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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농의 샘, 보는 이의 마음까지 경건하...
- 12/13
60년 가까운 생을 살아오며 늦은 나이에 노동조합을 알게 된 비정규직 여성노동자가 있었다. 노동조합과 함께 시작된 힘겨운 투쟁의 기간은 신앙과 양심의 힘으로 버텨냈다. 그리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굳건한 연대 속에 승리하는 투쟁을 만들어낼 수도 있었다. 서울대병원 간병인분회 정금자 분회장을 만나 삶과 투쟁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51년 전남 나주에서 태어난 정금자는 광주에서 고등학교를 나온 후 도서관 사서로 첫 사회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나 도서관 사서일이 워낙 박봉인데다가 꿈과 자존심이 있었던 정금자는 새로운 일자리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때 독일에 막 갈 때였어요. 광부 가고 간호사 가고 그랬는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간호보조학원 나와서 간호사가 아니라 간병인으로 보낸 것 같아요. 그때 간호사가 독일 간다고 그래서 내가 그 꿈을 안고 간호학원을 다녔죠. 간호학원을 다녀서 병원 근무를 좀 했죠. 개인병원에서는 간호조무사를 간호사로 막 써요.”
그렇게 병원과 인연을 맺기 시작해 광주와 서울에서 8년 가까운 기간을 병원 일을 하며 보냈다. 간호조무사였지만 실제 간호사 이상으로 많은 일들을 하게 됐고, 그러면서 많은 경험을 하게 됐다.
28살에 결혼을 하고 병원을 그만둔다. 전남 고흥 출신으로 중소기업 중역으로 있다가 개인사업을 하던 남편은 79년 박정희의 사망과 민주화의 봄이라는 시대적 분위기 속에 김대중의 동교동으로 합류하면서 정치에 입문하게 된다. 그러나 신군부가 들어서고 광주항쟁이 진압된 후 여러 가지로 어려워진 남편은 고향인 고흥으로 내려갈 것을 결정한다.
“그때 남편이 정신이 있는 사람이라 뭐인가 가만히 있지 않고 기계화영농단을 만들었어요. 그때는 콤바인이니 트랙터니 이런 게 드물었어요. 기계화영농단이라는 농촌단체를 만들어서 시골에서 야당운동을 시작했어요. 그때까지는 시골에 야당이 없었어요. 박정희 정권 때는 전국을 독차지했으니까. 야당이 거의 없던 시절에 기계화영농단이라는 조직을 만들어서 야당활동을 시작한 거죠.
그때는 사회가 민주화운동시대였기 때문에 종교계에서도 그쪽으로 많이 했어요. 그리고 우리 목사님이 의식 있는 목사님이었는데 기독교농민회 활동을 하셨어요. 그래서 저도 기독교농민회 활동을 하고...”
그렇게 지역에서 나름대로 활동을 하면서 지역기반을 다진 남편은 88년 총선에서 선거에 출마를 하려 했으나 돈이 없어서 포기하고, 고등학교 선배인 평민당 인사의 선거를 돕게 된다. 그 결과 그 선배의 당선과 함께 국회의원 보좌관으로 일을 하기 위해 다시 서울로 옮기게 된다.
그런 속에서 기독교농민회 활동을 열성적으로 했던 정금자는 남편을 도와 정치활동을 함께 열성적으로 벌여나가기도 했다.
“기독교농민회 일을 열심히 했죠. 전국으로 활동을 했다고 봐야죠. 그때는 전국에 조직이 만들어져 있었어요. 그래서 내가 많이 도움을 받았죠.
남편이 보좌관을 하고 있을 때, 김대중씨가 (92년) 대통령에 출마했는데... 그때는 민주당 지역구가 전라도하고 서울 밖에는 없었어요. 강원도나, 충청도나, 경상도는 거의 지역구가 없었어요. 그러니까 보좌관이나 이런 사람들이 각 지역으로 배치가 됐어요. 그래서 나하고 남편하고 같이 충청도 음성 진천으로 갔어요.
나는 거기 가서 도움을 받는 게 기독교농민회 도움을 받는 거죠. 기독교농민회 자체가 민주화운동을 했으니까. 농민운동을 하는 것보다는 의식을 깨기 위한 활동이 먼저였거든요. 그래서 그쪽 조직들의 도움을 받아서 내가 거기서 활동하는 범위를 넓혔고...”
