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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장. 권력과 영광의 예술 2(17세기 말과 18세기 초 :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22장. 권력과 영광의 예술 Ⅱ (17세기 말과 18세기 초 :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 베르사유 궁전(도판 291, p.448) ▼

- 이탈리아를 포함한 가톨릭교회의 화려함과 장식 과잉의 특징을 가진 가톨릭적 바로크에 맞선 부르주아·프로테스탄트적 바로크는 단순함·간결함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부르주아·프로테스탄트적 바로크는 다음과 같은 형태로 변화·발전하게 된다. 즉 건축의 외양에 있어서는 단순성을 그대로 유지하되 가톨릭교회 권에 맞서서 거대한 크기를 자랑한다. 일단 건물 크기로 가톨릭교회를 압도함으로써 부르주아와 결탁한 절대 군주와 영주들의 권력의 위엄을 잘 나타내기 위해서다(물론 그렇다고 내부 장식에 소홀했느냐 하면 그것은 결코 아니다. 가톨릭교회의 화려함과 맞먹는다). 이러한 대표적인 건축물이 베르사유 궁전이다.

베르사유 궁전은 프랑스 “루이 14세의” “절대 권력의 상징이 되었다.” “베르사유 궁전은 너무나 거대하기 때문에 사진을 통해서는 그 외관이 어떻게 생겼는지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다.” “베르사유가 바로크 양식인 것은 그 장식적인 세부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거대한 규모 때문이다.” (447쪽)

- 그런데 이러한 거대한 규모는 한 가지 종류의 형태만으로는 채울 수 없다. 얀 베르메르 반 델프트의 <부엌의 하녀>(도판 281, p.432)라는 정물화에서처럼 전혀 이질적인 것들(크게는 사람과 사물)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처럼, 베르사유에서도 서로 다른 이질적인 요소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이것은 시장에서 여러 이질적인 상품들이 서로 기계적인 교환 관계에 있음과 비견될 수 있겠다). 단순하게 조합했더라면 이처럼 방대

- 이에 대해 곰브리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순수한 르네상스식 형태들만으로 한 규모의 정면은 그 단조로움을 깨지 못했을 것이나 조각상들과 항아리, 전승 기념품 등의 도움으로 건축가들은 어느 정도의 다양성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건물에서 바로크 형태의 진정한 기능과 목적을 잘 감상할 수 있다.” (447쪽)

- 다른 한편 이 시기 베르사유를 비롯한 건물의 대부분은 기본적으로 단순하게 4각형 형태를 취하고 있다. 중세 때까지만 하더라도 가장 단순하면서도 안정적이며 기본적인 기하학 형태는 3각형이었다. 이것은 사회적·정치적 형태로 볼 때 지배계급을 의미하는 것이었다(삼각형의 정점에는 The One, 왼쪽 꼭짓점에는 천사, 오른쪽 꼭짓점에는 성인, 즉 성직자가 있다). 그런데 꼭짓점이 하나 더 추가되어 사각형이 된다. 이것은 부르주아(또는 과학)가 지배계급으로 편입되었음을 의미한다고 생각해 볼 수 있겠다. 현대의 아파트 건물의 aid아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 루카스 폰 힐데브란트(Lucas von Hildebrandt : 1668 - 1745) ▼

- “1700을 전후한 시대가 건축에 있어서는 가장 위대한 시대였으며 그것은 비단 건축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성과 교회당들은 단순히 건물로서만 설계된 것은 아니었다. 모든 예술은 환상적이고 인위적인 세계의 효과를 높이는 데 기여해야만 했다.” (449쪽)

-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바로크 이념들이 가장 대담하고 일관성 있게 융합된 지역은 오스트리아와 보헤미아, 그리고 남부 독일이었다.” (449-451쪽)

- “도판 293(<빈의 벨베데레 궁>, p.450)은 오스트리아 건축가 루카스 폰 힐데브란트가 말버러 공작의 동맹자인 사부아 가(Savoy 家)의 외진(Eugene)공을 위해서 빈에 세운 성을 보여준다.” (451쪽)

