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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장. 권력과 영광의 예술 Ⅰ(17세기 후반과 18세기 : 이탈리아)
** 세기 별 서양 예술 사조
<14 ~ 18세기>
국제 고딕 - 르네상스 (14세기) · 매너리즘 (16세기) · 바로크 (17세기) · 로코코 - 신고전주의 - 낭만주의 (18세기)
<19세기>
사실주의 · 라파엘전파 · 아카데미 예술 · 인상주의 · 후기인상주의 · 신인상주의 · 분할주의 · 점묘주의 · 구획주의 (클로와조니즘) · 나비파 · 종합주의 · 상징주의 · 허드슨 리버파
<20세기>
모더니즘 · 입체파 · 표현주의 · 추상표현주의 · 추상미술 · 뮌헨 신미술가 협회 · 청기사파 · 다리파 · 다다이즘 · 야수파 · 신야수파 · 아르누보 · 바우하우스 · 더 스테일 · 아르데코 · 팝 아트 · 미래주의 · 절대주의 · 초현실주의 · 색면파 · 미니멀리즘 · 설치미술 · 서정추상 · 포스트모더니즘 · 개념미술 · 대지미술 · 행위 예술 · 비디오 아트 · 신표현주의 · 아웃사이더 아트 · 로브로우 예술 운동 · 뉴미디어 아트 · 젊은 영국 작가들 · 스터키즘 · 시스템 아트
<21세기>
관계 예술
** 로코코
로코코(Rococo)는 18세기 프랑스에서 생겨난 예술형식이다. 어원은 프랑스어 rocaille(조개무늬 장식, 자갈)에서 왔다.
로코코는 바로크 시대의 호방한 취향을 이어받아 경박함 속에 표현되는 화려한 색채와 섬세한 장식, 건축의 유행을 말한다. 바로크 양식이 수정, 약화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로코코는 왕실예술이 아니라 귀족과 부르주아의 예술이다. 다시 말하자면, 유희와 쾌락의 추구에 몰두해 있던 루이 14세 사후, 18세기 프랑스 사회의 귀족계급이 추구한, 사치스럽고 우아한 성격 및 유희적이고 변덕스러운 매력을, 그러나 동시에 부드럽고, 내면적인 성격을 가진 사교계 예술을 말하는 것이다. 귀족계급의 주거환경을 장식하기 위해 에로틱한 주제나 아늑함과 감미로움이 추구되었고 개인의 감성적 체험을 표출하는 소품위주로 제작되었다. 또한 로코코에서는 중국 양식이 많이 유행하였다.
로코코란 낱말이 서양 예술사에서 전문용어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아마 1840년대로 보인다 (1842년 프랑스 학술원에서 이 낱말의 사용 인정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좁은 의미에서 로코코란 루이 15세 시대 (1730년 - 1750년)에 유행하던 프랑스 특유의 건축의 내부장식, 미술, 생활용구의 장식적인 양식을 의미한다 (조개무늬를 장식으로 많이 쓰기 때문에 style de rocaille라고 부른다). 후에 이 국한된 의미를 벗어나 예술사를 연구하는 이들 사이에서 후기 바로크를 이어주는 건축과 서양미술의 한 예술 양식으로 쓰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로코코는 바로크나 르네상스처럼 한 시대를 대표하는 사조라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18세기는 로코코 뿐만 아니라 바로크, 고전주의, 낭만주의가 병존하는 시대이며, 이 시기에 유행하고 나타난 예술양식들은 서로간에 영향을 받고 주는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건축물로 상수시 궁전(Sans-Souci Palace)이 있다.
