물인 사회의 정치 경제를 함께 형성한다. 이렇게 과도하게 단순화시킨 진술은 몇 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다. 이 진술은 이 두 영역 모두에 존재하는 관계들을 끊어낸다. 예를 들면, 자본주의는 사회의 경제적 계급 관계들과 그 관계들을 작업장 내에서 조직화하는 것으로부터 나타나는 일련의 통제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진술은 모든 점에서 두 체계 사이의 조화를 가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좀 더 발전된 자본주의로 나아가 보면, 이러한 관계 맺음이 얼마나 쉽지 않은지를 볼 수 있다. 노동력 부문(경제적 계급 영역-옮긴이)에 여성의 편입이 점점 더 늘어나면, 가부장적 가족 관계들과 관련된 몇몇 통제는 허물어지게 된다(이중 노동은 보다 분명해진다(the double day becomes more obvious)). 그러나 여성을 노동력 부문에 게토화시키는 것은 동시에 사회의 성적인 위계 체계를 손상시키지 않도록 하는 여성의 위계적인 통제 체계를 성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유지시키는 것이다. 가부장적 (29) 위계와 통제에 대한 복종은 바로 다음과 같은 사실, 즉 값싼 노동을 구한다는 것이 여성을 노동력 부문의 모든 부분들로 완전히 통합시킨다는 것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나타난다. 비록 여성의 노동이 값 싸다고 하지만, 사회의 필수적인 질서 그리고 이와 더불어 여성 노동의 싼 가격 모두를 유지시켜 주는 통제 체계는 여성이 (가사노동으로부터-옮긴이) 노동력 부문으로 분리돼 들어감으로써 보호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여성의 이중 노동(woman`s double day)과 불평등에 대한 정당화는 오늘날 점점 더 약화되고 있다.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와 여성 삶의 현실 사이에 모순이 있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비록 모든 여성이 어머니(그리고 비노동자)로서 규정된다고 할지라도, 미국 여성의 약 45%(3천 8백 6십 만 명)가 임금을 지불 받는 노동력 부문에서 일을 하고 있고, 거의 대부분의 노동이 집에서 이루어진다. 전체 노동하는 여성의 4분의 1 가까이가 독신이다. 19%는 과부이거나 이혼했거나 별거 중이다. 그리고 나머지 26%는 년 소득 1만 달러 이하의 남성과 결혼한 여성이다. 그러나, 지배 이데올로기 내에서 여성은 노동자로 규정되지 않기 때문에, 여성은 노동에 대한 임금을 받지 못하거나 남성보다 더 낮은 임금을 받는다. 여성을 어머니로서 성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그녀를 임금이 지불되지 않는 집안 노동에 머물게 하거나 그녀에게 부과된 성적인 열등성 때문에 그녀를 낮은 임금에 고용할 수 있도록 한다. 실업률이 문제라면, 여성은 전혀 일을 구할 수 없거나 더 낮은 비율로 일을 구하게 된다. 노동과 사회의 성적 분업은 여성이 임금을 받는 경제 영역에 있다고 하더라도 손상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된다. 이데올로기는 여성을 일하는 어머니로 규정함으로써 이러한 상황에 순응한다. 그리고 두 개의 일은 한 개 일에 해당하는 임금 가격보다 더 적은 가격으로 수행된다.

 

가사노동에 포함된 모든 과정은 현존하는 사회가 영원히 지속될 수 있도록 해 준다. (1) 여성은 가부장적 구조들(가족, 주부, 어머니 등)을 이런 역할 수행을 통해 안정화시킨다. (2) 동시에, 여성은 임금을 받는 노동력과 그렇지 못한 노동력 모두로 새로운 노동자를 재생산한다. 여성은 사회의 남성들과 아이들을 돌본다. (3) 여성은 또한 저임금으로 노동력 부문에서 일한다. (4) 여성은 소비자로의 역할을 함으로써 경제를 안정화시킨다. 생산의 또 다른 측면이 소비라고 한다면, 자본주의의 또 다른 측면은 가부장제이다.

 

사회와 노동의 이런 성적 분업이 (30) 자본주의에 선행한다고 하더라도, 그 분업은 발전된 자본주의의 필요 때문에 점점 더 제도화되었고 특히 핵가족의 측면에서 규정되었다. 이제 그 분업은 전(前)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루었던 것보다 더 많은 형태와 구조를 가지고 있다. 전(前)자본주의사회에서 남성, 여성 그리고 아이들은 집, 농장 또는 경작지에서 생활에 필요한 물품들을 생산하기 위해 같이 일하였다. 여성은 아이를 낳고 기르는 사람이었지만, 일을 구성하는 방식은 이러한 성적 역할 구분의 영향 아래에 있었다. 산업 자본주의가 시작되면서, 남성은 가정의 울타리를 벗어나서 임금 노동 경제로 편입되었다. 여성은 집안에 갇히기 시작했고 많은 여성들이 공장에서 일을 함에도 불구하고 남성에 의해 점점 더 비생산적인 존재로 여겨졌다. 여성들은 성 역할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배타적으로 여성의 역할만 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여성이 산업 자본주의 이전에도 어머니였지만, 이것은 배타적인 역할이 아니었다. 반면에 산업 자본주의에서 여성은 가정주부가 되었다. “프롤레타리아트 쪽에서 보면, 가정주부는 발전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중적 특성을 지닌 노동자로 나타난다.” 여성이 집안에서 지속적으로 수행하는 노동은 노동으로서 인정되지 않았다. 생산적 노동이 임금 노동, 즉 잉여가치(자본)를 생산하는 노동으로 규정되었다.

 

따라서 사회의 생산 조건들은 가족 내에서의 생산, 재생산 그리고 소비를 규정하고 또한 그런 형태를 구체화시킨다. 그렇게, 또한 가족의 생산, 재생산 그리고 소비 양식은 상품 생산에 영향을 준다. 이것들은 모두 정치 경제를 규정한다. 정치적 질서와 통제 체계가 필수적으로 요구하는 이윤이 통치 계급에게 기본적으로 우선되는 영역인 자본주의 가부장제 경제 영역에서 사회와 노동의 성적 분업은 특별한 목적에 기여한다. 이 분업은 가족을 통해 사회를 안정화시킨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노동, 다시 말해서 가사노동을 조직하는데, 이 가사노동에는 무임금이거나(가정주부), (집안일을 하는 노동자에게 지불되는) 얼마 안 되는 임금(limited pay)이거나 또는 (임금이 지불되는 노동력 부문에서의) 불평등한 임금의 경우가 있다. 이 마지막 범주는 계급 구조 내에서의 노동의 성별 분업에 따라 여성에게 궁극적으로 미치는 영향을 보여 준다. 임금을 지불 받는 노동자로서 여성의 지위는 이윤 계기를 둘러싸고 조직된 사회의 위계적인 성적 분업의 직접적 반영인 여성으로 존재한다는 측면에서 규정된다.

 

(31) 모든 개별적인 남성이 그들을 위해 수행되는 노동(labor)과 연관하여 이익을 얻는 반면에, 한 계급으로서 부르주아지는 여성 노동(women`s work)의 기본적인 배치로부터 이윤을 얻는다. 계급과 상관없이, 남성들은 (이익을 얻는 정도가 다를지라도) 그들이 가부장제 사회 안에서 얻는 여러 특권의 체계로부터 이익을 얻는다. 이데올로기와 남성 위계 구조가 사회의 기초가 아니었다면, 여러 특권으로 이루어진 체계는 그 자체 결코 성립될 수 없었을 것이다. 계급 체계를 통해 만들어진 인위적 욕구들과 함께 노동과 사회의 성별 분업을 유지시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위계이다.

 

가족을 유지하고자 지배계급의 욕망은 최대 이익을 보장할 뿐만 아니라 위계적인 질서를 사회에 부여하는 노동 분업에 가족을 문화적이고 정치적으로 연루시키는 것으로 나타난다. 일단 노동의 성별 분업이 변화한다면, 특히 자본주의 질서와 관련하여 도전을 받게 된다면, (특히 가정에 영향을 미치지만, 전체 사회에 폭넓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일의 여러 구성 형태 중 하나도 도전을 받을 것이다. 이러한 도전은 삶의 거의 모든 측면에 스며들어 있는 자유로운 노동 풀(pool), 그리고 값싼 노동 풀(pool)뿐만 아니라 성적 위계 그 자체인 기본적인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사회 구성을 위태롭게 만든다. 사회의 성적 위계를 함축하고 있는 권력 배치로부터 도출되는 그러한 질서와 통제는 해체될 것이다.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에 기본적으로 두 가지 종류의 일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될 때, 우리는 노동자들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을 변경시킬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가 해야만 하는 일은 계급이 여성에게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는 단순히 여성이 계급 범주에 꼭 들어맞는 방식을 재검토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범주 자체를 재정의해야 한다. 우리는 여성의 복잡한 현실과 그러한 현실에 대한 여성의 의식과 관련하여 계급을 정의할 필요가 있다.

 

현재 계급 범주는 현재 기본적으로 남성의 측면에서 규정되고 있고, 여성은 그녀의 남편이 맺는 생산수단과의 관계를 기초로 하여 계급에 귀속된다. 여성은 자율적인 존재로 보이지 않는다. 여성이 중간 계급(middle-class)으로 불리는 것은 어떤 척도에 따른 것인가? 중간 계급 여성의 지위가 중간 계급 남성의 지위와 상당히 차이가 날 때 그녀의 삶이 노동 계급 여성의 (32) 삶보다 훨씬 “편하다고” 말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가사노동자(houseworker)로서) 전혀 소득이 없는 여성은 누구이며 그녀의 남편이 중간 계급이기 때문에 중간계급이라고 불리는 여성은 누구인가? 그녀는 그 자신의 방식으로 돈을 버는 그녀 남편과 똑같은, 그녀의 삶을 넘어서는 자유, 자율성, 통제권을 가질 수 있는가? 그녀의 지위는 남은 임금의 직업을 가진 독신 여성의 지위와 어떻게 비교되는가?

 

 

명확하게 상위 계급 또는 중간 계급(자세하게 이것들이 무엇을 의미하건 간에)이라는 딱지를 붙인 남성은 자신의 상대방인 여성보다 더 많은 돈, 권력, 안전, 그리고 선택의 자유를 가지고 있다. 대부분의 여성은 전적으로 또는 부분적으로 남성의 부양에 의존하고 있는 아내이고 어머니이다. 그리고 주인(남성-옮긴이)은 무엇을 베풀지만 거두어 갈 수 있다.

