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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10/04
    서양 고대 그리스 철학-1.
    곰탱이
  2. 2007/02/24
    앙띠 오이디푸스(들뢰즈와 가타리) 1.
    곰탱이
  3. 2006/10/26
    <귀향>(Volver)
    곰탱이

서양 고대 그리스 철학-5.

 

(6) 피타고라스학파


피타고라스학파는 순수한 학문적 학파라기보다는 종교적 학파에 가까웠다. 이 학파는 수적 조화(황금 비율, 하나(一)와 여럿(多), 음수와 양수, 홀수와 짝수 등)와 윤회설을 믿었고, 금욕적인 생활을 하였다. 이 수적 조화에 의해서 고대 그리스에서는 기하학이 엄청나게 발달하였다. 이 학파 초기에는 귀족들만이 이 학파의 일원이 될 수 있었고, 평민은 될 수 없었다(귀족들이 대 토지 소유 귀족들이었고 그리하여 토지는 거의 대부분이 귀족들의 소유였다. 그리고 토지의 정확한 분을 통한 토지 소유는 귀족들의 관심사였고, 이것이 기하학을 엄청나게 발달시킨 주 요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대적으로, 사회적으로 빈부의 격차가 점점 심해지고, 사회 혼란이 상당할 것으로 예상되던 시기에 사회적 혼란을 종교적으로 극복해 보고자 노력한 학파가 또한 피타고라스학파였다. 

이 학파 역시 <다(多)의 공존>을 꾀하였는데, <수적 조화>를 사회의 상황에 적용시켜 <사회적 조화>를 꾀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던 당시의 일반 평민에게도 이 학파의 일원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다시 말해서 일반 평민의 고통을 함께 경험함으로써 그 고통을 나누고자 하였고, 따라서 사회적 조화를 꾀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 고통은 디오니소스적 고통과 오르페우스적 고통으로 표현된다.

디오니소스는 반신반인(半神半人)으로서 아버지는 제우스신이고 어머니는 인간이다. 어느 날 제우스는 자신의 본처인 헤라 몰래 지상에 내려왔다가 지상의 이름모를 아름다운 여인에게 반한다. 그래서 그 여인과 하룻밤을 같이 지냈는데, 그 결과로 태어난 것이 디오니소스였다. 헤라가 매우 질투심이 강한 여신이라서 제우스도 함부로 그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는데, 그 때문에 제우스는 헤라 몰래 디오니소스를 자신의 허벅지 속에 감춘다. 그러나 헤라는 제우스가 바람을 핀 것을 눈치 채고는 디오니소스의 생모를 갈기갈기 찢어 죽인다. 그러나 다행히 디오니소스는 헤라의 눈을 피하게 되고 자신의 아버지인 제우스의 허벅지 속에서 크게 된다. 더 이상 제우스의 허벅지에서 클 수 없었던 디오니소스를 제우스는 디오니소스의 생모의 여동생 부부에게 맡겨져 크게 된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게 된 헤라는 디오니소스를 직접 죽이는 대신에 디오니소스의 양부모(디오니소스 생모의 여동생 부부)를 디오니소스가 보는 데에서 생모처럼 갈기갈기 찢어 죽인다. 이를 본 디오니소스는 정신이 나갔다 들어왔다 하는 고통을 겪게 된다. 이러한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디오니소스는 집을 떠나지만, 그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정신이 나갔을 때 디오니소스는 지나가는 사람 아무를 붙잡고서 그를 도끼로 갈기갈기 찢어 죽인다, 생모가 헤라에게서 죽임을 당했던 것처럼. 그러다가 다시 정신이 돌아오면 자신이 헤라와 같은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는 죄책감이 더해서 더 극심한 고통을 겪게 된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디오니소스는 결국 자살을 하게 된다. 제우스는 이런 디오니소스를 불쌍히 여겨 신의 반열에 올려놓는다. 이 신이 바로 이른바 축제의 신, 술의 신인 바쿠스(박카스)이다.

오르페우스는 자신의 아내인 에우리디케와 금실 좋게 살고 있었다. 그런데 이 둘의 금실이 너무 좋아 신들의 노여움을 샀고, 결국 에우리디케는 독사에 물려 죽게 되고 하데스가 지배하고 있는 지하 세계(저승 세계)로 끌려가게 되었다. 오르페우스는 너무 슬픈 나머지 지하세계로 내려가게 되었다. 지하세계로 내려간 오르페우스는 자신의 아내인 에우리디케를 돌려달라고 하데스에게 간청하였다. 하데스는 오르페우스의 간청을 듣고 에우리디케를 돌 주겠다고 오르페우스에게 약속하였다. 그런데 거기에는 전제조건이 있었다. 그것은 오르페우스가 지상 세계로 나갈 때까지 절대로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상 세계의 문 앞에 거의 다 왔을 때 오르페우스는 자신의 아내인 에우리디케가 잘 오고 있는지 궁금한 나머지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때 에우리디케는 지하 세계로 다시 끌려 가게 되었고 오르페우스는 너무나 상심하였다. 그 이후에 오르페우스는 오로지 에우리디케만 생각하고서 하프 연주만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하프 연주가 너무 애절하고 아름다워서 트라키아 처녀들의 혼을 온통 빼 놓았다. 트라키아 처녀들은 오르페우스의 마음을 사로잡고자, 그래서 청혼을 하고자 하였으나, 오르페우스에겐 오직 에우리디케만 있었을 뿐 트리키아 처녀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트라키아 처녀들은 이에 분노하여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는 심정으로 오르페우스에게 동시에 달려들었다. 그리하여 오르페우스의 몸을 갈가리 찢어 놓았고 저마다 오르페우스의 신체 일부분을 차지하였다. 남아 있는 것은 오르페우스의 에우리디케에 대한 영혼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머리만 남게 되었다. 트리키아 처녀들은 이 오르페우스의 머리를 바다에 던져 버렸다. 바다에 던져진 오르페우스의 머리는 바다를 동동 떠다니다가 <레스보스>라는 섬에 떠밀려 왔다. 이를 불쌍히 여긴 무우사들(음악의 여신들)이 오르페우스의 머리를 양지 바른 곳에 묻어 주었다. 그런데 이 무덤에서 다시 애절하고도 아름다운 하프 연주가 흘러 나오기 시작하였다. 이 소리는 바드를 건너 세계 곳곳에 퍼지게 되었고 세계 곳곳의 처녀들이 이 소리를 듣고 구름처럼 몰려들게 되었다. 이 섬은 금남의 왕국인 여인들의 왕국이 되었다. 이로부터 레스비언(여인들의 왕국인 레스보스 섬에 사는 사람들, 여성 동성애자)이라는 말이 생겨나게 되었다.

