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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장. 전통의 단절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 영국, 미국 및 프랑스) 1

24장. 전통의 단절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 영국, 미국 및 프랑스)

 

▲ 전통 단절의 역사적 배경 : 프랑스 대혁명(1789년) ▼

- 르네상스, 근대(“역사책에서 근대는 1492년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발견으로 시작된다.”) 이후, 프랑스 대혁명 이전까지만 해도 미술은 중세 때처럼 “유한계급의 생활 속에서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반드시 있어야 하는 어떤 것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475쪽)

- 또한 “이러한 미술의 목적이란 원하고 즐기려는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것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사실 그들 간에도 여러 유파가 존재하여 ‘미’란 무엇인가, 카라바조와 네덜란드 화가들과 게인즈버러 등이 명성을 얻었던 것처럼 자연을 능숙하게 모방하는 것인가, 혹은 라파엘로와 카라치, 레니, 레이놀즈와 같이 자연을 ‘이상화’할 수 있는 미술가들의 능력이 진정한 미를 좌지우지하는가 하는 여러 문제에 대한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475쪽)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논쟁자들 사이에는 많은 공통점이” 있었다. “‘이상주의자’들도 미술가란 자연을 연구해야 하고 나체화로부터 그림 공부를 시작해야 한다는 점에는 동의했으며 ‘자연주의자’라고 할지라도 고대의 고전적인 작품들이 결코 능가할 수 없는 최고의 미를 지니고 있다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 (475쪽)

- “18세기 말에 이르러 공통된 기반은 점점 무너지기 시작하는 것처럼 보였다.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은 “이성의 시대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으며 미술에 대한 관념이 변화한 것도 이 시기부터였다.” (475-6쪽)

 

▲ 호레이스 월폴(Horace Walpole) ▼

- “첫 번째 변화는 이른바 ‘양식’에 대한 미술가들의 태도였다.” (476쪽)

- “전에는 한 시대의 양식이란 그저 어떤 일이 행해지는 방식이었고 사람들은 그것이 어떤 바람직한 효과를 얻는 데 가장 올바르고 훌륭한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채택할 뿐이었다. 이성의 시대가 되자 사람들은 양식에 대해서 의식하기 시작했다.” (476쪽)

- “그러한 의식은” “‘왜 꼭 팔라디오 양식이어야만 하는가’”라는 물음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일이 바로 18세기 영국에서 일어났다.” (476쪽)

- 이러한 물음을 화제로 삼은 사람들 중 “가장 톡특한 인물은 초대 영국 수상의 아들인 호레이스 월폴이었다.” 그는 “스트로베리 힐의 별장을 고성(古城)처럼 고딕 양식으로 결정”했다(도판 311, <런던 트위크넘의 스트로베리 힐>, p.476). (476쪽)

- 이러한 고딕 양식의 선택은 “벽지 무늬를 선택하듯이 건물의 양식을 선택하도록 만든 자의식의 첫 번째 징후였다.” (477쪽)

 

▲ 존 숀(John Soane : 1752 - 1837) ▼

- 첫 번째 변화에 뒤이어 두 번째의 변화가 있었다. 그것은 “과연 무엇이 올바른 양식인가” 하는 것이었다. (477쪽)

- “건축가들은 올바른 양식을 먼저 찾아야만 하였다. 이제 월폴의 ‘고딕 복고’와 견줄 만한 ‘그리스 복고’가 일어났고 이는 ‘섭정 시대(1810-20)’에 절정을 이루었다.” (477-8쪽)

- “도판 312(존 패프워스, <첼튼엄(Cheltenham)의 도셋 하우스>, p.477)는 순수한 이오니아 식 그리스 신전(p.110, 도판 60)을 모방하여 지은 첼튼엄 온천의 한 집이다.” (478쪽)

- “도판 313(<시골 별장의 구상도>, p.478)은 파르테논 신전(p.83, 도판 50)을 통해 우리가 알고 있는 본래의 도리아 식을 건축의 한 예를 보여준다.” (478쪽)

 

▲ 신고전주의의 득세 ▼

- “엄격하고 단순한 규칙들을 적용한다는 이러한 건축 개념은 그 힘과 영향력이 전 세계적으로 커지고 있던 이성의 옹호자들에게 강한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미국의 건국공로자이자 제3대 대통령이었던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 1743 - 1826) 같은 사람이 자신의 저택 몬티첼로(도판 314, <버지니아의 몬티첼로 저택>, p.479)를 이러한 확실한 신고전주의(neo-classical) 양식으로 설계했고 각종 관공서가 있는 워싱턴 시가 ‘그리스 복고(Greek Revival)’ 양식으로 설계되었다는 것은 결코 놀라운 이야기가 아니다.” (479-80쪽)