▲ 프란체스코 보로미니(Francesco Borromini : 1599 - 1667) ▼
- “17세기 전반에 이탈리아에서는 건물과 그 장식에 대한 더욱 눈부신 새로운 구상들이 하나하나 축적되어 17세기 중엽에 가면 소위 바로크라고 부르는 양식은 완전하게 발전하게 된다.” (435쪽)
- “도판 282(<전성기 바로크 양식의 로마 교회 : 산타 아그네스 성당>, p.436)는 유명한 건축가 프란체스코 보로미니가 그의 조수들과 건립한 전형적인 바로크 양식의 교회이다.” (435쪽)
- “델라 포르타처럼 그는 중앙 입구를 고대 신전의 정면 형태로 만들고 또 그와 마찬가지로 보다 풍부한 효과를 살리기 위해서 양쪽으로 벽기둥의 수를 배로 늘렸다.” (435쪽)
- “그러나 보로미니의 정면과 비교해보면 델라 포르타의 정면은 다소 엄격하고 절제된 것처럼 보인다. 보로미니는 더 이상 고전 건축에서 따온 기둥 양식을 가지고 벽을 장식하는 데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거대한 둥근 지붕을 만들고 그 양쪽에 두 개의 탑과 정면을 세움으로 해서 서로 다른 형태들을 한데 모아 그의 교회를 구성했다. 정면은 마치 진흙으로 빚어서 만든 것처럼 굴곡이 져 있다.” (435쪽)
- “세부를 들여다보면” “두 개의 탑 아래층은 사각형이고 윗층은 원형이며 이 두 개의 층이 이상하게 파괴된 엔타블레이처로 연결되어 있는데, 이것은 모든 정통파 교사들을 불쾌하게 만들 만한 것이었으나 건물 전체에는 극히 잘 어울리고 있다.” (435쪽)
- “이 교회 내부를 들여다보면 중세 성당들보다 훨씬 구체적인 방법으로 천상의 영광을 연상시키기 위해 얼마나 신중히 보석과 황금과 스터코(stucco, 치장 벽토) 등으로 화화스러운 장관을 연출했는지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도판 283(산타 아그네스 성당 내부>, p.437)은 보로미니가 설계한 교회의 내부를 보여 준다.” (436쪽)
- “가톨릭 세계는 중세 초기 미술에 부여했던 단순한 임무, 즉 글을 못 읽는 사람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역할(p.95) 이상으로 미술이 종교에 공헌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미술은 글을 못 읽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너무 많이 읽은 사람들까지도 설득해서 개종시키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었다. 많은 건축가, 화가, 조각가들이 교회를 변형시켜 그 찬란함과 아름다움으로 보는 이를 거의 압도해 버리는 거대한 장식물로 만들기 위해서 소집되었다.” (436-7쪽)
▲ 장 로렌초 베르니니(Jean Lorenzo Bernini ; 1598 - 1680) ▼
- “이러한 무대 장식과도 같은 현란한 미술은 잔 로렌초 베르니니라는 한 미술가에 의해서 발전되었다. 베르니니는 보로미니와 같은 세대로 반 다이크와 벨라스케스보다는 한 살 위였고 렘브란트보다는 여덟 살이 위였다. 이런 거장들처럼 그도 최고의 초상화가였다. 도판 284(콘스탄차 부오나렐리 상>, p.438)는 한 젊은 여자의 흉상으로 참신하고도 인습에 얽매이지 않는 베르니니의 최고 걸작 중의 하나이다.” (437-6쪽)
- “마치 렘브란트가 인간의 행동에 관한 그의 심오한 지식을 이용했듯이” 여기에서 “베르니니는 얼굴 표정의 묘사를 활용하여 그의 종교적인 체험에 시각적인 형태를 부여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438쪽)
- “도판 285(<성 테레사의 환희>, p.439)는 로마에 있는 조그마한 교회의 부속 예배실을 장식하기 위해 베르니니가 만든 제단이다. 이 제단은 스페인의 성 테레사에게 봉헌된 것이다.” (438쪽)
- 여기에서 “우리는 그 성녀가 구름을 타고 황금빛 햇살의 형태로 위로부터 쏟아지는 빛줄기를 향해서 하늘로 올라가는 광경을 본다. 천사가 공손하게 그녀에게 다가서고 있으며 성녀는 기절한 채 황홀감 속에 빠져 있다.” (438쪽)
