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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12.

과학은 주체의 실천활동(Praxis)과 직결된다. 

즉 제1원리 또는 제1원인으로서의 이념이나 법칙은 인간의 실천활동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과학적 방법은 주체의 실천활동을 잘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이다. 

주체의 실천활동은 환경을 변화시키고 그 환경에 맞추어 자신을 변화시키는 변혁적, 혁명적 활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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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산동네 의풍리.

밖에는 햇살 몇 조각들 모여,

가을장마의 물기 툭툭 떨어내듯

조곤조곤 안부인사를 건넨다.

토요일 오후 동네 카페에 앉아

무심히 창밖을 내다본다.

 

<그리운 산동네 의풍리> - 정기복 -

 

담론이 끝나고

철문이 내려진 거리에

스산한 겨울이 어슬렁거리면

구겨진 전단 같은 퇴색한 잎들이 날리고

이제 나는

그리움의 수배자가 된다

그 많던 사람들

뿔뿔이 흩어져 어디로 갔나

지워진 얼굴들 대책 없이 호명하다가

가슴에 품었던 산동네 하나 끄집어낸다

 

살얼음 진창 밟으며

사람의 하늘 열던

동학군 깃들어 짚신 고쳐매던 그곳

그믐 가시밭길 봉화 치켜들고

새벽을 밝히던 산사람들

싸릿불 지펴 감자 굽던 그곳

비탈산 불 놓아

조며 수수며 메밀 갈던

생떼 같은 화전민들 목숨 부쳐먹던 그곳

그렇게 시절에 쫓긴 땅벌들이 더덕 뿌리 흙살 박아 물 차오르던 곳

 

암울에 지쳐 병이 된

이 계절에 산동네 의풍리 떠메고 와

만나는 사람마다

한 자락씩 떼어주고 싶다

 

- 정기복 시집 <<어떤 청혼>> 중에서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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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청혼

하도 답답하여, 20여 년 전에 읽었던 시집을 꺼내들었다.

시집 제목은 <어떤 청혼>(정기복 시집).

시집 제목인 어떤 청혼은 이 시집에 들어 있는 시들 중 한 시의 제목이기도 하다.

그때 참 무엇인가에 그리움 복받쳐 먹먹하게 읽었던 시다.

그런데 오늘 읽어보니 무엇인가 밋밋하다..

왜 그럴까를 찬찬히 생각해보며 이 시를 다시 읽어보련다.

 

<어떤 청혼> -정기복-

 

바다 쉴새없이 뒤척여

가슴에 묻었던 사람 하나

십 년 부대껴 떠나보내고

달무리 속 대보름달

생선 속살 모래밭에

연어 같은 사람 하나 던져주었네

 

그대!

잘먹고 잘사는 일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는가?

오빠,

다 읽었는데 전태일

그 사람 그 뜨거움 어떻게 견딜 수 있었을까

 

썩는다는 것이다

씨앗으로 썩어 어머니 젖가슴 닮은

봉분을 키운다는 것이다

그대,

 

흙 토해 기름진 흙이게 하는

지렁이처럼 살자

 

정기복 시집 <어떤 청혼> 중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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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복시계] 기조제기 : 중추섬멸전을 축으로 한 대중적 반일 도시게릴라전의 전개를!

years and years

일 포스티노를 보고..

어제 밤에 모처럼 [일 포스티노]라는 영화를 다시 보았다.

어렸을 때 아껴 먹던 맛있는 과자처럼, 개인적으로 아끼면서 보는 영화다.

그런 영화들 중에는 브레스트 오프, 풀 몬티, 빌리 엘리엇, 파업전야, 우리 학교 등이 있다.

 

어제 본 [일 포스티노]를 보고 떠올랐던 단상을 주저리 주저리 메모해 본다.

 

시는 혁명이고, 혁명은 가랑비와도 같다.

사회주의는 메타포어이며, 아름다움이다.

아름다움은 자신이 관게하는 모든 타자에 대해 모른다는 한계를 자각하고,

그 타자를 향해 현재 자신을 넘어서는 것으로부터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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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죽음이란 어떠한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규정으로 규정될 수 없는 물자체(thing itself)이다.

그렇지만 삶은 규정될 수 없는 이 물자체의 현상학(과학)이다.

그럼으로써 죽음은 삶에 의해 규정되어야만 하는 당위이면서

현실의 삶에 의해 규정되는 존재라고 할 수 있겠다.

동시에 삶은 '규정된' 죽음에 의하여 규정되어야만 하는 당위이며,

현실의 죽음에 의해 규정되는 존재라고 할 수 있겠다.

 

이상 주저리 주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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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거리두기

코로나19에 대한 주요한 방역 대책으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거론되고 있다.

