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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의료생협 조병민 이야기

대전지역에서 건강과 생태와 공동체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지역화폐운동과 의료생활협동조합운동을 벌이고 있는 이들이 있다. 자본주의적 이윤논리 속에 개별화되고 소외받고 있는 이들과 함께 새로운 공동체운동을 실현시키기 위한 실험을 10년 가까이 벌이면서 비자본주의적 상상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대전의료생활협동조합 조병민 동지를 만나 그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충남 논산에서 태어난 조병민은 충남대에 입학하면서 학생운동을 접하게 된다. 조병민이 입학했던 91년은 노태우 정권의 공단탄압에 맞서 수많은 열사들이 죽음으로 저항했던 격렬한 시대였다.

 

“87년부터 사회분위기가 있었고, 우리가 다닌 고등학교가 천주교쪽 학교였고, 거기 계신 신부님이나 형들한테 그런 얘기를 들어와서 그런 분위기는 알고는 있었어요. 그런데 막상 대학 가니까 충격적인 그런 것들이었고... 그런 것들을 겪으면서 그런 고민들을 많이 했죠. 문학회 활동을 하면서 ‘사회적으로 어떻게 자리매김할 것인가’ 이런 고민들이 많이 됐었죠.

문화운동을 했으니까 저 같은 경우는 ‘글이 남한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라는 고민이 많았고... 글을 쓰기도 많이 썼고, 내부적으로 치열하게 공동창작시 걸개시 이런 것들을 써서 만화패와 같이 공동으로 전시도 하는 작업들도 많이 했었던 시기를 보냈어요.”

 

2학년 후 군입대를 하고, 다시 복학한 95년은 학생운동 진영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군대 갔다 와서는 정치지형이 많이 바뀌었죠. 비합이었던 것들이 많이 물 위로 올라왔던 시대였고... 그런 시기에 있으면서 후배들 추스르고 갈등도 많이 했던 거 같아요. 쉽게 말하면, 화염병 들고 싸워본 적이 없는 후배들도 상당히 많았거든요. 그때 선배들 하고 같이 해서 ‘후배들에게 싸움이라도 한 번 경험하게 해봐야 하지 않겠냐’ 그래서 원정데모도 끌고 다니고 그랬던 거 같아요. 그러다가 전체적으로 사회분위기가 그렇게 되면서 새로운 여러 가지 지형, 문화, 부문 그런 거 공부하고, 취직시험 준비하고 그러면서 졸업을 했죠.”

 

청년실업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하면서 대학졸업 후 딱히 일자리를 잡지 못한 조병민은 1년 동안 대학에서 조교생활을 하게 된다. 그 후 삼성 컴퓨터서비스센터에 취직해 컴퓨터AS를 하는 일로 사회생활을 할 즈음 시민단체 활동을 하던 동기의 권유로 지역화폐운동을 접하게 된다.

 

“제 굉장히 친한 문학회 동기 중에 한 명이 ‘대전의제21’이라는 곳에서 상근 실무자로 있었는데... 당시 ‘대전의제21’에 사무처장으로 있었던 박용남씨가 ‘꿈의 도시 꾸리찌바’라는 책도 쓰고, 꾸리찌바도 디자인하고 그런 시기였기 때문에 ‘뭔가 지속가능한 생태운동 모델이 없을까’ 이런 거 고민하다가 ‘레츠’라는 것을 디자인 했어요.

‘레츠’는 뭐냐 하면 지역 경제통화운동 이런 겁니다. 지역화폐운동인데... 그것을 전체적으로 디자인하면서 ‘그것을 한 번 운영을 해보자’라고 제 친구가 그것을 실무적으로 디자인도 해보고, 사람들도 모으고 그러면서 실무 작업을 하게 됩니다.

이게 지역 내의 회원제 품앗이 운동이기 때문에 제가 거기에 회원으로 참여를 하게 되고... 이 친구는 당시 진학정련(진보학생정치연합) 운동을 찐하게 했던 세대이기 때문에 그쪽 선후배들이 같이 ‘한밭레츠’에 참여하게 되고... 또 ‘대전의제21’이나 대전시에 홍보도 하고 그러면서 몇몇 분들이 참여를 하게 되죠.”

 

지역화폐운동에 대한 큰 고민 없이 동기의 권유로 참여한 ‘한밭레츠’에서 재미있는 경험들을 하게 됐다.

