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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농의 샘, 보는 이의 마음까지 경건하...
- 12/13
낮은 데로 임하소서
오래 전부터 많은 이들이 노동자 민중과 함께 하려고 현장으로 들어갔고, 그런 흐름은 노동자 민중들의 삶 속에 적지 않은 변화를 가져왔다. 그런 노력의 결과 노동자 민중 속에서 구의원, 시의원, 국회의원, 농협장, 구청장 등이 나오고 있다. 그러면서 어느 수간부터 사람들은 좀 더 많은 영역을 확보하기 위해 더 위로 올라가려고 노력하기 시작했다.
낮은 데서 뿜어져 나오는 샘물을 먹고 위로 올라가는 사람들은 더 많은 샘물을 원한다. 하지만 자신이 스스로 다시 그 샘물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런 가운데 아직도 많은 이들이 스스로 낮은 데서 뿜어져 나오는 샘물이 되고자 하고 있다. 그래서 아직은 샘물이 마르지 않고 있다.
1970년 전태일의 분신 이후 학생운동 활동가들은 ‘전태일을 따라서’ 민중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고려대 68학번인 김영곤도 72년 구로공단으로 들어가면서 노동운동을 시작하게 된다.
“80년대에는 만 명 정도가 현장으로 갔다고 그러는데, 그때는 현장으로 간 사람이 몇 십 명 됐죠. 그 당시에는 많은 거죠. 노동으로 많이 가고, 농촌으로도 가고, 그 다음에 빈민... 전태일을 따라서...”
-전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 의장 김영곤
80년대는 학생운동 활동가들이 조직적으로 현장으로 들어가면서 밑에서부터 변화의 흐름을 만들기 시작한 때이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노동자의 삶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사상적 혼란 등으로 다시 현장에서 빠져나온다. 이런 흐름의 끝 무렵인 93년 양산의 노동현장으로 들어갔던 한 활동가는 대중의 삶을 이해하면서 한 노동자로 거듭하기 시작했다.
“나름대로 노동자에 대한 신비감이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현실은 아니더라고요. 현실은 사람들이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더라고요. 여성노동자들은 성적으로 굉장히 문란해 있었고... 견뎌내기가 쉽지 않던데... 그래서 ‘더 있어야 되나’ 고민했었어요.
같이 있던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가 많이 아프고 사정이 안 좋아서 같이 우유배달을 했었어요. 1년 했었어요. 제가 사는 동네를 중심으로 했는데, 그때 우유배달 하면서 수금하러가고 배달하고 그러면서 사람들을 알게 되잖아요. 먼 곳에서 여공들이 오잖아요. 그래가지고 정 붙일 데 없어서 동거를 하기도 하고...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어요. 다들 우유값 밀리고, 방값 밀리고... 제가 공장 안에서 봤던 모습하고 우유배달하면서 사는 모습하고 전혀 다르더라고요. 그때 ‘노동자의 모습은 공장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노동자들 생활에도 있는 것이다’하고 깨달았죠. 사람들 생활 속으로 들어가야 되는 거로구나...
공장에서는 악다구니 밖에 안보이잖아요. 맨날 옷 사 입고, 산부인과 가고, 미팅하고 자고 오고, 이거 밖에 안보이잖아요. 또 관리자들의 성추행 이런 거... 끽 소리 못하고... 이런 게 답답한 현실이었는데, 우유배달 하면서 보니까... 저도 동생들 하고 사는 얘기도 하고, 집에 가서 쭉 보기도 하고 그러다보니까 그들이 왜 악다구니 밖에 안 남고 그런가를 알게 됐어요. 그 다음부터는 아주 자연스럽게 저도 그냥 한 사람의 노동자로서 살았어요.”
- 양산지역 활동가
학생운동 활동가들이 접하면서 실망도 하고 배신감도 느끼기도 했던 민중들은 빠져나올 수 없는 현실 속에 자포자기의 삶을 살고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소년원을 드나들면서 도시 뒷골목 삶을 살았던 송경동은 그 ‘쓰레기 같이 버려지는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고 얘기한다.
