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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선희..

# <우리 선희> (홍상수 감독, 2013) #

감독 : 홍상수

출연 : 정유미(선희), 이선균(문수), 김상중(최교수), 정재영(재학), 이민우(상우), 예지원(주현)

 

내 머리털 나고 혼자 야심한 밤(밤11시 상영)에 영화 관람을 하러 간 것은 처음이었다. 그만큼 홍상수라는 감독의 이름이, 그리고 배우들의 이름(정유미, 김상중, 정재영, 이선균, 이민우, 예지원)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이 영화에는 특별한 반전이 있는 내용이 없다. 그냥 너무나도 일상적인 이야기들과 모습으로 구성된 영화이다. 얼핏 보면 그냥 그저 약간 코믹한 영화처럼 보일 수 있다. 홍상수 감독께서 그러셨단다. “이번엔 쉽게 쉽게 보시라.” 그런데 이게 쉽게 보면 쉬울 수도 있는 것이지만, 한꺼풀만 벗기면 그리 녹록하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홍감독님께서 낚시밥을 던지셨구나 하는 느낌에 살짝 웃음이 나기도 했다(어렵게 생각하는 나를 홍감독님께서는 싫어하실 수도 있다! 그렇지만 영화 해석은 내 자유이니까!^^).

이 영화는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강하게 떠올리게 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람들 관계 속에서 네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를 찬찬히 사색해 볼 것을 바람이 전하듯 전해 준다.

이 영화는 한 여자(선희)와 세 남자(문수, 최교수, 재학)의 만남(재회)과 헤어짐에 관한 이야기이다. 세 남자는 예전에 한 여자와 관계가 있던 남자들이다. 한 여자는 학교 졸업 후에 다시 학교로 와서 이 남자들을 하나씩 만나고 나서 그대로 떠나버린다.

홍상수 감독의 예전의 영화 제목인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서 볼 수 있듯이, 이 영화에서도 선희는 앞으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인간관계의 전형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선희는 인간관계, 특히 남녀관계에서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적 관계 고리를 끊어 버린다. 예전에 세 남자와 선희의 관계는 주인과 노예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다가 선희는 이 관계로부터 벗어나서 새로운 자신의 모습을 찾기 위해 현실(학교)을 떠나 잠수를 탄다. 그리고 새로운 관계를 통해 새롭게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려는 결심(유학)한 후에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이제 현실에서의 관계를 이해하고 정리해야 새로운 현실로 나아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선희는 세 남자를 만나서 현실을 이해하고자 한다. 세 남자와의 각각의 만남 속에서 선희는 자신이 이들과의 관계 속에서 주인의 위치에 있게 됨을 이해하게 된다. 세 남자는 선희에게 매달리고(문수), 선희의 말에 복종하게 되고(최교수, 교수 추천서를 선희의 뜻을 그대로 반영하여 다시 써 준다), 선희에게 오히려 위로를 받게 된다(재학). 그리고 선희는 이 주인의 위치를 과감히 버리고 쿨하게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 고리를 끊어 버린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은 끊임없는 악무한적 순환의 고리(불교에서는 윤회의 고리로 표현된다)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세 남자와 다시 관계를 가진다면 주인의 위치는 얼마 가지 않아 노예의 위치로 바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희의 떠남은 결국 대등하고 평등한 인간관계를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

대등하고 평등한 관계란 집착과 아집을 끊어버리는 쿨한 관계이다. 집착과 아집은 배타적 소유인 사적 소유관계(주인과 노예의 관계)로부터 나타나는 것이다. 남자들 셋 모두 선희에 대한 동일한 파악은 바로 이러한 집착과 아집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세 남자는 자신들이 선희와의 관계에서 노예의 위치에 있다는 것을 즉자적으로 직감하지만 대자적으로 이해하지는 못한다. 그들은 늘 주인의 자리를 그리워하지만, 그 주인의 자리는 이제 과거의 일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선희가 떠난 후에 주인의 위치라는 집착과 아집에 갇혀 현재의 자기 존재에 대해 기만하게 된다.

다른 한편 세 남자는 선희와 만나면서 선희에게 삶에 대한 충고를 한다. 이러한 충고는 여전히 자신의 주인의 자리에 있다는 자기 존재기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또한 권력관계로부터 나타나는 것(가진 자, 쥔 자가 그렇지 못한 자에게 하는 것)이다. 그들이 자신의 삶을 깊게 파고 들어가봐야 한다고 말하면서 결과적으로 지금의 삶을 깨뜨려보라고 말하지 않는 것은 권력을 가진 자가 말하는 것, 즉 지금의 삶의 모습에 대한 제1원인을 캐보라는 것인데, 그 제1원인은 결국 신이고 네가 현재 이렇게 사는 것은 신에 의해 결정된 삶이라는 결정론의 이데올로기가 함축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결국 노예의 삶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임을 뜻한다.

세 남자는 자신들의 이러한 존재 기만이 관성의 법칙에 의한 것임을 깨닫지 못한다. 이 깨닫지 못함은 결국 치킨(닭)으로 상징된다. 주현(예지원 분)의 재치가 돋보인다. 여성의 이름에만 Sophia(지혜)가 있고 남성의 이름에는 없는지가 이해된다. 역시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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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의 <<판단력 비판>> 에 관한 메모.

# 칸트의 [판단력 비판](김상현 옮김, 책세상, 2005년) #

 

- Communism에서의 <자유>는 칸트의 판단력의 기초인 감성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Communism에서의 <자유>는 칸트가 말하는 현존 대상의 질서와 법칙으로서의 개념과 도덕적 선(good)을 넘어서는, 즉 자본주의 질서와 도덕적 선(good)을 넘어서는 감성적인 것과 연관이 있는 것 같다. Communism의 자유로운 개인은 <취미판단에서의 순수한 취미를, 공통감(어쩌면 이것이 자유일 수 있겠다)에 대한 직관력을 가지고 있는 인간>일 수 있겠다.

 

- (칸트에서의) 정치철학적 의미로서 (칸트의) <개념>은 <국가>(공동체)에 상응한다고 볼 수 있으며 <취미판단>, <공통감>은 <세계 국가(공화국)> 또는 <국가 연합>에 상응한다고 할 수 있다.

 

- (75쪽) “취미판단이 순수하다면, 그것은 만족이나 불만족을 용도나 목적을 고려하지 않고 대상에 대한 순전한 관조와 직접 결부시킨다.”

--> Commune의 형식을 가장 잘 표현해 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목적성을 배제한 목적성, 즉 대상을 그 자체로 관조하는 것, 다시 말해서 여러 가지 유용성, 기능, 의도 실현 가능성을 배제한 대상 그 자체에 대한 아름다움의 관조가 바로 Commune의 형식이지 않을까 싶다.

 

- (75쪽) “마음의 능력들이 우리가 아름답다고 부르는 것과 더불어 자유롭게 그리고 무규정적이면서도 합목적적으로 향유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자유로우면서 합목적적인] 향유에서는 지성이 상상력을 위해 활동할 뿐 상상력이 지성을 위해 활동하지는 않는다.”

--> Commune : 아름답다고 부르는 것과 더불어 자유롭게 그리고 무규정적이면서도 합목적적인 것이다.

 

- (87쪽) “그것이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은 [이를 측정하기 위한] 척도로서 역시 크기를 가지고 있는 다른 어떤 것을 항상 요구하게 된다. 크기를 판정함에 있어서는 단지 다수성(수)뿐만 아니라 단위(척도)의 크기도 중요하고, 또 이 단위의 크기는 항상 다시 그것과 비교할 수 있는 척도로서 다른 어떤 것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현상의 모든 크기 규정은 크기에 관한 절대적 개념을 결코 제공할 수 없고, 언제나 비교 개념만 제공할 수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은 다른 크기를 가지고 있는 다른 어떤 것을 항상 척도로서 요구한다. → 이것은 맑스의 상품 교환을 뜻하고 그 척도는 교환가치를 뜻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어떤 것은 단적으로 크다>라는 것에서 <크다>라는 것은 어떤 척도를 요구하는 비교·상대적인 개념이 아니라 <절대적인> 개념이다. 이 개념은 맑스에게서 <필요한 만큼>이라는 개개인의 욕망과 직결된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필요한 만큼>이라는 개개인의 욕망 개념은 대단히 주관적인 것이지만, 이 주관을 넘어서는 보편성과 절대성(인간 삶을 위한 필요의 충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 비교·상대적인 개념으로서의 <크다> 개념은 수학적·논리적 판단을 위해 사용되는 개념이다.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들의 계열 밖에서 상품 가치의 기준, 척도가 되는 등가형태로서의 화폐, 나아가서는 자본의 역할과 바로 연결될 수 있다. 모든 상품들은 자신의 밖에서 판단의 기준을 확보하게 된다. 이것은 더 나아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소외> 개념으로 이어질 수 있다.

--> 절대적인 개념으로서의 <크다> 개념은 감성적 판단에 사용되는 개념이다. 이것은 모든 판단의 기준을 자신 안에서 확보할 수 있는 사회주의 사회에 적용될 수 있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 (91~92쪽) “물론 사물의 크기에 관한 명확한 개념은 단지 수(물론 무한히 진행하는 수 계열에 의한 근삿값)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이 수의 단위가 곧 척도이며, 그런 한에서 크기의 모든 논리적 평가는 수학적이다. 그러나 척도의 크기는 이미 알려진 것으로 가정되어야만 하므로, 만일 이 척도의 크기가 또다시 다른 척도를 단위로 삼아야만 하는 수를 통해서만 평가된다면, 우리는 결코 제일의 척도 또는 근본 적도를 가질 수 없을 것이며, 따라서 주어진 크기에 관하여 규정된 개념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근본 척도의 크기 평가는 오로지 우리가 그 크기를 직관적으로 직접 포착하여 포착된 크기를 상상력이 수 개념을 현시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다는 데서 성립하는 것임이 틀림없다. 다시 말해 자연 대상들의 크기 평가는 모두가 결국은 감성적인 것이다(즉 주관적으로 규정된 것이지 객관적으로 규정된 것이 아니다).”

--> 이는 화폐의 물신화를 벗겨내는 맑스 사유의 방법과 아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 (134~135쪽) “칸트는 ‘일체의 관심 없이 대상을 판정하는 것’은 곧 ‘상상력과 지성의 자유로운 유희에 있어서 나타나는 마음의 상태’(《판단력 비판》, 29쪽 참조)라고 말하며, 이렇게 상상력과 지성의 일치가 일어나는 경우 이는 필연적으로 만족을 동반하게 되며, 그 만족감을 표시하는 판단, 즉 감성적 판단은 비록 주관적이기는 하지만 만인에 대한 타당성을 요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 상상력과 지성의 자유로운 유희 = 상상력과 지성의 일치

→ 반성 취미에 의한 미의 만족

--> 이러한 상상력과 지성의 관계는 맑스주의에서 토대와 상부구조와의 관계, 자본주의와 그를 넘어서는 공산주의와의 관계로 유비될 수 있겠다.

→ (137~138쪽) “감성적 합목적성은 주관적 측면에서 본다면 인식 능력들 간의 일치로 규정된다. 상상력과 지성이라는 인식의 두 능력은 감성적 판단에서는 상호 대립하면서 통일하는 자유로운 유희의 상태에 놓이게 된다. 이 관계는 이론 인식의 상황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이론 인식의 상황에서는 상상력이 지성을 위해 활동하는 일방적인 관계가 성립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관계에서는 각각의 부분들이 결합해 전체를 이루기는 하되, 각각의 항이 서로에게 원인이자 동시에 결과인 전체 관계를 성립시킨다고 보기는 어렵다. 반면에 감성적 판단에서는 두 인식 능력이 상호 침투하여 동시에 상호 원인이자 결과인 관계를 형성한다. 이때 감성적 주체는 인식 능력들의 자유로운 상호 침투 작용을 합목적적인 것으로 느끼게 되고, 쾌감이 유발되어 그 상태에 몰입하는 관조의 상태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객체로부터의 자유는 주관 자신의 내적·반성적 자유를 가능하게 하며, 이 반성적 자유는 객체적 목적이 없는 자유로운 합목적성으로 규정될 수 있을 것이다.”

