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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도 레니(Guido Reni : 1575-1642) ▼
- “로마에서 자기의 독자적인 양식을 발전시킨 많은 이탈리아 거장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아마도 귀도 레니일 것이다.” (393-4쪽)
- 레니는 “카라치 파에 입문”했다. “한때는 그의 명성이 라파엘로와 비등할 정도로 높았는데 도판 253(<오로라(새벽의 여신), p. 394)을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394쪽)
- “사실 레니는 사람들이 자신의 그림을 보고 그가 모방하고자 했던 위대한 화가 라파엘로를 생각하게 되기를 원했다. 현대의 비평가들이 레니의 업적을 별로 높게 평가하지 않은 것은 아마도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394쪽)
- 그러나 “레니가 그의 마음속에 가지고 있던 아름다움을 실현하기 위해서 취한 방법, 즉 비속하고 추하며 그의 고상한 이상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은 무엇이든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현실보다 더 완벽하고 이상적인 형태를 추구하는 그의 노력”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395쪽)
- “고전 시대의 조각상들에 의해 설정된 기준에 따라서 자연을 이상화하고 ‘미화하는’ 방침을 공식화한 사람들은 카라치와 레니, 그리고 그레니의 추종자들이었다. 우리는 이것을 어떤 정해진 방법 같은 것에 아무런 구애를 받지 않는 고전 미술과 분명하게 구별하는 의미에서 신고전주의적(neo-classical), 또는 ‘아카데믹한(academic)’ 방침이라 부른다.”(395쪽)
▲ 니콜라 푸생(Nicolas Poussin : 1594-1665) ▼
- “‘아카데믹한’ 거장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인 “프랑스 화가 니콜라스 푸생”은 “로마를 제2의 고향으로 삼고” 살면서 “정열적으로 고전 시대의 조각상들을 연구했는데, 그것들의 아름다움을 통해 순수하고 장엄했던 고대 도시들에 대한 자신의 시각을 전달하고자 했다. 도판 254(<아르카이에도 나는 있다>, p. 395)는 이러한 부단한 노력의 결과로서 생겨난 유명한 작품들 가운데 하나이다.” (395쪽)
- “명문에는 라틴어로 다음과 같이 써 있다.”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다(ET IN ARCADIA EGO).” “나(EGO), 즉 죽음은 목가적인 이상향인 아르카디아에도 의연히 군림한다는 뜻이다.” (396쪽) 그런데 죽음을 대하는 이들의 표정은 의외로 담담하고 단순해 보인다(물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경외심이 없을 수는 없지만, 그 표정을 바깥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고대 그리스·로마인들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대한 깊은 성찰만이 “죽음의 공포가 말끔히 가신 조용한 휴식의 이러한 회고적인 정경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396쪽)
▲ 클로드 로랭(Claude Lorrain : 1600-82) ▼
- 푸생과 “동일한 회고적인 아름다운 분위기를 그린 작품으로 유명해진” 화가는 “클로드 로랭”이다. (396쪽)
- 도판 255(<아폴론에게 제물을 바치는 풍경>, p. 396)를 보자. 여기서 “그는 화면 전체의 장면을 현실과 다르게 보이는 금빛 광선이나 은빛 대기 속에 이 모든 것들을 무르녹아 들어가게 묘사했다.” (397쪽)
- “자연의 숭고한 아름다움에 처음으로 사람들의 눈을 뜨게 만든 화가는 바로 클로드 로랭”이었다. (397쪽)
▲ 페터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 : 1577-1640) ▼
