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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84회 – 세상을 밝히는 힘은 어디서 왔을까?

 

 

 

1

 

‘파티51’이라는 다큐를 봤습니다.

2010년 홍대 입구 칼국수집 두리반 철거를 둘러싼 투쟁과 그에 함께했던 음악인들의 연대를 담은 다큐였습니다.

 

거대 건설사에 맞서 맨몸으로 싸우고 있던 부부에게 힘이 돼 주기 위해

인디씬에서도 별로 설자리가 없었던 언저리 뮤지션 몇 명이 모여

주말마다 그곳에서 공연을 벌였습니다.

좁디좁은 칼국수집 안에서

몇 명 되지 않는 인원들이 모여

시원찮은 음향시설과 악기들로

대중성이니 음악성이니 그런 것들과는 거기가 먼 노래를 부르며

투쟁인지 발광인지 투정인지 자족인지 모를 요상한 짓거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하루하루 생계비를 고민하며 근근이 살아가는 그들이었지만

절박한 이들의 현실을 외면할 수 없어서

매주 공연을 열며 두리반과 함께 했고

그들의 투쟁은 크고 작은 성과들을 만들어내며 승리로 이어졌습니다.

그 속에서 그들은 음악적으로도 성장해나가면서

두리반투쟁 이후 인디씬에서 뚜렷한 성과들을 만들어내게 됩니다.

 

저라면 함께하기 쉽지 않을 타입의 사람도 있었고

제 취향이 아닌 음악들도 있었지만

그들의 얘기와 음악 속에서는

진지함과 솔직함과 엄청난 열정이 뿜어져 나오고 있어서

정말 부럽고 존경스러웠습니다.

 

그곳에 함께 했던 이들 중에

가장 에너지가 넘쳤던 밴드이면서

제 스타일과는 가장 상극인 밴드가 있습니다.

이 다큐가 아니었으면 접해볼 기회도 없고

설사 우연히 접했더라도 ‘젊은 마초 밴드’라며 거부감을 가졌을 이들이지만

그들의 치열함을 이해하고는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게 됐습니다.

그렇더라도 그들의 음악을 즐겨 듣지는 않겠지만

오늘은 그들의 음악 속에 빠져서 그 치열하고 순수한 에너지를 맘껏 느껴보고 싶습니다.

 

 

 

(밤섬해적단의 ‘나는야 씨발 존나 젊다 + 하면 된다 + 백범살인일지’)

 

 

2

 

두리반에서의 그 에너지를 부러워하고 있었는데

생각해보면 저도 그와 비슷한 에너지를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2008년 기륭전자 단식농성장에서였습니다.

 

기륭전자에서 해고자 노동자들이 1000일이 넘게 싸웠지만 굳건하게 닫힌 문이 꿈쩍도 하지 않자 열 명의 조합원들은 마지막 투쟁으로 단식농성을 시작했습니다.

광화문에서 광우병 소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가 뜨겁게 열리고 있는 와중에

구로공단 한편에서는 자그마한 촛불집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났습니다.

단식자는 뼈만 남아 생사가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고 있는데

사측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민주노총은 무기력하기만 했고

촛불집회에 모인 사람들은 조촐하기만 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도 참 다양한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다양한 민중가수도 있었고

풋풋한 고등학교 동아리 회원들도 있었고

회사 마치고 달려온 동네 아저씨 같은 직장인도 있었고

광화문 촛불집회에서 급조된 길거리 음악단도 있었고

홍대에서 활동하는 인디뮤지션도 있었고

아이와 함께 온 주부도 있었고

멀리 다른 지역에서 올라온 조합원도 있었습니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에너지는

두리반에서처럼 활활 타오르는 젊은 폐기의 에너지와 달리

작고 소박했지만 쉽게 사그라들지 않는 깊은 내공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그 투쟁을 유지하게 하는 힘이었습니다.

 

끔찍하게 무더웠던 8월의 폭염 속에서

숨 막힐 것 같은 답답함을 촛불 하나에 의지해서 버티고 있을 때

어떤 분이 기타 하나 들고 앞으로 나와 짧게 인사를 하고 노래를 부르더군요.