→ (138~139쪽) “여기에서 우리는 감성적 합목적성의 두 번째 특징을 발견하게 되는데, 바로 생명감의 고양이다. 즉 인식 능력들의 일치와 조화라는 “감성적 판단은 ‘활력을 불어넣는 것’으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 이는 사실 칸트 자신이 주장하는 바이기도 하다. 그는 감성적 판단에 있어서의 쾌·불쾌의 감정을 생의 감정이라고 일컬으며(《판단력 비판》, 4쪽), 이 판단에서 성립되는 쾌의 감정이 인식 능력들에 활력을 준다고 말한다(《판단력 비판》, 37쪽). 감성적 합목적성이 생명감을 고양시킨다고 할 때도 우리는 감성적 합목적성의 부정적 규정, 즉 목적 없음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이 생명감의 고양은 물질적 욕구의 충족에서 비롯되는 것도, 실천적 욕구의 충족에서 비롯되는 것도 아니다. 말하자면 자기반성에서만 비롯되는 생명감이다. 바로 이런 측면에서 우리는 미와 예술을 통해 마음을 도야하고 세련된 문화를 지향하되, 목적(억압) 없는 - 일체의 목적은 그 달성을 위해서는 언제나 그 목적에 반하는 것들에 대한 배제를 내포하므로 목적은 곧 어압의 근원이 된다 - 자유로운 문명을 추측해 볼 수 있게 된다.”

 

- (139~140쪽) “그러므로 형식적 합목적성, 즉 객관의 측면에서 본 감성적 합목적성은 ‘전체-존재Ganz-Sein가 지성에 의한 부분들의 규칙적인 합성을 통해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부분들이 자유롭게 합쳐져서 통일을 이루는 것과 같은 외관을 제시하는 것’이라 하겠다.

감성적 합목적성에 대한 이와 같은 주관적 측면의 규정과 객관적 측면의 규정은 자연스럽게 감성적 경험에 있어서 주·객의 관계를 합목적적으로 표상하게 만든다. 인식 능력들의 일치와 조화 또는 생명감의 고양이라는 주관적 측면은 대상의 형식적 합목적성이라는 객관적 측면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감성적 합목적성은 감성적 주체와 그 주체가 경험하는 세계와의 목적 없는 자유로운 일치로 규정된다. 이는 객체에 투사된 주체의 자기 경험임과 동시에 주체에 투사된 객체의 (또 다른 방식의) 드러남이다. 말하자면 인식 능력들 간의 자유로운 일치가 주관과 객관의 자유로운 조응으로 전환됨을 의미한다. 주체와 객체의 자유로운 상호 조응은 사회적 의사소통의 문제와 관련하여 새로운 지평을 열어줄 수 있는 단초가 된다.”

--> 공산주의 사회는 자유로운 각 개인들의 연합체(어소시에이션)이라는 정의와 아주 흡사하다(감성적 합목적성, 전체-존재).

--> 코뮌 사회 : 목적(사유재산제로 유비) 없는 합목적성, 자유로운 합목적성(또는 필연성, 합법칙성) 또는 무규정적인 규칙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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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장. 전통의 단절(18세기 말과 19세기 초 : 영국, 미국 및 프랑스)

▲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 : 1757 - 1827) ▼

- “미술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접근에 있어서 가장 두드러진 예는 고야보다 열한 살 아래인 영국의 시인이자 신비주의자인 블레이크였다.” 그는 “자기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에 사는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었다. 그는 아카데미의 관학적 미술을 경멸했다.” (488쪽)

- “도판 321(<태고 적부터 ‘계신’ 이>, p.491)은 《유럽, 예언서》라는 자작 시집에 곁들인 삽화 가운데 하나이다.” (488쪽)

- “블레이크가 그린 것은 깊은 바다 앞에서 컴퍼스를 세우고 있는 하나님의 이런 장엄한 환상이다, 이 천지창조의 그림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모습은 어딘가 미켈란젤로의 숭배자였다 그러나 블레이크의 손을 거치면서 하나님의 모습은 몽환적이고 환상적으로 되어 갔다.” (490쪽)

- “사실상 블레이크는 자기 나름의 독특한 신화를 창조했으며 환상 속의 형상은 엄격하게 말해 하나님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블레이크의 상상 속의 한 존재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는 이를 유리즌(Urizen : 이성을 상징-역주)이라 불렀다.” (490쪽)

- “비록 블레이크가 유리즌을 세계의 창조자로 생각하기는 했으나 그는 세계를 악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러한 세계의 창조자도 사악한 영혼을 지녔다고 생각했다. 그 때문에 이 환상을 기분 나쁜 악몽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컴퍼스는 마치 어둡고 폭풍우 몰아치는 밤의 번갯불처럼 보인다.” (490쪽)

- “블레이크는 환상에 너무 깊이 빠진 나머지 현실세계를 그리길 거부하고 오로지 자기 내면의 눈에만 의존했다.” (490쪽)

- “중세의 미술가들처럼 그는 정확한 묘사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꿈속의 형상 하나하나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으므로 단순한 정확성의 문제는 그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 같이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는 르네상스 이래로 공인된 전통의 규범을 의식적으로 포기한 최초의 화가였다.” (490쪽)

 

▲ J. M. W. 터너( J. M. W. Tuner : 1775 - 1851) ▼

- “주제를 마음대로 선택하는 새로운 자유를 얻게 된 화가들이 가장 많은 혜택을 입었던 분야는 풍경화였다. 그때까지 풍경화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져왔다. 특히 시골의 집이나 정원, 또는 멋진 경치를 그려 생계를 꾸려왔던 화가들은 진정한 예술가로서의 대우를 받지 못하였다. 이러한 태도는 18세기 말엽 낭만주의 정신을 통해 다소 바뀌었으며 위대한 화가들은 풍경화를 새로운 권위로 끌어올리는 것을 일생의 목표로 삼았다.” (490쪽)

- “여기서도 전통은 한편으로 도움을 주면서도 한편으로는 장애물이 되었다. 같은 세대에 속하는 두 명의 영국화가가 서로 얼마나 다른 방식으로 이 문제에 접근하였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흥미 있는 일이다.” (490쪽)

- “그 중 하나는 터너이고 다른 한 사람은 존 컨스터블이다. 이 두 사람을 비교하는 것은 레이놀즈와 게인즈버러 사이의 대조를 연상시키는 무엇이 있다.” (490쪽)

- “그 역시 레이놀즈와 마찬가지로 전통의 문제에 사로잡혀 있었다. 클로드 로랭의 유명한 풍경화(p.396, 도판 255, <아폴론에게 제물을 바치는 풍경>)를 능가하지는 못해도 같은 수준에는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 그가 지닌 일생의 야심이었다. 그는 자신의 작품과 스케치를 국가에 기증하면서 그 중 한 작품(도판 322, <카르타고를 건설하는 디도>, p.492)를 항상 클로드 로랭의 작품과 나란히 전시해 줄 것을 명백한 조건으로 내세웠다.” (492쪽)

- “클로드의 그림이 지닌 미를 단순함과 고요한, 그의 환상세계가 지니는 명료함과 구체성, 그리고 어떠한 요란한 색채도 없다는 점에 있었다. 터너 또한 빛으로 가득하고, 눈부신 아름다움을 지닌 환상세계를 그렸지만 그것은 정적인 세계가 아니라 동적인 세계였으며 단순한 조화의 세계가 아니라 현란하고 화려한 세계였다.” (492쪽) (밑줄 친 부분은 낭만주의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 “그의 최고의 걸작들은 사실상 우리에게 웅다한 자연의 가장 낭만적이고 숭고한 모습을 보여준다. 도판 323(<눈보라 속의 증기선>, p.493)은 터너의 작품 중 가장 대담한 것 가운데 하나로서 눈보라 속의 증기선을 그린 것이다. 이 소용돌이치는 구도를 데 블리헤르의 바다 풍경(p.418, 도판 271, <해풍에 흔들리는 네덜란드 군함과 수많은 범선들>)과 비교해보면 터너의 접근방식이 얼마나 대담한 것인지 알 수 있다.” (492쪽)

-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데 블리헤르”의 “그림을 보고 이러한 배들을 다시 만들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터너의 그림을 보고 19세기의 증기선을 다시 만들어낼 수 없을 것이다. 그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은 시커먼 선체ㅘ 돛대에서 펄럭이는 깃발, 사나운 바다의 위협적인 돌풍과 대결하는 투쟁의 인상뿐이다. 마치 휘몰아치는 바람과 파도의 충격을 몸으로 느낄 수 있을 것만 같다. 세세한 부분은 살펴볼 겨를이 없다.” (492-4쪽)

- “낭만주의 시를 읽거나 낭만주의 음악을 들을 때에 우리가 상상하게 되는 것은 영혼을 뒤흔들고 마음을 압도하는 이러한 폭풍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터너에게 있어서 자연은 항상 인간의 감정을 반영하고 표현한다.” (494쪽)

 

▲ 존 컨스터블(John Constable : 1776 - 1837) ▼

- "컨스터블의 생각은 터너와는 매우 달랐다. 터너가 경쟁하고 능가하기를 원했던 전통이라는 것이 그에게는 단지 장애물에 지나지 않았다.“ (494쪽)

- “그는 클로드 로랭의 눈이 아니라 그 자신의 눈으로 본 것을 그리려고 했다. 그는 게인즈버러가 그만둔 것에서 다시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p.470, 도판 307, <시골풍경>). 그러나 게인즈버러조차도 여전히 전통적인 기준에서 보아 ‘한 폭의 그림 같다(picturesque)’고 생각될 만한 소재들을 선택했으며 여전히 자연을 목가적인 장면들을 위한 아늑한 무대로 보았다. 컨스터블에게는 이러한 모든 생각들이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진실만을 원했다.” (494-5쪽)

- “컨스터블은 대담한 혁신으로 사람들에게 추격을 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가 원한 것은 그저 자신의 눈에 충실하려고 하는 것뿐이었다.” (496쪽)

- “그의 습작(도판 324, <나무줄기의 습작>, p.494)들은 흔히 완성된 그의 작품들보다 훨씬 대담하다. 그러한 아직 일반 대중이 순간적인 인상의 기록을 전시할 만한 가치 있는 작품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시기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완성된 작품들은 처음 전시되었을 때 큰 물의를 불러일으켰다.” (496쪽)

- “도판 325(<건초마차>, p.495)는 1824년 파리에서 공개되어 컨스터블을 일약 유명하게 만든 작품이다.” (496쪽)

- 컨스터블은 “실제의 자연보다 더 그럴 듯하게 보이도록 묘사하는 것을 거부하였고 가식적인 포즈나 허세가 전혀 없는” 태도를 “성실”하게 견지하려고 했다. (496-7쪽)

 

▲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 : 1774 - 1840) ▼

- “전통과의 단절은 화가들에게 터너나 컨스터블의 작품에서 구체화된 두 가지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그들은 붓과 물감으로 시를 쓰는 시인이 되어 감동적이고 극적인 효과를 추구할 수 있었다. 또 자기 앞에 놓여진 소재들을 성실하게 묘사하여 끈질기고 정직하게 그것을 탐구하려는 결심을 할 수 있었다.” (497쪽)

- “유럽의 낭만주의 화가 가운데는 터너와 동시대 사람인 프리드리히 같은 위대한 미술가들이 있었다.” (497쪽)

- “프리드리히의 풍경화는 슈베르트의 가곡을 통하여 우리가 보다 친숙하게 알고 있는 당시의 낭만적 서정시의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그가 그린 황량한 산의 모습(도판 326, <살레지아 산의 풍경>, p.496)은 그 발상에 있어서 시와 가까운 중국 산수화(p.153, 도판 98, <우산도>)의 정신을 상기시키기까지 한다.” (4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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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장. 전통의 단절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 영국, 미국 및 프랑스) 1

24장. 전통의 단절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 영국, 미국 및 프랑스)

 

▲ 전통 단절의 역사적 배경 : 프랑스 대혁명(1789년) ▼

- 르네상스, 근대(“역사책에서 근대는 1492년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발견으로 시작된다.”) 이후, 프랑스 대혁명 이전까지만 해도 미술은 중세 때처럼 “유한계급의 생활 속에서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반드시 있어야 하는 어떤 것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475쪽)

- 또한 “이러한 미술의 목적이란 원하고 즐기려는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것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사실 그들 간에도 여러 유파가 존재하여 ‘미’란 무엇인가, 카라바조와 네덜란드 화가들과 게인즈버러 등이 명성을 얻었던 것처럼 자연을 능숙하게 모방하는 것인가, 혹은 라파엘로와 카라치, 레니, 레이놀즈와 같이 자연을 ‘이상화’할 수 있는 미술가들의 능력이 진정한 미를 좌지우지하는가 하는 여러 문제에 대한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475쪽)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논쟁자들 사이에는 많은 공통점이” 있었다. “‘이상주의자’들도 미술가란 자연을 연구해야 하고 나체화로부터 그림 공부를 시작해야 한다는 점에는 동의했으며 ‘자연주의자’라고 할지라도 고대의 고전적인 작품들이 결코 능가할 수 없는 최고의 미를 지니고 있다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 (475쪽)

