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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장. 발전하는 시각 세계(17세기 전반기 : 가톨릭 교회권의 유럽)
▲ 바로크 양식의 등장과 특성 ▼
- “르네상스를 뒤이은 양식을 보통 바로크(Baroque)라고 부른다.” (387쪽)
- 원래 바로크라는 말은 포르투갈어나 에스파냐어에서 <비뚤어진 모양의 진주>를 뜻하는 <바로코(baroco)>에서 유래하였다고 하며, 처음에는 곡선을 많이 사용한 장식 과잉의 이 양식을 <불규칙한> <그로테스크한>이라는 부정적이거나 모멸적인 의미로 사용하였다.
- 좀 더 세분화해서 말하자면 바로크는 매너리즘과 로코코 사이의 17세기 문화 전반의 양식을 지칭하며 이는 처음으로 이탈리아가 중심이 되어 시작되었다. 바로크는 <매너리즘>(17세기 비평가들이 16세기 말의 미술가들을 비난하는 데 사용했던 가식과 천박한 모방이라는 본래의 의미 ; 선배들이 사용했던 부조화를 종종 모방했다는 의미)과 <로코코>(결벽증적인 단편성 추구)와는 다르게 전체에 종속되는 부분들의 조화를 통한 균형을 강조하였다.
- 바로크는 프랑스의 고딕양식(즉 중세 고딕양식)이 국제적 성격으로 발전하였던 것처럼 범 유럽적 문화 현상이었다. 그러나 국가나 각 지방 특유의 문화권에 따라 서로 상이하게 나타난다. 즉 하나의 공통분모를 갖기엔 너무 방대하고 다양한 예술 경향이었던 것이다.
- 바로크는 크게 두 종류로 나타나게 된다. 즉 가톨릭적 바로크와 부르주아․프로테스탄트적 바로크로 나뉜다.
- 가톨릭적 바로크는 카라바조의 자연주의로부터 루벤스, 베르니니의 예술에서 나타난다. 부르주아․프로테스탄트적 바로크는 렘브란트와 얀 반 호이엔(Van Goyen, Jan)의 예술에서 나타난다.
- 전자는 감각주의적이고 기념비적, 장식적인 반면 후자는 이보다 더 엄격하고 더 형식을 존중하는 ‘고전주의적’ 양식으로 나타난다. 전자는 14세기 옥캄의 중세 경험론에 기인한 바 크다.
- 가톨릭적 바로크는 로마를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만들려는 로마 교황의 진흥책에서 발단되었으므로 반종교개혁의 유력한 수단이 되어 여러 가톨릭 국가에서는 종래의 종교 그림이나 조각상을 새롭게 하여 종교 미술에 신선한 입김을 불어넣었다.
- 이렇게 해서 나타난 가톨릭적 바로크 미술의 특징은 비고전적, 동적, 남성적, 불규칙적인 성격과 심한 과장성이다(그러나 19세기 중엽의 독일 미술사가들에 의해 바로크란 용어에서 <변칙․이상․기묘함>이라는 부정적 평가는 제거되었다).
- 동시에 가톨릭적 바로크는 귀족들의 표현 수단이기도 하여 화려 호사한 의식을 과시하고 장식하는 구실을 다하였다.
- 이런 화려하고 호사스러운 장식을 바탕으로 한 가톨릭적 바로크 미술은 르네상스 미술에 비해 감동이 넘치는 극적 표현을 특색으로 한다.
- 결론적으로 바로크 미술의 성격은 3가지로 정의될 수 있다.
⑴ 자연주의적 추세를 부활시킨 카라바조는 예술의 원천으로 관념보다 자연의 관찰을 강조했다-가톨릭적 바로크.
⑵ 전성기의 르네상스 고전기와 로마 고대 풍습으로의 복귀였다-부르주아․프로테스탄트적 바로크.
⑶ 필수적이며 가장 지속적인 요소로 베네치아 특히 티치아노의 전통이다. 이러한 전통과 코레조의 예술에서 이탈리아 바로크의 색깔과 빛의 풍요로움이 비롯된다-가톨릭적 바로크.
