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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버 국가론 추가[펌글]

적린님의 [그레이버 국가론 추가] 에 관련된 글.

 

적린님의 [그레이버, 국가론에 대한 단상] 에 관련된 글.

 

고소 이와사부로와 그레이버 대담집(원문은 일어인데 번역해 준 사람들이 있음)에서 아주 조금 손봐 일부 긁어 올린다. 올려도 괜찮겠지? ^^; 이 대담집, 정말 재미있다. 개념적으로 흥미로운 것들도 많고 구체적인 부분에서도 흥미로운 게 많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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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소: 『아나키스트 인류학의 단상들』에서 당신은 처음에는 국가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은 권력구조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레이버: 그렇습니다. 그것들은 일반적으로 '추장제'[=일어 원문에는 '수장제首長制']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명칭은 별로 좋지 않습니다. 어쨌든 중점은 국민국가의 망령이 지나치게 강해져서 그것을 과거의 역사에 과도하게 투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에 관해 클라스트르는 (그리고 월러스틴 등도) 비판적인 시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국민국가라는 모델을 과거에 투영하고 있지만, 그 때 그것을 '사회'라고 하는 언어, 습관, 제도, 경계가 명료하게 떼어낼 수 있는 고유한 실체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상태는 인간의 역사에 있어서 거의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역사를 통해서 정치/경제기구가 가지는 실제의 형태는 이것과 많이 틀립니다.


우리가 국가라고 부르는 것은, 실제로 그것들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 존재한다고 상상하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어떤 의미에서 유토피아적인 이상[=ideal. 일어 원문에는 '망상']인 것입니다. 따라서 국가는 두 가지 요소가 합체된 결과물로 만들어져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유토피아적인 이상과 급습적인 약탈기구입니다. 이 둘 사이에는 원리적으로 어떤 관계도 없지만 실제로는 합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동남아시아의 인도어계의 국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것들은 기본적으로 단지 마음 내키는 대로 상인이나 농민에게 강탈하기 보다는 그들의 부를 제도적으로 빨아올리는 편이 이득이라고 이해한 해적이나 산적에 의해 설립된 것입니다. 거기에서 그들은 불교도든, 힌두교도든, 그 누구라도 인도에서 유랑하는 성자를 데려와 거대한 우주론적 체계를 만들어내게 해서, 그것을 정통화한다는 안전판을 사용한 것입니다. 우주론적 체계란 것은 항상 우주전역이 어떤 전체화의 원리에 의해 조정되어 있다는 절대적/신적인 힘의 망상입니다. 그것은 어떤 국가도 실제로는 끌어 낼 수 없는 힘에 대한 환상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국가의 우주론적 도취는 실제로 지상에 존재하며 경험되는 것과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지배자가 복잡한 천체적인 장식으로 거대사원을 만들거나 할 때, 그것에 가깝게 보이는 것은 있어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붕괴합니다. 하여간 그 이유가 무엇이든, 국가는 항상 전능한 권력의 환상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제임스 스콧이 『지배와 저항의 기술』에서 주장하고 있듯이 주인과 노예와 같은 두 개의 불평등한 역관계가 존재할 때, 양 쪽 모두 역사를 날조하기 위해 협력하고 있는 듯한 사태가 진행합니다. 권력을 방위하기 위한 제1선은 모두가 공공의 장에서는 그것을 믿고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주인들은 플랜테이션이 진심으로 노예들을 생각하는 부권적인[?? 이건 번역자에게 물어봐야 할 듯] 제도인 것처럼 보이게 하고 노예들도 말을 맞추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집에 돌아가면 양쪽 모두 그것을 터무니없는 것이라 비웃고 있었던 것입니다 (웃음)


그러므로 권력구축의 제1선은 아무도 믿고 있지 않는 게임에 모두를 참가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좀처럼 넘어서기 힘든 불가시(不可視)의 선입니다. 그리고 권력에 도전할 때, 우선 우리는 모두가 무대 뒤에서 말하고 있는 것을 무대 앞에서 말해보고 그것이 처벌 받게 되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항상 무엇을 하면 좋을까, 무엇을 하면 안 될까 실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스콧이 '공식기록official transcript' 이라고 부르는, 역사기록에 쓰여있는 것은 사람들이 실제로 믿고 있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실제로 효력이 있는 권력의 외연(外延)이란, 그 초기에는 대략 왕의 신체로부터 사방 100야드 정도 아니었을까요. 또는 왕이 바라볼 수 있는 범위정도인 것입니다. 그래서 왕은 언덕 위에 있을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국가의 현전은 동일하지 않으며, 또한 예측 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산발적(sporadic)인 것입니다. 우리들은 언제 국가가 모습을 드러낼지 확실히는 알지 못합니다. 국가개입에는 어딘가 엉터리같은 구석이 있습니다. 눈먼 거인이 닥치는 대로 휘두르며 달려드는 것과 유사합니다. 그러나 이 엉터리와 비일관성이 위협의 방법으로서 대단히 효과적입니다.


