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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칸트의 [판단력 비판](김상현 옮김, 책세상, 2005년) #
- Communism에서의 <자유>는 칸트의 판단력의 기초인 감성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Communism에서의 <자유>는 칸트가 말하는 현존 대상의 질서와 법칙으로서의 개념과 도덕적 선(good)을 넘어서는, 즉 자본주의 질서와 도덕적 선(good)을 넘어서는 감성적인 것과 연관이 있는 것 같다. Communism의 자유로운 개인은 <취미판단에서의 순수한 취미를, 공통감(어쩌면 이것이 자유일 수 있겠다)에 대한 직관력을 가지고 있는 인간>일 수 있겠다.
- (칸트에서의) 정치철학적 의미로서 (칸트의) <개념>은 <국가>(공동체)에 상응한다고 볼 수 있으며 <취미판단>, <공통감>은 <세계 국가(공화국)> 또는 <국가 연합>에 상응한다고 할 수 있다.
- (75쪽) “취미판단이 순수하다면, 그것은 만족이나 불만족을 용도나 목적을 고려하지 않고 대상에 대한 순전한 관조와 직접 결부시킨다.”
--> Commune의 형식을 가장 잘 표현해 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목적성을 배제한 목적성, 즉 대상을 그 자체로 관조하는 것, 다시 말해서 여러 가지 유용성, 기능, 의도 실현 가능성을 배제한 대상 그 자체에 대한 아름다움의 관조가 바로 Commune의 형식이지 않을까 싶다.
- (75쪽) “마음의 능력들이 우리가 아름답다고 부르는 것과 더불어 자유롭게 그리고 무규정적이면서도 합목적적으로 향유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자유로우면서 합목적적인] 향유에서는 지성이 상상력을 위해 활동할 뿐 상상력이 지성을 위해 활동하지는 않는다.”
--> Commune : 아름답다고 부르는 것과 더불어 자유롭게 그리고 무규정적이면서도 합목적적인 것이다.
- (87쪽) “그것이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은 [이를 측정하기 위한] 척도로서 역시 크기를 가지고 있는 다른 어떤 것을 항상 요구하게 된다. 크기를 판정함에 있어서는 단지 다수성(수)뿐만 아니라 단위(척도)의 크기도 중요하고, 또 이 단위의 크기는 항상 다시 그것과 비교할 수 있는 척도로서 다른 어떤 것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현상의 모든 크기 규정은 크기에 관한 절대적 개념을 결코 제공할 수 없고, 언제나 비교 개념만 제공할 수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은 다른 크기를 가지고 있는 다른 어떤 것을 항상 척도로서 요구한다. → 이것은 맑스의 상품 교환을 뜻하고 그 척도는 교환가치를 뜻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어떤 것은 단적으로 크다>라는 것에서 <크다>라는 것은 어떤 척도를 요구하는 비교·상대적인 개념이 아니라 <절대적인> 개념이다. 이 개념은 맑스에게서 <필요한 만큼>이라는 개개인의 욕망과 직결된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필요한 만큼>이라는 개개인의 욕망 개념은 대단히 주관적인 것이지만, 이 주관을 넘어서는 보편성과 절대성(인간 삶을 위한 필요의 충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 비교·상대적인 개념으로서의 <크다> 개념은 수학적·논리적 판단을 위해 사용되는 개념이다.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들의 계열 밖에서 상품 가치의 기준, 척도가 되는 등가형태로서의 화폐, 나아가서는 자본의 역할과 바로 연결될 수 있다. 모든 상품들은 자신의 밖에서 판단의 기준을 확보하게 된다. 이것은 더 나아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소외> 개념으로 이어질 수 있다.
--> 절대적인 개념으로서의 <크다> 개념은 감성적 판단에 사용되는 개념이다. 이것은 모든 판단의 기준을 자신 안에서 확보할 수 있는 사회주의 사회에 적용될 수 있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 (91~92쪽) “물론 사물의 크기에 관한 명확한 개념은 단지 수(물론 무한히 진행하는 수 계열에 의한 근삿값)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이 수의 단위가 곧 척도이며, 그런 한에서 크기의 모든 논리적 평가는 수학적이다. 그러나 척도의 크기는 이미 알려진 것으로 가정되어야만 하므로, 만일 이 척도의 크기가 또다시 다른 척도를 단위로 삼아야만 하는 수를 통해서만 평가된다면, 우리는 결코 제일의 척도 또는 근본 적도를 가질 수 없을 것이며, 따라서 주어진 크기에 관하여 규정된 개념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근본 척도의 크기 평가는 오로지 우리가 그 크기를 직관적으로 직접 포착하여 포착된 크기를 상상력이 수 개념을 현시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다는 데서 성립하는 것임이 틀림없다. 다시 말해 자연 대상들의 크기 평가는 모두가 결국은 감성적인 것이다(즉 주관적으로 규정된 것이지 객관적으로 규정된 것이 아니다).”
