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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 도대체 누구냐, 넌!

한 6년 전에 쓰다가 만 글을 이제사 끝을 맺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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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보, 도대체 누구냐 넌?! #

 

1. 아리송한 진보의 정체.

2. 노동자는 진보적 존재인가 또는 아닌가?

3. 계급투쟁은 진보적인가 또는 아닌가?

4. 당은 진보적인가 또는 아닌가?

5. 진보는 여성 되기, 소수자 되기의 끊임없는 과정

6. 진보와 혁명의 관계-전략, 전술의 측면에서

7. 진지전과 게릴라전의 통일로서의 진보.

 

1. 아리송한 진보의 정체.

예전에 진보라는 말은 ‘빨갱이’, ‘좌익’과 동의어였다. 그래서 진보라는 말을 함부로 쓰지도 못했다. 그런데 오늘날 진보라는 말은 진부하다고 할 만치 여기저기서 쓰고 있는 말이다. 그런데도 진보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잘 아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진보, 그것은 ‘유령’인가 아니면 ‘보이지 않는 손’인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산물인 ‘민족주의’에 집착하는 주사파도 진보라고 하며, 심지어 노무현 정권도 진보라고 이름을 갖다 붙인다. 다른 한편 일반 대중들은 대통합민주신당이 새누리당보다 개혁적이고 진보적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참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것이 진보라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진보라는 말이 ‘중산층’, ‘서민’(우리는 이들을 보통 민중이라 부른다)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처럼 사용된다는 것이다. 중산층, 서민이라는 말은 ‘피지배 계급’의 뉘앙스를 강하게 풍긴다. 이제 ‘진보’의 정의를 내려 보자면 <중산층, 서민을 위하는 것에 속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의심해 볼 수 있다. 첫째 이러한 정의가 사실 참된 것인지 자꾸 의심이 간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에서 어떤 정권도 피지배 계급을 위하지 않는다는 정권이 없기 때문이다. 둘째, 첫째 물음과 관련하여, 도대체 중산층, 서민은 과학적으로 어떤 계층을 가리키는 것인지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이상 위의 정의로부터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다. 그런데 두 번째 문제에 대한 답을 구하면 첫 번째 문제에 대한 답을 자연스럽게 구할 수 있을 것이다.

 

2. 노동자는 진보적 존재인가 또는 아닌가?

서민, 중산층이라는 개념은 사회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계급처럼 질적인 차이를 포괄하는 개념이 아니라 양적인 차이만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다시 말하자면 양적인 소득 차이와 재산 소유의 양적 정도 차이만을 나타내는 개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양적 차이는 실제로 그 경계가 아주 불분명하다. 명확하게 어떤 기준으로 상류층, 중산층, 서민층을 가를 수 있을까? 그 기준은 대단히 자의적이고 임의적일 수밖에 없다. 연 소득 2,000만 원 이하이면 서민층이고 2,010만 원이면 중산층인 것인가? 이러한 자의성과 임의성은 명확한 질적 차이를 드러내는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관계, 즉 계급 지배에 따른 착취와 억압의 관계를 은폐하게 된다. 그러므로 중산층, 서민이라는 개념은 이러한 관계를 은폐시키는 이데올로기의 역할을 지닌 개념이 된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역할은 곧바로 서민, 중산층이라고 느끼는 일반 대중들의 심리에 엄청난 영향을 준다. 엄연히 현실적으로는 계급지배가 일어나고 있음을 피부로 느끼는 일반 대중들은 지배 당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받아들이기 힘들기 때문에(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면 사는 것이 너무나 비참하고 고달프기 때문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한 사실을 받아들이길 거부할 수 있는 것을 찾게 된다. 이러한 심리적 상태가 자본의 이데올로기와 맞아 떨어지게 됨으로써 일반 대중들은 서민, 중산층이라는 개념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라 본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계급질서 속에서 지배계급으로 상승할 수 있는 사회적 지위를 확보하고자 하는데, 이러한 것이 또한 일반 대중들 대부분이 자신을 중산층이라 생각하도록 만들며, 자신은 대부분 노동자이고 비슷한 처지이면서도 피지배계급에 속하는 다른 사람들과 끊임없이 자기를 구분시키고자 한다. 노동자 대부분은 도시빈민들과 다르다고 생각하며, 정규직 노동자는 비정규직 노동자와 다르다고 생각하며, 화이트칼라는 블루칼라와 다르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볼 때 서민, 중산층이라는 개념은 과학적인 개념이 아니라 심리적이고 주관적이며 이데올로기적인 관념일 뿐이다. 그러므로 서민, 중산층을 위하네 어쩌네 하면서 서민, 중산층을 들먹거리는 것을 진보라 칭할 수 없다. 그것은 단지 무늬만 진보인 ‘사이비 진보’이다. 진보는 질적인 차이를 지닌 개념을 바탕으로 하는 과학을 통해 그 진정한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질적인 차이를 지닌 계급지배를 나타내는 개념들은 노동-자본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노동-자본 개념은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지 못하느냐 또는 소유하고 있느냐’에 따르는, 즉 질적인 차이를 드러내 주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는 필요조건일 뿐이다. 즉 노동자를 위한다고 해서 모두 진보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좀더 생각해 봐야 할 문제라는 것이다.

서민, 중산층은 계급의 측면에서 볼 때 피지배계급이며, 자본주의 사회에서 피지배계급의 대부분은 노동자이다. 서민, 중산층으로서 이 노동자들은 어떤 물적 토대를 가지며 살고 있는 존재인가? 그들 삶의 물적 토대는 무엇인가? 맑스는 생산하는 ‘인간’ 자신이 생산력이라고 했으며, 이 인간은 생산관계의 총체를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노동자의 삶의 물적 토대는 노동자 자신이다.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자본가에게 팔아 그 임금으로 자신의 삶을 영위해 가는 존재이다. 이때 노동자는 두 가지의 측면으로 정의될 수 있다. 첫 번째는 자신의 노동력을 자본가에게 판다는 측면이다. 두 번째는 임금으로 자신의 삶을 영위해 간다는 측면이다. 이 두 측면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첫 번째의 측면에서 노동자는 <자본의 대상>이 된다. 두 번째의 측면에서 노동자는 <자신의 삶의 주체>가 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노동자는 대상과 주체의 측면 모두를 가지고 있는 <모순적인 존재>이다. 이 모순이야말로 자본주의의 본질적인 모순이다. 이 모순은 자본가-노동자의 갈등과 투쟁이라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노동자 대중은 이러한 모순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 자체로 진보적이지 않다. 그들의 생존의 물적 토대는 자본주의 경제 체제에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 대중은 자본주의 경제 체제에서 자신의 생존을 모두 자신 혼자 떠맡게 된다. 자신 이외의 다른 모든 사람들은 암묵적으로 무한한 적대 경쟁에서 물리쳐야 할 적이다. 노동자 대중은 전쟁의 한복판에 서 있다. 생존하기 위해서 그들은 ‘힘’이 있는 쪽, 이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고 있는 쪽으로 붙을 수밖에 없다. 이것이 노동자의 첫 번째 측면, 즉 자신의 노동력을 자본에게 팔 수밖에 없는 측면이다. “장자 에셔가 죽 한 그릇에 자신의 영혼을 파는 것”처럼 이렇게 노동자는 자신의 모든 것을 자본에 맡긴다. 그들은 자본주의 체제를 위협할 수 있는 어떤 사상, 신념, 개념, 언어 등을 사용하지 않으려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을 사용하게 될 때 자신의 생존을 보장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노동자 대중은 자본주의의 비밀을 폭로하며, 자본주의를 해체시킬 수 있는 과학적 개념인 ‘노동자’를 사용하는 대신에 자본의 비밀을 은폐하는 이데올로기 역할을 하는 말인 ‘근로자’, ‘국민’, ‘서민’, ‘중산층’이라는 말을 쓰며, 그 말에 아주 익숙해 있다. 이러한 것들은 노동자 대중이 자신의 삶을 최우선의 목적으로 두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부차적인 것으로 제쳐놓고서 돈 버는 것 자체를 최우선의 목적으로 삼게끔 만든다.

