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다시! 52회 – 이기적인 평화에 온기를 불어넣기

 

 

 

1

 

아주 가끔씩 연락이 오던 분이 있었습니다.

그리 친했던 분은 아니지만 연락이 오면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습니다.

서울에서 활동을 하다가 고향에 내려가 지내고 있었는데

그곳에서의 삶도 제대로 적응을 하지 못하는 듯 했습니다.

전화 통화에서는 그런 하소연을 하지는 않지만

대화 속에 그런 점들이 충분히 녹아있더군요.

그분의 과거 고민이나 현재 상태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뭐라고 해줄 말은 딱히 없고 그저 듣는 역할에 충실했습니다.

 

문제는 그분의 통화가 참으로 길다는 점입니다.

세상고민을 혼자 다 짊어지며 주절주절 넋두리를 하는데

현실적인 문제보다는 관념적인 비평이 대부분이고

그마저도 옛날 얘기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딱히 할 말도 없습니다.

솔직히 제가 제일 싫어하는 스타일의 대화이기도 합니다.

그런 통화가 길어지면 나중에는 건성으로 적당히 반응만 보이게 되고

통화를 마치게 되면 피로가 몰려오죠.

 

그분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도 알고

친하지 않는 저에게까지 연락을 해서 넋두리를 할 정도면 그 외로움이 짐작이 돼서

연락이 오면 반갑지는 않지만 그의 얘기를 들어주곤 했었습니다.

그런 통화가 몇 번 이어지며 그와의 통화에 지쳐갈 즈음

저녁 늦게 그에게서 또 전화가 걸려왔고

저는 받지를 않았습니다.

그 후로 그에게서 연락이 없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세상을 떴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고향에서의 생활에 적응하는데 실패한 그는 다시 서울로 올라갔고

서울에서 노동조합 활동을 하며 다시 열정을 불태우다가

역시 그곳에서의 생활에도 적응을 못해 힘들게 보냈던 모양입니다.

그러다가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했다고 합니다.

 

아는 분들이 하나둘씩 떠나고 있는 소식을 접할 때마다

착잡하고 씁쓸한 것은 어쩔 수 없는데

그분의 소식은 유독 더 그렇더군요.

그분과의 마지막이 거절한 통화여서 더 그랬습니다.

 

춥고 외롭고 배고픈 이들과 함께 온기를 나누며

세상을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만드는 삶을 살아가자고

수시로 주문을 외우듯이 다짐을 해보지만

정작 그런 이들이 다가왔을 때는

몇 번의 온정을 보여주고는 슬금슬금 뒷걸음질 쳐버립니다.

그의 불안이 내 평화를 깨뜨릴 것 같기 때문이죠.

저의 평화는 이렇게도 이기적이고 속이 좁네요.

 

 

2

 

총선이 끝나고 나니 세상이 조용해졌습니다.

세상이 조용해지니 한결 살 것 같습니다.

이제 추한 자들의 확성기 소리에 가려졌던

세상 사람들과 내면의 소리를 듣도록 노력해봐야겠습니다.

 

감귤수확이 목전에 닥쳤습니다.

이런저런 노력도 많이 했고 마음도 졸이면서 1년을 보냈는데

이제 그 결과를 보게 됐습니다.

주렁주렁 달린 열매들을 따내고 나면

나무도 한결 개운해지고

제 마음도 개운해지겠죠.

개운한 상태에서 다시 나무와의 호흡을 배워가야겠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3

 

20대 초반 때 친척 형님의 소개로 생애 첫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공사장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것이었는데 일은 그리 힘들지 않았습니다.

그곳에서 또래 친구들도 만나서 재미있게 지냈습니다.

한 달의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처음으로 월급이라는 것을 받아봤습니다.

얼마 되지 않는 돈이었지만 내가 일해서 받는 것이어서 뿌듯하더군요.

부모님에게 작은 선물을 사서 드리고는 친척 형님에게도 만년필을 하나 사서 드렸습니다.

당시에 건축가로 잘 나가던 그분에게 싸구려 만년필이 쓸모가 있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제 딴에는 나름 마음을 담아서 성의를 표했던 것이었습니다.

 

영화를 보다가 만년필이 나오는 장면에서 갑자기 그때의 일이 떠올라

“어린 녀석이 마음 씀씀이가 기특하네”라며 살며시 미소를 지어보였습니다.

지난 날의 기억이 문득 떠오를 때면 대부분 잊고 싶은 기억들인 경우가 많은데

이렇게 마음이 화사해지는 기억이 찾아오면 정말 기분이 좋습니다.

그 기억을 소중하게 어루만지면서 그때의 마음 씀씀이도 함께 간직하려고 노력해봅니다.

 

앞으로 30년쯤 시간이 흘러

삶의 황혼기를 거닐고 있을 때

문득 지금의 내 모습이 떠오른다면

잊고 싶은 기억이 아니라

마음이 환해지는 기억이 될 수 있도록

오늘도 작은 노력들을 이어가봐야 겠습니다.

 

 

 

(이상은의 ‘비밀의 화원’)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