“거기(소년원) 들어온 친구들은 거의 대부분은 가정 결손 등으로 사회에서 버림받은 아이들이었거든요. 16~17살 이런 애들이 전과가 3범이에요. 다 몇 천원 몇 만원 훔친 죄들이었어요. 겨울이면 먹고 살기가 힘드니 일을 저질러 스스로 들어오는 얘들도 있었어요. 감옥은 그래도 밥 주고 이불 주니까. 서울 와서도 뒷골목에 정상적이고 편안하고 그런 사람들이 오겠어요? 삶이 소외된 사람들에게 자본주의 사회가 열어주는 길은 그런 길 밖에 없는 거잖아요? 자연스럽게 삶을 허비하고 탕진하는 쪽으로 빠지게 되죠. 실상은 쓰레기처럼 버려지는 거죠.
......
하지만 계속 그렇게 살기는 힘들었어요. 그 삶의 바닥에서 배우는 것들이 소중한 것들이긴 했지만, 그곳에서 계속 삶을 이어나간다는 것은 나를 버리는 일이고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어요. 이제 나는 자학과 위악의 거짓된 수렁 속에서 나를 구하고 싶었어요. 누구나 그런 곳에서 빠져나오고 싶지 그렇게 살고 싶겠어요? 방법과 계기가 없는 거죠.”
- 시인 송경동
자학과 인내에 익숙해져 있던 이들이 자신의 삶에 숨통이 트임을 확인하는 순간 엄청난 해방감으로 다가온다. 그것이 민중운동의 중요한 원천이 되는 것이다. 장애인의 삶과 현실에 대해 분노만을 삼키고 살아오던 노금호가 장애운동을 본격적으로 생각하게 된 계기는 이런 해방의 느낌이었다.
“제가 기도원 생활도 하고 그러면서 동정의 대상이었던 뇌성마비... 제가 뇌성마비분들 얕잡아보고 하기도 그랬었거든요. 그런데 그런 사람이 400명 되는 앞에서 강의를 하는 거예요. 강의를 하는 게 어눌하고 그런 게 아니라 내용도 정당하고... 사람들 끌어당기고 하는 거 보면서 그때 뭔가 홀린 듯한 느낌이었죠. 그리고 공동체 활동이나 이런 것도 하고, 에바다학교 권오일 선생님이나 이런 분도 그 때 처음 알게 되고... 그러면서 장애인운동이나 이런 것에 대해서 알게 됐죠. 그러면서 좋게 생각했죠.
그리고 저희 집안이 기독교 집안이라 교회 다니고 그러면서 뭔가 정제해야 되고 그런 금욕주의 같은 것들이 강했었는데... 전특연(전국특수교육과연합회) 수련회에서 술도 처음 배우면서 뭔가 해방감이랄까 그런 걸 많이 느꼈죠. 운동적인 건 아니지만 내가 가지고 있던 인간상을 버리고 새로운 변화들이 돼는... 개인적으로 감정을 억누르는 스타일이었거든요. 슬프거나 그래도 일부러 드러내지 않고... 물론 분노에 대한 것은 거칠게 나왔지만, 웬만하면 가리고 그랬었는데... 1학년 여름방학 때 그런 것들을 경험하면서 억눌렸던 것을 풀어내는 것을 경험했죠.”
- 대구장애인차별철폐연대 노금호
길게는 30년, 짧게는 10여 년 동안 많은 이들이 노동자 민중 속에서 함께 하면서 많은 변화들이 나타났다. 그러나 아직도 너무도 많은 이들이 이 변화를 느끼지 못하고 있고, 산별노조시대에도 무수한 노동자들은 방치돼 있다. 이런 노동자들을 조직하기 위해 쉽게 전망이 보이지 않는 활동을 몇 년째 하고 있는 대구 성서공단노조 박찬희는 ‘혁명은 그런 곳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신념을 아직도 갖고 있다.
“영세사업장을 보니까 심각한 게, 이주노동자들이 있고, 여성노동자들이 있고, 노령노동자들이 있고... 이 사람들이 조직되기 진짜 어려운 사람들인 기라. 건장하고 힘 쎄고 혈기왕성하고 문제의식 많은 젊은 남성노동자라면 찌르면 터지기라고 할 텐데... 여기는 찔러도 터지지도 않는... 인내하고, 차별받고 그런 것을 운명처럼 생각하는 것이 자기 내부화 되어 있는 그런 노동자들...
......
