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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공유정옥 이야기

의사라는 신분을 갖고 노동자의 삶과 투쟁에 녹아드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의 삶의 방향을 바꾸는 문제만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삶을 이해하고 호흡을 함께 하려는 노력이 동시에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공유정옥 동지를 만나 그 힘겨우면서도 즐거운 과정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74년 충북 단양에서 태어난 공유정옥은 6살 때 자식들의 교육을 배려한 부모의 결정으로 서울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1년 재수 끝에 고려대 의대에 입학하게 된 것이 94년이다. 학생운동의 활력이 많이 줄어들었던 시절 공유정옥은 과 동아리인 ‘상계진료소’ 활동을 하면서 다른 세상을 접하게 된다.

 

“도시빈민 진료소 같은 포맷인데, 토요일마다 상계동에 가서 오후 4시부터 진료활동을 해요. 원래는 공부방하고 진료소 활동을 했었는데, 공부방이 떨어져나가고 없어지면서 진료동아리만 남은 거예요. 80년대 선배들이 만든 거고, 우리 동아리 같은 경우는 88학번이 최고 선배였는데... 지역에 도시빈민 선교하는 전도사님이 있었어요. 공부방은 추억으로만 남고, 진료소만 있었고...

나는 그런 거 모르고 들어갔고... 좋은 일 하는 것 같고, 사람들도 좋고... 매주 토요일 진료 갔고, 매주 수요일에 세미나를 했어요. 시험 때나 방학 때 빼고는 1주일에 두 번씩 꼬박꼬박 했어요. 되게 빡쎘어요. 내가 의예과 2년 동안 세미나랑 진료를 한 번 빼고 매번 갔어요. 94년~95년 내 대학 생활의 전부였죠. 진료할 때 할머니들 장애인들 이런 분들 왔는데, 기다리는 동안 얘기하고 이러는 게 좋았고, 선배들하고 뒤풀이 하면서 얘기하는 것도 좋았고... 우리 사람들도 좋았고, 거기서 진료하면서 만나는 사람들도 정이 많이 들었어요.

세미나는 선배들이 커리큘럼 딱 짜서 했죠. 3월에는 대학생에 대하여, 4월에는 4·18(고대에서는 4·19 하루 전인 4·18에 대해서부터 얘기했어요), 5월은 광주민중항쟁, 6월은 여성학, 방학 때는 철학 세미나 이렇게 커리가 있었거든요. 할 때마다 선배들이 텍스트(주요문헌)는 뭐고 레퍼런스(참고문헌)는 뭐다면서 책을 두어 권씩 권해줘요. 그때 과외를 해서 30만원씩인가 벌었는데, 보지도 않는 텍스트와 레퍼런스를 다 샀어요. 되게 성실하게 했어요. 재미도 있었고, 정성을 많이 쏟았어요.

그때 세미나 했던 거가 졸업할 때까지 고민을 계속 하게 했던 거죠. 선배들은 ‘이게 옳다’ 이렇게 얘기하는데, 옳은 건 옳은 건데 그렇게 살수가 없다는 생각을 했어요. 세미나 하고 이럴 때는 모르겠는데, 돌아와서 우리 과 친구들을 보거나 그러면 일상하고 전혀 안 와 닿으니까 ‘나는 되게 모자라다’ ‘나는 훌륭한 사람은 될 수 없고, 어떻게 하면 죄는 안 짓고 살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했죠.

투쟁의 역사를 배우고, 해방의 역사를 배우고, 예전에 학생운동이 어떤 역할을 했고, 이런 얘기를 하는데... 그러면서 막상 본과 올라가면 공부에 매달리는데... 그렇다고 내가 학업을 때려치고 현장에 투신하고 이럴 수 있을 거 같지도 않고... 그랬다가 학교로 돌아오는 선배들 보면서 ‘저게 뭔가?’ 하는 고민을 했어요. 그래서 나는 ‘진료소 정도 수준에서 열심히 해봐야겠다’ 생각했던 거죠.”

 

그렇게 대학생활과 동아리 활동에 즐거움을 가져갈 즈음 1학년 여름방학 때 우연하게 철거민투쟁을 경험하게 된다.