노동자 대중이 자신의 삶을 자본의 영역과는 전적으로 다른 영역에서 새로운 생산관계 속에서 영위해 나가려는 기획을 가지고 실천활동을 해 나가는 순간에서부터 노동자 대중은 진보적인 존재가 된다. 이는 두 번째 측면이 첫 번째 측면을 지양해 나가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므로 진보는 자본주의 생산관계를 해체하고 새로운 생산관계, 인간관계를 창출하는 과정 속에서 자신의 삶을 영위하고자 하는 지속적인 운동이라 할 수 있겠다. 이는 맑스가 말한 대로 “각각의 자유로운 개인들이 연대하는 사회”를 건설해 나가는 끊임없는 운동 자체라고 할 수 있겠다.

 

3. 계급투쟁은 진보적인가 또는 아닌가?

이런 물음을 던지는 것 자체가 어떤 이들에게는 뜬금없고 ‘별 미친...’이라는 말을 하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계급이 가지고 있는 이중적 측면, 즉 모순적인 측면들은 이런 물음을 가능하게 할 수도 있지도 않을까 싶다.

계급투쟁은 그 자체로 절대적으로 진보적이며 절대적으로 선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계급이 처해 있는 상황 또는 계급이 가지고 있는 현실적인 모순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순은 오늘날 노동자 계급 투쟁이 현실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한계라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 계급은 모순적인 존재이다. 먼저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자본에 팖으로써 자본의 대상이 되는 측면을 가지고 있고, 다른 한편 임금을 가지고 자신의 삶의 주체로 살아가고자 하는 측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측면을 ‘즉자적’ 계급이라 하고, 두 번째 측면을 ‘대자적’ 계급이라고 한다.

즉자적 계급으로서 노동자 계급은 자본의 적대적 경쟁 이데올로기에 따라 원자화되고 파편화된 존재로서 항상 모든 걸 자기 혼자(또는 오로지 자기 가족)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개별적인 개인에 불과하다. 이 노동자는 사회적 개인이 아니다. 이 노동자는 언제나 자기와 자기의 가족 안위만이 문제이며, 그 안위를 위해서 죽기 살기로 경쟁에 뛰어든다. 동료가 짤리든, 그 동료가 비정규직 노동자가 되어 자본과 싸우든 그것은 그에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만일 이런 것이 그의 생존을 위협할라치면 협력은 고사하고 적대적인 태도로 돌변하게 된다. 이 노동자는 오로지 ‘너 죽고 나 살자’라는 전쟁의 살얼음판 위에서 목숨 부지에 연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속에서 계급투쟁의 형태는 기껏해야 경제주의, 조합주의 이상을 넘어서지 못하게 된다. 이 즉자적 계급투쟁으로는 결코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갈 수가 없다. 이 상황에서 자본은 노동자 집단 이기주의의 이데올로기를 퍼트리면서 노동자들 사이의 분열을 촉진시킨다. 그리하여 노동자의 저항을 쉽게 분쇄시킨다. 이것이 신자유주의에 따른 자본의 기본 전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즉자적 계급투쟁은 진보적인 것이라 할 수 없다.

새로운 생산관계, 인간관계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은 ‘대자적’ 계급투쟁이라 할 수 있겠다. 자기 삶의 주체가 되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투쟁이 ‘대자적’ 계급투쟁이다. 자기 삶의 주체는 자본에 의해 개별화되고 원자화된, 그리하여 분열되어 있으며 타자를 끊임없이 수단화하려는 무한 적대적인 경쟁 속에 있는 즉자적 계급을 넘어서는 데 있다. 즉 이 분열을 줄여 나가기 위한 물질적 기반과 조건들을 만들어 나가는 데에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개별적이고 원자화된’ 존재에서 인간의 유적 보편성을 지닌 ‘보편적인’ 존재로 만들어 나가는 데에 있다는 것이다. 이런 존재의 생산과정은 맑스의 말마따나 동시적 과정으로서의 “환경의 변혁과 인간 활동 또는 자기 변혁의 일치” 과정이며, “혁명적 실천” 과정이다. 또한 생산력을 ‘질적’으로 변혁시키며 동시에 생산관계를 변혁시키는 과정이다. 이것이야말로 ‘진보’로서의 대자적 계급투쟁이다.

 

4. ‘당’은 진보적인가 또는 아닌가?

이러한 물음 또한 ‘미친...’이란 소리를 듣기 쉬운 물음일 수도, 어리석은 물음일 수도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당’은 크게 두 가지 형태로 존재해 왔다. 하나는 러시아 혁명 당시의 볼셰비키 당으로서의 전위 정당이고, 다른 하나는 전위 정당과 대비되는 의회를 중심으로 하는 제도적 대중 정당이다. 그런데 이 둘 모두 역사적으로 ‘대표하는 자’가 ‘대표되는 자’로부터 구속을 받지 않기 때문에 독재 또는 전제 정치로 귀결되었다.