▲ 자코모 델라 포르타(Giacomo della Porta : 1541?-1602) ▼
- 도판 250(<로마의 일 제수 교회>, p.389)을 보자. 이 교회 건물은 지금으로 보면 별로 대단해 보이지 않지만 세워질 당시인 1575년에는 “대단히 혁명적인 것이었다.” (388쪽) 왜냐하면 이 건물은 “유럽 전역에 걸친 종교개혁에 대항해서 싸우려는 드높은 기대를 걸고 새롭게 설립된 예수회(Jesuits) 교단의 교회”였기 때문이다. (388쪽)
- 이 교회 건물은 이전 중세 시대의 교회 건물들과 비교해 볼 때, 훨씬 더 장식적이고 현란하면서도 나름대로 규칙성을 부여함으로써 교회의 권위를 잃지 않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먼저 이 교회 건물이 중세 시대의 교회 건물들과 비교해 볼 때 훨씬 더 장식적이고 현란한 것은 “이 건물이 고전기 건축의 여러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388쪽)
- 일단 “원주가 틀을 이루고 양 쪽에 작은 현관을 거느리고 있는 중앙의 대현관은” “고대 로마의 개선문(<티베리우스 황제의 개선문>, 도판 74, p.119) 형식을 상기시켜 준다.” (388쪽)
- 또한 “원주(오히려 반원주나 벽기둥에 가깝다)가 아키트레이브를 받치고 있고 그 위로 높은 ‘아티카(attica)’가 있으며 이번에 이것은 또 위층을 지탱하고 있다.” (388쪽)
- 그러나 이전 중세 시대의 교회 건물, 즉 “브루넬레스키의 <파치 예배당>(도판 147, p.226)”, “브라만테가 설계한 <템피에토>(도판 187, p.290)”, “심지어 산소비노의 <산 마르코 교회 도서관>(도판 207, p.326)” (389쪽)과 비교해서 훨씬 더 현란하고 장식적인 이유는 앞서 이야기한 “고전적인 요소들을 하나의 패턴으로 융합시킨 방법을” 볼 때 “로마나 그리스, 심지어 르네상스 건축법까지도 도외시하고” (388쪽) 있기 때문이다.
- 이렇게 도외시하는 특징들은 크게 2가지로 나타낼 수 있다. ⑴ “마치 전체 구조를 보다 호화스럽고 다채롭고 또한 장엄해 보이게 하려는 듯 기둥이나 반기둥이 모두 이중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388-9쪽) ⑵ “이 건축가가 단조로운 중복을 피하고 이중 틀에 의해서 강조된 대현관이 있는 중심부에 초점을 주기 위해 각 부분들을 세심하게 배치한 점이다”(예를 들어 각 현관 문 위에 장식된 부조상은 삼위일체의 형식을 띰으로써 양쪽 작은 현관문의 의미를 잘 드러내고 있다). (389쪽)
- 그런데 ⑵의 특징인 ‘세심한 배치’는 “모든 부분이 전체적인 효과를 이루기 위해 존재”하도록 이루어져 있으며 “모두 하나의 커다랗고 복잡한 형태 속에 융합되어 있다.” (389쪽) “이 건축가가 아래층과 위층을 조화 있게 연결”시키기 위해 “고전 시대의 건축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일종의 소용돌이 형태를 사용했다” (389쪽)는 점을 예로 들 수 있다.
- “사실상 순수한 고전적 전통을 고수하는 사람들이 바로크 건축가들에게 퍼부었던 비난의 대부분은 바로 이러한 곡선과 소용돌이 무늬 때문이었다.” (389쪽)
- 그러나 이 무늬를 빼면 이 교회 건물은 ‘기계적’으로 분할되어 버릴 수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이 무늬는 그 자체로 보면 이상한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건물 전체에 건축가가 의도했던 그런 일관성과 통일성을 부여하고 있다.” (390쪽)
▲ 17세기 회화의 특성 ▼
- “매너리즘의 막다른 골목에서 벗어나 회화가 그 이전 시대의 거장들의 양식보다 더 풍부한 가능성을 지닌 양식으로 발전하게 된 과정은 여러 모로 바로크 건축의 발달사와 비슷하다.” (390쪽)
- “우리는 틴토레토(도판 236, 237 ; pp.369, 370)와 엘 그레코(도판 238, 239 ; pp.372, 373)의 위대한 작품들 속에서 17세기 회화”의 “새로운 이념들”, 즉 “빛과 색의 강조라든가 단순한 균형을 무시하고 보다 복잡한 구도를 선호한다든가 하는 것”들이 “성장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390쪽)
- 그렇지만 “17세기 회화는 매너리즘 화가들의 양식을 단순하게 지속시킨 것만이” 아니라 “거기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하고서 논쟁을 벌였다.
- (그런데 “미술 세계에서의” “논쟁 자체는” 16세기에 처음 일어난 것이었는데, “16세기에는 회화가 조각보다 나은 예술이냐 또는 구도가 색채보다 더 중요하냐 아니면 그 반대인가 하는 식의 문제로 논쟁을 벌였다(예컨대 피렌체 사람들은 구도를 중시했고 베네치아 사람들은 색채를 높이 평가했다).” (390쪽))
- 17세기 논쟁의 쟁점은 다음의 2가지 흐름 사이의 대립과 관련된 것이었다. 즉 한편으로 라파엘로의 단순하고 이상적인 아름다움, 즉 고전주의적인 아름다움의 추구, 다른 한편으로는 추한 것이라 할지라도 추한 그대로의 진실, 즉 본 그대로의 진실 추구였다.