- “18세기 말에 이르러 공통된 기반은 점점 무너지기 시작하는 것처럼 보였다.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은 “이성의 시대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으며 미술에 대한 관념이 변화한 것도 이 시기부터였다.” (475-6쪽)

 

▲ 호레이스 월폴(Horace Walpole) ▼

- “첫 번째 변화는 이른바 ‘양식’에 대한 미술가들의 태도였다.” (476쪽)

- “전에는 한 시대의 양식이란 그저 어떤 일이 행해지는 방식이었고 사람들은 그것이 어떤 바람직한 효과를 얻는 데 가장 올바르고 훌륭한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채택할 뿐이었다. 이성의 시대가 되자 사람들은 양식에 대해서 의식하기 시작했다.” (476쪽)

- “그러한 의식은” “‘왜 꼭 팔라디오 양식이어야만 하는가’”라는 물음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일이 바로 18세기 영국에서 일어났다.” (476쪽)

- 이러한 물음을 화제로 삼은 사람들 중 “가장 톡특한 인물은 초대 영국 수상의 아들인 호레이스 월폴이었다.” 그는 “스트로베리 힐의 별장을 고성(古城)처럼 고딕 양식으로 결정”했다(도판 311, <런던 트위크넘의 스트로베리 힐>, p.476). (476쪽)

- 이러한 고딕 양식의 선택은 “벽지 무늬를 선택하듯이 건물의 양식을 선택하도록 만든 자의식의 첫 번째 징후였다.” (477쪽)

 

▲ 존 숀(John Soane : 1752 - 1837) ▼

- 첫 번째 변화에 뒤이어 두 번째의 변화가 있었다. 그것은 “과연 무엇이 올바른 양식인가” 하는 것이었다. (477쪽)

- “건축가들은 올바른 양식을 먼저 찾아야만 하였다. 이제 월폴의 ‘고딕 복고’와 견줄 만한 ‘그리스 복고’가 일어났고 이는 ‘섭정 시대(1810-20)’에 절정을 이루었다.” (477-8쪽)

- “도판 312(존 패프워스, <첼튼엄(Cheltenham)의 도셋 하우스>, p.477)는 순수한 이오니아 식 그리스 신전(p.110, 도판 60)을 모방하여 지은 첼튼엄 온천의 한 집이다.” (478쪽)

- “도판 313(<시골 별장의 구상도>, p.478)은 파르테논 신전(p.83, 도판 50)을 통해 우리가 알고 있는 본래의 도리아 식을 건축의 한 예를 보여준다.” (478쪽)

 

▲ 신고전주의의 득세 ▼

- “엄격하고 단순한 규칙들을 적용한다는 이러한 건축 개념은 그 힘과 영향력이 전 세계적으로 커지고 있던 이성의 옹호자들에게 강한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미국의 건국공로자이자 제3대 대통령이었던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 1743 - 1826) 같은 사람이 자신의 저택 몬티첼로(도판 314, <버지니아의 몬티첼로 저택>, p.479)를 이러한 확실한 신고전주의(neo-classical) 양식으로 설계했고 각종 관공서가 있는 워싱턴 시가 ‘그리스 복고(Greek Revival)’ 양식으로 설계되었다는 것은 결코 놀라운 이야기가 아니다.” (479-80쪽)

- “프랑스에서도 대혁명이 일어난 후에 이 양식의 승리가 확고해졌다. 바로크와 로코코 건축가나 장식가들의 화려하고 낙천적인 전통은 이제 흘러가버린 과거지사가 되어버렸다.” “나폴레옹이 프랑스 대혁명의 이념을 옹호하는 척하면서 유럽에서 패권을 잡게 되자, 신고전주의 건축 양식은 제정 양식이 되었다.” (480쪽)

- “유럽 대륙에서도 고딕 양식의 부활을 이러한 순수한 그리스 양식의 새로운 부활과 나란히 존재하였다. 이것은 특히 이성의 힘이 세상을 개조하는 데 실망하고 이른바 ‘신앙의 시대’로 되돌아가는 것을 주장하던 낭만주의자들의 호응을 얻었다.” (480쪽)

- “전통의 사슬이 단절되었다는 사실이 그림과 조각에서는 건축처럼 즉각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을지 모르지만, 사실은 훨씬 더 커다란 의의를 지닌 것이었다.” (480쪽)

- 그런 의의 중 하나는 아카데미(Academy)의 설립이었다. “16세기 이탈리아의 미술가들은 자기들이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과)학자들과 맞먹는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그들이 모이는 장소를 처음으로 아카데미라 불렀다. 이러한 아카데미가 점차 학생들에게 미술을 가르치는 기능을 맡게 된 것은 18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이루어졌다.” (480쪽)

- 이 아카데미에서의 미술 교육은 그 이전까지 길드에서 도제를 교육시키는 방식과는 판이하게 다른 근대 학교의 방식인 것처럼 보인다. “18세기의 아카데미는 왕실의 후원을 받았다.” (480쪽)

- 그런데 여기에서 대단히 어려운 문제가 발생했다. 그것은 그 당시 현재의 화가들이 그림이 팔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카데미는 그림을 팔기 위한 전시회를 계획하였다. 이제 그림은 시장에서 팔려야 하는 상품이 되었다. 그런데 그림의 이러한 상품화 때문에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주제, 즉 멜로드라마의 주제 같은 것도 그리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화가들 사이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가져 왔으며, 이에 따라 아카데미적인 미술을 경멸하고 불신하는 흐름이 나타나게 되었다.

- 이러한 흐름은 미술가들로 하여금 “도처에서 새로운 주제의 종류를 찾아”내도록 했다. “미술가들은 셰익스피어 작품의 한 장면에서부터 시사적 사건에 이르기까지 상상력에 호소하고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모든 것을 그들의 주제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고 느끼게 되었다.” (481쪽)

- 그러나 “18세기 중반 이전의 미술가들은 주제에 있어서” “성경에서 따온 주제들이나 성자의 전설을 묘사”하는 주제 또는 “고대 그리스 신화라든가 용맹과 자기희생이 있는 로마의 영웅 설화, 또는 의인화를 통해 일반적인 진리를 보여주는 우의적 주제 등 몇 가지 선택된 주제”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481쪽)

 

▲ 존 싱글톤 코플리(John Singleton Copley : 1737 - 1815) ▼

- “유럽 미술이 기존의 전통으로부터 이렇게 이탈한 것은 부분적으로는 대서양을 건너 유럽으로 왔던 미술가들, 즉 영국에서 활약했던 미국의 화가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분명히 이들은 구세계서 신성시되어온 관습에 구속감을 느꼈으며 새로운 실험을 시도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코플리는 “이러한 부류의 전형적인 화가였다.” (481쪽)

- “도판 315(<1641년에 다섯 명의 탄핵된 의원들의 인도를 요구하는 찰스1세>, p.483)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서 1785년 처음 일반에게 공개되어 큰 물의를 일으켰다. 그 주제는 그야말로 특이한 것이었다.” (481-2쪽)

- “코플리는 찰스1세가 영국 하원에 대해 탁핵된 5명의 체포를 요구했을 때, 하원 의장이 왕의 권위에 도전하여 그들을 내주기를 거부했던 사건을 그리도록 제안 받았다.”(482쪽)

- “그의 의도는 마치 목격자의 눈에 비친 것처럼 가능한 한 정확하게 그 장면을 재구성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 코플리는 “엄밀하게” 역사적인 “시대 고증을 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482쪽)

- “프랑스 대혁명은 역사적 사건에 대해 이러한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영웅적 주제를 다룬 그림들을 등장시켰다. 코플리가 영국의 역사 속에서 그 주제를 구한 것은 하나의 예라고 할 수 있다.” (482쪽)

 

▲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 Louis David : 1748 - 1825) ▼

- “프랑스 혁명가들은 스스로를 새로 태어난 그리스와 로마 시민으로 자처하기를 좋아했으며, 그들의 그림들은 건축 못지않게 로마 풍의 장려함이라고 불리는 취향을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신고전주의 양식의 지도자는 다비드였다.” (482쪽)

- “그는 혁명 정부가 내세우는 ‘공식화가’였다.” “프랑스 대혁명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인 마라(Mara)가 광신적인 반혁명파의 젊은 여자에 의해 목욕탕에서 피살되었을 때 다비드는 그를 대의명분을 위해 죽은 순교자의 모습으로 그렸다(도판 316, <암살 당한 마라>, p.484).” (485쪽)

- “그는 그리스와 로마의 조각을 연구하여, 신체의 근육과 힘줄을 실감나게 묘사하고 고상하고 아름다운 외관을 그리는 것을 배웠다. 또한 중점적인 효과에 꼭 필요하지 않은 모든 세부 묘사를 생략하고 단순성을 목표로 삼는 것을 고전기의 미술로부터 배웠다. 이 그림 속에는 잡다한 색채도 없고 복잡한 단축법도 없다. 코플리의 커다란 전시 효과적 작품에 비교해 볼 때 다비드의 그림은 엄숙하게 보인다.” (485쪽)

 

▲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 : 1746 - 1828)의 <발코니의 사람들>(도판 317, p.486) ▼

- “고야는 엘 그레코(p.372, 도판 238, <요한 묵시록의 다섯 번째 봉인의 개봉>)와 벨라스케스(p.407, 도판 264,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를 배출한 스페인 회화의 훌륭한 전통을 몸에 익히고 있었으며 도판 307의 <발코니의 사람들>(p.486)에서 보듯 그는 다비드와는 달리 고전주의적인 장려함을 위해서 이러한 지식을 거부하지 않았다.” (485쪽)

- “18세기의 베네치아의 위대한 화가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Giovanni Battista Tiepolo, p.442, 도판 288)가 사용한 얼굴 광채와 같은 표현이 고야의 그림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고야의 인물은 다른 세계에 속한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유혹하듯이 쳐다보고 있는 두 여인과 배경의 어둠 속에 서 있는 다소 불길한 두 명의 정부는 호가스의 세계에 더 가깝다.” (485쪽)

▲ 프란시스코 고야의 <스페인 국왕>(도판 318, p.487) ▼

- “그에게 스페인 궁중에서의 지위를 확보해준 초상화(도판 318)들은 얼핏 보면 반 다이크(p.404, 도판 261)나 레이놀즈 류의 어용 초상화들처럼 보인다. 그가 마술을 부리듯 비단과 황금의 반짝임을 만들어내는 기술은 티치아노와 벨라스케스를 연상시키지만 사실 고야는 그들과는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485쪽)

- “옛 거장들은 권력에 아첨했지만 고야는 그것을 버리는 것을 전혀 아까워하지 않은 듯 보인다. 그는 그들의 초상화에서 허영과 추악함, 탐욕과 공허함을 낱낱이 드러냈다(도판 319, <도판 318의 세부>, p.488). 자기 후원자들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던 궁정 화가는 전무후무할 것이다.” (485쪽)

 

▲ 프란시스코 고야의 <거인>(도판 320, p.489) ▼

- “렘브란트처럼 그도 수많은 에칭을 제작했는데, 그 중 대부분이 부식된 선뿐만 아니라 그늘진 부분까지도 나타낼 수 있는 에쿼틴트(aquatint)라는 기법으로 제작된 것이었다.” (485쪽)

- “고야의 판화에서 가장 특이한 점은 성경의 주제이든 역사적 주제이든 또는 풍속적인 주제이든 간에 이미 알려진 주제는 일절 그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의 판화들은 대개 마녀라든가 기괴한 요괴들의 환상이 주제이다.” (485-8쪽)

- “어떤 것들은 고야 자신이 스페인에서 직접 목격했던 부패하고 반동적이며 잔인하고 억압적인 폭력에 대한 고발로서 제작한 것이며 또 어떤 것들은 그저 고야 자신의 악몽을 형상화한 듯하다.” (488쪽)

