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부안 이주여성 한글교실 김영표 이야기

신자유주의 속에 해체되는 지역사회를 새롭게 복원한다는 것은 단순히 과거를 복구하는 것이 아니다. 국제결혼 등을 통해 수많은 다문화가정이 이뤄지는 현실에서 이주여성들이 지역사회의 주체로 만들기 위한 것은 지역공동체운동의 새로운 접근이기도 하다. 부안이주여성한글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김영표 동지를 만나 그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68년 부안에서 태어난 김영표는 교사였던 아버지의 지도가 남달랐다. 일제시대부터 해방공간에서 좌익 활동을 하셨던 아버지는 그에 대한 얘기는 침묵으로 일관하면서 자식이 사회의식을 갖도록 배려하셨다.

 

“공부에 대한 것보다도 세상에 대한 것을 많이 가르쳐 주셨어요. 시골에서 초등학교 때 ‘소년 조선’이라는 신문을 구독했어요. 저는 그걸 봤어요. 중학교 때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봐야 하는데 꼭 9시가 되면 아버지가 부르셔요. 9시뉴스 보라고... 그리고 그날의 주요 기사 거리에 대해서 ‘너는 어떻게 생각 하냐?’고 제 생각을 물어 보시 곤 하셨죠. 그리고 대학시절에 사고(?)를 많이 치고 다녔는데... 운동을 할 때 가장 문제가 되는 게 가족과의 관계잖아요. 그것을 아버지가 해결을 해 주셨죠.”

 

전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무렵 광주항쟁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되면서 김영표의 인생에서 중요한 전환이 이뤄진다.

 

“친구가 화순에서 전학 온 놈이 있었어요. 근데 이놈이 맨날 하는 얘기가 광주에 대한 얘기예요. 근데 내가 가지고 있는 광주에 대한 생각과 완전히 틀리는 거예요. 저희 매형이 그 당시에 특전사에 있었어요. 매형 얘기 들어보면 이건 폭동이에요. 난 광주를 그렇게 알고 있었죠.

고등학교 2학년 때였어요. 하루는 시험 끝나자 이 친구가 ‘야, 우리 어디 좀 갈래?’ 그래서 ‘가자’ 그러니까 전북대학교를 간 거예요. 그때가 84년 5월 초쯤이었어요. 전북대학교를 갔는데 최루탄 냄새에다가 전경들이 다 막고 있어서 들어가질 못하는 거예요. 그래도 우리는 개구멍이 어디 있는지 다 아니까 들어갔어요. 친구가 어디서 유인물을 가져다 주길래 봤더니 이 친구가 하는 얘기랑 똑 같은 거예요. 조금 더 들어가니까 이세종 열사 유품이 쫙 펴져있는 거예요. 그리고 조금 더 가니까 마당극 하는 델 갔어요. 거기 가니까 동네 형이 거기서 장구치고 있더라고요. 형 하고 궁금한 거 몇 가지 물어보니까 이 새끼 하고 똑 같은 얘기를 해요. 내가 굉장히 좋아하는 형이었거든요. 형이 친구놈 하고 똑 같은 얘기를 하니까 친구놈이 존경스러운 거예요.

그때부터 교과서는 싹 접어버리고, 그 형한테 가서 사회과학 서적을 갖다가 탐독하는 거죠. 솔직히 50%도 이해를 못했어요. 그냥 막 읽었을 뿐이지... 그래도 박노해 씨의 시는 조금 이해할 수 있었어요.”

 

86년 경기지역에 있는 대학에 들어가서 탈춤동아리 활동을 시작으로 학생운동에 참여하게 되고 군 제대 후 기존 운동권의 관성화 된 모습을 비판하며 대중사업을 강조하기도 한다.

 

“운동이라는 것도 대중사업이거든요. 그 당시에 저하고 맞섰던 것이 뭐냐 하면... 예를 들어 노래를 해도 가요는 안 해요. 다 운동가요를 하고, 일반가요를 하면 천박한 놈이 돼버려요. 그런데 저는 생각이 조금 달랐어요. 저는 일반가요도 할 줄 알아야 된다고 생각해요. 대중사업은 대중과 동떨어져서는 못하는 거예요. 같이 가야 되는 거죠. 그러려면 대중과 같이 어울릴 수 있는 똑같은 눈높이가 돼야 된다는 거예요. 그들과 격이 없게 생활을 해야 되는 거거든요. 그런데 ‘나는 운동권이니까’ 이러면서 냄새 풀풀 나게 하고 다니고... 그런 걸 멋으로 알고...”

 

대학 졸업 후 건설회사 현장관리직으로 일을 하면서 잠시 운동과 멀어진 삶을 살게 된다. 건설현장의 술 문화 속에서 몇 년을 보내는 가운데 건강이 극도로 악화돼 98년 고향인 부안으로 다시 내려오게 된다.