 

“상계동이 10몇 동까지 있는데, 우리는 상계4동에 들어가거든요. 그런데 1학년 여름방학 때 학교에 ‘상계1동 큰마을 철거’ 이렇게 대자보가 붙었어요. 우리 과 아닌 다른 과 친구들이 막 가고... 소위 운동권 친구들이 가는 거예요. 우리 과에서는 역사학회 하는 친구들이 가는 거예요.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가 가는 바로 옆 동네 일인데 가서 봐야 되지 않겠냐’ 그래서 동기 셋이서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않고 갔어요. 갔더니 삼엄하죠. 다 놀래는 거야. 다행히 우리 과 선배들이 있고... 뭐했냐 하면, 돌 줍고, 골리앗에 기왓장 줍고... ‘오늘 밤은 자자’해서 자는데 새벽에 ‘들어온덴다’ 그러면서 깨우더라고요.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냐?’ 그랬더니 저랑 여자 둘이서 ‘동네 애기들을 데리고 뒷산에 가 있어라’ 그래요. 남자 애들은 제일 앞에서 화염병 던지고 빠지는 일을 했고... 새벽에 일어나서 갑자기 화염병 만드는 일을 처음으로 했고... 애들 데리고 다니면서 하루 종일 놀아주는 일을 했죠. 오지 말라고 그러더라고요. 저녁 때 다시 모이라고 그래서 저녁 때 모였죠. 그랬더니 13가구 남아있던 동넨데 그 집이 다 헐렸더라고요. 돌들만 쌓여 있는 집터에서 솥 걸어놓고 라면 끓여먹고 그랬는데...

그러고 나서 지하철을 타고 오는데... 잠도 한 숨도 못 잤고, 너무 긴장했고, 애들 다칠까봐 걱정했고... 우리 집은 강남에 넓은 아파트에 내 방이 있고, 침대가 있고... 그전까지는 우리 아버지가 ‘노력하면 잘 산다’는 것을 주입해서 ‘너무 잘 사는 거만 강조한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살았는데... 그날 지하철 타고 오면서 너무 피곤하기는 한데 잠을 한숨도 못 자겠는 거예요. ‘이제 겨우 스무 살에 내가 한 게 뭐가 있어서 그 집에 사냐?’는 거죠. ‘다섯 살 여섯 살 먹은 애들은 지들이 안 한 게 뭐가 있길래 하루 아침에 집 없는 애들이 되냐?’는 거고... ‘이건 정말 아닌 거 같다’는 생각도 하고...

지금도 돌 줍고, 화염병 만들고 이런 기억은 잘 안 나는데... 집터 무너졌던 거 하고, 지하철 타고 돌아올 때 너무 괴로웠던 거는 생각이 많이 나요. 그런 게 되게 무거웠던 거 같애요.”

 

예과 2년을 마치고 본과 4년을 다녀야 하는 의대에서 공유정옥은 본과에 올라가면서 본격적으로 학생회 활동을 결심하게 된다.

 

“96년 초에 노수석 열사가 집회 나갔다가 진압할 때 쫓겨서 돌연사를 해요. 노수석 열사 추모제를 연대 앞에서 하는데 토요일 오후 3시에 하는 거예요. 그전에 2년 동안은 학내 집회나 이런데 가끔 가기는 했지만, 학외 집회는 보통 토요일 오후 2시에 집회를 하고 나는 4시까지 상계동에 가야 하니까 학외에서 하는 집회를 거의 안 갔는데, 그날은 나보다 한 학년 어린 친구가 죽었다는데 되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어요. 연대 앞에 가서 노수석 열사 추모제를 하고, ‘오늘 집회 때문에 내가 진료를 빠지는 구나. 다음에는 가능하면 진료를 가야지’ 이렇게 생각을 했는데, 그리고 나서 4년 내내 못 갔어요.

그게 결정적 계기는 아니었는데... 본과 올라가면서 학생회 활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거든요. 보통 본과 올라가면 동아리활동 하던 것도 접고 그러는데 ‘나는 맨날 동아리 안에서만 놀았지. 밖에 일들은 보고 듣더라도 직접 하지는 않았는데, 나는 뭐했나?’라는 생각에... 나는 학생회 활동하겠다는 것도 굉장히 큰 결심이었어요.”

 

학생운동이 침체기로 빠져들던 97년 학생회는 소수의 간부의 활동으로 축소되지만 열정적으로 활동을 했다.

