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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통신산업비정규직노조 윤순재 이야기

무수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기본권을 쟁취하기 위해 다양한 투쟁을 벌이고 있다. 그런 가운데 서울통신산업비정규직노동조합은 비정규직 조직화를 위해 몇 년 동안 고군분투하고 있지만 좀처럼 전망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윤순재 동지를 만나서 쉽게 전망이 보이지 않는 비정규직노조 활동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72년 서울에서 태어난 윤순재는 공고 기계과를 다니면서 기능경진대회에 입상하는 등 나름대로의 능력을 쌓아갔다. 그런 영향이 있었던 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90년 삼성정보통신에 입사해 일을 하게 된다. 그러던 중 우연히 ‘관악노동자학교’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이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회사를 1년 다닐 때쯤에 전봇대에 ‘관악노동자학교’라는 걸 딱 봤죠. 그때는 어떤 건지도 몰랐고... 그냥 마음속에 땡긴다는 게 있었고... 그때 많은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서 생각과 사고의 폭을 넓히고 싶은 욕구가 있었어요. 그래서 교회 다니지도 않는데, 교회청년회에 다녀보기도 하고... 그 당시에 친구가 전화가 왔어요. 고등학교 동창인데... ‘가보니까 너무 좋다’고 그래서 따라갔죠.”

 

그렇게 노동단체 활동을 자연스럽게 접하면서 계급의식을 갖게 됐고, 그 이후 열성적으로 단체활동을 하게 된다.

 

“91년 들어갔을 때 제가 노동자학교 3기고요. 대부분 단체들 보면 학생운동권들이 단체를 만들고, 후배들이 오고, 나름대로 이것저것 하고, 학교 틀을 벋어나서 진보정당운동이니 뭐니 이런 것들을 하는 건데... 여기는 그때 한국노동당 창당한다고 하면서 사람들이 다 빠졌어요. 그래서 이 사람들이 남은 거예요.

그 사람들이 남아서 단체 활동을 한 거죠. 그래서 지역에서 활동도 하고, 노동자학교 열어서 하기도 하고, 학습도 하고, 집회 있으면 집회 가고, 나름대로 지역 내 선전전도 하고... 계급의식 확대 강화라는 것을 주목적으로 하는 그런 단체였죠. 그런데 주로 구성원들이 학생운동 라인을 타는 게 아니라 순수하게 배출된 사람들의 자발적 모임이었죠. 학생운동 출신은 1명이었고, 나머지는 다 현장출신이었죠.”

 

93년 군에 입대해 방위 생활를 하고, 제대 후에는 본격적으로 단체에서 상근활동을 하게 된다. 그리고 얼마 후 다시 회사에 복직했지만, 자의반 타의반으로 3년 동안의 회사생활을 그만두게 된다.

 

“97년 1월에 회사는 그만뒀어요. 민주노총이 삼성에 노조를 만들겠다고 하니까 내사를 나왔는데 내 이름이 딱 걸린 거죠. 그래서 1년 정도 ‘나가라’ ‘나가라’ 그랬어요. 난 편했는데, 위에 애들이 힘들어 하더라고요. 말단 사원인데 부장이 차장 옆에 앉아 가지고 ‘야, 윤순재’ 어쩌고 저쩌고 그러고... 처음 대응하는 거라 걔네들도 멍청하게 대응했죠.

사실 그러기 전에 나갈 마음이 있었거든요. 지하철이나 궤도 쪽으로 가보려고요. 또 아버지가 암 투병을 하고 있었고, 집안문제가 안 좋아가지고... 저도 삼성에 대한 마음은 진작 비워져서 떠나고 있었고... 거기서 뭔가를 하려고 했으면 단체를 그만두거나 그랬어야 하는데, 나는 거기서 뭐 할 생각이 없었으니까. 그래서 자의반 타의반 해서 밖으로 나왔죠.”

 

회사를 그만두고 단체에서 회장으로 활동하던 98년 2월 조직사건으로 구속됐다.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출소한 후 집안 생계문제 등으로 인해 PC방을 열어 장사를 하기도 하는 기간을 보냈다. 그러나 장사에 소질도 없는데다가 PC방에 계속 붙어서 지내야 하는 것에 갑갑함을 느껴 중소기업에 들어가 잠시 일을 하게 된다.