 

“서울에서 내려왔는데 후배 한 명이 놀러 와서 ‘선배, 부안이라는 곳이 어떤 곳입니까?’ 질문을 해요. 말이 안 나와요. 챙피하죠 이거... 내가 태어나서 살던 곳인데 부안이라는 곳을 아무 것도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그때부터 부안에 관련된 책들을 찾으러 다녔어요. 부안문화원도 가보고, 군청도 가보고...

그러다가 새만금 간척사업 얘기가 나와요. ‘한 번 가볼까’ 그래서 계화도 쪽으로 가봤어요. 그런데 계화도 사람들이 새만금에 대한 말을 안 해요. 다만 이웃과의 관계가 옛날 같지가 않다고만 해요. 서로 불신하고... ‘이것은 아닌데...’ 그러고 있는데 누가 그래요 ‘부안 환경모임 있는데 한 번 들어가 볼래?’ 그래서 부안환경모임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거기서 새만금 얘기를 딱 꺼내는 거예요. 같이 공부를 하면서 보니까 개발독재에 의해서 공동체가 파괴되고 있는 거예요.

그렇게 운동을 다시 시작하면서 제가 살아있다는 거를 느꼈어요. 활력이 막 생겼어요. 접근방식도 옛날하고는 틀렸죠. 적극적으로 내 주장만 가져가는 게 아니라 일단은 들어보고 거기에 대해서 나의 생각을 얘기하고... 그날 답을 다 얻으려고 안 했어요. 학창시절의 운동방식이 완전히 바뀌어 버렸죠.”

 

고향에서 공부를 좀 더 해야겠다는 생각에 편입을 하게 되는데 그곳에서도 새만금문제로 갈등이 생기기도 했다.

 

“토목공학과다 보니까 전부다 새만금에 대한 환상에 빠져 있는 거예요. 제가 새만금 반대하면서 한참 열나게 싸울 때 아닙니까? 선배라는 사람들도 현장에 와 있었고... 유일하게 새만금 반대하는 사람은 저 밖에 없는 거예요. 레포트를 써도 새만금에 대해서 굉장히 비판적인 레포트를 썼거든요. 유일하게 학점을 잘 준 것이 환경공학 교수만...”

 

직접 농사를 지으며 환경농업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됐고, 새만금 투쟁을 비롯해 핵폐기장 저지투쟁 등을 활발하게 벌이던 중 유연치 않은 기회에 이주여성 문제를 접하게 됐다.

 

“2003년에 사고가 터졌어요. 계화도 사람인데, 베트남 사람하고 결혼한 사람이에요. 어느날 이 사람이 자기 아내를 구타하는 모습이 환활(환경활동)을 하던 친구들 눈에 띄게 되었고, 이들 환경활동대는 ‘이것은 가정폭력이다’고 해서 그 여자를 데리고 나가 버렸어요. 그래서 그 남자 불러다가 ‘그렇게 조심하라고 그랬는데... 이게 무슨 챙피냐?’ 그러자 이 사람이 옷을 벗어서 보여주는 거예요. 참 할 말이 없더구먼... 온 몸에 상처투성이예요. 여성이 부부로서의 관계도 맺어주지 않을뿐더러 자꾸 겉돌아요. 그래서 남자는 ‘그러면 돌아가라’ 그래도 돌아가지도 않는다는 거예요. 그러다가 술 한 잔 먹고 홧김에 팼는데 그것을 이 학생들이 본거야. 그런데 이 남자의 골병든 모습은 보지를 못했죠. 보니까 심각해요.

그래서 ‘이주여성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고 고민하게 되었죠. 그러던 어느날 성당에서 원어민 교사를 하시는 분을 만나게 되었죠. 처음 보는데, 지나가 길래 그냥 불렀어요. ‘아줌마, 얘기 좀 합시다’ 이 여성이 딱 쳐다보더니 오는 거예요. 그래서 저를 소개했죠. ‘저는 성당에 다니고 있는데, 이주여성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는데 아는 사람이 없어서 얘기를 꺼내보는 거다’ 그랬더니 ‘구체적으로 어떤 생각을 갖고 있냐?’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상담소도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런 저런 얘기를 했죠.

얘기를 하다보니까 우리 친구 애기엄마를 잘 알더라고요. 친구 애기엄마는 일본여성인데... 같이 고민을 해봐야 한다고 그래서 의견을 물어봤었거든요. 그래서 같이 모이자 해서 친구랑 같이 모여가지고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 그러니까 ‘상담소도 좋고 뭐든지 해야 된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러면 다른 여성들도 있으니 정말 필요한 것이 뭔지 한 번 알아봐줘라’ 그랬더니 답이 딱 나오는 게 한글을 배우고 싶데요. 그러면 한글학교를 하자고 했어요.”