그러나 현실 정치논리 속에서 남편은 고립되어 갔다.
“지방자치가 되니까 지역에 자치단체장이나 의원들을 뽑으면서 우리는 의식 있는 사람을 뽑고 싶은데... 그 사람에게는 옛날 여당에 붙어먹었던 사람들, 지역에서 유지라고 하면서 돈 좀 벌고 그런 사람들이 붙은 거예요. 그 사람이 국회의원 당선되니까 거기로 다 붙은 거지... 그래서 우리가 반대하기 시작하죠. ‘그 사람 안 된다. 우리 취지하고 맡지 않다’. 그 사람은 ... 우리하고 취지가 다르다보니까 그쪽에서 당선된 도의원이나 이런 사람들한테 우리가 고립돼 버린 거예요. 우리가 싫다고 했으니까. 우리가 고립되다보니까 나중에 모함을 당한 거예요. 우리가 의원 보좌관을 못하도록, 우리가 스스로 나가도록 까지 만든 거예요. 그래서 내가 너무너무 한이 쌓인 거죠.”
94년 국회의원 보좌관을 그만둔 후 정치적 배신에 대한 울분과 함께 당장 막막한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정금자는 사십이 넘은 나이에 일자리를 알아보기 시작한다.
“남편이 직장을 그만두니까 우리가 생활을 할 뭐가 없잖아요. 그래서 내가 생활전선에 뛰어든 거죠. 그때에 도배학원이 막 생겼어요. 여자들도 도배학원 가서 도배 배워가지고 여자 도배기술자들이 생기는 찰나였어요. 그래서 나도 기술이 있어야 뭘 해볼 수 있겠다 싶어서... 기술을 배워서 가게를 낼 생각으로 도배학원을 갔어요.
도배학원에 가서 몇 개월 배웠죠. 그리고 기술자 밑에서 풀칠하는 사람으로 따라 다니다가 관절염을 얻어버린 거야. 하루 종일 쭈그리고 앉아서 일을 하니까... 내가 앉고 서고도 못할 정도로 너무 심했어요.”
갑작스러운 생계의 막막함, 처음 하는 도배 일 속에서의 육체적 힘겨움, 정치적 배신에 대한 정신적 고통 등으로 매우 힘겨운 시기를 보내던 정금자는 신앙에 의지하며 이 모든 것을 극복해 나가시 시작한다.
“내가 원수 갚으려고 기도하는 참이거든요. 낮에는 도배를 하러다니까 시간이 없어요. 밤에 교회에 가서 기도처를 찾고 싶은데... 집에서 조용히 기도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에요. 악을 쓰면서 울면서 불면서 해야 하는 그런 심정이어서 교회에 가서 할 수밖에 없다고요. 교회에 가서 기도를 하려고 기도처를 찾아보니까 밤에는 교회가 다 문을 닫아버리더라고요. 기도할 처소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조그만 기도원에서 부흥회를 한다고 그래요. ‘그러면 좋다. 내가 거기 가서 응답을 받아야겠다’ 이 생각으로 간 거예요. 원수 갚으려고 찾아간 거죠. 울면서 불면서 기도를 했죠. ‘하느님, 나 억울하다. 잘못한 것이 있으면 무엇을 잘못했는지 나한테 깨닫게 해주시고, 아니면 내가 억울한 것을 하느님이 내 원을 풀어주셔야 하니 않습니까!’ 이렇게 기도를 한 거죠.
그런데 음성이 들리는 거예요. 기가 맥힌 거죠. 나의 마음 하고는 반대로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리리라. 원수를 사랑해라’ 이런 음성이 들리는 거예요. 나는 전혀 그 생각을 안했거든요. 그래서 내가 ‘무슨 말씀입니까!’ 그랬지. ‘내가 원수 갚아달라고 그랬지 용서한다고 그랬습니까!’ 그러면서 내가 막 울면서 하느님한테 막 따진 거예요. ‘나 지옥 가도 절대로 용서 못 합니다’ 그랬어요. 그런데 그 이후로는 딱 끊어버리더라고요. 대답이 없는 거예요. 관계가 딱 끊어져 버리고 맹숭맹숭 해져버리는 거야.