당시의 일반 평민들의 고통을 신화에 나오는 디오니소스와 오르페우스의 고통에 비유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유를 통해서 일반 평민들의 고통을 분담하여 사회적 조화를 꾀하고자 했던 피타고라스학파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사회적 불평등이 하나의 종교적 단체의 노력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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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고대 그리스 철학-4.

 

(5) 원자론자들


파르메니데스와 같은 대 토지 소유 귀족들이 지배하던 귀족 정치 체제 아래에서 빈부의 격차는 심해지고, 인간의 자유는 억압당함으로써 사회가 점점 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런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민주주의자들의 목소리가 커지게 되었는데, 이러한 민주주의자들의 사상적 토대가 되었던 것이 데모크리토스를 위시한 원자론자들이었다(사실 원자론자도 상인이 주도적이었던 상민(常民) 계급을 대변하였던 민주주의자들이었다).

원자론자들은 위에서 말한 아낙시만드로스(아낙시만드로스도 민주주의자였다)와 헤라클레이토스의 영향을 상당히 받았다. 그리하여 <물질적 요소와 그 물질적 요소들 간의 운동>이라는 생각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원자론자에게 있어 물질적 요소는 원자이다. 원자는 무수히 많은데, 이는 아낙시만드로스의 4가지 요소를 벗어나기 위한 것이다. 초기 원자들의 속성은 크기, 모양밖에 없었다. 그러나 크기, 모양만으로는 운동을 설명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후기 원자들의 속성은 크기, 모양 이외에 무게가 첨가되었다. 이러한 원자의 개념은 근대 이후의 자연과학에서의 <원자> 개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원자론자들은 원자들의 운동을 수직 자유 낙하 운동으로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운동을 위해서는 빈공간이 필요했는데 이 당시에는 빈공간이 <없는 것>으로 생각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좌우의 운동은 가능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빈공간은 근대에 와서야 <있는 것>으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수직 자유 낙하 운동만으로는 만물의 발생을 설명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만물의 발생은 원자들의 결합과 분리에 의한 것인데, 수직 자유 낙하 운동으로는 원자들이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원자론자들은 수직 자유 낙하 운동을 수직과 거의 같지만,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의 사선을 그리며 빗겨 내리는 자유 낙하 운동으로 수정하였다. 이때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의 사선은 이후에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로 설명되었다. 그리고 근대 이후에는 이 자유의지의 현실태, 즉 현실적인 실천 활동으로서 노동으로 설명되었다.   

그런데 <있는 것>으로 꽉 차 있는 곳에서 어떻게 수직 자유 낙하 운동이 아닌 운동이 가능한가? 예를 들어 만원 버스나 지하철에서 우리는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가? 이러한 물음에 대해서 원자론자들의 답변은 물에서의 물고기의 유영(헤엄)에 비유된 것이었다. 이것은 상당히 궁색한 답변이다. 물에서의 물고기에 비유한 답변은 하나의 메타포어(비유)일 뿐이지 논리적인 답변이 아니기 때문이다.

원자론자들의 이론은 처음부터 결함이 많았다. 이는 지배 계급인 대 토지 소유 귀족들의 지배 사상인 파르메니데스 이론에 대해 대항하기엔 상당히 무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인데, 다시 말하자면 여전히 지배 계급의 사상이 새로운 사상을 압도할 만큼 주도적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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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고대 그리스 철학-3.

 

(3) 헤라클레이토스


이런 아낙시만드로스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헤라클레이토스가 등장한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아낙시만드로스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아낙시만드로스의 <몇 가지 다양한 물질적 요소>를 제거하고, 이 물질적 요소를 추상화하여 이 요소들 모두를 다 포괄할 수 있는 하나의 정신적 요소(우리는 일상적으로 물질적인 것과 반대되는 것으로 정신적 것을 이야기한다)를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어떤 다른 물질적 요소를 이야기한다 할지라도, 그 물질적 요소는 아낙시만드로스가 말한 물질적 요소와 다를 바 없는 물질적 요소이기 때문에, 결코 아낙시만드로스를 넘어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헤라클레이토스는 이 정신적 요소를 <>로 비유한다. 그리고 이 <불>이 적절하게 타오르고 사그라짐으로써 만물이 발생하게 된다고 말한다. 불이 적절하게 타오르고 사그라짐은 물질적인 대립 쌍들의 운동을 모두 포괄하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이것을 정치 체제와 연관시켜 보면 다음과 같다. 아낙시만드로스가 이야기하고 있는 민주주의는 결국 <사공이 많아 결국 배가 산으로 올라가는 격>이라 많은 혼란을 줄 수 있다. 그러므로 많은 이해 관계를 조정하고 조화시켜 줄 강력한 중앙 국가 기구가 필요로 하게 된다. 그럼으로써 <다(多)의 공존>이 이루어질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국가 기구가 바로 <불>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불>은 헤라클레이토스 말년에 가면 <Logos(영혼, 이성, 정신)>로 변하게 된다. 그리하여 헤라클레이토스에게서는 아낙시만드로스의 <몇 가지 다양한 물질적 요소와 그 요소들 간의 운동> 중에서 <몇 가지 다양한 물질적 요소>는 사라지게 되고, <운동>만이 남게 된다. 그 <운동>은 <불이 적절하게 타오르고 사라짐>으로 표현된다.