 

“다음 해에 남자 동기 애가 학생회장 하고, 언니가 사무국장 하고, 내가 사회부장 하고... 셋이서 정말 열심히 했어요. 그런데 그 다음 해부터 학생회 못 만들었죠. 그전에는 집행부가 5~6명 됐는데, 셋이니까 다 같이 했어요. 대자보를 다섯 벌을 만들어야 되거든요. 되게 부지런히 했고... 늘 새벽 예닐곱시에 모여서 대자보 다섯 벌을 만들어서 쫙 붙이고... 뒷간 토론이라는 걸 했어요. 매주 주제를 정하고, A3용지에 볼펜 달아서 월요일날 붙이고, 금요일날 모아서, 의견을 다 잘라서 ‘학우들의 의견’ ‘우리의 답변’ ‘다음 주제에 대한 의견’ 이렇게 다시 대자보를 만들어서 붙이고... 품은 정말 많이 팔았어요. 근데 ‘애들이 조금 하다 말겠지’하는 걸 1년을 했으니까 되게 신뢰를 많이 받았어요.

96년 여름에 연대사태가 있었어요. 학생회장 하는 친구 아버지가 부산대 교직원인데 ‘한총련을 탈퇴하라’는 압박이 들어와서 고민이 많았어요. 학생운동 내에서 우리는 소위 좌파성향이었는데, 한총련이랑 같이 해본 게 없으니까 한총련을 고집할 이유는 없었는데, ‘이거는 학생운동 탄압이니까 이거는 아니다’해서 버티다가 그 친구가 ‘아버지가 잡아 내릴려고 강하게 나오신다’ 그래서 ‘이걸 어떻게 풀거냐?’ ‘이건 우리 셋이 결정할 수 없다’ 그래서 친구들하고 1대1 면접을 했어요. 종이를 들고 ‘너 한총련 연대사태 알지? 우리는 한총련을 탈퇴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낸 거 본적 있지? 그런데 학생회장이 되게 힘들데, 그래서 우리 되게 고민 돼. 너는 어떻게 생각해?’ 그러면서 몇 십 명을 했어요. 결국 탈퇴하기로는 결정이 났어요.

지금은 구체적인 내용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그렇게 발상을 하고 애썼던 게 되게 소중한 기억인 거 같애요. 그래서 우리가 학내문제나 과의 복지문제가 아니라 다른 이야기를 해도 애들이 굉장히 많이 지지를 해줬어요.

97년 연말 대선 때 나는 투표를 안 했었거든요. ‘권영길이 왜 찍냐?’ 그랬는데... 학년이 올라가니까 학생회 정리하고 도서관에서 시험공부하고 있었는데, 친구들 몇 명이 와서 ‘집이 인천인데 집에까지 가서 권영길 찍고 왔어. 나 잘했지?’ 이러는 거예요. ‘그렇게 안 하면 너한테 부끄러울 것 같아서 했다’ 이런 얘기를 하고...

지금도 그때 생각하면, ‘학생대중조직으로서의 민주성은 참 열심히 만들었다’ 생각이 들어요. 나름대로 진보적인 의식을 가진 친구들이 막 나서지는 못하는데, ‘운동하는 애들은 우리랑 달라’ 이런 게 아니라 ‘나도 여기까지 하면 얘네랑 같이 힘을 보탤 수 있겠구나’ 하는... 집행부는 세 명인데, 늘 우리를 도와주는 사람들이 20~30명 정도 있었어요. 그게 되게 좋았죠.”

 

학생회 활동을 정리하고 이후 진로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면서 갖게 된 곳이 민중의료연합이다.

 

“98년 되니까 본과 3학년인데 나는 큰일 난 거야. 운동을 했던 다른 끈이 있는 게 아니어서 나는 끈 떨어진 거고... 이렇게 가면 1~2학년 때 봤던 선배들처럼 이 사이클에 말려서 그냥 의사가 되고... 그래서 찾아간 게 민의련(민중의료연합)이예요. 나한테 ‘뭐 할 수 있나?’ 하는 고민을 던져줄 수 있는 게 필요한데... 인의협(인도주의실현의사협의회)도 생각해봤는데, 의사에 갇히면 못 찾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고... 보건의료운동을 생각해왔기 때문에 보건의료운동 하는 사람들 중에 가장 내가 동의할 수 있는 얘기를 해왔던 사람들이 민의련이어서 그냥 갔어요.”

 

민의련 민중연대팀 활동을 하면서 철거민이나 노동자들 농성장들을 많이 찾아다니면서 진료도 하고 얘기도 많이 나눴다. 그렇게 대학생활을 마치고 2000년 인턴생활을 시작한 곳이 원자력병원이다.

 

“2000년에 의약분업 때문에 의사들이 파업을 했어요. 의사들이 두 번을 나갔는데, 나는 파업에 반대해서 병원에 남아있었어요. 그때 인턴이 26명이 있었고, 레지던트들까지 하면 200명 정도의 전공의들이 있었는데, 첫 파업 때는 저랑 저희 학교에서 같이 운동했던 선배 둘만 빼고 다 나갔어요. ‘의약분업이 의료 사회주의다. 의사들이 약사들한테 밥그릇 뺐기는 거다’ 그러는데 그걸 어떻게 동의해요.

