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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장. 자연의 거울(17세기 네덜란드) (1)

20장. 자연의 거울(17세기 : 네덜란드)

** 부르주아·프로테스탄트적 바로크 **

 

- “네덜란드 북쪽 지방 사람들은” “스페인의 가톨릭 군주에 대항해서 반란을 일으켰”으며, “부유한 상업 도시에” 살았으며 “대부분 신교를 믿었다.” “이들의 태도는 영국의 청교도들”처럼 “경건하고 근면 절약하며 대부분 남쪽 지역의 호사스런 형식을 싫어하”였다. (413쪽)

- 이들은 가톨릭적 “바로크 양식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건축에 있어서조차도 이들은 수수하고 절제된 양식을 선호했다.” 이들은 “새로 완성된 그들 국가의 자부심과 업적을 과시하기” 위하여 암스테르담에 “대규모 시청사를 지시로 결정하였다. 그들이 선택한 모델은 크고 당당하지만 형태는 단순하고 장식도 별로 없는 건축 양식이었다.” (413쪽)

- “앞에서 우리는 신교의 승리가 미친 영향이 건축보다는 회화에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났음을 살펴보았다(p.374).” (413쪽)

- “신교 사회에서 계속될 수 있었던 어떤 회화의 영역 중에서도 제일 중요한 것은, 홀바인의 경우가 잘 증명해 주듯이 마로 초상화 그리기였다. 성공한 많은 상인들은” 부와 직위, 명예, 권력을 가진 자신의 모습이 “들어있는 자신의 초상화를 원했다.” (413쪽)

 

▲ 프란스 할스(Frans Hals : 1580? - 1666) ▼

- “할스는 루벤스와 같은 세대에 속한 사람이었”으며 “그의 부모들은 신교도였”다. (414쪽)

- “도판 269(<성 조지 군단 장교들의 연회>, p.415)는 거의 초창기에 그린 그림으로 그가 이런 종류의 주문 그림을 그릴 때 구사한 빼어난 솜씨와 독창력을 잘 보여준다,” “할스는 처음부터 어떻게 그 유쾌한 순간의 분위기를 전달할지와 그와 같이 의례적인 모임에 어떻게 생기를 불어 넣었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12명의 구성원 개개인을 드러내 보여줘야 하는 목적에 소홀함이 없이 각각의 인물을 너무나 실감나게 묘사하여 과거 우리도 그들을 틀림없이 만났었던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 (414~5쪽)

- 할스가 그린 “수많은 개인 초상화들 중 하나인 도판 270(<피터 반 덴 부르케 초상>, p.417)”을 살펴보자. “할스 이전의 초상화들과 비교해 보면 이것은 거의 스냅 사진처럼 보인다.” (415쪽)

- “약 한 세기 전에 그린 홀바인의 리처드 사우스웰 경의 초상화(p.377, 도판 242)라든가 같은 시기의 유럽의 가톨릭 국가들에서 그려진 루벤스와 반 다이크 또는 벨라스케스의 초상화들과 비교해 보라.” “그들이 그린 초상화들은 모두 생동감이 넘치고 사실적이긴 하지만 주문한 사람의 위엄과 귀족적인 혈통을 암시하기 위해 화가들이 주문자의 자세를 세심하게 배려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할스의 초상화들은 화가가 주문한 사람을 어떤 특정한 순간에 ‘포착해서’ 그의 화폭에 영원히 고정시켰다는 인상을 준다.” (416쪽)

- 이렇게 스냅 사진처럼 순간적으로 포착하여 그리는 그림은 “물감과 붓을 다루는 방법”이 아주 달랐을 것이라 생각된다. “우리는 마치 밝은 색과 어두운 색을 몇 번 붓질해 헝클어진 머리카락이나 구겨진 소매의 모습을 실감나게 묘사하는 그의 빠르고 능숙한 붓놀림을 보는 것 같다.” (416쪽)

- 이러한 “빠르고 능숙한” 붓놀림은 부르주아·프로테스탄트적 바로크의 특징인 단순함, 간결함(동시에 이것은 고대 그리스·로마, 특히 플라톤의 이데아계의 특징이기도 하다. 또한 신플라톤주의의 강한 영행을 받은 근대과학의 기초 또는 출발점이기도 하다)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다.