(4) 파르메니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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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구체적인 현실 세계>               <현실 세계를 추상화시킨 세계>



파르메니데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생각을 극단적으로 밀고 나간다. 그래서 헤라클레이토스가 아낙시만드로스에게서부터 계승했던 <운동> 요소까지도 제거한다. 파르메니데스가 <운동>의 요소까지도 부정하는 이유는, 파르메니데스가 대(大) 토지를 소유한 귀족 출신이고, 그렇기 때문에 대 토지 소유 귀족으로서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사회 변화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파르메니데스는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의 모순율을 바탕으로 헤라클레이토스의 <운동> 요소를 비판한다. 다시 말하자면 <있는 것>은 <있는 것>일 뿐이지 <없는 것>이 아니고, <없는 것>은 <없는 것>일 뿐이지 <있는 것>이 아닌데(이것이 형식 논리상의 모순율이다), 헤라클레이토스의 <운동>은 <있는 것>이 <없는 것>이 되도록 하고, <없는 것>을 <있는 것>이 되도록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운동>이란 <변화>를 뜻하고, 그 <변화>란 <있는 것>을 <없는 것>으로 만들기도 하고,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운동>을 말하게 되면, 이러한 형식 논리상의 모순율을 범하게 된다는 것이다.

파르메니데스는 이것을 위의 도식를 통해 설명하고자 한다. <우리의 구체적인 현실 세계>는 사람, 물, 나무, 소, 말, 개 들이 서로 구별되어 있는 세계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은 구체적인 물질적인 것인데, 그것을 추상화하면, 이것들 모두는 <있는 것>(유식한 말로는 “존재”라고 말한다)이다.

그러면 <있는 것>들의 세계인 <현실 세계를 추상화시킨 세계>를 살펴보자. 여기서 <있는 것>들은 서로 구별되고 있는데, 그 구별되는 경계선은 <있는 것>일까, 아니면 <없는 것>일까? 먼저, 그 경계선이 <있는 것>이라는 주장을 살펴보자. 만일 그 경계선이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있는 것>들 사이의 구별은 없어지게 되고, <우리의 구체적 현실 세계>는 그 어떤 구별도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나 말이나 개나 소나 구별되지 않는 똑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면 현실세계는 혼란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그러니 그 경계선은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면 <헨실 세계를 추상화시킨 세계>는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즉 <있는 것>-<있는 것(경계선)>-<있는 것>-<있는 것(경계선)>……, 이런 연쇄 사슬로 이어질 것이다. 따라서 <현실 세계를 추상화시킨 세계>는 어떤 구별도 없는 <있는 것>으로 가득 찬 세계가 된다. 그러니까 ‘<있는 것>으로 가득 찬 세계에 어떻게 <운동>이라는 것이 가능한가’라고 파르메니데스는 반문한다.

다른 한편, 그 경계선이 <없는 것>이라는 주장을 살펴보자. 만일 그 경계선이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첫 번째 주장과 같은 모순에 접하게 될 것이다. 실제로 <있는 것>들을 구별시켜 주는 그 경계선은 <없는 것>이어야 한다. <있는 것>-<없는 것(경계선)>-<있는 것>-<없는 것(경계선)>……, 이런 연쇄 사슬로 이루어져야 있는 것들을 구별시켜 줄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주장하게 되면, 그 역시도 똑같은 모순에 빠지게 된다. <없는 것>은 <없는 것>이므로 <있는 것>들의 연쇄가 이루어지게 되고, 그리하여 <현실 세계를 추상화시틴 세계>는 또한 어떤 구별도 없는 <있는 것>으로 가득 찬 세계가 된다. 따라서 여기에서도 ‘<운동>이란 없다’고 파르메니데스는 말한다.

<우리의 구체적인 현실 세계>를 머릿속에서 사고(생각)로 반영하는 <현실 세계를 추상화시킨 세계>에서 <운동>이란 요소가 아예 없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우리의 생각 중에는 <운동>이라는 관념(개념)이 아예 없기 때문에, <우리의 구체적인 현실 세계>에서도 <운동>이란 요소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이다.

이것을 정치 체제와 연관시켜 보면 다음과 같다. 헤라클레이토스에게서 강력한 중앙 국가 기구가 있다고 해도, 이해(利害) 관계를 바탕으로 한 여러 계층, 집단들이 서로 그 중앙국가 권력을 잡기 위해 투쟁(다툼)이 일어난다면, 그 투쟁(다툼) 때문에 사회는 혼란해질 것이고, 따라서 <다(多)의 공존>은 이루어질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 투쟁은 곧 헤라클레이토스의 <운동>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투쟁(운동)의 요소가 있어서는 안 된다. 그 투쟁(운동)이 없어야만 <다(多)의 공존>을 이룰 수 있다고 파르메니데스는 말한다. 

파르메니데스에게서는 아낙시만드로스의 <몇 가지 다양한 물질적 요소와 그 요소들 간의 운동> 모두가 부정된다. 파르메니데스에게 세계는 온통 <있는 것> 하나로 가득 차 있다. 이런 것 때문에 그 당시에도 “돈이 다다”라는 물질 만능주의가 횡행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돈, 즉 부(副)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대 토지 소유 귀족으로 대표되는 ‘귀족 정치 체제(귀족정)’말고는 어떤 정치 체제도 용납될 수도, 또한 용납할 수도 없다는 것이 파르메니데스의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있는 것>(귀족정)에는 어떤 <운동>의 요소(권력과의 투쟁, 그리고 그 투쟁을 통한 사회 변혁)도 없기 때문이었다.