- “도판 320은 그의 꿈 가운데 가장 무시무시한 악몽으로, 한 거인이 세계의 끝에 앉아 있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 “이것이야말로 전통의 단절이 가져온 가장 뚜렷한 결과”였다. “이제 미술가들은 지금까지 오직 시인들만이 누렸던 개인적 환상의 세계를 종이 위에 펼쳐 놓는 자유를 얻게 된 것이다.” (이것은 상품에서 가치가 사용가치로부터 독립한 현상과 비견될 수 있다 할 수 있으며, 구체적인 사물로부터 이미지의 독립과 비견될 수 있겠다. 다른 한편 이로부터 심미주의 --> 예술 지상주의로 나아가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4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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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장. 이성의 시대(18세기 : 영국과 프랑스) 2

▲ 조수아 레이놀즈 경(Sir Joshua Reynolds : 1723 - 92) ▼

- 호가스로부터 “한 세대가 지나서야 비로소 18세기 영국의 상류사회를 만족시킬 수 있는 그림을 그린 영국의 화가 조수아 레이놀즈 경이 탄생했다.” (464쪽)

- “그는 미술가들의 유일한 희망은 과거 거장들의 장점이라고 불리는 것들, 이를테면 라파엘로의 소묘, 티치아노의 채색 등을 세심하게 연구하고 모방하는 것이라는 카라치(pp.390-1쪽)의 교훈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464쪽)

- “그의 강연들은 고상하고 품위 있는 주제의 탐구를 권하는 말로 가득 차 있다. 왜냐하면 레이놀즈는 거창하고 감동적인 것만이 ‘위대한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진정한 화가라면 대상을 세밀하고 예쁘게 묘사해서 인류를 즐겁게 만들려고 애쓰지 말고 그의 신념의 위대함으로 사람들을 개선하는데 이바지해야 한다.” 이것은 레이놀즈가 제3회 강연(영국 왕립 미술원의 초대 원장으로서의 강연들 중 하나)에서 한 말이다.” (464쪽)

-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대상으로 한 초상화나 풍경화의 경우처럼 눈으로 본 것을 그대로 손으로 묘사하는 작업은 어딘가 비천한 감이 없지 않다는 점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회화란 단순한 손재주 이상의 것을 필요로 한다. 즉 레니의 <오로라(새벽의 여신)>(p.394, 도판 253)이나 푸생의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다>(p.395, 도판 254)와 같은 주제를 그리는 데에는 해박한 학식과 상상력이 필요하다.”” (465쪽)

 

▲ 레이놀즈의 <조지프 바레티의 초상>(도판 304, p.466) ▼

- “그는” “상류사회가 실질적으로 필요로 하는 종류의 미술은 초상화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465쪽)

- “이미 반 다이크가 귀족 사회의 초상화의 전형(典型)을 확립해 놓았으며 후세의 인기 있는 초상화가들은 모두 이 전형에 도달하려고 애썼다. 레이놀즈는 반 다이크 이후의 초상화가들 중 누구 못지않게 모델을 돋보이게 미화할 수 있었으나 그는 모델의 성격과 사회저인 지위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의 초상화에 무엇인가 특별히 흥미가 있는 것을 덧붙이기를 좋아했다.” (465쪽)

- “도판 304는 존슨 박사(Samuel Johnson : 1709 - 1784 ; 18세기 영문학을 대표하는 시인·비평가) 그룹의 한 지식인이며 이탈리아 출신의 학자로서 영어-이탈리아 어 사전을 편찬하고 후에 레이놀즈의 《강연집》을 이탈리아 어로 번역한 조지프 바레티의 초상이다.” (465쪽)

 

▲ 레이놀즈의 <강아지를 안고 있는 보울즈 양>(도판 305, p.467) ▼

- “어린이의 초상화를 그려야 할 때에도 레이놀즈는 배경을 신중하게 선택함으로써 그 그림을 단순한 초상화 이상의 것으로 만들었다. 도판 305는 그가 그린 <강아지를 안고 있는 보울즈 양>의 초상화이다.” (465쪽)

- “우리는 벨라스케스도 또한 강아지와 함께 있는 어린이의 초상화를 그렸음을 기억한다(p.410, 도판 267). 그러나 벨라스케스가 자신의 눈으로 본 질감과 색채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반면에 레이놀즈는 우리에게 소녀가 애완용 강아지에게 기울이고 있는 애정을 보여주고자 했다.” (465-7쪽)

- “그는 이 귀여운 아이의 성격을 표현하고 그 성격의 우아함과 매력을 우리에게 생생하게 전해주려고 하였다.” (467-8쪽)

 

▲ 토마스 게인즈버러(Thomas Gainsborough : 1727 - 88)의 <하버필드 양의 초상>(도판 306, p.469) ▼

- 레이놀즈의 “호적수였으며 그보다 불과 네 살 아래였던” 게인즈버러가 “그린 비슷한 또래의 소녀 초상화”가 바로 이 그림인데, “작은 숙녀가 망토의 끈을 매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 (468쪽)

- “그녀의 행동에는 감동적이거나 흥미를 유발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애완용 강아지를 안고 있는 소녀의 모습을 그린 레이놀즈의 창안처럼 게인즈버러의 그 단순한 행동(산책을 가기 위해 막 옷을 입고 있는 행동)을 매우 온화하고 예쁘게 만들었다. 게인즈버러는 레이놀즈에 비해 ‘창안’에 훨씬 관심을 덜 가지고 있었다.” (468쪽)

- “이 두 사람(레이놀즈와 게인즈버러)의 관계는 라파엘로의 방법을 부활시키려 했던 유식한 안니발레 카라치(p.390)와 자연 이외는 어떤 스승도 인정하지 않았던 혁신적인 카라바조(p.392)를 연상시킨다.” (468쪽)

- “게인즈버러는 ‘지성적인’ 체할 의향이 전혀 없었으며 단지 그의 뛰어난 붓놀림과 날카로운 관찰력을 과시할 수 있는 솔직하고 틀에 박히지 않는 초상화를 그리길 원했다.” (468쪽)

- “그의 빠르고 성급한 붓질은 우리에게 프랑스 할스(p.417, 도판 270)를 연상케 한다. 그러나” “그의 많은 초상화에서 볼 수 있는 어두운 색조의 섬세함과 세련된 붓질은 오히려 바토의 그림(p.454, 도판 298)을 상기시킨다.” (468쪽)

 

▲ 게인즈버러의 <시골 풍경>(도판 307, p.470) ▼

- “레이놀즈가 고대사에 나오는 야심적인 신화의 장면이나 일화들을 그릴 시간과 여유를 갈망한 반면에, 게인즈버러는 그의 경쟁자가 경멸했던 바로 그런 주제, 즉 풍경화를 그리고 싶어 했다.” (469쪽)

- 게인즈버러의 “대부분의 풍경화는” 살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그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 그린 습작(도판 307)으로 남아 있다. 이 그림들에서 그는 영국 시골의 나무들과 언덕들을 아름다운 풍경이 되도록 짜 맞추어서 그 당시가 풍경 정원이 유행하던 시대였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왜냐하면 게인즈버러의 습작들은 자연을 직접 묘사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그림들은 어떤 기분을 불러일으키고 반영시키기 위한 풍경 ‘구성 작품’들이었다.” (469-70쪽)

 

▲ 장 밥티스트 시메옹 샤르댕(Jean-Baptiste Siméon Chardin : 1699 - 1779) ▼

- “18세기 영국의 제도와 영국인의 취향은 이성의 법칙을 갈망했던 유럽의 모든 사람들이 찬미하는 모델이었다. 왜냐하면 영국에서는 미술이 신처럼 군림한 통치자들의 권력과 영광을 과시하기 위해 이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470쪽) (미술의 상품화가 시작되었음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

- “우리는 프랑스에서도 역시 베르사유 궁전의 중후하고 장엄한 바로크 양식이 18세기 초에 오면 바토의 로코코 미술 작품(p.454, 도판 298)과 같은 보다 섬세하고 친근한 감각 효과에 밀려 우행에서 벗어났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이제 이러한 귀족풍의 몽상적인 세계는 퇴조하기 시작했다.” (470쪽)

- “화가들은 당대의 보통 사람들에게 눈을 돌리고 이야기로 엮어낼 수 있는 감동적이거나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그리기 시작했다. 이들 중에 제일 위대한 화가는 샤르댕으로 그는 호가스보다 두 살 아래인 화가였다.” (470쪽)

- “도판 308(<감사기도>, p.471)은 그의 매력적인 그림 중의 하나로서 한 여인이 식탁 위에 저녁을 차리면서 두 아이들에게 감사기도를 드리라고 말하는 소박한 장면을 보여준다.” (470쪽) (이는 근대에서의 남녀 성별분업을 암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샤르댕은 이러한 서민 생활의 평온한 광경을 좋아했다. 눈에 띄는 효과나 날카로운 비유를 추구하지 않고 가정적인 정경의 시정(詩情)을 느껴 화폭에 담은 면에서 그는 네덜란드의 화가 베르메르(p.432, 도판 281)와 유사하다.” (470쪽)

- “그의 색채는 고요하고 은근하다. 그리고 바토의 번쩍거리는 그림과 비교할 때 그의 작품은 광채를 잃은 것 같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원칙을 잘 살펴보면 우리는 거기에서 신중하게 구사된 색조의 미묘한 농담의 변화와 꾸밈없어 보이는 화면 구성의 솜씨를 발견하게 된다.” (470쪽)

 

▲ 징 앙투안 우동(Jean-Antoine Houdon : 1741 - 1828) ▼

- “영국에서처럼 프랑스에서도 권려의 겉치레보다는 서민들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초상 미술에 도움을 주었다. 아마도 프랑스에서 가장 위대한 초상 미술가로는” “조각가인 우동을 들 수 있을 것이다.” (472쪽)

- “그의 훌륭한 흉상들을 백여 년 전에 베르니니가 시작했던 전통(p.438, 도판 284)을 이어받고 있다. 도판 309는 우동이 제작한 흉상 <볼테르 상>(p.472)인데, 우리는 이 위대한 이성의 옹호자의 얼굴에서 날카로운 기지와 통찰력 있는 지성과 또한 위인의 깊은 동정심을 ‘읽을 수’ 있다.” (472쪽)

 

▲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Jean-Honoré Fragonard : 1732 - 1806) ▼

- “영국에서 게인즈버러의 스케치에 염감을 불어넣어 주었던 자연의 ‘그림 같이 아름다운(picturesque)’ 측면에 대란 취향은 마침내 18세기의 프랑스에서도 나타나게 되었다.” (472쪽)

- “도판 310(<티볼리에 있는 에스테 별장의 넓은 정원>, p.473)은 프라고나르의 소묘인데 그는 게인즈버러의 세대에 속한 사람이었다. 그 또한 상류사회의 테마를 그리는 바토의 전통을 따르는 매력적인 화가였다.” (4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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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장. 이성의 시대(18세기 : 영국과 프랑스) 1

23장. 이성의 시대 (18세기 : 영국과 프랑스)

 

▲ 영국 경험론의 특징 ▼

- 이 시기 영국과 프랑스에서 자리 잡고 있던 철학적 이론 경향은 베이컨으로부터 시작하는 영국 경험론과 이 경험론에 영향을 받은 프랑스의 기계적 유물론이다.

- 영국의 경험론이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즉 우리의 감각 또는 지각 바깥에 존재하고 있는 감각 대상 또는 지각 대상이 우리에게 감각적인 정보 데이터를 보내 주면 우리가 그 감각 데이터를 받아들여서(이렇게 받아들이는 것을 <경험>이라고 한다) 그 감각 대상에 대한 관념(idea)을 비로소 가지게 되며, 이 관념이 대상과 완전히 일치하는 <참다운 앎> 또는 <진리>라고 주장하는 철학이론이다.

- 그런데 이 영국 경험론은 우리의 일상 경험으로 볼 때 대단히 의심스럽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이 경험론에서 말하는 진리 또는 참다운 앎이 그렇지 않은 것일 수 있는 경험적 반박 사례를 제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범죄자의 목격자가 2명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한 목격자는 그 범인의 얼굴이 장동건처럼 생겼다고 하고, 다른 목격자는 그 범인의 얼굴이 배철수처럼 생겼다고 진술했다. 그럼 범인의 얼굴에 대한 진술은 누가 맞는 것인가?