 

지역에서 이주여성문제를 접근하기 위해 여러 단체와 정당 등을 찾아다녀 보았지만 선뜻 나서는 곳은 없었다. 그러게 동분서주 하던 중 이주사업을 함께 할 사람들을 만나게 됐다.

 

“전주에서 농민회 전북도연맹 행사가 있어서 갔더니 전라북도 여성농민회 회장님이 딱 오셨네... 아는 형수거든요. ‘형수, 여성단체들이 이런 걸 고민해야 될 거 아니요?’하면서 막 뭐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형수(여성농민회장)가 ‘삼춘, 무슨 말씀이세요. 전라북도 여성농민회에서 이주여성 한글교육 사업을 하기로 했어요’ 그러시는 거예요. ‘그러면 부안은 담당이 누구냐?’ 그랬더니 ‘임덕규 선생이 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자리에서 바로 전화했어요. ‘임선생님 이거 어떻게 된 겁니까?’ 그러니까 ‘계획은 갖고 있는데 사람이 없네요’ 그래요. ‘내가 사람하고 장소는 얼마든지 구해 줄테니까 와서 선생님 좀 하쇼’ 그랬어요.

교재도 없어요. 그래서 전교조 국어선생님한테 가서 ‘선생님, 도와주십시오’ 해서 그 양반, 나, 임덕규 선생, 그리고 전주에 평화인권연대에서 활동하던 여성 동지 하고 해서 고민을 하면서 만들어낸 거죠.”

 

성당 건물을 이용해 이주여성들을 대상으로 한글학교를 운영하기 시작하면서 나름대로 다양한 활동을 벌이게 된다.

 

“처음에는 프로그램을 다양하게 했어요. 우리 문화도 알아야 되고... 우리 문화라고 하면 대부분 시부모님 모시고 있으니까 제사상 차리는 방법, 절하는 방법, 그런 음식들도 만들어보고...”

 

임덕규씨와 함께 둘이 중심이 돼서 매주 일요일 한글학교를 운영하는 것은 개인적 헌신이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것이었다. 재정적 후원도 특별히 받지 않으면서 사비를 털어 한글학교를 운영하는 가운데 지역의 몇 분이 자원봉사형태로 지원을 하기도 했다.

 

“한번은 로타리클럽 사모님들 모임이 있는데, 요리강습을 하자고 그러기에 하자고 했어요. 그런데 돈만 주시는 거예요. ‘나는 이런 거 필요 없습니다. 그동안 내 발품 팔아서 다 했습니다. 돈 몇 푼 받겠다고 이런 거 아닙니다’ 그러니까 자기들도 뻘쭘하죠. ‘기분 나쁘게 생각하시지 마시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저는 여러분들이 와서 하는 것을 돈만 던져주고 끝내는 것이 아니고, 모든 일을 같이 해서 관계를 맺으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거 같으면 정부보조금 신청해서 쓰죠. 그런 거 없이 이렇게 할 때에는 나름대로 생각이 있으니까 그런 거 아닙니까? 이해해 주십시오’ 그러니까 이 양반들이 빨리 이해를 하더만요. 그래서 같이 시장 봐서 직접 만들고...”

 

한글학교를 개설하고 1년이 지나 부안지역에 사회복지관이 문을 열면서 이주여성을 대상으로 한 사업들이 좀 더 확대됐다. 그에 따라 한글학교는 직장 등의 문제로 평일에 나올 수 없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축소돼서 운영된다.

이런 활동들을 몇 년간 진행하면서 김영표는 이주여성 문제가 사회적 문제임을 몸으로 느끼게 됐다.

 

“처음에 한글학교 시작할 때만해도 여성들이 문제라고 생각을 했었어요. 글을 모르고 그러니까... 그런데 조금 지나다 보다보니까 여성들이 문제가 아니라 남편들이 문제야. 남편들이 안 내보내주면 그것도 못하니까. 그런데 지금은 아니에요. 남편들이 문제가 아니고 그 이전에 사회적인 문제더라고요.

그거를 경찰행정이나 행정 하는 사람들한테 수차례 얘기했거든요. 교양교육을 해야 된다. 특히 이장들... 그들이 가장 선도적으로 지역의 여론이나 이런 거를 주도하는 사람들이니까... 그들을 먼저 깨이게 하지 않는 이상 무지 힘들다는 거예요. 작년 6월까지만 해도 ‘교환 가능합니다’라고 현수막이 붙었어요. 그리고 술자리에서 ‘베트남 가서 하나 데리고 와’ 그러잖아요. 아주 거리낌 없이... 돈 주고 사오라는 말 밖에 더 돼요?”