 

 

나는 이러한 물음들을 통해서 계급 표식이 의미가 없다거나, 또는 계급 특권이 여성들 사이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또는 가정주부들(가사노동자들)이 하나의 고유한 계급이라는 것의 의미를 담고 있지 않다. 그러나, 여성으로서 우리가 가지는 현실적인 유사성이 무엇인지를 다루기 전까지 우리의 현실적인 계급 차이가 무엇인지를 알 수 없을 것이라는 의미는 담고 있다. 나는 우리가 여성과 남성들 사이의 관계와 계급 구조, 생산과 재생산, 가사노동과 임금노동, 그리고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 등의 측면에서 여성들 사이의 권력 차이에 대한 의문을 다루는 단어와 개념적 도구들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이후라야 우리는 여성을 조직하기 위한 우리의 이해에 대해 이것이 어떤 효과를 가지고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함께 일할 수 있게 될 때 우리는 우리의 유사성과 차이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차이가 우리를 갈라놓는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유사성은 이러한 갈등들을 재규정하는 그 무엇이 된다. 페미니즘 계급 분석은 전체로서의 경제 영역 안에서 여성들이 수행하는 노동과 관련하여 여성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구별, 즉 가정 밖에서 일하는 여성들 사이(전문직 여성 대 비전문직 여성 사이), 가사노동자들(가정 밖에서 일하지 않는 가사노동자 그리고 가사노동자이면서 또한 밖에서 일하는 여성 사이), 생활 보조금을 받는 여성들, 실업 여성들 그리고 전혀 일을 하지 않는 부유한 여성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구별로부터 시작해야만 한다. 이러한 계급 구별들은 더 나아가 인종과 결혼 상황과 연관하여 규정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우리는 (33) 이러한 각각의 범주에 속하는 여성들이 다른 범주에 있는 여성들의 경험들을 재생산, 아이 양육, 섹슈얼리티, 소비, 가정 유지라는 행위 속에서 어떻게 공유하는지를 연구할 필요가 있다. 페미니즘의 이러한 계급 탐구 분석에서 우리가 앞으로 발견하게 되는 것은 하나의 복잡하고 다양한 패턴인데, 다양한 눈금을 가진 이러한 페미니즘의 개념화는 여성의 현실적인 삶과 경험 속에서 나타나는 성과 계급 차이들의 복잡성을 반영한다.

 

 

 

이 모델은 사회의 성적 위계와 자본주의 사이의 기본적인 관계 맺음이라는 문맥 안에서 계급 차이에 주목하도록 만들 것이다. 희망적이게도, 사회주의 페미니즘 분석은 본질적으로 분리된 체계가 아닌 이러한 체계들 사이의 관계 맺음을 계속 탐구할 수 있도록 해 준다. 이러한 페미니즘 계급 분석은 앞으로 여성의 서로 다른 경제적 현실을 다루게 될 것이지만, 이 분석을 통해서 크게는 (34) 가부장적이고 자본주의적인 필요라는 문맥 속에서 규정되는 여성들을 보게 될 것이다. 여성은 여성으로서 비슷한 경제적 지위를 가지지만, 현실적인 경제적 계급 차이들을 경험하는 가족 구조를 통해 여전히 분리되어 있다. 이러한 검토를 통해 고립된 가정 속에서가 아니라 사회적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기 위한 여성의 잠재력을, 소외되거나 마음이 내키지 않는 일이 아닌 창조적 일을 하기 위한 여성의 잠재력을, 잘못된 의식에 대립하는 것으로서의 비판적 의식을 위한 여성의 잠재력을, 그리고 섹슈얼리티의 새로운 개념들로부터 나타나는 무제한의 섹슈얼리티를 위한 여성의 잠재력을 현실화시키려고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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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가부장제 이론의 발전과 사회주의 페미니즘 5

종합 : 사회적 페미니즘

 

 

1. 착취와 억압

 

 

맑스주의 분석은 현존하는 권력 관계를 경제적 계급 관계의 관점으로 역사적 설명을 하고자 한다. 그리고 급진 페미니즘은 권력을 생물학적 현실로 다룬다. 다른 한편으로,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계급의 기원과 가부장제적 뿌리라는 관점에서 권력을 분석한다. 바로 이러한 분석 안에서는 자본주의와 가부장제가 서로 독립적인 체계가 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서로 동일한 체계가 되지도 않는다. 이 둘은 그 현실적인 형태를 놓고 본다면, 서로 의존적이다. 권력과 억압과 관련하여 자율적인 측면으로서 인종 측면에 초점을 두는 것은, 사회주의 페미니즘 분석에 필수적인 것이지만, 이 논의를 벗어나는 것이다. 억압에 관해 아래의 논의에서 볼 수 있듯이, 인종이 권력 규정에 있어 핵심적 요소로 나타나지만, 나는 인종에 관한 좀 더 포괄적인 분석을 향해 나아가는 첫 단계로서 성과 계급 사이의 관계에만 초점을 두고 있다. 맑스와 엥겔스가 여성 또는 소수 인종의 경우에서 억압과 착취를 동등한 개념으로 보았지만,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동등한 개념으로 보지 않는다. 착취는 남성과 여성의 경우에 적용되는 자본주의 계급 관계의 경제적 현실을 말하는 것이고, 반면에 억압은 가부장적이며, 인종주의적이고 자본주의적인 관계들 안에서 규정되는 여성과 소수자에 관해 언급하는 것이다. 착취는 노동력을 가지고 있는 여성과 남성에게 일어나는 것이다. 여성의 억압은 임금 노동자로서 그녀의 착취로부터 비롯되는 것뿐만 아니라 가부장제의 성 위계질서 안에서 나타나는 그녀의 존재를 어머니, 가사 노동자, 그리고 소비자로서 규정하는 관계로부터 비롯된다. 인종 억압은 여성의 착취와 억압에 따른 사회의 인종 분리 속에 그녀를 위치시킨다. 억압은 착취를 포함하지만 (23) 보다 복잡한 현실을 반영한다. 권력(또는 그 반대 극인 억압)은 성, 인종 그리고 계급으로부터 도출되며, 이러한 것은 가부장제, 인종주의 그리고 자본주의의 물질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것 둘 다를 통해서 나타난다. 억압은 노동과 사회의 성적이고 인종적 분업이라는 위계적 관계를 반영한다.

 

나는 내가 자본주의 가부장제라고 부르기로 결정했던 것으로 현재 실행되고 있는,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의 상호 의존성을 파악하는 데 한정해서 논의를 진행해 갈 것이다. 자본주의 가부장제의 역사적 발전은 18세기 중반 영국에서부터 그리고 19세기 중반 미국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 둘 다 모두 가부장제와 새로운 산업 자본주의 사이의 발전된 관계를 반영한다. 자본주의 가부장제를 규정해 보자면, 그것은 성과 계급, 사적인 것과 공적인 영역, 가사노동과 임금노동, 가족과 경제, 개인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그리고 이데올로기와 물질적 조건이라는 이분법을 깨고 나온 것이다.

 

우리가 보았듯이, 맑스와 엥겔스는 인간의 억압을 인간이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자라는 착취 당하는 자로서의 위치에 있기 때문에 나온 결과로 보았다. 그들은 여성의 억압을 같은 종류의 것으로 가정하였다. 그들은 자연적이고 본질적인 면에서 가사 노예를 임금 노예와 동일한 것으로 제시함으로써 이 둘을 동등한 것으로 보았다. 맑스와 엥겔스는 여성이 노동력을 가지고 노동을 하였을 때 그녀가 프롤레타리아트의 일원으로서 착취 당하고 있음을 인정하였다. 그런데 그들은 그녀가 가사 노예와 관련되었을 경우 그녀를 비임금 노예로 보았다. 자본주의가 여성을 착취하는 것으로 보여졌지만, 거기에는 가부장제와 자본주의가 모두 어떻게 여성 억압을 규정하였는지에 대한 고찰이 없었다. 오늘날, 특히 급진 페미니즘의 통찰 덕분에 우리는 착취와 억압의 동등성이 문제가 되고 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우리가 임금 노동으로서 생산적 노동이라는 맑스 고유의 범주를 사용할 경우, 가사 노예가 임금 노예와 같은 동일한 방식으로 착취 당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것이 사실이 되기 위해서 그들에게 임금이 지급돼야 할 것이다.

 

맑스주의 분석에서 억압을 착취로 환원시키는 것은 경제적 계급 구조를 사회 권력 구조와 동등한 것으로 놓는 기초에 바탕을 둔다. 사회주의 페미니즘에게 있어서, 여성 억압은 그녀의 계급 지위 (24) (그녀의 착취)보다 더 큰 것에 뿌리를 두고 있다. 게다가 그녀의 지위는 구조적이면서 이데올로기적으로도 가부장제 안에 놓여 있어야 한다. 그것은 계급 구조 안에서 맺어지는 위계적인 성적 사회 질서와의 특별한 관계이자 그 질서 안에서의 기능이거나 자본주의 가부장제의 인간 활동에 초점을 두는 성적 사회 질서 내에서 계급 구조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것들(계급 구조와 위계적인 사회 질서)은 함께 존재하며 잘못하여 분리시키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이러한 의문들(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다룰 때, (경제적 또는 성적인) 물질적 현재 조건과 이데올로기 사이의 분리를 깨트려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다시피, 가부장제의 기초가 되고 있는 노동과 사회의 성 분업은 물질적 형태(성 역할 자체)와 이데올로기적 실재(이러한 성 역할을 규정하는 고정 관념, 신화 그리고 이념들) 모두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어떤 내부적 망으로 짜여져 존재한다.

 

여성의 현실적 존재가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의 지배적 이데올로기와 제도들에 의하여 규정된다고 할 때, 자본주의만을 파악하는 일은(또는 가부장제만을 파악하는 일은) 여성 억압의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도록 할 것이다. Juliet Mitchell이 썼듯이, “자본주의 경제의 폐지와 이를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정치적 도전은 그 자체로 가부장제 이데올로기가 변할 수 있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이러한 폐지가 필연적으로 가부장적 제도들의 해체로 이어지지 않는다. (경제적 폐지가-옮긴이) 각자의 영역에서 서로 다르게 이루어졌다고 할지라도, 성별 노동 분업은 소련, 쿠바 그리고 중국에 남아 있다. 이러한 사회들의 역사는 서로 다르고, 또한 가부장제에 대항하는 투쟁의 한계는 그 나라 문화의 특수성에 의해 규정된다. 특히 쿠바와 중국에서 여성 삶의 실질적 진보가 있었다. 그러나 노동과 사회의 성별 분업이 이런 나라들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정확한 것이 못된다. 최근에 쿠바에서만 성별 노동 분업이 혁명의 특수한 문제로 다루어졌을 뿐이다. 그리하여 정의상, 가부장제는 서로 다른 사회 속에서 서로 다르게 성별 위계를 제도화함으로써 다르게 실현된다고 하더라도, 교차문화적(crosscultural)이다. 성 역할의 윤곽이 사회적으로 서로 다를 수 있지만 권력은 남성을 통해 존재해 왔고 존재하고 있다.