2000년 중소기업에 다니면서 당시 서울지역사무서비스노조에 가입해 조합원으로 활동을 하다가 회사를 그만두고 노조 간부로 몇 년 간 활동을 하게 된다. 몇 년간 노조활동을 하다가 본격적인 비정규직사업을 하기 위해 철도 시험을 준비하던 중 생계를 위해 전화국 도급업체에 들어가게 되면서 또 다른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잠깐 돈 벌러 간 거죠. 원래는 궤도 쪽의 비정규직 아니면, 금속 쪽의 비정규직으로 갈 생각이었거든요. 2003년 10월 26일 이용석 열사가 돌아가시는 집회 끝나고 그 다음날 출근했어요. 관악전화국에서 일을 시작했죠.

전화국 도급회사에 건당제였어요. ‘너 일할 줄 아냐?’ 그러고 ‘한 건 당 얼마 주니까 니가 알아서 해라. 오토바이는 니가 알아서 사고, 공구도 니가 알아서 사고...’ 그래요. 완전히 개념 없어요. 지금은 아니지만... 그 당시에 그것도 임금 때먹고 중간에 도망가면, 잡으러 간다 어쩐다 하고... 그런 게 하도 심해서...”

 

그렇게 들어간 도급업체에는 그 이전 한국통신계약직노동조합 출신 조합원들이 몇 명 있었고, 현장분위기가 매우 좋았다.

 

“딱 들어가니까 한통계약직노조 동지들 몇 명 있데... 그때 투쟁 정리하고 도급으로 들어가 있는 거였어요. 저도 사무서비스노조 할 때 연대투쟁 하고 그래서 얼굴 아는 동지들이 몇 명 있더라고요.

들어가서 보니까 한 명이 현장을 틀어잡고 있더라고요. 그 사람은 한통계약직 출신이 아닌데, 한통계약직 동지들이 좀 보조해주고... 예를 들면, 사무실에 전화가 와서 ‘윤순재 기사님, 죄송한데 이거 될까요?’ 그러면 ‘바빠서 안 되겠는데요’ 그러면 안 돌아가는 거예요. 그런데 옆에서 그 형이 ‘순재야, 그거 한 번 해라’ 그러면 ‘알았어요’ 그러는 거예요. ‘여기 좀 되겠네... 희망이 보이네...’

그러다가 2004년 새로운 도급회사로 바뀌면서 한날도 빼지 않고 그 회사랑 다툼이 있었죠. 휴일수당 문제와 지역 배치에 관한 문제로 계속 싸웠죠. 그 와중에 회사는 4명을 해고 통지하게 되고, 거기서 현장모임을 만들고 거기서 현장을 더욱 장악하게 되었죠. 다 복직이 되었고 현장모임이 현장을 더욱 장악하게 되었죠. 우리도 당시에 1년 계약이었기에 12월 말에 회사는 전체 현장노동자의 70%를 해고 하게 되고, 2005년부터는 실질임금이 30%이상 떨어지기에 노조를 건설하게 됐죠.”

 

결단 속에 노조를 만들었지만 밀려난 3명의 간부들은 서울지역을 돌며 조직화 사업을 시작한다. 그러나 그것 역시 현실의 벽에 부딪히게 된다.

 

“처음에 노조를 ‘띄우자’ ‘띄우지 말자’ 이런 얘기가 많았어요. 일단은 해고가 되면 다 중심이 돼서 해나가야 되지 않겠느냐 해서 한 친구가 ‘노조를 띄워서 대응을 하자’ 했고... 2004년과 2005년 사이에 전체적으로 임금이 많이 떨어졌어요. 실질적으로 30%씩 임금이 떨어진 해였어요.

‘이걸 조직하자’ 해가지고 한 개 업체부터 딱 뜨고, 서울지역 전화국이 44갠데 하루도 안 쉬고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아침마다 4개 빼고 다 돌았어요. 9개월 동안... 한 전화국에 3~4번 간 곳도 있고... 관악 구로 이쪽은 열 번씩도 가고... 2004년 12월 8일 노조를 띄우고, 2005년 1월 1일부터 아침 8시에 연맹 차 우리가 끌고 다니면서 음악 틀어놓고... 9월까지 딱 9개월 했는데 반응이 없어요.