조용조용한 목소리로 부르는 그분의 노래를 가만히 듣고 있었는데

따뜻한 손길이 제 마음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어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 기분이 너무 편안해서 스르르 눈을 감고 노래에 빠져들었더니

한 방울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면서 꽉 막혔던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 들었던 노래입니다.

 

 

(시와의 ‘Dream’)

 

 

3

 

살벌하고 차가운 세상에서 한 발 물러나

자기만의 조그만 둥지에서 자족적인 편안함에 취해

열정도 의욕도 없이 중늙은이로 살아가는 것이 싫어

다시 세상을 향한 도전을 해보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읽는 라디오 다시!’가 1년 6개월이 넘었습니다.

그동안 얼마나 도전적이었는지를 생각하면 할 말이 없어집니다.

자꾸 현실의 안락함에 안주하고 싶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도 제 자신을 격려하기도 하고 질책하기도 하면서 꾸준히 발길을 이어가고 있음에 위로를 얻어 봅니다.

 

두리반에서처럼 거침없이 내지르는 열정을 뿜어낼 수는 없고

기륭전자에서처럼 단단하게 다져진 내공으로 주위를 밝힐 수도 없지만

꺼질 듯 꺼질 듯 허술해 보이는 불빛을 꺼뜨리지 않고 가만히 지켜내는 힘은 있다고 자부합니다.

그것이 10년 넘게 이어져오고 읽는 라디오의 저력이겠죠.

 

오늘 방송을 마치면서 제 노래를 한 곡 들려드리려고 합니다.

두리반과 기륭전자에서 보여줬던 수많은 이들의 열정과 힘에 그지없는 존경을 표하면서

감히 저도 그들과 함께 하는 사람이고 싶어서 이 노래를 불러보렵니다.

동영상이 없는 관계로 텍스트로만 들려드리는 점 이해바랍니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숲속, 찬바람이 불어오고 요상한 전자기타 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온다.

오른쪽 귀퉁이에 있는 조그만 오두막의 문이 열리면, 검은 드레스를 입고 기괴한 얼굴 문신을 한 여자가 밖으로 나온다.

전자기타와 드럼 소리가 점점 커지는 가운데 그 여자가 차가운 눈을 하고 가만히 앞을 쳐다 보다 고함을 지르면서 노래를 시작한다.)

 

 

왜? 그런 눈으로 쳐다보는데? 응?

왜? 아무 말도 못하는데? 응?

왜! 그런 눈으로 쳐다보냐고? 응!

왜! 아무 말도 못하냐고? 응!

 

내가 미친년 또라이 같아 보여?

이 얼굴에 있는 문신들이 이상해?

이 문신들 하나 하나에 담긴 뜻을 설명해줄까?

이 문신들 하나 하나에 흘린 피를 얘기해줄까?

 

나에게서 건질 것이 있을 때는 그런 눈으로 보지 않았잖아

내가 순진해 볼일 때는 더없이 상냥하게 대해잖아

나를 욕망할 때는 무지무지 부드럽고 뜨거웠잖아

나 아직 젊고 뜨겁거든

일로 와, 놀아줄게

 

아직 어려서 세상물정 모른다고 했지?

인간은 상처를 받으면서 성숙해진다고 했지?

판도라의 상자에서 온갖 악이 쏟아져 나왔지만 마지막에 희망이 들어있었다고 했지?

그 희망이 이 문신이야

가까이 와서 만져봐

 

내 가슴에 꽂혔던 너의 칼로 하나씩 팠어

싸늘하게 돌아선 너의 뒷모습을 떠올리면서 피를 마셨지

도와달라는 외침을 못 들은 척 지나가버리는 너를 이마에 그렸어

역겨운 표정으로 찡그린 너의 눈을 생각하면서 입술에 묻은 피를 닦았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더 이상 봐주지 않는 너를 위해 만든 것들이야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마! 그 눈을 파 버리겠어

아무 말도 하지마! 그 입을 찢어버리겠어

그냥 즐겁게 나랑 놀기만 하면 돼

이 밤을 나와 함께 즐기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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