 

급진 페미니즘과 사회주의 페미니즘 모두 다 가부장제가 (25) 자본주의에 선행하고 있다는 사실에 동의하는 반면에 맑스주의는 가부장제가 자본주의와 더불어 발생했다고 믿는다. 오늘날 가부장제, 즉 자본주의에서의 성 역할을 통한 남성의 권력은 핵가족 내에서 제도화된다. Mitchell은 이러한 것을 “선사시대에 살해된 아버지의 법칙(law of the prehistoric murdered father)”과 연관시키고 있다. 우리 삶의 여명기에 남성들 사이의 이러한 신비적 범죄 속에서 하나의 사회 집단으로서 가부장제의 확실한 뿌리를 찾으려는 와중에, Mitchell은 가부장제를 여성과 남성 사이의 대립 속에 있는 유물론적 정식과 연결시키기보다는, 오히려 가부장제가 생산하는 이데올로기 관점에 좀 더 치우쳐 가부장제를 논의하는 위험을 안게 된다. 그녀는 보편적인 가부장제 문화의 뿌리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본다. 그러나 그녀에게서 문화는 오늘날 본래 이데올로기 형태 속에 존재하는 교환 체계를 통해 규정된다. Mitchell의 경우, 가부장제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보편적 존재를 통해 자본주의에 선행한다. 그러나 나는 생물학적 차이에 관한 이데올로기적이고 정치적인 해석으로부터 도출된, 현존하는 사회의 성적 질서를 통해 가부장제가 자본주의에 앞선다고 주장한다. 다른 말로 하면, 남성들은 여성이 인류를 재생산한다는 사실로 해석하는 것을 선택하고 그 사실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였다는 것이다. 재생산과 이 재생산을 남성이 정치적으로 통제한다는 사실로부터 재생산 관계들은 여성 억압의 특수한 형태로 떠올랐다. 가부장제 문화는 사회의 성적 위계질서를 지키기 위하여 한 역사적 시기로부터 다른 역사적 시기로 넘어가게 된다. 오늘날 사회의 성 분업은 몇 년 간의 이데올로기적 압력에 의해 생겨난 현실적 차이들에 기초한다. 물질적 조건들은 필요한 이데올로기를 규정하며, 그 다음에 이데올로기는 현실과 이전 현실에 영향을 미친다. 거기엔 두 가지 방식의 흐름이 있다. 여성들은 자신들이 속한 사회 역사의 생산물들이지만, 여전히 자신들의 고유한 삶을 형성시키지 못하고 있다.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경우, 역사적 유물론은 생산관계가 여성의 섹슈얼리티로부터 나타난 관계, 즉 재생산관계들과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파악하지 않고서는 생산관계에 의하여 규정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들의 이데올로기적 형태들이 열쇠이다. 페미니즘 유물론을 통해 우리는 바로 자본주의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특수한 현실적 상황을 파악하게 될 수밖에 없다. (26) 계급적 관점의 맑스주의와 성적 관점의 급진 페미니즘 각각이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접근법들은 여성의 삶 속에 있는 관력 관계의 현실에 대한 판단을 흐리게 한다.

 

 

2. 페미니즘 유물론의 선구자들 : de Beauvoir와 Mitchell

 

 

Simone de Beauvoir는 『제2의 성』(The Second Sex)에서 역사와 성 사이의 상호관계와 마주하게 된다. 그녀는 “성 분업을 인간 역사의 한 사건이 아니라 생물학적 사실로 보고 있”지만, “우리는 존재론적, 경제적, 사회적 그리고 심리학적 문맥 속에서 생물학 사실을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녀는 여성이 남성에 의해 규정되었고 그 자체 “타자”의 역할 속으로 던져졌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프로이트의 성 일원론과 엥겔스의 경제 일원론 모두 여성 억압을 충분히 파악할 수 없다는 사실 또한 깨닫고 있다. De Beauvoir의 초기 통찰들은 Juliet Mitchell에 의해 한층 더 발전하였다. Juliet Mitchell은 『여성의 토지』(Woman`s Estate)에서 계급적 사회주의 이론이 여성의 억압을 너무 협소하게 가족 안에 한정시키고 있다고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그녀는 여성의 문제를 여성이 일할 능력이 없다는 것으로 환원시키는 것을, 즉 사적 소유와 계급착취의 제도의 측면에서 여성을 단순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 대신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이 권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은 네 가지 기본적인 구조, 즉 생산, 재생산, 섹슈얼리티 그리고 아이들의 사회화의 구조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여성의 생물학적 능력은 그녀의 사회적, 경제적 목적을 규정한다. 모성은 역사적 필요로서 가족을 내놓았고, 가족은 여성의 세계가 되었다. 그리하여, 여성은 성적 불평등을 낳는 생산과 공적 삶으로부터 배제되었다.

 

자본주의 가족은 여성의 억압적 조건을 강화한다. 가족은 자본주의의 대부분이 분열하는 가운데서도 조용히 유지될 수 있는 방식을 제공함으로써 자본주의를 떠받친다. 가족은 생산적인 노동력을 제공하고 거대한 소비 시장을 공급함으로써 경제적으로 자본주의의 버팀목이 된다. 또한 가족은 사회의 신념 구조의 기초가 되는 개인주의, 자유 그리고 평등에 대한 믿음을 촉진시킴으로써 이데올로기 역할을 수행한다. 비록 개인주의, 자유 그리고 평등이 사회 경제적 현실과 거리가 멀지라도 말이다.

 

(27) Mitchell은 가족만의 해체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여성의 상황이 필연적으로 사실상 qua화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에 동의한다. Mitchell은 “사회주의가 가족의 폐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적절하게 사회적으로 승인된 관계들, 즉 가족 속에 강력하고도 단단하게 압축되어 있는 관계들의 다양성을 뜻한다”고 말한다.

 

Mitchell 분석의 중요성은 그녀가 여성이 재생산의 존재이며, 성적 존재이고, 개별적으로 노동하는 개인이며 또한 아이들을 사회화시키는 존재이기 때문에 여성 자신의 모든 활동 영역에서 경험하는 권력 없음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사실에 놓여 있다. 그녀는 가족이 자본주의 체계를 떠받치고 있는 부분에 여성 억압의 뿌리가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권력은 복잡한 실재(현실)로서 나타난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자본주의 가부장제 사회에서 가족과 정치 경제학 사이의 관계를 분명하게 밝혀야 할 필요를 느끼는 좌파이다. Mitchell이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족에 대한 이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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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가부장제 이론의 발전과 사회주의 페미니즘 4

2. Shulamith Firestone : 성 변증법

 

 

1970년에 출판된 자신의 책 『성 변증법』에서, Shulamith Firestone은 급진 페미니즘을 모범적으로 표현하였다. 그녀가 말하는, 여성들이 경험하는 특별한 억압은 여성들의 유일한 생물학적 생태와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다. 여성의 재생산 기능은 본래 여성의 억압의 중심에 있다. 따라서 생물학적 가족도 그러하다. Firestone에 따르면, “권력의 성적 불균형은 생물학적인 기초이다.” 여성과 남성은 생물학적으로 다르며, 따라서 평등한 권리를 가지지 못한다. 그러므로 다른 그룹에 의한 한 그룹의 지배는 이러한 남자/여자의 생물학적 구별로부터 나타난다. (Robin Morgan의 새 책 Going Too Far에서 볼 수 있다시피, 1970년 이래로 급진 페미니즘이 어느 정도 변화하고 발전하였지만, 급진 페미니즘을 단일화시켜 주는 끈은 권력 관계를 이해하는 데 우선해야 할 것으로서 성 계급 개념이다.)

 

Firestone이 성 계급이라는 관념을 제시한 것은 생산수단의 소유 유무를 둘러싼 관계를 의미하는 경제적 범주로서의 고전 맑스주의의 계급 의미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성으로서 여성은 하나의 계급이며, 남성은 이 계급에 대립하는 다른 계급이다. 이러한 새로운 관념은 성 권력이라는 역학을 정교화하기 위해 길고도 중요한 과정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권력에 대한 경제적 이론에 답하면서도 그 이론을 거부하려는 과정에서, 맑스가 그랬던 것처럼, 그녀는 억압 체계로서 자본주의를 가부장제로 대체하면서 인위적으로 성 영역과 경제 영역을 분리시킨다. 그녀는 풍부하고 종합적인 관점을 가지고서 좀 더 논의를 진전시키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그녀가 억압을 좀 더 복잡한 현실로 바라보기보다는 현대 시대의 주요 억압으로서 성을 다루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Firestone이 경제적 억압을 여성에 대해 문제가 있는 것으로 바라보지만, 그 경제적 억압을 억압의 주요 근원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19쪽)여성의 상황에 관한 이러한 양자택일 식의 정식화가 분석을 제대로 하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그녀는 여성 현실이 복잡다단하게 얽혀 있는 것을 제대로 다룰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맑스주의 분석이 여성 억압의 특수성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 것처럼, Firestone의 급진 페미니즘 관점도 우리의 경제적 현실의 실재 또는 역사적 특수성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가부장제는 보편적인 초역사적 권력 구조로 남아 있게 된다.

 

이러한 논의 체계에서 페미니즘 혁명은 성별 분업 자체의 제거와 생물학적 가족의 해체를 통한 남성의 특권의 배제를 함축하고 있다. 그러면 여성은 그녀의 억압적 생물학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으며, 여성과 아이들의 경제적 독립을 이룩할 수 있으며, 여전히 현실화되지 못하고 있는 성적 자유가 전개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성의 몸이 그녀의 현실 척도를 규정한다는 점이다. 또한 그 문제는 그녀의 몸이 그녀의 재생산 생물학으로부터의 자유라는 관점에 중심을 둔다. 이것은 자유가, 즉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이 인류 발전의 긍정적 모델이 되는 곳의 자유가, 다시 말해 몸과 마음을 통합시켜 갈 수 있는 자유가 가지고 있는 부정적 단계의(변증법의 단계에서 볼 때의 부정적 단계의-옮긴이) 함의이다. 섹슈얼리티(성성)가 명백히 여성의 유일한 억압이지만, 이것이 다음과 같은 점, 즉 섹슈얼리티가 여성의 총체적인 상황을 포괄하고 있다거나 또는 섹슈얼리티가 모든 차원의 인간 잠재성을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섹슈얼리티는 여성이 어떤 차이를 가지는지를 말해 주지만, 여성을 권력의 일반적 구조와 연결시켜 주지 못한다. 섹슈얼리티는 우리 사회 권력 관계 구조의 복잡성을 설명할 수 없다.

 

게다가 여러 문제들이 있다. Firestone은 맑스와 프로이트를 종합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맑스의 사회적 역사적 구조를 부정함으로써, 여성의 생물학을 시간을 초월한 불변적인 상태로 취급함으로써 그렇게 하려고 한다. Firestone이 불평등을 자연적인 것으로 생각하지만, 불평등은 사회적 문맥에서만 불평등이다. 여성의 몸과 남성의 몸은 생물학적으로 다르지만, 이것을 불평등으로 부르는 것은 생물학적 차이에다 강제로 사회적인 (불평등-옮긴이) 의미를 부과하는 것이다. 그녀는 어느 누구도 결코 불평등한 성 계급 체계를 그 기원을 통해 정당하게 밝힐 수 없지만, 그렇다고 둘(생물학적 차이와 사회적 불평등-옮긴이) 중 하나로 그 체계를 설명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Firestone은 (20쪽) 여성의 섹슈얼리티가 역사를 통해 어떻게 다양하게 해석되어 왔는지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게 될 때, 우리 고유한 문화 속에 내재해 있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사실상 받아들인다.

 

예를 들면, 봉건 사회에서 성 역할이 존재했다고 할지라도, 경제적이고 성적인 물질적 삶이 다르기 때문에 봉건제에서의 성 역할은 발전된 자본주의 사회의 성 역할과 상당히 다르게 경험된다. 핵 가족이 전자본주의적이면서도 자본주의적인 것이라고 할지라도, 서로 다른 사회에서 서로 다른 형태로 현실화된다. 여성 억압에 보편적인 요소가 있음을 안다는 것은 중요한 것이지만, 현재 우리 존재의 특수성이 그 보편성에 속할 때로 그 의미가 한정된다. 모든 역사가 가부장적일 수 있지만, 이것이 각 역사적 시대들의 차이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가부장제 존재의 일반적 의미를 명료하게 밝히는 것이 이러한 특수성이다. 이런 의미에서 가부장제는 단순히 생물학적 체계로서만이 아니라 특정한 역사를 지닌 정치적 체계로 이해되어야 한다.