- 이러한 불일치는 우리의 관념(장동건, 또는 배철수)의 원인인 감각적 경험 대상(범인 자체)을 부정하는 결과에 이르게 된다. 왜냐하면 그 대상은 한결 같아야 하는데(그래야만 그 대상에 대한 앎, 사실이 참된 것인지 아닌지를 판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지각에 따라 이랬다 저랬다(장동건이었다가 배철수였다가) 하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남는 것은 우리의 지각 또는 그 지각에 의한 관념뿐이며, 이러한 지각 또는 관념에 따라 감각 대상인 사물이 존재할 수밖에, 즉 그렇게 존재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 이렇게 해서 영국 경험론은 두 가지 형태로 갈라지는 모습을 띠게 된다. 첫 번째는 우리의 감각 대상에 의해서 우리의 지각 또는 관념이 형성된다는 견해로서 감각 대상(즉 객관)이 더 우선적이라는 주장이다. 두 번째는 우리의 지각 또는 관념에 따라 우리의 감각 대상이 존재한다는 견해로서 우리의 지각 또는 관념이 더 우선적이라는 주장이다. 첫 번째를 주장하는 철학자는 로크라는 철학자이고 두 번째를 주장하는 철학자는 버클리라는 철학자이다.

- 이 두 철학자에 비유될 수 있는 영국의 두 회화 예술가가 있다. 로크에 비유될 수 있는 회화가는 게인즈버러라고 할 수 있고, 버클리에 비유될 수 있는 회화가는 레이놀즈라고 할 수 있겠다.

- 이러한 영국 경험론이 18세기 영국 미술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 크리스토퍼 렌 경(Sir Christopher Wren : 1632 - 1723) ▼

- “그가 지은 세인트 폴 대성당(도판 299, <런던의 세인트 폴 대성당>, p.458)을 불과 20여 년 전에 로마의 바로크 양식으로 지은 교회(p.436, 도판 282, <전성기 바로크 양식의 로마 교회 : 산타 아그네스 성당>)와 비교해 보면 흥미롭다.” (457쪽)

- 유사점 : “렌의 성당은 보로미니의 교회당보다 규모가 훨씬 크지만 그것과 마찬가지로 중앙의 둥근 지붕과 양쪽의 탑들과 고대 신전의 정면을 연상시키는 정면 현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보로미니의 바로크식 탑과 렌의 탑 사이에는 확실히 유사성이 있으며 특히 2층의 경우가 그렇다.” (457쪽)

- 차이점 : “이 두 정면 현관들이 주는 전반적인 인상은 대단히 다르다. 세인트 폴 성당은 곡선적인 곳이 없어서 운동감을 암시하지 않으며 오히려 강인함과 안정감을 준다. 건물에 당당함과 고귀함을 주기 위해서 사용된 쌍으로 나란히 선 원주들은 로마의 바로크 양식보다는 오히려 베르사유 궁전의 정면(p.448, 도판 291)을 연상시킨다.” (457쪽)

- “세부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의 장식에는” 바로크와 같은 “괴상한 것이나 환상적인 것이 하나도 없다. 그의 모든 형태들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최고의 모델들을 엄격하게 따르고 있다. 건물의 각 형태와 부분은 그것이 갖는 본질적인 의미를 상실하지 않은 그 자체로 보여질 수 있다. 보로미니나 멜크 수도원을 지은 건축가의 자유분방함에 비하면 렌은 우리들에게 은근하고 침착한 인상을 준다.” (457쪽)

 

▲ 렌 경의 <런던의 세인트 스티븐 월브룩 교회>(도판 300, p.459) ▼

- “신교와 가톨릭 교회 건축의 대조는 렌이 설계한” “월브룩 교회(도판 300)와 같은 건물의 내부를 살펴보면 훨씬 더 뚜렷하게 나타난다. 이와 같은 교회”의 “목적은” “천국의 환상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신도들의 생각들을 집중시키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457쪽)

 

▲ 벌링턴(Burlington : 1695 - 1753)과 윌리엄 켄트(William Kent : 1685 - 1748) ▼

- “교회들이 그랬듯이 성(城)들도 동일한 경향을 따랐다. 영국의 어떠한 왕도 베르사유와 같은 궁전을 짓는 데 필요한 엄청난 자금을 모을 수 없었고 영국의 귀족들 또한 사치와 방종의 면에서 독일의 제후들과 경쟁하려 하지 않았다.” “18세기 영국의 이상(理想)은 성이 아니라 교외의 저택이었다.” (459쪽)

- 이러한 교외 저택의 선호는 중세 봉건 공동체가 해체되면서 부르주아 가족 형태인 근대 핵가족 문화, 더 근본적으로는 경제적 생산과 그 생산에 따른 이윤 창출이라는 목적, 즉 효율성에 부합하려는 경향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 “교외의 저택들을 설계한 건축가들은 보통 바로크 양식의 지나친 호사스러움을 배격했다. 그들의 야심은 그들이 ‘고상한 취향’이라고 생각한 규칙을 하나도 위반하지 않고 고전 건축의 실제적인 또는 그렇다고 주장하는 법칙을 가능한 한 충실하게 따르려는 것이었다.” (459쪽)

- “도판 301(<런던 치직 저택>, p.460)은” “팔라디오 식 별장인 치직(Chiswick) 저택이다.” “이 건물은 정말로 팔라디오의 로톤다 별장(p.363, 도판 232)과 대단히 유사하다.” (459-60쪽)

- “당당한 현관은 코린트 식 기둥 양식(p.108)을 지닌 고대 신전의 정면과 동일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p.73). 건물의 벽은 단순하고 평범하여 곡선이나 나선형이 없고 지붕 위를 장식하는 조각상도 없으며 그로테스크한 장식도 없다.” (460쪽)

- “그 이유는” 영국의 “고전주의”와 경험론에 기인하고 있다. (460쪽)

 

▲ 도판 302(<윌트셔(Wiltshire) 주 스타우어헤드의 정원>, p.461) ▼

- “영국의 전반적인 기질은 바로크 식 장식에 나타난 공상의 비약에 반대했고 또 감정을 압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그런 예술에도 반대했다.” “베르사유 궁의 정원 양식 같이” “실제 건물 이외의 주변 지역까지 확장된 형식적인 느낌을 주는 정원은 불합리하고 인공적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460쪽)

- “영국인들이 생각하는 정원이나 공원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반영해야 하며 화가의 눈을 매혹시키는 그런 아름다운 풍경을 모아놓아야 하는 것이었다. 켄트 같은 사람은 팔라디오 식 별장의 이상적인 주변 경관으로서 영국의 ‘풍경 정원(landscape garden)’을 고안해냈다.” (460쪽)

- “경치에 있어서의 아름다움의 기준에 대해서도” 영국인들은 “남유럽의 한 화가에게 자연이 어떤 모습으로 보여야 하는지에 관한 그들의 생각은 대체로 클로드 로랭의 그림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460-1쪽)

- “18세기 중엽에 조성된” 이 도판의 “아름다운 정원 풍경을 로랭과 팔과디오의 작품들과 비교해보면 흥미롭다. 배경에 있는 ‘신전’은 팔라디오의 로톤다 별장(p.363, 도판 232 : 이것은 본래 로마의 판테온을 본떠 지은 것이다)을 연상시키는 한편 연못과 다리, 로마의 건물을 연상케 하는 전체적인 경관은” “ 영국 풍경의 아름다움이 클로드 로랭의 회화(p.396, 도판 255)에서 영향 받았다는 것을 확인해 주는 것이었다.” (461쪽)

 

▲ 윌리엄 호가스(William Hogarth : 1697-1764) ▼

- 호가스는 “사람들이 ‘그림의 효용이 무엇인가’라고 묻고 싶어 한다는 것을 깨닫고 청교도적인 전통이나 성장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서라도 예술이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따라서 그는 사람들에게 착한 인의 보상과 악한 일의 대가를 가르칠 만큼 교훈적인 내용을 그릴 것을 계획했다.” (462쪽)

- “그는 방탕과 나태로부터 범죄와 죽음에 이르는 <탕아의 편력(A Rake’s Progress)>이나 소년이 고양이를 놀리는 일에서부터 어른들의 잔인한 살인에까지 이르는 <잔혹의 네 단계(Four Stages Gruelty)>를 보여주려고 했다.” (462쪽)

- “그가 이러한 교화적(敎化的)인 이야기와 경고의 사례들을 어찌나 잘 그렸던지 이 일련의 그림을 본 사람들은 모두 다 그 그림이 의미하는 모든 사람들과 교훈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462쪽)

- 왜냐하면 “그들은 과거의 대가들과 그들이 회화적인 효과를 내는 데 사용한 방법을 세심하게 연구” 했기 때문이다. “그는 일상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익살스런 에피소드로 그림을 채우고 또 인간의 유형을 개성적으로 표현하는 데 탁월했던 얀 스텐(p.428, 도판 278)과 같은 네덜란드의 대가들을 잘 알고 있었다.” (462쪽)

- “그는 또 당시의 이탈리아 화가들과 구아르디(p.444, 도판 290) 풍의 베네치아 화가들의 수법도 알고 있었다. 구아르디로부터 그는 붓을 두세 번 힘차게 휘두름으로써 한 인물의 모습을 실감나게 표현하는 기법을 배울 수 있었다.” (462쪽)

- “도판 303(<베들럼의 탕아>, p.463)은 <탕아의 편력>에 나오는 한 장면으로 빈털터리가 된 탕아가 베들럼 정신 병원에서 광란하는 미치광이로 인생을 끝맺는다는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다.” (4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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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장. 권력과 영광의 예술 2(17세기 말과 18세기 초 :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22장. 권력과 영광의 예술 Ⅱ (17세기 말과 18세기 초 :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 베르사유 궁전(도판 291, p.448) ▼

- 이탈리아를 포함한 가톨릭교회의 화려함과 장식 과잉의 특징을 가진 가톨릭적 바로크에 맞선 부르주아·프로테스탄트적 바로크는 단순함·간결함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부르주아·프로테스탄트적 바로크는 다음과 같은 형태로 변화·발전하게 된다. 즉 건축의 외양에 있어서는 단순성을 그대로 유지하되 가톨릭교회 권에 맞서서 거대한 크기를 자랑한다. 일단 건물 크기로 가톨릭교회를 압도함으로써 부르주아와 결탁한 절대 군주와 영주들의 권력의 위엄을 잘 나타내기 위해서다(물론 그렇다고 내부 장식에 소홀했느냐 하면 그것은 결코 아니다. 가톨릭교회의 화려함과 맞먹는다). 이러한 대표적인 건축물이 베르사유 궁전이다.

베르사유 궁전은 프랑스 “루이 14세의” “절대 권력의 상징이 되었다.” “베르사유 궁전은 너무나 거대하기 때문에 사진을 통해서는 그 외관이 어떻게 생겼는지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다.” “베르사유가 바로크 양식인 것은 그 장식적인 세부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거대한 규모 때문이다.” (447쪽)

- 그런데 이러한 거대한 규모는 한 가지 종류의 형태만으로는 채울 수 없다. 얀 베르메르 반 델프트의 <부엌의 하녀>(도판 281, p.432)라는 정물화에서처럼 전혀 이질적인 것들(크게는 사람과 사물)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처럼, 베르사유에서도 서로 다른 이질적인 요소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이것은 시장에서 여러 이질적인 상품들이 서로 기계적인 교환 관계에 있음과 비견될 수 있겠다). 단순하게 조합했더라면 이처럼 방대

- 이에 대해 곰브리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순수한 르네상스식 형태들만으로 한 규모의 정면은 그 단조로움을 깨지 못했을 것이나 조각상들과 항아리, 전승 기념품 등의 도움으로 건축가들은 어느 정도의 다양성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건물에서 바로크 형태의 진정한 기능과 목적을 잘 감상할 수 있다.” (447쪽)

- 다른 한편 이 시기 베르사유를 비롯한 건물의 대부분은 기본적으로 단순하게 4각형 형태를 취하고 있다. 중세 때까지만 하더라도 가장 단순하면서도 안정적이며 기본적인 기하학 형태는 3각형이었다. 이것은 사회적·정치적 형태로 볼 때 지배계급을 의미하는 것이었다(삼각형의 정점에는 The One, 왼쪽 꼭짓점에는 천사, 오른쪽 꼭짓점에는 성인, 즉 성직자가 있다). 그런데 꼭짓점이 하나 더 추가되어 사각형이 된다. 이것은 부르주아(또는 과학)가 지배계급으로 편입되었음을 의미한다고 생각해 볼 수 있겠다. 현대의 아파트 건물의 aid아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 루카스 폰 힐데브란트(Lucas von Hildebrandt : 1668 - 1745) ▼