- 루벤스는 “푸생과 클로드보다는 한 세대 위였고 귀도 레니와는 비슷한 연배였다.” (397쪽)
- 루벤스는 “어떤 ‘운동’이나 유파에 가입한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그의 본질적인 신념, 즉 화가의 임무는 자기 주위의 세계를 그리며,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그림으로써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화가 자신이 사물의 생동감 넘치는 다양한 아름다움을 즐긴 대로 느끼게 해 주는 일이라는 신념이 흔들리지는 않았던 것 같다.” (397쪽)
- “이러한 접근 방법으로 보면 카라바조의 예술이나 카라치의 예술은 서로 모순되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397쪽)
- “그는 이탈리아로부터 교회와 궁전을 장식하기 위한 거대한 화면을 선호하는 취향을 플랑드르에 도입했는데, 이것은 당시의 고관대작들과 군주들의 취향에 잘 들어맞았다. 그는 거대한 화면 속에 인물들을 배치하고 전체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 빛과 색채를 구사하는 기술을 공부했다. 도판 256(<성인들의 경배를 받고 있는 성모와 아기 예수>, p. 399)은 안트웨르펜의 한 교회당의 주 제단을 장식할 그림의 습작으로 그가 이탈리아 선배 화가들의 작품을 얼마나 잘 연구했으며 또 그들의 이념을 얼마나 대담하게 발전시켰는지를 보여준다.” (398쪽)
- “이 그림에는” “<윌튼 두폭화>(pp. 216-7, 도판 143), 벨리니의 <성모>(p. 327, 도판 208) 또는 티치아노의 <페사로의 성모>(p. 330, 도판 210)” 등의 “그림에서보다도 더 많은 움직임과 빛, 그리고 훨씬 공간감이 넘치고 있으며 더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고 있다.” (398쪽)
▲ 페터 파울 루벤스의 <아이의 얼굴>(도판 257, p. 400) ▼
- “마술사와 같은 그의 솜씨는 모든 것을 생기발랄하게 하고, 강력하고 유쾌하게 살아 숨 쉬는 곳으로 만들 수 있었다. 이와 같은 그의 완벽한 기량은 그의 간단한 소묘 작품(p. 26, 도판 1<아들 니콜라스의 초상>)이나 재미 삼아 그린 그림들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400쪽)
- “도판 257은 작은 소녀의 얼굴인데 아마도 루벤스의 딸인 것 같다. 이것은 구도상의 복잡한 기교도 없으며 화려한 의상이나 흘러내리는 빛도 없는 단순한 소녀의 정면 초상일 뿐이다. 그런데도 이 그림은 살아 있는 사람처럼 숨을 쉬고 맥박이 고동치고 있는 듯하다.” (400쪽)
- “루벤스가 어떻게 해서 이 생기발랄한 생명력의 인상을 만들어 냈는지” 하는 것은 “아마도 입술의 물기를 암시하고 또 얼굴과 머리카락을 입체적으로 표현하는 데 사용한 대담하고 섬세한 빛의 효과와 분명히 관계가 있을 듯싶다.” (400쪽)
▲ 페터 파울 루벤스의 <자화상>(도판 258, p. 401) ▼
- 이 시기 “네덜란드 자체도 스페인의 ‘가톨릭’ 지배에 저항한 신교 국가인 홀란트와 스페인과의 동맹 하에서 안트웨르펜의 지배를 받는 가톨릭교의 플랑드르로 양분되어 있었다. 이 가톨릭 진영의 화가로서 루벤스는 독자적인 지위에 올라섰다.” (402쪽)
- “귀족임을 암시하는 검(劍)을 차고 있는 그의 자화상(도판 258)은 그가 자신의” 이러한 독자적인 “지위를 얼마나 의식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402쪽)
▲ 페터 파울 루벤스의 <평화의 축복에 대한 알레고리>(도판 259, p. 402) ▼
- 루벤스의 “손을 통해서 고전적인 우화와 우의적인 이야기들이 그의 딸의 초상처럼 실감나게 살아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402쪽)
- “우의화는 보통 다소 따분하고 추상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루벤스의 시대에는 그것이 사상을 표현하는 편리한 하나의 수단이 되었다.” (402-3쪽)
