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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9.

~** 메모 9 **


- “히코하치의 신분은, 역시 다른 조건과 결부되어 있기는 했지만, 눈앞의 봉건적 신분 질서 관계를 명백하게 초과하여 부정하는 곳까지 그를 ‘개(個)’로서 밀어붙였다.” “주어진 신분 질서 안에 매몰되어 있는 한, 거기에서 ‘개’는 나타나지 않는다. ‘개’는 이 질서와의 마찰, 충돌을 통해 나타난다.” (<<유머로서의 유물론>>, 202쪽)

- “나카노 시게하루가 ‘개’를 ‘신분 질서와의 마찰, 충돌’ 안에서 보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쿠라하라 코레히토처럼 ‘개’를 계급 안에 종속시키는 것도 아니며, 히라노 켄처럼 ‘개’를 집단과 마주 세우는 것도 아니다.” (같은 책, 202쪽)

- “요컨대 나카노가 말하는 ‘개’는 집단에 맞서는 ‘개’라든지, 자기의식으로서의 ‘개’와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관계를 은폐하는 것일 뿐이다. ‘실재로서의 개’는 물론 실재가 아니다. 그것은 관계의 갈등·알력·투쟁으로만 존재한다. ‘개’를 내세우는 것은 관계이지 ‘근대적 자기의식’이 아니다.” (같은 책 203쪽)

- “‘개’는 어딘가 일정한 곳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예컨대 네덜란드에 망명하고 있던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개’이지만, 프랑스에 받아들여진 그것은 이미 ‘근대적 자의식’일 뿐이다. 이러한 ‘차이’를 보지 않는다면, 근대의 비판이나 근대의 초극이라는 공소한 말을 가지고 놀게 된다. 맑스에 대해서도 똑같다. ‘집단과 개’, ‘지식인과 대중’, ‘서양과 일본’ 등의 대립 개념은 끊임없이 변용되는 다수적(多數的)인 여러 관계의 알력과 관계해서만 ‘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숨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 사회적인 다수성을 이원적 대립으로 바꾸며, 역사적인 것을 비역사화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른 것’을 내면화하고 소거해 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관계를 지워버릴 수 없으며, 그 관계에서 탄생되는 ‘개’를 전혀 지울 수 없다.” (같은 책, 2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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