 

Firestone의 비사회적이고 비역사적 틀은 특히 그녀가 기술을 논의할 때로 그 의미가 한정된다. 피임과 자궁 외 재생산(extrauterine reproduction)을 통해, 기술이 여성을 그녀의 몸으로부터 해방시킬 것이라는 것이 Firestone의 관점이다. 따라서 기술은 여성 해방의 열쇠가 된다. 그러나 피임이 여성을 자유롭게 만들었다는 것은 중요한 사실이지만, 출산 통제, 낙태 권리 등등이 재생산로서 여성의 역할을 그녀의 사회적 지위와 무관하게 만들 정도로 발전돼 나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여전히 남는다. 기술이 사회 권력 구조의 고유한 차원이라고 우리가 이해하게 될 때 Firestone의 분석의 타당해 보이는 측면은 사라지게 된다. 남성 지배 계급의 욕구들은 기술적 발전을 규정한다. 권력에서의 남성 지배 계급의 변화 없이 (그리고 기술의 목적을 규정하는 그 계급의 변화 없이), 기술은 해방의 요소라고 보기 어렵다.

 

Firestone이 경제적 고통이 적어도 여성의 다른 질병들만큼이나 여성 억압에 기여한다는 점을 알고 있지만, 그녀의 분석 요점은 성 억압을 경제적 계급 사회 조직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이다. 그녀는 여성이 잘 교육 받았을 때조차도 남성만큼 돈을 벌지 못할 것이라는 점에 주목하지 않는다. 따라서 여성은 (21) 자녀들을 돌보려고 결심할 때 이러한 돈의 부족에 시달린다. 이러한 점은 그 자체 가족 내에서 요구되는 혁명의 기반이 되는 생물학적 주장 전반을 쓸모없게 만든다. Firestone은 경제적 계급 체계 구조와 성 계급 체계 내에서의 그 기원을 연결시키고 싶다고 말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다. 비록 우리가 경제적 억압이 역사적으로 성적 억압을 기본적으로 대변해 왔다는 생각을 받아들인다고 할지라도, 오늘날 이 두 체계는 서로가 서로를 떠받친다. 이 둘은 상호 의존적이다. 이러한 관계맺음은 누군가가 이 관계맺음을 인과적이고 이분법적인 관점에서 규정하려고 할 때만 왜곡된다. 이러한 이분법의 효과는 성적 억압이 근본적인 억압이라는 것을 이론적으로 단정하는 것이다. 나는 당신이 실업과 인플레이션이라는 일반적인 문맥 속에서 여성이 초과 착취 당하는 사회의 이러한 여성 지위를 통해 정치적으로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성적 억압이 근본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일상적인 삶의 현실적 관계들을 분리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맑스가 근본 모순으로서 계급 착취에 초점을 두었던 것과 다른 것인가? 사회적 실재는(현실은) 이러한 이론적 추상들을 복잡하게 만든다. 처음으로 급진적 페미니즘이 나타났던 것은 바로 “근본 모순” 신드롬이 가지고 있는 불완전함을 의식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이렇게 똑같은 불충분함으로 다시 곤경에 빠지게 되는 것은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Shulamith Firestone과 가장 최근의 Robin Morgan 이 두 사람은 정치적 현실(실재)에 대한 맑스주의의 과도한 단순화를 거부해 왔다. 우리는 급진적 페미니즘의 일면성을 그러한 단순화로 대체시킬 필요가 없다. 성과 계급 현실을 재구조화하는 것이 필요하다면, 우리는 둘을 통합할 수 있는 이론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성 계급 체계와 경제적 계급 체계 사이의 관계와 연결은 급진적 페미니즘의 저작 속에서는 규정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권력은 이분법의 한 쪽 측면에서 다루어진다. 권력은 성적인 것에 기초해 있다. 자본주의는 권력에 대한 여성의 접근을 규정하는 이론적 분석 속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비슷하게, 권력 체계로서의 가부장제와 여성의 생물학 사이의 상호작용들은 분리된 채로 있다. 여성의 억압을 역사적으로 정식화시키는 대신에, 우리에게 생물학적 결정론이 나타난다. 이러한 이분법의 마지막 산출물은 이러한 모순들과 그 모순들을 지지하는 이데올로기들 사이의 관계맺음을 분리시킨다. (22) 결론적으로, 맑스주의나 급진적 페미니즘 둘 다 관념과 현실 조건 사이의 상호 관계맺음을 충분히 다루지 못하고 있다. 만일 현실이 단편적인 것이 된다면, 그러한 현실의 이데올로기적인 표상이 현실로부터 분리된다는 것 또한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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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가부장제 이론의 발전과 사회주의 페미니즘 3

안티 테제 : 성(Sex)으로서의 여성

 

 

1. 가부장제와 급진 페미니즘

 

 

급진 페미니즘의 시작이 보통 최근 여성해방 운동(대략 1969~1970년경)과 일치한다고 보더라도, 급진 페미니즘은 사실상 역사적으로 Kate Millett 이전에 성 정치학을 이야기하였던 여성들인 Mary Wollstonecraft, Elizabeth Cady Stanton, 그리고 Harriet Kate Mill의 자유주의 페미니즘과 중요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런 여성들은 그들이 가진 일면적인 방식으로 “성적 영역들”로 조직된 사회에서 남성들이 남성으로서 권력을 가진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들이 사회적 지위(caste)와 연관해 권력을 말했지만, 그들은 그들이 노동 분업과 사회를 통해 단지 이해하기 시작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러한 페미니즘의 주장은 개혁적인 것으로 남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적 억압, 성별 노동 분업과 경제적 계급 구조 사이의 필연적 연관성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급진적 페미니즘은 성 권력에 관해 이전의 페미니즘보다 훨씬 더 복잡하게 이해하고 있어서, 투표나 법적 개혁 투쟁을 가부장제를 해체시킬 수 있는 혁명적 요구로 대체시킬 수 있었다. 생물학적 가족, 사회의 위계적인 성별 분업, 그리고 성 역할 자체는 근본적으로 재조직화되어야 한다. 노동과 사회의 성별 분업은 우리사회에서 남성과 여성 역할 사이의 가장 근본적인 위계적 분업을 나타내고 있다. 그것은 가부장제 문화를 위한 근본적인 통제 기구이다. 그것은 역할들, 목적들, 활동, 어느 누구의 노동이 성적으로 결정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그것은 남자/여자(male/female)라는 생물학적 구분이 사회적 기능들과 개인 권력을 구별해 주는 데 익숙해져 있다는 바로 그러한 의미를 나타낸다.

 

급진 페미니즘은 Wollstonecraft, Stanton, 그리고 Taylor의 분석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발견하였으며, 또한 아주 유사한 방식으로 오늘날 좌파의 정치 이론이 불충분하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현존하는 급진적 사회 분석 역시도 경제적 계급 체계 구조를 성적 계급 체계 안에 내재해 있는 그 구조의 기원과 관련시키지 못하고 있다. 경제적인 것이 아닌 성적인 분석은 어떤 좀 더 넓고 의미 있는 혁명적 분석에 집중되어 있는 것처럼 나타났다. 이러한 여성들은 권력에 관한 맑스주의의 정의를 만족시키지 못하였거나, 또는 여성의 억압과 착취의 동등함을 만족스럽게 밝히지 못했다. 경제적 계급은 그녀들의 삶의 중심에 있지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역사는 가부장적인 것으로 알려졌으며, 가부장제적인 것에 대한 투쟁은 성 사이의 투쟁이 되었다. 그 투쟁 전선은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에 그어지기보다는 오히려 여성과 남성 사이에 그어지고, 그 결정 관계들은 생산이 아니라 재생산관계들이다.

 

급진 페미니즘은 가부장제를 남자들이 경제적 특권과 상위의 권력을 가지는 성적 권력 체계로 규정한다. 가부장제는 사회를 남성 위계 체계로 만든다. 가부장제의 법적-제도적 기초가 좀 더 뚜렷하였지만, 그 기초적 권력 관계들은 오늘날 변하지 않고 있다. 가부장제는 결혼과 가족을 통해서, 노동과 사회의 성 분업을 통해서 보존되고 있다. 가부장제는 경제나 역사에 뿌리를 두고 있기보다는 생물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남성의 힘과 통제를 통해 나타났던 가부장제의 뿌리들은 여성들의 자기 재생산에 위치하고 있다. 이러한 권력 위계 안에서 여성의 지위는 경제적 계급 구조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가부장제적 사회 조직화를 통해 규정된다.

 

이런 분석을 통하여, 급진 페미니즘은 사적인 것과 공공적인 것 사이의 이분법에 다리를 놓는다. 사적인 것으로의 성은 또한 정치적인 것이 되며, 바로 사회의 성 정치학으로 인하여 여성들은 그들의 억압 지위를 공유한다. 성 분업을 통한 사회 구조화는 여성들의 행동, 일, 욕망과 열망을 제한한다. “성은 정치적 함의를 지닌 사회적 지위 범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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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가부장제 이론의 발전과 사회주의 페미니즘 2

(12쪽) 2. 역사 속에 나타난 여성들의 착취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맑스와 엥겔스는 초기 전(前)자본주의 사회의 노동 분업을 가족의 관점에서 논의하고 있다. 첫 번째 노동 분업은 성별 활동을 통한 가족 내에서의 “자연스러운” 노동 분업이다. 아이들을 양육하는 활동이 노동 분업의 시작이다. 바로 이러한 활동이 가족 내에서의 소유를 처음 나타나게 했다. 맑스와 엥겔스에 따르면, 이것은 부인과 아이들이 남편의 노예가 될 때 나타난다.

 

 

가족 내에서의 이러한 잠재적 상태의 노예 상태는 여전히 거의 세련되지 못한 상태이지만, 첫 번째 소유 상태이다. 그러나 이 초기 단계에서조차 그 상태는 타인의 노동력을 처분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부르는 근대 경제학자의 정의와 완전히 일치한다. 게다가 노동 분업과 사적 소유는 동일한 표현이 된다. ……

 

 

여기에는 성별 노동 분업 자체에 대한 논의가 없다고 할지라도, 거의 세련되지 못했지만 성별 노동 분업에 대한 초기 통찰의 싹이 있다. 맑스와 엥겔스에게 있어서, 이러한 통찰을 약화시키고 결국에는 그 통찰을 제한하는 것은 성별 활동으로부터 나타난 이러한 노동 분업이 사적 소유와 일치하고 동일시된다는 점이며, 게다가 “노동 분업과 사적 소유가 동일한 표현”이라는 점이다. 노동 분업은 그 자체 어떤 특성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또한 출산 행위로 인한 노동 분업을 통해 나타난 소유는 자본 관계로부터 나타난 노동 분업과 구별되지 않는다. 재생산과 생산은 하나인 것처럼 보인다. 마치 이 둘이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 분업 관계 속에서 나온 것처럼 말이다. 불평등이 성별 활동으로부터 나올 수도 있다는 사실은 여기에서 아무런 의미도 없다. 재생산이 노동 분업의 첫 번째 근원지라고 알려지더라도, 결코 어떤 특별한 검토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독일 이데올로기』에서는 그것이 물질적 조건에 따라 변한다는 것과 같은 여성의 조건에 관한 개략적인 분석이 이루어지고 있다.