새로운 대책으로 거론되고 있다.

이에 대한 단상을 잠깐 정리해 본다.

방역 대책으로 논의되고 있는 <사회적 거리두기>는 사람들이 서로 모여 소통하는 것을

당분간 자제하는 것으로 규정되고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사회적 거리두기는 자본주의 체제의 민낯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자본주의 체제는 본래 사회적 거리두기를 자신의 기초로 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자본은 자본의 허락 없이 각기의 사람들이 자유롭게 서로 모여 소통하고 연대하는 것을 금지한다.

모든 노동생산물이 자본의 승인을 통해 시장에서 비로소 상품이 되어

다른 노동생산물과 관계를 가지게 되고, 생산자들 역시도 서로 관계를 가지게 된다.

자본의 승인하에 취업을 하게 되고, 사회적 관계를 맺게 된다.

자본의 승인이 없으면 사회적 관계망에서 배제되어 <사회적으로 거리>를 둘 수밖에 없다.

자본은 자신의 승인 없이는 어떠한 사회적 관계도 허락하지 않는다.

자본의 이익 생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노동조합 등 모든 소수자 집단의

자발적인 사회적, 정치적 관계들을 배제시키려고 한다.

이러한 것은 어렸을 때부터 일상에서 수도 없이 들어왔다.

누구 누구와 어울리지 말아아, 데모에 참가하지 말아라 등...

우리는 어쩌면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무의식적으로 소소한 일상에서부터

<사회적 거리두기>를 일상화하면서 살아왔을 터이다.

 

코로나19에 의해 희생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사회적 거리두기에 의해 사회적 관계가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강제적으로 차단된 노인 등 사회적 약자들이다.

사회적 관계가 약화될수록 면역력이 급속히 낮아진다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코로나19의 장기적인 방역대책은 사회적 거리두기가 아니라

바로 일상적으로 사회적 관계를 강화시키는 것이다.

물론 현재의 상태를 진정시키기 위해서는 사회적 거리두기가 단기적으로 필요하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사회적 관계의 강화, 즉 각기의 사람들이 자유롭게 연대, 소통하는 시스템을

새롭게 생산, 강화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공중파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사회적 거리두기는 유행전염병의

새로운 방역 대책이 아니라, 오히려 코로나19를 발생시킨 근본적인 원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코로나19는 어쩌면 자본의 사회적 거리두기에 대한 경고일 수 있겠다.

다시 말하자면 자본에 의해 규정(승인)될 수 없는 자연(nature)의

자본에 대한 투쟁일 수도 있겠다 싶다.

코로나19는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엄청난 타격을 주고 있다.

공장이 멈춰서고, 세계의 교통이 점점 동맥경화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과한 생각일 수도 있다. 나도 안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자본의 사회적 거리두기에 의해 발생한 코로나19 같은 유행전염병을

진정시키는 일은 바로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운 사회적 관계의 강화이고,

이러한 사회적 관계의 강화를 실천해 나가는 것이 아닌가 한다.

 

공중파에서 코로나19의 시민사회의 새로운 방역대책으로 내세운

사회적 거리두기에 대한 단상을 두서없이 끄적여 보았다.

차분히 다시 정리해볼 필요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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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련

그제 어제는 눈이 내렸다. 많이도 내렸다.

그런데 그제 어제 온 눈은 미련이다.

겨울에 대한 미련...

이 미련은 나를 닮았다.

아무리 겨울에 대한 미련을 가진들

봄을 향한 마음을 다시 얻지 못할 것이다.

크리스마스 즈음의 한겨울에 내렸다면

세상의 마음을 얻었을 텐데...

 

이 미련은 부질없거니와

또한 세상사의 이치임을...

그래서 세상은 동장군을 안타까워 하리라.

부질없음과 세상사의 이치의 경계는 어디일까...

 

눈을 닮되 눈을 닮지 마라

나를 닮되 나를 닮지 마라

세상을 닮되 세상을 닮지 마라

 

이 끄적임도 부질없지만 세상사의 흐름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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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전

영화 <독전>을 보았다.

<독전>의 영어 제목은 believer(믿는 사람, 신봉자)였다.

독전이 무엇을 뜻하는지 몰라 국어사전을 찾아보았더니...

영화 내용과 가까운 것(가깝나?, 잘 모르겠다)이 있었다.

 

- 독전(獨專) : 남과 상의하지 않고 혼자서 판단하거나 결정함.

 

제목부터가 잘 이해되지 않았다.

 

그런데 영화를 다 보고 난 느낌은

영화 <유주얼 서스펙트>와 얼개가 비슷하다는 느낌.

영화 초중반에 이미 영화 내용 전개가 대충 다 읽혔다.

 

배우 류준열을 본 것으로 만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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