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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내용은 들뢰즈.가타리의 <앙띠 오이디푸스>에 대한 세미나에서 공부한 내용을 요약, 정리한 내용입니다. 혹시 부족하거나 잘못 이해한 부분이 있다면 지적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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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앙띠 오이디푸스(들뢰즈․가타리) 1장 1절-4절 #
1. 기계(machine, 제작, 생산)
- 유기체와는 반대의 개념이다. 다시 말해서 헤겔 변증법적 통일의 반대 개념이다.
- 비유기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 불어로는 ça이고, 독일어로는 Es로 나타낸다. 그런데 이것들은 프로이트 개념인 id를 가리킨다.
- 기계는 언제나 분리되고 새로이 구성될 수 있는, 뭐라 규정할 수 없는 요소들의 기계적(비유기적) 구성체이다.
-이런 면에서 기계는 고대 원자론에서 원자들(더 나아가서는 아낙시만드로스의 to apeiron(뭐라 규정할 수 없는 것들, 무한정자))의 구성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이런 점에서 욕망은 자유 개념과 밀접한 연관을 가진다고 할 수 있겠다).
- 또한 이 기계는 연결되고 연접해 있는 기계들의 기계이기도 하다.
2. 욕망
- 이러한 기계를 생산하고, 연결되고 연접되는 기계들의 기계를 생산하게 하는 힘은 욕망으로부터 비롯된다.
- 여기서 생산은 근대의 의식적 주체로서의 Ich(나)가 아니라 욕망이 하는 것이다.
- 그런데 들뢰즈에게서 욕망은 결핍, 결여, 필요로서 나타나지 않는다.
- 그리고 욕망은 들뢰즈에게서 규정할 수 없는 것으로서, 예를 들자면 chaos(카오스) 내에서의 흐름일 따름이다.
- 그러므로 들뢰즈는 프랑스 68혁명을 맑스의 거시적 혁명인 정치경제적 혁명(결여를 메꾸는 반결여의 혁명)과는 다른 혁명으로 본다. 이 68혁명은 결여-반결여를 넘어서는 혁명이다. 들뢰즈는 이것을 『천개의 고원』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욕망하는 기계들은 곧 <기관 없는 신체들>이다.
- <기관 없는 신체들>은 루소의 자연인(원초적 자연인)처럼 어떠한 것도 매개되지 않은 직접태라고 할 수 있다.
- 그런데 욕망으로부터 이러한 기계, 신체 없는 기관은 어떻게 생산되는 것인가?
- 이 문제와 관련해서 들뢰즈는 이 생산 과정에서의 필연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 과정은 우연적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욕망은 자유 개념과 밀접한 연관을 가질 수 있다고 본다.
- 그렇지만 이러한 필연성을 인정하지 않게 되면, 들뢰즈의 욕망 체계는 신화적이며, 신비주의적인 것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것 같다.
3. 이전의 정신분석학의 긍정과 한계
- 긍정 : 무의식의 측면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 한계 : 이 무의식의 측면을 개인적, 성적인 측면으로 한정시켰다는 것이다.
- 그런데 들뢰즈는 무의식의 개인적, 성적인 측면을 사회 전체 측면으로 확대시켰다.
- 들뢰즈는 이전의 정신분석학에서 정신병자 치료의 목적을 사회의 통합으로 보았는데, 이는 제국주의적인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왜냐하면 사회의 통합은 결국 정신병자를 건전한 노동을 할 수 있는 인간으로 만들어서 자본주의 체제에 적응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4. 들뢰즈의 관계 방식
- 들뢰즈의 관계 방식은 <종합의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러한 종합의 방식은 변증법적 관계 방식과 다른 비유기적 방식이다. 이러한 방식은 다음과 같은 순서에 따라 이루어진다.
- 연결적(접속적) 종합 --> 이접적 종합 --> 연접적 종합
- 연결적(접속적) 종합은 und(또, ~그리고)로 연결되는 관계 방식이다. 이 방식은 최초로 관계 맺는 방식이다. 이를 들뢰즈는 <생산의 생산>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종합(생산)의 에너지는 리비도이다.
- 이접적 종합은 entweder ~ or(~이거나 ~이거나)로 연결되는 관계 방식이다. 이 종합은 욕망이라는 흐름의 매끄러운 표면에 자기 자신에 대해 이러저러하게 등록, 기입되는 종합이다. 등록, 기입은 매끄러운 표면에 홈을 파는 것이다. 이를 들뢰즈는 <등록의 생산>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종합(생산)의 에너지는 누멘(본질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이다.
- 연접적 종합은 so~ daß~(그래서 ~이다)로 연결되는 관계 방식인데, 이 종합에서 비로소 주체(그래서 나는 ~이다)가 형성된다. 그런데 이러한 주체는 이접적 종합에서 파여진 홈을 메꾸면서 이루어지는 주체이다. 그런데 이 주체는 일시적, 분열적, 유목적 주체이다. 들뢰즈는 이러한 주체의 생산을 <소비의 생산>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종합(생산)의 에너지는 볼룸타스(자발성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이다.
- 이 주체는 소비의 선택을 통해서 주체로서의 자기를 인식(의식)하게 된다.