 

 

노동 분업은 이 단계에서 여전히 아주 기본적인 것이고 또한 가족에 의해 나타날 수밖에 없던 자연발생적인 노동 분업이 좀더 확장된 것에 머무른다. 따라서 사회 구조는 가족의 확장에 머무른다. 가부장제 종족 우두머리들이 있고 그 아래에 그 종족 구성원들이 있으며 마지막엔 노예들이 있다. 가족 안에 잠재되어 있는 노예제만이 점차 발전되어 가는 것이다.

 

 

(13쪽) “가족에 의해 나타날 수밖에 없던” 노동 분업은 여기서 자연발생적인 것이라고 이야기되고, 또한 이것이 “필연적” 또는 “선한”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 분업은 맑스와 엥겔스에 의해 수용되었던 분업이다. 여기서, 따라서 가족 내에서의 노동 분업은 가족을 둘러싸고 규정하는 경제적 사회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다(이러한 것은 이후 『공산당 선언』에서 나타난다). 오히려 이러한 역사적 초창기에 맑스와 엥겔스는 가족을 사회와 그 사회의 노동 분업을 구조화시키는 것으로 본다. 맑스와 엥겔스의 가족에 대한 분석은 다음과 같이 계속된다. “성별 활동 내에서 노동 분업이 발전돼 나오지만, 그 다음에 이 노동 분업은 자연적인 소질(예를 들면 체력), 욕구, 우연 등에 의하여 저절로 또는 ‘자연발생적으로’ 발전해 나간다.”

 

『가족, 사유재산, 그리고 국가의 기원』에서 엥겔스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발전해 나온 이 주제를 다음과 같이 되풀이하고 있다. “첫 번째 노동 분업은 자녀 양육을 위한 여성과 남성 사이의 노동 분업이다.” 따라서 첫 번째 계급 적대는 일부일처제에서 여남 사이의 적대와 동시에 나타나는데, 이러한 적대가 어디에 기초하는지는 결코 분명하지 않다. 엥겔스의 주장은 첫 번째 계급 적대가 여남 사이의 적대와 동시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이러한 여남 사이의 적대가 계급 적대와 관련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결국엔 그도 여남 사이의 갈등에 관해서 계급 갈등으로 말하였다. 가족 내에서 남성은 부르주아지를 대표하고, 부인은 프롤레타리아트를 대표한다. 그러나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는 경제적 생산수단과 관련하여 나타나는 힘(권력)의 위치를 표현하는 것이지, 재생산이라는 성별 활동과 관련한 것이 아니다. 여성과 남성을 범주화함으로써, 재생산관계는 생산관계 아래로 포섭된다. 엥겔스가 가족 안에서의 여-남(male-female) 관계들을 사회의 노동 분업을 규정하는 것으로 인정하면서도, 그 관계들을 재생산과 관련된 분석 범주 아래로 완전히 종속시킨다는 것은 모순이다. 그는 이런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는 어떤 설명도 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 딜레마가 그의 분석 영역 밖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노동 분업이 가족으로부터 사회로 퍼져 나간다는 점을 엥겔스가 인정하고 있음을 보았다. 그런데도 가족 내에서 여성이 노예화되는 것을 설명하는 분석 범주들이 전적으로 생산관계로부터 도출되고 있다. 가족은 (14쪽) 역사적인 경제 양식에 의해 규정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가족은 그 자체 경제를 규정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사회를 규정하지 못한다. 그리고 가족은 경제적 관계와 일치하는 노동 분업의 근원으로서 더 이상 이야기되지 못한다. 경제적인 생존 양식이 가족을 결정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엥겔스는 “첫 번째 노동 분업”에 관한 자신의 고유한 분석 형태를 잊어버리고서는, 가족이 그 자체 어떻게 경제 양식을 떠받치고 있는지를 분석하는 것 대신에 가족이 자본주의의 붕괴와 더불어 해체될 것이라고 가정한다. 그가 (사회적 생산에 대립하며 그 바깥에 있는) 사적인 가사 영역에서 여성의 생존 문제를 인정하고 있지만, 그는 이 문제를 사적 소유에 기초해 있는 생산관계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녀의 생산 활동을 제한하는) 여성의 재생산 활동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엥겔스에게서 가족은 정치 경제의 축소판이 되었다. “가족은 이후에 사회와 국가로 확산될 모든 모순을 축소판으로 가지고 있다.” 남성은 부르주아지이고, 여성은 프롤레타리아트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엥겔스가 남자(male)의 범주를 가족 바깥에 있는 부르주아지로, 그리고 여자(female)의 범주를 프롤레타리아트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거기서 사람들은 그들의 성이 아니라 생산수단과의 관계에 따라 계급 위치를 정한다. 엥겔스는 계급 안에서의 구성원의 지위를 규정하기 위하여 가족 안과 바깥에서 서로 다른 규준(criteria)을 사용한다. 이런 범주가 권력과 같은 것에 기초해 있었다면, 동일한 분석 단위가 가족 안팎 둘 다에서 적용되었을 것이다. 또한 누군가가 애초부터 엥겔스가 가족 안에서 프롤레타리아트/부르주아지 개념을 사용한다는 점이 경제적인 것이라고 말하고 싶을 때, 거기에는 여전히 명백하게 고려해야 할 다른 것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고려되지 않는다면, 그는 (1) 가족에서의 계급 구별을 부르주아니-남자/프롤레타리아트-여자로 할 수 없으며, 또한 (2) 사회에서의 계급 구별을 생산수단의 유무로 할 수 없을 것이다. 그에게 있어 이러한 것들이 처음부터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이것들은 가족과 자본주의의 관계에 관해서 애초부터 무엇을 반영하고 있는가? 이러한 것은 재생산 관계 내에서의 여성과 남성의 성적 차이들로부터 벗어난 권력 개념과 관계 있어 보인다. 그러나 엥겔스는 이러한 것을 파악하지 못했다.

 

(15쪽) 그 시기에 대부분 엥겔스는 억압과 착취를 동등하게 보는 단순한 방정식을 가지고 연구에 임한다. 엥겔스가 가족이 가사 노예제를 은폐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동시에 가사 노예제나 남편의 임금-노예제 사이에 아무런 차이도 없다는 점을 믿고 있었다. 이 두 노예제는 자본주의로부터 도출되었다. “여성해방은 오로지 여성이 거대한 사회적 규모로 생산에 참여할 수 있고 가사노동이 하찮은 일이 될 때에만 가능할 수 있다.” 여성의 현실적인 평등은 자본의 착취가 소멸되고 사적인 가사노동이 공적인 산업으로 바뀜으로써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엥겔스가 성별 노동 분업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엥겔스에게는 공적인 가사노동조차 아마도 거의 여성의 일로 남게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맑스와 엥겔스에 의해 윤곽이 드러나고, 그리하여 『가족, 사유재산, 그리고 국가의 기원』에서 엥겔스에 의해 발전된 이러한 분석은 가족이 적어도 역사적으로 사회의 노동 분업을 구조화시키며 이러한 노동 분업이 성별 활동에서의 노동 분업을 반영한다는 그들의 믿음을 드러낸다.

 

“유물론적인 개념에 따르면, 역사에서 결정적 요소는 최종 심급에서 직접적인 삶의 생산과 재생산이다. 이것은 또 다시 두 가지 측면을 가진다. 한편으로 생존수단의 생산, 즉 식량, 옷, 그리고 생산에 필요한 도구들, 다른 한편으로 인간 존재 자체의 생산, 즉 인간 종의 번식. 특정한 역사적 시대와 나라에서 사는 사람들의 사회 조직은 이 두 종류의 생산에 의해, 즉 한편으로 노동 발전 상태와 다른 한편으로 가족의 발전 상태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가족에 관해 논의할 때 사라지는데, 왜냐하면 계급 사회를 총체적으로 반영하는 가족이 여기서는 단지 상부구조의 다른 한 부분으로 나타나며, 또한 재생산 관계가 생산 관계 아래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요점은 가족이 사회를 반영한다는 것이 아니라 가족의 가부장제적 (16쪽)구조와 가부장제적 이데올로기 둘 다를 통해서 가족과 재생산의 욕구가 사회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가족과 사회, 생산과 재생산 사이의 이러한 상호 관계는 여성의 삶을 규정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단순히 경제적 착취를 이해하기보다 억압을 이해하려고 할 때, 여성 억압에 관한 연구는 성적이고 경제적인 물질적 조건 둘 다를 다루어야만 한다. 역사 유물론 방법은 생산자와 재생산자로서 여성이 성별 노동 분업과 사회와 맺는 관계뿐만 아니라 이러한 관계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정식화하는 방향으로 통합, 확장되어야 한다. 그럴 때만이 여성 생존의 복합성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유적 삶을 여성에게도 적용시킬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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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가부장제 이론의 발전과 사회주의 페미니즘 1.

아래의 글은 질라 아이젠슈타인이 편집한 논문 모음집 <<자본주의 가부장제와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입장>>(Monthly Review Press, New York and London, 1979) 중에서 질라 아이젠슈타인의 논문 [자본주의 가부장제 이론의 발전과 사회주의 페미니즘]을 해석한 것이다.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와의 상관관계를 공부하는 중인데, 이러한 상관관계를 내 나름대로 명쾌하게 밝혀보고자 하는 욕심에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잘 될라나 모르겠지만 열심히 공부해서 정리한 글을 이 해가 가기 전에 써 보고자 하는 욕심이 있다.

욕심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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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본주의 가부장제와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입장 #

 

 

- Zillah R. Eisenstein -

 

 

@ 1장 자본주의 가부장제 이론의 발전과 사회주의 페미니즘 @

 

 

** 들어가며

 

급진 페미니스트들과 남자 좌파들은 사회주의자 여성들과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을 혼동하면서 여성으로 됨과 페미니스트로 됨 사이의 정치적 구별을 잘 하고 있지 못하다. 그런데 급진 페미니즘과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서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사회주의자 여성들과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 사이의 차이 또한 연결될 필요가 있다. 사회주의자 여성들이 자본주의 시스템을 이해하고 변화시키려고 노력하는 반면에,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자본주의 가부장제로부터 나타난 권력 시스템을 이해하고자 한다. 나는 자본주의 계급 구조와 위계적인 성적 구조 사이의 관계가 서로 강제하는 변증법적 관계임을 강조하는 자본주의 가부장제라는 말을 선택했다.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의 상호의존을 이해한다는 것은 사회주의 페미니즘의 정치적 분석의 본질에 해당한다. (남성 지배권으로서의) 가부장제가 자본주의 이전에 존재했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속된다고 할지라도, 자본주의 사회의 현재 관계는 억압 구조가 바뀌려고 할 때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로 사회주의 페미니즘은 단일적인 맑스주의 분석이나 고립된 급진적 페미니즘 이론을 넘어서게 된다.

