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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유튜브에서 리스토레이션에 대한 영상을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아주 오랫동안 버려져서 녹슬고 이끼가 낀 제품을 씻고 닦고 갈고 분해하고 재조립하고 광내고 염색까지 해서 완전히 새 제품처럼 복원해내는 영상입니다.
영상은 10~20분 정도로 길지 않지만 실제로는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는 과정이었습니다.
그 과정을 멍하니 보고 있으면 과정 하나하나가 참으로 정성스럽고 기발하기도 해서 예술작품처럼 보이기도 하고, 마지막에 완전히 달리진 모습으로 등장한 결과물을 봤을 때는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영상에 나오는 제품들은 그다지 특별하지는 않습니다.
녹슨 펜치, 오래된 재봉틀, 쓸모가 별로 없는 소형 가전제품 같은 겁니다.
그것들을 복원하는데 드는 시간과 비용을 생각하면 굳이 복원할 필요 없이 새로 사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겠다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정성 속에 새롭게 재탄생하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으면 세상에 쓸모없는 것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죠.
너무도 사소하고 오래 되서 사람들이 쳐다보지도 않던 것이 정성스러운 과정을 거치기만 하면 아주 깔끔하고 쓸모 있는 것으로 재탄생할 수 있다는 것은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더군요.
유튜브에서 자주 보는 영상 중에 노숙인들에 대한 인터뷰도 있습니다.
‘컨션스9’이라는 유튜브 채널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인데 서울에서 노숙을 하거나 쪽방생활을 하시는 분들을 대상으로 한 짧은 인터뷰 영상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나와서 어떻게 해서 노숙인이 됐으며 현재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해 얘기들을 하십니다.
그들의 얘기를 가만히 듣고 있노라면 참으로 다양한 사연들이 있고,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받아들이고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덤덤하게 얘기하시는 분도 있고, 심한 허세를 부리며 과장하시는 분도 있고, 정신질환이 있어서 횡설수설하시는 분도 있고, 약간의 우월의식을 드러내며 다른 노숙인들을 계도하는 듯 하게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렇게 다양한 분들이 자신의 삶에 대해 얘기하는데 그분들의 인터뷰에는 공통적으로 강한 자존심이 있었습니다.
인터뷰 진행하던 분이 조심스럽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고 얘기하면, 많은 분들이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그분들이 살아왔던 삶의 경험이나 노숙생활을 하면서 겪었던 부당한 경험들이 쌓여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하는 추측만 해봅니다.
“내가 지금 이렇게 쓸모없는 존재처럼 살아가고 있지만 나도 한 인간으로서 자존심은 있다”고 당당하게 얘기하는 것 같았습니다.
쉽게 사회의 일원으로 다시 복귀하기 어려워 보이는 그분들이
많은 시간과 정성과 비용을 들여 리스토레이션 과정을 거친다면
쓸모가 있는 존재로 다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제품이 아닌 인간에게서 그런 과정이 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동시에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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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초등학교 앞 건널목에 설치된 신호등입니다.
신호등 밑에 남은 시간을 알리는 숫자판이 있었는데 다른 곳들과 조금 다르더군요.
보통은 초록 신호에만 숫자판이 나타나는데, 이곳에는 빨간 신호에도 숫자판이 나타나서 대기 시간을 알려주고 있었습니다.
초록 신호 숫자판은 “차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어서 빨리 지나가라”고 재촉하는 느낌이었다면, 빨간 신호 숫자판은 “건너갈 수 있을 때까지 얼마의 시간이 남았으니 차분하게 기다리라”는 여유를 주고 있었습니다.
기존 신호등 숫자판에 작은 기능 하나만 살짝 추가한 것인데 다가오는 느낌의 차이가 이렇게 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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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살고 있는 이곳에서는 얼마 전에 도로 확장 공사로 길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사람과 차들이 서로를 배려하며 여유롭게 다니던 한적한 시골의 농로였는데
차들의 원활한 주행을 위해 사람들을 좁은 인도로 몰아넣는 매끈한 도로가 돼버렸습니다.
매일 사랑이와 함께 이 길을 산책하면서 느끼는 소외감과 이질감은 쉽게 사라지질 않더군요.
사람보다 차들이 우선인 세상에서
차 없이 살아가는 저는 시골에서도 점점 구석으로 밀려나고 있지만
신호등의 조그마한 배려 하나가 제 마음을 달래주더군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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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 한쪽을 가득 채웠던 호박 줄기가 거의 사그라들었습니다.
봄에 조그만 호박 모종 2개를 심은 후
여름에 비료도 충분히 주고 땀을 뻘뻘 흘리며 주변 잡초들도 뽑아주었더니
가을이 돼서 엄청나게 많은 호박들을 만들어냈었죠.
겨울이 다가오면서 이제 그 무섭던 기세도 사라져 잡초들만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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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앙상한 줄기와 몇 개의 이파리만 남았는데도
꽃이 피고 있는 것이 신기해서 주변을 살펴봤더니
그 사이에서 또 호박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제법 커다란 호박이 하나 있었고
이보다는 작지만 조금만 더 자라면 충분히 먹을 만한 크기의 호박이 몇 개 더 있더군요.
이렇게 앙상한 상태에서도 커다란 호박들을 키워내는 그 생명력이 놀랍기만 했습니다.
호박이라는 녀석을 통해 왕성한 생명력과 교감의 즐거움을 배우고 즐긴 멋진 한해로 기억되겠네요.
(씨피카의 ‘OOZ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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