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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자본주의 가부장제 관계들에 대한 몇 가지 노트 4.

가족 관계들

 

가족은 가족 안팎 모두에서 일어나는 여성의 행위들을 규정하는 일련의 관계들이다. 가족은 개인들을 경제와 관련시키는 관계망들의 한 구조이기 때문에, 가족은 한 사회의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그리고 문화적인 한 단위이다. 가족은 형성 과정상 역사적인 것이지, 단순히 생물학적 단위가 아니다. 여성의 역할과 마찬가지로, 가족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다 ; 가족은 사회의 특수한 관계들, 즉 충족되어야 할 특수한 욕구들을 반영한다.

 

가족을 규정하는 관계들에는 어떠한 것이 있을까? 첫째, 여성은 경제를 위한 노동자들 그리고 사회의 구성원들이 되는 아이들을 재생산하는 존재이다. 또한 여성은 노동 세계와 사회 전체 속에서 아이들이 자신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사회화시킨다. 여성은 이러한 아이들을, 그리고 그녀의 남편들을 먹이고, 입히고 돌보는 노동을 한다. 이러한 능력들을 펼치는 과정 속에서, 어머니는 경제의 측면에서 가사 노동자이며 또한 나아가 사회 전체를 양육하는 존재이다.

 

둘째, 여성은 가족에 대한 역할을 고려해 볼 때 소비자이다. 소비는 생산의 다른 측면이다. 여성은 가족이 원하고 경제가 팔아야만 하는 물건들을 산다. 여성은 새로운 옷을 세탁하거나 식사를 준비하는 하는 것과 같은 이러한 상품들을 선호한다. 소비자로서, 여성은 이러한 상품들을 고르고, 준비하고 유지시키는 데 힘을 쏟는다. 여성은 아주 중요하게 경제와 사회에 연결되어 있다. 여성은 경제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 즉 소비를 담당하고 있다.

 

모성이 가사노동이라고 부르는 활동들을 포함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모성은 이러한 활동들로 결코 환원될 수 없다. 모성은 자본 관계들 내에 있는 가사노동보다도 더 복잡한 실재,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어떤 계급 실재로도 환원될 수 없는 가부장 제도로 이해되어야 한다. 가사노동과 가정(housewifery)은 모성을 자본주의 가부장제의 특수한 것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어머니의 초역사적인(pre-existing historical) 의미 (49쪽) 그리고 이 개념이 남성지배와 관련하여 반영하고 있는 모든 것을 연결시킬 수 있도록 주의해야 한다.

 

가족 내의 이러한 관계들은 여성들이 일자리를 구하려 할 때 시장에서 그녀들의 가치를 하락시킨다. 1970년 (미국 남성의 40%에 비해) 고작 미국 여성의 7%만이 1년에 10,000$ 이상을 벌었다. 다르게 말하자면, 미국 여성의 93%가 1년에 10,000$ 미만을 벌었다는 것이다. 가정에서 여성의 노동은 가정 밖에서 임금을 받을 수 있는 일자리를 찾는 데 대한 책임이 있다. 여성은 자신을 가족에 묶어두는 관계들 때문에 자신의 노동력에 대한 임금을 지불 받지 못한다. 여성의 노동은 공짜거나 값싼 것으로 규정된다.

 

우리는 여성이 자신의 노동력 안에서 고립되고(ghettoized) 거기서 그녀들의 노동이 남성 지배의 사회 조직에 저항하지 못한다는 것을 이미 볼 수 있었다. 여성을 가장 낮은 단계의 노동력으로 유입시키는 것은 마음대로 사회를 남성이 지배하는 가부장적 위계질서로 만들고자 하는 욕망을 반영하는 것이다. 남성 지배는 계급 위계를 통해 유지된다. 이러한 불변성은 여성 삶의 모순인 이중 노동(the double day of work)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여성은 노동자이면서 어머니 둘 다이다.