 

권력은 사회주의자 여성들과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에 의해 이분법적인 방식으로 취급된다. 권력은 경제적 계급 지위 또는 성으로부터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생물학적 남성/여성 구별에 기초한 권력 비판은 대부분 가부장제에 초점을 맞춘다. 부르주아지/프롤레타리아트 구별에 기초한 권력 비판은 자본주의에 초점을 맞춘다. 사람들은 사회적 생산관계를 억압적인 것으로 또는 사회적 재생산관계를 억압적인 것으로 보거나, 가사노동을 억압적인 것으로 또는 임금 노동을 억압적인 것으로 보거나, 사적 영역을 억압적인 것으로 또는 공적 영역을 억압적인 것으로 보거나, 가족을 억압적인 것으로 또는 경제를 억압적인 것으로 보거나, 이데올로기를 억압적인 것으로 보거나 또는 물질적 조건을 억압적인 것으로 보거나, 성적인 노동 분업을 억압적인 것으로 보거나 또는 자본주의 계급관계를 억압적인 것으로 본다. 그런데 대부분의 여성들의 상황이 이러한 이분법의 양 측면에 다 속해 있지만, 여성은 그렇지 않았던 것처럼 취급된다. 여성을 이런 식으로 취급하면서 개념화하는 것은 여성 억압의 복잡성을 이해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이분법이 현실을 이기고 있다. 나는 여기서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서서 변증법적 사고로 접근하고자 한다.

 

급진적 페미니즘과 맑스주의 분석을 종합하는 것은 일관된 사회주의 페미니즘 정치 이론을 정식화하는 첫 단계로서 필수적인 것이다. 그런데 이 정치이론은 단순히 권력에 대한 이 두 가지 이론을 서로 더하는 것이 아니라 이 두 이론이 성별 노동 분업을 통하여 서로 관계를 맺는 것으로 본다. 자본주의 가부장제를 이러한 문제의 근원으로 정의하는 것은 동시에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답이라는 것을 제안하는 것이다. 나는 맑스주의 계급 분석을 테제로 사용하고, 급진적 페미니즘의 가부장제적 분석을 안티테제로 사용하여 논의를 전개해 나가면서, 이 둘로부터 사회주의 페미니즘을 종합으로 이끌어낼 것이다.

 

 

테제 : 계급으로서의 여성

 

 

1. 맑스 : 혁명적 존재론과 여성 해방

 

 

여성 억압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맑스주의 분석은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하다. 첫째, 맑스주의 분석은 권력 연구를 위한 필수적인 것으로 계급 분석을 내놓는다. 둘째, 맑스주의 분석은 역사적이며 변증법적인 분석 방법을 제공한다. (방법으로서) 변증법은 거의 대체로 계급과 계급투쟁을 연구하는 맑스주의에 의해 사용되고 있지만, 또한 여성의 현존을 지배하는 가부장제적 관계들과 이로부터 나타나는 여성의 혁명적 잠재력을 분석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 맑스주의 분석이 모든 권력 관계를 이해할 수 있는 도구를 제공하기 때문에 누구든지 이렇게 할 수 있다. 역사적이고 변증법적인 방법은 계급관계를 이해하는 데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나는 계급투쟁에 관한 맑스의 분석을 사용할 것이지만, 또한 그의 분석 방법을 끌어내서 그가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몇몇 권력관계 차원에 적용시킬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맑스의 방법을 자본주의 사회의 물질적 관계에 대한 오늘날 우리의 이해를 자본주의 가부장제의 물질적 관계들로 확장시켜 사용하고자 한다.

 

이런 관계들은 맑스의 착취와 소외 이론을 통해 해명된다. 여성 억압을 이해하기 위해 착취 이론이 중요하다는 것이 사회주의자 여성들과 사회주의 페미니즘 사이에서 이미 많이 논의돼 왔기 때문에, 나는 아주 짤막하게 언급하려고 한다. 나는 맑스의 소외 이론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그의 변증법적이고 혁명적인 존재론의 중요성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소외에 관한 그의 논의가 노동력을 가진 여성 노동자들에게 적용되고, 전혀 다르게 가정주부와 같은 비임금 가사노동자에게도 적용되지만, 이와는 별개로 나는 그의 분석 방법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분석을 착취 이론 속에 나타난 것으로서 계급과 계급투쟁으로 환원시키지 않음으로써, 소외 이론 속에 나타난 변증법적 방법을 여성의 특별한 혁명적 잠재 능력으로 확장시킬 수 있다. 본질적으로 이것은 소외 이론이 착취 이론에 포함된다고 할지라도 결코 착취 이론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외이론과 그 이론으로부터 공산주의 사회에서의 “유적 삶”으로 넘기는 일은 인간 존재의 혁명적 능력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유적 존재”는 궁극적으로 자신의 인간 잠재성을 창조적 노동, 사회적 의식,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투쟁을 통해 이루어지는 사회적 삶의 과정에 도달시키기 위해 애쓰는 존재이다. 또한 이러한 능력들을 공산주의 사회에서 완전히 내면화하는 존재이다. 이러한 기본적인 존재론적 구조는 그 존재의 본질과 현존을 규정한다. 맑스에게서 현실은 따라서 단순한 현존을 넘어서는 것이다. 현존재는 현실 속에서 인간 본질을 향한 운동을 구체화시킨다. 이것은 완전히 추상적인 인간 본질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역사적 문맥 속에서 이해할 수 있는 본질이다. “유적 존재”는 소외되지 않는 사회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개념이다.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오로지 본질로서만 존재한다.

 

만일 이러한 개념이 없다면, 인간 존재는 자본주의 관계들 속에서 착취 당하는 자로서 나타나게 될 것이고, 필연적으로 자신의 잠재적인 혁명적 능력을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소외 이론에서 착취 개념이 포함돼 있지 않다면, 우리는 착취 당하는 사람으로 방치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개별 노동자의 유적 삶의 잠재적 능력 때문에, 바로 착취 당하는 노동자는 잠재적인 혁명적 존재가 된다. 유적 삶의 잠재적 능력이 없다면, 우리는 맑스의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가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한 노예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잠재적 능력은 계급 구조 또는 착취 관계 내에서의 지위와 상관없이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존재한다. 이러한 잠재적 능력의 실현은, 그러나 계급 별로 차이가 난다.

 

자신의 소외 이론에 따라 맑스는 자본주의의 본성을 비판적으로 규명해 간다. 자본주의에 관해서, 맑스와 엥겔스는 상품생산의 전 과정을 언급하였다. 이 과정 안에 내재해 있는 착취를 고찰하면서, 맑스는 자신의 권력 이론을 발전시켰다. 권력 또는 권력 없음은 한 개인의 계급 위치로부터 도출된다. 따라서 억압은 자본주의 조직의 결과물이며 통제할 수 있는 권력이 없다는 사실에 기초해 있다. 생산적 노동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는 부르주아지를 위해 잉여가치를 창조하는 노동자를 착취한다. 이윤 속에 내재해 있는 잉여 노동은 노동자의 실질적인 노동시간과 필요 노동시간 사이의 차이로부터 나타난다.

 

 

자본주의 생산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생산적 노동은 가변 자본 부분(임금의 형태로 소비되는 자본 부분)과 교환되는 임금노동인데, 이러한 가변 자본 부분(또는 노동력의 가치)을 재생산할 뿐만 아니라 이에 덧붙여서 자본가를 위한 잉여가치를 생산한다. …… 그러한 임금노동만이 자본을 생산하는 생산일 뿐이다.

 

 

사회적, 정치적, 그리고 문화적 형태로 나타나는 계급 구조는 기본적으로 경제적인 것이다. 사회는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로 양분된다. 이 둘 사이의 분리와 갈등의 기초는 자본주의 생산양식 내에서 서로가 맺고 있는 관계이다. 잉여가치가 자신의 생산적 노동으로부터 뽑히면서 당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착취는 프롤레타리아트가 당하는 억압이다.

 

자본주의 관계에 대한 맑스주의의 이러한 비난은 사회적인 인간 현존재의 혁명적 존재론으로 포괄된다. 혁명적 존재론은 사회에서 혁명적 의식으로 나타나는 본질과 현존재 사이의 변증법이 각 개인들 내에 있음을 단정한다. 소외 당하고 착취 당하는 계급 현존재에 대한 비판 그리고 이런 계급 현존재에 관한 이론 내의 혁명적 존재론 둘 다 맑스주의 분석으로 하여금 계급의식 이론을 추가하면서도 그 이론을 넘어서 나아가는 페미니즘 이론이 발전해 나가는 데 비판적인 역할을 하도록 한다.

 

여성으로 확장되었을 때, 이 혁명적 존재론은 자유의 가능성이 착취와 억압과 나란히 존재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데, 이는 여성이 현재의 그녀 모습보다 더 잠재적이기 때문이다. 여성은 오늘날 그녀의 모습에 의해 구조화되어 있고, 이는 내일의 실제적 가능성을 규정한다. 그러나 오늘날 그녀의 모습이 그녀의 능력 또는 잠재성의 객관적 한계를 결정하지 못한다. 물론 이것은 소외된 노동자에 대해서는 참이다. 어떤 노동자가 그의/그녀의(자신의-옮긴이) 창조적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녀/그는 여전히 잠재적으로 창조적인 존재이다. 따라서 본질과 현존 사이의 이러한 모순은 혁명적 여성뿐만 아니라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저변에 깔려 있다. 맑스에 따르면 어떤 사람의 계급적 위치는 의식을 규정한다. 그러나 우리가 혁명적 존재론을 사용한다면, 이러한 것(계급적 위치-옮긴이)에 제한될 필요가 없다. 게다가 우리가 어떤 여성이 그녀의 성과 관련하여 규정된다고 말하고 싶을 때, 가부장적 관계들은 그녀의 의식을 규정하고 결과적으로 그녀의 혁명적 잠재력을 함축하게 된다. 사람들의 현실적 조건들(현존)과 가능성들(본질)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혁명적 잠재력을 위치시킴으로써, 우리는 가부장제적 관계들이 어떻게 인간 본질의 발전을 막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유적 삶이라는 개념은 남성과 여성의 혁명적 잠재력을 지시하고 있다. 여성의 혁명적 의식의 잠재력을 규정하는 이러한 사회적 관계들은 맑스가 이해한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맑스는 결코 성적인 사회 위계 질서를 문제 삼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훨씬 더 복잡해진 일련의 관계들이 여성으로 하여금 유적 삶을 살지 못하도록 만들었고, 따라서 유적 삶의 현실화가 계급 체계 하나만을 해체시킨다고 해서 결코 이루어질 수 없음을 보지 못했다. 그런데도 여성에 관한 그의 저작은 중요한데, 왜냐하면 그가 유적 삶과 남녀 모두의 사회적 경험의 자본주의적 소외 형태들 사이의 긴장들을 드러내었기 때문이다.

 

『경제학-철학 수고』, 『공산당 선언』, 『독일 이데올로기』, 『자본』에는 가족과 여성의 착취에 대해 특별히 언급한 것들이 있다. 맑스는 가족 관계를 단순한 화폐관계로 환원시킬 수 있는 것으로 보고 있는 『공산당 선언』에서 부르주아 가족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있다.

 

 

부르주아는 자신의 아내를 단순한 생산도구로 여기고 있다. 현대 가족, 즉 부르주아 가족의 기초는 무엇인가? 자본, 즉 사적 이익이다. …… 가족과 교육에 관한 부르주아의 허풍, 부모와 자식 간의 상호관계에 관한 부르주의 허풍은 모두 근대 산업 활동으로 인해 점점 더 정나미 떨어지는 것으로 변하며, 프롤레타리아트의 모든 가족 관계는 산산이 부서져서 아이들은 단순한 상업 물품으로 그리고 노동도구로 변하게 된다.