왕따 당하는 일이 좀 있었는데 별로 안 괴로웠고, 두 번째 파업했을 때는 한 명이 더 동참을 해서 세 명이서 남았어요. 그때 병원 과장이 불러가지고 ‘병원입장에서는 니네들이 남아줘서 고맙지만, 나도 같은 의사기 때문에 니네가 점수가 잘 나올지 모르겠다’ 이런 얘기를 했던 기억도 나요.”

 

1년의 인턴생활을 마친 2001년 결혼과 함께 산업의학과로 전공을 결정하면서 찾아간 곳이 서울대보건대학원 산업의학교실이었다. 그곳에서 4년간의 레지던트 과정을 밟으면서 산업의학과 예방의학 등에 대한 공부를 하고, 민중의료연합 노동자건강사업단 활동을 하면서 여러 노동현장과 결합한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2002년 대우조선 노동조합의 근골격계투쟁을 시작으로 근골격계투쟁이 전국적으로 터져 나오면서 ‘근골격계 직업병 공동연구단’이 만들어지면서 현장투쟁과 결합된 연구활동이 본격화된다. 이어 2003년과 2004년에는 노동자들의 직업병투쟁이 더욱 거세게 일어나게 되면서 공동연구단도 다양한 활동을 벌이게 되지만, 공유정옥은 직장의 프로젝트사업에 묶여 다양한 현장투쟁에 적극적으로 결합하지는 못한다.

그런 조건에서도 관계를 맺으면서 사업을 해오던 사업장이 서울도시철도공사였다. 2003년 기관사가 자살을 하면서 정신질환 문제에 대한 현장조사사업을 하기 시작했고, 민주노조가 막 들어선 도시철도공사 노동조합은 승무본부를 중심으로 적극적이었다. 2004년 공유정옥은 여러 가지로 어수선한 조건에서도 도시철도공사 승무본부 공황장애투쟁에 결합하면서 많은 것을 느끼게 된다.

 

“노동조합이 힘이 약한 상황에서 본조도 열심히 했고, 승무본부 동지들도 열심히 했어요. 승무본부 동지들이 이 문제를 비롯해서 다른 현장문제에 대해서도 훌륭하게 현장활동을 했던 거 같애요. 본부장만 사실상 전임자인 거고, 사무국장은 근무협조를 해서 하는 건데, 두 명이 7개로 쪼개져 있는 승무사업소를 돌면서 한 명 한 명 근무시간이 다 다른 기관사들을 조직하려고 맨날 열차타면서 다니는 거예요.

정말 문제가 너무 절박했었어요. 산재신청은 7명밖에 못했지만, 30여 명의 환자가 드러났었으니까. 투쟁을 전후로 해서 조합원들이 하나 하나 숨겨왔던 자기 얘기를 하게 되는데 그게 너무 좋기도 하고 너무 무거웠어요.

2004년 7월에 궤도연대 파업을 했어요. 서울지하철, 도시철도, 인천, 대구 모여서 파업대오가 있었는데, 거기 진료실 차려서 들어가 있었고... 도철 승무조합원들은 분위기가 너무 좋은 거예요. 서울지하철은 뿔뿔이 흩어져서 숨어서 자고 그러는데, 도철 조합원들은 끼리끼리 모여서 놀고 토론하고...

여러 가지 아픔이 있어서 파업대오가 중간에 빠지고 도철만 남았어요. 그래서 지축기지에서 도봉기지로 옮겨갔고, 옮겨갈 때 다 떨어져 나가고, 승무는 처음 대오가 거의 다 있고, 기술 일부 남고, 차량 일부 남고, 활동가는 거의 다 있고... 그게 1박2일 동안이예요.

나는 집에 가서 자고 와서 도봉기지에 가봤더니 공대위 회의를 하고 있었고, 승무조합원들은 여전히 대오를 유지하고 앉아서 구호만들기 같은 걸 하고 있어요. 냉방도 안 되는데 모여서 땀 뻘뻘 흘리고... 결국 현장복귀를 결정하게 되죠.

그날 저녁에 총회를 열면서 위원장이랑 본부장이랑 현장복귀 선언을 하면서 위원장이 막 울어요. 그런데 조합원들이 다 우는 거예요. 나가면서 위원장하고 본부장이 서 있는데 조합원들이 ‘수고 많았다’고 한 명 한 명이 다 인사하면서 나가고, ‘괜찮아! 현장투쟁 열심히 하면 돼!’ 이러는데... 참 좋았어요.