파르메니데스에게 와서야 물질(존재)-정신(사유)이라는 이분법적 구별이 확연히 드러나고, 또한 정신이 물질보다 우위에 있고 고귀한 것이고, 본질적인 것이며, 따라서 물질이 정신으로 환원되는, 다시 말하자면 <우리의 구체적 현실 세계>(물질)를 <현실 세계를 추상화시킨 세계>(정신)에다 꿰어 맞추는 일이 처음으로 비로소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존재와 사유가 일치하는 일원론적인 세계관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것을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세계에 비유해 보면, 돈(자본)에 우리의 모든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삶을 꿰어 맞추는 것과 유사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파르메니데스는 <운동>과 그 운동의 토대인 <물질 세계>를 부정함으로써 구체적인 현실 세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였고, 나아가서 인간 역사 발전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다. 다시 말하자면, <있는 것> 역시도 <물질 세계>의 <운동>의 생산물임을 파악할 수 없었고, <있는 것>을 단지 모든 것의 전제로 삼았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있는 것>은 역사적으로 <없는 것>으로 사라지기도 하고, <없는 것>도 역사적으로 <있는 것>으로 생성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배가 고프다가도 부르기도 하고, 부르다가도 고프기도 한다. 고프다는 것은 위에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고, 부르다는 것은 위에 어떤 것이 차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현실적인 모든 것의 삶의 기본 과정이라는 것을 파르메니데스는 잊어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A는 not A(~A)]이고, [not A(~A)는 A]이며, 결국 [A는 A이면서 동시에 not A(~A)]라는 변증법의 기본 원리를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정치 체제와 연관해서 보자면, 인간의 삶이 발전하고 복잡해질수록, 그 발전되고 복잡한 삶의 양식을 담아낼 수 있게끔 정치 체제도 변화해야 한다는 사실을 파르메니데스는 자신의 계급 이익 때문에 미처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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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고대 그리스 철학-2,

 

** 고대 그리스(희랍) 사상 **


위의 신화의 내용과 의미에 대해서 비추어 보면, 서양 고대 그리스(희랍) 사상의 근본 물음은 세계가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물음이 아니라, 세계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하는 물음이다. 왜냐하면 신화에서는 <다(多)의 공존>을 문제 삼고 있기 때문에, 세상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며 사는 것이 관심사이고, 이런 관심사가 서양 고대 그리스(희랍) 사상에 고스란히 녹아 있기 때문이다.


(1) 탈레스


탈레스는 이오니아 지방에서 발생한 최초의 철학 학파인 이오니아(또는 밀레토스) 학파의 선구자이다. 그런데 탈레스는 위에서 말했던 것처럼 세계가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가에 대한 관심보다는 세계가 무엇으로 이루어졌는가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탈레스는 세계가 물(水, water)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다. 탈레스가 세계가 물로 이루어졌다고 말하는 까닭은 그의 직업이 항법사였기 때문이다. 항법사란 직업은 배의 물길을 살피는 직업이고, 여러 다른 지역과 나라를 돌아다니는 직업이기 때문에, 그의 삶 자체가 늘 물과 직접적으로 관련돼 있다. 그리하여 탈레스는 세계가 물(水, water)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했다.


(2) 아낙시만드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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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낙시만드로스는 신화를 바탕으로 해서 <최초로 과학적인 세계관>을 확립한 철학자이다. 아낙시만드로스는 해상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상인 계급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 이오니아 지방의 출신이다. 대토지를 소유하고 있던 귀족들이 귀족 정치 체제를 주장하고 옹호했던 반면에, 상인 계급들은 민주주의를 주장하고 옹호하였다. 아낙시만드로스 역시 민주주의를 주장하고 옹호하였다. 그는 민주주의가 <다(多)의 공존>을 위한 최선의 정치 체제라고 생각하였다. 그러한 결과로 나타난 것이 위의 도식에서 설명되는 것이다.

아낙시만드로스는 신화에 근거해서 최초로 <무한정자(한정되거나 규정되지 않은 것. 산화와 비교해 보면 Chaos(혼돈)과 같은 것이다), to apeiron>를 상정한다. 그리고 그 <무한정자>로부터 최초의 자연질서라고 할 수 있는 <온․냉․건․습>의 4가지가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이 4가지로부터 만물이 발생하게 된다. 그런데 이 4가지로부터 만물이 발생하는 과정에는 근본적으로 <불의>가 도사리고 있다.

신화에 따르면, <다(多)>가 <공존>하기 위해서는 신들이 본래부터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영역만을 관장할 뿐 다른 신의 영역을 간섭하거나 침해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만일 이러한 간섭이나 침해가 있게 될 경우, 신들의 <다(多)의 공존>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다(多)의 공존>을 위해서 <복수의 여신>인 <Nemesis>에 의해 복수가 이루어진다. 신화에서 <복수>란 이러한 간섭이나 침해 이전의 본래의 상태로 되돌아감을 뜻한다.  

그런데 <온․냉․건․습>의 <온․냉>이라는 대립 쌍의 상호 작용과 <건․습>이라는 대립 쌍의 상호 작용, 그리고 이 두 대립 쌍 자체의 상호 작용이 없다면 만물은 발생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늘을 봐야 별을 딴다’는 옛말도 있듯이, 남성과 여성의 관계 작용이 없으면 새로운 세대가 태어날 수 없듯이, 서로간에 어떤 상호 작용이 없으면 아무 것도 생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만물이 태어나려면 최초의 자연 질서라고 할 수 있는 <온․냉․건․습>의 서로간의 상호 작용이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해서 태어난 만물은 그 자체 불의를 가지고 태어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신화에 따라 복수를 당하여, 만물은 최초의 자연 질서인 <온․냉․건․습>으로 되돌아가게 된다(이는 기독교의 원죄설과 아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아낙시만드로스의 세계관은 <몇 가지 다양한 물질적 요소와 그 물질적 요소들간의 운동>이라는 것이 전제되어야만 성립될 수 있다.