 

 

사적 소유의 관계는 교환양식이 된다. 이러한 부르주아 우위의 확장은 사회적 관계를 가족 내로 한정시킨다. 그리고 맑스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듯이, 아주 진정한 사회적 관계로만 보이는 가족은 부차적인 욕구가 된다. 사유재산과 사적 소유라는 이해관계는 여성-남성 관계에 침투해 들어간다.

 

「유대인의 문제에 관하여」에서, 맑스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유적 관계 자체, 즉 여성과 남성 사이의 관계 등은 상업의 대상이 된다. 여성은 구매되기도 하고 판매되기도 한다.” “가진다”라는 성향은 유적 관계를 소유와 지배의 관계로 탈바꿈시키고, 결혼을 매춘으로 탈바꿈시킨다. 그래서 맑스는 『경제학-철학 수고』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끝으로, 사적 소유를 보편적인 사적 소유에 대립시키는 이러한 운동은 (확실히 배타적인 사적 소유 형태의 하나인) 결혼을 여성이 공동체의 공동 소유가 되는 여성들의 공동체에 대립시키는 동물적인 형태로 표현된다. …… 여성이 (11쪽)결혼으로부터 보편적인 매춘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부의 전체 세계(즉, 남성이 지배하는 자산의 전체 세계)는 사적 소유주와의 배타적 결혼 관계로부터 공동체와의 보편적 매춘 상태로 나아간다.

 

 

맑스는 여성의 문제를 단순한 재생산 도구로서 취급되는 그녀들의 지위로부터 나타나는 것으로 봄으로써, 사회주의 혁명 속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선언』에서 그는 “현재 생산 체계의 폐지는 이 체계로부터 나타난 여성들의 공동체, 즉 공적이고 사적인 매춘 모두를 포함하는 매춘의 공동체 폐지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라고 썼다. 맑스의 저작에서 부르주아 가족은 그 자체 특별한 의미도 없는 자본주의 사회의 한 도구로서 나타난다. 여성의 억압은 결혼과 가족을 통해서 나타나는 계급 사회에서의 억압이다. 여성은 프롤레타리아트 일반과 구별되지 않는 희생자, 즉 유해한 계급(프롤레타리아트-옮긴이)의 노동 분업의 단순한 또 다른 희생자로 인지된다. 성별 역할, 목적, 활동 등등과 마찬가지로 성별 노동 분업은 맑스에게 독자적인 존재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그는 여성의 생물학적 재생산 또는 가족 내에서 노동 분업을 만들어 내는 결정적인 것으로서 모성 역할에 거의 또는 아무 관심도 없었다. 결론적으로 맑스는 여성과 남성의 착취를 똑같은 근원지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았으며, 그들의 억압이 동일한 구조적 용어들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가정하였다. 혁명적 의식은 착취에 대한 계급 관계를 이해하는 데에만 한정되고 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유적 삶을 살아가는) 공산주의 사회에서 삶은 여전히 남성과 여성이 서로 다른 삶을 선택하도록 하는 성별 노동 분업에 의해 구조화될 것이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성 역할은 끊임없이 소외와 고립을 피할 길 없는 일을 여성에게 미리 부과할 것이다. 본질과 현존은 여전히 하나로 통일되지 못하고 있다. 맑스는 사회에서의 성별 노동 분업이 비창조적이고 고립되는 노동을 특히 여성들이 담당하도록 만든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자본주의와 자본주의 착취의 해체는 그 자체 현실적인 유적 삶, 즉 여성의 창조적 노동, 사회 공동체, 그리고 비판적 의식을 보장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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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주의와 사회이론 사이의 가치론 4.

 

물론 이미 추상 노동의 이러한 기본적인 개념에 대한 서술에서 특정한 모순적인 것의 양립(추상노동과 구체노동-옮긴이)이 발견된다.(주25-)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와 『자본』 제1판에서 맑스는 여전히 가능한 한 추상노동을 단순하고 질적으로 차이가 나지 않는 노동과 동일시한다.(주26-) 그러므로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에서 상품은 교환가치로서 “가치의 실체를 이루고 있는, 그러한 단순하고 동일한 형태를 지닌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노동을” 나타내는 것으로 나온다.(Ⅱ.2/109; 13/17) 게다가 좀더 명확하게 말한다:


“상품들의 교환가치를 그 상품에 들어 있는 노동시간으로 측정하기 위해서, 서로 상이한 노동들 그 자체는 서로 구별되지 않고 동일한 형태를 띠는 단순한 노동, 요컨대 질적으로 동일하며 오로지 양적으로만 구별되는 노동으로 환원된다. 이러한 환원은 하나의 추상으로 나타나지만, 그 추상은 사회적인 생산과정에서 일상적으로 수행되는 추상이다.(……) 보편적 인간노동이라는 이러한 추상은 어떤 한 사회의 각각의 평균적-개인들이 행할 수 있는 평균노동 속에 존재하며 인간 근육, 신경, 두뇌 등의 특정한 생산적 지출이다. 어떤 한 사회의 각각의 평균적-개인들이 적응될 수 있는 것이 바로 단순한 노동이다…… 이 단순한 노동은 사람들이 모든 통계를 확신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부르주아 사회의 가능한 한 모든 노동을 형성한다.”(Ⅱ.2/110; 13/18)


맑스는 여기서 두 가지 완전히 다른 추상들을 서로 동일시한다 : 한편으로는 항상 좀더 기계화된 생산과정에서 일어나는 추상으로서 노동력의 특수한 성질에 대한 추상, 특수한 성질을 지닌 노동들을 단순한 노동으로 대체, 따라서 특정한 한 종류의 노동지출과 다른 한편으로 가치를 형성하는 “추상 노동”, 즉 특정한 종류의 노동지출이 어느 곳에서도 존재하지 않는 추상노동.

제1장의 시작 부분에서 결코 추상 노동으로부터가 아니라 오히려 가치실체로서의 “노동”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는 『자본』 제1판에서도, 가치를 형성하는 노동도 동시에 단순한 평균노동으로 측정된다(Ⅱ.5/19f). “추상 노동”이라는 개념은 단순한 가치형태의 고찰 속에서 처음으로 나타난다(Ⅱ.5/31). 그러고 나서 우선 제2판에서 단순노동과 추상노동이 엄밀하게 구분되었고 처음부터 가치실체로서의 추상 노동으로 시작하였다.(주27-) 물론 두 개의 첫 소절에서 추상 노동을 규정하는 데에 “자연주의적인” 것을 많이 연상하게 한다. 생산적 활동의 특정한 성격이 추상되고 난 후에 그 추상 안에 오로지 생산적 활동이 “인간의 두뇌, 근육, 신경, 손 등의 생산적 지출”(Ⅱ.5/24; 23/58)이어야 한다는 사실이 남아 있다는 것이 이미 나타난 후에, 맑스는 (제1판과 대비되어 새롭게 파악된)두 번째 소절의 끝에서 개괄적으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 


“모든 노동은 한편으로 생리학적인 의미에서의 인간 노동력의 지출이며, 또한 동일한 인간 노동이라는 또는 추상적인 인간 노동이라는 이러한 속성 안에서 상품-가치를 형성한다.” (Ⅱ.6/79; 23/61) 


이러한 관점에서는, 마치 “추상 노동”이 노동의 자연적 속성에 해당하고, 노동의 가장 보편적인 생리학적 규정들, 즉 항상 존재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상품 생산에서만 “가치를 형성하는” 것으로 의미를 가지는 규정들에 해당하는 것처럼 보인다. 노동의 추상성이 결코 자연적 속성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적 속성이라는 사실, 즉 교환 속에서 이루어지는 노동의 (질적인) 상이함에 대한 추상이 문제가 된다는 사실은 『자본』 제1장의 첫 번째 두 소절 안에서는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주29-) 

이러한 것은 나에게 물론 하나의 정식화 문제로만 보이지 않는다. 맑스는 자신의 담론을 고전 정치경제학에 반대하여 전개시킬 뿐만 아니라 고전 정치경제학보다 더 정확한 규정으로 자신의 담론을 전개시키고 있다.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의 이중적 특성에 관해서 맑스는 상대적으로 뒤늦게 자신의 입장을 밝힌다.(주30-) 여기에서 우선 고전 정치경제학이 상품에서 사용가치와 교환가치 사이를 구별했지만 상품의 이러한 이중적 성격이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의 이중적 성격 속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있지 못하다는 인식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추상 노동의 생리학적 파악은 고전 정치경제학보다 더 정확한 규정 없이도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된다; 고전 정치경제학에서 수행되지 못한 구별이 보충되고 있다. 물론 그렇게 파악된 구별을 통하여서는 노동을 자연과 인간 사이의 비사회적 과정으로 파악하는 고전 정치경제학의 영역을 넘어설 수 없다.(주31-) 추상 노동이 사실상 노동에 대한 특수한 사회적 규정으로 파악될 때에 비로소 고전 정치경제학을 넘어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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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주의와 사회이론 사이의 가치론 3.

 

추상 노동


맑스는 상품교환 분석을 통해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의 특수한 사회적 성격으로 나아간다:


“비로소 상품 교환 속에서 노동생산물은 그 생산물의 감각적이고 다양한 사용대상성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으면서 사회적으로 동등한 가치대상성을 가지게 된다. (……) 이러한 순간에 생산자들의 사적 노동은 사실상 이중적인 사회적 성격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사적 노동은 한편으로 특정한 유용 노동으로서 특정한 사회적 욕구를 충족시켜야만 하며 따라서 총노동의 지절로서, 즉 사회적인 노동 분업의 자연적인 시스템의 지절로서 유지되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각각의 특수하고 유용한 사적 노동이 각각의 다른 유용한 방식의 사적 노동과 교환될 수 있고 따라서 그 노동들이 동등해지는 한에서, 사적 노동은 바로 그 사적 노동의 생산자의 다양한 욕구만을 충족시킨다.” (Ⅱ.6/104; 23/87, Herv. v. mir)


노동이 분업화된 모든 사회에서 개인 노동의 생산물은 사회적인 욕구를 충족시킨다. 개인의 노동은 동시에 사회적 총노동의 부분이며 따라서 사회적 성격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상품 생산에서 이러한 사회적 성격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개인 노동의 생산물은 반드시 교환되어야 한다. 이러한 것은 개별적인 사적 노동이 다른 사적 노동과 동등한 것이 될 수 있을 때에만 사회적 총노동의 구성 부분으로서 인정받게 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개별적인 사적 노동은 서로가 동등하게 상품 생산에 대해 더 넓어진 노동의 특수한 사회적 성격을 형성하는 것으로 통용된다. 따라서 상품생산에 대해서는 오로지 다음과 같은 사실이 통용된다;


“서로 독립적인 사적 노동들의 특수한 사회적 성격은 인간 노동이라는 동등성 속에 있으며 또한 노동생산물의 가치의 특성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형태를 띠게 된다……” (Ⅱ.6/105; 23/88, Herv. v. mir)