 

“시작할 당시에는 마음을 많이 두지는 않았는데, 하다 보니 재미있었어요. 저 같은 경우는 컴퓨터 일을 하니까 컴퓨터를 수리해주고 돈으로 2만원을 받는 게 아니라, 우리들이 사용하는 공동체 화폐를 두루라고 부르는데, 2만원 대신 2만 두루를 받고 제 계정에 쌓이고... 이런 활동을 하다가 한 달에 한 번씩 회원들이 품앗이 만찬도 해서 각자 내놓을 것도 갖고 오고 나누고 그러면서 ‘품앗이 정신들을 살려보자’하면서 하고 있었어요.”

 

99년 시작한 한밭레츠 운동은 학생운동 출신이거나 새로운 공동체운동에 초보적 문제의식을 갖고 있던 전문직 종사자나 자영업자들이 중심이 돼서 시작하게 된다.

 

“그 당시에 했던 한밭레츠 했던 분들 중에는 유니폼 납품하시는 분도 있었고, 통닭집 하시는 분도 있었고, 의사 한의사 약사 교사 이런 사람들도 있었고... 구성을 보면 중산층 플러스 약간 저소득층이 섞여 있었어요. 일반 사회에 비해서는 전문직 비율이 약간 높았죠. 그런 사람들이 잘 어울렸어요. 그 당시 실제로 움직였던 사람들은 100~200명 정도가 회원으로 했었던 거 같아요. 주부층들이 많았고, 30대 40대 50대 층들이 많았어요.”

 

과거 캐나다의 한 컴퓨터 프로그래머의 제안으로 시작한 지역화폐운동은 캐나다와 호주에서는 매우 활성화됐지만 한국에서는 초보적 시도가 이뤄지던 시기였다. 그러면서도 소위 IMF 이후 경제가 어려워지고 사회가 급속히 붕괴되는 상황에서 ‘한밭레츠’운동은 다양한 실험들을 적극적으로 벌이게 된다.

 

“제가 컴퓨터 수리를 해주면 저한테는 3만 두루가 생깁니다. 가격 책정은 상호합의 하는데, 사회적 통념을 깨뜨리기가 어렵죠. 왜냐하면 딴 데서는 3만원인데 나는 10만 두루라고 할 수가 없잖아요. 대부분 그것과 비슷하게 하거나 약간 저렴하게 하는 경우가 많고요.

당시에 한의원 하시던 분이 있었는데 보약을 지을 때 반을 현금으로 받고 나머지 반을 두루로 받았어요. 당시에 IMF도 떠지고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기에 사람들한테는 굉장히 고마운 소식이었던 거죠. 당장은 돈이 없더라도 쓸 수 있는 신용화폐였던 거고... 예를 들어서 보약 값이 현금 10만원에 10만 두루라고 한다면, 부족한 10만 두루는 다른 사람한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주면서 쌓을 수 있는... 그래서 관계망을 계속 지속화시키는 그런 것이 됐어요.

당시 거래가 됐던 품목 중에 그런 한의원 거래가 많았었고, 컴퓨터 AS도 있었고... 금산에서 유기농을 하시던 분이 있었는데, 그분이 고구마나 야채 이런 것들을 품앗이장터나 이런데 내놓으시면서 두루를 섞어가지고 저렴하게 판매를 해서 사람들에게 굉장히 많이 인기를 얻었었죠.”

 

초기에 공동체 자체 화폐를 만들어 유통시켰지만 현실적 어려움과 공동체운동의 정신을 살리기 위해 화폐중심에서 계정중심으로 형태가 바뀌게 된다.

 

“그 당시에 만들어서 유통했던 화폐가 있는데 지금은 쓰지 않습니다. 왜 쓰지 않느냐 하면, 실제로 많이 불편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업체에서 쓸 수 있는 돈이 아니거든요. 한정된 곳에서만 쓸 수 있는데, 내가 지갑에 10만 두루를 넣고 다니면 언제 거래할지 모르는데 항상 갖고 다닐 수는 없잖아요.

그리고 또 우리가 했던 레츠운동의 화폐는 거래가 다 드러나는 겁니다. 그런데 만나서 현금화폐처럼 줘버리면 거래가 다 숨어버려요. 지금 우리의 거래가 다 그렇잖아요. 누가 누구랑 어떤 거래를 하는지 공동체에 알려지지 않는 거죠. ‘아이가 커서 신발을 내놓습니다’ 하면 ‘아이가 커서 신발이 필요하지 않을 때가 됐구나’, ‘6학년 전과가 필요합니다’ 그러면 ‘누구네 집 아이가 전과가 필요할 때가 됐구나’ 이런 식으로 해서 공동체에 자신의 생활이나 이런 것이 알려지는... 예전에 마을에서 누구네 집에 숟가락 몇 개까지 알 수 있도록 하는 이런 것인데, 화폐를 만들어서 현금처럼 써버리면 그런 것이 다 숨어버린다는 거죠.