그때 한통계약직 사람들하고 부닥쳤는데... ‘안 된다’ ‘안 된다’고 그러면서... 여기서 시발점이 돼보자 해서 했는데... 와, 만만치 않더라고요. 안 되더라고요. 기본 망이 있어서 사람들을 일대 일로 만났는데,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현장 들어가자. 밖에서 아무리 해도 피부로 느끼지 못하면 못 한다’ 그렇게 하고 들어간 거예요.”

 

2005년 하반기에 지역차원의 조직화를 위한 시도를 포기하고 현장에 들어왔지만 현장 활동은 쉽게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명목상 18명의 조합원이 있지만 실제 조합 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간부를 중심으로 5명 정도 수준에서 노동조합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노조 만든 지 4년 됐는데... 똑 같아요. 대신 아는 사람들은 많이 늘긴 했는데... 나이 사십이 가까워지니까 개인적인 처지에 대한 문제로 또 다른 벽이 부딪히는 거예요. 그러면 이걸 어떻게 할 거냐... 지금 할 수 있는 거 하면서 꾸준히 가는데...

우리가 전화국의 간접고용 하청구조이기 때문에... 전화국이 다 뭉치기 위해서는 업체별 작은 벽을 넘고, 이거 뒤에 KT가 있고, KT 뒤에 신자유주의 정책이 있는데... 작은 벽 넘는다고 그 다음에 큰 벽이 있고 이런 거 아니에요. 같이 한꺼번에 서있는 거예요.

그래서 4~5년 해서는 힘들다. 전화국에 있을 때까지 20년 인생을 걸고 승부를 걸든가... 이런 과정을 수십 번 거쳐야 가능성이 보이겠다... 계속 모여서 부딪혀 보고, 또 부딪혀 보고... 제일 중요한 건 그런 거 같아요. 현장에서 자기를 믿는 사람을 얼마나 확보하느냐... 회사랑 붙었을 때 내편이 돼 줄 수 있는 사람을 얼마나 만드느냐 하는 것이... 그거를 만드느냐 못 만드느냐 하는 것에 승부가 달려있다고 생각해요.

현장에서 정체가 완전히 드러났거든요. 그래서 행동을 말끔히 해야 현장에 믿음이 생기고, 회사하고도 쉽게 대응할 수 있고...”

 

노동조합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지만 실제 활동은 한국노총 사업장의 노조민주화추진위원회 정도의 활동도 되지 못하고 있다. 간부들이 계속 회의를 하면서 노동조합을 유지하면서 어떻게든 조직을 확대하기 위한 시도를 힘겹게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전화국간의 친목모임을 시도하고 있어요. 작년에 시도하려고 하다가 안됐고, 올해 제대로 해보려고 하죠. 작년 같은 경우에는 제가 있는 현장 중심으로 많이 신경을 썼었는데... 올해는 좀 더 넓혀서 지역에 있는 좀 더 많은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만나려고 하는데... 이거도 다 들키죠.

일단 모여야 하는데, 너무 산만하게 모여 버리면 진짜 친목모임이 돼요. 친목은 친목대로 가고, 그 안에서 믿음이 가는 친구들은 만나려고 하고 있는 중이죠. 그 안에서 그 친목모임을 그냥 친목으로 가지 않고, 자연스럽게 방향성을 갖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겠죠.”

 

전망이 쉽게 보이지 않는 가운데 노동조합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엄청나게 힘겨운 활동이었다. 그러면서 잠시 회의가 들기도 했던 것이 사실이라고 떨어 놨다.

 

“정말 전망이 안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성과가 나오지 않자 ‘여기 정리하고 울산이나 가자’ 그런 얘기가 지나가는 말로 나왔어요. ‘그래도 해볼 여지가 좀 있다. 해보자’ 이렇게 암암리에 가는 거죠.