먼저 전위 정당은 ‘이성의 화신’으로서 모든 프롤레타리아가 따라야 할 전범이며, 통치 권력을 잡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삼는다. 그런데 이러한 전위 정당의 특색 때문에 동일한 목적을 가진 다른 모든 정당 또는 정치 세력들을 자신의 통치 권력으로부터 배제시키고자 한다. 예를 들어 프롤레타리아 자체가 여러 정당으로 분열되어 있을 경우, 도시 프롤레타리아가 농민과 연대하여 권력을 잡았을 경우 등을 생각해 보면, 통치 권력을 잡은 프롤레타리아 일부가 통치 권력을 잡지 못한 다른 프롤레타리아를 통치 권력으로부터 배제시키고자 하며, 도시 프롤레타리아가 농민을 통치 권력으로부터 배제시키고자 하고, 남성이 여성을 통치 권력으로부터 배제시키고자 한다. 이렇게 될 경우 부르주아 정치와 하등 다를 게 없으며, 더 나아가서는 1차 파리 코뮌이나 스탈린 독재 체제처럼 공포 정치 또는 전제 정치로 나아갈 수밖에 없게 된다.

1차 코뮌의 실패는 코뮌의 통치가 공포정치로 변했다는 데 있다. 1차 코뮌은 프롤레타리아와 농민들의 연합에 의해 봉건적인 예속 관계와 지배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이 목표를 달성하면서 봉건적 귀족 소유의 토지를 배분하는 데 있어서 배분의 기준도 정하지 않고 농민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토지를 배분하도록 했다. 그렇게 해서 농민들과 부르주아들은 봉건 귀족의 토지를 무상으로 소유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농민들로 하여금 혁명과 코뮌에 대하여 더 이상 관심을 가지지 않도록 하였다. 왜냐하면 농민들은 이 혁명과 코뮌을 통하여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였기 때문이었다. 농민들은 자신들의 배만 불렸고, 먹고 남은 것은 비싼 값에 팔려고 하였다. 이렇게 해서 도시의 노동자들은 굶주리게 되었다. 이러한 굶주림은 고리대업을 성행시켰고, 부르주아들이 이득을 보도록 하였다. 도시의 프롤레타리아는 굶주림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자리를 찾아 나섰고 그리하여 코뮌의 일을 거의 볼 수 없게 되었다. 코뮌을 장악하고 있던 쟈코뱅 당은 도시 프롤레타리아의 이탈을 막기 위해 코뮌의 일로부터 멀어져가는 행위를 배신으로 규정하고 가차 없는 처벌을 내렸다. 이러한 일은 쟈코뱅 당이 도시 프롤레타리아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지 못하고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결과를 가져왔고, 결국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점점 더 공포정치로 빠져들게 하였다. 다른 한편 전쟁 수행 중이던 이때 프랑스를 지키기 위해 물자가 엄청나게 필요하였다. 이러한 물자 징발과 관련해서 파리와 국경 근처에 있는 농민들은 애국심으로 물자 징발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으나, 국경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전쟁의 위험을 크게 느끼지 못한 대부분 지방의 농민들은 이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으며 전쟁하는 것을 싫어하였다. 이렇게 물자가 제대로 징발되지 않자 코뮌은 6.000명의 군대를 동원해 무력으로 물자 징발에 나섰다. 이것은 대부분의 농민들을 쟈코뱅 당으로부터 등을 돌리게 하였고, 이에 대응하여 쟈코뱅 당은 더더욱 공포정치에 매달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1차 파리코뮌은 파리 노동자들의 저항을 불러일으키지 않고 무너지게 되었다. 오히려 이러한 와해는 많은 사람들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쟈코뱅 당의 이러한 공포정치와 독재의 전철은 러시아의 볼셰비키와 그 뒤를 이은 스탈린 독재로 이어졌다. 러시아 혁명 당시 볼셰비키는 “유럽 전체의 혁명이라는 단 하나의 카드에 모든 것을 걸었다. 그러나 그 카드가 나오지 않자 그들은 자신들이 해결할 수 없는 과제들이 가득 찬 길로 접어들고 말았다. 그들은 강력하고 무자비한 적들에 대항해서 군대도 없이 러시아를 방어해야만 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것들을 달성하기 위한 모든 물적인 조건과 정신적인 조건들이 부족하면 할수록 그 부족한 것을 메우기 위해 더욱더 노골적인 폭력에 의존하는 강제력, 즉 독재에 매달려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들이 그렇게 하면 할수록 국민대중 속에서 그들에 대한 반대파도 더욱 늘어났다. 그리하여 그들은 점점 더 불가피하게” “독재로” “나가야만 했다.” (카를 카우츠키 지음, 『프롤레타리아 독재』, 한길사, 2006, 103쪽) 이러한 최종적인 결과가 스탈린의 공포정치에 의한 독재가 되었던 것이다.

다른 한편, 제도적 대중 정당 역시 ‘부르주아 독재’의 길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부르주아 독재란 부르주아 계급이 의회를 통해 지배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계급’이나 ‘지배’ 속에 있는 개인을 ‘자유로운’ 모든 개인으로 환원함으로써 개인의 계급관계나 지배관계를 지워버리는 일이다.”(가리타니 고진, 『트랜스크리틱』, 한길사, 2005, 256쪽) 제도적 대중 정당은 부르주아 의회 제도권으로 들어간 정당인데, 이 제도권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반드시 “보통선거”를 거쳐야만 한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부르주아 독재를, 오히려 보통선거에서 보고 있었다.”(같은 책, 255쪽) 보통선거의 특징은 모든 계급 사람들이 선거에 참여한다는 것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모든 개인들을 모든 계급·생산관계로부터 분리시킨다는 것에 있다. 이러한 분리는 부르주아가 추구하는 주요한 이데올로기 장치로서 현실 생산관계에서의 계급관계 또는 지배관계를 은폐·소거시킨다. 다른 한편 보통 선거는 비밀 투표로 이루어진다. 비밀투표는 투표에 참여한 사람 자신이 누구에게 투표했는지를 감춤으로써 자유로울 수 있지만, 동시에 누군가에게 투표했다는 증거를 지워버린다. 그럼으로써 ‘대표하는 자’(선출되는 자)와 ‘대표되는 자’(선출하는 자) 사이에 단절이 생김으로써 대표하는 자는 대표되는 자의 구속을 받을 필요가 없다. 다른 말로 하면 선출된 자는 선출한 모든 사람을 대표하는 것이 아닌데도 선출한 모든 사람을 대표하는 것처럼 행동하며 선출한 사람은 또한 그렇게 믿는다. 따라서 제도적 대중 정당이 비밀투표로 이루어지는 보통선거에 의해 의회로 진출하여 국가의 통치 권력을 접수하려고 할 때, 그것이 자의적이든 또는 타의적이든 간에 부르주아 독재의 길로 나아갈 수밖에 없게 된다.

‘당’이 진보의 길로 나아가는 것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물론 위에서 말한 두 가지 형태의 ‘당’ 역시도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방향은 의도했든 또는 의도하지 않았든 간에 부르주아 독재로 귀결되었음을 위에서 보았다. 부르주아 독재의 이데올로기적 원리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오로지 타자를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목적으로서만 대하라!’ 여기에서 목적으로서 ‘타자’에 대립해 있는 ‘나’는 ‘수단’이 된다. 타자에 대해 나는 영원히 수단의 위치에 서 있을 뿐이다. 노동자인 나는 자본인 타자에 대해 자본의 자기 증식을 위한 영원한 수단의 위치에 있게 된다. 이것을 상품의 가치 형태에 놓게 되면 상품인 노동력으로서의 나는 항상 판매되어야 하는 상대적 가치 형태의 자리에만 있게 되고, 자본은 구매하는 등가 형태의 자리에만 있게 되는 것이다.