 

한국에 와서 아이를 낳고 살아가는 다문화가정의 현실을 알게 되다보니 이주여성들의 적응문제와 함께 더욱 심각한 문제로 나타나는 것이 자녀들의 문제였다.

 

“아이들 문제는 정말 심각해요. 특히 첫째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좀 있어요. 머리는 정말 좋은데 다혈질이에요. 엄마가 없으면 불안해하고... 딱 한국에 오자마자 한국이 어떤 나란지도 모르고 겁나죠. 그런 상태에서 애를 가지고... 엄마가 정서적으로 불안하니까 아이들도 불안한 거예요. 둘째 애들은 잘해요. 애들이 밝아요. 큰 애는 뭔가 거칠다거나, 아니면 괴팍하다거나, 아니면 너무 조용하다거나...”

 

이런 문제의식 속에 김영표는 이들 가정에 직접 결합해 자녀들의 학습지도를 비롯한 대면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런 제안을 받아들여 열 가정을 대상으로 한시적인 가정방문 학습지도가 시도되고 있다.

 

이주여성을 대상으로 한 사업은 대부분 한국 사회에 동화시키기 위한 것이 주된 것이다. 그러나 이주여성들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고민하는 이들은 이들의 문화를 이해하고 주체가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거를 하면서 나 자신한테도 너무 그렇지 않았나 생각하는 게, 저 결혼이민자들한테 우리 문화만 강요를 했지 그들의 문화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농민회나 이런 행사 때 몇 번 주장을 했는데 받아들이지를 않으니까 나도 깝깝하죠. 부스 하나만 만들어달라는 거예요. 그들의 음식도 만들고, 그 나라 민속무용도 보여주고... 그러면서 똑같은 사람이라는 걸 인식시켜줘야 되는데 안하는 거예요.

저는 애들도 모아가지고 엄마들이 직접 그 나라 말과 문화를 가르쳐야 된다고 생각해요. 이 아이들이 웃기는 게 엄마에 대한 공경심이 없어요. 일단은 엄마가 한국말을 모르잖아요. 잘 모르니까 표현이 안 되고, 집에서도 남편들이 무시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이들도 무시를 해요.

장수에 있는 민들레 학교를 이현선씨가 운영을 하시는데... 거기는 어떻게 하냐하면 베트남이면 베트남, 일본이면 일본, 이렇게 아이들을 모아서 엄마가 공부를 시켜요. 그러니까 아이들이 엄마에 대한 존경심이 생기는 거예요.”

 

이주여성의 문제에 함께 하는 과정에서 간혹 이들에 대한 접근방식으로 갈등이 생기기도 했다.

 

“집단으로 바람이 날뻔 했어요. 산업연수생들이 들어와 가지고 이쪽도 친구를 데리고 나오고 여성도 친구를 데리고 나와서 집단으로 바람이 날려고 해요. 갈수록 심각해지려고 그래요. 정말 고민스럽죠.

그래서 모 인권단체의 사람에게 물어봤더니 냅두라는 식이예요. 그거는 우리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것은 그들의 문제라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미쳤다’ ‘너그들은 개풀 뜯어먹는 소리하지 마라’ 그랬어요. 말려야 되는 게 당연한 거 아닙니까? 한국사람 같으면 즈그들 둘이 눈 맞으면 인정해줄 수가 있어요. 근데 이 여성들은 한국 사람도 아니고, 이 남자(산업연수생)가 떠났을 때 그 여성은 어떻게 할 거냐? 그거는 인권이 아닌가요? 우리가 지켜줄 수 있는 건 지켜줘야 되는데, 그걸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해가지고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정말 한심하죠.”

 

한글학교를 운영한 지 5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이주여성들과의 정서적 교감은 매우 높아졌고, 이주여성들 서로 간에도 끈끈한 친밀감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본인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의식이 싹 뜨고 있기도 하다.

 

“말 그대로 자조회가 형성이 돼야 해요. 스스로가 필요에 의해서... 남편들도 그래요. 전에는 좀 동떨어져 있었거든요. 근데 지금은 조금 달라요. 이제는 ‘우리 스스로가 주장을 하자’ 그래요. ‘군청에도 찾아가 보고, 개선할 것도 얘기하고, 스스로가 해야 되지 않느냐?’라고 문제의식을 갖는 사람이 생겼어요.”

 

본인이 환경농업과 영농조합 활동을 함께 벌이고 있는 김영표는 이주여성사업이 늪과 같다고 생각한다.

 

“늪은 한 번 발이 들어가면 더 깊이 들어가면 들어갔지 못 빼요. 처음에는 상담에서 시작했죠. 그러다보면 그들의 생활, 그들의 아픔을 알게 되고. 그러면 한 발 더 들어가요. 그러다보면 계속 빠져드는 거예요. 못 빠져나와요. 그들과 같이 갈 수 밖에 없어요.”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