- “도판 259가 그런 그림의 하나인데 이것은 루벤스가 스페인과의 화평을 설득하고자 영국 국왕 찰스 1세에게 선물로 가져왔던 것이라고 한다. 이 그림은 평화와 축복을 전쟁의 공포와 대조시키고 있다.” (403쪽)
- “이 그림의 풍부한 세부 묘사와 생생한 대조들, 빛나는 색채에 몰입되어 보게 되면 이러한 구상들이 루벤스에게 있어서는 맥 빠진 추상으로서가 아니라 박진감 넘치는 현실로 생각되었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403쪽)
- 그러므로 “고전적인 아름다움의 ‘이상화’된 형태가 그에게는 무용지물이었다. 그런 형태들은 그와는 거리가 멀고 추상적인 것이었다. 그가 그린 남자와 여자들은 그가 실제로 보고 좋아했던 살아 있는 사람들이었다.” (403쪽)
▲ 안토니오 반 다이크(Anthony van Dyck : 1599-1641) ▼
- 안토니오 반 다이크는 “루벤스의 유명한 제자와 조수들 중에서 가장 위대하고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였으며 “푸생과 클로드 로랭의 세대에 속했다.” (405쪽)
- 안토니 반 다이크의 “기질과 분위기는 그의 스승과 대단히 달랐다.” “그의 그림에는 힘이 없고 다소 우울한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바로 이러한 자질 때문에 제노바의 근엄한 귀족들과 찰스 1세와 그의 왕당파 당원들이 그의 그림에 마음이 끌렸는지도 모른다.” (405쪽)
- “오늘날 거만한 귀족적인 태도나 궁정적인 세련미를 숭상하던 당시의 영국 사회에 관한 그림의 기록을 갖게 된 것은 반 다이크 덕분이라 할 수 있다.” (405쪽)
- “사냥을 하던 중에 방금 말에서 내린 찰스 1세의 초상화(도판 261, <영국 국왕 찰스 1세>, p. 404)는 역사 속에 영원히 남고자 원했던 스튜어트 왕조의 한 군주의 모습을 보여준다. 여기서의 찰스 1세는 비할 데 없이 우아하고 확고한 권위와 높은 교양을 지닌 인물이며, 예술의 후원자이자 신으로부터 왕권을 부여받은 자로서 타고난 위엄을 강조하기 위해 권력의 다른 외형적인 장식이 필요치 않았던 한 남자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405쪽)
- “루벤스의 생명력이 넘쳐흐르는 건장하고 힘찬 인물들 못지 않게 인간에 대한 우리들의 시각 세계를 풍부하게 해 주는 명문 출신다운 귀족적인 품위와 신사적인 유유자적한 태도(도판 262, <존 경과 버너드 스튜어트 경>, p. 405)의 이상을 그림 속에 구체화시킨 사람”은 바로 반 다이크였다. (406쪽)
▲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á́zquez : 1599-1660) ▼
- “루벤스는 스페인을 여러 번 여행하던 중에 젊은 화가를 만났는데 그 젊은 화가는” “마드리드의 펠리페 4세의 궁전”의 궁정화가였던 디에고 벨라스케스였다. (406쪽)
- 벨라스케스는 “카라바조의” “‘자연주의’의 방침을 흡수하여 전통에 구애받지 않고 자연을 냉정하게 관찰하는 데 그의 예술을 바쳤다.” (406쪽)
- “도판 263(<세비야의 물장수>, p. 406)은 그의 초기 작품의 하나로 세비야 거리에서 물을 팔고 있는 한 노인을 그린 것이다. 이것은 네덜란드 화가들이 그들의 재주를 과시하기 위해서 고안해 낸 그런 유형의 ‘풍속화’이지만, 카라바조의 <의심하는 성 토마>(도판 252)와 같이 강렬하고 예리한 통찰력으로 그려졌다.” (406-7쪽)
- “지치고 주름살 투성이 얼굴에 누더기 망토를 걸친 노인과 둥근 모양의 큼직한 토기 항아리, 유약을 바른 단지의 표면과 투명한 유리잔에 어른거리는 빛 등 모든 것이 너무나 실감나게 그려져 있어서 그 물건들을 마치 손으로 만져볼 수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407쪽)
▲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도판 264, p. 407) ▼
- 펠리페 4세의 궁정화가로서 “그의 주요 임무는 왕과 왕족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자신들의 “위신을 내세우며 딱딱하고 어울리지 않게 옷을 입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벨라스케스는 마치 마술을 부린 것처럼 이들의 초상화들을 사상 유례 없는 가장 매혹적인 그림들로 바꾸어 놓았다.” (408쪽)