그리고는 그 다음날 또 갔죠. 또 갔는데 ‘이건 계란으로 바위치기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이제는 내가 원수와의 싸움이 아니고, 이거는 뒷전이고, 하느님과 나의 관계더라고요. 내가 하느님하고 싸우고 있는 거라고 생각이 든 거예요. 내가 바위에다가 아무리 쳐봐야 나만 아프고 나만 손해지 반응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내가 죽어야지’하는 생각이 딱 들더라고요. ‘내가 살 길을 열려면 하나님 뜻대로 해야 되겠구나’이런 생각이 든 거예요. 그래서 ‘내가 하나님하고 싸워서 이길 수가 없습니다. 이 작은 힘이 어떻게 하나님하고 싸워서 이기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명령 하신대로 용서를 하겠습니다. 그러면 내가 땅에서 풀테니까 하늘에서 풀어주십시오. 내 길을 열어주십시오’ 이렇게 기도를 한 거죠.
그러고 나도 내가 억울한 거예요. 너무 억울해서 말도 못하게 엉엉 울었어요. 내가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나니까 마음이 다 풀리는 거예요.”
그 후 95년 지방자치선거에 남편은 다시 고향에 내려와 출마를 하게 된다. 그러나 이미 민주당이 지역기반을 굳건히 장악하던 상황에서 그에 맞서 무소속으로 출마했던 남편은 낙선을 하게 된다. 그리고 선거에 출마하면서 그 나마의 재산마저 도무 탕진해버려 자식들을 고향에 남겨두고 두 부부만 다시 서울로 올라오게 된다.
연립주택 지하 단칸방에서 어렵게 생활을 하면서 정금자는 40대 중반의 나이에 간병인으로 일을 나서게 된다. 다행이 간병인으로서는 어린 나이인데다가 젊었을 때의 병원 경험이 많은 도움이 됐다. 개인 환자를 돌보다가 97년 서울대병원에서 운영하던 무료소개소에 공채를 통해 입사를 하게 된다. 실무능력이 있는데다가 친근한 성격에 신앙심까지 있어서 간병인 생활은 매우 즐겁게 할 수 있었다.
“남편이 직장을 얻어서 우리 가정이 발전을 해야 되는데, 나만 좋아진 거예요. 그래서 안 되겠더라고요. 그때는 기도 목적이 ‘남편이 일 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였거든요. 그게 이뤄지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내 마음에 또 단안을 내린 거예요. ‘내가 맨날 여기서 해봤자 쳇바퀴 돌더라. 이건 끝이 없다. 남편을 일하게 해야 되는데 내가 하는 것은 이 안에서 맴돌 뿐이지 가정의 발전이 아니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하느님과 나의 관계를 정리를 했어요.
‘내가 간병인을 안 해도 좋으니까 당신이 나를 사용하겠다면 내가 당신의 종이 되겠소’ 그래서 신학을 결심했어요. 내가 안 벌면 먹고 살기가 힘들어요. 학교를 가면 내가 이거를 그만둬야 되는데... 내가 이 직장을 그만두는 것은 죽을 만큼 힘든 일이었어요. 그런데 내가 그 결단을 했어요.”
그런 결심 속에 간병인 일을 잠시 중단하고 신학원에 입학하게 된다.
“내가 학교에 가니까 남편이랑 시댁 식구들은 나보고 미쳤다고 그랬지... ‘먹고 살길이 없는데, 신학이 뭐냐. 너 미친 거 아니냐. 무당 아니냐’ 이런 식으로 나를 몰아세운 거예요. 그렇지만 자기 아들이 놀고 있으니까 나한테 ‘일 나가라’ 이 말은 못해도 나를 왕따를 시킨 거예요. 남편도 나한테 말은 못하지만 ‘저 여자 미쳤다. 완전히 무당 되부렀다’ 이렇게 생각한 거예요.
‘그래도 좋다. 하나님과의 약속은 지킨다’ 그러고는 한 학기를 끝냈어요. 한 학기를 전혀 일 안하고 끝내니까 빚이 막 쌓이더라고요. 그래도 그냥 했어요. 그러니까 남편이 조금씩 뭔 일을 하려고 생각을 하더라고요. 그러더니 조금씩 벌어오더라고요.