맑스가 첫 번째 인용문의 마지막에서 언급하고 있는 이러한 동등성의 통용(gleiche Geltung)이 무엇으로 실현되는가에 관한 문제가 나타난다. 두 번째 인용문에서 사람들은 이러한 동등성의 통용이 사적 노동을 인간 노동으로 동등하게 표현한다는 것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을 추론할 수 있다. 여기서는 좀더 확대된 물음이 나타날 수 있다. 즉 이러한 동등성이 모든 사적 노동을 서로 동등하게 하면서도 독립적으로 만들지만 그 사적 노동들에 귀속해 있는 하나의 속성에 기인하는가 또는 사적 노동들 사이의 특정한 사회적 연관이 문제인가? 가치 분석과 상품의 물신적 특성에 관한 절의 문맥 속에서 맑스는 명백하게 두 가지 가능한 방향으로 다음과 같이 논증한다 : 교환에서 사적 노동들의 동등성은 결코 개별적인 사적 노동들에 곧바로 귀속하는 어떤 속성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다른 사적 노동들에 대한 특정한 사회적 연관이다. 또한 자연적이지 않고 오히려 이러한 특수한 사회적 동등성을 근거로 하여 비로소 사람들은 추상적 노동에 대하여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것을 날카롭게 지적할 필요가 있다 :


“전체 하늘 아래서의 모든(toto coelo) 서로 다른 노동의 동등성은 그 노동들의 현실적인 비동등성(Ungleichheit)을 추상하는 과정 속에서만 가능할 수 있다. 즉 서로 다른 노동들이 인간 노동력의 지출로서, 추상적 인간 노동으로서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특성으로 환원하는 과정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Ⅱ.6/104; 23/87f)


이런 한에서 추상적인 노동은 교환을 통해서야 비로소 실현되는 노동의 특수한 사회적 규정이 된다. 경제학-철학 수고의 보충판……(Ergänzungen……)에서 맑스는 자신이 방금 인용한 글을 다음에 나오는(Ⅱ.7/55와 비교해 보면, 역시 프랑스 번역판에도 포함되어 있는) 글을 부가함으로써 보완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 이러한 교환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


“서로 다른 구체적인 사적 노동을 동일한 인간 노동이라는 이러한 추상물로 환원시키는 것은 서로 다른 노동의 생산물들을 동등하게 만드는 교환을 통해서만 완수된다.” (Ⅱ.6/41)  

따라서 여기서 문제가 되고 있는 “추상”이 교환 행위자들을 통해 의식적으로 행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백하게 말할 수 있다. 또한 다음과 같은 말이 타당하다 : “그들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 다만 그것을 행할 뿐이다.” 여기서는 일반적으로 어떤 지적인 추상과정이 문제가 아니다; 추상은 오히려 교환 행위자들의 교환행위를 통해서 수행된다.(주24-)         

맑스가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의 특수한 사회적 성격에 관한 문제에 직면하여 교역의 관점(그리고 추상의 공정)에 기초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서도 답할 수 있는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그는 고전 경제학의 이론적 장과 결별하게 된다. 따라서 맑스는 노동이 사용가치를 생산하고 가치를 생산하는 한에서, 고전경제학 어디에서도 만들지 못한 노동 내에서의 차이가 “정치경제학을 이해하기 위한 출발점”(Ⅱ.5/22; 23/56)이라는 사실을 정당하게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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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주의와 사회이론 사이의 가치론 2.

사회화의 특정한 방식과 양식은 개인들 일반에게 그들의 자리를 지정해 주며 그들에게 그 자리에서의 합리성을 강요한다. 이러한 방식과 양식은 개인들과 그 합리성 바깥에서 결정되 수 없다. 맑스는 명백하게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

 

“사람들은 따라서 자신의 노동생산물을 서로 가치로서 관련시키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이러한 사물들을 동질의 인간노동의 단순한 사물적인 외피로 간주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반대이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서로 다른 종류의 생산물을 서로 교환 속에서 가치로 동일시함으로써, 그들은 자신들의 서로 다른 노동을 서로 인간노동으로 동일시한다.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행한다.” (Ⅱ.6/104f; 23/88, Herv. v. mir)

 

이러한 분석이 개인들이라는 관점으로부터 출발할 수 없고 오히려 개인 그 자체가 해명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마지막으로 인용된 글(문장)이 다음과 같이 계속되는『자본』의 초판에서 좀더 명확하게 나타난다:

 

“……, 왜냐하면 개인들이 물질적인 사물을 가치라는 추상으로 환원시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

은 개인들의 두뇌의 자연적이며 따라서 무의식적인 본능적 작동인데, 그 작동은 개인들의 물질적 생산의 특수한 방식과 이러한 생산으로 인해 개인의 위치가 정해지는 관계들로부터 필연적으로 생겨난다.” (Ⅱ.5/46)

 

여기에선 특히 정치경제학의 이론적 장(Feld)과의 단절이 분명해진다. 경제적 현상들은 더 이상

거래하는 개인들의 이해관계와 연관해서, 즉 경제적 인간(homo oeconomicus)이라는 특정한 인간학과 연관해서 그 근거가 밝혀지지 않는다. 이러한 것 대신에 (개인들이 보통 결코 어떠한 생각도 하지 못하는)거래의 형태내용(Formgehalt)으로부터 일반적으로 우선 노동의 특수한 사회적 성격, 즉 개인들의 거래 행위의 기초가 되는 특수한 생산관계가 재구성되어야 한다. 그러할 때 비로소 개인들과 경제적 행위의 동기가 고찰될 수 있다.(주23-) 

노동이 노동생산물의 기치형태로부터 이윤과 이자까지 다양한 경제적 형태로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는 노동의 특수한 사회적 형태에 관한 서술은 맑스 노동가치론의 유일한 핵심이다. 이와 반대로 맑스의 가치론이, 그 본질적인 과제가 이윤의 기원을 셀 수 없는 노동(질적인 노동-옮긴이)의 특정한 양에서 찾게 하는 것을 입증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양적인 노동량 이론(Arbeitsmengentheorie)으로서 파악된다면, 맑스는 “사회주의적 리카르도주의자”의 이론적 수준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그러나 맑스는 좀더 근본적인 다양한 질문에 처하게 되는데, 그 문제는 사적 생산자들의 사회 속에서 일관성 있는 사회적 연관이 어떠한 방식으로 만들어지는가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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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주의와 사회이론 사이의 가치론 1.

지금부터 올리는 번역은 3부 <정치경제학 비판 근본 범주들의 양립> 중 5장 <화폐 가치론>의 2절 <자연주의와 사회이론 사이의 가치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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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부 정치경제학 비판 근본 범주들의 양립 #

 

@ 5장 화폐 가치론 @


# 2절. 자연주의와 사회 이론 사이의 가치론 #

 

이미 1장에서 보았듯이, 노동은 고전 정치경제학에서는 늘 오로지 인간과 자연 사이의 (개별적인) 개인의 과정인데, 이 과정은 인간에게 고역과 부담을 의미한다. 정치경제학과 관련되는 최후의 지점이 늘 개별적 개인이기 때문에, 즉 “인간에 대해서” 변용된 상품 소유자의 인간학이기 때문에,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의 특수한 사회적 형태는 정치경제학 일반에 대해서는 어떠한 대상도 아니다.(주19-) 고전 경제학뿐만 아니라 한계주의(Marginalismus-대부분의 인간 행태를 '限界(marginal)'라는 개념으로써 설명하려고 하는 소위 '限界主義(marginalism)' 분석 방법을 택하고 있다. 소비자들의 嗜好(preference)는 처음부터 주어진 것으로 가정하고 논의의 대상에서 제외시키고 있으며,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여러 가지 사회적 制度도 주어진 조건으로 하여 분석의 대상에서 제외시키고 있다)는 늘 두 개별적인 상품 소유자 사이의 행위로서만 상품교환을 주제로 삼는다. 이 둘의 패러다임에서는 교환관계의 양적인 규정에 대한 문제가 중심에 서 있고, 또한 이 둘에게서 이러한 문제는 인간학과의 관련을 통해서 그 답이 얻어진다. 교환 속에서 이미 늘 전제되고 있는 비교 가능성은 더 이상 이론적인 문제로 인식되지 않고, 오히려 단지 경험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여질 뿐이다. 두 패러다임의 내용이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고전 정치경제학의 “객관적” 가치론과 한계주의의 “주관적” 가치론은 그들 담론의 개별적 개인이라는 인간학적 구조 속에서 일치한다.


고전 경제학과 신고전 경제학에 대립하여 맑스가 상품교환을 단순히 사회적 재생산의 매개 형태로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사회적 노동의 한 특수한 형태로 고찰한다.(주20-) 맑스는 교환자들이 교환 속에서 생각하는 것에 대한 문제, 즉 교환자들이 어떤 이해관계를 추구하는가의 문제에 서 있지 않는데, 그 대신에 개별적 개인들에게 교환 이외의 어떤 다른 가능성도 허용하지 않는 사회적 노동이 어떻게 구성되는가를 탐구한다.

 

“사용대상들은 그것이 상호 독립적으로 행해진 사적 노동의 생산물인 한에서만 상품이다. 이러한 사적 노동들의 복잡성은 사회적인 총노동을 형성한다. 생산자들이 우선 자신의 노동생산물의 교환을 통해 사회적 접촉을 하기 때문에, 또한 역시 생산자들의 사적 노동의 특수한 사회적 성격은 우선 이러한 교환 속에서 나타난다. 또는 여러 사적 노동은 사실상 교환이 노동생산물과 그 생산물을 매개로 한 생산자들의 위치를 바꿔 놓는 관계들을 통해 사회적 총노동의 한 지절(Glieder)로서 나타난다.”(Ⅱ.6/103f; 23/87, Herv. v. mir)

 

 개별적 개인들이 자신의 개인적 노동을 상호 독립적인 사적 노동의 형태로 전제함으로써, 그들은 그들의 생산물을 교환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들의 사적 노동이 일반적으로 사회적 총노동의 구성 부분으로서 나타날 유일한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별적인 생산자들의 사회화는 그들의 서로 다른 사적 노동 사이에 하나의 응집된 사회적 연관이 존재할 때에만 가능하다. 이러한 응집 관계의 수립은 또한 개인들의 교역의 결과물이지만, 개별적 개인들 자체를 명확하게 밝혀 낼 수 있는 어떤 의식적인 결과물이 결코 아니다; 또한 이러한 관계의 수립은 독립적인 행위들이 충돌해서 나타나는 단순한 우연적인 결과물이 아니다. 개별적 개인들에게 이러한 결과물은 그들 행위 이전에 현존하는 전제이다. 그들에게 이러한 전제는 상품과 화폐의 대상적 속성으로, 즉 대략 중력 법칙과 같이 바로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속성으로 설명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한에서 맑스는 “물신주의”에 대해서 말한다.(주21- “물신주의”에 대한 개념은 알튀세(1969, S.103)가 생각하는 것처럼 결코 헤겔의 유해한 어떤 잔재도 아니다. 물신주의는 상품물신과 화폐물신에 한정되지 않고 부르주아 생산관계 전체를 포괄한다. 피셔(Fischer, 1978)의 다양한 물신형태와 아울러 바로 다음 장의 결론에 해당하는 절과 비교해 보라. 에르켄브레흐트(Erckenbrecht, 1976)는 좀더 넓은 연관 속에서 맑스의 물신주의 개념을 논하고 있다.) 일상의식뿐만 아니라 고전 부르주아 경제학은 자신들의 경험주의를 토대로 하여 이러한 물신주의로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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