- “만약 우리가 이 기절한 성녀의 얼굴을 이전의 다른 작품과 비교해 보면 우리는 그때까지 미술의 영역에서 한번도 시도된 일이 없는 얼굴 표정의 격렬함이 표현되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도판 286(<도판 285의 세부>, p.440)을 <라오콘>(p.110, 도판 69)의 두상과 비교해 보면 그 차이점을 분명히 알 수 있다.” (440쪽)
- “베르니니의 옷 주름 처리 방법도 그 당시로서는 아주 새로운 것이었다. 즉 고전적인 방식으로 인정되어온 품위 있는 옷 주름으로 흘러내리게 하지 않고 흥분과 움직임의 효과를 보다 강조하기 위해서 옷자락이 몸부림을 치듯 펄펄 날리게 표현했다. 베르니니의 이러한 강렬한 효과들은 얼마 안 가서 유럽 전역에 퍼져 모방되었다.” (440쪽)
▲ 조반니 바티스타 가울리(Giovanni Batista Gaulli : 1639 - 1709) ▼
- "도판 287(<예수의 성스러운 이름을 찬미함>, p.441)은 베르니니를 추종하는 화가였던 조반니 바티스타 가울 리가 그린 로마의 한 예수회 교회의 천장 장식이다. 이 화가는 우리에게 교회의 궁륭형 천장이 열려 있으며 우리가 천국의 영광을 곧바로 보고 있다는 환상을 주려고 했다. 그 이전의 코레조도 천장에 천국을 그리는 데 착안했으나(p.338, 도판 217) 가울리의 효과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무대 효과에 가깝다.“ (443쪽)
- “이와 같은 그림은 이것이 놓여 있는 장소를 벗어나면 그 의미를 상실한다. 그렇게 때문에” “바로크 양식이 완벽하게 발전한 뒤에는 이탈리아와 유럽의 가톨릭 세계에서 회화와 조각이 각각 독립적인 예술로서 발전하지 못하고 쇠퇴하게 된 것도 우연한 일은 아닌 것 같다.” (443쪽)
▲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Giovanni Batista Tiepolo : 1696 - 1770) ▼
- "도판 288(<클레오파트라의 연회>, p.442)은 그가 1750년 경에 그린 베네치아의 한 궁전 장식의 일부이다. 이 그림은 티에폴로에게 화려한 색채와 호화스러운 의상 묘사를 과시할 모든 기회를 준 주제인 <클레오파트라의 연회>이다.“ (444쪽)
- “이와 같은 프레스코는” “그 이전 시대의 보다 차분한 작품들보다 영구적인 가치에 있어서는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이탈리아 미술의 위대한 시대가 끝나고 있는 것이다.”(444쪽)
▲ 프란체스코 구아르디(Francesco Guardi : 1712 - 93) ▼
- “이탈리아 미술은 18세기 초에 단 한 가지의 특수한 분야에서만 새로운 이념들을 창조해냈다. 그것은 대단히 특징적인 것으로 풍경을 묘사한 유화와 동판화였다.” (444-5쪽)
- “도판 290(<베네치아의 산 조르조 마조레 정경>, p.444)은” “구아르디가 그린 베네치아의 한 풍경이다. 티에폴로의 프레스코처럼 이 풍경화도 베네치아의 미술이 그 특유의 화려함과 빛과 색채의 감각을 잃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445쪽)
- “우리는 움직임과 대담한 효과를 좋아하는 바로크의 정신이 단순한 한 도시의 풍경 속에서도 여실히 나타나 있음을 알 수 있다.” (445쪽)
- “그는 화가가 일단 한 장면의 일반적인 인상만 제공해 주면 나머지의 사소한 세부들을 보는 사람들이 상상을 통해 메꾸고 보충하려 한다는 사실을 터득하고 있었다.” (이것은 벨라스케스의 영향을 받았고 그것을 전승하고 있음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도판 267과 410을 참조하기 바란다.) “작품 속의 곤돌라 사공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놀랍게도 그들은 능숙하게 배치된 몇 점의 색채들로 단순하게 이루어졌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몇 발짝 뒤로 물러서면 그 환영은 완벽한 효과를 연출해낼 것이다. 이러한 후기 이탈리아 미술의 결실 속에 살아 있는 바로크 양식의 전통은 후대에 가서 새로운 중요성을 얻게 된다.” (4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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