그런데 아낙시만드로스의 이 세계관은 나름대로의 한계를 가지고 있다. 아낙시만드로스는 <온․냉․건․습>으로부터 만물이 발생한다고 했다. 그런데 <온․냉>, <건․습>과 같은 대립 쌍은 무수히 많다. <크고 작음>, <많고 적음>, <아름다움과 추함>, <높고 낮음>, <무겁고 가벼움> 등등……. 아낙시만드로스는 <온․냉>, <건․습>의 대립 쌍으로부터 이 이외의 다른 모든 대립 쌍들이 어떻게 생겨나는지를 전혀 설명하지 못한다. 다시 말하자면 <대립 쌍>이라는 동일한 존재 지위에 있는 모든 대립 쌍들 중에서 오로지 <온․냉>, <건․습>만이 필연적으로 <최초의 자연 질서>로 될 만한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아낙시만드로스가 <온․냉․건․습>만을 <최초의 자연질서>로 삼은 것은 <탈레스>의 영향을 상당히 받아서인 것으로 보인다. 물은 대체로 따뜻함, 차가움의 속성을 가지고 있고, 또한 물이 많으냐, 적으냐에 따라서 습기가 많다고 하거나 건조하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민주주의 정치 체제와 연관시켜 보면 다음과 같다. 사회가 발달하고 복잡해질수록 다양한 직업들과, 이에 따라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생겨나게 된다. 그런데 사회가 발전하고 복잡하기 이전의 단순한 사회 상태에서 나타난 대표자들(이 대표자들이 곧 <온․냉․건․습>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 대표자들이 불의를 저지르게 되면 만물로 표현되는 사람들 중에서 새로운 대표자를 뽑게 된다. 이것이 위에 나타난 아낙시만드로스의 도식으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의 계층 영역은 얼마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의 발전에 따라 더 많이 생겨난 작업과 계층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해 관계를 대변하기 위하여, 자신의 대표자를 뽑아 의회에 보내고자 할 것이다. 이렇게 되었을 때, 위에 나타난 아낙시만드로스의 도식으로서는 이러한 다양한 이해 관계를 조정하거나 만족시킬 수 없게 된다. 급기야는 <사공이 많아져 배가 산으로 올라가는 식>의 사회 혼란이 일어날 수 있게 된다. 그러면 <다(多)의 공존>은 무너지게 된다. 이것이 바로 <몇 가지 다양한 물질 요소와 그 물질 요소들 간의 운동>을 전제하고 있는 아낙시만드로스의 세계관이 가지고 있는 한계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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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고대 그리스 철학-1.

** 이것은 학생들과 철학사를 공부하기 만들었던 강의안 교재입니다.

왜 이걸 여기에 올리느냐고요?

다 아시면서^^...(이걸 배트께서 날로 먹는 포스팅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저도 날로 먹을까 해서요^^...)

하루에 하나씩 올리면 일 주일은 올릴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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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 고대 그리스 철학 #


# 헤시오도스의 우주 생성 신화 #


 

 

 

Chaos(혼돈)

 

 

 

 

 

 

 

 

 

 

 

 

 

 

 

 

 

 

 

Gaia(땅)

 

Eros(사랑, 조화)

 

Nyx

(밤, 공기)

 

 

 

 

 

 

 

 

Uranos(하늘)

 

 

 

 

 

 



Gaia(땅)

 

 

Uranos(하늘)

 

 

 

 

 

 

 

 

 

 

 

 

 

 

 

 

 

 

 

 

 

 

Kyklopos(외눈박이 신)

 

 

Titan(거인신족)




 

Rhea

(거인신족 계열신)

 

 

Chronos

(거인신족 막내신)

 

 

 

 

 

 

 

 

 

 

 

 

 

 

 

 

 

 

 

 

 

Zeus(하늘)

 

Hades(지하세계)

 

Poseidon(바다)




 

 

Zeus(하늘)

 

 

Themis(법의 여신)

 

 

 

 

 

 

 

 

 

 

 

 

 

 

 

 

 

 

 

 

 

 

 

 

 

 

 

 

 

 

 

 

 

 

 

 

 

 

 

 

 

Horai(계절의 여신)

 

 

 

Moira(운명의 여신)

 

 

 

 

 

 

 

 

 

 

 

 

 

 

 

 

 

 

 

 

 

 

 

 

 

 

 

 

 

 

 

 

 

 

 

 

eumonia

(질서)

 

dike

(정의)

 

eirehe

(규율,평화)

 

cleito

(분리,계획)

 

cachesis

(분배)

 

atropos

(분배감시)


위에 그려진 도식은 헤시오도스의 우주 생성 신화의 발생을 개략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우리가 이 신화를 살펴보는 까닭은 서양 고대 사상이 어떻게 발생하였고, 그리하여 서양 고대 사상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줄 수 있을 것인가를 따져봄으로써, 이 고대 사상이 오늘날 혼란스러운 우리의 삶에 어떤 한 이정표를 제시해 줄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그럼 먼저 이 도표를 살펴보도록 하자.

이 신화에서는 한정되어 있고, 규정되어 있어 서로가 구별될 수 있는 이 세계가 나타나기 전에, 먼저 한정되어 있지 않고, 규정되어 있지 않으며, 서로 구별될 수 없이 마구 뒤섞여 있는 Chaos(혼돈)의 상태가 있다고 말한다. 이 Chaos(혼돈)의 상태에서 최초의 자연 질서라고 할 수 있는 Gaia(땅, 대지), Eros(사랑, 조화), Nyx(Erebos)(밤, 공기)가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Gaia(땅, 대지)로부터 Uranos(하늘)가 나타나게 된다(** 우리는 대체로 거의 아무런 의심 없이 남성이 하늘, 여성이 땅이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다. 그런데 이 신화를 보게 되면, 하늘(남성)은 땅(여성)으로부터 생겨난 것임을 알 수 있다).