지금은 거래를 한 것을 다 보고를 해서 등록소에서 그 거래를 공개를 하는 식으로 운영됩니다. 그러다보니까 지금은 계정 거래방식으로 하죠.”

 

지역화폐운동을 벌이던 즈음 2000년 의약분업에 따른 의사와 약사간의 갈등이 발생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의사와 약사의 수입은 증가하면서 대중들의 의료비만 늘어나는 결과로 나타난다. 이런 의료계의 현실에 문제의식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 모여 얘기를 하던 중 의료생협에 대한 논의가 만들어진다.

 

“한밭레츠에 속해있던 회원 중에 의사, 한의사, 약사들이 많았는데, 그중에서 몇 명이 술 먹고 얘기를 하는데 나준식 원장이, 당시에 군대체복무기간이 1년 정도 남았을 때였는데, ‘인도에 가서 의사가 없는 무의촌에서 일하고 싶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한국에서도 할 일이 많은데 왜 거기까지 가서 하느냐. 여기서 뭐 해보자’ 그렇게 얘기를 하고 분위기가 무르익어가지고 ‘그럼 생협이라는 거 한 번 해볼래?’라고 얘기가 된 거예요.

의료생협이라는 게 있는데, 의료생협은 의료의 사실상의 주체인 지역주민들이 모여서 조합을 만들고, 의료나 건강 생활에 대한 문제를 해결해보자고 만든 협동조합인 거예요. 그래서 조합을 만들고, 그 조합에서 어떤 사업을 어떻게 할 것인가는 조합원들이 총회를 통해서 결정하게 돼 있어요. 우리나라에서는 소비자협동조합법에 의한 비영리법인으로 설립하게 돼 있는 거죠.

나준식 원장이 연대 의대 출신인데, 그 선배들이 이미 안성 인천 등에서 의료생협활동을 하고 있었어요. 94년에 안성에서는 매번 의료봉사활동을 가던 연세대 의대팀에게 농민회 분들이 ‘니네 매번 이렇게 왔다 갔다 하지 말고 병원 하나 차려라’ 그래서 ‘그럴까요?’ 해서 차린 것이 안성농민의원이 되었고 의료생협이 된 거죠. ‘의사가 주인이 아니라 농민들이 다 주인이다’해서 당시에 만원인가 3만원인가 출자금을 모으고 참여한 사람 다 주인처럼 해서 생협을 설립했죠.

그래서 안성도 가보고, 여기 저기 가보고 그래서 ‘대전에도 의료생협 만들어보는 게 어떻겠냐’라고 해서... ‘인도주의실천 의사협의회(인의협)’에 제안해서 2001년에 의료생협 준비위를 꾸리고, 일본이 의료생협이 굉장히 활발하게 되고 있어서 일본으로 연수도 다녀오고 그랬어요. 2002년에 대전지역의 시민사회단체에 제안하고... 그래서 50명 정도의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나 대표나 인의협이랑 같이해서 3월에 발기인대회를 했고 바로 병원을 먼저 개원했습니다.”

 

한밭레츠, 인의협, 공동육아어린이조합 등이 중심이 돼서 녹색연합, 참여연대, 환경운동연합 등의 시민단체 활동가들의 참여로 대전의료생협이 만들어지게 됐다. 그와 함께 조병민은 실무자로 본격적으로 의료생협활동에 결합한다.

 

“어디다가 병원을 낼 거냐 고민이 있었는데 ‘장사가 되는 곳에 병원을 내야 된다’ ‘아니다 빈민지역으로 가야 된다’라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었어요. 결국은 대전지역의 영구임대아파트의 50% 이상이 몰려 있는 대덕구 법동으로 왔습니다. 이곳에 병원을 열고, 당시 조합원이 303명이 모여서 창립총회를 했고... 출자금은 1억5천 정도를 모았습니다. 돈 좀 있는 의사들은 많이 내고, 최저 10만원씩 내서 의원하고 한의원을 개원했어요.”

 

의료생협운동은 자본주의적 수익사업으로 전락한 의료체계를 비판하면서 의료의 공공성과 지역의 공동체정신을 복원하기 위한 취지로 활동을 시작한다.

 

“의료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공익적인 일이고 공공적인 분야인데도, 의료라는 것 자체가 사적인 시장의 질서 하에 놓여 있는 것이 한국사회의 현실입니다. 의료생협을 만들어졌을 때부터의 취지가 ‘의료는 단순한 의사와 환자간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같이 풀어야 되는 문제고, 단순히 나 혼자만 건강해서 건강해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나 가족 이웃 마을이 건강하지 않고는 사회가 결코 건강할 수 없다’ 그래서 ‘이 사회가 건강해지는 상태까지는 건강이라고 본다’는 거죠. 그래서 평화라는 가치까지도 다 아우른다고 보는데... 그런 이념을 갖고 의료생협 활동을 계속 하고 있습니다.