물론 노동자가 구매하는 등가형태의 자리에 있을 때가 있다. 그것은 자신의 노동력을 재생산하기 위한 소비 물품을 구매할 때이다. 이때 소비자로서의 노동자는 자본가 대등한, 아니 오히려 자본보다 우위에 서 있다는 느낌을 가지게 되며, 그리하여 자신이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운 주체인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소비자로서의 위치에 서려면 우선 전제가 되는 것은 노동자 자신의 노동력이 판매되어야 한다는 사실, 즉 자본에 의해 구매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것은 소비자의 영역에 서게 될 때 자주 망각되는 것이다. 이것을 맑스는 『자본론』에서 ‘화폐의 물신성’으로 설명하고 있다. 선출하는 자는 선거를 통해서만 선출되는 자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지만, 이 자유는 선출되는 자 또는 선출된 자가 결정해 놓은 보통 선거라는 국가 장치를 전제할 때만 생겨나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방향은 이제 ‘오로지 타자를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목적으로서만 대하는 노동자 자신을 만들어 내는 영역이 아니라, 타자를 수단으로서뿐만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는 노동자 자신을 생산하는 영역’을 구축하는 것이다. 이 영역은 현실적으로는 타자(자본)에 대해 오로지 수단으로서밖에 존재할 수밖에 없으면서도 이데올로기적으로는 자신(노동자)이 타자에 대해 목적이라는 느낌을 가지게 하여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가져오거나 정체성을 기만하게 만드는 영역이 아니다. 다시 말하자면 현실세계에서는 타자와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으며 그 타자에 대해 수단으로밖에 존재하고 있지만, 본래 자신은 누구로부터도 자유로운 개별적 개인이라는 이데아를 상기함으로써 이데아계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환상을 가지게 하는 영역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은 타자에게 수단이 되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타인은 지옥’이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인간 역시도 타자이므로 목적이 될 수밖에 없고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인간의 특성을 잘 발현시키는 사회가 바로 코뮌 사회이다. 맑스는 코뮌 사회를 ‘각기 자유로운 개인이 연대’하는 사회라고 말했다. 코뮌 사회의 실현은 위에서 말한 영역의 끊임없는 확장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이 영역은 ‘공장 밖’의 영역이다.

‘공장 안’이 노동자의 삶의 목적을 수단으로 삼아 자본의 자기 증식이라는 목적을 위한 자본의 고유한 운동 영역이라면, ‘공장 밖’은 노동자의 자기 자신의 삶의 목적이 목적 그 자체가 되는 노동자가 유적 존재로서의 인간으로서 자기 자신을 생산하는 영역이다. 이 영역은 자본이 간섭하지 않고 통제하지 않는 영역이다. 왜냐하면 이 영역은 자본의 생산 과정의 전제로서 자본 생산 과정의 외부에 있기 때문이다. 또한 ‘공장 안’은 개별적인 노동자에 대한 자본의 지배와 감시, 통제와 억압이 일어나는 장소이며, 이 자본의 힘이 이 개별적 노동자에 대해서 독립적이고 낯설며,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져야 하는 초역사적인 힘으로 느껴지게 되는 장소이다. 그에 반해 ‘공장 밖’은 자본의 지배와 감시, 통제와 감시를 벗어나서 유적인 인간으로서 노동자 자신의 삶을 자유의사에 따라 자유롭게 꾸려갈 수 있는 장소이다. 이 영역에서 노동자 계급은 온전히 유적 존재로서의 인간으로 자기 자신을 생산할 수 있다. 유적 존재의 실현은 모든 인간의 보편적 목적이다. 이 목적의 달성은 각기 자유의지로 타자를 위한 수단이 됨으로써 동시에 타자에 대해 목적으로서의 타자가 됨으로써 이루어진다. 또한 이 유적 존재의 실현은 맑스가 말하는 ‘각자의 필요에 따라’, 즉 각자의 욕구에 따라 분배, 교환, 소통되는 방식이다. 이 방식 속에서는 그 누구도 이익을 보거나 손해를 볼 수 없다. 왜냐하면 누구나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5. 진보는 여성 되기, 소수자 되기의 끊임없는 과정

진보는 누구나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상태를 뜻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는 최대 다수를 위하고 소수를 배제하는 사회이다. 즉 소수를 수단으로 삼고 최대 다수를 목적으로 대하는 사회이다. 그런데 이 최대 다수는 양적으로 볼 때 최소의 다수가 된다. 왜냐하면 최대 다수가 되는 기준이 바로 적대적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이고, 이 경쟁은 TV프로그램인 1박2일처럼 한 번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이루어지면서 지속적으로 ‘소수’를 배출하기 때문이다. 이제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지속적으로 ‘소수’가 등장하면서 이 소수는 양적으로 ‘최대’가 된다. ‘소수’는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기회조차 제공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진보는 ‘소수’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맑스는 노동을 통해 사회적 관계로서의 인간이 생산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노동은 자본을 위해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노동을 수행하는 임노동자로서의 노동자는 여전히 로빈슨 크루소와 같은 순수한 개별적인 개인으로서의 노동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노동은 노동자 계급이 자기 자신을 생산하는 노동이 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치(자본)의 실체로서의 추상노동은 항상 노동자의 살아 있는 구체노동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이 추상노동은 노동자의 임노동이다. 그리고 이 임노동을 뒷받침하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노동은 여성의 가사노동이다.1 가사노동은 노동자 계급의 기존의 노동력 재생산뿐만 아니라 새로운 노동력 생산의 기초이다. 새로운 노동력의 생산은 질적으로 새로운 ‘생산력’으로서의 새로운 ‘인간’의 생산이다. 그러므로 가사노동은 대자적 노동자 계급 또는 주체로서의 노동자 계급을 생산해 내는 물질적 기초이다. 그리고 계급투쟁의 발화 지점이라 할 수 있다.