낮은 일을 해야 되는데, 낮은 일을 할 줄 모르니까 못 가는 거예요. 자기 채면을 생각하니까. 채면을 버리고, 나도 나가서 간병인 일을 하는데 자기가 못할게 뭐가 있어요. 그런데 자기는 위에 있고, 나만 나가서 벌어오라고 그러면 안 되는 거지... 그런데 그거를 내가 말은 못하고... 나도 그런 남편을 밀어낸 거죠. 내가 남편을 언덕 꼭대기에 올려놓고 밀어트린 느낌이 들더라고요.”
한 학기를 그렇게 보낸 후 다음 학기부터는 낮에 간병인으로 일을 하고 밤에 신학원에서 공부를 하면서 2년을 마치게 됐다. 49살에 신학원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목사가 되기 위한 공부를 생각해 보기도 했지만 10년의 세월을 더 투자해야 하는 상황에서 포기를 하고 만다.
그 즈음 서울대병원에서 간병인 무료소개소를 없앤다는 소문이 돌면서 간병인들이 불안해하기 시작한다.
“2000년부터 없앤다 없앤다 그랬어요. ‘자진해체 시킬 것이다’ 이런 말들이 막 떠돌았어요. 그래서 우리가 노조를 만들려고 했어요. 우리 남편이 정치를 했던 사람이라 그걸 나한테 가르쳐 준거예요. ‘노조를 만들어야 한다. 노조가 없으면 병원하고 대응할 수 없다. 당신이 노조를 만드시오’ 이렇게 얘기를 한 거예요.
그래서 노조를 만들려고 해보니까 우리가 노동자가 아니라는 거예요. 노조를 만들기 위해서 노동부에 질의서를 냈어요. 그래서 거기서 온 것이 ‘간병인이 가사사용인이다. 환자와의 관계이지 사용주와의 관계가 없어서 노동조합을 만들 수 없다’는 결론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노동조합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는지를 알아보려고 사방을 찾아다녔어요. 그러다가 민주노총 권두섭 변호사님을 찾아가라는 남편의 권유로 권두섭 변호사님과 약속을 하고 민주노총에 가서 변호사님을 만나려고 2~3시간을 기다렸어요. 변호사님이 못 오신다는 말을 듣고, 누군지는 잘 모르겠지만 상담을 하고 노조를 만들 수 있다는 예기를 들었어요. 나중에 보건노조 담당자와 그분과 내가 만나서 다시 예기하자고 하고 돌아왔습니다.”
민주노총과 접촉하며 노조 결성에 대한 논의를 하는 동시에 간병인들 자체적으로 상조회를 만들어 집단대응을 위한 움직임을 시작한다. 이에 민감해진 병원측에서는 상조회 간부들과의 면담 속에 ‘상조회를 해체하면 무료소개소를 없애지 않겠다’며 구두 약속을 하게 되고, 상조회는 형식상 해체하게 된다. 상조회 형식은 해체했지만 핵심 10여 명은 자체적인 모임을 유지하며 병원의 대응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2001년 다시 무료소개소를 폐쇄한다는 얘기가 나오자 즉각 노조를 만들어 공개적인 대응을 벌이기 시작했다. 당시 120여 명의 간병인 중 80명가량이 노조로 조직됐지만, 병원측에서 개별면담을 비롯한 탈퇴공작으로 조합원은 6명으로 줄어들고 만다. 그런 과정 힘겨운 속에서도 병원의 탄압에 맞선 활발한 활동을 벌이며 맞서갔다.
2003년 서울대병원은 공식적으로 8월 31일자로 무료소개소를 폐쇄한다는 방침을 밝혔고, 이에 서울대병원 정규직지부와 간병인지부는 공동투쟁으로 맞서기 시작했다.
“우리보고 유료소개소로 가라고 한 달간 시간을 줬어요. 그리고 우리를 쫓아내기 시작하는데 병원의 원장만 빼고 부원장까지 다 동원됐어요. 교수, 수간호사, 간호사, 경비, 모든 직원이 동원돼서 우리를 끌어내는 거예요.
그때는 ‘어디 소속이오?’ 물어보면, 병원하고 싸우니까 ‘노동조합 조합원입니다’ 이랬거든요. 그렇게 얘기하면, 환자가 열이 나서 꼴딱꼴딱해도 오지를 않아요. ‘나’라는 사람이 없는 거예요. 그러면서 보호자한테 이야기하기를 ‘이 간병인을 쓰면 불이익을 당합니다. 병원이 선택한 간병인을 쓰십시오’ 그러면서 우리를 못 쓰게 만든 거예요.”