현재 의료구조는 치료중심의 구조입니다. 예방사업을 아무리 열심히 해도 돈이 안 됩니다. 예를 들어서 ‘독감이 유행합니다’ 그러면 의사는 돈이 되니까 뿌듯합니다. 이게 우리나라 구조라는 거죠. 오히려 의사가 한 지역을 맡아서 예방활동도 하고, 교육도 하고, 주치의 활동도 하면서 그 지역사람들이 병에 잘 걸리지 않았을 때 그 의사가 더 받을 수 있고 보람도 느낄 수 있어야 하는데... 그냥 앉아서 ‘환자 언제나 오나’ 기다려서 빠른 치료를 하고, 심지어는 더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항생제나 주사제 같은 것을 더 많이 처방을 해서 ‘그 병원에 가면 단방에 나아’라고 오해하게끔 만들어서 환자를 끌어들이는 구조가 그동안의 우리나라의 의료구조라는 거죠.

이런 것들을 반성하면서, 주민의 건강이나 생활을 잘 해결해보고자 만든 것이 의료생협이라는 거죠. 그래서 당시에 우리가 했던 프로그램 중에 ‘스스로 건강교실’이런 것들이 많았습니다. 우리가 치료시스템에 기대지 않고도 스스로 건강을 유지하고 증진시키고, 나만의 건강만이 아니라 이웃이나 가족의 건강까지도 같이 돌볼 수 있는 그런 보건예방사업을 같이 펼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을 해서 그런 사업들을 계속 하고 있습니다.”

 

2000년 의원과 한의원을 중심으로 병원을 열면서 이름을 짓는 과정에서부터 주민과 조합원들의 참여를 이끌어내려고 노력을 했다.

 

“처음에 병원 이름을 짓는 것이 큰 고민이었어요. 그래서 이쪽 지역주민들한테 직접 물어봤습니다. 그 당시 나왔던 여러 가지 의견 중에 ‘주민의원’ ‘행복한 의원’ ‘건강한 의원’ 이런 것 몇 가지를 해가지고 거리에서 스티커를 붙이는 거리투표를 했어요. 그렇게 해서 하나가 결정이 됐는데, ‘지역주민들한테만 의사를 물어볼 것이 아니라 300명이나 되는 조합원들한테도 의견을 물어봐야 할 것이 아니냐’라는 수정제안이 나왔어요. 그 중의 한 분이 ‘이름을 민들레로 하자. 우리가 대전지역에서 이런 이런 취지로 의료생협을 만들었고, 이게 단순히 하나의 병원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척박한 이 땅에 의료가 소외받지 않고 보건예방 활동을 하는 여러 가지 목적이 녹아드는 병원을 세운 것은 민들레꽃을 하나 심은 것과 같고, 앞으로 계속 퍼져나가야 되는 것이 아니냐’라고 얘기를 한 거예요.

그래서 그때 저희들이 처음으로 한 조합원 사업이 그겁니다. 실무자들이 전화를 일일이 다해서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거의 압도적으로 ‘민들레’가 좋다는 거예요. 지역주민들 하고는 정서가 약간 달랐던 거죠.”

 

초기 출자금과 대출 등을 통해 병원을 열고 활동을 하기 시작한 의료생협은 거동이 불편한 주민을 위한 방문진료, 혈압과 혈당과 체지방을 체크하는 거리검진 등 주민 속의 사업들도 활발하게 벌인다. 그러나 첫해부터 2000만원의 적자가 발생하는 등 재정적 어려움이 큰 고민 중의 하나였다. 그렇게 어렵게 활동을 하던 2005년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면서 의료생협운동은 위기를 맡게 된다.