직접행동을 뉴욕에서 하는 경우와 유럽의 도시에서 하는 경우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국가권력은 뉴욕에서는 철저하게 통제해 왔습니다. 워싱턴도 그에 가깝게 통제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뉴욕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 뉴욕에서는 일정한 수의 사람이 집합하면 즉시 경찰대가 나타나 법을 강요합니다. 파리나 밀라노에서는 약간 틀립니다. 제노바 직후의 밀라노에서는 경찰대가 어느 시점에 한꺼번에 사라져 버려 데모대 마음 내키는 대로 하게 했습니다. 나는 유럽의 많은 도시에서 비슷한 상황을 여러 번 봤습니다. 어떤 때 경찰은 숨어 있다가 소수의 그룹을 공격하거나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그들의 행동은 산발적입니다. 남반구의 독재 국가들에서 대부분의 시간 동안 국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돌연히 대학살이 일어납니다. 세계제국의 진앙인 뉴욕은 국가가 항상 통제에 예민해, 일순간도 거리를 내주지 않는 드문 장소일지도 모릅니다. 어찌됐든 국가는 본성적으로 산발적인 것입니다. 우주론적 차원에서 국가는 절대성을 주장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회적인 통제의 차원에서 [절대적 체계를] 재생산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이것의 결론은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국가를 본질적으로 실현불가능한 유토피아적인 계획이라 하든, 혹은 많은 권력제도는 국가가 아니지만 그것들을 정의하는 말이 아직 없다고 하든.... 특히 국가가 이전과 같은 전체주의적인 논리(혹은 고전적인 '주권'이라는 의미)로 향하지 않는 오늘, 이것을 생각하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물론 '주권'이나 '왕권'은 국가 훨씬 전부터 존재했습니다. 인류학에서는 국가기구가 없는 곳에서(다시 말해 왕의 의지로 압력을 가할 수 있는 관료기구가 없는 곳에서) 왕이 복잡한 우주론적인 의례에 둘러싸여 있는 예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수단 남부의 실룩Shiluk이 그 한 예입니다. 그들은 나일강변에 살고 있는 양을 치는 사람들로 그들의 남쪽에 사는 인류학에서 평등주의적인 사회의 고전적인 예로 여겨지는 누어Nuer와 많이 비슷합니다. 그 차이는 실룩에는 왕이 있다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실룩의 왕은 거의 누구에게도 명령을 내릴 수가 없습니다. 누구보다도 많은 부인과 친척 등 부양가족을 거느리고 있다는 차이 밖에 없습니다. 그는 이 사람들을 배치할 수 있고, 싫어하는 사람을 공격하거나 분쟁이 있을 때 결정을 내리는 강제력으로서 나타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자신을 지상에 비를 내려 농업을 가능케 하는 하늘과 땅의 합체의 열쇠로 모셔 세우는 터무니없이 복잡한 의례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실제로 모든 농사는 그의 의례적인 행위에 맞춰 실행됩니다. 여기에는 국가의 강탈적인 측면과 우주론적인 측면 둘 다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 국가가 아닙니다. 실제 국가에서는 이미 충분히 확립된 어느 쪽의 요소가 다른 쪽을 제치고 지배적으로 되어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른바 '신성왕권'에서 왕은 몸이 땅에 닿거나, 태양을 바라보거나, 궁전에서 벗어나면 안 된다든지, (바콩고의 경우 등) 취임 후에는 거세되는 것과 같은 상당히 복잡한 의례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믿기 어려운 규약은 우주론적인 측면이 다른 것을 억누르고 있는 현상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벌써 그와 같은 지적이 있듯이 )그것들은 왕권에 대한 대중의 저항이 성공한 결과라고 간주할 수도 있습니다. 여하튼 이러한 의례화가 일어난다는 것은 실제적인 '주권권력' 혹은 '국가다운 권력'이 붕괴하는 때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실룩의 왕권과 같이 '국가가 되려고 하는 권력'이 이미 의례의 과잉에 의해 왕권의 기초를 제대로 만들어낼 수 없는 경우일 것입니다.
 

 

이 '주권'이라는 개념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것에 대해 논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의 '주권자'와의 관계는 그다지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실제의 '통치'의 힘이란 것은 매우 복잡한 것으로 무한한 형식을 취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근대국가라는 정통성 주장의 이면에 무수한 형태로 그림자처럼 붙어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는 '주권sovereignty'이 없는 '통치sovereign'가 있거나 국가기구가 없는 '통치권력'이 있거나 합니다. 우리가 대응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여러 요소는 실제로 반드시 대응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인류학의 이점중의 하나는 그것이 우리에게 '정치적인 것'의 보다 폭넓은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이미 여러 다양한 방식으로 국가권력을 무효화하는 것을 시도해왔습니다. 그 중 하나가 국가권력을 아주 복잡하고 내용 없는 의례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우주론적인 권력의 이미지가 지나치게 장대해져서 강탈적인 행동을 취하는 기초를 꺾어 버린 것입니다. 내가 여기서 하고 싶은 말은 결국 저항의 형식은 우리가 통상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풍부하다는 것입니다.

 

이밖에 뒤의 "전투규약"에 관련된 논의도 참 재미있다. 이건 나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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