- “1700을 전후한 시대가 건축에 있어서는 가장 위대한 시대였으며 그것은 비단 건축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성과 교회당들은 단순히 건물로서만 설계된 것은 아니었다. 모든 예술은 환상적이고 인위적인 세계의 효과를 높이는 데 기여해야만 했다.” (449쪽)

-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바로크 이념들이 가장 대담하고 일관성 있게 융합된 지역은 오스트리아와 보헤미아, 그리고 남부 독일이었다.” (449-451쪽)

- “도판 293(<빈의 벨베데레 궁>, p.450)은 오스트리아 건축가 루카스 폰 힐데브란트가 말버러 공작의 동맹자인 사부아 가(Savoy 家)의 외진(Eugene)공을 위해서 빈에 세운 성을 보여준다.” (451쪽)

- “우리가” 이 건물의 “환상적인 장식의 효과를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것은 이 건물 안에 들어설 때마다 도판 294(<벨베데레 궁의 입구 홀과 계단>은 외젠 궁의 궁전 입구이며 도판 295(<독일 폼머스 펠덴 성의 계단>, p.451)는 힐데브란트가 설계한 독일의 한 성의 계단 부분이다. (451쪽)

 

▲ 야콥 프란타우어(Jacob Prandtauer : 1726년 사망) ▼

- “교회의 건물들도” 왕이나 귀족의 성 실내의 모습에서처럼 “인상적인 효과를 이용했다.” (451쪽)

- “도판 296(<다뉴브 강변의 멜크 수도원>, p.452)은 다뉴브 강변에 있는 오스트리아의 멜크(Melk) 수도원이다.” 이 수도원의 “장식은 바로크 양식의 방대한 보고에서 나온 새로운 이념과 디자인을 즉시 적용할 줄 알았던 솜씨 좋은 떠돌이 이탈리아 장인들이 맡았다.” (452쪽)

- “이 이름 없는 미술가들은 단조롭지 않고 당당한 외관을 표현하기 위하여 건물들을 한데 모으고 배치하는 어려운 기술을” 아주 “잘 습득하고” 있었으며, “또한 장소에 따라서 장식의 비중을 두어 ”눈에 띄지 않는 곳은 지나치게 화려한 장식을 삼가고 돋보이고자 하는 부분에서는 더욱 효과적으로 부각되도록 애썼다.“ (452쪽)

- “이러한 교회의 건물(도판 297, <멜크 수도원의 예배당 내부>, p.253)에서는 ‘자연스럽거나’ ‘정상적인’ 것이 하나도 없으며 또 그런 것을 의도하지 않았다. 그것은 보는 사람들에게 천국의 영광을 미리 맛보게 해주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가 그 가운데 서 있으면” “우리의 모든 의심을 정지시켜 버린다. 우리는 우리 나름의 규칙과 기준이 전혀 통하지 않는 그런 세계에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452쪽)

 

▲ 앙투안 바토((Antoine Wateau : 1686 - 1721) ▼

- “이탈리아에서와 마찬가지로 알프스 북쪽에서도 미술의 각 분야가 이러한 장식의 북새통에 휩쓸려 들어가 버렸으며 각 분야의 독자적인 중요성을 많이 상실했다.” 이런 가운데서 “17세기 점잔기의 위대한 지도적인 화가들과 비견되는 거장은 단 한 사람밖에 없었던 것 같다. 이 사람은 앙투안 바토이다.” (454쪽)

- “그는 현실의 모든 어려움과 자질구레한 일에서 동떨어진 자기 자신의 환상적인 생활을 그리기 시작했다.” (454쪽)

- “너무나 존귀하고 인위적일 거라는 인상을” 줄지도 모르는 “바토의 예술”은 “많은 사람들에게” “로코코(Rococo)라고 알려져 18세기 초의 프랑스 귀족들의 취향을 반영하는 것이 되었다.” 바토의 “꿈과 이상”은 “우리가 로코코라고 부르는 유행을 만들어내는 데 일조를” 하였다. (454-5쪽)

- “도판 290(<공원의 연회>, p.454)은 공원에서의 소동 모습을 보여주는 그의 작품이다. 이 장면에는 얀 스텐의 떠들썩한 쾌활함(p.428, 도판 278) 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달콤하고 우수에 젖은 그런 고요함이 지배적이다.” (455쪽)

- “바토는 그가 찬양했던 루벤스처럼 슬쩍 한번 그은 분필 자국이나 붓 자국만으로 살아서 숨 쉬는 듯한 육체의 인상을 묘사할 수 있었다.” “그의 그림이 얀 스텐의 그림과 다르듯이 그의 습작들이 자아내는 분위기는 루벤스의 습작과는 다르다. 이러한 아름다움의 환상 속에는 어딘지 슬픈 분위기가 감돌고 있는데 그것은 말로 설명하거나 규정할 수 없지만 그것이 바토의 예술을 단순한 기교나 예쁘장한 아름다움의 영역을 초월하게 만든다.” (4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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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장. 권력과 영광의 예술 Ⅰ(17세기 후반과 18세기 : 이탈리아)

21장. 권력과 영광의 예술 Ⅰ(17세기 후반과 18세기 : 이탈리아)

 

** 세기 별 서양 예술 사조

 

<14 ~ 18세기>

국제 고딕 - 르네상스 (14세기) · 매너리즘 (16세기) · 바로크 (17세기) · 로코코 - 신고전주의 - 낭만주의 (18세기)

 

<19세기>

사실주의 · 라파엘전파 · 아카데미 예술 · 인상주의 · 후기인상주의 · 신인상주의 · 분할주의 · 점묘주의 · 구획주의 (클로와조니즘) · 나비파 · 종합주의 · 상징주의 · 허드슨 리버파

 

<20세기>

모더니즘 · 입체파 · 표현주의 · 추상표현주의 · 추상미술 · 뮌헨 신미술가 협회 · 청기사파 · 다리파 · 다다이즘 · 야수파 · 신야수파 · 아르누보 · 바우하우스 · 더 스테일 · 아르데코 · 팝 아트 · 미래주의 · 절대주의 · 초현실주의 · 색면파 · 미니멀리즘 · 설치미술 · 서정추상 · 포스트모더니즘 · 개념미술 · 대지미술 · 행위 예술 · 비디오 아트 · 신표현주의 · 아웃사이더 아트 · 로브로우 예술 운동 · 뉴미디어 아트 · 젊은 영국 작가들 · 스터키즘 · 시스템 아트

 

<21세기>

관계 예술

 

** 로코코

로코코(Rococo)는 18세기 프랑스에서 생겨난 예술형식이다. 어원은 프랑스어 rocaille(조개무늬 장식, 자갈)에서 왔다.

로코코는 바로크 시대의 호방한 취향을 이어받아 경박함 속에 표현되는 화려한 색채와 섬세한 장식, 건축의 유행을 말한다. 바로크 양식이 수정, 약화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로코코는 왕실예술이 아니라 귀족과 부르주아의 예술이다. 다시 말하자면, 유희와 쾌락의 추구에 몰두해 있던 루이 14세 사후, 18세기 프랑스 사회의 귀족계급이 추구한, 사치스럽고 우아한 성격 및 유희적이고 변덕스러운 매력을, 그러나 동시에 부드럽고, 내면적인 성격을 가진 사교계 예술을 말하는 것이다. 귀족계급의 주거환경을 장식하기 위해 에로틱한 주제나 아늑함과 감미로움이 추구되었고 개인의 감성적 체험을 표출하는 소품위주로 제작되었다. 또한 로코코에서는 중국 양식이 많이 유행하였다.

로코코란 낱말이 서양 예술사에서 전문용어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아마 1840년대로 보인다 (1842년 프랑스 학술원에서 이 낱말의 사용 인정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좁은 의미에서 로코코란 루이 15세 시대 (1730년 - 1750년)에 유행하던 프랑스 특유의 건축의 내부장식, 미술, 생활용구의 장식적인 양식을 의미한다 (조개무늬를 장식으로 많이 쓰기 때문에 style de rocaille라고 부른다). 후에 이 국한된 의미를 벗어나 예술사를 연구하는 이들 사이에서 후기 바로크를 이어주는 건축과 서양미술의 한 예술 양식으로 쓰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로코코는 바로크나 르네상스처럼 한 시대를 대표하는 사조라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18세기는 로코코 뿐만 아니라 바로크, 고전주의, 낭만주의가 병존하는 시대이며, 이 시기에 유행하고 나타난 예술양식들은 서로간에 영향을 받고 주는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건축물로 상수시 궁전(Sans-Souci Palace)이 있다.

 

▲ 프란체스코 보로미니(Francesco Borromini : 1599 - 1667) ▼

- “17세기 전반에 이탈리아에서는 건물과 그 장식에 대한 더욱 눈부신 새로운 구상들이 하나하나 축적되어 17세기 중엽에 가면 소위 바로크라고 부르는 양식은 완전하게 발전하게 된다.” (435쪽)

- “도판 282(<전성기 바로크 양식의 로마 교회 : 산타 아그네스 성당>, p.436)는 유명한 건축가 프란체스코 보로미니가 그의 조수들과 건립한 전형적인 바로크 양식의 교회이다.” (435쪽)

- “델라 포르타처럼 그는 중앙 입구를 고대 신전의 정면 형태로 만들고 또 그와 마찬가지로 보다 풍부한 효과를 살리기 위해서 양쪽으로 벽기둥의 수를 배로 늘렸다.” (435쪽)

- “그러나 보로미니의 정면과 비교해보면 델라 포르타의 정면은 다소 엄격하고 절제된 것처럼 보인다. 보로미니는 더 이상 고전 건축에서 따온 기둥 양식을 가지고 벽을 장식하는 데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거대한 둥근 지붕을 만들고 그 양쪽에 두 개의 탑과 정면을 세움으로 해서 서로 다른 형태들을 한데 모아 그의 교회를 구성했다. 정면은 마치 진흙으로 빚어서 만든 것처럼 굴곡이 져 있다.” (435쪽)

- “세부를 들여다보면” “두 개의 탑 아래층은 사각형이고 윗층은 원형이며 이 두 개의 층이 이상하게 파괴된 엔타블레이처로 연결되어 있는데, 이것은 모든 정통파 교사들을 불쾌하게 만들 만한 것이었으나 건물 전체에는 극히 잘 어울리고 있다.” (435쪽)

- “이 교회 내부를 들여다보면 중세 성당들보다 훨씬 구체적인 방법으로 천상의 영광을 연상시키기 위해 얼마나 신중히 보석과 황금과 스터코(stucco, 치장 벽토) 등으로 화화스러운 장관을 연출했는지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도판 283(산타 아그네스 성당 내부>, p.437)은 보로미니가 설계한 교회의 내부를 보여 준다.” (436쪽)

- “가톨릭 세계는 중세 초기 미술에 부여했던 단순한 임무, 즉 글을 못 읽는 사람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역할(p.95) 이상으로 미술이 종교에 공헌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미술은 글을 못 읽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너무 많이 읽은 사람들까지도 설득해서 개종시키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었다. 많은 건축가, 화가, 조각가들이 교회를 변형시켜 그 찬란함과 아름다움으로 보는 이를 거의 압도해 버리는 거대한 장식물로 만들기 위해서 소집되었다.” (436-7쪽)

 

▲ 장 로렌초 베르니니(Jean Lorenzo Bernini ; 1598 - 1680) ▼

- “이러한 무대 장식과도 같은 현란한 미술은 잔 로렌초 베르니니라는 한 미술가에 의해서 발전되었다. 베르니니는 보로미니와 같은 세대로 반 다이크와 벨라스케스보다는 한 살 위였고 렘브란트보다는 여덟 살이 위였다. 이런 거장들처럼 그도 최고의 초상화가였다. 도판 284(콘스탄차 부오나렐리 상>, p.438)는 한 젊은 여자의 흉상으로 참신하고도 인습에 얽매이지 않는 베르니니의 최고 걸작 중의 하나이다.” (437-6쪽)

- “마치 렘브란트가 인간의 행동에 관한 그의 심오한 지식을 이용했듯이” 여기에서 “베르니니는 얼굴 표정의 묘사를 활용하여 그의 종교적인 체험에 시각적인 형태를 부여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438쪽)

- “도판 285(<성 테레사의 환희>, p.439)는 로마에 있는 조그마한 교회의 부속 예배실을 장식하기 위해 베르니니가 만든 제단이다. 이 제단은 스페인의 성 테레사에게 봉헌된 것이다.” (438쪽)