원장실 점거농성과 병원 현관 앞 농성 등 처절한 투쟁이 시작됐지만 병원측은 관리자들을 대대적으로 동원해서 물리력으로 농성자들을 몰아냈다. 그리고 법원에 신청한 출입금지가처분신청이 받아들여져 농성 간병인들은 병원 출입마저 어렵게 됐다.
이에 12명의 간병인 조합원과 정규직 간부들은 국가인권위에 서울대병원의 인권침해 사례에 대해 진정을 넣고 12월 2일부터 인권위원회 점거농성에 들어간다. 그런 투쟁의 결과 인권위로부터 인권침해에 대한 시정권고를 받아내기도 한다.
2003년 하반기는 죽음으로 저항하는 노동자들의 투쟁이 이어져 열사국면이 만들어지고, 다양한 사업장들의 투쟁이 집중되던 시기였다. 이에 12명의 간병인들은 각종 집회와 농성, 1인 시위, 진정 등 매우 열성적인 활동을 벌이게 된다.
“서울대병원이 두 민간업체를 용역업체로 들여왔잖아요. 우리가 두 업체에 대한 근거자료를 만들어서 불법공급업체로 고발을 했어요. 노동자 공급을 할 수 없게 돼 있고, 소개비가 3만 원 이상이면 안 되게 돼 있는데 5만 원 받고 있고, 중간착취 하고... 이런 근거를 가지고 고발을 한 것이 불법공급으로 판정이 떨어진 거예요.
판정이 떨어졌으면 두 업체를 쫓아내고 우리가 들어가야 되는데, 쫓아내지 않고 서울대병원에서 가만 두니까 ‘행정 처분을 내렸으면 행동으로 옮겨라. 서울대병원 유료소개소를 쫓아내라. 그리고 노동조합이 운영하는 무료소개소를 인정해라’ 그러면서 노동청 점거농성에 들어가게 된 거예요.”
2004년 2월 노동청 점거농성은 3일 만에 경찰병력이 투입돼 전원 연행으로 이어졌다. 이런 격렬한 투쟁이 계속 이어지고 언론의 조명을 받는 등의 상황에서 병원측은 4월 23일자로 새로운 민간업체를 통해 복귀하는 것에 합의하게 된다.
당시 12명의 간병인투쟁을 지원하기 위해 수십 개의 단체로 공대위가 만들어져 함께 했지만, 가장 큰 힘이 됐던 것은 정규직인 서울대병원지부였다. 정규직 간부들이 처음부터 헌신적으로 결합한 것은 물론 12명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1인 당 하루 4만원씩의 생계비를 지급하는 등 책임지는 공동투쟁의 모습을 보여줬다.
“동원은 서울대병원(지부)에서 다했어요. 서울대병원(지부) 간부들이 무지하게 고생했어요. 우리랑 같이 투쟁했으니까... 노조가 병원하고 교섭을 하는데 ‘간병인문제 해결하지 않으면 교섭하지 않는다’해서 완전히 문을 닫아버렸어요. 1년 동안 우리 투쟁 말고는 아무 사업 안했어요.”
복귀 후 조합원들에 대한 견제가 심하게 있었지만 투쟁으로 단련된 조합원들은 현장투쟁으로 돌파하기 시작했다.
“복귀하고 보니까 또 갈구더라고요. 우리 조합원만 수간호사가 와서 찐따를 놓는다든지, 알선을 하는데 우리한테 들어오는 거는 방해를 해요. 그런 걸 우리가 다 적어놓고, 사진 찍어 놓고... 우리도 현장에서 싸운 거죠.”
그러나 문제는 의외로 노조 내부에서 발생했다. 끝가지 싸웠던 12명의 조합원이 현장으로 복귀 한 후 조합원은 다시 급속히 늘었다. 그 과정에서 미묘한 분란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리는 우리만을 놓고 투쟁하는 게 아니거든요. 미래를 놓고 살아가는 정신을 알아야 되는데... 자칫 잘못해서 현재 내 일터만을 놓고 싸우게 되면 문제가 돼버려요. 그게 기득권이 돼 버린다고요. 그 기득권을 벋어나기가 굉장히 힘들어요.