 

첫째로 여성을 어머니로 규정하는 관계들은 무엇인가? 무엇이 가부장적 노동 조직을 규정하는가? 다른 말로, 여성은 왜 여성으로서 억압 받아야 하는가? 그 대답은 종종 여성의 생물학이 여성을 남성으로부터 구별시킨다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여성의 재생산 관계가 남성보다는 오히려 여성을 교환 대상으로 규정했다고 할지라도, 남성 지배의 역사 그리고 자본주의와 이 역사의 특수한 관계는 지금 이러한 유일한 특성(여성의 생물학-옮긴이)으로 제한되지 않는 일련의 관계들을 반영하고 있다. 여성을 재생산자로 정의함으로써 나타난 전체 관계들이 있는데, 이러한 정의는 결코 그 관계들의 근원으로 “환원될” 수 없다. 문화적이고도 정치적인 관계 이 두 가지는 성적 관계들의 위계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규정되었고 또한 재규정되었다. 위계질서에 대한 초기 이유는 아마도 꼭 필요로 하는 생물학적 지식의 결여로 나타난 여성의 재생산 능력에 대한 공포일 텐데,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회는 여전히 성적 위계질서를 필요로 하는데, 이는 그 관계들이 그 이후로 구조화되었던 방식 때문이었다.

 

남성과 여성 사이의 생물학적 특성을 구별시키는 것이 (50쪽) 여성의 재생산 능력이라고 한다면, 이 능력이 왜 그리고 어떻게 남성지상주의 관계들(이 관계들은 초기 이유보다 훨씬 더 복잡한 불평등 체계로 구성되었다)의 부분으로 사용되었는지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재생산자로서 여성의 생물학적 자아(self)에 대한 이해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이해가 정치적 관계들(이 관계들은 어떠한 경우라도 그러한 이해를 규정한다)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생물학적으로 추상화된 의미가 아닌 생산과 재생산의 관계들은 여성이 자신과 사회에 대해 재생산자로서 가지게 되는 관계성(relationship)을 규정한다. 재생산자로서 여성이 서로 다른 문화 속에서 나타나는 남성지상주의 보편적 특성이며 따라서 문제의 근원이라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문제를 부적절하게 정식화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동일한 실재(reality,재생산으로 여성을 통제하는 것)를 바라보는 것으로는 재생산을 규정하는 사회관계들을 충분하게 밝혀낼 수 없다. 문제는 재생산 자체가 아니라 바로 재생산을 규정하고 강제하는 관계들이다.

 

가부장제는 성별 노동 분업 그리고 문화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여성의 몸을 재생산의 그릇(vessel)으로 사용하는 데 기초를 두었던 사회를 통해 유지되었다. 여성은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선물로 교환되었다. 불평등은 재생산자로서 여성의 지위를 늘 찬양하고/하거나 통제하였던 구조로부터 나타났다. 교환체계가 바뀌었다고 하더라도, 그 체계가 생산했던 관계들은 가부장제 역사의 구성 부분이 되었고 아직도 (재규정되었지만) 그 구성 부분으로 남아 있다. 여성은 관리되는 존재였지 관리하는 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둘러싼 제도를 통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새로운 환경에 처해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집단 사회의 방식들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여성은 교환체계를 결정과 목적론적 행동 그리고 통제권으로부터 자신을 배제시켰던 관계 체계로서 경험하였다. 이것은 어느 정도 다른 형태이긴 하지만 자본주의 가부장제적 사회에 존재한다. 여성은 결혼해서 자기의 이름을 상실해 버리고 남편의 일이 필요로 하는 새로운 공동체로 이주해가서 외로움을 느끼며, 또한 사람 만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경제적으로 하위 계층에 있는 대부분의 여성이 노동력 시장에 나온다고 하더라도, 남성이 우선적으로 다루어진다. 남성과 동일하게 다루어지지 않으며 (51쪽) 결혼, 가족 그리고 가정주부라는 이성애적인 형태들에 따라야 하는 레즈비언 그리고 다른 여성들은 심지어 점점 더 고립되며 배척 당한다. 이러한 관계들은 남성에게 우선성이 주어진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 관계들은 여성의 삶에 대해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다는 특징을 명확하게 나타낸다.