- “그는 이미 오래 전에 카라바조의 수법에 대한 지나친 집착을 버렸다.” (408쪽)
- “그는 루벤스와 티치아노의 필법을 연구했으나 자연에 접근하는 그의 방식에는 ‘남에게서 빌어온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도판 264는” “티치아노가 그린 <교황 바오로 3세>(p. 335, 도판 214)보다 백 년여 뒤인 1649-50년에 로마에서 그린 것이다.” (408쪽)
- “티치아노가 라파엘로의 그림(p. 322, 도판 206, <교황 레오 10세와 두 추기경>)에서 자극을 받았던 것처럼 벨라스케스는 티치아노가 그린 <교황 바오로 3세>에 대해서 도전 의식을 가졌을 것이다.” (408쪽)
- “그러나 붓을 가지고 물질의 광택을 표현하는 방법이나 교황의 표정을 포착한 붓질의 정확성에 있어서 티치아노의 수법을 완전히 터득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것이 실물을 묘사한 그림이며 잘 베껴낸 공식 같은 그림은 아님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408쪽)
▲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라스 메니나스(시녀들) Las Meninas>(도판 266, p. 409) ▼
- “사실 벨라스케스의 원숙한 작품들은 붓놀림의 효과와 색채의 섬세한 조화에 대단히 많이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도판만 가지고는 원화가 어떠한지 정확히 알 수 없다. 그의 작품들 중에서 특히 그런 예로 들 수 있는 것이 <라스 메니나스>라고 알려진 높이가 3미터에 이르는 대작(도판 266)이다.” (408쪽)
- “이 그림은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을 알 수 없으나 나는 카메라가 발명되기 이미 오래 전에 벨라스케스는 현실의 한 순간을 화면에 담았다고 상상하고 싶다.” (410쪽)
▲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스페인의 펠리페 프로스페로 왕자>(도판 267, p. 410) ▼
- 벨라스케스는 카메라가 한 순간의 현실을 가감 없이 포착하듯 현실을 그림으로 전환시키는 데만 멈추지 않았다. 도판 267도 “얼핏 보아서는 인상에 남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을 것”처럼 보이는 초상 사진처럼 보일지 모른다. (411쪽)
- 그러나 그의 그림에는 일반 사진처럼 포착된 사물의 세세한 측면을 묘사하기보다는 그 사물을 사물이게끔 하는 ‘인상’(또는 일반자)을 묘사하려는 특징이 잘 드러난다.
- “붉은 의자 위에 앉아 있는 강아지와 같은 작은 모티프조차도 그야말로 기적과 같은 탁월한 솜씨를 드러내 보인다. 얀 반 에이크가 그린 <아르놀피니의 약혼>(도판 160, p. 243)에 나오는 작은 개와 비교해” 보자. (411쪽)
- “반 에이크는 작은 개의 곱슬곱슬한 털 하나 하나를 묘사하는 데 온 정성을 쏟고 있는 반면에, 그로부터 이백 년 뒤의 벨라스케스는 개의 특징적인 인상만을 포착하려고 노력했다.” (411쪽)
- “레오나르도처럼, 아니 오히려 그보다 더 한층 꼭 필요한 것만을 묘사하고 보는 사람에게 상상할 여지를 남겨 놓고 있다. 비록 그는 털을 하나도 그리지 않았지만 그의 작은 개는 사실상 반 에이크의 개보다 훨씬 더 털이 북실북실하고 자연스럽게 보인다.” (411쪽)
- “19세기의 파리에서 인상주의 창시자들이 과거의 어느 다른 화가들보다도 벨라스케스를 존경한 것은 바로 이와 같은 효과 때문이었다.” (411쪽)
▲ 19장의 소결론 ▼
- “자연을 새로운 눈으로 보고 관찰하며 색채와 빛의 새로운 조화를 끊임없이 발견하고 그것을 누리는 것이 화가의 기본적인 과제가 되었다. 유럽의 가톨릭 진영에 살던 위대한 미술가들이나 정치적 장벽의 또 다른 쪽인 신교도의 네덜란드에 살던 위대한 미술가들이나 이 점은 모두 같았으며 이러한 새로운 임무에 그들의 열정을 쏟았다.” (4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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