--> 이는 화폐의 물신화를 벗겨내는 맑스 사유의 방법과 아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 (134~135쪽) “칸트는 ‘일체의 관심 없이 대상을 판정하는 것’은 곧 ‘상상력과 지성의 자유로운 유희에 있어서 나타나는 마음의 상태’(《판단력 비판》, 29쪽 참조)라고 말하며, 이렇게 상상력과 지성의 일치가 일어나는 경우 이는 필연적으로 만족을 동반하게 되며, 그 만족감을 표시하는 판단, 즉 감성적 판단은 비록 주관적이기는 하지만 만인에 대한 타당성을 요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 상상력과 지성의 자유로운 유희 = 상상력과 지성의 일치
→ 반성 취미에 의한 미의 만족
--> 이러한 상상력과 지성의 관계는 맑스주의에서 토대와 상부구조와의 관계, 자본주의와 그를 넘어서는 공산주의와의 관계로 유비될 수 있겠다.
→ (137~138쪽) “감성적 합목적성은 주관적 측면에서 본다면 인식 능력들 간의 일치로 규정된다. 상상력과 지성이라는 인식의 두 능력은 감성적 판단에서는 상호 대립하면서 통일하는 자유로운 유희의 상태에 놓이게 된다. 이 관계는 이론 인식의 상황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이론 인식의 상황에서는 상상력이 지성을 위해 활동하는 일방적인 관계가 성립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관계에서는 각각의 부분들이 결합해 전체를 이루기는 하되, 각각의 항이 서로에게 원인이자 동시에 결과인 전체 관계를 성립시킨다고 보기는 어렵다. 반면에 감성적 판단에서는 두 인식 능력이 상호 침투하여 동시에 상호 원인이자 결과인 관계를 형성한다. 이때 감성적 주체는 인식 능력들의 자유로운 상호 침투 작용을 합목적적인 것으로 느끼게 되고, 쾌감이 유발되어 그 상태에 몰입하는 관조의 상태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객체로부터의 자유는 주관 자신의 내적·반성적 자유를 가능하게 하며, 이 반성적 자유는 객체적 목적이 없는 자유로운 합목적성으로 규정될 수 있을 것이다.”
→ (138~139쪽) “여기에서 우리는 감성적 합목적성의 두 번째 특징을 발견하게 되는데, 바로 생명감의 고양이다. 즉 인식 능력들의 일치와 조화라는 “감성적 판단은 ‘활력을 불어넣는 것’으로 특징지어질 수 있다.” 이는 사실 칸트 자신이 주장하는 바이기도 하다. 그는 감성적 판단에 있어서의 쾌·불쾌의 감정을 생의 감정이라고 일컬으며(《판단력 비판》, 4쪽), 이 판단에서 성립되는 쾌의 감정이 인식 능력들에 활력을 준다고 말한다(《판단력 비판》, 37쪽). 감성적 합목적성이 생명감을 고양시킨다고 할 때도 우리는 감성적 합목적성의 부정적 규정, 즉 목적 없음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이 생명감의 고양은 물질적 욕구의 충족에서 비롯되는 것도, 실천적 욕구의 충족에서 비롯되는 것도 아니다. 말하자면 자기반성에서만 비롯되는 생명감이다. 바로 이런 측면에서 우리는 미와 예술을 통해 마음을 도야하고 세련된 문화를 지향하되, 목적(억압) 없는 - 일체의 목적은 그 달성을 위해서는 언제나 그 목적에 반하는 것들에 대한 배제를 내포하므로 목적은 곧 어압의 근원이 된다 - 자유로운 문명을 추측해 볼 수 있게 된다.”
- (139~140쪽) “그러므로 형식적 합목적성, 즉 객관의 측면에서 본 감성적 합목적성은 ‘전체-존재Ganz-Sein가 지성에 의한 부분들의 규칙적인 합성을 통해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부분들이 자유롭게 합쳐져서 통일을 이루는 것과 같은 외관을 제시하는 것’이라 하겠다.
감성적 합목적성에 대한 이와 같은 주관적 측면의 규정과 객관적 측면의 규정은 자연스럽게 감성적 경험에 있어서 주·객의 관계를 합목적적으로 표상하게 만든다. 인식 능력들의 일치와 조화 또는 생명감의 고양이라는 주관적 측면은 대상의 형식적 합목적성이라는 객관적 측면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감성적 합목적성은 감성적 주체와 그 주체가 경험하는 세계와의 목적 없는 자유로운 일치로 규정된다. 이는 객체에 투사된 주체의 자기 경험임과 동시에 주체에 투사된 객체의 (또 다른 방식의) 드러남이다. 말하자면 인식 능력들 간의 자유로운 일치가 주관과 객관의 자유로운 조응으로 전환됨을 의미한다. 주체와 객체의 자유로운 상호 조응은 사회적 의사소통의 문제와 관련하여 새로운 지평을 열어줄 수 있는 단초가 된다.”
--> 공산주의 사회는 자유로운 각 개인들의 연합체(어소시에이션)이라는 정의와 아주 흡사하다(감성적 합목적성, 전체-존재).
--> 코뮌 사회 : 목적(사유재산제로 유비) 없는 합목적성, 자유로운 합목적성(또는 필연성, 합법칙성) 또는 무규정적인 규칙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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