 

“우리는 의원과 한의원이 같은 곳에 있는데... 환자가 왔을 때 의원진료를 받습니다. 그 다음에 ‘이왕 왔는데 한의사 소견도 듣고 싶다’ 그래서 한의사 진료도 받았어요. 현재 의원 구조는 환자한테 얼마 받고, 의료보험공단에 청구해서 얼마 받는 식이잖아요. 그런데 의원도 청구를 하고 한의도 청구를 하면 둘 중의 하나는 인정을 안 해줍니다. 왜냐하면 ‘환자 한 명 온 걸 갖고 너희들끼리 꿍짝꿍짝 해서 받게 된 거 아니냐’하는 의심을 받게 되기 때문에... 동일한 장소에 동일한 법인에 양·한방 의료기관이 있을 경우에 같은 질병에 대해서는 인정을 해주지 않겠다는 고시가 있다는 거죠. 그래서 저희들이 ‘이거 안 되냐?’ 그러니까 ‘안 된다’는 거죠. 같은 건물에 양·한방이 같이 있어도 법인이 다르면 상관이 없는데 우리는 법인이 같기 때문에 안 된다는 거예요. 그거를 바꾸는 싸움을 했어야 되는데... 저희는 계속 그거를 해왔기 때문에 어떻게 대응을 했느냐 하면, 이 사람을 오늘 온 걸로 하지 않고 내일 온 걸로 친 거예요. 날짜를 바꿔서 청구를 한 거죠.

또 하나가 뭐냐면... 의사가 판단을 해서 의사의 치료과정 중에 ‘이 사람은 위에 염증이나 이런 것이 있을 것 같으니까 한 번 검사를 해보는 게 좋겠다’ 이거는 보험에 포함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환자의 요구에 의해서 검사를 하는 것은 예방사업이라고 그래서 똑같은 행위라 할지라도 의료보험의 대상이 안 됩니다. 이게 좀 이상하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조합원들에게도 그렇고 지역주민들에게도 그렇고 ‘건강검진 싸게 의료보험으로 해 줄 수 있다’ 그래요. 왜냐하면 ‘저 검진하러 왔는데요’ 그러면 ‘어디가 아프십니까?’ 다 물어보잖아요. 그게 다 진료과정이고 상담과정이니까. 그래서 ‘이 분은 내시경 하시고’ ‘이거는 안 하시는 게 좋겠고’ ‘X레이 하시고’ ‘심전도 하시고’ 그래서 다 청구를 했어요. 그런데 이게 다 일괄적으로 문제가 된 거예요. 그게 두 번째고...

또 하나는... 이것도 우리가 잘못한 거긴 한데... 노숙자나 이런 분들은 주민등록이 말소된 분들이 많아요. 이 사람들은 일반진료를 하게 되면 병원진료비 2만원만 내는 게 아니라 약을 장기적으로 받아야 되는 경우들이 굉장히 많거든요. 이 약값도 다 보험이 안 되는 거예요. 만약에 보험이 되면 만원 2만원만 내면 되는 것을 보험이 안 되니까 10만원 20만원을 내야 되는 거예요. 너무 안 된 거죠. 그래서 직원이 진료한 것으로 편법을 써서 노숙자들에게 줬습니다. 원칙적으로 할 거면 우리가 그 재정을 따로 마련을 해서 했어야 되는데 우리가 그렇게 안 한 거죠.

이것이 한 번에 다 실사를 맞았어요. 마침 그때가 법인체 의료기관의 양·한방 협진문제나 이런 것에 대한 중점단속 기간이었어요. 그때가 2005년인데 ‘이제 자리 좀 잡아가는구나’ 할 때 맞은 거예요. 이게 어마어마하게 크게 맞았는데, 업무정지를 3개월씩 맞았어요.”

 

3개월 업무정지는 재정적으로만 1억 원 상당의 손실을 감수해야 할뿐 아니라 의료생협운동 자체의 진정성에 대한 심각한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하면서 3개월 정도를 숨 죽여서 보냈어요. 의료생협이 어떤 것을 하겠다고 조합원들에게 돈을 받고, 우리나라 의료제도의 잘못된 것을 바로 잡아보겠다고 한 우리들이 법적으로 큰 문제되는 잘못을 저질렀으니 누구한테도 하소연할 수 없는 그런 노릇이었는데...

그 당시에 우리들한테 굉장히 크게 힘이 되었던 것은... 이사장을 하시고 계시는 김조년 교수님이 있었어요. 시민사회단체도 그렇겠지만, 대표는 상징적인 분이시고 실무적으로는 잘 모르거든요. 그런데 이 사건이 터졌을 때 ‘실무자들이 어떻게 그런 실수를 할 수 있냐’하고 질타를 하려는 분위기에서 오셔가지고 행정적으로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모르시는 분이 ‘이거는 제 잘못입니다’라고 얘기를 했던 것이 ‘너는 뭘 잘못했고...’ 하면서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보다 더 큰 반성을 하게했던 계기였던 거 같아요.

그러한 것을 통해 가지고 ‘우리 스스로가 정말 원했던 것이 뭘까?’ ‘우리가 돈을 좀 벌어서 더 좋은 일을 하려고 거짓말을 친 건데, 이것이 우리 스스로와 조합원과 지역주민을 위한 일이었을까?’ 이런 거를 진지하게 고민을 한 거죠. ‘그게 우리한테는 정말 아팠지만, 고마운 계기가 됐다’는 게 실무자뿐만이 아니라 조합원들도 그렇게 생각을 했어요.

