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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장. 전통의 단절(18세기 말과 19세기 초 : 영국, 미국 및 프랑스)

▲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 : 1757 - 1827) ▼

- “미술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접근에 있어서 가장 두드러진 예는 고야보다 열한 살 아래인 영국의 시인이자 신비주의자인 블레이크였다.” 그는 “자기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에 사는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었다. 그는 아카데미의 관학적 미술을 경멸했다.” (488쪽)

- “도판 321(<태고 적부터 ‘계신’ 이>, p.491)은 《유럽, 예언서》라는 자작 시집에 곁들인 삽화 가운데 하나이다.” (488쪽)

- “블레이크가 그린 것은 깊은 바다 앞에서 컴퍼스를 세우고 있는 하나님의 이런 장엄한 환상이다, 이 천지창조의 그림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모습은 어딘가 미켈란젤로의 숭배자였다 그러나 블레이크의 손을 거치면서 하나님의 모습은 몽환적이고 환상적으로 되어 갔다.” (490쪽)

- “사실상 블레이크는 자기 나름의 독특한 신화를 창조했으며 환상 속의 형상은 엄격하게 말해 하나님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블레이크의 상상 속의 한 존재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는 이를 유리즌(Urizen : 이성을 상징-역주)이라 불렀다.” (490쪽)

- “비록 블레이크가 유리즌을 세계의 창조자로 생각하기는 했으나 그는 세계를 악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러한 세계의 창조자도 사악한 영혼을 지녔다고 생각했다. 그 때문에 이 환상을 기분 나쁜 악몽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컴퍼스는 마치 어둡고 폭풍우 몰아치는 밤의 번갯불처럼 보인다.” (490쪽)

- “블레이크는 환상에 너무 깊이 빠진 나머지 현실세계를 그리길 거부하고 오로지 자기 내면의 눈에만 의존했다.” (490쪽)

- “중세의 미술가들처럼 그는 정확한 묘사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꿈속의 형상 하나하나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으므로 단순한 정확성의 문제는 그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 같이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는 르네상스 이래로 공인된 전통의 규범을 의식적으로 포기한 최초의 화가였다.” (490쪽)

 

▲ J. M. W. 터너( J. M. W. Tuner : 1775 - 1851) ▼

- “주제를 마음대로 선택하는 새로운 자유를 얻게 된 화가들이 가장 많은 혜택을 입었던 분야는 풍경화였다. 그때까지 풍경화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져왔다. 특히 시골의 집이나 정원, 또는 멋진 경치를 그려 생계를 꾸려왔던 화가들은 진정한 예술가로서의 대우를 받지 못하였다. 이러한 태도는 18세기 말엽 낭만주의 정신을 통해 다소 바뀌었으며 위대한 화가들은 풍경화를 새로운 권위로 끌어올리는 것을 일생의 목표로 삼았다.” (490쪽)

- “여기서도 전통은 한편으로 도움을 주면서도 한편으로는 장애물이 되었다. 같은 세대에 속하는 두 명의 영국화가가 서로 얼마나 다른 방식으로 이 문제에 접근하였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흥미 있는 일이다.” (490쪽)

- “그 중 하나는 터너이고 다른 한 사람은 존 컨스터블이다. 이 두 사람을 비교하는 것은 레이놀즈와 게인즈버러 사이의 대조를 연상시키는 무엇이 있다.” (490쪽)

- “그 역시 레이놀즈와 마찬가지로 전통의 문제에 사로잡혀 있었다. 클로드 로랭의 유명한 풍경화(p.396, 도판 255, <아폴론에게 제물을 바치는 풍경>)를 능가하지는 못해도 같은 수준에는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 그가 지닌 일생의 야심이었다. 그는 자신의 작품과 스케치를 국가에 기증하면서 그 중 한 작품(도판 322, <카르타고를 건설하는 디도>, p.492)를 항상 클로드 로랭의 작품과 나란히 전시해 줄 것을 명백한 조건으로 내세웠다.” (492쪽)