‘우리가 해도 안 되는데 하고 있는 거 아닌가?’ 하는 반성이나 회의도 들어요. 그런 반성이나 평가를 하기 위한 사업들을 조금 조금씩 배치 해 보죠. 활동하는 우리들은 우리 활동하는 거에 매몰 되가 잘 못 볼 수 있으니까, 주변에서 평가를 들어보기도 하고...
제가 가지는 그 반문에 제가 대답하는 거는 ‘정말 어렵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됐을 때는 그게 바로 혁명이다’는 생각을 해요. ‘그 일어나는 순간에 나는 같이 있을란다. 딴 데 가지고 않고 계속 있다가...’ 이런 거 있잖아요? 그런데 그럴 수 있을 거 같아요.”
- 대구성서공단노조 박찬희
삶의 근본문제를 성찰하면서 가장 낮은 곳에서 노동자 민중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노동목사 장창원도 ‘바닥이 기초가 되는 혁명’을 꿈꾸고 있다.
“열악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공부방도 하고, 주민도서실과 문화사업도 하고, 밥 못 먹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밥집도 하고... 여기는 알코올중독자나 거지들도 많이 오거든요. 알코올중독자 거지들 오면 다 자유롭게 먹고 자고하고... 그러다가 내가 와서 노동문화센터를 만들고, 그 속에서 이주노동자센터가 첫 번째 사업으로 4~5년 하면서 자리가 좀 잡혔고, 지금 시도하는 것이 오산지역의 민주적인 여성모임을 준비하고 있고, 공부방을 통해서 자라난 중·고등학교 아이들을 위한 대안교육모임을 계획하고 있고, 아이들과 농장에서 농사도 지으려하고, 이주노동자방송국을 하고 있고, 지역 FM 라디오도 준비 중이예요.
최근에 시작한 것이 사회적 일자리 속에서 재활용센터인 녹색가게(다솜환경)를 2006년부터 시작했어요. 그것은 사회기업으로 지역의 바닥에 있는 사람들을 조직하고 경제공동체를 지향하고 있는 거죠. 협동생산, 공동분배, 사회공헌이 하나의 큰 목적이고, 새로운 공동체운동으로 공장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어요.
처음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왔어요. 처음에는 적응이 쉽지 않았고... 젊은 사람들이 오길 바랐는데, 젊은 사람들은 왔다가 적응이 안 되고... 지금은 조금 나이 먹은 사람들이 중심인데, 그래도 2년 하니까 자체적으로 회의도 하고 그래요. 지금까지는 생산력보다는 팀워크를 맞추는데 주력을 많이 했고, 올해는 최소한 자립할 수 있는 생산을 해야죠. 처음에는 공동체를 지향하는 사람도 좀 있었는데 다 떨어지고, 지금은 먹고 살기 위한 방편 속에서 일을 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는 사람들이 오는 거죠.
......
지역의 센터로서 다양한 문제에 대한 접근하는 민중들의 센터역할을 하면 좋겠죠. 그런 모델들을 민중교회나 지역 센터들이랑 연결해서 같이 전체적으로 바닥에서 일어나야 되는 운동이 돼야죠. 바닥이 기초가 되는 혁명을 꿈꿔야죠.”
- 오산노동문화센터 장창원
낮은 곳에서 노동자 민중과 함께 한다는 것은 수도자적 고난을 감수하거나 혁명에 대한 철두철미한 신념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 삶 자체를 즐기고 자신과 서로에 대한 애정이 있어야 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구로공단에 들어와 20년 가까운 세월을 투쟁 속에 보내고 있는 김소연은 ‘이렇게 하는 게 좋다’고 얘기한다.
“솔직히 서울이 너무 팍팍해서 서울에서 살기 싫다는 생각은 있어요. 장기투쟁을 해도 지방에서 하면 동지들보니까 여유가 좀 있어요. 너무 어렵긴 한데, 인간적인 것이 있으니까... 그런데 서울은 없어요. 그래서 만약에 기륭이 안 되면 ‘나도 지방 가서 살까?’ 이런 생각은 해요.
그런데 저는 여전히 체질이 현장이에요. 이렇게 하는 게 너무 힘들긴 한데 이렇게 하는 게 좋아요. 사람들 하고 수다 떨고 놀러 가고 이런 게 좋고...”
- 기륭전자분회장 김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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