- “우리가” 이 건물의 “환상적인 장식의 효과를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것은 이 건물 안에 들어설 때마다 도판 294(<벨베데레 궁의 입구 홀과 계단>은 외젠 궁의 궁전 입구이며 도판 295(<독일 폼머스 펠덴 성의 계단>, p.451)는 힐데브란트가 설계한 독일의 한 성의 계단 부분이다. (451쪽)

 

▲ 야콥 프란타우어(Jacob Prandtauer : 1726년 사망) ▼

- “교회의 건물들도” 왕이나 귀족의 성 실내의 모습에서처럼 “인상적인 효과를 이용했다.” (451쪽)

- “도판 296(<다뉴브 강변의 멜크 수도원>, p.452)은 다뉴브 강변에 있는 오스트리아의 멜크(Melk) 수도원이다.” 이 수도원의 “장식은 바로크 양식의 방대한 보고에서 나온 새로운 이념과 디자인을 즉시 적용할 줄 알았던 솜씨 좋은 떠돌이 이탈리아 장인들이 맡았다.” (452쪽)

- “이 이름 없는 미술가들은 단조롭지 않고 당당한 외관을 표현하기 위하여 건물들을 한데 모으고 배치하는 어려운 기술을” 아주 “잘 습득하고” 있었으며, “또한 장소에 따라서 장식의 비중을 두어 ”눈에 띄지 않는 곳은 지나치게 화려한 장식을 삼가고 돋보이고자 하는 부분에서는 더욱 효과적으로 부각되도록 애썼다.“ (452쪽)

- “이러한 교회의 건물(도판 297, <멜크 수도원의 예배당 내부>, p.253)에서는 ‘자연스럽거나’ ‘정상적인’ 것이 하나도 없으며 또 그런 것을 의도하지 않았다. 그것은 보는 사람들에게 천국의 영광을 미리 맛보게 해주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가 그 가운데 서 있으면” “우리의 모든 의심을 정지시켜 버린다. 우리는 우리 나름의 규칙과 기준이 전혀 통하지 않는 그런 세계에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452쪽)

 

▲ 앙투안 바토((Antoine Wateau : 1686 - 1721) ▼

- “이탈리아에서와 마찬가지로 알프스 북쪽에서도 미술의 각 분야가 이러한 장식의 북새통에 휩쓸려 들어가 버렸으며 각 분야의 독자적인 중요성을 많이 상실했다.” 이런 가운데서 “17세기 점잔기의 위대한 지도적인 화가들과 비견되는 거장은 단 한 사람밖에 없었던 것 같다. 이 사람은 앙투안 바토이다.” (454쪽)

- “그는 현실의 모든 어려움과 자질구레한 일에서 동떨어진 자기 자신의 환상적인 생활을 그리기 시작했다.” (454쪽)

- “너무나 존귀하고 인위적일 거라는 인상을” 줄지도 모르는 “바토의 예술”은 “많은 사람들에게” “로코코(Rococo)라고 알려져 18세기 초의 프랑스 귀족들의 취향을 반영하는 것이 되었다.” 바토의 “꿈과 이상”은 “우리가 로코코라고 부르는 유행을 만들어내는 데 일조를” 하였다. (454-5쪽)

- “도판 290(<공원의 연회>, p.454)은 공원에서의 소동 모습을 보여주는 그의 작품이다. 이 장면에는 얀 스텐의 떠들썩한 쾌활함(p.428, 도판 278) 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달콤하고 우수에 젖은 그런 고요함이 지배적이다.” (455쪽)

- “바토는 그가 찬양했던 루벤스처럼 슬쩍 한번 그은 분필 자국이나 붓 자국만으로 살아서 숨 쉬는 듯한 육체의 인상을 묘사할 수 있었다.” “그의 그림이 얀 스텐의 그림과 다르듯이 그의 습작들이 자아내는 분위기는 루벤스의 습작과는 다르다. 이러한 아름다움의 환상 속에는 어딘지 슬픈 분위기가 감돌고 있는데 그것은 말로 설명하거나 규정할 수 없지만 그것이 바토의 예술을 단순한 기교나 예쁘장한 아름다움의 영역을 초월하게 만든다.” (4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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