그 맥락이 이어지는 게, 환자들을 산재신청한 후에 지부별로 근로복지공단 항의방문 가고, 간담회 하고, 조합원 특별교육 잡아서 돌아다니면서 지부별로 교육하고, 그러니까 조합원들이 정신질환에 대한 이해가 높아졌어요. ‘나도 저럴 수 있다’ ‘저 사람 얼마나 힘들까?’ 하는 이런 동지적 분위기가 2004년~2005년에는 굉장히 높았어요. 활동가들에 대해서도 ‘정말 고맙다’ ‘뭐라도 같이 할 수 있을까?’ 그러고...

이런 게 좋았다가 탄압이 들어오죠. 승무는 본부장과 사무장, 지부장급까지 다 해고예요. 그리고 나서도 2005~2006년 막 힘들 때 ‘그래도 우리가 해야지’하면서 해고자 동지들이 현장 돌아다니면서 열심히 하고...”

 

2004년까지 레지던트 과정을 마치게 되는 공유정옥은 전문의 시험을 앞두고 어머니가 쓰러지시는 등 어려움이 찾아온다. 2005년 초 우여곡절 끝에 산업의학과 전문의 자격증을 획득하고 상근활동을 시작하게 된 곳이 ‘근골격계 직업병 공동연구단’ 활동의 성과로 만들어진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였다.

 

“2005년 초에 전문의 시험을 보고 직장을 구해야 되는 상황이었어요. 전문의 시험을 앞두고 스터디도 하고... 그러다가 2004년 10월에 엄마가 뇌출혈로 쓰러지셔서 석 달을 입원해 계셨어요. 초반에 두 달까지는 의식이 안 돌아오셔서 공부할 거 책 싸들고 가서 병원에서 했어요. 엄마 문제 때문에 아버지랑도 많이 다투고... 주변에서 많이 걱정해줬어요. 공부도 안 잡혔고, ‘엄마가 이렇게 가시면 어떻하나’ 하는 걱정도 컸고... 막판에 2차 수술 하시고 엄마가 정신이 돌아오셨어요.

어쨌든 내 생각에는 전문의 시험을 겨우 통과한 거 같애요. ‘어떻게 할까?’ ‘어디로 취직을 할까?’ 이런 저런 생각을 했었는데, ‘상근을 해야겠다’는 마음이 있었거든요. 내가 파고드는 스타일이라서 학교에 남아서 연구를 하는 것도 좋았을 거 같은데, ‘내 스타일이나 이 운동에 필요한 게 단체 상근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었고... 산업안전공단이라는 곳이 있는데, ‘거기서 하는 일도 상당히 중요한데 그런데 가보는 건 어떨까?’ 이런 생각도 했었는데, 성에 안 차고 제약이 많잖아요. 내가 대학에 들어가서 조금씩 조금씩 내 일상생활하고 운동하고 교집합이 넓어지면서 왔는데, 그걸 물리고 싶지가 않았어요. 그래서 남은 건 상근 밖에 없는 거예요.

저희 나올 때 거제 대우병원에서 ‘아파트, 차, 1억’ 이렇게 조건을 걸었었거든요. 지방에는 산업의학 검진의로 가면 초봉 최저가 750이다고 그랬고... 그런 데의 일상이 뻔한 거고... 잠깐 생각했던 것이 ‘1년 정도 돈을 벌어놓고 해볼까?’ 이런 생각도 했었어요. 그런데 엄마 쓰러지고 이러면서 정신없었고... 그런 생각들을 잠깐씩 해보기는 했었는데 자연스럽게 다 사라지고, ‘그냥 상근하지 뭐’ ‘상근비로 충분히 살 수 있고, 만약에 모자라면 아닌 말로 응급실 아르바이트 한 번 뛰면 20만원 벌 수 있는데... 내가 자식이 있어? 뭐가 있어?’ 그러면서 되게 자연스럽게 결정을 했어요.”

 

2005년 주요하게 진행했던 사업 중의 하나는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사업이었다. 대공장이었고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사업의 중요성이 있었던 만큼 연구소에서도 많은 투여를 했다. 공유정옥은 1주일에 3일을 울산에서 지내면서 평가사업을 진행하게 된다. 그러나 관료화된 대공장 노동조합운동은 많은 고민을 하게 했다.