그 당시에 굉장히 놀랐던 것 중의 하나도 조합원들에게 다 편지도 보내고, 대전시에 있는 시민사회단체에 조직적으로 결합하는 단체가 아니어도 다 사과문을 보냈어요. 오히려 그런 욕도 먹고 그런 것을 보낸 것이 우리를 더 튼튼하게 하지 않았나 생각이 됩니다.”

 

진정한 반성과 자기성찰을 통해 심기일전한 의료생협은 그것이 전화위복이 돼서 2006년에는 지역에서 더 신뢰받는 곳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그리고 주민들에게 더 필요한 활동을 벌이기 위해 치과를 개원하기도 한다.

이런 노력들의 결과 303명의 조합원으로 출발한 의료생협은 2008년 3월 현재 930명으로 조합원이 늘었다. 그리고 조합원들과 함께 하는 사업을 벌이기 위해 2008년에는 건강실천단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올해 모든 조합원들이 함께 참여할 수 있는 사업 중의 하나로 건강실천단을 준비하고 있어요. 의료생협의 성격을 잘 드러낼 수 있는 사업 중의 하난데...

건강실천단은 자기가 하고 싶은 건강실천 목표를 하나 세웁니다. 주로 간호사와 상담을 해서 세우는데... ‘올해는 5kg 감량을 하겠다’ 그러면 감량을 하기 위한 세부계획을 세워요. 예를 들어서 매일 아침 30분씩 걷기, 일주일에 한 번 등산하기, 어떤 것 먹지 않기, 이런 특정한 세부계획을 세우고...

그러면 조합원들에게 건강칼렌더를 줍니다. 거기에 보면 날짜가 다 박혀있고, 중요한 일정도 있습니다. 날짜별로 세부 실천계획을 체크하게 돼있고, 하루하루 동그라미를 칠 때마다 500원을 모읍니다. 저희가 돼지저금통도 다 드렸는데... 그리고 정기적인 모임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도록 하고... 굳이 의사나 누가 결합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건강을 챙겨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거죠.

그렇게 해서 연말에 그 저금통을 다 모아서 ‘몽골지역에 사막화가 진행이 되고 있어서 우리 건강을 위협하는데, 사막화 방지를 위한 숲 가꾸기 기금에 후원하겠다’하는 것이 기본적인 사업의 틀입니다.”

 

의료생협은 지역화폐운동인 한밭레츠와 결합해 공동체운동을 좀 더 폭넓게 벌이기 위한 시도들도 이어가고 있다.

 

“의료생협도 레츠의 하나의 회원업소입니다. 환자들이 의료생협의 병원에서 한약을 짖는다 그러면 일부를 두루로 사용할 수가 있어요. 그리고 보험진료를 받는다 그러면 3천원이나 5천원을 내는데, 그 중 일부를 두루로 낼 수가 있어요.

그러면 병원에서는 그렇게 받은 두루를 어떻게 쓸 것이냐? 일반적인 시민단체나 봉사단체나 이런 데는 자원활동가는 그냥 자원활동가잖아요. 실제 일은 똑같이 실무자랑 하더라도 실무자는 돈을 받지만, 자원활동가는 돈을 안 받고 자원활동을 합니다. 그런데 저희들은 병원에서 벌어들인 두루 수입을 가지고 일부는 직원들의 임금의 일부로 주고요, 일부는 자원활동가들한테 활동비로 지급을 해 줍니다. 그것을 받은 자원활동가들은 약을 지을 때 써 먹을 수도 있고, 아니면 다른 레츠 농산물을 사 먹을 수도 있고요.

그리고 우리는 두루를 건강화폐라고 부르는데요. 의료생협의 등산모임에 참여를 했다거나, 건강강좌에 참여를 했다거나 이런 의료생협의 사업에 참여를 한 분들에게도 건강화폐를 드립니다. 보통은 이런 강좌나 행사에 참여를 할 경우 참가비를 내고 오지만, 의료생협은 오히려 참여하시는 분들한테 건강화폐라는 돈을 드림으로서 그분들이 공동체에 대해 쉽게 배우실 수가 있고... 그렇게 벌어들인 것으로 병원을 이용하거나 다른 공동체에 참여하도록 촉진시킬 수 있는 거 자체가 ‘의료생협이 지역경제나 지역공동체를 복원하는데 써야 될 비용이다’ 생각을 해서 쓰는 거죠.”