- “프랑스에서도 대혁명이 일어난 후에 이 양식의 승리가 확고해졌다. 바로크와 로코코 건축가나 장식가들의 화려하고 낙천적인 전통은 이제 흘러가버린 과거지사가 되어버렸다.” “나폴레옹이 프랑스 대혁명의 이념을 옹호하는 척하면서 유럽에서 패권을 잡게 되자, 신고전주의 건축 양식은 제정 양식이 되었다.” (480쪽)

- “유럽 대륙에서도 고딕 양식의 부활을 이러한 순수한 그리스 양식의 새로운 부활과 나란히 존재하였다. 이것은 특히 이성의 힘이 세상을 개조하는 데 실망하고 이른바 ‘신앙의 시대’로 되돌아가는 것을 주장하던 낭만주의자들의 호응을 얻었다.” (480쪽)

- “전통의 사슬이 단절되었다는 사실이 그림과 조각에서는 건축처럼 즉각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을지 모르지만, 사실은 훨씬 더 커다란 의의를 지닌 것이었다.” (480쪽)

- 그런 의의 중 하나는 아카데미(Academy)의 설립이었다. “16세기 이탈리아의 미술가들은 자기들이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과)학자들과 맞먹는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그들이 모이는 장소를 처음으로 아카데미라 불렀다. 이러한 아카데미가 점차 학생들에게 미술을 가르치는 기능을 맡게 된 것은 18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이루어졌다.” (480쪽)

- 이 아카데미에서의 미술 교육은 그 이전까지 길드에서 도제를 교육시키는 방식과는 판이하게 다른 근대 학교의 방식인 것처럼 보인다. “18세기의 아카데미는 왕실의 후원을 받았다.” (480쪽)

- 그런데 여기에서 대단히 어려운 문제가 발생했다. 그것은 그 당시 현재의 화가들이 그림이 팔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카데미는 그림을 팔기 위한 전시회를 계획하였다. 이제 그림은 시장에서 팔려야 하는 상품이 되었다. 그런데 그림의 이러한 상품화 때문에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주제, 즉 멜로드라마의 주제 같은 것도 그리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화가들 사이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가져 왔으며, 이에 따라 아카데미적인 미술을 경멸하고 불신하는 흐름이 나타나게 되었다.

- 이러한 흐름은 미술가들로 하여금 “도처에서 새로운 주제의 종류를 찾아”내도록 했다. “미술가들은 셰익스피어 작품의 한 장면에서부터 시사적 사건에 이르기까지 상상력에 호소하고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모든 것을 그들의 주제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고 느끼게 되었다.” (481쪽)

- 그러나 “18세기 중반 이전의 미술가들은 주제에 있어서” “성경에서 따온 주제들이나 성자의 전설을 묘사”하는 주제 또는 “고대 그리스 신화라든가 용맹과 자기희생이 있는 로마의 영웅 설화, 또는 의인화를 통해 일반적인 진리를 보여주는 우의적 주제 등 몇 가지 선택된 주제”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481쪽)

 

▲ 존 싱글톤 코플리(John Singleton Copley : 1737 - 1815) ▼

- “유럽 미술이 기존의 전통으로부터 이렇게 이탈한 것은 부분적으로는 대서양을 건너 유럽으로 왔던 미술가들, 즉 영국에서 활약했던 미국의 화가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분명히 이들은 구세계서 신성시되어온 관습에 구속감을 느꼈으며 새로운 실험을 시도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코플리는 “이러한 부류의 전형적인 화가였다.” (481쪽)

- “도판 315(<1641년에 다섯 명의 탄핵된 의원들의 인도를 요구하는 찰스1세>, p.483)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서 1785년 처음 일반에게 공개되어 큰 물의를 일으켰다. 그 주제는 그야말로 특이한 것이었다.” (481-2쪽)

- “코플리는 찰스1세가 영국 하원에 대해 탁핵된 5명의 체포를 요구했을 때, 하원 의장이 왕의 권위에 도전하여 그들을 내주기를 거부했던 사건을 그리도록 제안 받았다.”(482쪽)

- “그의 의도는 마치 목격자의 눈에 비친 것처럼 가능한 한 정확하게 그 장면을 재구성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 코플리는 “엄밀하게” 역사적인 “시대 고증을 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482쪽)

- “프랑스 대혁명은 역사적 사건에 대해 이러한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영웅적 주제를 다룬 그림들을 등장시켰다. 코플리가 영국의 역사 속에서 그 주제를 구한 것은 하나의 예라고 할 수 있다.” (482쪽)

 

▲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 Louis David : 1748 - 1825) ▼