 

“거기 분위기가 ‘하기로 했으면 하는 거다’는 게 있어요. 일 하다가 멈춰 서서 잘 가고 있는지 돌아보는 게 아니라 ‘하기로 했으니까 하는 거다’는 정말 관료적인 거죠. 하기로 한 거만 하는 거죠. 하다보면 다른 걸 더 붙여야 되거나, 원래 들고 가던 걸 내려놔야 되기도 하는데, ‘하기로 했으니까 하기로 한 것만 하는 거다’는 그런 관계맺기가 재미도 없지만, ‘저 사람은 재미가 있을까?’ ‘이렇게 해서 운동이 발전이 될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제가 예전에 학생회 있을 때 뒷간토론 해보자 해서 했던 게 몸은 고달퍼도 너무 신나고 재미있었는데... 나중에 이런 얘기를 나누게 된 사람이 몇 명 있기는 해요. ‘자신도 그렇다. 노동운동 처음의 마음이나 낙을 잊고 사는 거 같다’ 그런 마음을 알게 되면서 더 애정을 갖게 됐어요.

지금은 그런 모습들 보면서, 정말 쳐다보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지만, ‘노동운동은 옛날식으로는 안 돼. 나는 집행부 맡았으니까 그냥 하는 거야’ 하는 무기력감에 젖어있는 모습이 안됐다는 생각이 들어요. 실무집행을 하는 사람들이 하기로 했으니까 하는 딱가리가 아니라 운동을 하는 기쁨을 느끼게 하고 보람을 찾게 할 거냐 하는 건, 대공장이건 작은 공장이건 다 마찬가지 숙제라는 생각을 해요. 그 문제를 풀 때 그렇게 어려움에 처해있는 사람들, 자기가 어려움에 처해있는 줄 모르거나 인정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자기 얘기를 하고, ‘그런 식으로 하면 노동운동 안 된다’ 이렇게 고민을 하고 그래야 풀리지, 밖에서 풀어줄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제가 소재공장을 담당했는데, 소재공장이 10개가 있어요. 토요일날 오전에 조합 사무실이 비어 있잖아요. 이만큼 큰 궤도가 벽에 붙어 있으면, 종이를 대서 지도를 그렸어요. 그걸 복사기로 축소복사 축소복사해서 작게 축소를 했어요. 그걸 놓고 지도를 외웠어요. 공장이 흩어져 있으니까 내가 맡은 공장이라도 외워야 된다 싶어서... 그리고 현장에 갈 때마다 ‘여기가 몇 번 문이고, 여기가 게시판이고, 조합원들은 여기서 쉰다’는 걸 지도에 표시를 했어요. 하나하나 메모해놓고 계속 봤어요.

나중에 주철공장 출신의 활동가 차를 얻어 타고 대자보를 붙이러 가는데 경합금공장을 가게 된 거죠. ‘이렇게 도셔서 저기 문이 있는데, 거기로 가면 게시판이 가깝다’ 그러니까 ‘어떻게 자기보다 더 잘 아냐?’고 그래요. 그러면서 얘기하게 되니까 자기만이 아니라 여기 있는 사람들이 다 20년을 다녀도 자기 일하는데, 대의원을 하더라도 자기 선거구 밖에 모르는 거예요.

회사가 보기엔 ‘거기 운동하는 놈 있어? 걔 영역 요만큼’ 이거잖아요. ‘걔 괜찮아. 뛰어봤자 거기까지야’ 이런 거잖아요. 위원장급으로 튀는 사람만 몇 사람 쳐주면 되니까. ‘이거 되게 허름한 시스템이다’ 싶었어요.

대의원들이 자기 선거구 관리하는 것도 인상적이었어요. 라인을 가다가 ‘여기까지가 내 선거구기 때문에 더 이상은 안내하지 못 한다’ 그래서 ‘그쪽 선거구 들어간다’고 전화를 하더라고요. 너무 황당했어요. 그런데 상집들이건 현장활동 하는 사람들이건 자기 나와바리가 있어서 딱 그만큼인 거예요. 그걸 깰 수가 없는 거죠. 이 경계의 문을 열어야 하는데...

근골격계 실행위원 하는 사람들이 재미있어 하는 게 자기가 일 안 해본 현장을 가는데, 그냥 가는 게 아니라 그걸 분석적으로 보잖아요. 처음에는 그런 걸 의도하지 않았는데, 이게 정말 위협적인 거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이게 보이지 않는 국경을 넘나드는 사람들을 만들어내는 거잖아요. 그게 2004년에 바로 됐으면, 2005~2006년에 뭔가 다른 희망을 만들어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하고...”