 

사람들이 재생산 관계에 주목하게 될 때, 실제로 초점을 맞추는 것은 모든 기존 사회가 필요로 했고 이용했던 위계질서의 통제와 명령 체계이다. 남성 우월주의로서의 가부장제는 사회의 경제 구성체(organizations)가 변화해도 이러한 질서를 뒷받침했다. 이러한 것은 가부장제적 통제 체계가 변화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체계가 자신의 남성 우월주의 구조를 유지하고 남성 우월주의의 기본적인 영향력이 바뀌지 않고서도 변화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봉건주의로부터 자본주의로의 변화 과정에서도 기본적인 경제 계급 구조와 그 통제 체계는 확실히 변화한다.

 

가부장제가 권력 체계이기 때문에 남성이 가부장제 관계를 구현시켰기 때문에 억압하는 자라는 설명 없이 남자가 억압자라고 말하는 것은 불충분하다. 권력 관계들의 반영으로서가 아니라 단지 “사람들”(things)로서 개별적인 남성들에 대해 말하는 것은 남성의 권력을 구체적인 형태가 아니라 추상적인 형태로 이해하는 것이다. 생물학적 존재로서의 남자가 가부장제 관계들 밖에서 존재했다면, 그는 속빈 조개(a hollow shell)가 되었을 것이다. 가부장제 역사에서, 그와 권력관계들을 동일시하는 것이 바로 그의 생물학이다. 어떤 이들은 남성의 권력이 신체적인 힘을 통한 개인적 수준에서 나타나는 것이라 말하고 싶겠지만, 나는 이것이 가부장제 체계에서 남성이 가지고 있는 권력의 매우 제한된 의미에서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남성이 자신의 권력을 나타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오히려 성적 위계 관계들이다. 남성들은 이 위계 관계들에 기초한 관계와 행위를 내면화시켰다. 남성의 성 권력(sexual power)은 그의 개별적인 존재에만 내재하는 것이 아니다. 가부장제 관계들을 해체하기 위해서 우리는 성적 위계질서의 구조, 인종적 위계질서의 구조 그리고 특히 성별 노동 분업을 통해 유지되었던 계급적 위계질서의 구조를 해체해야만 한다. 우리가 사회의 권력 관계를 변화시킬 때 남성은 변할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더 이상 그들의 위계질서의 토대를 가질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가부장제에서 여성에 의해 경험된 가부장제의 어떤 특수한 억압도 사회관계들을 보여준다. 사람으로서(As things) 여성은 완전히 중립적(neutral)이다. 실재를 추상하게 되면, (52쪽) 피임, 임신, 낙태, 아이양육, 또는 여성의 애정 관계들에 대한 본질적으로(innately) 억압적인 어떠한 것도 없게 된다. 그러나, 이 애정 관계 모두는 이 사회에서 여성의 매우 특수한 억압도 나타낸다. 피임 방법들이 이윤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 건강을 생각하면서 여성과 남성 모두를 위해 고안된 것이라면, 그리고 낙태가 가부장제적 가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고 가부장제적 가치를 짊어질 때보다 비용이 더 적게 든다면, 피임과 낙태는 서로 다른 경험들이 되었을 것이다. 여남 모두가 아이 양육이 여성의 책임이라기보다는 사회적 책임이라는 사실을 믿게 된다면, 어린 시절의 애정 행위가 친밀한 행위라기보다는 오히려 은밀한 행위라고 우리가 믿지 않게 된다면, 아이 양육의 “관계들”은 현저하게 달라졌을 것이다. 여성이 현재 임신을 해서 가부장제의 의료를 받지 않게 된다면, 여성이 이 임신으로 인해 개별적으로 건강을 회복해야 하는(defining private health care) 관계들 속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여성이 이 임신으로 인해 임금 손실을 당하지 않고 경제적 부담을 지지 않는다면, 그리고 사회주의 페미니즘 사회에서 아이를 낳게 된다면, 출산 행위는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 가부장제 내에서 가부장제의 경험을 강조하는 것은 사회의 어떤 특수한 계기 속에서도 권력 관계가 드러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사회 속에서 삶의 활동이 과정, 즉 권력 관계의 과정 속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단절된 계기들보다는 오히려 이러한 과정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과정을 이해한다는 것은 과정이 변화할 수 있는 방식을 이해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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