- 이러한 쟁점에 서 있던 두 화가가 있었는데, 그들은 전자와 관련해서는 <안니발레 카라치>, 후자와 관련해서는 <미켈란젤로 다 카라바조>였다.
▲ 안니발레 카라치(Annibale Carracci : 1560-1609) - 이탈리아 볼로냐 출신 ▼
- “매너리즘에 진력이” 났다. (390쪽)
- “안니발레 카라치는 베네치아 파, 특히 코레조 파의 미술을 배운 화가 집안의 일원이었다. 그는 로마에 도착하자마자 그가 대단히 존경했던 라파엘로의 작품 세계에 매료되었다. 그는 매너리즘 화가들이 의도적으로 거부했던 라파엘로의 단순성과 아름다움을 다시 회복시키고자 했다.” (390쪽)
- “당시 그가 속해 있던 로마의 집단이 부르짖은 구호는 고전적인 아름다움의 양성이었다. 우리는 그러한 그의 의도를 죽은 그리스도의 시체를 보며 슬퍼하는 성모를 묘사한 제단화(도판 251, <그리스도를 애도하는 성모>, p.351)에서 찾아볼 수 있다.” (390-1쪽)
- 그뤼네발트가 그린 고통으로 심하게 일그러진 예수(도판 224,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p.351)와 비교해보면 안니발레 카라치는 보는 사람에게 죽음의 공포와 아픔의 고통을 상기시키지 않으려고 아주 세심한 배려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91쪽)
- “이 그림 자체는 초기 르네상스 화가의 그림처럼 구도가 단순하고 조화롭다.” 그러나 “이 그림은 르네상스 회화라고 착각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구세주의 몸 위에서 아른거리는 빛의 묘사 방식이라든가 우리의 감정에 호소하는 표현 방식은 르네상스 양식과는 아주 다른, 말하자면 바로크적이다.” (391쪽)
▲ 미켈란젤로 다 카라바조(Michelangelo da Caravaggio : 1573-1610) - 밀라노 근처 출신 ▼
- “그의 작품은 카라치와는 전혀 달랐다. 카라바조”는 “추한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것은 진실, 즉 그가 본 그대로의 진실이었다.” (392쪽)
- “그는 고전적인 규범을 좋아하지 않았고 또 ‘이상적인 아름다움’이라는 것도 신통치 않게 생각했다. 그는 인습을 타파하고 미술에 대해 아주 새롭게 생각하고 싶어 했다.” 비평가들은 “그를 ‘자연주의자(naturalist)’라고 비난했다.” (392쪽)
- “성 토마를 묘사한 그의 작품(도판 252, <의심하는 토마>, p.392)을 살펴보자.”(393쪽) 이 그림에서는 “카라바조의 ‘자연주의’,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그것을 추하다고 생각하든 아름답다고 생각하든지 간에 자연을 충실하게 묘사하려는 그의 의도”가 잘 나타나 있다고 할 수 있다. (393쪽)
- 이러한 “그의 의도는 아마도 아름다움에 중점을 두는 카라치의 태도보다 더 돈독한 신앙심에서 우러나온 것 같다.” (393쪽) 그의 신앙심은 성경 이야기(“네 손가락으로 내선을 만져보아라. 또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요한복음 20장 27절)(393쪽에서 재인용))에 충실한 것에 기초하고 있는 것 같으며, 이러한 충실함은 성경의 인물들을 아름답게 묘사하기보다는 그 당시에 성경의 인물들, 즉 성인들이 겪었을 고초와 풍상을 그대로 그려내는 것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 이러한 그의 자연주의는 그림에서 성 토마가 예수를 의심하면서 자기 손가락을 예수의 옆구리 상처에 집어넣는 장면, 그리고 성인들의 모습이 풍상을 다 겪은 노동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 카라바조의 자연주의를 곰브리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위대한 예술가였던 그는 그 전의 조토(도판 135, <그리스도를 애도함>, p. 203)와 뒤러(도판 222, <예수 탄생>, p. 347)처럼,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마치 그의 이웃집에서 일어난 듯이 그 자신의 눈앞에 그려보고 싶어 했다. 그리고 그는 이 오래된 성경의 등장인물들을 보다 진실되고 실감나게 표현하기 위해 가능한 한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393쪽)
- “심지어 그가 명암을 다루는 방법도 그의 이러한 효과를 이룩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의 빛은 인체를 우아하고 부드럽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깊은 어둠과의 대조를 생겨나게 하는 눈부시도록 번쩍이는 거센 빛이다. 그러나 그 빛은 이 이상한 장면 전체를 조금도 타협하지 않고 정직하게 드러내 보이고 있다.” (393쪽)
- “안니발레 카라치와 카라바조는 19세기의 유행에서 배제되었으나 20세기에 들어 다시금 그들의 진가를 인정받게 되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당시에 회화에 불어 넣어준 자극과 영향은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다.” (3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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