- 또한 이러한 단순함, 간결함은 부르주아 또는 자본주의 분업·전문화의 기초 또는 토대를 이루게 된다(이것은 바로 뒤에서 다루게 될 미술 영역의 분화와 전문화로 이어지게 된다).

- 다른 한편 “그의 초상화는 초기의 초상화들이 그랬던 것처럼 좌우 대칭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한쪽에 치우쳐 불안정한 것도 아니다. 바로크 시대의 거장들과 마찬가지로 할스도 규칙을 따르지 않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훌륭하게 균형감을 이룩해 내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416쪽)

 

▲ 17세기 네덜란드에서의 회화 영역의 분업·전문화 ▼

- 가톨릭 교회권에서는 화가들이 주로 성경이야기를 소재로 한 제단화를 그려 살았지만 신교를 믿는 네덜란드 북쪽 지역, 즉 부르주아가 지배하는 지역에서는 이러한 그림을 더 이상 그릴 수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거대한 제단화들은 가톨릭교회의 부패와 타락을 상징하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 교회의 주문을 받아 그림을 제작하는 방식은 더 이상 어울리지 않았다. 이제 화가들은 자신들이 잘 그릴 수 있는 그림들을 그려서 시장에서 다른 상품들처럼 팔아야 했다. 이렇게 해서 그림의 특수한 장르를 전문적으로 그리는 전문적인 화가가 등장하게 되었다.

- 특히 “바다 풍경을 전문적으로 그리는 화가들”의 그림은 “영국과 네덜란드가 해상을 제패하던 시대를 말해 주는 귀중한 역사적 문헌으로 간주된다.” (418쪽)

 

▲ 지몬 데 블리헤르(Simon de Vlieger : 1601 - 1653) ▼

- 이 화가는 “바다 풍경을 전문으로 그리는 화가들 중의 한 사람이다.” (418쪽)

- 도판 271(<해풍에 흔들리는 네덜란드 군함과 수많은 범선들>, p.418)을 살펴보자. “이 그림은 네덜란드의 화가들이 바다의 분위기를 얼마나 놀랄 만큼 단순하고 솔직한 방식으로 표현하였는지를 보여 준다. 이들 네덜란드 화가들은 미술사상 최초로 하늘의 아름다움을 발견한 사람들이다.” (418쪽)

- “그들은 그림을 흥미 있게 만들기 위해 극적이거나 시선을 끄는 것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단지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세계의 한 부분을 그렸을 뿐이며 그것만으로도 영웅적인 이야기나 희극적인 테마를 다룬 그림만큼 만족스러울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418쪽)

 

▲ 얀 반 호이엔(Jan van Goyen : 1596 - 1656) ▼

- “그는 헤이그 출신으로 풍경화가 클로드 로랭과 거의 동일한 시대의 사람이었다. 조용한 아름다움이 넘치는 회고적인 정경을 보여주는 클로드의 풍경화(p.396, 도판 255)와 얀 반 호이엔의 간결하고 솔직한 그림(도판 272, <강변의 풍차>, p.419)을 비교해 보는 것은 매우 흥미 있는 일이다.” (418쪽)

- “호이엔은 클로드처럼 고상하고 품위 있는 신전 대신에 소박한 풍차를, 그리고 매혹적인 숲 속의 오솔길 대신에 별다른 특징 없는 자기 고행의 들판을 그렸다. 그러나 반 호이엔은 이처럼 평범한 풍경을 평온한 아름다움이 배어 있는 정경으로 변형시키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는 우리들의 눈이 익은 모티프들을 변화시켜서 우리들의 시선을 아득히 먼 속으로 인도하여 마치 우리들이 제일 좋은 위치에 서서 저녁 햇살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 (헤르메티시즘의 영향이 강하게 보인다.) (419쪽)

- 반 호이엔 같은 거장들의 그림, 즉 “소박한 풍경”을 그린 그림을 ‘픽처레스크(picturesque)’라고 한다. “우리로 하여금 소박한 풍경 중에서 ‘한 폭의 그림” 같은 것을 볼 수 있도록 가르쳐 준 사람은 바로 이 네덜란드 화가들이었다. (4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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