다시 Gaia(땅, 대지)와 Uranos(하늘)가 결합하여 최초의 신(神, God)이라고 할 수 있는 Kyklopos(외눈박이 신)를 낳게 되었다. 그런데 Kyklopos(외눈박이 신)가 워낙 못생겨서(Kyklopos의 모습이 그 자체 세상에 위협을 줄 정도의 무기였다는 소문이 자자하였단다*^^*...) 태어나자마자 Gaia(땅, 대지)가 Kyklopos(외눈박이 신)를 다시 자기 자신의 뱃속으로 집어넣었다고 한다. 그리고는 다시 Titan(거인 신족 ; 영어로는 ‘타이탄’이라고 한다) 계열의 신들을 낳았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상식을 뒤집을 만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보통 우리가 사는 세계가 신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사실 이런 생각은 서양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이후에 더욱 확고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신화에서 보면, 신이 세상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최초의 자연 질서인 Gaia(땅, 대지)와 Uranos(하늘)의 결합으로부터 신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고대 서양인들의 생각을 빌리자면, 신은 자연인 인간으로부터 만들어졌다는 것, 즉 신이란 인간의 머릿속에서 만들어진 생각의 생산물이라는 것이다.

Titan(거인 신족) 계열의 신 중에서 여신인 Rhea와 남신 들 중에서 가장 막내신인 Chronos가 결혼하여 우리의 귀에 낯익은 신들인 Zeus(하늘), Hades(지하세계), Poseidon(바다) 등등을 낳게 된다. 그런데 이 Chronos는 자신을 낳아준 아버지 Uranos(하늘)의 성기를 거세시키고, 아버지가 가지고 있었던 세계에 대한 지배권을 빼앗게 된다. 그리하여 이 Chronos에게서 비로소 ‘신에 의한 세계의 지배’가 이루어지게 된다.

아버지의 세게 지배권을 찬탈한 Chronos에게는 또 다른 고약한 면이 있었다. 즉 자식을 낳자마자 곧바로 잡아먹는다는 것이다. Hades(지하세계)나 Poseidon(바다) 모두 역시 아버지인 Chronos에게 잡혀 먹혔다. 이것을 본 Rhea는 하도 기가 막혀서 마지막 자식인 Zeus를 Chronos 몰래 Gaia에게 맡기고 집채만한 커다란 바위를 보자기에 싸서 Chronos에게 가져간다. 그리고 Chronos에게 보자기에 싼 것을 건네주며, 이것이 방금 낳은 자식이라고 말한다. Chronos는 아무런 의심 없이 그 보자기에 싼 것을 그대로 집어삼킨다. 집채만한 바위를 삼킨 Chronos는 꼼짝도 하지 못하게 된다. 그 후에 시간이 흘러 Zeus가 청년이 되어서 자기 아버지인 Chronos의 배를 가르고 자신의 형, 누나들을 꺼내게 된다. 이렇게 해서 Zeus를 비롯한 올림푸스 산의 신들과 거인 신족 계열의 신들의 10년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물론 이 전쟁에서 Zeus를 비롯한 올림푸스 산의 신들이 승리를 하게 된다.

그런데 Chronos가 자기 자식들을 잡아먹었던 것은 자기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 때문이었다는 얘기도 있다. Chronos는 본래 시간을 관장하는 신이었다(chron 또는 chrom은 시간(time)이라는 어원을 가지는 말이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만물이 Chronos의 지배를 받아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고통을 당하게 된다. 자기 자식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었다. Chronos는 아버지로서 자기 자식들이 이런 고통을 당하는 것을 차마 보지 못했을 것이다. 자기 자식들이 이런 고통을 당하느니, 차라리 자기 뱃속에 넣어서 이런 고통을 당하지 않게 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Zeus(하늘)는 자기 아버지 Chronos의 배를 갈라서 형, 누나들을 꺼내고 나서 아버지인 Chronos를 깊은 동굴 속에 영원히 유폐시킨다. 이렇게 해서 Zeus(하늘)를 비롯하여 Chronos의 뱃속에서 나온 신들은 시간의 지배를 받지 않게 되어 영원히 젊게 살 수 있게 된다. Zeus(하늘), Hades(지하세계), Poseidon(바다) 들은 자기 아버지의 1인 독재를 끝장내고, 세계에 대한 지배를 한 신에게 맡기는 것이 아니라 여러 신들이 세계의 여러 부문을 맡아서 지배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이들 신은 Styx(신의 세계에 있는 10개의 강 중에서 9번째의 강으로, 형벌의 강으로 불려진다. 그리고 마지막 10번째의 강은 Lethe인데, 망각의 강으로 불려진다. 말하자면 인간의 세계(이승)와 신의 세계(저승)을 가르는 강이라고 할 수 있다)에서 다음과 같은 것을 맹세하게 된다. 즉 [Zeus는 하늘, Hades는 지하세계, Poseidon은 바다를 지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신들은 자기 고유의 지배 영역이 있는데, 다른 신이 지배하는 영역을 간섭하거나 침해해서는 절대 안 된다. 만일 다른 신의 지배 영역을 간섭하거나 침해하게 되면 Nemesis라는 복수의 여신에 의해 복수를 당하게 된다]는 것을 말이다. 이때 <복수>의 의미는 복수 당하기 이전의 상태, 즉 다른 신의 영역을 간섭하거나 침해하기 이전의 원래의 상태, 다시 말해서 Styx 강에서 맹세하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헤시오도스의 신화에서 말하고자 핵심은 <다(多) 의 공존>이다. 다시 말하자면 여러 사람이 어떻게 공존하면서 조화롭게 살아갈 것인가를 말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 신화에서 나타나는 역사관은 <운명사관>이다. 그런데 시간의 처음과 끝이 필연적으로 있다는 의미에서의, 즉 시간적인 의미에서의 운명사관이 아니다. <공간적인 의미에서의 운명사관>이다. 신화에서 각각의 신들은 자신이 지배하는 영역이 처음부터 존재한다. 그리고 그 영역을 모든 신이 다 인정하고 간섭하지 않으며, 또한 침해하지 않는다. 만일 그렇게 되면 Chronos 때에서와 마찬가지로 피를 흘리는 싸움을 계속 하게 되어 아무도 살아 남지 못한다. 이것은 인간에게서와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땅과 영역이 있고, 또한 개인적으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소질과 능력이 있다. 우리가 이러한 소질과 능력, 더 나아가 그런 인간들이 모여 사는 공간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공존해서 살아갈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러한 영역들을 인정해야만 한다. 이것이 서양의 고대 신화가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이고, 또한 화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다(多)의 공존>이 고대 서양 사상에서는 어떻게 현실화되고 있고, 어떤 방식으로 주장되고 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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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띠 오이디푸스(들뢰즈와 가타리) 1.