성별 분업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리고 가사노동이 개별적인 여성의 몫으로 남게 될 때, 노동자의 자기 생산은 가사노동의 착취 구조를 통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또한 이렇게 생산된 노동자의 노동력은 다시금 자본의 착취 구조 속으로 편입된다. 이러한 것은 <가사노동(개별) = 노동자의 임금(사용가치)(보편) = 자본(보편)>의 등식으로 성립될 수 있으며, <가사노동(개별) --> 노동자의 임금(사용가치)(보편) --> 자본(보편)>이라는 일종의 먹이사슬 구조로 바뀌어 나타난다. 이런 구조 속에서 노동자 계급의 계급투쟁은 그 자체로 비민주적인 착취 구조를 자기 자신 안에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비민주적인 착취 구조를 깨나가는 것이 바로 ‘여성 되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성 되기’는 ‘소수자 되기’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그러면 여성은 소수자인가? 과연 소수자란 무엇인가? 양적인 측면에서 볼 때 여성은 소수자가 아니다. 세계의 절반이 여성이라고 했다. 그런데도 여성이 소수자라고 하는 것은 ‘소수자’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사실상 ‘소수자 되기’, ‘여성 되기’라는 말은 가타리가 썼던 말이다.

 

“모든 권력 구성체에 고유한 남근적 경매[부풀림]에서 이탈하는 남성은 가능한 다양한 양식들에 따라 여성 되기에 개입할 것입니다. 오직 이러한 조건에서만 그는 더욱이 동물, 우주, 문자(lettre), 색채, 음악이 될 수 있습니다.” (F. Guatttari, 『분자혁명』, 윤수종 옮김, 푸른 숲, 2004, 226쪽.)

 

“본래적인 여성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성적 극이란 없으며, 영원한 여성성의 극도 없습니다. 남성-여성 대립은 계급이나 카스트 등의 대립에 앞서 사회적 질서를 근거짓는 데 기여합니다. 거꾸로, 이 규범들을 침해하는 것, 기존 질서와 단절하는 것은 모두 일정한 방식으로 동성애나 동물 되기, 여성 되기 등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같은 책, 227쪽.)

 

“우리가 사람들을 범주-흑인 또는 백인, 남성 또는 여성-로 환원하려는 것은, 우리의 선입관, 즉 이원론적 환원과정을 통해 우리의 권력을 이들에게 행사하려는 욕구 때문입니다. 어떤 사랑도 일의적인 방식으로 서술할 수 없습니다. 프루스트(Proust)에게서 사랑은 결코 특정하게 동성애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항상 분열자 및 편집자의 요소를, 식물 되기, 여성 되기, 음악 되기를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같은 책, 227쪽.)

 

여기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여성 되기’의 주체는 “모든 권력 구성체에 고유한 남근적 경매에서” (의식적으로)2 “이탈하”고자 하고, 기존의 “규범들을 침해하”고 “기존 질서와” (의식적으로) “단절하”고자 하며, “항상 분열자 및 편집자의 요소”를 (의식적으로) “포함하”고자 하는 모든 자들이라 할 수 있다. 즉 현존의 자본주의 가부장제 질서와 규범에 의식적으로 저항하고자 하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여성 되기’는

 

“다른 형태의 되기[생성](예를 들면 슈만에게서처럼 아동 되기, 카프카에게서처럼 동물 되기, 노발리스에게서처럼 야채 되기, 베케트에게서처럼 광물 되기)의 준거” (같은 책, 225~226.)

 

이다. 즉 다른 ‘소수자 되기’의 토대가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소수자 역시도 자본주의 가부장제 질서와 규범에 (의식적으로) 저항하는 주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이 ‘여성 되기’를 통해 본 가타리의 문제의식은 맑스주의의 문제의식과 동일하다. 즉 자본주의에서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주체인 노동자 계급이 계급 주체로 서기 위해서는 소수자, 특히 여성 되기의 과정과 필수 불가결한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맑스주의에서 ‘여성 되기’, ‘소수자 되기’는 결국 인간관계의 문제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관계는 자유롭게 이루어지지 않으며, 오로지 화폐, 자본을 매개로 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노동자를 비롯한 모든 개인들은 로빈슨 크루소와 같은 순수하고 개별적인 개인으로서 자신의 생존을 위하여 자본과 대면할 수밖에 없고, 자본을 통해서만 자신을 표현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자면 이 개인들은 인간으로서 자신의 유적 보편성을 자본의 유사 보편성을 통해 가질 수밖에 없음으로써 자본에 의해 포섭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개별적 개인으로서의 노동자들이, 즉 상대적 등가형태의 자리에만 있을 수 있는 노동자들이 화폐, 결국엔 자본에 의해 모여질 수밖에 없게 되는데, 이것이 루카치가 말한 ‘사물화된 의식’을 가지는 즉자적 계급으로서의 노동자 계급의 모습이다. 그런데 즉자적 계급으로서의 노동자 계급은 자본,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주체로서의 ‘소수자’의 모습이 아니라 자본에 포획되어 자본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다수자’로서의 모습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저항은 어떻게 가능할까? 그리하여 노동자 계급이 계급 주체로서, 저항하는 주체로서의 ‘소수자’ 모습이 어떻게 가능할까?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는 모든 것을 자본으로 표현하도록 강제하는 가치의 동일성, 자본의 동일성을 깨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일단 자본의 동일성은 아래와 같이 상대적 가치형태에 있던 것을 등가형태로, 등가형태에 있던 것을 상대적 가치형태로 뒤바꾸는 것으로부터 해체된다.

 

노동자 계급 = p․화폐(자본) --> p․화폐(자본) = 노동자 계급 [도식2]

 

그런데 이러한 해체는 자본의 동일성의 비밀을 캐물어 들어가 해명하는 데서 출발한다. 가치, 자본의 동일성은 ‘차이’라는 관계를 통해 나타난다. 맑스는 『자본』상품 장의 ‘단순한 가치 형태’의 절에서 ‘x량의 상품A = y량의 상품B’라는 등식을 통해 이 등식이 성립하는 것이 노동 일반으로서의 추상노동, 즉 자연적 노동시간이라는 공통요소(동일성)가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것이 맑스 생각 전체라고 보아서는 안 된다. 맑스는 『자본』을 통해서 자본 운동의 모순을 밝히고자 하였고, 고전 정치경제학의 노동가치론의 모순을 비판적으로 고찰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만일 이것이 맑스 생각의 전체라고 본다면 맑스를 고전 정치경제학의 아류쯤으로 보는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 된다. 이러한 동일성의 이면에는 무엇이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렇지 못할 경우 자본의 동일성과 똑같은 동일성을 노동자 계급이 가지고 있는 것이 된다.

