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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가부장제 이론의 발전과 사회주의 페미니즘 2

(12쪽) 2. 역사 속에 나타난 여성들의 착취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맑스와 엥겔스는 초기 전(前)자본주의 사회의 노동 분업을 가족의 관점에서 논의하고 있다. 첫 번째 노동 분업은 성별 활동을 통한 가족 내에서의 “자연스러운” 노동 분업이다. 아이들을 양육하는 활동이 노동 분업의 시작이다. 바로 이러한 활동이 가족 내에서의 소유를 처음 나타나게 했다. 맑스와 엥겔스에 따르면, 이것은 부인과 아이들이 남편의 노예가 될 때 나타난다.

 

 

가족 내에서의 이러한 잠재적 상태의 노예 상태는 여전히 거의 세련되지 못한 상태이지만, 첫 번째 소유 상태이다. 그러나 이 초기 단계에서조차 그 상태는 타인의 노동력을 처분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부르는 근대 경제학자의 정의와 완전히 일치한다. 게다가 노동 분업과 사적 소유는 동일한 표현이 된다. ……

 

 

여기에는 성별 노동 분업 자체에 대한 논의가 없다고 할지라도, 거의 세련되지 못했지만 성별 노동 분업에 대한 초기 통찰의 싹이 있다. 맑스와 엥겔스에게 있어서, 이러한 통찰을 약화시키고 결국에는 그 통찰을 제한하는 것은 성별 활동으로부터 나타난 이러한 노동 분업이 사적 소유와 일치하고 동일시된다는 점이며, 게다가 “노동 분업과 사적 소유가 동일한 표현”이라는 점이다. 노동 분업은 그 자체 어떤 특성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또한 출산 행위로 인한 노동 분업을 통해 나타난 소유는 자본 관계로부터 나타난 노동 분업과 구별되지 않는다. 재생산과 생산은 하나인 것처럼 보인다. 마치 이 둘이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 분업 관계 속에서 나온 것처럼 말이다. 불평등이 성별 활동으로부터 나올 수도 있다는 사실은 여기에서 아무런 의미도 없다. 재생산이 노동 분업의 첫 번째 근원지라고 알려지더라도, 결코 어떤 특별한 검토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독일 이데올로기』에서는 그것이 물질적 조건에 따라 변한다는 것과 같은 여성의 조건에 관한 개략적인 분석이 이루어지고 있다.

 

 

노동 분업은 이 단계에서 여전히 아주 기본적인 것이고 또한 가족에 의해 나타날 수밖에 없던 자연발생적인 노동 분업이 좀더 확장된 것에 머무른다. 따라서 사회 구조는 가족의 확장에 머무른다. 가부장제 종족 우두머리들이 있고 그 아래에 그 종족 구성원들이 있으며 마지막엔 노예들이 있다. 가족 안에 잠재되어 있는 노예제만이 점차 발전되어 가는 것이다.

 

 

(13쪽) “가족에 의해 나타날 수밖에 없던” 노동 분업은 여기서 자연발생적인 것이라고 이야기되고, 또한 이것이 “필연적” 또는 “선한”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 분업은 맑스와 엥겔스에 의해 수용되었던 분업이다. 여기서, 따라서 가족 내에서의 노동 분업은 가족을 둘러싸고 규정하는 경제적 사회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다(이러한 것은 이후 『공산당 선언』에서 나타난다). 오히려 이러한 역사적 초창기에 맑스와 엥겔스는 가족을 사회와 그 사회의 노동 분업을 구조화시키는 것으로 본다. 맑스와 엥겔스의 가족에 대한 분석은 다음과 같이 계속된다. “성별 활동 내에서 노동 분업이 발전돼 나오지만, 그 다음에 이 노동 분업은 자연적인 소질(예를 들면 체력), 욕구, 우연 등에 의하여 저절로 또는 ‘자연발생적으로’ 발전해 나간다.”

 

