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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17.

부르주아 사회(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정치 체제는 근본적으로 대의제이다. 대의제는 신적인 존재인 ‘국가’(그리고 이 국가는 추상적인 개별적 국민과 일치한다. 이는 근대 이후의 개별적 개인들이 신의 이성을 공유함으로써 신의 뜻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고 신과 대등하게 독대할 수 있게 되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의 뜻과 의지를 대신할 매개자(또는 대리자, agent)로서의 ‘지배계급’의 신분을 호명하는 것이다.

 

대리자로서의 지배계급은 국가의 대리자이면서도 추상적인 국민의 대리자이기도 하다. 그런데 현실적인 국민은 ‘현실적으로’ ‘개별적인’ 또는 특수한 이익에 사로잡혀서 아직 ‘신적인’ 보편성을 현실화시키지 못한 ‘시민사회’의 일원일 뿐이다. 대의제에 의해 호명된 지배계급은 현실적인 국민을 신적인 존재의 의지와 뜻을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계몽한다. 그런데 이 계몽은 이중적인 과정을 내포하고 있다. 하나는 현실적인 국민의 개별적인 또는 특수한 이익을 실현시킬 수 있도록 국가에 요청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국가의 보편적인 의지와 뜻을 현실적인 국민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이 계몽을 통해 시민사회의 일원이었던 지배계급은 자신의 이익을 국가의 보편적인 의지와 뜻과 일치시키면서 시민사회의 다른 구성원들의 개별적인 또는 특수한 이익을 무화시키고 자신의 이익과 일치되는 한에서만 이러한 이익을 충족시킨다.

 

개별적인 또는 특수한 이익에 매몰돼 있는 현실적인 국민을 자신의 이익과 일치시키고 또한 이를 국가의 의지와 뜻으로 일치시키는 지배계급은 중세시대의 ‘사제’의 모습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차이점이 있다면 하나는 선거를 통해 호명되고, 다른 하나는 신분제 사회에서 호명된다는 차이이다. 그러나 이 차이도 형식적인 요소인 선거를 빼고 나면 하등 다를 게 없다.

 

우리는 흔히 대의제에 기반한 대의 민주주의에 반대되는 의미로, 또는 대체될 수 있는 것의 의미로 직접 민주주의를 언급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의 민주주의나 직접 민주주의나 별반 다를 게 없다. 왜냐하면 신적인 존재인 국가의 대리자를 ‘선거’를 통해 호명하기 때문이다. 대의 민주주의나 직접 민주주의라는 두 항을 넘어서는 것은 ‘만장일치’이다. 만장일치는 부르주아 식의 (보통)선거를 통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왜냐하면 ‘선거’ 자체에는 이미 ‘소수에 대한 배제’와 ‘소수에 대한 다수의 복종의 강요’가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선거는 시민사회의 개별적인 집단적인 이해관계(집단적 이기주의)의 충돌의 장이며, 특수한 이해가 보편적인 이해로 세탁되는 장의 이데올로기를 내포한다고 할 수 있다.

 

부르주아 사회에서의 개인은 로빈슨 크루소와 같은 순수하게 개별적이고 원자화된 개인을 근본적인 전제를 깔고 있지만, 사회주의 사회에서의 개인은 개별적 개인의 대립항으로서의 ‘집단적 또는 공동체적’ 개인이 아니라 이 대립된 두 항의 개인을 넘어서는 초월론적인 개인으로서의 ‘사회적’ 개인이다. 사회적 개인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개인이다. 그런데 자기가 하고 싶다는 욕구는 단순히 감각적이고 즉자적인, 즉 개별적 개인 또는 집단적 개인의 이해를 충족시키고자 하는 욕구(개별적인, 특수한 또는 일반적인 욕구)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즉자대자적인 욕구, 다시 말해서 칸트 식으로 말하자면, ‘너의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로 타당할 수 있도록 행위하라’, ‘너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인격을 결코 수단으로만 다루지 말고 항상 목적으로도 다루라’는 이성적이고 보편적인 욕구이다. 이성적이고 보편적인 욕구는 맑스에게서는 “각기 자유로운 개인들이 서로 연대하는 사회”를 생산하고자 하는 욕구이다. 그리고 ‘계급의식적’ 욕구이다. 이 욕구는 자기 자신을 ‘새로운 인간’으로 생산하고자 하는 생산력을 총체적으로 실현하고자 하는 ‘실천적’이고 ‘구체적인’ 욕구이다. 이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만장일치이며, 이 만장일치를 ‘의식적으로’ 실현시키려는 사회가 사회주의 사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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