- 여기에서 “우리는 그 성녀가 구름을 타고 황금빛 햇살의 형태로 위로부터 쏟아지는 빛줄기를 향해서 하늘로 올라가는 광경을 본다. 천사가 공손하게 그녀에게 다가서고 있으며 성녀는 기절한 채 황홀감 속에 빠져 있다.” (438쪽)

- “만약 우리가 이 기절한 성녀의 얼굴을 이전의 다른 작품과 비교해 보면 우리는 그때까지 미술의 영역에서 한번도 시도된 일이 없는 얼굴 표정의 격렬함이 표현되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도판 286(<도판 285의 세부>, p.440)을 <라오콘>(p.110, 도판 69)의 두상과 비교해 보면 그 차이점을 분명히 알 수 있다.” (440쪽)

- “베르니니의 옷 주름 처리 방법도 그 당시로서는 아주 새로운 것이었다. 즉 고전적인 방식으로 인정되어온 품위 있는 옷 주름으로 흘러내리게 하지 않고 흥분과 움직임의 효과를 보다 강조하기 위해서 옷자락이 몸부림을 치듯 펄펄 날리게 표현했다. 베르니니의 이러한 강렬한 효과들은 얼마 안 가서 유럽 전역에 퍼져 모방되었다.” (440쪽)

 

▲ 조반니 바티스타 가울리(Giovanni Batista Gaulli : 1639 - 1709) ▼

- "도판 287(<예수의 성스러운 이름을 찬미함>, p.441)은 베르니니를 추종하는 화가였던 조반니 바티스타 가울 리가 그린 로마의 한 예수회 교회의 천장 장식이다. 이 화가는 우리에게 교회의 궁륭형 천장이 열려 있으며 우리가 천국의 영광을 곧바로 보고 있다는 환상을 주려고 했다. 그 이전의 코레조도 천장에 천국을 그리는 데 착안했으나(p.338, 도판 217) 가울리의 효과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무대 효과에 가깝다.“ (443쪽)

- “이와 같은 그림은 이것이 놓여 있는 장소를 벗어나면 그 의미를 상실한다. 그렇게 때문에” “바로크 양식이 완벽하게 발전한 뒤에는 이탈리아와 유럽의 가톨릭 세계에서 회화와 조각이 각각 독립적인 예술로서 발전하지 못하고 쇠퇴하게 된 것도 우연한 일은 아닌 것 같다.” (443쪽)

 

▲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Giovanni Batista Tiepolo : 1696 - 1770) ▼

- "도판 288(<클레오파트라의 연회>, p.442)은 그가 1750년 경에 그린 베네치아의 한 궁전 장식의 일부이다. 이 그림은 티에폴로에게 화려한 색채와 호화스러운 의상 묘사를 과시할 모든 기회를 준 주제인 <클레오파트라의 연회>이다.“ (444쪽)

- “이와 같은 프레스코는” “그 이전 시대의 보다 차분한 작품들보다 영구적인 가치에 있어서는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이탈리아 미술의 위대한 시대가 끝나고 있는 것이다.”(444쪽)

 

▲ 프란체스코 구아르디(Francesco Guardi : 1712 - 93) ▼

- “이탈리아 미술은 18세기 초에 단 한 가지의 특수한 분야에서만 새로운 이념들을 창조해냈다. 그것은 대단히 특징적인 것으로 풍경을 묘사한 유화와 동판화였다.” (444-5쪽)

- “도판 290(<베네치아의 산 조르조 마조레 정경>, p.444)은” “구아르디가 그린 베네치아의 한 풍경이다. 티에폴로의 프레스코처럼 이 풍경화도 베네치아의 미술이 그 특유의 화려함과 빛과 색채의 감각을 잃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445쪽)

- “우리는 움직임과 대담한 효과를 좋아하는 바로크의 정신이 단순한 한 도시의 풍경 속에서도 여실히 나타나 있음을 알 수 있다.” (445쪽)

- “그는 화가가 일단 한 장면의 일반적인 인상만 제공해 주면 나머지의 사소한 세부들을 보는 사람들이 상상을 통해 메꾸고 보충하려 한다는 사실을 터득하고 있었다.” (이것은 벨라스케스의 영향을 받았고 그것을 전승하고 있음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도판 267과 410을 참조하기 바란다.) “작품 속의 곤돌라 사공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놀랍게도 그들은 능숙하게 배치된 몇 점의 색채들로 단순하게 이루어졌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몇 발짝 뒤로 물러서면 그 환영은 완벽한 효과를 연출해낼 것이다. 이러한 후기 이탈리아 미술의 결실 속에 살아 있는 바로크 양식의 전통은 후대에 가서 새로운 중요성을 얻게 된다.” (4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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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장. 자연의 거울(17세기 네덜란드) (2)

▲ 렘브란트 반 레인(Rembrandt van Rijn : 1606 - 1669) ▼

- “네덜란드가 낳은 최고의 화가이며, 그리고 아마도 미술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420쪽)

- “그는 성공적이고 인기 있는 화가였던 젊은 시절에서부터 파산의 비애와 진실로 위대한 인간으로서의 불굴의 의지를 반영하고 있는 외로운 노년에 이르기까지 그의 생애에 관한 놀라운 기록인 일련의 자화상들을 남겨” 놓았다. “이 자화상들”은 “일종의 독특한 자서전인 셈이다.” (420쪽)

 

▲ 렘브란트 반 레인의 <자화상>(도판 273, p.422) ▼

- 이 자화상은 “만년의 렘브란트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 준다. 그것은 분명 아름다운 모습은 아니다. 그러나 렘브란트는 그의 추한 모습을 결코 감추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거을에 비친 자신을 아주 성실하게 관찰했다.” (420쪽)

- “이것은 살아 있는 인간의 실제 얼굴이다. 여기에는 포즈를 취한 흔적도 없고 허영의 그림자도 없으며 다만 자신의 생김새를 샅샅이 훑어보고, 끊임없이 이난의 표정에 내포되어 있는 비밀에 대해 보다 많은 것을 탐구하려는 화가의 꿰뚫어보려는 응시가 있을 뿐이다.” (420쪽)

- 꾸미지 않고 과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묘사한다는 측면에서 가톨릭적 바로크와 대립되는 부르주아·프로테스탄트적 바로크의 특징을 엿볼 수 있으며, 붓놀림이 간결해 보인다는 측면에서도 이 특징을 엿볼 수 있다.

 

▲ 렘브란트 반 레인의 <얀 지크스>(도판 274, p.422) ▼

- <자화상>에서의 렘브란트의 면모를 <얀 지크스>에게서도 느낄 수 있다.

- 이 초상화 역시 인물을 정중앙에 배치하지 않고 살짝 오른쪽에 치우쳐 배치하였지만 균형감을 잃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바로크 양식을 엿볼 수 있다. 특히 “얀 지크스의 장갑 낀 왼손을 단순한 스케치 형태로 남겨둔 채 완성해 버렸다”는 점에서 부르주아·프로테스탄트적 바로크를 느낄 수 있다. (422쪽)

- “이 작품을 프란스 할스의 생생한 초상화와 비교한다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왜냐하면 할스는 우리에게 실감나는 스냅 사진 같은 느낌을 주는 반면에 렘브란트는 인물의 전 생애를 다 보여주는 것 같기 때문이다.” (422쪽)

 

▲ 렘브란트 반 레인의 <무자비한 하인 이야기>(도판 275, p.423) ▼

- 이 그림은 “성경에 나오는 무자비한 하인의 이야기(마태오 복음18장 21-35절)를 묘사한 소묘이다.” “셈을 청산하는 날 커다란 장부를 살펴보는 남자와 함께 주인이 앉아 있다. 하인은 고개를 숙이고 주머니 속을 뒤지는 것 같지만 그 모습으로 보아 빚 갚을 능력이 없음을 알 수 있다. 분주한 회계사와 위엄 있는 주인과 죄송스러워하는 하인의 상호관계가 몇 개 안 되는 선으로 훌륭하게 표현되어 있다.” (423쪽)

- 여기서도 부르주아·프로테스탄트적 바로크를 엿볼 수 있다. “렘브란트는 이 장면의 내적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서 어떤 제스처나 동작을 거의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의 그림에는 연극적인 구석이 하나도 없다.” (424쪽)

- 이 그림을 통해 렘브란트는 자신의 처지를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 렘브란트 반 레인의 <다윗왕과 압솔롬의 화해> ▼

- “이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루벤스나 벨라스케스 못지않게 번쩍이는 질감의 효과를 아주 실감나게 묘사하는 탁월한 솜씨를 지녔다. 렘브란트는 이들보다 밝은 색을 훨씬 더 적게 사용했다. 그의 작품을 볼 때 느끼는 첫인상은 어둠침침한 갈색이다. 그러나 이 어두운 색조들은 몇 안 되는 밝고 현란한 색채와의 대조를 보다 강하고 힘차게 돋보이게 만든다. 그 결과 그의 몇몇 작품에 나타나는 빛은 눈부시게 빛나 보인다.” (424쪽)

- 빛과 색채의 이러한 사용을 통해서도 부르주아·프로테스탄트적 바로크를 엿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 렘브란트 반 레인의 <설교하는 그리스도>(도판 277, p.426) ▼

- “전에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렘브란트도 화가로서뿐만 아니라 판화가로서도 역시 위대한 거장이었다. 그가 사용한 기술은” “에칭(etching, 부식동판화)”이었다. (424쪽)

- “도판 277은 렘브란트의 에칭 작품 중의 하나인데 이것 역시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묘사한 것이다.” (424쪽)

- “당대의 다른 미술가들처럼 렘브란트도 카라바조의 교훈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카라바조와 마찬가지로 렘브란트 역시 조화와 아름다움보다는 진실과 성실성을 더 중요시했다.” (427쪽)

- “렘브란트의 자유로운 제작 태도는 우리로 하여금 그가 인물들을 배치하는 데 얼마나 많은 예술적 지혜와 기술을 사용했는지 잊게 만든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예수를 둘러싸고 있는 이 군중들만큼 교묘하게 균형이 잡힌 예는 다른 데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많은 사람들을 겉보기에는 우연한 듯이 그리면서도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군상들로 배치하는 기술을 렘브란트는 이탈리아 전통에서 배웠다. 그는 결코 이탈리아 미술을 경멸하지 않았다.”(427쪽)

 

▲ 얀 스텐(Jan Steen : 1626 - 1679) ▼

- "대부분의 네덜란드 화가들은 유쾌하고 소박한 방식으로 평범한 사람들의 생활상을 묘사하는 북유럽 미술의 전통을 따르고 있었다. 이러한 전통은 도판 140(p.211)이나 도판 177(p.274)과 같은 중세의 세밀화로 거슬러 올라간다.“ (427쪽)

- “우리는 농민생활의 유머러스한 장면과 묘사를 통해서 화가로서의 솜씨와 인간의 본성에 대한 그의 지식을 과시했던 브뢰헬(p.382, 도판 246)eh 이러한 전통을 이어받고 있음을 기억한다. 이러한 전통의 흐름을 완성시킨 17세기 화가는 얀 반 호이엔의 사위인 얀 스텐이었다.” (427쪽)

- 도판 278(<세례 잔치>, p.428)은 평민들의 유쾌한 생활의 한 장면인 세례를 축하하는 장면이다.“ (428쪽)

- 이 그림의 “모든 세부를 자세히 살펴보면 이 화가가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한 화면에 혼합시킨 솜씨가 매우 뛰어남을 알 수 있다. 전경에 등을 보이고 서 있는 인물만으로도 한 폭의 훌륭한 그림이 되고 있다. 원화를 본 사람이면 누구나 이 작품의 화려한 색채들이 주는 따사로움과 부드러움을 쉽게 잊을 수 없을 것이다.” (428쪽)

-

 

▲ 야콥 반 로이스달(Jacob van Ruisdael : 1628 - 1682) ▼

- 얀 스텐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 보다 렘브란트의 정신에 가까운 분위기를 표현한 다른 화가들이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은 또 다른 분야의 ‘전문가’인 풍경화가 야콥 반 로이스달이었다. 로이스달은 얀 스텐과 동년배로 위대한 네덜란드 미술가들의 제2세대에 속한 사람이었다.” (428-9쪽)