『가족, 사유재산, 그리고 국가의 기원』에서 엥겔스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발전해 나온 이 주제를 다음과 같이 되풀이하고 있다. “첫 번째 노동 분업은 자녀 양육을 위한 여성과 남성 사이의 노동 분업이다.” 따라서 첫 번째 계급 적대는 일부일처제에서 여남 사이의 적대와 동시에 나타나는데, 이러한 적대가 어디에 기초하는지는 결코 분명하지 않다. 엥겔스의 주장은 첫 번째 계급 적대가 여남 사이의 적대와 동시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이러한 여남 사이의 적대가 계급 적대와 관련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결국엔 그도 여남 사이의 갈등에 관해서 계급 갈등으로 말하였다. 가족 내에서 남성은 부르주아지를 대표하고, 부인은 프롤레타리아트를 대표한다. 그러나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는 경제적 생산수단과 관련하여 나타나는 힘(권력)의 위치를 표현하는 것이지, 재생산이라는 성별 활동과 관련한 것이 아니다. 여성과 남성을 범주화함으로써, 재생산관계는 생산관계 아래로 포섭된다. 엥겔스가 가족 안에서의 여-남(male-female) 관계들을 사회의 노동 분업을 규정하는 것으로 인정하면서도, 그 관계들을 재생산과 관련된 분석 범주 아래로 완전히 종속시킨다는 것은 모순이다. 그는 이런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는 어떤 설명도 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 딜레마가 그의 분석 영역 밖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노동 분업이 가족으로부터 사회로 퍼져 나간다는 점을 엥겔스가 인정하고 있음을 보았다. 그런데도 가족 내에서 여성이 노예화되는 것을 설명하는 분석 범주들이 전적으로 생산관계로부터 도출되고 있다. 가족은 (14쪽) 역사적인 경제 양식에 의해 규정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가족은 그 자체 경제를 규정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사회를 규정하지 못한다. 그리고 가족은 경제적 관계와 일치하는 노동 분업의 근원으로서 더 이상 이야기되지 못한다. 경제적인 생존 양식이 가족을 결정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엥겔스는 “첫 번째 노동 분업”에 관한 자신의 고유한 분석 형태를 잊어버리고서는, 가족이 그 자체 어떻게 경제 양식을 떠받치고 있는지를 분석하는 것 대신에 가족이 자본주의의 붕괴와 더불어 해체될 것이라고 가정한다. 그가 (사회적 생산에 대립하며 그 바깥에 있는) 사적인 가사 영역에서 여성의 생존 문제를 인정하고 있지만, 그는 이 문제를 사적 소유에 기초해 있는 생산관계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녀의 생산 활동을 제한하는) 여성의 재생산 활동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엥겔스에게서 가족은 정치 경제의 축소판이 되었다. “가족은 이후에 사회와 국가로 확산될 모든 모순을 축소판으로 가지고 있다.” 남성은 부르주아지이고, 여성은 프롤레타리아트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엥겔스가 남자(male)의 범주를 가족 바깥에 있는 부르주아지로, 그리고 여자(female)의 범주를 프롤레타리아트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거기서 사람들은 그들의 성이 아니라 생산수단과의 관계에 따라 계급 위치를 정한다. 엥겔스는 계급 안에서의 구성원의 지위를 규정하기 위하여 가족 안과 바깥에서 서로 다른 규준(criteria)을 사용한다. 이런 범주가 권력과 같은 것에 기초해 있었다면, 동일한 분석 단위가 가족 안팎 둘 다에서 적용되었을 것이다. 또한 누군가가 애초부터 엥겔스가 가족 안에서 프롤레타리아트/부르주아지 개념을 사용한다는 점이 경제적인 것이라고 말하고 싶을 때, 거기에는 여전히 명백하게 고려해야 할 다른 것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고려되지 않는다면, 그는 (1) 가족에서의 계급 구별을 부르주아니-남자/프롤레타리아트-여자로 할 수 없으며, 또한 (2) 사회에서의 계급 구별을 생산수단의 유무로 할 수 없을 것이다. 그에게 있어 이러한 것들이 처음부터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이것들은 가족과 자본주의의 관계에 관해서 애초부터 무엇을 반영하고 있는가? 이러한 것은 재생산 관계 내에서의 여성과 남성의 성적 차이들로부터 벗어난 권력 개념과 관계 있어 보인다. 그러나 엥겔스는 이러한 것을 파악하지 못했다.

 

(15쪽) 그 시기에 대부분 엥겔스는 억압과 착취를 동등하게 보는 단순한 방정식을 가지고 연구에 임한다. 엥겔스가 가족이 가사 노예제를 은폐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동시에 가사 노예제나 남편의 임금-노예제 사이에 아무런 차이도 없다는 점을 믿고 있었다. 이 두 노예제는 자본주의로부터 도출되었다. “여성해방은 오로지 여성이 거대한 사회적 규모로 생산에 참여할 수 있고 가사노동이 하찮은 일이 될 때에만 가능할 수 있다.” 여성의 현실적인 평등은 자본의 착취가 소멸되고 사적인 가사노동이 공적인 산업으로 바뀜으로써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엥겔스가 성별 노동 분업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엥겔스에게는 공적인 가사노동조차 아마도 거의 여성의 일로 남게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맑스와 엥겔스에 의해 윤곽이 드러나고, 그리하여 『가족, 사유재산, 그리고 국가의 기원』에서 엥겔스에 의해 발전된 이러한 분석은 가족이 적어도 역사적으로 사회의 노동 분업을 구조화시키며 이러한 노동 분업이 성별 활동에서의 노동 분업을 반영한다는 그들의 믿음을 드러낸다.

 

“유물론적인 개념에 따르면, 역사에서 결정적 요소는 최종 심급에서 직접적인 삶의 생산과 재생산이다. 이것은 또 다시 두 가지 측면을 가진다. 한편으로 생존수단의 생산, 즉 식량, 옷, 그리고 생산에 필요한 도구들, 다른 한편으로 인간 존재 자체의 생산, 즉 인간 종의 번식. 특정한 역사적 시대와 나라에서 사는 사람들의 사회 조직은 이 두 종류의 생산에 의해, 즉 한편으로 노동 발전 상태와 다른 한편으로 가족의 발전 상태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가족에 관해 논의할 때 사라지는데, 왜냐하면 계급 사회를 총체적으로 반영하는 가족이 여기서는 단지 상부구조의 다른 한 부분으로 나타나며, 또한 재생산 관계가 생산 관계 아래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요점은 가족이 사회를 반영한다는 것이 아니라 가족의 가부장제적 (16쪽)구조와 가부장제적 이데올로기 둘 다를 통해서 가족과 재생산의 욕구가 사회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가족과 사회, 생산과 재생산 사이의 이러한 상호 관계는 여성의 삶을 규정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단순히 경제적 착취를 이해하기보다 억압을 이해하려고 할 때, 여성 억압에 관한 연구는 성적이고 경제적인 물질적 조건 둘 다를 다루어야만 한다. 역사 유물론 방법은 생산자와 재생산자로서 여성이 성별 노동 분업과 사회와 맺는 관계뿐만 아니라 이러한 관계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정식화하는 방향으로 통합, 확장되어야 한다. 그럴 때만이 여성 생존의 복합성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유적 삶을 여성에게도 적용시킬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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