- 그리고 이러한 주체는 형이상학적으로 고정된 주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흘러 다니는 주체이다.
- 그런데 이러한 종합 형식의 순서는 『자본』에서의 가치형태의 전개 순서와 매우 유사하다. 연결적 종합은 <단순한, 개별적인 또는 우연적인 가치형태>와 닮아 있으며, 이접적 종합은 <전체적 또는 전개된 가치형태>와 닮아 있고, 연접적 종합은 <일반적 가치형태>와 <화폐형태>와 닮아 있다.
- 여기에서 들뢰즈가 주목하는 것은 바로 개별적이고 우연적인 처음의 단계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런데 이러한 개별적이고 우연한 관계 방식은 인간의 다양한 욕망(사용가치)에 따라 흘러간다. 바로 이러한 것에 또 주목하는 것은 아닐까 한다. 그런데 이렇게 사용가치에 주목하는 것은 맑스에게서는 사회주의의 대안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사용가치 자체에는 어떤 관계성도 포함되어 있지 않으며, 이러한 개별적이고 우연한 상품소유자로서의 개인은 자본주의 사회의 특성이기 때문이다.
- 위에서 말한 이접적 종합과 연접적 종합의 내용을 보게 되면 그 관계 방식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의 전략과 맞닿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자본 그 자체는 모순이 없는 매끄러운 자본의 표면을 원한다. 그런데 자본의 모순에 따라 자본의 저항 주체가 자본의 운동 과정 표면에 홈을 파면서 등록된다. 그러나 이러한 주체는 자본에 의해 호명되고 또 다시 자본에 의해 자본 속으로 포획, 포섭된다. 자본은 소비를 통한 자본의 물신 이데올로기를 통해 그 홈을 메운다. 이는 또한 그람시의 <동의>라는 개념과 연결된다.
(지금 인터내셔널가 모음을 듣고 있다.
올릴 수 있어서 같이 들으면 좋으련만...
인터내셔널가와 영화 <귀향>이 잘 어울릴 것 같다는 느낌^^...)
어제 밤 늦게(?, 8시50분 시작) 씨네 큐브에서 여친과 둘이서 이 영화를 보았다.
감독은 <페드로 알모도바르>인데, 이 감독의 영화는 처음이다.
아니다. <그녀에게>라는 영화를 시디로 본 것 같은 어렴풋한 기억이...
시디 찾아서 다시 봐야겠다.
늦게 영화 보고 나서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는 것도 좀 그렇고...
그냥 내가 본 영화의 느낌을 간단히 적어보려 한다.
이 영화 <귀향>은 <안토니아스 라인>과 좀 비슷하게
여성의 연대, 주체로서의 여성을 그리고 있는 것 같다.
<안토니아스 라인>과 <귀향>은 가부장제의 살인을 통하여
새로운 삶의 양식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우화적이고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것 같다.
이 새로운 삶의 양식은 바로 여성의 연대, 주체로서의 여성의 삶을 통해
보편적인 유적 인간의 삶이 진실로 가능한지를 보여 준다고 하겠다.
보편적인 유적 인간의 삶은 개별적이고 부수적인 삶의 영역을 보편적인 삶의
영역으로, 사회적인 삶의 영역으로 만드는 인간의 삶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귀향>에서 유령으로서 살아온 어머니, 그 어머니의 딸 라이문다와 쏠레,
그리고 라이문다의 딸 파울라, 그리고 아우구스티나와 다른 여성들...
이들은 자본주의 가부장제 사회에서 언제나 개별적이고 부차적인 존재로
언제나 상처 받고 고통 받는 존재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 가부장제의 상징인 남편(아버지)을 살해(?)함으로써
가부장제의 틀을 깨고 새로운 세상을 향한 기초를 마련한다.
그 기초는 여성의 연대, 주체로서의 여성이다.
그런데 여성의 연대, 주체로서의 여성은 어떻게 가능할까?
<귀향>에서는 바로 <모성>을 통해 가능하다고 말한다.
<귀향>에서 모성은 가부장제에서 신비화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인간, 즉 보편적인 유적 인간을 생산해 내는
여성노동의 현실적이고 역사적 결과물이라 생각한다.
모성을 지닌 여성은 그 자체로 자신의 노동을 통해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인간을 생산해 내는 보편성과 유적 인간 본성을 자기 자신 속에
가지고서 현실화시키는 실천적이고 현실적인 주체라고 생각한다.
<귀향>에서 어머니, 라이문다와 쏠레, 파울라, 아우구스티나 등의 여성들은
바로 자기 자신 안의 보편성과 유적 인간 본성을 가부장을 살해하고 공범이
되는 과정 속에서 서로 확인한다.
그리하여 서로가 서로를 돌보며, 서로에게서 인간임을 확증한다,
사랑의 이름으로...
그들에게는 어떠한 일도 개별적 개인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공동체적인 것이다.
내가 이 영화를 보면서 느끼고 생각해 본 것을 내 맘대로 적어 보았다.
어쩜 또 오바하고 있는 걸까^^...
덧글> 내가 이 영화를 보고 이런 느낌과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은
여러 여성의 영향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여성 분들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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