- “클로드의 그림이 지닌 미를 단순함과 고요한, 그의 환상세계가 지니는 명료함과 구체성, 그리고 어떠한 요란한 색채도 없다는 점에 있었다. 터너 또한 빛으로 가득하고, 눈부신 아름다움을 지닌 환상세계를 그렸지만 그것은 정적인 세계가 아니라 동적인 세계였으며 단순한 조화의 세계가 아니라 현란하고 화려한 세계였다.” (492쪽) (밑줄 친 부분은 낭만주의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 “그의 최고의 걸작들은 사실상 우리에게 웅다한 자연의 가장 낭만적이고 숭고한 모습을 보여준다. 도판 323(<눈보라 속의 증기선>, p.493)은 터너의 작품 중 가장 대담한 것 가운데 하나로서 눈보라 속의 증기선을 그린 것이다. 이 소용돌이치는 구도를 데 블리헤르의 바다 풍경(p.418, 도판 271, <해풍에 흔들리는 네덜란드 군함과 수많은 범선들>)과 비교해보면 터너의 접근방식이 얼마나 대담한 것인지 알 수 있다.” (492쪽)

-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데 블리헤르”의 “그림을 보고 이러한 배들을 다시 만들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터너의 그림을 보고 19세기의 증기선을 다시 만들어낼 수 없을 것이다. 그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은 시커먼 선체ㅘ 돛대에서 펄럭이는 깃발, 사나운 바다의 위협적인 돌풍과 대결하는 투쟁의 인상뿐이다. 마치 휘몰아치는 바람과 파도의 충격을 몸으로 느낄 수 있을 것만 같다. 세세한 부분은 살펴볼 겨를이 없다.” (492-4쪽)

- “낭만주의 시를 읽거나 낭만주의 음악을 들을 때에 우리가 상상하게 되는 것은 영혼을 뒤흔들고 마음을 압도하는 이러한 폭풍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터너에게 있어서 자연은 항상 인간의 감정을 반영하고 표현한다.” (494쪽)

 

▲ 존 컨스터블(John Constable : 1776 - 1837) ▼

- "컨스터블의 생각은 터너와는 매우 달랐다. 터너가 경쟁하고 능가하기를 원했던 전통이라는 것이 그에게는 단지 장애물에 지나지 않았다.“ (494쪽)

- “그는 클로드 로랭의 눈이 아니라 그 자신의 눈으로 본 것을 그리려고 했다. 그는 게인즈버러가 그만둔 것에서 다시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p.470, 도판 307, <시골풍경>). 그러나 게인즈버러조차도 여전히 전통적인 기준에서 보아 ‘한 폭의 그림 같다(picturesque)’고 생각될 만한 소재들을 선택했으며 여전히 자연을 목가적인 장면들을 위한 아늑한 무대로 보았다. 컨스터블에게는 이러한 모든 생각들이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진실만을 원했다.” (494-5쪽)

- “컨스터블은 대담한 혁신으로 사람들에게 추격을 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가 원한 것은 그저 자신의 눈에 충실하려고 하는 것뿐이었다.” (496쪽)

- “그의 습작(도판 324, <나무줄기의 습작>, p.494)들은 흔히 완성된 그의 작품들보다 훨씬 대담하다. 그러한 아직 일반 대중이 순간적인 인상의 기록을 전시할 만한 가치 있는 작품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시기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완성된 작품들은 처음 전시되었을 때 큰 물의를 불러일으켰다.” (496쪽)

- “도판 325(<건초마차>, p.495)는 1824년 파리에서 공개되어 컨스터블을 일약 유명하게 만든 작품이다.” (496쪽)

- 컨스터블은 “실제의 자연보다 더 그럴 듯하게 보이도록 묘사하는 것을 거부하였고 가식적인 포즈나 허세가 전혀 없는” 태도를 “성실”하게 견지하려고 했다. (496-7쪽)

 

▲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 : 1774 - 1840) ▼

- “전통과의 단절은 화가들에게 터너나 컨스터블의 작품에서 구체화된 두 가지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그들은 붓과 물감으로 시를 쓰는 시인이 되어 감동적이고 극적인 효과를 추구할 수 있었다. 또 자기 앞에 놓여진 소재들을 성실하게 묘사하여 끈질기고 정직하게 그것을 탐구하려는 결심을 할 수 있었다.” (497쪽)

- “유럽의 낭만주의 화가 가운데는 터너와 동시대 사람인 프리드리히 같은 위대한 미술가들이 있었다.” (497쪽)

- “프리드리히의 풍경화는 슈베르트의 가곡을 통하여 우리가 보다 친숙하게 알고 있는 당시의 낭만적 서정시의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그가 그린 황량한 산의 모습(도판 326, <살레지아 산의 풍경>, p.496)은 그 발상에 있어서 시와 가까운 중국 산수화(p.153, 도판 98, <우산도>)의 정신을 상기시키기까지 한다.” (4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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