투쟁했던 분들 중에 그 기득권을 행사하려고 했던 적이 있었어요. 그러면 간부로서 조합원들하고 융화가 안 돼요. 몇 명이 지도하고 이런 식이 돼 버리면 이거는 노동조합이 아니죠. 나도 그렇게 될 수가 있었겠지만, 나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으니까 바르게 갈수가 있었다고 봐요. 나는 노동조합 자체가 내 신앙적인 양심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지 않으면 ‘내가 뭐 때문에 생명 걸고 싸웠는데? 일 할라고 싸웠는데...’ 이런 소리가 바로 나오죠. 그리고 ‘느그들은 나 때문에 여기 와서 일해! 느그들은 나한테 잘 해야 돼’ 이런 식의... 투쟁하고 나면 누구나 다 어깨에 힘이 생겨...”
이런 미묘한 흐름은 복귀 후 2대 임원 선거에서 경선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그러나 2대 분회장에 다시 당선된 정금자는 양심과 원칙을 강조하면서 최대한 조합원들을 품어 나갔다. 그리고 제대로 된 노동조합 활동을 위해 굵직하게 달려 나가면서 내부문제를 풀어가고 있다.
서울대병원에서의 활동이 어느 정도 안착되면서 정금자는 특수고용노동자문제를 비롯한 비정규직 문제에 팔을 걷어붙여 나섰다. 특히 간병인 조직화를 위해 열성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잘못된 세상을 바로잡는 것이 우리 노동조합의 목적이기 때문에... 나는 기독교인이다 보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여는 것이 목적이거든요. 그래서 모임을 통해서 우리가 진실을 알고, 이 땅에서 해야 될 소명이랄까 그런 거를 스스로 깨달아 가면서 우리 역할을 충분히 해 나가면 세상이 좋아지지 않겠어요?
전국의 간병인이 25만 명이라고 그러거든요. 그 중에 몇 만 명만 모아도... 엄마들이라는 게 파워가 쌔요. 모이기만 시작해서 전달만 되면 어떤 것이든 물불을 안 가리는 게 엄마야. 정말 옳은 일이다 생각하면 무서울 것이 없어요. 그래서 나는 ‘간병인조직이 세상을 살리는 조직이다’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서 금년에는 서울대병원뿐이 아니라 서울에 전역에서 조직을 하려고 리플렛이나 이런 것을 준비했고요. 요양보호사 교육원을 만들었어요. 법인을 내서 지금 개강하고 있어요. 교육을 받으려면 경력자는 160시간이고, 신규자는 240시간 이예요. 거기서 교육받는 동안에 의식화는 시킬 수가 있거든요. 물론 교과서가 있기는 하지만, 교사에 따라서 어디에 관점을 맞추느냐에 따라 교육의 질이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정규직 활동을 하면서 정규직과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많은 것을 보고 들은 정금자는 인성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교육을 통해서 인성을 돌려줘야 돼요. 먼저 인간이 돼야 해요. 내가 먹고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인간이 되면 절대로 그렇게 할 수가 없어요. 인성을 버리고 돈의 노예가 되가지고 돈만 벌라고 생각하니까 동지가 눈에 보이지 않는 거지... 그러면 안 되죠. 아무리 어려워도 함께 살아가는 정신을 가져야지... 그런 것이 노조지...
투쟁도 중요하지만, 인성을 길러주는 인간회복교육이 가장 필요한 거예요. 더구나 노조운동은 어려운 사람들이 모이잖아요. 일자리 때문에 모이기 때문에 자칫하면 인간성이 망가질 수 있어요. ‘내가 저 사람을 밟아야 올라간다’는 식의 정규직이 비정규직을 잡아먹는 거는 있을 수 없는 이야기거든요. 왜냐하면, 똑같은 인간이잖아요. 자기도 식구들 먹여 살리겠다고 정규직 하는 거고, 나도 식구들 먹여 살리겠다고 비정규직 하는 거 아닙니까. 그렇게 생각해야지. ‘나는 다르고, 너는 뭐다’ 이렇게 생각하면 절대 안 되요.
그리고 지도부가 첫째 그런 정신이 돼 있어야 되요. 조합원들이 뭐 압니까? 현장에서 충실하다 보면 정신이 뭔지 몰라.”
“우리가 살아가는 것 자체도 투쟁의 연속 이라고 생각 합니다. 사람답게 살아가는 세상 속히 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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