아래의 내용은 들뢰즈.가타리의 <앙띠 오이디푸스>에 대한 세미나에서 공부한 내용을 요약, 정리한 내용입니다.  혹시 부족하거나 잘못 이해한 부분이 있다면 지적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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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앙띠 오이디푸스(들뢰즈․가타리) 1장 1절-4절 #


1. 기계(machine, 제작, 생산) 

- 유기체와는 반대의 개념이다. 다시 말해서 헤겔 변증법적 통일의 반대 개념이다.

- 비유기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 불어로는 ça이고, 독일어로는 Es로 나타낸다. 그런데 이것들은 프로이트 개념인 id를 가리킨다.

- 기계는 언제나 분리되고 새로이 구성될 수 있는, 뭐라 규정할 수 없는 요소들의 기계적(비유기적) 구성체이다.

-이런 면에서 기계는 고대 원자론에서 원자들(더 나아가서는 아낙시만드로스의 to apeiron(뭐라 규정할 수 없는 것들, 무한정자))의 구성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이런 점에서 욕망은 자유 개념과 밀접한 연관을 가진다고 할 수 있겠다).

- 또한 이 기계는 연결되고 연접해 있는 기계들의 기계이기도 하다.


2. 욕망

- 이러한 기계를 생산하고, 연결되고 연접되는 기계들의 기계를 생산하게 하는 힘은 욕망으로부터 비롯된다.

- 여기서 생산은 근대의 의식적 주체로서의 Ich(나)가 아니라 욕망이 하는 것이다.

- 그런데 들뢰즈에게서 욕망은 결핍, 결여, 필요로서 나타나지 않는다.

- 그리고 욕망은 들뢰즈에게서 규정할 수 없는 것으로서, 예를 들자면 chaos(카오스) 내에서의 흐름일 따름이다.

- 그러므로 들뢰즈는 프랑스 68혁명을 맑스의 거시적 혁명인 정치경제적 혁명(결여를 메꾸는 반결여의 혁명)과는 다른 혁명으로 본다. 이 68혁명은 결여-반결여를 넘어서는 혁명이다. 들뢰즈는 이것을 『천개의 고원』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욕망하는 기계들은 곧 <기관 없는 신체들>이다.

- <기관 없는 신체들>은 루소의 자연인(원초적 자연인)처럼 어떠한 것도 매개되지 않은 직접태라고 할 수 있다.

- 그런데 욕망으로부터 이러한 기계, 신체 없는 기관은 어떻게 생산되는 것인가?

- 이 문제와 관련해서 들뢰즈는 이 생산 과정에서의 필연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 과정은 우연적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욕망은 자유 개념과 밀접한 연관을 가질 수 있다고 본다.

- 그렇지만 이러한 필연성을 인정하지 않게 되면, 들뢰즈의 욕망 체계는 신화적이며, 신비주의적인 것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것 같다.


3. 이전의 정신분석학의 긍정과 한계

- 긍정 : 무의식의 측면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 한계 : 이 무의식의 측면을 개인적, 성적인 측면으로 한정시켰다는 것이다.

- 그런데 들뢰즈는 무의식의 개인적, 성적인 측면을 사회 전체 측면으로 확대시켰다.

- 들뢰즈는 이전의 정신분석학에서 정신병자 치료의 목적을 사회의 통합으로 보았는데, 이는 제국주의적인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왜냐하면 사회의 통합은 결국 정신병자를 건전한 노동을 할 수 있는 인간으로 만들어서 자본주의 체제에 적응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4. 들뢰즈의 관계 방식

- 들뢰즈의 관계 방식은 <종합의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러한 종합의 방식은 변증법적 관계 방식과 다른 비유기적 방식이다. 이러한 방식은 다음과 같은 순서에 따라 이루어진다.

- 연결적(접속적) 종합 --> 이접적 종합 --> 연접적 종합

- 연결적(접속적) 종합은 und(또, ~그리고)로 연결되는 관계 방식이다. 이 방식은 최초로 관계 맺는 방식이다. 이를 들뢰즈는 <생산의 생산>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종합(생산)의 에너지는 리비도이다.

- 이접적 종합은 entweder ~ or(~이거나 ~이거나)로 연결되는 관계 방식이다. 이 종합은 욕망이라는 흐름의 매끄러운 표면에 자기 자신에 대해 이러저러하게 등록, 기입되는 종합이다. 등록, 기입은 매끄러운 표면에 홈을 파는 것이다. 이를 들뢰즈는 <등록의 생산>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종합(생산)의 에너지는 누멘(본질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이다.