단위가 큰 비정규직도 비슷할 거라고 생각을 해요. 똑같은 벽에 부딪힐 거고... 10명이든, 20명이든, 100명이든 똑같은 고민일 텐데... 벽이 하나 넘어서 또 나타나는 게 아니라 거대한 벽이 한꺼번에 있는 거기 때문에... 대공장 사내하청도 ‘신자유주의 정책 때문에...’ ‘원청이 이것밖에 주지 않기 때문에...’ 이런 문제들이 똑같을 거라는 거죠.”

 

윤순재는 현장 동료들을 만나면서 가장 낮은 수준에서 생각을 맞춰나가는 활동을 벌이고 있다.

 

“현재 있는 전화국에서 할 수 있는 거는 내편인 동료들의 생각을 올려주는 거... 예를 들어서 이런 거죠. 전화국에 뭔가 문제가 있다 그러면... ‘형, 이 문제는 업체에서 사람을 안 뽑기 때문에 생긴 문제 아니냐? 이거를 회사에서 조치를 하지 않는 거는 잘못된 거 아니냐?’... 어떤 문제를 바라보는데 있어서의 정확한 핵심이 뭐냐를 얘기하는 거죠. 회사는 지표 떨어지고 그러면 자꾸 뭐라고 하는데... 그전 같았으면 ‘그런가 보죠’ 그랬는데 ‘회사가 그런 거는 인원을 뽑지 않아서 그런 거 아니냐? 지네가 잘못한 거를 우리한테 자꾸 떠넘긴다’ 그렇게 얘기를 하죠. 모여서 얘기를 하면서 철학적으로 얘기를 많이 해주죠. ‘형, 10만원 번다고 행복하겠어요? 동료들 간에 인간적인 것이 있고 그래야 행복하지...’ 이런 식으로...”

 

통신산업 비정규직들도 젊은 세대들이 정착을 하지 못하면서 점차 나이들이 많아지고 있다. 그런 가운데 최근 KT측에서 새로운 형태로 도급구조를 재편하려는 움직임이 있어 그에 대한 대응을 조심스럽게 고민하고 있다.

 

“어린 친구들이 들어오면 적응을 못해요. 주류가 30대예요. 2000년 초에는 20대가 많았는데... 내가 있는 전화국에도 열 몇 명 왔다가 갔어요. 하던 사람들은 그냥 하는데... 평균연령이 올라가고 있어요. 젊은 친구들이 와서 버텨주고 그래야 되는데... 열 명 오면 한 명은 살아남고 나머지는 다 떠나요.

그런 와중에 KT에서 자회사를 설립해서 하청을 흡수할 거예요. 자회사를 만들었고, 자회사가 지금 우리를 직접 관리하도록 그렇게 만들려고 해요. 4년 내에 그렇게 한데요. 그러면서 ‘복지가 좋아질 거다’ 이런 기대감을 가지고 있고... 그게 어떻게 갈 건지 한축으로 고민 중이고... 그게 어떻게 가든지 간에 걔네들이 쉽게 주나요? 우리가 따내지 않으면 다 허깨비예요. 장난치는 거고... 업체들이 중간에서 많이 먹는 것도 있는데... 지금은 적정하게 가자는 것 같아요.”

 

‘생존하는 것 자체가 투쟁 같다’고 얘기하는 윤순재는 믿음이 가는 관계를 만드는 것에 행복을 느낀다고 얘기한다.

 

“활동하는 사람들이 20대 때 가졌던 열정이 10년 가면 30대 중반이 되는데... 5년 10년 박았는데... 성과도 안 나고 지친다고요.

현장에서 내가 믿음을 저버리면 나와 함께 하는 동지들이 깨진다고요. 지금이 크냐 작으냐 하는 거는 진짜 작은 문제예요. 중요한 것은 내가 이 길을 계속 갈수 있느냐가 중요하죠. 현장에서 자기가 서야 그 현장이 설 거고... 그러면 후배들과 믿음과 신뢰가 가는 관계가 있는 거잖아요. 거기에 행복이 있는 거죠. 이 길을 계속 간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죠. 앞으로 10년 후면 계급갈등의 격화, 자본재생산의 문제, 환경, 에너지, 자원, 식량 문제 등 상당한 위기를 맞을 것이라 생각해요. 그 때가 정말 중요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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