 

2005년은 현대자동차 노동강도 평가사업만큼 중요한 비중으로 결합했던 사업장이 구로의 하이텍알씨디코리아였다. 노조 탄압에 의한 정신질환문제로 연구소와 함께 힘겨운 투쟁을 벌였다. 공유정옥은 1주일의 3일을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에서 보내고 서울로 올라와서 하이텍 농성장에서 하루를 지내고, 연구소 업무를 처리하는 등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게 된다.

 

“하이텍 투쟁을 하는데 내가 1주일에 하루씩 가서 농성을 하는 것으로는 힘이 모자란 상황인데, 나는 그 이상 할 수는 없는데... 자격지심인지는 모르겠는데, 나는 현대자동차 대공장 정규직노조에서 돈 받고 하는 사업만 하고, 13명 조합원의 하이텍투쟁은 제대로 하지 못하고...

내가 울산에서 오만가지 생각을 하고 오는데, 느낀 것도 나누고 싶고, 얘기도 하면서 정리도 하는 싶은데 그게 하나도 안 되는 거예요. 연구소 안에서 활동하는 동지들끼리 만나고 흐르고 서로 보듬고 그랬어야 되는데.... 그러지 못하고, 나는 나대로 소외감 느끼고, 그런 벽들을 조금씩 조금씩 느껴갔어요. 그래서 2005년 여름에서 가을은 되게 힘들었어요. 개인적으로는 우울증 치료를 받아야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불면증과 만성두통... 그때 난생 처음으로 혼자 술 먹고 그랬어요.”

 

그렇게 매우 바쁘고 힘겨운 2005년을 보내고 2006년 초 정기총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연구소 성원들과 여러 가지 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3명의 상근자가 상근활동을 정리했고, 한 명은 출산휴가에 들어가는 등 6명이던 상근자가 2006년 들어 2명으로 급속하게 줄어들게 된다.

 

“2006년 상반기가 힘들었던 거 같애요. 그때 술 먹으면 울고 맛이 가고 그랬어요. 그게 혼자 속이 썩어문들어지는 것도 있는데, 연구소에 있는 다른 동지들이 많이 지지해준 거 같애요. 다를 아팠기 때문에... 상처를 더 덧나게 만드는 과정도 있었지만, 그러면 그 다음 주에 만나서 다시 해소하고... 그러면서 비 온 뒤에 땅이 더 굳는다고, 그때부터 많이 친해졌죠. 연구소 활동을 떠나서 ‘남매 아니야?’ 할 정도로... 주변 사람들에게 나도 많이 의지를 했고, 서로 의지를 했던 거 같애요.”

 

이후 금속노조와 함께 노동자건강권 시리즈 소자보 제작사업, 현대자동차 주간연속2교대 실시에 대한 입장을 정리한 책자 발간, 크고 작은 사업장들에 대한 노동안전사업 지원, 비정규직의 건강권에 대한 대응사업 등을 다양하게 벌여왔다. 그러던 가운데 2007년 삼성반도체 집단 백혈병 발생사건을 접하게 된다.

 

“2007년 3월에 황유미씨가 돌아가셨고... 그 분이 백혈병으로 죽었는데, 나이도 젊고, 근무한지도 얼마 안 되고 그러니까 처음에 그걸 상담했던 노동안전단체 활동가들이 주변의 소위 진보적이라는 산업의학자들한테 물어봤더니 다 ‘관련성이 없는 거 같다’라고 그랬데요. 암은 좀 오래가는 건데, 노출부터 발병까지 기간이 너무 짧다는 거죠. 물어물어 다니다가 회의를 하고 헤어지는데 지나가는 말로 그러더라고요. ‘뭔가 있는 거 같은데, 다들 아니라고 한다. 너는 어떻게 생각 하냐?’ 그래서 ‘고농도의 노출에는 단기간에도 암이 생기지 않을까? 5년 10년 걸린다는 거는 지금까지 밝혀진 거고... 핵발전소 폭발하면 바로 죽기도 하는데...’ 그런 얘기를 했어요. ‘개별 산재보상 문제로 가서 풀릴 문제가 아닐 거 같으니까 대책위를 꾸려봤으면 좋겠다’는 정도까지 의견을 전하고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반 년 뒤에 수원지역 동지들이 대책위를 꾸리자고 제안을 했죠. 그래서 2007년 가을 정도부터 결합을 하고 있어요.