- 연접적 종합은 so~ daß~(그래서 ~이다)로 연결되는 관계 방식인데, 이 종합에서 비로소 주체(그래서 나는 ~이다)가 형성된다. 그런데 이러한 주체는 이접적 종합에서 파여진 홈을 메꾸면서 이루어지는 주체이다. 그런데 이 주체는 일시적, 분열적, 유목적 주체이다. 들뢰즈는 이러한 주체의 생산을 <소비의 생산>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종합(생산)의 에너지는 볼룸타스(자발성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이다.

- 이 주체는 소비의 선택을 통해서 주체로서의 자기를 인식(의식)하게 된다.

- 그리고 이러한 주체는 형이상학적으로 고정된 주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흘러 다니는 주체이다.

- 그런데 이러한 종합 형식의 순서는 『자본』에서의 가치형태의 전개 순서와 매우 유사하다. 연결적 종합은 <단순한, 개별적인 또는 우연적인 가치형태>와 닮아 있으며, 이접적 종합은 <전체적 또는 전개된 가치형태>와 닮아 있고, 연접적 종합은 <일반적 가치형태>와 <화폐형태>와 닮아 있다.

- 여기에서 들뢰즈가 주목하는 것은 바로 개별적이고 우연적인 처음의 단계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런데 이러한 개별적이고 우연한 관계 방식은 인간의 다양한 욕망(사용가치)에 따라 흘러간다. 바로 이러한 것에 또 주목하는 것은 아닐까 한다. 그런데 이렇게 사용가치에 주목하는 것은 맑스에게서는 사회주의의 대안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사용가치 자체에는 어떤 관계성도 포함되어 있지 않으며, 이러한 개별적이고 우연한 상품소유자로서의 개인은 자본주의 사회의 특성이기 때문이다.

- 위에서 말한 이접적 종합과 연접적 종합의 내용을 보게 되면 그 관계 방식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의 전략과 맞닿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자본 그 자체는 모순이 없는 매끄러운 자본의 표면을 원한다. 그런데 자본의 모순에 따라 자본의 저항 주체가 자본의 운동 과정 표면에 홈을 파면서 등록된다. 그러나 이러한 주체는 자본에 의해 호명되고 또 다시 자본에 의해 자본 속으로 포획, 포섭된다. 자본은 소비를 통한 자본의 물신 이데올로기를 통해 그 홈을 메운다. 이는 또한 그람시의 <동의>라는 개념과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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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향>(Volver)

(지금 인터내셔널가 모음을 듣고 있다.

올릴 수 있어서 같이 들으면 좋으련만...

인터내셔널가와 영화 <귀향>이 잘 어울릴 것 같다는 느낌^^...)

 

어제 밤 늦게(?, 8시50분 시작) 씨네 큐브에서 여친과 둘이서 이 영화를 보았다.

감독은 <페드로 알모도바르>인데, 이 감독의 영화는 처음이다.

아니다. <그녀에게>라는 영화를 시디로 본 것 같은 어렴풋한 기억이...

시디 찾아서 다시 봐야겠다.

 

늦게 영화 보고 나서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는 것도 좀 그렇고...

그냥 내가 본 영화의 느낌을 간단히 적어보려 한다.

 

이 영화 <귀향>은 <안토니아스 라인>과 좀 비슷하게

여성의 연대, 주체로서의 여성을 그리고 있는 것 같다.

<안토니아스 라인>과 <귀향>은 가부장제의 살인을 통하여

새로운 삶의 양식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우화적이고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것 같다.

이 새로운 삶의 양식은 바로 여성의 연대, 주체로서의 여성의 삶을 통해

보편적인 유적 인간의 삶이 진실로 가능한지를 보여 준다고 하겠다.

 

보편적인 유적 인간의 삶은 개별적이고 부수적인 삶의 영역을 보편적인 삶의

영역으로, 사회적인 삶의 영역으로 만드는 인간의 삶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귀향>에서 유령으로서 살아온 어머니, 그 어머니의 딸 라이문다와 쏠레,

그리고 라이문다의 딸 파울라, 그리고 아우구스티나와 다른 여성들... 

이들은 자본주의 가부장제 사회에서 언제나 개별적이고 부차적인 존재로

언제나 상처 받고 고통 받는 존재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 가부장제의 상징인 남편(아버지)을 살해(?)함으로써

가부장제의 틀을 깨고 새로운 세상을 향한 기초를 마련한다.

그 기초는 여성의 연대, 주체로서의 여성이다.

 

그런데 여성의 연대, 주체로서의 여성은 어떻게 가능할까?

<귀향>에서는 바로 <모성>을 통해 가능하다고 말한다.

<귀향>에서 모성은 가부장제에서 신비화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인간, 즉 보편적인 유적 인간을 생산해 내는

여성노동의 현실적이고 역사적 결과물이라 생각한다.

모성을 지닌 여성은 그 자체로 자신의 노동을 통해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인간을 생산해 내는 보편성과 유적 인간 본성을 자기 자신 속에

가지고서 현실화시키는 실천적이고 현실적인 주체라고 생각한다.

 

<귀향>에서 어머니, 라이문다와 쏠레, 파울라, 아우구스티나 등의 여성들은

바로 자기 자신 안의 보편성과 유적 인간 본성을 가부장을 살해하고 공범이

되는 과정 속에서 서로 확인한다.

그리하여 서로가 서로를 돌보며, 서로에게서 인간임을 확증한다,

사랑의 이름으로...

그들에게는 어떠한 일도 개별적 개인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공동체적인 것이다.

 

내가 이 영화를 보면서 느끼고 생각해 본 것을 내 맘대로 적어 보았다.

어쩜 또 오바하고 있는 걸까^^...

 

덧글> 내가 이 영화를 보고 이런 느낌과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은

여러 여성의 영향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여성 분들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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