 

의료생협은 마을모임을 기본으로 9명 당 1명의 대의원을 뽑고, 다양한 위원회를 구성해 조합원들의 참여를 유도하고 있다. 그러나 8년에 이르는 과정에서도 조합원들의 주체적 참여는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예전에는 실무자 몇몇이 움직이면 그것이 바로 의료생협의 색깔이 됐어요. 그런데 이게 규모도 커지고 어느 정도 되다보니까 그게 결코 좋은 것도 아닐뿐더러 감당할 수 없는 지점이 돼요. 그래서 이제는 정말로 지역주민이나 조합원들 스스로가 움직이지 않으면 조직화사업 자체가 안 되겠구나 하는 것을 몸으로 느끼는 시기고... 그래서 저희들이 생각하는 것은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자꾸 만나게 하고, 우리는 그런 만남을 주선해주고, 촉진해주고, 정보를 제공해주고... 이런 역할 정도가 저희 실무자의 역할이구나 하는 것을 느끼는 거죠.

이렇게 촉진 했을 때 마을모임이 어느 정도 돌아가고 자기들끼리 친해지고 이런 마을모임이 있어요. 그런 곳들을 계속 늘려나가야 되지 않을까... 그러면서 잃지 말아야 될 것이... 어떤 사람들이 계속 모이냐하면, 모이는 게 좋은 사람들이 계속 모이거든요. ‘모여 봤더니 별거 없더라’ 하면 안 모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뭘 원하는 가를 캐치를 해야 되고... 단순히 원하는 것을 무조건 들어준다기 보다도... 우리가 건강이나 생명이나 공동체 이런 정신에 맞게 어떤 곳에 어떠한 도움이 필요한지를 사람들한테 잘 알려주고, 사람들이 갖고 있는 선의를 잘 통하도록 해주는 역할이 우리들의 역할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우리 주변에 어떠한 이웃이 의료로부터 소외받아서 아파하고 있다’ 또 ‘어떠한 이웃이 어떠한 현실로 아파하고 있다’ 이런 것을 자꾸 드러내주고, 그런 소문을 자꾸 만들어서 사람들이 얘기하게 만들고, 그런 것들이 마을모임하게 만들고... 사람들의 선의를 스스로 끌어내게 만들고, 그 선의가 이뤄지게 만들고... 이런 것들이 우리가 하고자 하는 공동체가 복원이 되고 하는 것이 의료생협이 실질적으로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전망을 갖고 있죠.

저는 그게 초기단계라고 봐요. 뭔가를 지시를 해주고, ‘이 길로 가야한다고’ 제시를 해주는 것은 별로 옳지 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모이면 모일수록,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선의를 드러내는 쪽으로 움직인다고 생각을 해요. 사람들이 굉장히 많을 때 다 쳐다보고 있는데 휴지를 버릴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거죠. 지금은 공동체가 많이 파괴되고, 개인화가 많이 진행이 되고, 자본주의적인 물신화가 굉장히 진행됨으로써 자기도 모르게 ‘나만 손해 보면서 살 수 있어?’ 하는 생각을 스스로 하게 되는데... 그런 것들이 아니라 계속 모이게 만들고 만나게 만들고 함으로써 굳이 ‘우리가 좀 더 나누고 살기 위해서 어떻게 가야돼’하고 지시하지 않더라도 자기들끼리 그런 쪽으로 논의가 모아진다고 생각을 해요.”

 

조합원들의 주체화만이 아니라 의료생협이 위치해 있는 지역주민들 속에서 주민들과 함께 주체가 되는 사업도 공동체운동의 중요한 목표이다.

 

“우리가 지역주민들을 타겟으로 해서 ‘지역주민들이 의료주체로 서게 하기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 했을 때 가장 좋은 처방은 ‘나도 의료생협에 가입해서 내가 이 병원의 주인으로서 나도 한 자리 하겠다’라고 마음을 내게 하는 것이 가장 큰 활동이라고 보는 거예요. 그래서 계속 지역주민들한테 ‘조합원 가입해서 활동하셔라. 10만원만 내면 병원의 주인이 될 수 있다’ ‘우리 집안에 의사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다들 갖고 있을 텐데, 조합원으로 가입하면 우리 집안에 의사 하나 있는 것이랑 마찬가지다’ 이런 얘기를 하면서 그런 활동을 하고 있죠.

쉽지는 않더라고요. 아무리 이렇게 얘기를 해도 ‘너네들 그렇게 해도 다 돈 벌라고 하는 거 아니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더 익숙한 거죠.