맑스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새로운 사회의 도래에 대한 희망의 싹을 보는 것은 바로 이 단순한 가치 형태 속에서이다. 이는 맑스가 공산주의 사회를 ‘필요한 만큼 배분 받는 사회’라고 했을 때, 사회 구성원 각자가 서로의 욕구(필요)의 차이를 인정하고 동의한다는 점을 바탕으로 함을 암시하고 있는 대목이다. 단순한 가치형태는 바로 서로 질적으로 다른 욕구(필요)를 인정하고 동의하기 때문에 교환이 이루어짐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즉 단순히 상품 속에 들어 있는 노동량(자연적인 노동시간)이 동일하기(동일성) 때문에 교환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 주며, 교환의 전제가 바로 서로 다른 욕구(필요)의 인정과 동의라는 것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3 ‘자본’의 동일성은 이 차이의 인정과 동의 관계를 바탕으로 해서만 유지할 수 있다. 헤겔은 이 동일성에 최후의 목적을 두고 종지부를 찍었다. 그래서 자본의 동일성이 가지는 모순과 횡포를 두고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맑스는 이러한 헤겔을, 즉 머리로 서 있는 헤겔을 뒤집었다. 동일성은 차이를 긍정하고 동의할 때 생성되는 것이다. 차이를 부정하면 동일성은 사라진다. 왜냐하면 차이와 동일성은 관계 속에서 형성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자본의 동일성을 깨는 것은 차이를 부각시키는 것인데, 이는 부정의 단계에만 머무르는 것이 된다. 이 동일성을 깨고서 이 동일성에 바탕한 관계 방식을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바꾸지 않는 한 똑같은 관계 방식을 되풀이하게 된다. 즉 등가형태에 자리하는 얼굴마담만이 달라질 뿐이라는 것이다. 이럴 때 차이는 차별로 변하게 된다. 상대적 가치형태에 오는 것들, 즉 개별적인 것들 그리고 자본과 관계를 가지지 못한 개별적인 것들은 자본의 보편성의 기준에 따라 양적인 차이만을 가진 차별의 대상이 된다. 왜냐하면 자본은 질적 차이를 가지고 있지 못한 양적인 확대 재생산 측면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부정의 단계에서 부정의 부정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이것은 곧 자본의 동일성의 해체를 넘어서서 차이의 인정과 동의의 관계를 새롭게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제의 답은 차이의 생성의 변증법과 연관되어 있다. 차이의 생성의 변증법은 상대적 가치형태에 있는 개별을 등가형태의 보편으로 인정해 주는 것이다. 즉 개별과 보편의 관계의 변증법에 기인하는 것이다. 차이의 생성은 변증법(변화와 생성의 논리)을 배제하고서는 형성될 수 없다. 관계의 질적 변화, 발전의 변증법 없는, 또는 배제하는 차이는 어떤 차이도 가지지 못한다.

소수자 되기, 여성 되기는 이 관계의 변증법에 따라 끊임없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수자 되기, 여성 되기는 부정의 부정 변증법에 기초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이는 자본의 동일성만 깬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자본의 동일성만을 깬다는 것은 부정의 단계에 머무르는 것으로 소수자 되기, 여성 되기의 필요조건일 따름이지 충분조건은 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부정의 단계에 머무르는 노동자 계급의 중심성과 당파성은 해체되어야 한다. 노동자 계급의 중심성, 당파성은 바로 이러한 부정의 단계의 해체, 즉 부정의 부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6. 진지전과 게릴라전의 통일로서의 진보.

부정의 부정의 과정은 노동자 계급이 ‘즉자적 계급’에서 ‘대자적 계급’으로 구성되는 과정이다. 그렇다면 이 과정은 어떻게 구성될 수 있을까? 계급은 그 자체로 “진지”4이며, 또한 그렇게 돼야 한다. ‘즉자적’ 계급으로서의 노동자 계급은 보편으로서의 자본의 운동 과정의 모순에 따라 보편에 반대되는 개별로서의 주체의 참호를 구성한다.5 이러한 참호는 대체로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노동조합은 자본과 직접적으로 대면하는 최전선에 배치되어 있는 선봉부대이다. 그런데 이러한 참호는 각 개별 자본(기업) 별로 이루어지는 고립적 분산적인 것이기 때문에 총 자본의 측면에서 전 방위적인 포위 공격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이럴 경우 고립되고 분산된 참호인 노동조합은 얼마 지나지 않아 궤멸하거나 아니면 자본에 투항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총자본에 대항하는 총노동의 진지가 없기 때문이다.

‘즉자적’ 계급으로서의 노동자 계급은 개별화되고 원자화되어 있다. 즉 노동자 계급은 단일화되어 있지 않다. 노동자 계급들은 그 자체로 이질적이며 다원화되어 있다. 따라서 분열되어 있다.6 이 분열을 줄여 나가기 위한 물질적 기반과 조건들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대자적’ 계급, 즉 구체적인 계급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며, 이 과정이 바로 계급투쟁의 과정이며 총노동의 진지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총노동의 진지를 만들어 가는 과정은 계급투쟁의 과정으로서 자연, 사회의 총체적 관계를 만들어 간다는 것이고 이는 곧 소수자 되기, 여성 되기의 끊임없는 과정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순서의 도식들로 나타나게 된다.7

[여성, 성 소수자, 장애인, 빈민....] = 노동자 계급 [도식1]

 

노동자 계급 = [여성, 성 소수자, 장애인, 빈민....]   [도식2]

 

 [노동자계급, 어린이, 청소년 학생, 노인계층....] = [여성, 성 소수자, 장애인, 빈민....]

또는  [여성, 성 소수자, 장애인, 빈민....]  =  [노동자계급, 어린이, 청소년 학생, 노인계층....] [도식3]

 

[도식1]은 자본의 동일성, 보편성에 대한 부정의 형태이다. 그러나 이것은 자본을 단순히 노동자 계급으로 대체한 것뿐이다. 이것은 화폐, 자본이 서 있던 등가형태의 자리를 노동자가 단순히 대신한다는 의미의 동일성, 보편성을 뜻하는 것이고, 그 동일성, 보편성은 화폐, 자본이 모든 상품(또는 상품 소유자)을 추상적이고 자신에게로 지양되어야 할, 다시 말해서 환원되어야 할 개별자로 만들고, 그 개별자들을 동일성을 지닌 보편자로서의 자신에게로 환원시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또 다른 얼굴의 전체주의의 모습을 가진 사회를 만들 뿐이다.

노동자 계급의 자기 생산은 양적인 자기 생산인 자본 자신의 생산과는 달리 질적으로 새로운 자기 생산이다. 질적으로 새로운 생산은 자본처럼 늘 등가형태의 자리, 즉 동일성과 보편성의 자리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도식2]에서처럼 노동자 계급이 상대적 가치형태, 즉 차이와 개별성의 자리에 오고 동일성, 보편성의 자리에 여성을 비롯한 여러 소수자들이 온다. 여러 소수자 되기를 통해서 노동자 계급은 자기 자신을 새롭게 생산하고 표현할 수 있다. 계급투쟁은 이제 등가형태라는 보편성과 동일성의 자리에 끊임없이 소수자의 문제를 위치시킴으로써 노동자 계급 자신을 자유로운 사회적 개인으로서의 기초를 만들어 낸다.