금방 안 끝날 거 같은 싸움인데 ‘잘 해보고 싶다’는 생각 많이 들고... 삼성이고 반도체라는 게 한국사회에서 엄청난 건데... 젊고 어린 여성노동자들이 일하는 곳인데, 외국에서도 다 문제가 됐던 것이더라고요. 10년~20년 가는 싸움이 되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연구소도 그렇고 저 개인적으로도 이런 스타일의 운동은 안 해본 거거든요. 게다가 노동조합도 없고... 우리가 상대해본 자본 중에 가장 막강한 자본이기도 하고... 해 보고 싶어요.”

 

공유정옥은 20대 후반부터 여자 의사라는 신분으로 현장활동가들을 접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현장활동가들과의 관계가 원만했던 것만은 아니다.

 

“초기에는 그게 되게 싫었죠. ‘왜 저래! 그거 밖에 안 되냐?’ 그랬어요. 그런데 그게 똑같이 나한테 왔어요. 내가 뭔가 잘 하면 저 사람들도 나를 그렇게 안 보지 않을까? 말 그대로 내가 의사인 것도 무거웠고, 여자인 것도 무거웠고, 나이가 어린 것도 무거웠는데...

지금은 그게 없어요. 사람들이 날 그렇게 안 대한다는 게 아니라 ‘너는 날 그렇게 대하는 사람이구나’ ‘당신은 날 그걸로 보는군요’ 그래요. 일회적으로 교육 갔다가 나 한 번 밟아보려고 깝죽데는 사람들 보면 ‘그러세요. 당신 또 안 만나게 될 거 같애요’ ‘당신이 나한테 희망을 못 찾았듯이 나도 당신한테서 희망을 못 찾을 거 같애요’ 이런 것도 있고요.

‘이 사람이 나를 조금 못 미더워 하거나 의심하는 게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나 그런 게 생기는 게 있어요. 그럴 수 있겠다 생각해요. 나도 현장활동 하는 사람들 다 수고한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데 어떤 편견을 갖고 딱 정리하는 사람이 아닌 바에야... 그냥 못 미더워서 넌지시 보이는 정도라면 ‘그럴 수 있고 너무 자연스럽다. 나라도 그럴 가다[거다]’ 이런 생각도 하고...

서로 관계가 형성되면 없어져요. 그런 얘기도 하고... ‘못 미더웠는데 좀 다르네요’ 이렇게... 그게 오히려 처음부터 ‘의사 같지 않고...’ 이런 얘기 듣는 것보다, 나를 보여주고 만나다가 그런 얘기를 듣게 되면 좋아요. 그래서 어떨 때는 일부러 ‘나 30대 초반이고 의사다’그런 얘기를 하기도 해요. 편견 갖고 보라고... 그런 거리감을 갖고 보다가 정말로 만나는 사람들이 생기는 게 더 진국인 거 같애요.”

 

30대 중반이 된 공유정옥은 그냥 현재 주어진 길을 가고 있다고 자신을 얘기했다.

 

“나는 옛날을 자꾸 곱씹는 스타일이었는데, 지금은 현재형으로 변한 거 같애요. 앞날은 구체적으로 고민을 안 해요. 상근하면서 많이 바뀐 것 같은데, 그 전에는 옛날 일들은 혼자서 되게 많이 생각을 해요. 그게 왜냐하면 앞날에 대해서 막연하니까 ‘그때 내가 이랬는데 어쩌다가 여기까지 왔을까?’ 그런 거죠. 1년에 한 두 번씩은 95년~96년 일기장을 보기도 하고 그러거든요. 그러면 그 고민이 아직도 있기도 하고, ‘이게 해소가 됐네’ 이렇게 확인도 하기도 하고 그래서...

나는 어릴 때부터 딱 ‘나는 거기로 가야지’하면 강박적으로 그렇게 하는 스타일이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앞으로 뭐 하지? 어떻게 살아야 제대로 사는 거지?’ 이런 생각을 안 하는 이유가 딱 가서 언덕배기에 올라서야 다음 능선이 보이는 것도 있는 거 같애요. 반대 방향으로 끌리고 있는 거 같애요. 예전에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면 골목골목 다 챙기고 그래야 된다고 생각했었는데, 나에 대한 믿음도 생기는 거 같고요. ‘그런 거 없어도 돼’ ‘잘 갈 수 있을 거 같애’ 그러면서 그냥 가면 될 거 같다는 자신감도 있어요. 이러다가 다음 능선이 10년 후에 보일지 1달 후에 보일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그러다 보이면 다음 능선을 향해서 가면 될 거 같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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