저희들이 놓치지 않고 계속 하려는 것 중의 하나가 신규조합원들이나 지역주민들과 만남의 자리를 많이 합니다. 그런 모임 중에 ‘어르신 건강 소모임’이라고 해서... 실제로 해보면 밥 준다고 하니까 오시는 분들이 많아요. 그런 분들 해서 ‘건강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고, 체조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고, 이왕이면 와서 밥만 먹는 것이 아니라 어떤 활동을 했으면 좋겠다’ 그런 제안도 하고 하면서 20명 중의 한 두 명 정도가 ‘여기 괜찮네. 내가 어디 딴 데 가서 시간 보내느니 보다 여기서 시간 보내지’ 이렇게 해가지고 참여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그런 분들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우리 스스로가 그런 사람이 된다고 생각을 해요.

이 지역에 살고 계신 저소득계층이 몇 만 명 정도 될 텐데, 이 몇 만 명을 한 번에 다 우리 뜻에 동의하는 사람으로 만들 수는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다만 그 중에 1%라도 거의 천 명 가까이 될 거라는 거예요. 그런 사람들을 계속 발굴하고, 계속 만나고, 계속 같이 호흡하면서 지역주민들 스스로가 조합원 스스로가 ‘이런 우리가 해낸 일이다’ ‘이거 우리 병원이야’ 하는 것들을 만들어내는 것이 초기에 고민했던 지속가능한 운동이고 생태운동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8년을 맞이한 의료생협운동을 처음으로 흑자를 기록했다. 조병민으로 바로 이 시점이 의료생협운동의 위기라고 강조했다.

 

“저는 지금 의료생협이 위기라고 봅니다. 사실 지표상으로는 굉장히 좋아요. 작년에 우리가 8천만 원 정도 흑자를 봤어요. 한 번도 우리가 이렇게 흑자를 본 적이 없거든요. 맨날 근근이 맞추거나 어마어마한 적자를 보는데...

흑자를 내면서 조합원들이나 이사진들도 의료생협을 보는 시각이 달라졌다고 보는데... 그 달라진 것에 약간 빠다기가 들어가는 느낌을 받아요. ‘이런 식으로 해서 수많은 공동체나 운동들이 무너지겠구나’ 이런 생각을 많이 해요.

어려울 때는 ‘어려운 데서 일하니까 고생도 하고, 실수할 수도 있겠지’ 이런 식으로 다 이해를 해줍니다. 이게 어렵지도 않고 어느 정도 흑자도 나고 이렇게 하니까 ‘여기 뭐 좀 떨어지는 거 없나?’부터 시작을 해서 ‘돈도 많이 남는데 제대로 해야 될 거 아냐?’ 그런 욕심들이 많아지는 거 같아요. 그런 욕심이 많아질 때일수록 ‘의료생협이 어떤 쪽으로 가야될 것인가’ ‘생활협동조합이 어떤 정신을 가져야 될 것인가’라는 게 굉장히 중요한 시기라고 보는 거죠.

저희가 2007년 12월에 사회적 기업으로 지정을 받았어요. 그동안 저희가 했던 활동이나 서비스가 공익적인 사회적 서비스가 인정을 받은 거거든요. 그래서 사회적 기업에 관한 워크숍도 참여해보고, 여러 가지 사회적 기업에 관한 사람들도 만나보고 그랬는데... 사회적 기업도 마찬가지의 생각들이 많이 들었어요. 사회적 기업이 되면 재정적 지원이나 인력지원이나 세제 지원이나 이런 것도 있거든요. 이런 것 좀 있으니까 거 좀 따먹어 보려고 하는 마인드를 갖고 있는 사람이 실제로 있는 거 같아요. 까놓고 얘기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그런 사람이 더 많아요. 그렇게 하면 사회적 기업도 이미지가 안 좋아질 수 있게구나 하는 생각이 굉장히 많이 드는 거예요.

그런 것과 연관을 해서... 우리가 ‘사회적 기업이다’ ‘사회적 협동조합이다’ 이런 지향을 갖고 있는데 ‘실제 사회적이라는 게 어떤 것인가?’... 까놓고 얘기해서 우리가 8천만 원 흑자를 봤는데 그 돈으로 뭐 할 거냐는 거죠. 우리가 정말 사회적인가. 그런 고민을 해야 된다고 봐요. 그런 것들을 미리 마련하고 준비하지 않으면 우리가 어쩌면 되돌리기 어려운 위기로 빠져들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드는 거죠.

이럴 때일수록 더 많이 사람들을 교육하고... 교육하는 데 그동안 벌어놨던 것을 더 많이 소모를 하고... 그러면서 더 많은 인적자산이나 교육적 자산을 마련하는 것이 우리의 운동이 지속가능한 운동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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