공산주의 사회는 각기의 자유로운 사회적인 개인들이 자유롭게 연대의 관계를 맺는 사회이다. 물론 [도식2]는 공산주의 사회의 필요조건일 뿐이다. 만일 [도식2]에 노동자가 상대적 가치형태의 자리에만 머문다면 이것은 『자본』에서 전개된 가치형태가 일반적 가치형태로 이행하는 것처럼 [도식1]로 되돌아갈 수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도식2]에서의 노동자 계급은 『자본』의 전개된 가치형태에서 상대적 가치형태에 있는 개별 상품과 같은 순수한 개별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도식2]에서 좌변 항에 있는 노동자 계급은 이미 자신 안에 차이를 지닌 다양한 관계들을 포함하는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노동자 계급은 [도식1]에서처럼 이미 보편성을 지닌 우변 항을 거쳐 왔기 때문이다. 이제 [도식2]는 [도식3]으로 넘어간다.

그리하여 [도식3]의 좌측 등식의 좌변 항은 노동자 계급뿐만 아니라 여러 다른 계층이 올 수 있는데, 이는 『자본』에서의 일반적 가치형태의 좌변 항인 상대적 가치형태의 자리에 오는 상품들처럼 자기들끼리 아무런 연관 관계가 없는 것이 아니라 서로서로 연관되어 있다. 이러한 것은 우변 항에 있는 여성 계층(문제)과 다른 계층 사이에서도 동일하게 일어난다. 그럼으로써 노동자 계급을 비롯한 모든 계층은 다양한 상황 속에서 다양한 연대 관계를 가질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소수자 되기가 이루어지기 어렵다. 소수자 되기란 끊임없이 좌변 항과 우변 항의 위치를 지속적이고도 반복적으로 바꾸는 과정 속에 있는 것이다.8 이것은 보편이 개별이 되며 개별이 보편이 되는 끊임없는 과정이며, 또한 다시 보편으로 돌아갔을 때 이 보편은 이전의 보편과는 내용상 질적으로 차이가 있는 보편이며, 개별 역시도 이전의 개별과는 내용상 질적으로 차이가 있는 다른 개별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질적으로 새로운 인간의 생산과정이며, 생산력이 질적으로 바뀌는 과정이며, 그에 따라 새로운 환경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며, 이 새로운 환경은 곧 새로운 인간을 생산해 내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과정이 자본의 재생산 구조를 깨뜨려서 질적으로 새로운 인간관계 구조를 만들어 내는 계급투쟁의 과정이며 노동자 계급의 진지를 확보하는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진지화는 계급해방, 인간해방으로서의 노동해방의 기본 핵심 전략이다.