- “프랑스 혁명가들은 스스로를 새로 태어난 그리스와 로마 시민으로 자처하기를 좋아했으며, 그들의 그림들은 건축 못지않게 로마 풍의 장려함이라고 불리는 취향을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신고전주의 양식의 지도자는 다비드였다.” (482쪽)

- “그는 혁명 정부가 내세우는 ‘공식화가’였다.” “프랑스 대혁명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인 마라(Mara)가 광신적인 반혁명파의 젊은 여자에 의해 목욕탕에서 피살되었을 때 다비드는 그를 대의명분을 위해 죽은 순교자의 모습으로 그렸다(도판 316, <암살 당한 마라>, p.484).” (485쪽)

- “그는 그리스와 로마의 조각을 연구하여, 신체의 근육과 힘줄을 실감나게 묘사하고 고상하고 아름다운 외관을 그리는 것을 배웠다. 또한 중점적인 효과에 꼭 필요하지 않은 모든 세부 묘사를 생략하고 단순성을 목표로 삼는 것을 고전기의 미술로부터 배웠다. 이 그림 속에는 잡다한 색채도 없고 복잡한 단축법도 없다. 코플리의 커다란 전시 효과적 작품에 비교해 볼 때 다비드의 그림은 엄숙하게 보인다.” (485쪽)

 

▲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 : 1746 - 1828)의 <발코니의 사람들>(도판 317, p.486) ▼

- “고야는 엘 그레코(p.372, 도판 238, <요한 묵시록의 다섯 번째 봉인의 개봉>)와 벨라스케스(p.407, 도판 264,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를 배출한 스페인 회화의 훌륭한 전통을 몸에 익히고 있었으며 도판 307의 <발코니의 사람들>(p.486)에서 보듯 그는 다비드와는 달리 고전주의적인 장려함을 위해서 이러한 지식을 거부하지 않았다.” (485쪽)

- “18세기의 베네치아의 위대한 화가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Giovanni Battista Tiepolo, p.442, 도판 288)가 사용한 얼굴 광채와 같은 표현이 고야의 그림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고야의 인물은 다른 세계에 속한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유혹하듯이 쳐다보고 있는 두 여인과 배경의 어둠 속에 서 있는 다소 불길한 두 명의 정부는 호가스의 세계에 더 가깝다.” (485쪽)

▲ 프란시스코 고야의 <스페인 국왕>(도판 318, p.487) ▼

- “그에게 스페인 궁중에서의 지위를 확보해준 초상화(도판 318)들은 얼핏 보면 반 다이크(p.404, 도판 261)나 레이놀즈 류의 어용 초상화들처럼 보인다. 그가 마술을 부리듯 비단과 황금의 반짝임을 만들어내는 기술은 티치아노와 벨라스케스를 연상시키지만 사실 고야는 그들과는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485쪽)

- “옛 거장들은 권력에 아첨했지만 고야는 그것을 버리는 것을 전혀 아까워하지 않은 듯 보인다. 그는 그들의 초상화에서 허영과 추악함, 탐욕과 공허함을 낱낱이 드러냈다(도판 319, <도판 318의 세부>, p.488). 자기 후원자들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던 궁정 화가는 전무후무할 것이다.” (485쪽)

 

▲ 프란시스코 고야의 <거인>(도판 320, p.489) ▼

- “렘브란트처럼 그도 수많은 에칭을 제작했는데, 그 중 대부분이 부식된 선뿐만 아니라 그늘진 부분까지도 나타낼 수 있는 에쿼틴트(aquatint)라는 기법으로 제작된 것이었다.” (485쪽)

- “고야의 판화에서 가장 특이한 점은 성경의 주제이든 역사적 주제이든 또는 풍속적인 주제이든 간에 이미 알려진 주제는 일절 그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의 판화들은 대개 마녀라든가 기괴한 요괴들의 환상이 주제이다.” (485-8쪽)

- “어떤 것들은 고야 자신이 스페인에서 직접 목격했던 부패하고 반동적이며 잔인하고 억압적인 폭력에 대한 고발로서 제작한 것이며 또 어떤 것들은 그저 고야 자신의 악몽을 형상화한 듯하다.” (488쪽)

- “도판 320은 그의 꿈 가운데 가장 무시무시한 악몽으로, 한 거인이 세계의 끝에 앉아 있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 “이것이야말로 전통의 단절이 가져온 가장 뚜렷한 결과”였다. “이제 미술가들은 지금까지 오직 시인들만이 누렸던 개인적 환상의 세계를 종이 위에 펼쳐 놓는 자유를 얻게 된 것이다.” (이것은 상품에서 가치가 사용가치로부터 독립한 현상과 비견될 수 있다 할 수 있으며, 구체적인 사물로부터 이미지의 독립과 비견될 수 있겠다. 다른 한편 이로부터 심미주의 --> 예술 지상주의로 나아가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4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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