- “그는 생애의 전반기를 하를렘이라는 아름다운 도시에서 보냈는데 그 도시는 숲이 우거진 모래 둔덕으로 둘러싸인 바닷가 마을이었다. 그는 이 넒은 둔덕에 생겨나는 명암의 효과를 즐겨 관찰했으며 점점 ‘한 폭의 그림 같은’ 숲의 풍경(도판 279, <나무로 둘러싸인 늪이 있는 풍경>, p.429)을 전문적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429쪽)

- “로이스달은 검고 어두컴컴한 구름, 어두워져 가는 저녁 햇살, 폐허가 된 성과 콸콸 흐르는 개울을 그리는 전문가가 되었다. 클로드 로랭이 이탈리아 풍경의 시적인 아름다움을 발견한 화가였듯이 그는 북유럽 풍경의 시정을 발견해낸 화가였다. 그 이전의 어떤 미술가도 자연 속에 반영되는 자기 자신의 정서와 기분을 로이스달만큼 솔직하게 표현하려고 애쓴 사람은 없었다.” (429쪽)

 

▲ 윌렘 칼프(Willem Kalf : 1609 - 1693) ▼

- "네덜란드 화가 중에서 가장 ‘전문화’된 분야인 정물화를 그처럼 흥미 있는 것으로 만든 것은 무엇보다도 바로 그러한 점에 있다.“ (429쪽)

- “정물 그림에서 화가들은 그들이 그리고 싶은 물건을 자유롭게 선택하여 그들의 상상에 맞게 테이블 위에 배치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정물화는 미술가들이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 훌륭한 실험장이 되었다.” (430쪽)

- 예를 들어 윌렘 칼프 같은 화가는 빛이 색유리 위에서 어떻게 반사되고 흩어지는지를 연구했다. 그는 또 색채와 질감의 대조와 조화를 연구하고, 화려한 페르시아 양탄자와 번쩍이는 도자기, 다채로운 색깔의 과일, 윤이 나는 금속 장식물들을 참신하게 조화시키려고 노력했다(도판 280 ; <성 세바스티아누스 사수들의 조합의 뿔로 만든 술잔과 바다 가재 및 유리잔이 있는 정물>, p.431). (430쪽)

- 이처럼 “가사가 없어도 위대한 음악이 될 수 있듯이, 중요한 주제가 없는 위대한 그림도 있을 수 있다. 17세기 화가들이 가시적인 세계의 순수한 아름다움을 발견하였을 때 모색했던 것은 중요한 주제가 없이도 그림이 될 수 있다는 이 새로운 발견이었다(p.19, 도판 4). 그래서 동일한 종류의 주제만을 평생 동안 그린 네덜란드의 전문 화가들은 결국 주제라는 것은 부차적인 것이 될 수도 있음을 증명해 보였다.” (430쪽)

 

▲ 얀 베르메르 반 델프트(Jan Vermeer van Delft : 1632 - 1675) ▼

- “이러한 거장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렘브란트보다 한 세대 뒤에 태어난 얀 베르메르 반 델프트였다.” “그의 작품 중에는 의미심장하고 거창한 주제를 다룬 것이 거의 없다. 대부분의 작품은 전형적인 네덜란드 가옥의 실내에 서 있는 순박한 인물들을 보여주기도 한다.” (430쪽)

- 어떤 작품은 우유를 따르고 있는 여자처럼(도판 281 ; <부엌의 하녀>, p.432) 단순한 일을 하고 있는 단 한 여자만을 보여준다. 베르메르와 함께 유머러스한 요소는 풍속화에서 자취를 감춰버렸다. 그의 그림은 사실 인물이 들어 있는 정물화이다.“ (430쪽)

- “이렇게 단순하고 가식이 없는 그림이 불후의 명작이 된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질감, 색채 및 형태들을 치밀하고 완벽하게 묘사하는 베르메르의 표현 기법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430쪽)

- “그 밝고 정확한 화면 속에는 고심하거나 힘들여 제작한 흔적이 없다. 형태를 흐릿하게 만들지 않고도 사진의 거친 대조를 교묘히 부드럽게 수정하는 사진사처럼 베르메르는 윤곽선을 부드럽게 만들었고, 그러면서도 입체감과 견고함의 인상을 주었다.” (430-433쪽)

- “베르메르의 작품은 우리로 하여금 단순한 정경의 아름다움을 참신한 눈으로 보게 만들었으며, 천의 색깔을 고조시키는 창문을 통해서 쏟아져 들어오는 빛을 보았을 때 그가 느꼈을 감흥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4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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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장. 자연의 거울(17세기 네덜란드) (1)

20장. 자연의 거울(17세기 : 네덜란드)

** 부르주아·프로테스탄트적 바로크 **

 

- “네덜란드 북쪽 지방 사람들은” “스페인의 가톨릭 군주에 대항해서 반란을 일으켰”으며, “부유한 상업 도시에” 살았으며 “대부분 신교를 믿었다.” “이들의 태도는 영국의 청교도들”처럼 “경건하고 근면 절약하며 대부분 남쪽 지역의 호사스런 형식을 싫어하”였다. (413쪽)

- 이들은 가톨릭적 “바로크 양식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건축에 있어서조차도 이들은 수수하고 절제된 양식을 선호했다.” 이들은 “새로 완성된 그들 국가의 자부심과 업적을 과시하기” 위하여 암스테르담에 “대규모 시청사를 지시로 결정하였다. 그들이 선택한 모델은 크고 당당하지만 형태는 단순하고 장식도 별로 없는 건축 양식이었다.” (413쪽)

- “앞에서 우리는 신교의 승리가 미친 영향이 건축보다는 회화에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났음을 살펴보았다(p.374).” (413쪽)

- “신교 사회에서 계속될 수 있었던 어떤 회화의 영역 중에서도 제일 중요한 것은, 홀바인의 경우가 잘 증명해 주듯이 마로 초상화 그리기였다. 성공한 많은 상인들은” 부와 직위, 명예, 권력을 가진 자신의 모습이 “들어있는 자신의 초상화를 원했다.” (413쪽)

 

▲ 프란스 할스(Frans Hals : 1580? - 1666) ▼

- “할스는 루벤스와 같은 세대에 속한 사람이었”으며 “그의 부모들은 신교도였”다. (414쪽)

- “도판 269(<성 조지 군단 장교들의 연회>, p.415)는 거의 초창기에 그린 그림으로 그가 이런 종류의 주문 그림을 그릴 때 구사한 빼어난 솜씨와 독창력을 잘 보여준다,” “할스는 처음부터 어떻게 그 유쾌한 순간의 분위기를 전달할지와 그와 같이 의례적인 모임에 어떻게 생기를 불어 넣었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12명의 구성원 개개인을 드러내 보여줘야 하는 목적에 소홀함이 없이 각각의 인물을 너무나 실감나게 묘사하여 과거 우리도 그들을 틀림없이 만났었던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 (414~5쪽)

- 할스가 그린 “수많은 개인 초상화들 중 하나인 도판 270(<피터 반 덴 부르케 초상>, p.417)”을 살펴보자. “할스 이전의 초상화들과 비교해 보면 이것은 거의 스냅 사진처럼 보인다.” (415쪽)

- “약 한 세기 전에 그린 홀바인의 리처드 사우스웰 경의 초상화(p.377, 도판 242)라든가 같은 시기의 유럽의 가톨릭 국가들에서 그려진 루벤스와 반 다이크 또는 벨라스케스의 초상화들과 비교해 보라.” “그들이 그린 초상화들은 모두 생동감이 넘치고 사실적이긴 하지만 주문한 사람의 위엄과 귀족적인 혈통을 암시하기 위해 화가들이 주문자의 자세를 세심하게 배려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할스의 초상화들은 화가가 주문한 사람을 어떤 특정한 순간에 ‘포착해서’ 그의 화폭에 영원히 고정시켰다는 인상을 준다.” (416쪽)

- 이렇게 스냅 사진처럼 순간적으로 포착하여 그리는 그림은 “물감과 붓을 다루는 방법”이 아주 달랐을 것이라 생각된다. “우리는 마치 밝은 색과 어두운 색을 몇 번 붓질해 헝클어진 머리카락이나 구겨진 소매의 모습을 실감나게 묘사하는 그의 빠르고 능숙한 붓놀림을 보는 것 같다.” (416쪽)

- 이러한 “빠르고 능숙한” 붓놀림은 부르주아·프로테스탄트적 바로크의 특징인 단순함, 간결함(동시에 이것은 고대 그리스·로마, 특히 플라톤의 이데아계의 특징이기도 하다. 또한 신플라톤주의의 강한 영행을 받은 근대과학의 기초 또는 출발점이기도 하다)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다.

- 또한 이러한 단순함, 간결함은 부르주아 또는 자본주의 분업·전문화의 기초 또는 토대를 이루게 된다(이것은 바로 뒤에서 다루게 될 미술 영역의 분화와 전문화로 이어지게 된다).

- 다른 한편 “그의 초상화는 초기의 초상화들이 그랬던 것처럼 좌우 대칭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한쪽에 치우쳐 불안정한 것도 아니다. 바로크 시대의 거장들과 마찬가지로 할스도 규칙을 따르지 않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훌륭하게 균형감을 이룩해 내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416쪽)

 

▲ 17세기 네덜란드에서의 회화 영역의 분업·전문화 ▼

- 가톨릭 교회권에서는 화가들이 주로 성경이야기를 소재로 한 제단화를 그려 살았지만 신교를 믿는 네덜란드 북쪽 지역, 즉 부르주아가 지배하는 지역에서는 이러한 그림을 더 이상 그릴 수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거대한 제단화들은 가톨릭교회의 부패와 타락을 상징하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 교회의 주문을 받아 그림을 제작하는 방식은 더 이상 어울리지 않았다. 이제 화가들은 자신들이 잘 그릴 수 있는 그림들을 그려서 시장에서 다른 상품들처럼 팔아야 했다. 이렇게 해서 그림의 특수한 장르를 전문적으로 그리는 전문적인 화가가 등장하게 되었다.

- 특히 “바다 풍경을 전문적으로 그리는 화가들”의 그림은 “영국과 네덜란드가 해상을 제패하던 시대를 말해 주는 귀중한 역사적 문헌으로 간주된다.” (418쪽)

 

▲ 지몬 데 블리헤르(Simon de Vlieger : 1601 - 1653) ▼

- 이 화가는 “바다 풍경을 전문으로 그리는 화가들 중의 한 사람이다.” (418쪽)

- 도판 271(<해풍에 흔들리는 네덜란드 군함과 수많은 범선들>, p.418)을 살펴보자. “이 그림은 네덜란드의 화가들이 바다의 분위기를 얼마나 놀랄 만큼 단순하고 솔직한 방식으로 표현하였는지를 보여 준다. 이들 네덜란드 화가들은 미술사상 최초로 하늘의 아름다움을 발견한 사람들이다.” (418쪽)

- “그들은 그림을 흥미 있게 만들기 위해 극적이거나 시선을 끄는 것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단지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세계의 한 부분을 그렸을 뿐이며 그것만으로도 영웅적인 이야기나 희극적인 테마를 다룬 그림만큼 만족스러울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418쪽)

 

▲ 얀 반 호이엔(Jan van Goyen : 1596 - 1656) ▼

- “그는 헤이그 출신으로 풍경화가 클로드 로랭과 거의 동일한 시대의 사람이었다. 조용한 아름다움이 넘치는 회고적인 정경을 보여주는 클로드의 풍경화(p.396, 도판 255)와 얀 반 호이엔의 간결하고 솔직한 그림(도판 272, <강변의 풍차>, p.419)을 비교해 보는 것은 매우 흥미 있는 일이다.” (418쪽)

- “호이엔은 클로드처럼 고상하고 품위 있는 신전 대신에 소박한 풍차를, 그리고 매혹적인 숲 속의 오솔길 대신에 별다른 특징 없는 자기 고행의 들판을 그렸다. 그러나 반 호이엔은 이처럼 평범한 풍경을 평온한 아름다움이 배어 있는 정경으로 변형시키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는 우리들의 눈이 익은 모티프들을 변화시켜서 우리들의 시선을 아득히 먼 속으로 인도하여 마치 우리들이 제일 좋은 위치에 서서 저녁 햇살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 (헤르메티시즘의 영향이 강하게 보인다.) (419쪽)

- 반 호이엔 같은 거장들의 그림, 즉 “소박한 풍경”을 그린 그림을 ‘픽처레스크(picturesque)’라고 한다. “우리로 하여금 소박한 풍경 중에서 ‘한 폭의 그림” 같은 것을 볼 수 있도록 가르쳐 준 사람은 바로 이 네덜란드 화가들이었다. (4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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