계급투쟁의 진지는 홍길동처럼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소수자 되기를 통해 나타나는 각각의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대이다. 노동자 계급은 “수은방울”9처럼 자신의 관계 형성을 끊임없이 바꿔 나가면서 자본의 공격에 저항해야 하며 동시에 그 공격을 무화시켜야 한다. 노동자 계급이 노동자, 특히 임노동자로서 자신의 모습을 고정시킨다면 그것은 ‘가만히 있을 테니 때리시오’와 같은 형국이라고 할 수 있다. 노동자 계급은 가타리가 말했던 것처럼 ‘되기(becoming)’, 즉 소수자 되기의 전략을 통해 자본에 저항할 수 있고 자신을 방어할 수 있다. 특히 이 소수자 되기의 토대는 바로 여성 되기이다. 노동자 계급은 소수자 되기로서 여성 되기의 기동성과 유연성이라는 핵심전략을 채택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해방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 여성 되기는 진지 없이 치고 빠지는 단순한 게릴라전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정규군대를 중심으로 하는 단순한 진지전도 아니다.101112 싸움의 헤게모니 장악을 통한 계급투쟁 진지를 구축, 확보함으로써 진지전을 가능하게 하는 것과 동시에 자신의 정체성을 하나의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끊임없이 옮길 수 있는, 다시 말하자면 개별(상대적 가치형태의 자리)과 보편(등가형태의 자리)을 끊임없이 넘나드는 기동전을 펼치는 게릴라전이라 할 수 있다. 이 여성 되기라는 게릴라전이야말로 노동해방의 핵심 열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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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여기서 가사노동을 본래부터 여성의 담당이냐고 이의제기할 수 있다. 정당한 이의제기이다. 그런데 여기서 ‘여성’의 가사노동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러한 성별 분업이 일반적 경향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 뿐이다. 해체되어야 할 것은 바로 자본주의 하에서의 이러한 성별 분업이다. 다른 한편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가치=상품=화폐=자본>. 이것의 최고의 법률적 형태는 국가이다. 그런데 이 국가는 가부장적이며 남성 지배적인 국가이다. 왜냐하면 노동자의 임노동의 물적 토대는 바로 여성의 가사노동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가부장제에서 여성의 노동, 특히 가사노동은 남성의 화폐(임금)라는 사물의 형태로 소외된다.텍스트로 돌아가기
  2. 여기서 ‘의식적으로’라는 말은 맑스주의적으로 볼 때 ‘대자적’이라는 말과 유사한 말이다. 그러므로 이 ‘의식적’이라는 말에 괄호를 친 것은 ‘대자적’인 것뿐만 아니라 ‘즉자적’인 것 모두를 포괄하기 위해서이다. 앞으로 ‘의식적’이라는 말에 괄호를 칠 경우, 이러한 의미를 담고 있음을 참고하기 바란다. 텍스트로 돌아가기
  3. 그람시가 말하는 ‘동의’란 바로 ‘차이’에 의거한 동의라고 할 수 있다. 그람시가 시민사회에서 동의를 바탕으로 한 진지 구축을 이야기할 때, 그 동의는 시민사회 내에서 자본이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한 자본의 ‘동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바로 이 자본의 동의와 질적으로 다르면서도 이 자본의 동의의 전제가 되는 동의이다. 이러한 동의는 바로 그람시의 사회주의관으로 연결된다고 본다. 텍스트로 돌아가기
  4. K. Marx, Das Kapital, MEW 25, S. 99 텍스트로 돌아가기
  5. 이는 들뢰즈의 기계들의 관계 방식에서 이접적 종합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이접적 종합은 기계들이 주체로서 자신을 욕망이라는 매끄러운 표면에 ‘홈’을 파면서 등록, 기입하는 과정이다. 여기에서 ‘홈’은 바로 노동자 계급의 ‘참호’를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홈’, ‘참호’는 자본에 의해 쉽게 함락되고 메꿔지는 것이다. 이때의 주체는 들뢰즈의 일시적, 분열적 주체일 따름이다. 텍스트로 돌아가기
  6. 이와 관련하여 리보위츠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노동자들이 이질적인 인간들로 존재한다는 점을 생각해 보자. 그들 각각의 생산에 고유한 조건들이 지닌 차이점(자본 자체가 만들어 내는 분열뿐만 아니라)들을 감안한다면, 노동자들을 분열된 존재로, 즉 서로 경쟁하는 임노동자들로-자본에 대항하는 단일한 존재가 아니라-파악할 수 있는 구체적인 물질적 근거가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요컨대 분석상 노동자 계급을 단일한 존재로 파악한다는 것은, 실제로 노동자 계급이 자신을 단일한 존재로 인식하거나, 또는 단일한 존재로 행동해 나간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또한 노동자 계급이 그렇게 행동할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도 아니다).” 마이클 리보위츠, 『자본론을 넘어서』, 홍기빈 옮김, 백의, 1999, 255쪽.  텍스트로 돌아가기
  7. 아래에 나올 도식들은 맑스 『자본』의 상품 가치 형태에서 나오는 도식들을 응용한 도식들이다. 텍스트로 돌아가기
  8. 이는 들뢰즈의 ‘차이의 반복’과 유사하다 할 수 있다. 들뢰즈는 동일성보다는 차이의 존재론적 우월성을 강조한다. 더 나아가 들뢰즈는 동일성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다. 이는 들뢰즈가 반변증법론자이자 반헤겔주의자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반레겔주의자로서의 맑스와 유사한 점은 바로 상품의 가치라는 동일성이 바로 질적인 차이를 가지고 있는 두 상품 사이의 관계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는 데에 있다. 그러므로 맑스에게서 자기 동일성을 추구하려면 차이의 생성을 전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동일성이란 차이를 내포하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러므로 헤겔처럼 완전한 동일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들뢰즈가 비판하고 있듯이 개념적인 차원에서만 가능할 뿐 현실에서는 가능하지 않다. 맑스 역시도 이 점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머리로 서 있는 헤겔의 변증법을 바로 뒤집고자 한 것이다. G. 들뢰즈, 『차이와 반복』, 김상환 옮김, 민음사, 2004, <서론 : 반복과 차이> 참조. 텍스트로 돌아가기
  9. “빨치산 부대들은 방어 시 가능한 한 공격목표 대상이 되지 않거나 그 대상권을 벗어나면서도 한편으로는 최대의 안전도와 공격력을 보유하기 위해 전개(展開)(군사용어로서 종으로 집중된 부대가 공격을 행하기 위해 종횡으로 공격대형을 전개함)되었다. 수은방울처럼 게릴라 부대들은 단일한 임무를 위해 신속하게 대부대로 결집될 수 있었으며 또 독일군이 반격을 취할 때에는 마찬가지로 재빠르게 십여 개의 분대들로 분해되어 흩어질 수도 있었다. 방어의 기본 이론이란 통상적인 전력 비교에 따라 적과의 접전을 피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기동성과 유연성이 빨치산 대원들의 가장 강력한 전술적 특성이 되었다.” 브룩스 맥클루어, 「러시아의 지하군대」, 『현대 게릴라전 연구』, 오상카 외 지음, 편집부 편역, 세계, 1985, 64쪽 참조. 텍스트로 돌아가기
  10. 먼저 정규군대를 중심으로 하는 진지전에 관해서는 영화 <랜드 앤 프리덤>에서 무정부주의자와 품의 군사조직이 스탈린 군대에 의해 강제적으로 해산되는 장면을 참고하면 되겠다. 이는 프랑코와 그를 원조해 주는 제국주의 정규군대에 맞서기 위해서는 일사불란한 정규군대가 필요함을 역설하는 것이다. 이는 일면적으로 타당하다. 각각의 게릴라 소부대가 서로간의 의사소통 관계(유기적 관계) 없이 각 소부대가 유기적 관계를 가지고 있는 상대방의 정규군에게 각개격파 당하기 쉽기 때문이다. 이는 자본주의 사회의 커다란 특성인 원자화, 개별화와 관련이 깊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각 개인이나 소집단은 개별화, 원자화되어 있고 이 개별화, 원자화되어 있는 개인들이나 소집단들을 자본이 관계 맺게 하며, 만일 노동조합처럼 자본에 대항하는 경우 각개격파하여 궤멸시킨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탈 중앙집권적인 게릴라 전의 위험에 대하여 중앙집권적인 정규군의 필요성을 역설하게 된 것이다.  텍스트로 돌아가기
  11. 그런데 과도하게 중앙집권적 정규군에 집중할 경우, 즉 게릴라를 정규군으로 만드는 데 집중할 경우 싸움은 백전백패를 당할 게 뻔하다. 왜냐하면 질적으로 동일한 형식(중앙집권제)으로는 양적인 것만이 승패의 요인이 되고 양적으로 불리한 정규군화된 게릴라들은 이미 지는 싸움을 시작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는 1936년 스페인 내전이 잘 보여 준다고 하겠다. 정규군에 대한 게릴라들의 싸움의 승패는 중앙집권화를 넘어서면서도 질적으로 새로운 관계 틀이 좌우한다고 보겠다. 탈 중앙집권적인 게릴라도 아니고, 중앙집권적인 정규군도 아니라면 무엇일까? 2차 세계대전 중의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베트남전>의 보기를 들어서 그 싹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텍스트로 돌아가기
  12. 전력이 부족한 상태에 있는 측의 싸움 형태는 게릴라전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게릴라전이 눈부신 전과를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질 수밖에 없었던 경우가 바로 이순신의 경우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순신은 [전투]에서 승리하였지만 [전쟁]에서는 패배한 장수라는 것이다. 이순신의 싸움은 게릴라전의 전형을 보여 준다. 이순신은 서남 해안의 물길 지형을 이용해서 치고 빠지는 전술을 택했다. 그리고 그 전술을 위한 무기도 개발했다. 이순신은 절대로 정규군들이 하는 식으로 일대일로 붙는 싸움을 하지 않았다. 이순신은 부하에게 도망가는 적을 절대로 쫓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다. 그런데 이순신은 마지막 노량 해전 때 도망가는 적을 쫓아 관음포구로 향해 갔다. 왜 이순신은 그랬을까? 이순신은 더 이상 게릴라전이 불가능함을 알고 있었다. 명나라 육군과 수군의 수모를 받으면서도 육지를 탈환해서 앞으로의 싸움을 진지전으로 끌어가고자 하였다. 싸움의 힘을 끊임없이 재생산하고 새로이 생산할 수 있는 진지로서의 육지의 탈환! 이것이 이순신이 무리하게 도망가는 왜군을 뒤쫓던 이유였다. 진지 없는 게릴라전은 결국 패배하게 돼 있다. 해방 후 남쪽의 빨치산의 최후는 바로 이 경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싸움의 힘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면서 새로이 생산할 수 있는 진지를 어디서 어떻게 만들 수 있을 것인가? 이 문제는 노동자 계급이 계급투쟁의 힘을 어디서 어떻게 끊임없이 재생산하면서 새로이 생산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와 직결된다.  텍스트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